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숨결이 느껴지는 성 공산성? 차례Ⅰ. 들어가며Ⅱ. 본론? 금서루 입구 비석군? 금서루? 공북루? 쌍수정? 쌍수정 사적비? 추정 왕궁지? 연못? 진남루Ⅲ. 나오며Ⅰ. 들어가며공주라는 지역에 잠시라도 머물러본 사람들에게 공주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가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금강과 공산성, 무령왕릉, 석장리 박물관 등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많이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공주는 구석기시대부터 동학농민운동까지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백제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성 공산성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이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의 왕성으로, 금강에 접한 110m 높이의 공산에 능선과 계곡을 포함해 쌓은 포곡형 산성이다. 이 성은 백제 22대왕인 문주왕이 475년에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뒤, 성왕 때인 538년에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백제왕이 거주했을 것으로 알려진 성이다. 성의 이름은 백제 시대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 시대에는 쌍수산성 등으로 불리었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의 왕성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로 백제의 유적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제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나 백제뿐만 아니라 쌍수정, 영은사 등 조선시대의 유적들도 남아있어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문화도 엿볼 수 있다.Ⅱ. 본론공산성은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가벼운 산책 경로로도 많이 이용한다. 실제로 공산성 답사를 가보면 산책을 하는 사람,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가족, 또는 연인끼리 소풍을 나온 사람들도 많이 구경할 수 있다. 이렇듯 공주는 문화재와 문화 유적이 우리의 삶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사람들도 공산성에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나 또한 입학을 하면서 공산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 공산성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직접여 입장료가 무료라는 팻말이었다. 최근 공산성은 4대강 사업으로 인하여 무너진 성벽을 복원하는 공사를 하고 있으며, 백제의 문화재를 더욱 발굴하기 위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실제로 개인 답사를 갔을 때에는 발굴 작업을 진행하는 곳이 있어 보지 못한 곳이 여러 곳이 있었다. 문화재 발굴을 위한 작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4대강 사업으로 인해 무너진 성벽을 복원하는 작업으로 우리가 답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문화재를 훼손하면서까지 경제적 이익을 취해야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한 현실에 답답하고 안타까웠다.교수님과의 답사 코스는 비석군을 본 후, 금서루를 통해 쌍수정으로 간 후, 진남루, 영은사, 만하루를 보고 오는 코스였고, 개인 답사는 비석군을 본 후 금서루를 통해 들어가 공북루를 본 후 쌍수정, 쌍수정 사적비, 추정 왕궁지, 연지를 보고, 진남루, 영은사, 만하루를 보고 오는 코스로 진행되었다.? 금서루 입구 비석군(錦西樓 入口 碑石群)공산성에 들어서자마자 처음 눈에 보인 것은 비석들이었다. 이 비석들은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둔 것으로, 송덕비(頌德碑)라고 하고, 원래는 현재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각각 도시의 시내나 나루터, 다리 등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공산성에 모아둔 것이다. 하지만 공산성에는 이러한 비석들에 대한 설명이 없다. 특정한 몇몇 비석이 어떤 비석이다 라는 설명만 있을 뿐 어디서 온 것인지, 왜 옮겨놓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른 비석들은 아예 설명이 없어 어떤 비석인지 조차 잘 모른다. 나 또한 교수님이 설명을 해주시기 전까지 비석들이 모두 공산성에서 발굴된 것이라고, 공산성과 관련된 인물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 비석들을 왜 공산성에 옮겨 놓았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이 비석들은 모두 각기 다른 장소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비석들이 다른 장소에 세워졌던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굳이 비석들을 공산성으로 옮겨와야 했던 이유‘배가 멈추는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산으로 현재 도로인 지점들이 모두 예전에는 물에 잠겨있었고, 그 당시 교통수단이었던 배가 멈추었던 산이 정지산이라고 한다. 정지산은 교통상의 요지였는데 이는 서해로 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을 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정지산에는 중요한 특징이 한 가지 더 있는데 이는 정지산에 얼음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정지산은 무령왕의 3년상을 치루는 동안 그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얼음을 보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개인 답사를 갔을 때에는 다른 길을 통해 공산성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에 금서문을 통해 내려왔다. 처음 답사 때 보았던 것과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금서문을 통해 내려오는 길은 공산성 주변의 공주가 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공산성은 산성인 만큼 성벽의 높이가 높다. 