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독후감 : 잘 살고 싶다면,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인생의 지향과 목적을 고민하는 시기는 누구나, 적지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책을 읽고, 일을 하고, 취미를 찾으며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지 고민한다. 나 역시 끊임없이 삶의 비전과 목표를 고민하고 있고, 여전히 명확한 게 없어 좌절을 반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해답을 관계에서 찾는다.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을 고귀하고 즐거운 일이라 설명한다. 좋은 일을 한다는 건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단순한데, 단순하지 않다. 인생의 중요한 목표는 나의 외부에 있을 것만 같은데 결국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그 중에서도 나 자신)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인간관계에 관한 수많은 책은 ‘처세’와 ‘사랑’과 ‘이별’을 배우고 때론 ‘부탁’과 ‘거절’,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관계를 고민하는 사람이 많고, 자신의 고유한 관계에 대한 해답도 책을 통해 얻으려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다. 나 역시 새로운 환경에 처할 때면 새로운 관계가 가장 어려웠고, 그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곤 했다. 대체로 내가 해답을 얻은 책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하세요’라는 조언을 줬고,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했다. 반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서술하는 관계에 대한 철학은 모든 관계를 아울러 결국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내가 친애하는 사람, 내가 즐거움을 얻으려는 사람, 내가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에 대한 설명은 나 스스로가 관계에 어떤 지향을 가졌는지 돌이켜보지 않으면 어떤 관계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없었다. 궁극적으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인 스스로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상대와의 감정적 교류를 통해 친구가 된다는 말은 인간관계의 기본 중에 기본이면서도, 늘 잊고야 마는 사실이다. 그래서 짤막한 명령문이 담긴 처세술을 따르고, 실패하고, 또 같은 고민을 반복하는 것 아닐까.돌이켜보면 관계가 어려웠던 상황은, 상대가 나만큼 나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 않을 때, 나에게 필요한 것만 취하려 할 때, 내가 잘 되는 걸 불쾌하게 여길 때 등 상대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거나, 반대로 나 역시 상대에 대한 친밀한 호의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없을 때였다. 나열하면 끝이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친애’의 관계에 이르지 못했을 때가 바로 그랬다.그가 정의한 친애란 서로에 대해 선의를 갖고 있으며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고 동시에 그 사실을 서로가 알고 있는 관계다. 상호간의 지속적인 호의와 지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이 상대방으로 인해 얻을 나의 즐거움이나 유익이 아닌 상대가 가진 품성 그 자체여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의 품성이 선한 것이어야 하고, 나 역시도 그래야 한다. 결국 좋은 관계란 좋은 것을 찾으려는 지향에서 비롯되고, 그 지향이 나의 마음속에 자리해야 한다.누군가가 나만큼이나 똑같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넘어서 나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다. 열등감과 불안은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갉아먹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 스스로가 다치게 만드니까. 그래서 관계를 잘 정립하고 싶다면 나 자신의 성품을 만드는 데 더 큰 노력을 해야 한다.“서로 친구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정의가 필요하지 않지만 서로 정의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친애가 추가적으로 필요하고, 정의의 최상의 형태는 서로를 향한 친애의 태도처럼 보인다”이 문장만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친구를 얼마나 고귀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한 명의 진정한 친구를 만나는 것은 곧 자신의 성품을 고귀하게 만들고, 친애를 주고받을 상대를 만났다는 의미다. 삶에서 가장 고귀한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나의 성품을 훈련하는 시간이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짤막한 갈등마다 마음이 상해 온갖 책을 뒤적이기보다는 내가 가진 관계의 지향과 무게를 돌이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삶의 지향은 나의 영웅적인 성취로 특별히 옳은 일을 찾아나서는 쪽이 아니라, 좋은 사람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 되도록 고민하는 쪽으로 기울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렇게 신뢰가 쌓이기 전까지는 친구로 받아들일 수도, 또 친구일 수도 없다. 서로에게 서둘러 친구처럼 행세하려는 사람들은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지만 친구는 아니다. 만일 그들이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또 이것을 모르고 있다면 말이다. 친애에 대한 바람은 빨리 생겨나지만 친애는 그렇지 않다. (284p)”
