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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로 보는 한국사 과제1
    지도로 보는 한국사 과제)를 읽고 -국사 패러다임의 해체와 관련하여-2011-10698인류지리학과군윤상현최근 다문화 가정의 증가와 세계화의 진행에 따라 민족주의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하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역사 인식은 여전히 민족주의 담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원인에는 민족주의적인 국사 교육이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국사 교과서를 읽다 보면 마치 한국사와 민족사를 동의어로 취급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기에 더해, 민족을 선의 가치로 규정하고 민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세력은 악으로 묘사하는 등 이분법적 역사관을 내포하고 있다. 국사의 이 같은 인식은 일반인들의 사고방식 속에서 부동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국사의 권위는 불가침영역으로, 반론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친일파, 매국노로 매도를 당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사의 해체’를 부르짖는 임지현 교수의 글 “고구려사의 딜레마 - ’국가 주권‘과 ’역사 주권‘의 사이에서”의 메시지는 도발적이지만 흥미롭다.국사 패러다임은 국민 국가를 역사의 기점으로 삼아 거꾸로 역사를 거슬러간다. 이러한 역사관은 국가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이용되었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외부 세계와 접촉이 빈번하였던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 잡고 역사적 삶을 영위해 왔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중략) 고구려, 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서 민족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일반 사람들의 믿음과는 달리 ‘민족’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불과 100년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단어이다. 민족이 형성되지도, 심지어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고대사를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국사 패러다임은 이렇게 학문의 권위를 이용하여 과학과 객관으로 이데올로기를 포장하고, 또한 은밀하게 주입한다.이것은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러일전쟁 시기, 일본의 저명한 동양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광개토왕비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이 조선 남부를 지배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마치 지금의 러시아와 같은 관계 ······ 남부의 삼국을 지배하고 또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북부의 고구려를 꺾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관계는 마치 일본이 지금의 조선을 충분히 휘어잡기 위해서는 북의 노국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의 정세를 1000년 전 고대 국가 간에 관계에 투영하고 있다. 이렇게 국사 패러다임에 종속된 일본 학자들은 고구려인의 시각으로 비문을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 근대인의 인식을 광개토왕비문에 투영한다. 그 결과 나온 해석은 과거 왜가 임나일본부를 두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은 현재 오류임이 판정된 학설이다.국사 패러다임은 목적론적이다. 과거의 역사는 국민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단선적인 방향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되는 사건이나 문화는 존재 가치를 잃는다. 획일화는 암묵적으로 문화 간에 우열 관계를 설정하고 문화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파괴한다. 한국과 중국이 고구려사의 귀속을 놓고 다투는 가운데 정작 고구려의 옛 땅에서 살아온 토착민들의 역사는 온데간데없다. 고구려는 한반도인 뿐만이 아니라 말갈인, 거란인 등 다양한 유목민들로 구성된 복합적인 사회였지만 국사는 그러한 사실에 입을 다문다. 고구려가 다종족 사회였음을 인정하는 순간 고구려사는 국사가 주장하듯이 ‘한민족’만의 역사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민족 사회인 중국은 한국과는 다른가?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역사적 사실로부터 부여하여, 옛 고구려 땅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을 붙잡아두기 위함이다. 민족주의에서 국가주의로 성격이 바뀌었을 뿐(사실 두 개념의 차이도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사 패러다임이 근본 원리로 작용하였다.임 교수는 글 말미에 국사의 오리엔탈리즘적(的) 속성을 지적한다.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국사와 서구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대변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얼핏 생각하면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사 패러다임이 형성된 배경을 이해하면 그의 주장이 납득이 간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제국주의로 무장한 서양 열강의 ‘국사’는 동아시아인들이 자국의 ‘국사’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그들은 서양의 웅대한 국사에 열등감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국사에 견줄 수 있는 찬란한 문명을 가진 자국의 역사를 ‘설정’하여 세계사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즉, 국사 패러다임은 서양 따라잡기의 산물로, 서양 헤게모니 내부에서의 저항이라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국사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서구 중심주의 세계관의 극복인 것이다.국사 패러다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역사적 관점이 필요하다. 임 교수는 한국과 중국의 고구려사 논쟁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변경사를 제시한다. 변경사는 국사 패러다임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경계’의 허구성과 모순을 지적하고, 그 자리에 변경을 가져다 놓는다. 변경은 다양한 문화들이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공존하는 화합과 소통의 장이다. 변경은 한국사, 중국사 어느 한 곳의 배타적 영역이 되기를 거부하고 역사의 주인을 고구려인에게 되돌려준다. 나는 변경사 이외에도 지역사 역시 국사 패러다임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경사 뿐만 아니라 지역사 역시 ‘역사 단위로서의 근대 국민 국가는 먼 옛날부터 분할될 수 없는 하나의 실재’로 여기는 국사의 희생자이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뿐만 아니라 196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강조된 민족주의 역시 지역사를 경시하고 훼손한 측면이 있다. 자신의 고장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지역민이 주체적으로 지역사를 배우고 연구한다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는 더욱 다양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사실 제주사가 변경사와 동시에 지역사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지역사와 변경사는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연구 대상뿐만이 아니라 역사를 국가/민족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이용하기를 거부하고, 역사를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며, 역사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일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문/어학| 2017.11.07| 3페이지| 2,000원| 조회(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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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팩션, 사실과 허구의 변증법-소설 의 분석을 중심으로2011-10698인류지리학과군윤상현차례1. 