하지만 높은 성벽에 비해 이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땅히 없다. 실제로 성벽을 걷다보면 아찔한 높이에 놀랄 때가 많다. 공산성에 온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성벽을 걸을 때 위험함을 한 번씩 이야기를 하였으며, 모두 안전한 길로 돌아가거나,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공산성을 관리하는 공주시 문화 담당부서에서 이는 신경을 써서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개인 답사를 갔을 때에는 마침 웅진성 수문병 교대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웅진성 수문병 교대식은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국내/국외에 알리기 위하여 왕성을 호위하던 수문병의 근무를 재현하는 프로그램이다. 웅진성 수문병 교대식은 1999년 백제문화재에서 처음 시작하여 지금까지 15년 동안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와 송산리 고분군 벽화를 보고 고증을 통하여 복원을 한 것이라고 한다. 수문병 교대식에 사용되는 복식과 소품 역시 철저한 고증을 거친 후 재현한 것이라 한다. 수문병들의 무기인 ‘창’에 대해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한 것체험들이 준비되어 있다. 실제로 답사를 갔을 당시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체험을 해 보도록 해 주는 것을 보았다. 몸으로 체험하는 것은 쉽게 잊기 어렵기 때문에 공산성에 백제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북루(拱北樓)공북루는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7호로 공산성의 북문(北門)으로서 선조 36년(1603)에 옛 망북루(望北樓)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조선시대 문루건축(問樓建築)의 좋은 예(例)이며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강 사이를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關門)이었다.금강에서도 강 너머로 볼 수 있는 공북루는 나에게 공산성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유발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교수님과의 답사에서 공북루에 대한 기대를 하였지만 답사 코스상 공북루를 보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인 답사를 가면서 공북루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고 갔다. 하지만 공북루는 현재 문화재 재발굴 사업으로 인하여 볼 수가 없었다.? 쌍수정(雙樹亭)조선 영조10년(1734)에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조선 인조는 이괄(李适)의 난(1624)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을 와 6일간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인조는 이곳에 서있던 두 그루의 은행나무 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는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쌍수에 정삼품의 작위인 통훈대부(通訓大夫)를 내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공산성을 ‘쌍수산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공산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쌍수정일 것일 것이다.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의 피난 장소로도 유명하지만 쌍수정 사적비와 함께 인절미로 유명한 장소가 아닐까 한다.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에 피난을 와 있던 인조에게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콩고물을 무친 떡을 진상하였다. 인조께서 맛을 보시더니 감탄하며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있다. 속중34년(1708)에 세웠으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다.왕은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기념비인 쌍수산성사적비를 내렸는데 이는 왕이 이름을 지어 내린 기념비이기 때문에 왕과 다름없다고 생각하여 예전에는 남문인 진남루 앞에 홍살문이 있었다고 한다.? 추정 왕궁지(推定 王宮址)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에 왕궁 터로 추정된다. 1985~1986년 총 2년에 걸친 발굴 조사 때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 터 및 목과의 저장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도 되었다.교수님과의 답사에서 왕궁 추정지는 일제 강점기에 운동장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은 넓고 평평하여 운동장으로 사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심어진 벚꽃 나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백제의 문화재가 많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또 하나 들었던 생각이 생각보다 추정 왕궁지가 작다는 것이었다. 왕이 살았던 곳 치고는 그 면적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산성이기 때문에 공간적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연지(蓮地)백제가 475년에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직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王宮地) 연못이다. 1985~1986년에 걸친 왕궁터 발굴 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연못 안에서는 연꽃무늬 만(卍)자 무늬 막새기와 벼루, 등잔, 삼족토기 등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나왔다. 연못은 대접 모양으로 자연석을 정연하게 쌓아 만들었는데, 윗부분 지름이 7.3m, 바닥 지름이 4.79m, 깊이는 3m에 이른다이었다.
