러?일 영토분쟁1. 영토의 위치와 문제제기(1) 영토의 위치북방영토는 일본 홋카이도부터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까지 이어지는 쿠릴열도에 속하며 에토로후(?捉), 구나시리(?後), 시코탄(色丹), 하보마이(?舞) 이렇게 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 이름으로는 ‘치시마(千島)’라고 한다. 총 면적은 5036 평방킬로미터로 일본의 치바현과 거의 같은 크기이다.(2) 문제제기탈냉전의 시기에 많은 국가들이 사회적 발전 양식을 공유하며 국가 간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대적 흐름에 동참하였다. 러시아는 그 대표적인 국가이며 체제전환을 통해 소비에트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개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탈냉전 시기에 소비에트적 구조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허둥대던 러시아가 열을 올렸던 것이 국가 정체성 회복문제였으며 그 것을 뒷받침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영토였다. 이 시기 가장 민감했던 영토문제가 바로 일본과의 영토분쟁 즉, 사할린 섬 주변과 쿠릴열도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이것을 이유로 서로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러?일 양국은 그 후로 계속 교류가 정체상태의 관계에 머물고 있다. 러시아의 정치, 군사적 위상과 일본의 국제 경제적 의미를 고려할 때 양국이 협력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음에도 영토분쟁의 속성상 쉽게 타결되지 못하고 양국의 관계 발전 속도가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수많은 국가가 영토분쟁에 휘말려 있지만 러시아와 일본처럼 관계 미발전이나 답보상태를 보이지는 않았다.2. 러?일간 쿠릴열도 영토 분쟁 관계사● 1855년 시모다 조약 (러·일 화친조약)1855년 2월 7일에 이즈의 시모다(현재의 시즈오카현 시모다시)?쵸라쿠지에서 일본과 러시아(당시 제국)의 사이에 맺어진 조약. 쿠릴열도방면에서는 에토로후섬과 득무도 사이에 국경이 그어졌지만, 사할린 방면은 확정되지 않았다. 정식명칭은 일본?러시아국통호조약이고, 시모다조약이라고도 한다. 또 당시 일본은 일?러 화친조약이라고 표기했다.● 1875년 사할린/쿠릴열도 교환조약시모다 조약 이후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에 대해 강압적 영토정책을 지속하게 되었으며 사할린을 포기하라는 러시아의 군사적 외교적 압력에 굴복한 일본정부는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하여 러?일양국의 공유지였던 사할린 전체를 제정러시아에 넘겨주고 그 대신 러시아령이었던 쿠릴열도상의 18개 도서는 일본령으로 결정하였다.●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러?일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1905년 일본과 러시아가 맺은 강화조약.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국경문제의 재조정을 시도하게 되는데 전쟁의 전리품으로 러시아령의 남부사할린을 강제 할양받았다. 이로써 일본의 영토는 기존의 쿠릴열도 이외에 사할린 남부로 확대 되었다.● 1945년 러시아의 남부사할린, 쿠릴열도 강제 편입1945년 2차 대전 말기에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세력 팽창을 저지시키기 위해 일소간의 역사적 앙금인 영토카드를 제시하여 소련을 대일전에 끌어들였다. 소련의 대일전 참가 시 1905년 약취당한 남부사할린 및 쿠릴 열도에 대한 소련의 영토권을 인정하겠다는 약속함으로써 1945년 러시아는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150만 대군을 투입하여 남사할린 및 쿠릴 열도를 점령하였고 곧바로 이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회담얄타회담에서 약속된 단련의 대일전 참가 시 남사할린 및 쿠릴 열도의 할양을 전후 적대국으로 돌변한 미소관계로 인해 미?소간 견해차가 드러나게 되었다. 미국 주도의 서방진영은 일본의 쿠릴 열도 및 남사할린에 대한 모든 권리 및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만을 제시한 반면 소련은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완전한 주권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소련의 제시안을 묵살하자 소련은 자국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샌프란시스코 조약안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였다. 결과 전후 일?소간에만 평화조약 미체결국으로 남게 되는데 이는 양국 간 쿠릴 4도서 영유권 분쟁의 단초를 제공해준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강화조약이라고도 함.)1951년 미국을 비롯한 전승국들인 연합국 48개국이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위해 일본의 전후처리 방안에 대해 합의하고 이를 통해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영토의 문제에서는 한반도의 독립 승인, 타이완과 펑후제도, 쿠릴 열도, 남사할린 등에 대한 일본의 모든 권리와 청구권을 포기하고 남태평양 제도의 구위임 통치 지역을 미국의 단독 시정권으로 신탁 통치한다는 내용의 협정에 승인하였다.● 1956년 일?소 공동선언1956년까지 적대국으로 묶인 채 상호교류가 끊어진 단절상태에 있었으나 냉전의 시작은 양국관계의 교류를 가져오게 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냉전 체계관리의 비생산적 지출이 자국실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평화공존으로의 외교노선의 대전환을 시도한 흐루시초프는 일본과의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해 기존의 일본과의 미해결된 영토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경태도를 버리고 ‘평화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북방 4도서 가운데 시코탄과 하보마이 2개의 섬을 인도할 용의가 있다’ 하는 일?소 공동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1956년~ 일?