머리말2. 사실과 허구2-1. 시대 추정2-2. 경학파와 실용파3. 맺음말1. 머리말팩션은 사실을 의미하는 fact와 허구를 의미하는 fiction의 합성어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문화예술장르를 가리킨다. 근대 역사소설은, 사실은 진실이고 허구는 거짓이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역사적 사실의 재현을 시도하는 작업이다. 팩션은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사실과 허구의 우열관계를 파괴하고 두 개념 사이의 느슨한 관계를 설정한다. 팩션의 초점은 역사적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사건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허구의 진실성이다. 이렇게 팩션은 역사적 실재와 부합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역사를 자유롭게 변용하고 그 공백을 서사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러한 팩션의 속성은 팩션이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역사를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팩션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의 내적 욕망과 독자의 기대 지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의 장으로 사실과 허구의 단순한 구분 짓기를 넘어서는 의미를 창출한다.역사추리소설 는 집현전 학자 연쇄살인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훈민정음 창제 프로젝트와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뒷표지에는 ‘이렇게 멋진, 아름다운, 뿌듯한 역사는 없었다!’,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우리 감성에 맞는 한국형 팩션’이라는 광고문이 있다. 소설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 이정명의 입장과 소설의 방향성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구가 되겠다.이 글에서는 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변조하고 플롯을 설정하고 있는지 분석하여 작가의 의도와 견해를 파악하고자 한다.2. 사실과 허구2-1. 시대 추정먼저 의 시대를 추정하여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를 판별하는 기준을 삼고자 한다. 사실과 허구가 혼재하는 팩션에서 정확한 시대적 연대를 추정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세종 114권 28년 12월 26일 (기미) 3번째기사 / 이과와 이전의 취재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였다세종 116권 29년 4월 20일 (신해) 1번째기사 / 함길도 자제의 관리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다세종 117권 29년 9월 29일 (무오) 2번째기사 / 《동국정운》 완성에 따른 신숙주의 서문첫 번째 기사를 통해 훈민정음의 존재가 1443년에 조정에 알려졌고, 두 번째 기사를 통해 훈민정음이 백성들에게 공표된 해는 1446년임을 알 수가 있다. 작가가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변용하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작가의 혼동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에서는 1443년과 1446년의 사건을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로 묶고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을 작성한 것처럼 소설의 가장 중심적인 사건은 1446년의 일이지만 이 두 사건 이외의 비중이 작은 사건들의 연대를 살펴보았을 때 의 시간적 배경은 1446년보다는 1443년으로 설정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1권 초반에 성삼문 등이 왜에 서장관으로 파견되어 조정에 없는 신숙주를 그리워하는 대목이 있다. 실록에 따르면 신숙주가 왜에 서장관으로 파견된 해는 1443년이다. 이는 다음 기사에 나타난다.세종 102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10월 13일(갑오) 2번째 기사 / 통신사 변효문이 돌아와 일본에서의 일을 치계하다“(...)신(통신사 변효문을 가리킨다.)은 부사(副使) 윤인보와 서장관 신숙주(申叔舟)를 시키고, 광엄(光嚴)도 또한 우춘(祐椿)을 시켜 함께 가서 찾아서 드디어 잡혀 온 사람 7명을 찾아 가지고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렀습니다.(...)”통신사 변효문이 대마도에서 있었던 일을 세종에게 보고하고 있다.세종 99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2월 21일(정미) 2번째 기사변효문과 윤인보를 통신사로 일본에 보내다변효문이 통신사로 일본에 간 것은 1443년 2월 말부의 처벌을 보여준다. 최만리 외 학사들은 의금부에 하루 수감되었다가 이튿날 풀려나는데, 최만리 이외의 신석조, 김문 등은 이 사건 이후에도 실록에 꾸준히 등장한다. 세종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분노하였기보다는 훈민정음 제작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기 위한 차원에서 위와 같은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만리는 이 사건으로 중앙 정계에 뜻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낙향하고 1445년, 이듬해 사망한다. 따라서 다소 시간상의 차이는 있지만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1446년 보다는 1443년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2-2. 실용파와 경학파이 소설의 주요 골자는 세종과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를 필두로 한 경세치용(經世致用)파와 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경학(經學)파의 대립이다. 경세치용 학파(이하 실용파라 한다.)는 실용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의 학파인 반면에 경학파는 경전에 근거한 학문을 중시하는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학파이다. 작가는 두 학파 사이에 뚜렷한 선을 긋고 경학파를 명나라와 연계하여 세종을 끌어내리려는 일종의 대항 세력으로 설정한다. 경학파는 백성의 삶에 무관심하고 경전의 해석과 가르침에만 매달리는 일종의 탁상공론가들의 집단이자, 자주적인 의식 없이 명나라에 사대하여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려는 세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학파는 실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하여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찬반논쟁이 있었음은 분명하나 특정 당파를 구성할 정도로 그 갈등이 비화되지는 않았으며 훈민정음에 대한 찬반 여부로 그 인물의 자주성과 사대성, 진보성과 보수성, 실용파와 경학파, 친(親)세종와 반(反)세종 등의 성격을 규정할 수 없다.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세종 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실용파와 경학파의 갈등이라는 음모론으로 풀이한다. 세종은 장인 심온의 사사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고 중국과의 사대에 대한 비판을 담은 라는 가상의 책을 집필한다.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세종이 군) 11월 7일(무술) 1번째 기사/ 봉씨를 폐출시킨 이유를 부연하여 대신들에게 알리다신인손(辛引孫)과 권채(權採)를 사정전(思政殿)에서 불러 보고 교지를 내리기를, “근일에 폐위한 세자빈의 실덕한 일이 매우 많은데, 내가 낱낱이 들어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전에 교지를 내려 다만 몇 가지 일만 한 나라의 국모로서의 의표에 진실로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들었을 뿐이다. (...) (세자빈에게) 여사(女師)로 하여금 《열녀전(烈女傳)》을 가르치게 했는데, 봉씨가 이를 배운 지 며칠 만에 책을 뜰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후에 생활하겠는가.’ 