비즈니스와 매너 리포트대학생들의 복장매너◎ 서론◎ 본론- 대학생들의 복장 원인 및 배경- 대학생들의 복장 특징과 문제점◎ 결론? 서론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깔끔한 외모와 깔끔한 옷차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복장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중, 고등학교 때 까지 교복을 입게 된다. 중, 고등학교 때 까지는 면학 분위기 조성과 소속감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해 같은 옷을 입고 생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는 기껏해야 머리나 가방, 신발 같은 것들뿐이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복장의 자유를 갖게 되면서 자신의 개성에 맞게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옷을 입게 된다.그러나 도가 지나치면 화를 부르듯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너무 튀는 옷을 입는다던지 너무 짧다거나 너무 파져 있는 옷이라던가, 다른 사람이 보기 불편할 정도의 옷을 입는다면, 그것은 옷을 입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요즘 대학생들의 옷차림은 어떠한지 문제점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본론- 대학생들의 복장 원인 및 배경옛날에는 꾸미고 가꾸는 것은 당연히 여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남자들이 더 미용에 관심이 많고 더 잘 꾸민다. 화장을 하는 남자들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여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미용이 어째서 남자들 에게도 나타나는 것일까? 그 원인은 대중매체의 영향이라고 본다. 특히 요즘 아이돌들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대중매체를 통한 아이돌의 모습은 거의 완벽하다. 옷, 머리, 악세사리등 전문가의 손을 거치기 때문에 그 아이돌의 색에 맞게 꾸미고 나온다. 하지만 학생들은 아이돌이 입은 것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 하나로 자신의 색깔은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중, 고등학교 시절 교복을 입는다. 학교의 입장에서는 학교에 대한 소속감과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교복을 입으라고 하지만 학생의 입장에 서는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줄어드는 것이다. 기껏해야 머리, 가방, 신발에 제한하여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복장의 자유화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동안 보고 배워왔던 패션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자신을 꾸미는데 집중을 한다.- 대학생들의 복장 특징과 문제점요즘 대학생들의 옷차림을 보면 편안하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옷차림이 많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윗도리의 경우에는 PK티셔츠나, 남방을 주로 입고 바지는 청바지나 면바지, 또는 면 반바지를 매치시켜 입는다.여자들의 경우에는 종류와 디자인이 더욱 많고 화려하다. 윗도리의 경우에는 블라우스를 입는 경우도 있고, 티셔츠를 입는 경우도 있다. 아래는 스커트나 반바지를 입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치마나 바지의 길이가 너무 짧거나 앞이 너무 파져있는 윗도리를 입어 다른 사람의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또 너무 편안하게 입고 다니는 것 또한 매너가 아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트레이닝복을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수업을 들으러 가거나 돌아다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다. 자신은 편하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그냥 동네 마실 나온 아저씨, 아줌마 같다. 또 자신의 색깔에 맞지 않는 옷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유행하는 옷이라고 하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물론 유행에 따라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색깔도 없이 유행에 따르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 차례Ⅰ. 들어가며Ⅱ. 본론? 선덕여왕(善德女王)? 진덕여왕(眞德女王)? 진성여왕(眞聖女王)Ⅲ. 나오며Ⅰ. 들어가며과거 우리나라는 고조선부터 근대까지 남성중심의 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왕과 더블어 사회에서 높은 직책은 모두 남성들이 맡았다. 여성의 역할은 그저 남성이 하는 일에 대해 내조를 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는 신분이라는 제한 때문에 남성도 왕족이 아니면 쉽게 올라가지 못했던 왕의 자리에 올라간 세 명의 여성이 있다. 바로 신라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바로 세 명의 여왕이다. 이 세 여왕은 남긴 업적도 각기 다르며 후대에 남겨지고 있는 평도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아주 큰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여왕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고려시대가 아닌 신라시대에만 여왕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글에서는 그 이유와 더불어 이 세 여왕의 생애와 업적, 여왕들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선덕여왕은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명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이 당시에 여성이 왕이 된다는 것은 파격적이고 상당히 이래적인 일었다. 선덕여왕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반란을 수차례 겪어야했고 이웃나라들로부터 무시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마음껏 펼치며 신라를 발전시켰다. 