소 공동선언 이후소련의 태도는 1985년 3월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과 외교관계 개선을 추진하면서 변화하게 되는데 동 도서에 대한 첫 회담은 1989년 3월 개최되었다.1991년 4월‘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과 일본공동선언’? 하보마이, 시코탄, 구나시리, 에토로프 섬 귀속 문제가 평화조약에서 해결되어야 할 영토임을 처음 문서상에서 확인함.1993년 7월‘러?일관계에 관한 동경선언’? 러시아가 북방 4개 도서 영토문제를 최초로 인정함.1997년 11월 러?일 정상회담‘크라스노야루스크 합의’? 2000년까지 북방 4개 도서의 해결을 포함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함.1998년 4월 정상회담‘가나와 협의’? 1956년 일?소 공동 선언 시 소련의 하보마이, 시코탄 반환 제의가 유효함이 확인됨.? 러?일간 우호협력에 관한 원칙을 제정할 것에 합의함.● 2001년 이르쿠츠크 성명2001년 3월 25일, 일본 모리 총리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이르쿠츠크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평화조약의 체결과 북방영토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합의하는 내용의 이르쿠츠크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또한 공동성명을 통해 ‘평화조약 체결 후 하보마이·시코탄 2개 섬을 반환한다’는 일·소 공동선언(1956년 10월)이 법적 기본문서임을 확인하고 평화조약 조기체결 환경의 조성에 협력하기로 약속한 가운데 일 측이 ‘양국간 평화조약체결 교섭의 기초가 될 것이다’라고 환영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러 측이 ‘하보마이·시코탄 2도 반환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견해차를 표출하였다. 결국 일·소 공동선언의 유효를 명문화하고 영토협상 진전의 기반은 마련했으나 평화조약체결 시한 설정에 대한 목표는 실현하지 못해 당초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 영유권에 대한 양국의 입장◆ 일본 측의 주장√ 북방영토는 2차 대전 이전까지 한 번도 러시아 땅이 된 적이 없다.√ 1855년의 일본, 러시아간 조약으로 에토로후 섬과 우룹푸 섬 사이에 국경선이 그어졌다.√ 1875년의 사할린과 쿠릴 열도 교환 조약당시 교환 대상이 된 쿠릴 열도는 우룹푸 섬의 북쪽에만 해당된다. 당시 맺은 조약은 우룹푸 섬 이북의 섬들만 쿠릴 열도라고 칭했다.(이 조약은 프랑스어로 맺어졌는데 우룹푸 섬 이북만 쿠릴 열도이고 우룹푸 섬 이남의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은 쿠릴열도에 포함되지 않는 다는 것은 일본어 번역이 잘못된 것이라고 밝혀졌으므로 이 주장은 현재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 소련에게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열도를 할양할 것을 약속한 얄타 협정은 연합국간의 비밀 약속이고 법적 구속력이 없다.√ 2차 대전 중 일본과 소련은 1946년까지 중립 조약을 체결했는데 소련이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을 침략한 것은 조약위반이다.(이 주장은 도쿄재판에서 불가침 조약 자체가 불성실한 것이었고 소련 참전 자체를 미국 측이 요청했으며 소련의 대일 선전 포고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최종적으로 판결되었으므로 일본이 도쿄 재판을 받아들인 이상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얄타 협정 당사자인 미국이 북방영토는 일본에 포함된다는 일본의 입장을 지지했다.◆ 러시아 측의 주장√ 구나시리, 에토로후가 쿠릴 열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본 국어사전에 구나시리, 에토로후를 미나미 치시마 (남쿠릴)이라고 나와 있는 내용과도 모순 된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우익右翼이란?1. 머리말2. 우익이란?3. 우익단체의 현황4. 개인적 소견 및 맺음말5. 참고자료1. 머리말1936년 존황파 우익 청년장교들이 고위관료들을 살해하는 등의 돌출적 행동을 통해 군국주의 일본, 천황 중심의 일본을 만들고자 일으켰던 우익쿠테타 2.26사건을 보면서 그 전부터 줄곧 의문을 가졌던 우익단체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일본에게 우익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또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역사왜곡 등 이해할 수 없는 우익들의 행동들은 도대체 어떤 근원에서 나온 것인지, 이에 대해 접근해보고자 우익에 대해 조사하게 되었다.2. 우익이란?일본에서 우익이란 대일본제국의 진출, 팽창을 열렬히 주장하는 국가주의 단체로서 개인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혐오하고 가족주의, 국가주의를 찬미한다. 우익의 사상적 공통점은 황실중심주의를 기조로 하는 국가지상주의로서 황실을 정점으로 한 국가의 개조를 주장한다. 실제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역할을 하였다. 현재 일본 내에서는 천황에 대한 찬양이나 국수주의 언행을 주로 고성능 스피커를 장착한 검은색의 중대형 차량을 이용하여 주로 도심지에서 프로퍼갠더를 일삼는 경우가 상당수이다.(1) 우익의 발생제국주의 시대 일본 사회에서 우익이라는 용어는 노동, 농민운동 세력 중 우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거나 좌익의 대칭용어로 사용되었다. 당시 우익이라는 용어가 부정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자칭하는 인물은 극히 드물었는데 우익이라 불렀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활동을 애국운동, 일본주의 운동이라 칭했다. 1910년대까지 정치세력으로서 우익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대 농민, 노동운동세력 중 우파에게 우익이란 명칭을 붙였고, 소위 우익단체나 인물에 대해서는 우경파로 명명했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서 우익이라는 용어로 정착시켰다.(2) 우익의 흐름▶ 제국주의 시대의 ‘우익’제1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산업이 급속하게 발전하여 매스컴의 발달, 중간층의 증대를 초래 데모크라시, 개조, 혁명, 해방을 강령으로 낡은 일본을 근본적을 변혁시켜야 한다는 단체가 탄생한다. 