하면서, 학업을 받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 또 성품이 술을 즐겨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기를 좋아하며, 혹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혹 어떤 때는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집에서 가져와서 마시기도 하며, 또 좋은 음식물을 얻으면 시렁 속에 갈무리해 두고서는, 손수 그릇 속에 있는 것을 꺼내어서 먹고 다시 손수 이를 갈무리하니, 이것이 어찌 빈이 마땅히 할 짓이겠는가. (...) 봉씨는 여러 번 투기 때문에 몸소 궁인을 구타하여, 혹 어떤 때에는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니, 어진 부인이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시골의 여자로 궁중에 들어왔으니, 마땅히 공손하고 잠잠하여 자기 몸을 지켜 경계하기에 여가가 없을 것인데도, 교만하고 무례함이 이와 같았다.(...)”언어학, 과학, 천문학, 농업, 국방 등 많은 분야에 걸쳐 세종은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내었지만 한 가지 실패한 분야로 화폐 정책을 지적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세종의 화폐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직제학 심종수와 시전 상인 윤길주(두 명 다 가상 인물이다.) 주도의 방해 공작 때문이었다. 경학파는 금난전권을 주장하는 시전 상인들과 결탁하여 조선통보의 발행을 막고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소설과 달리 화폐 개혁은 소수 집단의 부제학으로, 최만리가 대제학이라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실록에 따르면, 최만리는 1438년 7월 집현전 부제학이 되고 1439년 6월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로 이임하였다가 1440년 7월 다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최만리가 1년간 강원도 관찰사로 이임한 까닭은 알려지지 않았다.세종 82권,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7월 30일(임자) 1번째 기사 / 이견기·민의생·남궁계·허후·이세형·배환·최만리·김황·유계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만리(崔萬理)로 집현전 부제학을, 김황(金滉)으로 우헌납을, 유계문(柳季聞)으로 황해도 도관찰사를 삼았다.세종 85권, 21년(1439 기미 / 명 정통(正統) 4년) 6월 29일(을사) 1번째 기사 / 오승·문효종·최사의·황치신·유계문 등에게 벼슬을 제수하다(...) 최만리(崔萬理)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세종 90권,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7월 2일(임인) 1번째 기사 / 한확·권제·정연·최만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만리(崔萬理)를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 삼았다.세자 섭정 문제가 대두되고 최만리가 첨사원 설치에 대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1442년으로, 강원도 관찰사에서 부제학으로 복귀한지 2년이 지난 시각이다. 실록은 세종이 상소에 대하여 그저 ‘윤허하지 않았다.’고 전할뿐 세종의 격노나 최만리의 처벌에 대한 내용은 없다. 세종과 최만리의 갈등을 부각시켜 두 인물의 대립 구도를 명확히 형성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사족으로, 이 부분에서 작가는 작은 실수를 한다. 소설에서는 최만리가 원주 목사로 부임하였지만 실제 최만리는 강원도 관찰사였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강원도 관찰사는 원주 목사를 겸직한다. 작가는 대전회통을 기준으로 위와 같은 서술을 한 듯하다. 그러나 대전회통은 조선 말 고종 대에 저술된 책으로 세종 대에는 경국대전이 국가의 최고 법전이었다. 경국대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원주 목사를 겸직한다는 .
    인문/어학| 2017.11.07| 8페이지| 2,000원| 조회(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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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속의 과학 과제
    역사속의 과학 과제)16, 17세기 유럽 사회에서의 과학 지식의 근대적 요소와 과도기적 측면-16, 17세기의 유토피아 문학인 와 에 나타난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위주로-2011-10698인류지리윤상현16, 17세기 유럽의 과학 혁명은 세계사의 일대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에서 뉴턴까지 이르는 약 150년의 시간은 과학 영역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인들의 지적 세계관과 현실의 삶을 바꿔놓았다. 과학 혁명은 단순히 과학 내부의 영역에서 일어난 움직임이 아니라 15세기 이후 급변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풍토와 복합적으로, 또한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하며 이루어졌다.이에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인간과 지식의 상이 요구되었고 많은 지식인들이 나름의 사상을 제시하였다. 유토피아 문학은 그러한 제시 방법의 한 형태로서 당시 유럽인들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토피아 문학으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와 토마소 캄파넬라(의 를 들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새 시대의 16, 17세기 유럽인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이 글은 두 책을 통해 당시 유럽인들이 생각했던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살펴보기로 한다.두 책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16, 17세기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중세 유럽의 자연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전통에 기초를 두고 조금씩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지는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천문학 분야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생리학 분야에서는 갈레노스의 이론이, 기하학 분야에서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크리스트교 신학에 기반을 두었던 스콜라 철학 역시 과학 혁명 이전 유럽의 사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스콜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완전한 별개의 학문으로서 기능하기 보다는 상호의 이론적 체계와 방법론을 공유하고 보완해나가며 중세 유럽인들의 사상 세계를 점유하였고, 이는 곧 중세 유럽인들의 세계관의 기틀이 되었다. 이러한 유50년 동안 유럽에서 3만종의 책이 2000만부 이상 인쇄되었는데, 지식에 대한 접근성의 향상은 학문의 장으로서의 대학의 독점적 위치를 무너뜨렸고 아마추어 지식인들이 생겨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지식인들은 인쇄술을 이용하여 개인의 사상과 주장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와 같은 유토피아 문학의 성행이 그 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역시 인쇄술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종교 혁명의 씨앗을 뿌렸다. 인쇄소는 출판업자와 저자가 정보를 교류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장으로서, 유럽 사회의 정보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인쇄술은 유럽 인들의 지적 환경을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책을 정확하게 복제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정보와 지식이 안정적으로 유포되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도서를 소장하고 분류하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정보의 비교와 취합이 용이해졌고 옛 지식에 대한 회의와 의문을 품는 지식인들이 나타났다. 중세의 ‘견해’에서 탈피하여 표준화된 지식인 근대적 ‘사실’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와 는 선원들의 일종의 경험기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두 책에서 등장하는 유토피아는 동양의 무릉도원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실제 유럽에서 공간적으로 확장된 영역이다. 