당시에는 골품제 사회로 성골이 아닌 사람은 왕위에 오를 수 없었으며, 여성 또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하지만 선덕여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신라 24대 임금인 진흥왕(540~576)이 죽고, 진지왕(576~579)이 뒤를 이어 왕위에 앉았다. 하지만 진지왕은 즉위한 지 3년 만에 신하들에 의해 퇴출당하고, 뒤를 이어 진평왕(579~632)이 왕이 되었다.진평왕은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며 신라의 문물을 발전시켰고, 진흥왕의 뒤를 이어서 불교를 융성하게 하는 등 나라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진평왕에게는 딸만 있을 뿐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걱정이 있었다. 진평왕이 죽자, 귀족들은 후대 임금 선발 문제로 회의를 열었다. 당시 신라의 왕은 부모 둘 다 왕족인 성골만이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인물은 진평왕의 딸인 덕만 공주와 사촌 동생인 승만 공주뿐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이 생각하기에 여자를 임금으로 내세우는 것은 신라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남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많았고, 후에 귀족 회의를 통해 성골 출신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덕만 공주는 신라의 27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하지만 즉위 첫 해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반발을 맞게 된다.이에 선덕여왕은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귀족 세력의 우두머리 격인 진골 귀족 을제에게 나랏일을 모두 맡겼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불거진 불만은 쉽게 잠들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 국가들의 시선 또한 곱지 못했다. 당나라 임금이 신라 사신에게 “고구려, 백제가 그대 나라를 깔보는 것은 여자가 왕이기 때문이다. 내가 친족 하나를 너희 나라의 임시 왕으로 보낼테니, 너희는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안정시켜라.” 하고 말할 정도였다. 이에 선덕 여왕은 굴복하지 않고, 여왕이라는 불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들이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과 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 첨성대(瞻星臺)이다.당시 당나라에서 불교 유학을 다녀온 승려 자장은 선덕 여왕에게 왕의 권위를 세우고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황룡사에 탑을 세우자는 건의를 한다. 선덕여왕은 이를 받아들여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불러와 2년만에 80m에 달하는 목탑을 완성하였다. 황룡사 9층목탑은 각 층마다 신라가 극복해야 할 나라들을 상징하고 있다. 이는 선덕여왕이 탑 하나를 만들 때에도 불교라는 종교를 정치와 연관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많은 전쟁과 반란을 통해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 위해 불교를 국가 통치의 구심점으로 삼으며 외부로는 건재함을 과시하고 내부로는 결속력을 다지려고 노력하였다. 이의 증거가 분황사를 비롯한 20여개의 사찰인데 이는 다른 왕들에 비해 2~3배나 많은 수이다. 수많은 전쟁을 치른 여왕은 불교의 힘을 빌어 내부적으로는 민심을 모으고자 하였고, 외부적으로는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였으며, 당과의 적절한 외교 관계를 맺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여왕이다. 또한 첨성대를 통해 우주의 뜻을 관찰하며 신과의 소통을 원했고, 이르러 그 권위를 빌어오고자 하였다.선덕여왕은 추진력과 예지력, 지혜로움을 지닌 여왕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는 모란 꽃 이야기, 개구리 이야기, 도리천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이처럼 선덕여왕은 여성이기 때문에 받는 불만과 불이익을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임으로써 극복하였다. 선덕여왕은 후세사람도 감탄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던 여왕으로 여왕의 원대한 야망과 정치력을 펼치며 16년의 기간 동안 강한 정치력과 카리스마로 국력을 다졌던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진덕여왕 (眞德女王)진덕여왕은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명은 승만(勝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모제(母弟)인 갈문왕 국반(國飯)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朴氏)이다. 선덕여왕이 죽고 성골은 귀한 존재가 되었고, 선덕여왕의 사촌이던 진덕만이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진골들은 또 다시 여성을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진덕여왕은 자질이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무척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신장이 7척이고 손을 내리면 무릎을 지났다”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진덕여왕이 부처와 같은 신체 조건을 지녔다는 것을 강조하여 좀 더 신성하게 보이려는 의도일 것이다.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는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계속적으로 신라를 침공해왔다. 이에 신라는 압독주(押督州) 군주(軍主)이던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백제의 공격을 막는 한편 648년에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여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었다. 이로써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외교(請兵外交)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숙위외교(宿衛外交)를 전개하였다. 