효율적 이타주의자 독후감 : '선의'보다 '선행'의 힘을 믿는다.저자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돕는 방식에 집중한다. 누군가를 도왔다는 감성적인 만족에 그칠 것이 아니라 마땅히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사람을 도와야하고, 같은 시간이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는 식이다.반대할 이유가 없다. 가능하다면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더 많은 사람을 돕는 게 바람직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더 많은 돈을 번다면 효과는 더 커진다. 기부를 드러내지 않는 미덕을 지키고자 익명으로 기부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믿을만한 단체에 실명으로 꾸준히 기부하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면 좋을테니까. 내가 유명인이라면 더 많이 드러내서 동참하는 사람을 이끌어낼 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명인들의 공개적 선행은 칭찬받아 마땅하다.나는 선의보다 선행의 힘을 믿는다. 심지어 정치인들의 위선적인 일회적 기부나 봉사활동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위(僞)'이지 '선(善)'이 아니니까. 평소에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선거 직전 단 한번 기부를 했다면, 기부 행위만 칭찬하고 악행은 비판하면 된다. 그게 정치적 쇼니 위선자니 손가락질 하더라도 이왕이면 봉사활동 하는 뉴스에 댓글달기보다는 잘못한 뉴스가 나면 거기에 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선행은 선행이다. 진정성있는 선의보다 필요한 건 어려운 사람을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힘이다.선물로 비유하자면 받는 사람이 좋아하는 선물을 줘야한다. 받는 사람이 되도록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많은 도움을 주는 게 좋다. '남을 돕는 스스로'에 집중하다보면 '드러내지 않는 미덕'도 고려하게 되고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과 '남들이 착한척한다고 손가락질 할 것 같다'는 걱정도 든다. 하지만 그것마저 부수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잘난척한다고 욕먹으면 좀 어떻고, 착한척한다고 손가락질 받으면 어때서. 중요한 건 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거고, 그게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게 먼저다.문제는 인간의 역량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같은 돈으로 가까운 친구의 다친 다리를 낫게 할지, 생면부지의 타인의 생명을 구조할지는 고민된다. 일상의 불편함을 개선하는 것과 생명을 살리는 것은 분명히 무게차가 있다. 그러나 눈앞의 아픔과 느낄 수 없는 죽음의 차도 무시할 수 없다.나는 지극히 '나'를 중심으로 사고한다.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가족과 친구들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내가 알고 경험한 세계가 행복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기부하고, 봉사하고, 심지어는 되도록 많이 해야한다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기부의 동기는 가까운 지인에서 점차 확장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가족과 친구, 지인들이 행복해져야 한다. 옆에서 누가 매일 울고 있으면 맛있는 걸 먹어도 행복할 리가 없다. 그래서 돕다보면 지인의 지인이 눈에 밟힌다. 친구의 어머니가 아프셔서 친구가 힘들어하는데 돕지 않을 수가 없다. 친구가 성소수자인데 누가 비난을 하면 화가나서 편을 들게 된다. 내 아이가 자꾸 아파서 환경문제, 소비자 권리에 점점 관심을 갖는다. 기부는 처음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한 헌신이 점차 더 큰 세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기가 내적으로 채워졌을 때 비로소 더 많은 도움과 더 많은 기부를 고민하게 된다.눈 앞에 한 사람을 돕는 행위와 모르는 열 사람을 돕는 행위의 우열은 없다. 물론 공적자금을 운용하는 것이라면 전혀 다르겠지만, 개인의 돈과 시간을 어느 곳에 들일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다만 저자가 제시한 방식은 좁은 범위에 집중된 기부의 범위를 확장하고, 더 효과적인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다. 똑같이 백만원을 기부한다고 할 때 나는 당장 눈앞에 한 사람이 중요하다면 그에게 기부하고, 이제는 충분히 세계가 넓어지면서 열사람에게 십만원씩 기부하는 게 중요하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쓰고나니 딜레마를 '선택의 자유'로 쉽게 피해가 버린셈이 됐지만, 완전한 결론을 찾고자 행동을 미루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세계만큼 최선을 다해 효과적으로 돕고, 그 세계가 단 한 사람이 되든 전세계가 되든 비난할 이유는 없다.