이는 15세기 이후 ‘대항해시대’로 확장된 유럽인들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기에 유럽을 벗어난 다양한 항로가 개척되었고 수많은 지리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특히 1498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 중심적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았다. 새로운 문물과 동식물의 존재는 그동안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지던 고대인들의 지식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인들은 지리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고전에 의지하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도를 제작하고 먼 바다를 항해 하기위해서는 실질적인 경험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에, 지식의 실용적 가치에 대한 제고가 이루어지고 ‘경험’은 전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와 전반에 깔려 있는 경험주의적 지식(知識) 모델은 이 같은 사물의 숨겨진 원인과 작용을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 활동의 영역을 넓히며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베이컨의 지식은, 중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스콜라 철학 전통의 초연하고 공평무사한 진리가 아니었다. 그는 지식이 현실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떠한 것을 안다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한 이해를 넘어선 온전한 통제와 지배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지식은 쓸모가 있어야 했다. 다음과 같은 솔로몬 학술원 소속의 과학자의 말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질병이나 역병, 유해한 동식물, 기근, 폭풍, 지진, 대홍수, 혜성, 계절에 따른 온도의 변화 등 다양한 자연 현상의 원인을 드러내어 규명하고, 이 재난들을 피하기 위해 백성들이 취해야 할 대책에 대해서 자문을 해줍니다.’베이컨이 그리는 유토피아는 과학 지식의 진보로 인간의 삶이 개선되고 인류의 복지가 향상된 세상이다. 에는 건강을 증진시키고 수명을 늘리는 천국의 물, 오늘날의 유전 공학을 연상시키는 동식물 교배 등 미래적인 기술이 묘사된다. 벤살렘 왕국과 마찬가지로 캄파넬라의 유토피아 ‘태양의 나라’ 역시 높은 수준의 응용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다. 주민들의 평균 수명이 100세가 넘고 바람과 노 없이 움직이는 배와 손을 쓰지 않고 말을 조종할 수 있는 편자를 발명하였으며 최근에는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였다고 언급된다. 이 같은 서술은 현대인의 시선으로는 허황되고 유치해 보일지 모르지만 16, 17세기 유럽인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신뢰로 해석이 가능하다.에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베이컨은 위와 같은 믿음에서 더 나아가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궁극적으로 인간이 당면한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다. 캄파넬라는 베이컨처럼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그는 정치와 사회 구조의 개혁을 주창한 혁명가였다.) 그 역시 과학을 신뢰하고 기술 발명을 예찬하였다. 캄파넬라의 유토피아 ‘태양의 나라’는 7개의 성이 동심 격리되어 있으며 지식을 다루는 사람들과 일반 주민들이 분리되어 있는 반면에, 태양의 나라의 주민들은 모두 지식에 개방되어 있으며 전 주민을 대상으로 의무 교육을 진행한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차이의 원인은 베이컨과 캄파넬라의 대조적인 출생과 신분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베이컨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엘리트 정치가였고, 캄파넬라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출신의 성직자이자 혁명가였다. 이러한 특질이 자신의 유토피아를 각각 엘리트주의 사회와 공유제 사회로 묘사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정치가와 혁명가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쳐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사람들이다. 두 작가의 이러한 삶은 와 에 나타난 경험주의, 실증주의적 지식 탐구법과 무관하지 않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베이컨은 과학의 진보를 위한 방법으로 귀납법을 제시하였다. 귀납법은 ‘작업과 실험으로부터 원인과 공리를 이끌어 내고 다시 이들 원인과 공리로부터 새로운 작업과 실험을 도출’하는 방법으로 경험주의적 방법론의 전형이다. 솔로몬 학술원의 과학자들의 공동 협동 연구는 귀납법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먼저, 섬 밖의 세계, 기존 텍스트, 새로운 실험과 발견 등에서 자료가 수집되고, 이렇게 축적된 자료들은 정리, 분류된다. 과학자들은 분류된 지식에서 인과 관계를 밝히고 일반 원리를 도출한다. 새롭게 만들어진 지식은 학술원의 모든 과학자들에 의해 검증 과정을 거친 후 공표되며, 이후 새롭고 더욱 심화된 주제가 다음 연구 과제로 선정된다.또한, 귀납법은 실험과 경험을 전제로 한다. 이를 위해 솔로몬 학술원은 과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많은 실험실과 도구를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동굴에서 냉동을 통해 사물의 상태를 보존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법을 연구한다. 또한, 유럽 국가에는 없는 훌륭한 용광로와 직물 기계를 이용하여 첨단의 물품을 생산하고 기술을 발전시킨다.태양의 나라는, 과학 지식의 탐구와 실험에 주안점을 두는 솔로몬 학술원과는 달리 지식의 교육과 습득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방식에서 경험 교육의 전형적인 방법인 현장 실습과 시청각 자료의 활용을 연상케 한다. 태양의 나라의 주민들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직업의 작업실을 견학하여 적성을 발굴하고, 교사의 지도로 성벽에 그려진 글과 그림을 보며 학문을 배운다. 캄파넬라는 이를 통해 중세 아리스토텔레스 학문 전통의 비현실성과 비실용성을 꼬집고, 지식 습득에 있어서 체험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6, 17세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 과도기였다. 정치, 사회, 문화적 격변이 유럽 사회를 뒤흔들어 놓으며 유럽인들의 사고관의 대대적인 전환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유럽 사회는 중세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 시대의 과학은 근대 사회에서 정의하는 과학과는 다른 경향을 띤다. 과학은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신의 존재와 권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점성술과 연금술의 경우처럼 과학적인 것과 마술(魔術)적인 것을 뚜렷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과학, 신학, 마술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였고, 서로 많은 영역을 공유하였다.에 나타나는 과학과 신학, 마술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높은 수준의 과학 지식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태양의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점성술의 원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생식, 교육, 노동 등 주민의 모든 것이 별과 행성의 움직임에 따라 결정되며, 7개의 성벽에는 각각 혹성의 이름이 붙여지는 등 이 도시는 점성술의 상징물들로 가득하다. 최고지도자 ‘태양’과 신관들이 점성술을 이용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기까지 한다. 이외에도 점성술에 대한 언급은 책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점성술에 대한 캄파넬라의 신봉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는 점성술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숫자인 700과 900을 더하여 1600년에 대변혁이 일어날 것을 확신하고 혁명의 날짜를 정했으며, 점성술을 이용하여 자신이 죽는 날을 계산했다고 전해진다. 점성술은 신학과도 관계가 있었다. 성경은 최후의 심판이 당도하는 날 태양과 달과 행성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전하는 있다.