또한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외교활동을 벌인 결과, 신라는 지금까지 신라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던 당나라 태종(太宗)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김춘추 일파의 주도 아래 당나라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모방한 대규모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을 이른바 한화정책(漢化政策)이라고 한다.대내적으로는 진덕 여왕이 즉위하던 해(647)에 선덕 여왕 때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毗曇)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649년 의관을 중국식으로 하는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를 실시하였고, 650년에는 즉위 직후부터 사용하던 독자적 연호인 태화(太和)를 버리고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였던 영휘(永徽)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관제(官制)와 연호(年號)의 사용은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예속도가 강화되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 651년에 백관(百官) 왕에 대해 행하는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를 실시하였다. 또, 종래의 품주(稟主)를 개편(稟主)하여 국왕직속의 최고 관부로서 집사부(執事部)를 설치하여 왕권 강화를 시도하였고, 품주의 본래 기능은 신설된 창부(倉部)로 이관하였다. 파진찬(波珍?) 죽지(竹旨)를 승진시켜 집사부의 수장 중시(中侍)를 삼고 기밀사무를 맡겼다. 이는 토착기반을 가진 귀족들의 정서를 인지하거나 주변국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했던 선덕여왕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배제하고 김춘추를 포함한 여왕 지지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정치개혁이었다. 또, 시위부(侍衛府)를 개편했는데,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김유신의 군사력이 주축이 되어 개편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이렇듯 진덕여왕은 왕권안정을 위한 집사부 설치, 율령체제를 운영하는 좌이방부(左理方府)의 신설, 각 행정관부의 체계화 등 개혁을 통해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를 지향했다. 그러나 당시 진덕여왕은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실제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정책을 주도하지 않았다. 김춘추에 의하여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훗날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치 작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진성여왕 (眞聖女王 재위 887~897)진성여왕은 성 김(金)이고, 본명은 만(曼)이다. 경문왕(景文王)의 딸이자 헌강왕(憲康王)·정강왕(定康王)의 누이동생이다.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은 47대 임금인 헌안왕의 사위이다. 아들이 없던 헌안왕은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이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반발하자 경문왕은 이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며 제도 개혁, 학문 진흥을 통해 어느 정도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고, 아들인 정강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정강왕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이에 정강왕은 누이인 만(曼)이 왕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보고 만(曼)을 왕위에 즉위시키도록 유언을 남겼다. 또한 경문왕의 자손들만으로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라는 세력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진성여왕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진성여왕의 즉위에 있어서 다른 귀족들의 반대는 거의 없었다. 신라 후기 치열한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해진 것을 경험한 탓인지, 46대 문성왕(文聖王) 이후에는 왕위 계승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진성여왕은 또한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숙부 위홍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선덕여왕, 진덕여왕 시기보다도 진성여왕 때의 왕권은 안정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여왕이 탄생하게 되었다.
? 들어가며‘장안의 봄’이라는 책은 단순히 당나라 시기의 수도였던 장안에 대한 설명을 한 책이 아닌 당나라 시기의 전체적인 사회의 분위기, 풍습, 문화, 생활, 종교 등을 포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시다 미키노스케’는 책의 첫 장의 제목인 ‘장안의 봄’을 책 제목으로 삼아, 제목에 어울릴만한 당대의 문화들을 추려내서 작문을 하였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는 달리 당대의 화려하고 개방적이었으며, 문학 뿐만이 아니라 여러 예술에 있어 절정의 시대를 이룬 당 왕조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다. 또한 책의 서술이 과거의 왕조에 대해 서술했던 여느 책들과는 다르게 그리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어려운 문체로 쓰이지 않아 이해를 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고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당에 대해 더 깊고 쉽게 이해하게된거 같아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같은 역사 초보자들도 막힘없이 읽어 내려갔으므로 역사에 관심이 있는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본론▶ 장안의 봄장안은 그 당시 수도였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였다.