플라톤 향연 독후감 : 고상하지 않은 사랑을 위한 변론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의 위계를 구분하며 ‘영혼의 아름다움을 더 가치있게 여기게 되면 육신의 아름다움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설명한다. 일단 첫 번째로 정신적 사랑이 육체적 사랑보다 언제나 위대한가, 두 번째로 육신의 아름다움을 개의치 않는 사랑이 존재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누군가는 타인의 야망을 사랑하고, 욕심을 사랑하고, 소심함을 사랑한다. 자비와 용기, 공동체의 선만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모난 것들도 사랑의 대상이 된다. 이 경우 정신적 사랑은 언제나 육체적 사랑보다 위대할까. 또 사랑의 대상이 정신적 아름다움인가, 추함인가에 따라 사랑의 위계가 부여되는걸까.돌이켜보면 나의 사랑의 대상은 말을 주저하는 소심함과 비겁함, 어리숙한 소년의 어른인 체 하는 허영, 때로는 성공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과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채찍질하는 지독함이기도 했다. 다른 장점을 사랑하는 바람에 그의 단점들을 눈감았다기 보다도 모난 모습들 그 자체를 사랑했다. 내 사랑의 대상은 선하고 학문적이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그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내가 선택하는 영역이 아니었고 불가피하게 마주하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모난 것에 대한 사랑이 단지 육체적 사랑이 아니라 해서 그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가치가 덜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선한 것에 대한 사랑만이 높은 차원의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의 전제를 설명했다기보다는 지향점을 설명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문적 사랑에 대한 경이로움을 지향할 수는 있어도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사랑을 설명한다면 사랑의 실제적 형태와는 멀어지는 건 아닐까. 사랑과 선함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간극을 단지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올라서는 과정으로 표현하는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수많은 간극사이에도 진실한 사랑이 존재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대다수의 인간은 선하지 않고, 선을 지향하더라도 많은 순간 좌절한다. 본성적인 민낯은 추악하고 두려움이 많고 결핍의 결정체라 하더라도 사랑을 한다. 사랑을 통해 선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불가피하게 사랑은 찾아온다. 당신으로 인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때로는 선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부와 명예, 그럴듯해 보이는 겉치레에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또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찾는 인간에게 육체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호감을 주는 장치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피부를 쓰다듬고 눈과 코를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형태의 몸이든 만지고 싶단 성욕을 불러일으킨다면 그는 육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물론 육체적 사랑을 전혀 경험하지 않는 관계도 있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을 가치있게 여긴다고 해서 육신의 아름다움을 개의치 않게 된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강렬하게 이끌리는 육체적 욕망을 저급하게 미뤄두려는 시도는 어쩌면 그것의 유한한 특성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충동적이고 예측할 수 없고 불안정한 성욕은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지향과는 정반대에 놓여있다. 연애 초반의 강렬한 성욕이 점차 사그라드는 시기에 만일 누군가가 사랑은 곧 성적 충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관계에서 사랑은 사라진 것이 된다. 결국 이 관계의 사랑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사랑은 부수적이고 저급한 단계에 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육체적 사랑은 사랑이라는 복잡한 형태의 일부를 분명히 차지하고 있고, 더욱 오래 지속하게 하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때론 관계가 정신적 사랑에 높은 비중을 둘 수도 있고, 육체적 사랑에 그러할 수도 있지만, 어느 하나를 완전히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애초에 육체가 있는 것을 사랑한 이상 그의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주장은 누군가의 ‘눈’만 사랑한다거나 ‘코’만 사랑한다는 것처럼 엉뚱하게 들리기 때문이다(물론 그것이 꼭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 역시도 높은 차원의 것, 즉 영원한 것만을 높은 수준의 사랑의 범주에 포함시키다보니 분리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분리하게 된 것은 아닐까.사랑에 대한 담론은 일단 고상함이란 옷부터 벗고 시작해야 한다. 사랑은 이성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치 않은 순간에 이미 생겨버린 감정이다. 인간의 본능은 선한 것과 악한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공존하는 만큼 사랑 역시 이 모두를 포괄한다. 선한 사람의 사랑은 선하고 악한 사람의 사랑은 악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거나 저급하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멀어지게 된다.