    인문/어학| 2017.11.07| 6페이지| 2,000원| 조회(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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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목(濟州牧)의 공간 구조 조사
    제주목(濟州牧)의 공간 구조 조사2011-10698인류지리윤상현차례1. 들어가며2. 제주목의 공간 구조2-1. 제주목 개요와 연혁2-2. 주요 구성 요소1) 제주성2) 제주목 관아와 부속 시설3) 교육 기관4) 사묘3.맺으며1. 들어가며필자는 제주에서 태어나 대학에 입학하여 상경하기 전까지 20년 가까이 제주에서 살아온 제주 토박이임에도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는 무지하다. 제주를 연구 주제로 선정한 까닭은 그러한 무지에 대한 반성과 애향심에서 비롯되었다.한반도의 변방에 위치하였으나 제주는 국내 최고(最古)의 신석기 시대 유적이 출토된 곳으로 제법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 여러 고문헌에 탁라, 혹은 탐라로 언급되며 국내 기록에서는 삼국사기 문주왕 대 기록에 최초로 등장한다.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제주목, 특히 제주목 관아가 있던 제주성 일대를 중심으로 제주목 고을의 공간구조를 살펴본다.2. 제주목의 공간 구조2-1. 개요와 연혁제주목(濟州牧)은 1295년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에게서 되찾은 탐라(耽羅)를 제주(濟州)로 개칭하면서 처음으로 설치된다. 이후 조선 태종 16년(1416) 한 개의 관에서 섬 전반을 관할하는 어려움과 그로 인한 폐단이 제기되어 제주도 동부에 정의현(?義縣)과 서부에 대정현(大靜縣)이 설치되어 제주도에는 세 개의 행정구역이 들어선다.과거 조선시대 제주목의 중심지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일대이다. 이 지역은 과거 제주성(濟州城, 제주읍성이라고도 한다.) 내부에 있었던 곳으로, 제주인들에게 ‘대촌’, 성(城)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성안’, 혹은 목내(牧內)를 뜻하는 ‘목안’, ‘모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제주목의 행정적 중심지였던 제주목 관아는 지금의 삼도동에 위치하였고, 관아를 중심으로 여러 부속건물과 기타 주요 시설물들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이후 제주성이 철거됨과 동시에 이 일대에 도청과 경찰서 등 식민통치기구와 우체국, 금융조합, 상업시설 등이 세워지면서 이 일대의 경관은 크게 색 선으로 과거 제주성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붉은 사각형은 각각 서문, 남문, 동문이 세워졌던 곳으로, 현재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 주차장이나 건물이 들어서있어 옛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오리엔탈 호텔 북쪽의 검은 선 위쪽이 1980년 대 말 매립된 곳으로 현재는 호텔과 광장, 상업시설이 들어서 있다. 과거 제주 목관아에서 바다까지 3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주성은 병문천과 산지천 두 하천을 자연 해자로 삼아 건설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제주성 좌측의 파란 선이 병문천이다. 현재는 완전히 복개되었다.그림 1연혁상고시대 - 탐라시대 : 탐라국1105년(고려 숙종 10년) : 탐라국호 폐지, 탐라군 설치1192-1259년(고려 고종년대) : 탐라군을 제주로 개편1275년(충렬왕 원년) : 탐라국으로 회복. 원, 총관부 설치1294년(충렬왕 20년) : 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1397년(태조 6년) : 제주목 설치1416년(태종 16년) : 정의현, 대정현 설치1864년(고종 1년) : 정의, 대정 양현을 군으로 승격, 전라도 관찰사 관할에 둠1880년(고종 17년) : 다시 현으로 환원1895년(고종 32년) : 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1906년(광무 10년) : 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1910년(융희 4년) : 정의, 대정군을 제주군에 합군1915년 5월(일제강점기) : 군제 폐지, 도제(道制)로 개편1955년 9월 1일 :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1시 2군)2006년 7월 : 제주특별자치도 출범2-2 주요 구성요소1) 제주성제주읍성이라고도 한다. 읍성은 군, 현 주민의 보호와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동시에 갖춘 성을 말한다. 제주성에는 서문 남문 동문과 산지천 상, 하류에 각각 수구(水口)가 있었고, 성곽 시설로는 여장(女裝), 치성(雉城), 옹성(甕城), 해자(垓字) 등이 있었다. 제주성의 외곽거리는 3.27km, 내곽거리는 2.75km이고, 외곽면적은 497,442㎡, 내곽면적은 466,569㎡이다.제주성 부근은 조선시대뿐만이 아도 칠성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제주성 안에 흩어져 있어 모두 돌을 쌓고 흙을 쌓아올렸으나 허물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한다. 현재까지도 칠성도가 있었던 곳을 칠성골이라 하고 이 일대를 지나는 도로를 칠성로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제주성 서북쪽에는 고성(古城) 터가 있었다고 과 는 전한다. 제주 민간에서는 옛 성터를 ‘무근 성(묵은 성)’이라 불렀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서문로터리 부근 도로명 주소에 ‘무근성로’가 있어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제주성의 건립 연대는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1105년(숙종 10년) 탐라국이 탐라군(耽羅郡)으로 개편되어 고려의 지방 군현이 되는 시기에 이미 성곽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문헌 기록이 존재하여 그 연대는 고대 탐라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에서는 제주성의 둘레를 4,394척, 높이를 11척으로, 는 둘레를 5,489자, 높이 11자로 기록하고 있다. 