학생운동, 시민운동이 왕성하였고 이 개조운동은 점차 사회주의로 기울어졌다. 그중 3대 우익 지도자라 불리는 미치가와 가메타로가 중심이 되어 노장회가 결성되고, 회원 중 한 사람인 오카와 슈메이가 노장회 회원 중 활동적 분자를 모집해 유존사를 결성하게 된다. 후에 기타 잇키가 가담하여 유존사는 이른바 우익 운동의 하나의 큰 원류가 되었다.1930년 11월 하마구치 수상이 우익청년에게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군의 일부, 민간우익 등이 처음으로 결집하는 계기가 되어 일본 정치의 한 축을 이루어간다.일본은 워싱턴체제의 붕괴를 유도하고 메이지 이래 전통적인 대영미 협조 외교노선에서 자유외교 혹은 적극외교 노선으로 크게 방향전환해 가기 시작했고 국제적 고립화의 길이 되었고, 만주사변을 계기로 혁신세력이 정치표면에 분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정당정치 타도를 꾀하는 쿠테타, 테러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였다.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장교 등이 중심으로 한 세력이 이누카이 수상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5.15사건) 이 사건은 수상뿐만이 아닌 정당, 재벌 등의 특권계급을 토벌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천황아래에서 유신 일본을 건설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1935년 들어서는 ‘천황기관설’이 문제가 되었는데 천황기관설이란 주권은 법인으로서 국가에 있고 천황은 국가의 최고기관으로써 그것을 행사한다는 헌법해석이다. 이는 군인출신 기쿠치 다케오가 비방연설을 함으로써 정치적 문제화되는데 그는 천황기관설은 천황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천황의 통치권을 제한하려고 하는 반국가적인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 문제는 민간우익 등이 천황기관설 배격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정치문제로 확대되었다. 이에 굴복하여 오카다 내각은 천황이 통치권의 주체라는 국체명징성명을 내고 그 학설의 배제를 결정했다. 그리고 1937년 문부성에서 일본 국체에 관한「국체의본의」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자유주대순종하는 것이 일본국민의 자세라고 주입시키고 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자유주의’ 란 제목의 글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1936년 2월 26일 민간우익 등과 청년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천 수백 명의 병사가 수상관저 등을 습격하고 도쿄일대를 점령하였다. (2.26사건) 열렬한 천황신앙을 품고 있던 청년장교들이 천황과 국민의 일체화를 방해하는 존재로서 중신들을 타도하려 했고, 이 사건은 일본이 입헌국가체제를 정비한 이래 최초의 대규모적 쿠테타였다.▶ 패전 이후의 ‘우익’전쟁말기 패전에 즈음하여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의 틀이 일본정부가 무조건항복을 받아들임으로써 천황 존재가 부정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에게 무조건항복은 곧 천황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죽음으로써 천황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지막 애국행위라고 생각했다. 우익단체의 저항 움직임으로 명랑회와 대동숙조직원들의 집단할복자살 사건으로 유명하다. 패전에 직면하여 명랑회의 12명의 조직원들은 천황 거소 앞 광장에서, 대동숙의 14명의 조직원들이 도쿄의 요기공원에서 집단할복자살을 감행했다.일본은 패전 이후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까지 거의 7년동안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간접통치를 받았다. 점령당국은 신도(神道)를 정치에서 분리하라는 지령과 천황의 ‘인간선언’을 발표했다. 발표직후 우익지도자의 공직 추방과 우익단체의 해산을 지령하였다. 1946년 5월부터 시작된 ‘도쿄재판’은 전쟁책임자로서 일부 정치·군사 지도자만을 심판한 재판으로 끝나 결과적으로 우익인사를 비롯하여 대다수 전쟁책임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했고 이것이 패전 후 일본 사회에서 우익세력에게 부활을 준비하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패전 이전에 활동하던 우익세력이 해체되는 가운데 새로운 전후 우익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일본정치권에서는 새로운 정당 결성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렇게 1946년 4월 첫 번째 중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보수파진영이 대승리를 거두는 가운데 우익단체는 거의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1952년 조약의 발효 이러한 가운데 우익세력들도 속속 부활하기 시작한다. 추방에서 해제된 우익 정치가들도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우익’1960년대 일본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달성하였고 경제성장은 탈정치화를 촉진시켰다. 상징 천황상이 확대되고, 일본사회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가족이 아닌 기업가족으로 변모해갔다. 기존의 우익은 현 체제를 긍정하면서 혁신세력의 활동을 방해하고 협박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천황이라는 존재의 절대적 지위가 상실되어 가는 속에서 1968년 3월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의 총궐기를 요구와 국군화를 촉구하며 할복자살하였다. 미시마의 자살을 계기로 여러 우익단체가 결성되었다. 신우익의 출현과 함께 일본 신도 종교세력의 정치적 세력화된 종교우익도 결성되었다. 