소년이 그랬다 독후감"난 내가 누굴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어요. 난 고작 열네 살이니까요. 근데 형사가 던진 돌이 쿵 하고 떨어지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어요. 그 남자는 왜 돌을 못 피한거죠?"한동안 사회적 파장을 몰고왔던 초등생 벽돌 살인사건이 겹쳐졌다. 그 아이들은 정말 몰랐을까? 높은 곳에서 돌을 던졌고 그 아래 사람이 지나가는 걸 알았는데그 돌을 맞은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정말로 인지하지 않았을 수 있다. 당시 흥분과 영웅심리에 도취돼 오로지 돌을 던지고 난 후에 돌아올 동경어린 시선만을 생각할 수 있다. 늘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어려서 괜찮아'한 번도 책임져본 적이 없으니까.애초에 아이들에게 타인을 해친 후의 책임은 고려할 영역이 아니다. 나의 어렸을 적만 생각해봐도 가장 두려운 것은 부모님과 선생님의 불호령 뿐이었다. 학원을 빠졌을 때, 숙제를 안했을 때 혼나듯이 누군가를 다치게 했을 때의 책임의 무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벌이라는 무서운 단어는 어른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그런데,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때리면 그 사람은 다칠 수 있다는 것을. 13살 때 친구랑 치고받으며 싸운 적이 있다. 둘 다 언성이 높아졌고 몸을 툭툭 치며 크게 싸우게 됐다. 난 정말 그 친구를 세게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먹고 손을 높이 든 순간, 손이 떨리고 힘이 풀렸다. 얼굴을 때렸다가는 정말 크게 다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착하거나 순수해서가 아니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힘을 줘 때리면 그 아이에게 큰 상처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던 것이다.초등학교 체육시간에 피구나 배구를 할 때면 '얼굴에 공을 던지면 반칙'이라는 룰이 있었고 아무리 장난이 심한 아이들도 달려오는 차에 친구를 밀어버리는 장난은 하지 않았다. 충분히 알았기 때문이다. 특정 행동을 했을 때 정말로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즉 행위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할 수 있을 나이이면서 결과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도 있는 나이가 내게도 있었다.나이가 든다고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힘의 크기를 인지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은 늘 하나같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변명한다. 돈이 많아서 합의금은 쉽게 내줄 수 있는 재벌가의 가족은 그만큼 쉽게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술을 마시고 범죄를 저지르면 감형이 되는 사회에서 걸핏하면 '술 취해서 기억이 안난다'는 변명하에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다.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것과 '그래도 나는 피해갈 구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고의성이 다분한 성인범죄와 판단력이 미숙한 미성년범죄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상황을 용인할수록 사람들은 조심하지 않게 된다. 범죄를 저지를 여지를 넓히는 것은 그만큼 개인 스스로가 '미성숙해질 권리'를 부여하는 것과 다름없다.법적으로 '유죄'를 부여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에게 '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인식을 가르쳐야 한다. 나의 말 한마디가 상처를 줄 수 있고, 나의 행동 하나가 누군가를 크게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스스로 조심하게 된다. 그 모든 행동의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14세 이후'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룰로 만들 필요는 없다.사회적 공감 능력이란 가르치고 반복해서 길러지는 것이라 생각한다."너의 행동으로 저 사람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어""넌 그만큼 위험할 수 있는 존재란다"우리 사회는 스스로를 제어할 메시지가 더 필요하다.적어도 돌 하나쯤 손에 쥘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사회는 아이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 당신은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