원래 제주성은 병문천과 산지천을 자연 해자로 삼고 그 안쪽에 축성되었다. 이후 1565년(명종 20년)에 제주성 확장 공사가 있었다. 이 때문에 1530년에 간행된 과 17세기 중반에 작성된 간 수치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증축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먼저, 당시 성 내에는 물이 없어서 성 안 사람들은 성 밖에 있는 ‘가락쿳물’이라는 용천수를 식수와 생활용수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곽흘 목사가 동쪽 성을 동쪽으로 물러 산지천과 가락쿳물이 성 내에 들어오게 된다. 또 다른 이유로는, 1555년(명종 10년) 을묘왜변 당시에 1,000여명의 왜구가 산지천 동쪽 언덕에 진을 치고 성을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힌다. 이 일을 교훈으로 전쟁 이후 동쪽 언덕 일대에 대한 방비를 위해 산지천을 넘어 언덕 위까지 성을 확장한다. 현재 제주 기상청이 위치한 산지천 동쪽 언덕 일대는 성 안과 고도차가 상당하다. 그러므로 제주성은 동쪽 끝부분만 떠있는 다소 기형적인 형태인 것이다.에 기록된 5,489자는 미터법으 주변에 옛 성터를 따라 간성(間成)과 보(堡)를 쌓았으며, 1847년에도 북수구를 퇴축하고 간성을 더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그림 2. 제주성 잔해제주성은 현재 오현단 북쪽 150m 구간만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으며, ‘삼도쉐르빌’ 아파트 인근과 ‘인천문화당’ 서쪽의 카센터, 제주기상청 남쪽(그림 2)에서 일부 잔해를 찾아볼 수 있다. 제주성은 대한제국 말까지 유지되었으나 일제의 합병 이후 전국에 내려진 읍성철거령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0년대 산지천 하구의 항만 공사(현재의 제주항)에 석자재로 이용되면서 완전히 해체된다.그림 3. 제주성내 주요 시설과 도로그림 4. 제주성 서쪽 주요 시설2) 제주목 관아제주성 안에는 상당한 수의 관청들이 분포하였다. 이 관청들은 관덕정 앞의 길고 넓은 광장(길이 약 155m, 폭 33m)을 기준으로 남과 북에 각종 관청이 늘어서 있었다. 이중 남쪽은 목사의, 북쪽은 판관의 업무공간으로 구분되었다. 주요 시설은 다음과 같다.영주관 : 조선시대의 객사대청(客舍大廳)이다. 관아에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이다. 목사가 왕의 명을 받아 그 고을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았다. 1689년(숙종 16년) 이우항 목사가 개축하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1907년 윤원구 군수가 사립 의신학교와 공립 제주보통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의 전신)를 창설하면서 폐쇄되었다. 객사에서 남문까지 직선도로를 건설하여 그 위엄을 높였다.그림 5. 관덕정관덕정 : 1448년(세종 30년) 제주 목사 신숙청이 창건하여 1480(성종 11년)에 목사 양찬이 중수하였다. 병사들의 군사훈련과 무예 수련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관덕(觀德)’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射者所以觀盛德也)’라는 의 구절에서 따왔다. 안평대군이 썼다는 편액으로 유명하다. 관덕정 앞 광장은 과거 제주 제일의 번화가로 민중집회가 수시로 열리던 장소이자 오일장이 들어섰던 곳이다. 현재는 대로와 광장이 있던 자리에 가옥과 하였는데, 향회에서는 고을의 당면 과제나 민심의 동향을 논하였다. 봄과 가을에는 고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향사례를 행하였다. 향사당은 처음에 산지천 서쪽에 지어졌으나 1691년(숙종 17년) 판관 김동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찬주헌 : 1689년 목사 이우항이 창건하였다. 유사시에 판관의 지휘소가 되었다.사창 : 관덕정 서쪽에는 사창, 진휼창 등 주로 창고가 있었다. 처음에는 호남 원병의 양곡을 저장 관리 하였으나 1620년(광해 12년)에 혁파, 이관하고 그 뒤로는 고을의 환곡 등을 저장하였다. 1668 현종 9에는 사창 옆에 따로 진휼고를 설치하고 양곡을 비치하여 흉년에 대비하였다.좌위랑, 우위랑 : 오일장 관아 남쪽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에 위치하였다. 처음에는 객사 앞에 있었으나 1511년(중종 6년) 목사 김석철이 옮겨 세웠다. 옛적에는 호남 원병이 들어왔을 때 주둔했으나 원병제도가 폐지된 뒤에는 심약방, 장춘원, 궁장방, 철장방, 영나졸방 등 여러 용도로 이용되었다.3) 교육기관그림 6. 제주향교 정문제주향교 : 제주향교는 옛 성인과 현인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1392년(태조 1년) 산지천 서쪽 언덕 위에 처음 지어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옮겨지다가, 1827년(순조 27년) 병문천 서쪽 현재 위치에 자리 잡는다. 향교 내에는 대성전, 계성사, 명륜당 등의 건물이 있다. 대성전은 문묘라고도 하며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5성인과 공문 10철, 송조육현, 한국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명륜당은 학생을 가르치는 강당으로 주로 사서오경을 가르쳤다.귤림서원 : 조선시대 제주 유학과 유교문화의 중심지였다. 귤림서원은 기묘사화로 제주에 유배되어 사사된 충암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518년(선조 1년) 판관 조인후가 산지천 동편에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1871년(고종 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폐원되었다가 2000년 이후 복원작업에 들어가 현재 장수당과 향현사 등이 복원되헐린다.