이들은 종교법인이라는 방패막 속에 자신들의 조직력과 자금력을 통해서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들의 조직과 자금력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국회의원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1년에는 ‘다 같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이 결성되고 교과서 검정제도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 국영법’에는 실패하자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로 전술을 바꿔 1983년 나카소네 총리는 총리로서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하였다. 신우익이 세력을 확장한 반면 기존 우익의 활동은 정체되어 있었고 임협계 우익의 불법행위에 대한 일본국민의 반감은 증폭되어만 갔다. 임협계 우익의 활동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일본정부의 견제도 강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임협계 우익의 활동은 급격히 쇠퇴하였다.1989년 1월 히로히토가 사망하자 일본 국민 사이에 잊혀져 가던 천황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는데 시의회에서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 발언한 나가사키시 시장은 우익단체로부터 집단적이고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1993년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노리히로 총리는 일본의 전쟁을 침략행위였다고 단정짓고 사죄하였다. 또 종전 50년을 가까이하여 1990년대 중반 이서 종국위안부재판이 제기되었다.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이다.이러한 분위기 속에 자유주의사관연구회에서 자유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일본의 역사를 고쳐쓴다는 운동을 전개했으나 결국 침략전쟁 긍정론으로 빠져 ‘대동아전쟁 긍정론’, ‘반미’를 전개하였다. 이들이 펴낸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는 일본사학회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40만부나 팔려 베스트셀러의 하나가 되었다. 1997년 자유주의사관연구회의 후지오카와 니시오 간지는 자유주의사관에 동조하는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과 함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를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8년 고바야시는 태평양전쟁과 아시아 침략을 긍정하는「전쟁론」이라는 만화를 발간했는데 이 또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새역모는 2001년 문부성의 검정을 마친 중학교 교과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발간해 채택운동을 전개하였다.1997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회’가 통합해서 ‘일본회의’가 결성되었다.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보수계조직으로 당연히 우익단체도 포함되어있다. 일본회의가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한다고 볼 수 있다.(3) 우익의 시대인식1) 제1차 세계대전 후 워싱턴 체제가 일본의 대륙발전을 저해하고 특히 미국이 일본의 군비확대를 억압하는 것으로 보고, 강대국 영미의 세계지배의 분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2)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원리로 하는 집단이 천황을 옹립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가 왜곡되고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발전이 저해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3) 희생의 상대자인 아시아에 대해 함께 서구열강에 대하자는 흥아론(동양맹주론)을 이념으로 내세워 국내적으로 천황주의를 혁신의 상징으로 앞세워 국가개조를 꾀하였다.4) 패전 이후 반공이념을 강조했던 점에서는 과거와 같지만 거기에 민주주의 이념을 함께 내세웠다. 또 반공을 추구하는 목표로 삼았다.5) 재벌과 결탁해 온 과거의 우익과 달리 반체제를 주장하면서 재계를다.
‘천황의 초상’ 서평제 1장: 보이지 않는 천황에서 보이는 천황으로(1) 보이지 않는 천황막말에 이르기까지 천황이 진정한 주권자이고 장군은 단순히 그 대리자에 불과하다는 의견은 제기되지 않았다. 봉건시대의 천황은 대체적으로 장군에 의해 권위가 유지되고 장군의 필요에 의해 수시로 제한을 받는 ‘소극적 권위’에 불과했다. 메이지변혁은 이러한 봉건적 권위가 수동적으로 명목상으로나마 권력주체를 바꿔치운 사건이었다. 사실 봉건시대에는 천황이 민중의 현실생활에 권력으로 침투할 여지가 없었다. 민중의 입장에서는 천황의 존재를 알고는 있지만 어떤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존재였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권력의 교대가 이뤄지고 새로운 정치형태가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민중의 생활이 봉건시대로부터 갑자기 변화할 리는 없었다.오쿠보 토시미치 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봉건시대의 천황과 민중의 소원한 관계가 새로운 국가의 권위를 만들어 내는 데 방해가 되고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천황을 일반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존재로 만들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오사카친정이나 동행등과 같은 일련의 정책에 의해서 그 자체가 정치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천황의 시각화를 수단으로 하는 하나의 정치적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는 천황의 성숙을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궁정 깊은 곳에 있던 천황을 사회라는 가시적인 공간으로 끌어내서 그 내실과는 상관없이 민중에게 위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이것은 비단 국내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외교상태가 막부에서 새로운 국가로 변한 것에 대해 경계심을 강하게 품고 있는 여러 외국이 새로운 국가를 승인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매우 긴급한 사안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리하여 천황은 궁정을 나와 바깥 땅을 밟게 되었다.