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리나 낙타를 이끌고 다니는 카라반이 이곳을 지나갔다. 장안의 사람들 뿐 아니라 외국 사신들도 이곳을 지나쳤다. 또한 장안 사람들은 밖에 나가 노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많은 연회를 벌였다. 이렇게 장안은 언제나 시끌벅적한 도시였다.장안의 봄에 있어서 특히 인상 깊게 보았던 점은 바로 ‘모란’의 존재였다. 장안에 봄이 도래하게 되면 모란이 도성 가득히 흐드러지게 피는데, 장안 사람들은 이러한 광경을 매우 특별하게 여겼다. 이들은 모란이 피어나는 곳으로 꽃구경을 가고, 그곳에서 풍류를 즐겼다. “농염한 모란꽃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 온 나라가 미친 듯 돈을 아까워 않네” 라고 노래한 것처럼, 모란에 대한 애착이 각별함에 따라서, 모란꽃은 하나의 을 이슬을 받는 옥잔에 비유하여 사람들이 유독 백모란은 완상하지 않음을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부분들을 보면서 당시 장안이 이토록 문화적, 물질적 향유를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지녔구나 하는 점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사치풍조가 후에 당나라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 또한 같이 할 수 있었다.▶ 호선무에 대한 짧은 글당대 내내 중국인들 사이에는 서역의 춤, 노래, 잡기 등이 인기가 있었다. 이는 한 대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나, 호선무라는 것은 그 전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당대의 기록에만 나타난다. 이때의 기록들을 보면 호선녀는 강국(康國), 미국(米國), 사국(史國), 구밀국(俱密國) 같은 나라의 명물이며 그들이 추는 춤, 곧 호선무 또한 이들 지역의 기예임일 알 수 있다.▶ 당대의 풍속이러한 당나라의 사치스러운 풍조는 모란의 유무에만 그치지 않았다. 당대의 풍속 중에 하나인 원소관등은 당나라 때의 유수한 연중행사 중에서도 화려하고 눈부시게 펼쳐졌다. 원소관등의 풍속이란 정월 15일 밤을 전후로 해서 며칠 동안 도시, 시골을 가리지 않고 등롱을 줄줄이 매달고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유희를 즐긴 것을 말한다. 이 날을 맞아 잘 차려 입은 남녀노소들은 달빛과 밝기를 다투는 그 등불을 좇아서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추면서 새벽이 되면 하나같이 시간이 가는 것을 애석해하였다. 이 원소 전후 며칠간은 시끌벅적함은 실로 굉장한 것으로 당대의 세시기(歲時記)를 빛내는 가장 호화로운 습속이었다. 이와 같은 풍속은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대하게 펼쳐졌다고 하니, 얼마나 요란하고 또 화려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 풍속이 이토록 성대하게 펼쳐지게 된 연유는 당시 당나라의 시대 상황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다. 현대 시대의 국가와는 달리 이전 시대의 국가들은 전쟁의 위협에 항상 직면하고 있었고, 정부로부터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이로 인해 야간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고, 이는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하지만 원소관등이 시행되는 이 며칠만큼은 발하나 승기 등의 풍습을 통해서 유희를 즐기기도 하였다. 여기서 발하란 줄다리기를 의미하고, 승기란 줄타기를 뜻한다. 발하라는 말은 당대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이 유희 자체는 훨씬 옛날부터 행해지던 것으로, 아마도 태곳적부터 내려온 민간의 습속이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이를 견구(牽鉤) 또는 시구(施鉤)라고도 부른 듯하며, 한수(漢水) 유역, 특히 양양(襄陽) 주변에서 주로 행해졌던 풍습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주변에서만 성행했던 풍습인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상원일에만 행해지고, 종교적 의미를 지녔으나 점점 그 의미가 퇴색되어, 놀이의 개념으로 변모하였다. 여기에 황제 또한 발하를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여, 줄을 당기는 자가 1천명이 이르기 까지 하였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단순한 유희나 경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이것이 하나의 신사(神事)로서, 다른 많은 겨루기와 마찬가지로 신의 의향을 점치는 예언의 한 형식이었다. 지금 현 시대의 우리가 아직도 하고 있는 줄다리기를 당시 당나라 사람들 또한 행했다고 하니, 나름 신기하고 동질감까지 느껴진다. 다만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줄을 잡아당기는 광경을 생각하니 정말 엄청난 장관을 방불케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승기는 줄 위에서 공이나 칼 따위를 던지면서 곡예를 부리는데, 주로 대도시의 시장이나 놀이마당 등에서 즐겨졌다고 한다. 이 놀이 또한 현대 시대에도 비슷하게 존속되어서 행해지고 있다. 높은 곳에서 외줄을 타고 걸어가거나, 혹은 도구를 통해 이동하는 행위가 이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들을 보면서 가슴을 졸이기도 하고, 환호를 보내기도 하는 데 당시 당의 사람들 또한 그러했다하니 시대와 상관없이 아찔한 행위를 보는 데 있어서 사람이 마음은 똑같은 것 같다. 승기라고 하면 보통은 줄타기를 가리키지만 때로는 예외적으로 약간 다른 것을 지칭하는 일도 있다. 다른 의미의 승기는 일종의 기술(奇術)로서의 의미와 환술로서의 의미이다.이러한 놀이 이외에 당대에는 자무라는 춤이 유행하였다. 