    인문/어학| 2017.11.07| 8페이지| 2,000원| 조회(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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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통해 살펴본 창조적 각색.hwp
    스탠리 큐브릭의 를 통해 살펴본 창조적 각색1. 서론012. 본론032.1. 오프닝032.2. 폭력과 성052.3. 의문, 그리고 주제092.4. 현실의 은유123. 결론144. 부록17지리학과 윤상현Ⅰ. 서론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최초의 영화를 상영한 이후, 활동사진이라는 이명으로도 불리는 이 새로운 매체는 끊임없이 발전을 모색해왔다. 시각 텍스트를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는 본디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이었지만 곧 예술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고, ‘의미 있는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가’라는 공통의 과업을 짊어지게 된 영화 관계자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분야를 확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순수 창작의 한계를 느낀 이들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다른 예술에 손을 뻗었고 문학, 연극 대본을 비롯한 다른 분야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을 ‘각색’이라고 한다.각색은 영화 분야에서 이미 보편적인 창작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당장 상영되는 작품들을 살펴보아도 원작을 갖는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일례로 작년 한 해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거둬들인 열 개의 작품 중 네 작품이 원작을 각색한 영화다. 각색 영화는 그것의 예술성과 작품성도 함께 인정받고 있어, , , 등의 작품들은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느 정도의 서사 구조를 보장하기도 하며 관객의 관심을 이끄는 데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영화 관계자들은 수많은 문학 작품을 참고하며 영화화에 알맞은 작품을 선별하고 있다. 이처럼 각색의 생명력은 현대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하다.물론 소설을 개작한 영화는 대체로 원작만 못하다는 등 소설의 영화적 각색에 대한 회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실제로 소설을 영화화하는 일은 원작을 기계적으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서술하는 언어적 관습을 영상으로 번역하는 일과 관련된다. 따라서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했는가 하는 점은 각색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러분들은 아마 이런 장소가 어떤 곳인지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우유에다 뭔가 다른 것을 섞어서 팔았던 거지. 게네들한테는 술을 팔 수 있는 영업 허가가 없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놈의 우유에다 집어넣던 새로운 약들을 단속할 법이 없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우유에다 벨로쳇이나 신세메쉬, 드렌크롬을 섞거나 이 중에서 하나나 둘 정도의 약을 한꺼번에 타서 마실 수 있었는데, 이 약들은 사람들의 온 꼴통 속에 빛이 번쩍거리게 하고 왼쪽 신발 속에서 하날님과 성스러운 천사와 성자를 보는 정말 기분 째지는 십오 분을 가지게 해주었지.소설과 영화는 모두 스토리를 전달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소설은 언어를 재료로 서사를 구성하여 독자에게 심상을 투사하는 데 반하여, 영화는 빛과 그림자와 음향을 통하여 관객에게 현실적인 시각 이미지를 전해준다. 소설이 지닌 관념적 심상을 영화는 감각적이고 현실적으로 전달한다. 영화의 상(像)은 감각적이고 현실적이나 소설의 상은 관념적 심상이다.소설 도입부에서 알렉스의 독백으로 간략히 묘사되는 바(Korova Milkbar)의 실내는 영화 속에서는 알렉스의 독백이 차갑게 흐르며 실내 전경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원 컷으로 처리된다. 천천히 빠지는 카메라에 보이는 어두운 실내는 완전히 침묵 속에 멈춰진 시간이다. 좌우로 걸려 있는 하얀 조각상들의 차가운 대비감에 더하여 몇몇 엑스트라의 형체도 마네킹처럼 굳어진 채로 있다. 이처럼 영화에서 큐브릭은 알렉스의 환상 묘사를 위한 몽타주 기법과 함께, 주어진 공간 속에서 대상들의 크기와 움직임에 대한 조정, 즉 미장센을 어두운 색조 속에 정적이고 무겁게 효과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주인공의 경박함과 냉소적 시선을 그를 둘러싼 닫힌 세계와 대비시켜 극대화한다. 객관적인 세계를 충실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능력은 영화가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강력한 실감을 획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한편 영화 속 세트와 소품은 외형적 장식이라는 역할을 넘어서 작품의 주제와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까존재한다. 첫째는 이것이 매우 무분별하고, 도통 의미와 정당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성질의 폭력이란 점이다. 그러나 이는 소설의 설정과 별반 구별되지 않는 지점이기에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다음의 특징이다. 스탠리 큐브릭적인 폭력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은, 그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폭력을 양식화함으로써 관객이 그것에 지나치게 몰입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점이다. 이는 큐브릭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며 그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데, 이는 차후 자세히 다루도록 할 것이다. 우선 네 장면을 직접 들여다보며 큐브릭이 어떤 방식으로 원작을 놀랍게 재탄생시켰는지 음미해보자.scene Ⅰ, 알렉스 일당이 지하도에서 늙은 거지를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 알렉스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술 취한 시끄러운 부랑자들에 대한 그의 혐오를 드러낸다. 