(2) 민중의 정치적 경험인 니시키에1868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그린 몇 종류의 니시키에에 처음으로 천황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천황의 즉위, 오사카친정, 동행 등이 니시키에로 그려지고 이것들이 상당수 퍼진 것은 민중차원의 정치적 경험을 을 알고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니시키에를 근거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행렬을 맞이한 관중은 매우 많았지만 천황은 가마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과하는 봉련은 민중에게 이상할 정도로 외경심과 공포심을 주었다는 점이다.(4) 사회의 시선이 가까워지다천황의 모습은 일시적으로 니시키에에 상상의 모습이 그려지긴 했지만 천황의 실제모습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천황 자신을 민중의 시선 앞에 드러내는 것, 이것은 새로운 권력의 공간을 만들어야만 하는 시대에 접어든 이상 정부로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1871년 11월에 천황은 공부성이 소관하는 요코스카조선소에서 최초의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니시키에가 화려한 색채로 천황의 활동을 하나씩 모노가타리적으로 다루면서도 천황의 얼굴과 신체를 직접 그리지 않고 있는 동안 사진은 거의 그러한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간접적 표현이 지니는 신비성은 더 이상 효과를 볼 수 없다. 실물과 똑같은 모습에 의한 유추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요코스카에서 천황이 사진에 찍혀버렸다는 것에는 이러한 미지의 시선이 부지불식간에 당시의 모든 것에 도달하는 이른바 사회의 시선이자 근대 그 자체였음을 의미한다.제 2장: 화혼양재와 메이지유신(1) 일본에 양장이 들어왔을 때1872년을 기점으로 마침내 천황 자체가 그 시각적 외관을 바꾸게 되었다. 천황의 존재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는 메이지유신 초기의 정치적 과제였고 이것은 오사카친정, 동행 이래 반복된 소규모 행차를 통해 어느 정도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였다. 민중에게는 정치가가 의도했던 지배기구가 보이지 않고 천황만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황은 유신과 함께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나와 단숨에 대내외적으로 보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정치가의 의도가 천황과 국가기구를 어떻게 연결 짓든 천황은 확실히 겉모습을 바꾸고 근대국가의 군주가 되는 길을 걸어갔고, 이것을 추진하는 힘은 천황에게 머무는 바깥의 시선 즉 은 천황 개인의 성장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천황의 교육이라는 테마는 정치가들이 정치지배의 구상을 어떻게 전개했는가라는 점에서 흥미 깊은 것이다. 그 방향은 두 가지였다. 천황의 겉모습은 근대국가의 군주인 서구의 군주를 본 뜬 복식제도를 채용했지만 이것은 동시에 군인으로 치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는 시각적으로 군인천황의 모습을 만들어가면서 여기에 어울리는 천황의 내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천황을 군의 통수자로 규정짓는 것에 대응한다. 다른 하나는 천황에 대한 학문교육이다. 천황의 군인교육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천황의 군인화야말로 이와쿠라 토모미와 오쿠보 토시미치 등과 같은 정치가들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메이지정부는 이러한 인격자를 기리고 그 인위성을 자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인위성을 자연화하는 조작이야말로 현대에 만들어내는 신화의 구조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이것을 신화라고 느끼지 않게 된다. 민중이 자연스럽게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을 때 천황제지배의 가장 중요한 구조인 ‘아래로부터의 호응’이 완성되었다. 교육칙어가 발포되지 민중은 이에 호응하듯이 행동하였고 나중에 자세히 검토하듯이 ‘어진영’의 경우도 위로부터 강요당하지 않더라도 원하면 하사한다는 상부의 말이 떨어지지자마자 하부 모두가 일제히 신청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아래로부터의 호응이 발생했을 때 지배기구로서의 천황제는 일단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제 3장: 순행의 시대(1) 6대 순행- 천황이 보다1872년 5월 23일 천황은 니시코쿠 순행을 위해 도쿄를 출발하였다. 이 순행을 시작으로 천황은 1,2개월에 걸친 대규모 순행을 6회 실시하였다. 당시 전국적인 규모로 농민봉기가 속출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것을 억누를 방책으로 강압적으로 임하기보다 천황이 직접 전국각지에 모습을 드러내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쪽을 필요한 시책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동행에서는 천황의 봉련 속에만 있었기 때문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토카이도를 지나왔지만 이번에는 천황이 자신의 모습을 민 장면 전체를 그리는 것이다. 이것은 메이지 초기부터의 관습이다. 니시키에에서 천황은 어떠한 사건 안에서밖에 출현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천황의 일가도 포함된다. 어느 쪽이든지 니시키에는 천황이 포함된 사건을 하나의 특별한 행사로 만들어버렸다. 천황이 존재하면 사소한 것이라도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3) 초상의 독점관리메이지정부는 천황의 초상이 사회로 유출되는 것을 신경질적일 정도로 단속하였다. 이것이 처음으로 드러난 특징적 사안은 화폐의 경우이다. 메이지정부는 화폐에 천황의 초상을 마지막까지 새기지 못하게 하였다. 