자무란국 상류층의 애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무의 가장 큰 특징은 공연이 한창일 때 겉옷을 재 빨리 벗어 안에 입을 옷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춤을 진행하다가 어누 순간 춤추는 사람들의 의상 색을 급히 바꾸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당대 북중국의 이색 풍속 하나예로부터 중국에는 각 방면으로부터 외국문화가 들어왔는데, 그 중 서역 및 인도 계통의 문화를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 그러나 북방민족의 문화가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도 결코 등한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에 이제까지 그다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던 당대의 북방문화 수입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이속(異俗)이 하나 있다. 그것은 동절기 한파가 극심함 북중국 지방의 상류층 인사들이 북방 스텝 지역 유목민의 전장을 자기 집안에 쳐놓고 혹한이 닥치면 그 안에다 화로를 설치해 치주담론을 즐기는 도구로 삼았다는 것이다. 본래 추위가 혹심한 몽골 초원 등지에 발달한 펠트 천막이 완벽에 가까운 방한설비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이에 주목한 것은 중국인들 나름의 착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대의 여인모란에 이어서, 다음으로 흥미롭게 보았던 장은 ‘당대의 여인’ 부분이었다. 이미, 당나라의 대표적인 여성으로써 알려진 측천무후나 양귀비 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더욱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여기서는 당대 부인의 생활 전반에서 특히 눈에 띄는 특색을 서술하고 있다. 먼저 당대 여인들의 생활을 가볍게 훑어볼 때 눈에 띄는 특색은 용장활발(勇壯活潑)이라 할 정도로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유명한 명화 같은 것을 볼 때, 그 명화에 대한 사전지식이 어느 정도 있으면 감상하는 데 있어서 더욱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는 말처럼 말이다. 또한, 타구와 같은 운동을 비롯하여 사냥을 즐겨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대 여인들이 다른 시기의 여인들과는 달리 이러한 모습을 보인 데에는 당시 당의 사회적 흐름과 관련이 있다. 당대는 문에 비해 무가 존중되고 배경에는 측천무후 개인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당시 당에서 여인들을 대하는 풍조가 이전과는 남달랐다는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대의 도서(圖書)당시 장안은 책방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중당부터 만당에 걸쳐 역서(曆書) 등을 비롯한 음양잡설(陰陽雜說), 점몽(占夢), 상택(相宅), 오위(五緯), 구궁(九宮) 등 민간의 신앙 및 풍습에 결부된 속서(俗書) 종류나 자서, 운서 종류의 인쇄가 행해지면서 대량으로 산출되었던 이들 서적의 유포에는 상식적으로 책방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서적은 대부분 사본(寫本)이었다. 물론 대다수는 권축(卷軸)이었다. 이 권축으로 만들어진 도서를 서가에 배열할 떄 좀 신경을 쓰는 사람은 책을 몇 권씩 경질에 싸서 안배했을 것이다. 이 경질에도 온갖 사치를 부려 정교하게 만든 것이 있었으므로 상류층 장서가들 사이에서는 틀림없이 훌륭한 경질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수당시대의 이란 문화당대의 특색을 하나 꼽자면, 바로 국제적인 성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수많은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수많은 문물들이 당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란의 문화도 포함되어서 들어온다. 수당시대는 이란문화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대는 이란 문화로부터 종교, 회화, 조각, 건축, 음악을 비롯해서 의식주 부문에까지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원인은 수당시대에 들어서는 중앙아시아 방면이나 근동지방과의 교통이 점점 활발해져 북으로는 육로, 남으로는 해로를 따라 이란 계통의 여러 민족이 전대보다 더 많이 중국 각지로 들어왔다는 점과, 아라비아인 등 셈족 계통의 민족이 상인으로서 이슬람의 교세 확장과 함께 다수 동래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서방 여러 나라에서 국가사절을 따라 입조(入朝)하는 자나 장안과 낙양의 대학에 유학을 와서 공부하는 자 등도 상당수 되었다. 수당시대에 서역의 문물 특히 이란 지방의 그것이 중국에서 성행하게 된 것은 .
? 들어가며장안은 옛 고사나 시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중국의 도시로 지금은 서안이라고 불린다. 장안은 중국 왕조 역사상 가장 오랜 시기 왕조의 도읍으로서 역할을 하였는데 1077년 동안 왕도의 역할을 하였다. 장안에 대하여서 평소에 알고 있었던 것은 그저 왕도의 수도였다는 내용뿐이었는데 이번에 라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 세오 다츠히코가 제안하는 여러 가지 방법과 연구 성과들을 통해 장안의 역사를 살펴보고 21세기에서 8세기~9세기 장안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장안의 봄을 읽은 후 이 책을 집었을 때에는 이 책에서는 장안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물론 장안의 봄은 문학작품을 모아둔 것이기 때문에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다. 장안의 봄에서는 장안의 문화와 풍속, 사람들이 사는 모습 등을 중심 내용으로 글을 썼듯이 이 책에서는 장안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이 책을 서술했을지가 궁금하였다. 처음에는 장안의 또 다른 모습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본론▶ 유라시아 대륙의 세 왕도장안의 역사를 연구할 때 장안이 자리 잡은 관중평야가 농업 유목 접경선에 접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관중 평야는 유라시아 대륙 동부 농경지대와 유목지대의 접경 지역에 있기 때문에 농목 복합에 기반을 둔 중국 고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고 이곳을 무대로 수 천 년의 역사가 여러 층으로 복잡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장안의 도시계획의 특색을 알기 위해 먼저는 중국역사의 특성을 이해해야 하는데 중국의 역사는 내 중국과 외 중국이 서로 조합하며 변천해 나간 과정이다. 내 중국과 외 중국이라는 구성은 7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발생한 동아시아의 변동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 공간의 다양한 형태의 조합이 중국이라는 공간구조를 변화시켰다. 