멀리 빛이 보이고 하얀 차림의 네 친구는 폭력을 가하며 노인이 떠벌리는 법이니 질서 따위를 한껏 조롱한다. 이는 영화에서 ‘나’와 친구들이 최초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다.이는 큐브릭에 의해 매우 인상적으로 양식화된 장면으로서 James Chapman은 이를 표현주의의 교과서라고 칭하기도 했다. 알렉스 패거리의 모습은 역광에 의해 긴 그림자 실루엣으로만 보이며, 빛과 그림자가 대조되어 움직임의 선만이 강조된다. 패거리가 터널 내부의 어둠의 일부가 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앞서 말한 표현주의의 고전적 영화를 상기시켜준다. 표현주의란 영화의 등장인물이나 감독의 주관적 상태를 투영시켜 물질세계를 왜곡하고 과장하는 영화 기법을 말하는데 세트, 조명, 공간 관계, 카메라 이동 등의 모든 요소는 등장인물이나 감독이 자기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된다. 큐브릭은 물질세계를 꿈결같이 환상적으로 혹은 악몽처럼 그려냄으로써,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 세계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비현실’을 창조해내기 위해 노력한다.scene Ⅱ, 다음에 이어지는 빌리 보이 일당과의 대결 장면. 이는 소설에서 두 페이지 가량의 분량인데 반해 영 43분 정도 분량인 알렉스의 폭력 신은 대부분 아주 객관적으로 찍혔다. 즉 알렉스가 폭력을 행하는 즐거움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숏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오히려 폭력 신의 시작은 롱 숏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풀 숏이거나 혹은 슬로우 모션이거나, 프레임 수를 올리거나, 실루엣으로 처리한다. 즉 영화에서 불량배의 폭력을 묘사하는 것은 일련의 폭력을 전시하는 식으로 촬영되었고 또 음악은 그런 폭력의 전시장을 좀 더 경쾌하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배경음악은 소설과 달리 영화만이 갖는 특징적 요소 중 하나다. 적절한 장면에서 들려오는 음악이나 음향효과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하며, 영상과 소리 두 가지를 교묘하게 병합했을 경우 이것은 독특한 효과를 창출한다. 큐브릭은 영상 매체의 이러한 특성에 착안하여, 소설의 언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적확하게 드러냈다.?큐브릭이〈시계태엽 오렌지〉에서 동원하는 것은 베토벤, 로시니가 작곡한 우아하고 품위 있는 클래식 넘버와 ‘Singin’ in the Rain’이라는 사랑스러운 노래다. 그러나 이들 음악은 일반적으로 해당 음악과 어울릴 것이라고 여겨지는 상황과 거리가 먼 장면에 삽입된다. 앞서 보았듯 로시니의 ‘도둑까치 서곡’의 경쾌한 선율은 소년 갱단의 패싸움을 리드미컬한 춤사위로 변모시키고, 생의 고결함을 드러내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는 알렉스의 폭력적인 판타지와 극적으로 부딪힌다.?이와 같은 부조화는 결국 화면에 묘사된 상황으로부터의 일종의 소격 효과를 이끈다. 큐브릭이 원한 것은 상황에 대한 감정적인 동조가 아니라 아이러니를 통한 이성적인 관찰이었던 셈이다. 화면과 음악의 마찰이 빚어내는 생경한 분위기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의 현실성을 경감하는 반면 폭력의 무감한 속성 자체는 더욱 사실적으로 드러낸다.영화에는 폭력과 성의 여과 없는 묘사가 두드러지지만, 큐브릭이 의도한 폭력의 음악적 내지 드라마적인 환원은 관객으로 하여금 폭력에 대한 가치 판 할까. 여기서 버지스는 신학적인 입장으로 돌아가 악 대신 선을 택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버지스에게 각각의 인간 개체는 타자가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하고 고유한 존재로 인식되며, 개개인이 이를 절감할 때 우리 안에 내재된 진정한 선이 드러날 수 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치유된 알렉스가 어느 순간엔가 자신의 철없음을 깨닫고 건실한 사회의 시민이 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그 믿음을 구현한다.반면 스탠리 큐브릭은 애초에 소설 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주제 의식, 즉 한 사람의 인간이 진정한 의미로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개개인이 우주의 끝과 시작이며,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개체임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버지스의 메시지에는 흥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큐브릭의 결말에서는 어떤 도덕적인 가망이나 전망도 드러나 있지 않다. 알렉스는 다시 풀려났고 그는 여전히 악마다. 이는 원작이 가졌던 도덕적인 비전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으로 두 가지 폭력이 모두 공존하고 개선될 가망이 보이지 않는 괴기한 세계를 냉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사회풍자극의 성격을 띠지만 어떤 교훈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영화는 폭력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주지만 섣부른 가치판단은 보류함으로써, 오히려 폭력의 위험성과 위선적인 양상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큐브릭은 중요한 결말부를 과감하게 삭제하고 다시 살아난 알렉스의 본성을 회복시켜 놓으며 두 가지 폭력이 모두 공존하고 개선될 가망이 보이지 않는 파시즘적 사회를 냉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인간의 관계란 결국 어떤 쪽이 넓적다리뼈를 들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유인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꼬았던 큐브릭에게, 자유의지에의 옹호와 같은 원작 소설의 표면적 주제는 매우 진부한 것으로, 라캉의 어휘를 빌려 말하자면 서사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주제를 서둘러 ‘봉합’해버리는 무책임한 작업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를 제작할 즈음에 큐브릭의 관심은 힘의 균형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인간들 간의 관계양상으로 향해 있
    인문/어학| 2017.11.07| 18페이지| 2,000원| 조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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