천황의 초상을 화폐에 새기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신성한 천황이 민중의 더러운 손에 의해 다뤄지는 것이 황송하다는 궁정내부의 음침한 반발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왕권과 대립하는 시민사회의 힘을 화폐에서 느끼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확실한 것은 화폐의 초상이 민중의 손에 의해 다뤄지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강했다는 점이다. 화폐가 허용될 수 없는 것은 초상의 취급방식에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황의 초상사진에 절대적인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이것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감시하는 것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정부는 천황의 초상이 함부로 촬영되지 않도록 하고 맘대로 소유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판매도 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황의 초상에 대한 정부의 하사는 머지않아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일본의 교육제도를 통해 구석구석까지 강제적으로 실시되었다. 그 취급방식은 의례를 주된 내용으로 하였고 위반에 대해서는 강제적으로 단속하거나 아니면 취급자기 믿기 힘들 정도의 책임을 지게 만들었다. 하사와 봉안이라는 과정을 통해 한 장의 사진이 성스러운 존재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구미에서는 군주의 사진이라 할지라도 시장에서 상품으로 유통되고 매입자는 이것들을 앨범에 수집하였다. 이렇듯 사회에서 군주의 사진이 소유되는 방식이나 유통되는 경로를 비교하면 당시의 일본사회와 서구사회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구조의으며 정치적 도상으로서의 기능도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약 15년 후인 1888년의 천황의 초상은 거의 이상적인 군주상이 되었다. 지도자의 초상은 왕성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위엄과 부드러움으로 가득찬 것으로 일단 만들어지면 그 이상은 필요가 없다. 이상으로서의 천황상은 역사적 시간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3) 사진으로 보는 일본인의 신체초상사진은 살아있는 신체의 도성화이다. 일반적으로 초상사진은 인물을 대상화하고 그 인물은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어떠한 표정을 짓게 되므로 그런 만큼 사람들이 자세나 표현을 너무 능숙하게 하면 자신도 모르게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라는 욕망을 말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1873년의 초상은 천황을 의자에 기대앉은 자세로 촬영하였다. 서구의 궁정문화에서 이것이 위엄을 잃어버린 자세라는 점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다리의 위치는 느슨하게 벌리고 있지만 신체는 어색하게 경직되어 있다. 초상이 지니고 있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지 않았던 우치다 쿠이치가 찍은 최초의 천황사진은 아직 국가의 상징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이에 반해 1888년 천황초상에는 모델의 나이가 성숙할 뿐만 아니라 화면의 배치와 자세도 이전의 두 장과 전혀 다른 시선이 움직이고 있다. 모델인 천황자체이상으로 사진자체의 구성과 도상을 형성하는 시선에서 무언가가 변했다. 이른바 천황을 이상화하는 정치적인 시선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제 5장: 이상적인 메이지천황(1) 1888년의 초상1873년과 1888년의 천황초상을 비교해보면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우치다 쿠이치의 사진에 있었던 신체의 생생함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머리 스타일도 확실히 변하여 서양식 이발이 이젠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고 천황도 연령과 경험이 쌓여 중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초상은 전신상이 아니라 7등신좌상이지만 신체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신체의 주위에는 쓸데없는 공백이 거의 없고 배경도 생략되어 있다. 그 결과 천황의 신체가 전면에 내세워지면서 육중한 존재
한국 · 일본의 전통의술 「 韓醫學 と 和漢 」진단방법 * 맥진 ( 脈診 ) 맥박의 상태를 살피는 진찰법으로 , 맥의 횟수 · 리듬 · 대소 · 지속을 살펴 심장기능이나 동맥의 상태를 알 수 있다 . * 고도의 전문적 · 주관적 경험과 실상 파악으로 전신의 부조 , 오장육부의 상태와 그 증후의 음양허실 ( 陰陽虛實 ), 표리한열 ( 表裏寒熱 ) 등을 판단해내고 , 근원적인 마음의 허 · 실까지 진단한다 . 한의학 ( 韓醫學 )* 복진 ( 腹診 ) 복부를 문지르거나 눌러보고 그 반응으로 병증을 헤아리는 진찰법으로 복진은 복부 전체를 보아서 허 ( 虛 ) · 실 ( 實 ) 을 가려 장부의 이상을 직접 판정한다 . * 일본에서 특별히 발달한 진단법으로 일본한방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 와칸 ( 和漢 )침술 가늘고 예민한 바늘 ( 또는 유사도구 ) 로 인체의 일정한 부위에 자극을 주어 인체의 기혈 ( 생체에너지 ) 을 조절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 . 한의학과 와칸의 침구요법한국 침술의 역사 침술의 발상지로 동방 지역은 삼면이 바다여서 주민은 자연히 짠 음식과 생선을 즐기게 되고 그로 인해서 종기와 같은 질병이 흔하므로 , 그들은 일찍부터 폄석이나 패각을 이용하여 기를 통하게 하고 피를 맑게 하는 치료법이 성행해 왔다 . 는 기록이 있어 , 우리 조상들이 이미 선사 시대부터 침과 부항을 시술해 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 사암 침법 : 대표적인 한국 전통 침법으로서 , 인체의 개개 증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간 본연에 내재된 음양과 오행이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침법 일본 침술의 역사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래된 침술은 중세 이후 오랫동안 쇠퇴해 있었으나 근세 초기에 명나라로부터 연침법이 전해졌고 , 일본 내에서는 어원의재가 타침법을 고안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경도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 나가노 침법 : 일본에서 양방지식을 응용하여 오행을 적용시켜 놓은 것* 체내의 노폐물과 독소를 빼줌과 동시에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불리는 혈액순환장애를 원활하게 돌려 질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 * 부황을 뜬다는 것은 경혈에 음압을 작용시켜 세포 찌꺼기와 어혈을 제거하여 건강을 회복하는 방법이다 . 모든 병의 원인이 되는 모세혈관속의 어혈 ( 산화노폐 혈액 · 체내독소 ) 을 부항기로 피하에 끌어내 여과 · 분해하여 자가 혈정 · 단백체로 만들어 한 방울의 혈액도 손실됨이 다시 살리는 한편 , 진공의 힘으로 피하 조직내의 산소를 보충하는 것이다 . 즉 , 피부호흡을 강화시켜 혈액을 정화시키는 이상적인 건강요법이다 한국의 부항요법안마란 ? 오장육부를 조절하는 경락을 직접적으로 자극함으로써 , 기 순환에 막힘이 없도록 하여 장기기능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려는데 목적에 있다 . 즉 기의 경맥유주의 원리에 따라 몸의 중심으로부터 말단 사지를 향해 문지르고 , 주무르고 , 누르고 , 두드리는 방법으로 기혈순환을 돕는 수기요법이다 . 와칸의 안마시술指圧 ( しあつ ) 1940 년에 도루지로 나미고시가 동경에 일본 시아츠 스쿨을 열었고 , 1957 년에 정부 인증을 받았다 . * 인체의 생체에너지이자 , 우주만물의 에너지인 기는 경혈을 자극하여 인체의 에너지의 통로인 경락을 열어줌으로써 , 기의 흐름을 돕고 , 상극을 대칭하여 음과 양의 조화를 돕는다 . 이와 같은 시아츠의 깊이 있는 철학과 정교한 원리는 수 천년동안 이어져 , 민간요법 , 대체요법으로 전수되어지고 있는 동양의학이자 치료법이다 . * 강약이 조합된 압을 경혈에 자극함으로써 기혈순환을 돕는 경락마사지로 , 테크닉상으론 시술 시 소란스럽지 않고 정적인 면을 강조했다 .감사합니다 .{nameOfApplication=Show}
日本의 시베리아 출병1. 시베리아 출병이란? (※대소간섭전쟁 對蘇干涉戰爭)러시아 혁명으로 성립된 소비에트 정부를 간섭하기 위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열강이 체코슬로바키아군을 원조한다는 구실로 시베리아에 출병한 사건을 말한다.(1)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배경일본은 북방에 대한 팽창정책인 북진론을 주장하며 조선, 만주(중국 동북), 몽고, 시베리아 등 대륙의 북방에 대한 침략정책을 추진해오고 있었다. 전쟁 중이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세계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만주와 몽고의 지배를 둘러싸고 대립해 온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자, 일본은 북진정책을 북만주와 시베리아까지 확대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권이 독일과의 단독 강화(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로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측 전열에서 이탈하는 한편, 제정 러시아 시대의 대외채무를 파기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한 과격한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자, 이의 파급을 두려워한 프랑스와 영국은 비밀협정을 맺고 소련 국내의 반혁명세력을 원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연합국들은 소련에 억류되어 있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구출을 구실로 공동출병하게 되었다. 소련 국내에는 10만 명이상의 체코슬로바키아군 포로들이 있었다. 원래 오스트리아군으로 종군했던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에 투항하여 거꾸로 독일군과 싸웠으나, 독·소 강화가 이루어지자 단독으로 서부전선에 참가하려던 중 러시아 반혁명 분자들과 연결되어 반소 정부를 세우고 적군과 충돌하였다. 바로 이 출병에 즈음하여 일본은 연합국과는 별도로 중국의 북경정부와 중일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단독으로 북만주에 출병하였다. 게다가 반혁명파인 그리고리 세묘노프가 시베리아와 내외몽고의 몽고 부족들을 통합하고 대몽고국을 건설하려는 운동을 일으키자 일본 육군은 이것을 원조하여 만몽권익의 확대를 도모하였다.2.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1918년 1월, 일본은 영국과 함께 거류민보호 명목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함을 파견하였고, 4월, 일본인 살해사건을 기화로 500여 명의 육군을 상륙시켰다. 1918년 3월 미국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구출이라는 명목적인 이유를 들어 미·일 공동출병을 제안하였고 일본은 이에 동의하는 형식으로 본격적으로 시베리아 출병을 시작했다. 8월 2일, 일본은 체코슬로바키아군의 구출을 달성한 후에는 즉시 철퇴하고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출병선언을 하였다. 미국은 당초 미·일 파병을 각각 7천 명 정도로 제의하였으나 일본이 동북아에서의 특수지위와 이익을 내세우자 일본의 파병병력을 1만 내지 1만 2천으로 올리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8월 하순에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위기를 구실로 삼아 자·바이칼과 북만·연해주 등지에 총병력 7만 이상으로 증파시켜 미국의 대일 불신을 증대시켰다. 이로써 일본군은 다른 연합국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7만 5천여 명의 군대를 들여보내게 된다.한편, 영국, 프랑스 군 함대는 이미 3월 무르만스크에 상륙해 있었다. 일본군은 콜차크 정권을 비롯하여 시베리아 각지의 수많은 반소비에트 정권을 지지하였다. 1918년 4월, 미국·프랑스·이탈리아·터키·그리스·폴란드 등 도합 14개국의 무장병력이 사방에서 소련 영내에 침입, 소비에트 정부를 한때 위기에 빠뜨렸으나 연합국 내부의 의견 불일치, 국내 여론의 반대 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1) 일본의 시베리아 주둔미국군은 1920년 1월에 철수하고, 동년 봄에서 여름에 걸쳐 일본 이외의 각국 군대는 시베리아로부터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일본은 1920년 3월에 시베리아 출병의 이유를 ‘체코슬로바키아군 구출’에서 ‘조선과 만주의 안전 확보’ 및 ‘거류민 보호’ 등으로 변경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1922년까지 만주 북부와 시베리아, 연해주에 계속 주둔했다. 1920년에는 일본은 조선과 이웃한 간도 지방에 군대를 파견하여 항일 무장 독립군을 진압하고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2)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특히 아무르강 하구의 니콜라예프스크(尼港)점령은 일본에 대한 소련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1920년 2월, 소련의 빨치산부대가 포위 공격하자 이에 항복하고 군인과 거류민이 철수할 것을 협정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3월 12일 항복협정을 위반하고 기습에 나서서 한때 우세하였지만 결국 격파됨으로써 영사, 수비대장 이하 병사, 거류민 700여 명이 살해되고, 병사, 거류민 생존자 122명은 항복 투옥되었다. 5월 25일 일본 구원부대가 진주하자 빨치산은 시가에 불을 지른 뒤 일본인 포로와 반혁명파 러시아인 전원을 살해하고 후퇴하였다.(3) 일본의 시베리아 철수7월, 빨치산 대장은 혁명 정부의 인민재판에서 처형되었으나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볼셰비키와 빨치산의 잔학함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소련 정부에 사건의 만족한 해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북부 사할린을 점령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출병했다.1925년 일본은 소·일 국교회복 협상 당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배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일본은 국내외의 여론, 재정적인 부담 등으로 인하여 1922년 가을, 시베리아로부터 차차 철수하여 1925년 1월 소·일 기본조약 조인 후 5월 북부 사할린의 점령군은 완전히 철병했다.(4) 시베리아 출병의 피해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해 일본은 어마어마한 전쟁비용과 3,500여 명의 사상자, 그리고 그의 몇 배가 되는 부상자를 내고 철수했다.3.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이 갖는 의미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해 일본이라는 나라를 바라보는 외국의 눈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일본의 야망은 이미 이 시기에도 확연히 눈에 보일 법 한 것이어서 연합국, 특히 미국이 일본을 감시 아닌 감시의 눈총과 견제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싹을 트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일본에 대해 한층 깊어진 러시아의 불신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일본이 시베리아 출병에서 보여준 태도는 타국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자국의 사상자도 그렇거니와 일본군에 의해 희생당한 타국의 희생자들 또한 결코 일본을 곱게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2007 年文部科?省?定?世界史?日本史?科書】4.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교과서 기술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체코슬로바키아군 사건과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표기에 대한 목록은 위와 같다. 위의 교과서 중, 세계사에 대해서는 東京書籍뿐만이 「1918년 8월, 일본은 미국과 체코군단 구출을 이유로 시베리아에 출병했다」라는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대한 간단한 기술을 싣고 있고, 그 외의 다른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전혀 기술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시베리아 출병」이라는 용어조차 게재하지 않은 교과서도 있다. 표의 일본역사 교과서 7권중 4권이 체코슬로바키아군에 관해 기술되어있는데, 본래 세계사에서 다루어져야하는 사건이 정작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고,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이상한 현상이 보이고 있다. (중략)◇ 일본 교과서 게재의 의문점세계사에 언급되어야 할 시베리아 출병과 체코슬로바키아군에 관한 내용이 왜 세계사가 아닌 일본역사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것일까. 체코슬로바키아군에 관한 설명은 후에 일어날 역사적 사건과 더불어 세계사에서 빠질 수 없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그 내용을 일본역사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다루고 있는 것일까. 교과서의 객관적인 집필은 중요하다. 교과서 자체에 다른 사람의 해석과 시각의 쓰여 편찬된다면 보는 사람도 집필자의 시선으로 바라 볼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교과서 중에서도 가장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역사교과서이다. 自由社의 ‘새로운 역사교과서’처럼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교과서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건을 역사교과서에서만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분명 어떤 의도나 목적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역사교과서’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대한 기술에 관해서는 일본군을 영웅으로 미화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의 흐름을 마음대로 바꾸고 조작하는 것은 교과서에 대한 모독이다. 때문에 이번 시베리아 출병에 관한 기술에 관해 의문이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