이러한 공간구조의 변화는 왕도의 입지 변천에 영향을 끼쳤는데 중국사 전기에는 왕도가 동서 방향으로 입지하지만 후기에는 남북방향으로 입지하게 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왕도의 입지는 유라시아 동부의 공간 구성과 역사 전개에 따라 규경제 동향의 지표가 된다. 그리고 중국의 대표적인 왕도 변천이 유라시아 동부에 일어난 역사적 변동의 한 단면을 상징하기 때문에 왕도의 입지를 보면 역사를 볼 수 있다.▶ 장안은 우주의 왕도로서 설계되었다.수?당 장안성만이 아니라 세계 각 지역에 존재하는 왕도의 기능과 의미를 살펴 볼 때 근대 국가와 전근대 국가에서 수도가 행하는 기능과 상징이 다르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근대 국가의 수도는 그 나라의 중앙정부가 있고 국가 원수가 거주하는 도시를 가리키며 그 특색은 군사와 정치 측면에서 중추적 관리 기능을 하는데 이에 비해 전근대 국가의 왕도는 수많은 군사 거점 중 하나에 불과하며 군사?정치권력이 유일하게 집중된 곳도 아니다. 이에 지배자는 왕도를 하늘이나 신이 정통성을 부여한 도시라고 연출함으로써 왕도의 위상을 명확히 나타냄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군사력 집중도가 낮은 상황을 상징으로 힘으로 극복하고 있는데 중국의 사례를 보면 중국에서 왕도는 관념적으로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천자, 곧 황제의 거주지이자 하늘의 중심에 대응하는 우주의 도시로 신성하게 여겼다. 전근대에 황제와 그의 피지배자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은 지배계급이나 정권에서 이득을 얻은 유복한 계층으로 주민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통치자에 대해 바라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었기에 왕조 의례를 거행함으로서 공유의식을 도모하고자 했다.수의 대흥성은 서진 말 염가의 난 이후 260년이 넘는 오랜 분열 시대가 끝나고 유라시아 동부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는 오랜 분열 상태에서 벗어나 재통일로 향하는 조짐이 있었지만 정세는 여전히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러한 시기에 건설된 대흥성에서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살필 수 있는데 대흥성 건설의 주체가 오호 십육국 이래 유목 정권의 계보를 잇는 군사 지도자층이며 북위 평성에서 수 대흥성에 이르기까지 유목 정권의 도성 문화에 일관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장안성은 수 대흥성 기초 위에 일부를 개축한 것으로 특히 당 변화는 없다. 그래서 수 대흥성과 당 장안성을 합쳐 장안이라 부르기로 한다.장안은 그 규모가 금원을 제외하더라도 동서 9721미터 남북8651.7미터에 이르는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의 격자형 계획도시이다. 장안성은 궁성과 궁성 뒤편으로 널리 펼쳐진 금원, 관청인 황성, 관료와 일반인의 거주 지역인 외곽성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수 대흥성의 건설 예정지는 군사적 목적이나 방어상의 편리성, 자연환경, 성곽의 규모 등을 고려하여 옛 장안성 동남부의 구릉지대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장소를 결정하고 남북축의 기준점을 결정한 후 전통적인 측정법으로 남북 방위를 정확하게 결정하여 궁전의 위치를 정하였는데 중국에서는 태양을 이용하는 방법과 북극성을 이용하는 방법 두 가지를 병용하였다. 궁성조영과 아울러 궁성을 방어하기 위해 궁성 북쪽에 광활한 금원인 대흥원이 조성되고 이어 관청가인 황성이 조영되었다. 마지막 공사로 외곽성이 조영되면 왕도 공사가 완료된다.이어 대흥성의 궁성, 금원, 황성, 외곽성의 특색을 살펴보면 황성은 두 부분으로 구성 되었는데 수?당 왕조의 중앙관청과 동궁의 관청이 그것이다. 여러 관청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있다. 장안성의 도시계획의 큰 특색은 금원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격자형으로 분할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동서고금에 널리 존재한 격자형 도시 계획의 특징을 살펴보면 1) 가장 초보적인 측량도구와 기술로 설계가 가능하다. 2) 토지의 분배와 소유, 조세 부과가 편리하다. 3) 군사적 정치적 지배와 관리가 쉽다. 4) 도시계획의 기본적 형태를 변경하지 않은 채 시가지를 차례차례로 밖으로 확대할 수 있다. 5) 사각 형태의 건축물을 가장 조밀하게 수용할 수 있는 건축상의 이점이 있다. 6) 한정된 고밀도 도시 공간에 주민 거주지를 효율적으로 분포시킬 수 있다. 등인데 격자형 계획도시는 일반적으로 이주자가 새로운 지배 지역에 도시를 건설할 때 탄생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장안성은 몽골초원에서 화북으로 이주한 선비족 탁발부와 그 후예들이 로 건설 한 것이다.수?당 장안성에는 당시의 다양한 전통 사상이 곳곳에 유기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지상에 있는 우주의 거울로 왕도를 건설한다는 천문사상, 왕조 의례의 무대로 왕도를 짓는다는 예사사상, 중국 고래로 주례가 제시한 이상 도시의 모델,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 왕자에게 적합한 토지인지를 감정하는 역경 사상이다. 수?당 장안성은 이러한 중국전통사상이 격자형 도시계획 공간에 유연하게 반영되어있다.왕도 장안은 초자연적인 신이나 우주의 힘과 직결된 왕권의 소재지로 설계 되었고 지배의 정통성을 도모하는 의례 도시의 기능을 하였고 불교 도시로 건설되었다. 불교는 수?당 왕조의례에서 유교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유교에 의거한 왕조 의례에는 당연히 불교의례에 관한 내용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중국사에서 북위, 요, 금, 원, 청과 같은 유목계 비한족 정권이 모두 일관되게 불교를 믿어 각종 불교사원을 중국의 전통적인 교사가 거행되지 않을 때에도 왕조 의례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불교는 중국내부에서 발생한 종교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세계 종교였기 때문에 비한족 정권의 정통성을 보증해 줄 수 있었다. 왕조와 황제의 행사에 불교 의례가 빠짐없이 치러졌고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이나 황태자 탄생, 황제의 선조에 대한 제사에 불교도고 꼭 참석했다.583년 새롭게 건설된 수 대흥성과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904년에 붕괴된 당 장안성은 중국의 왕도 가운데 대표적인 건설도시이다. 광대한 면적과 복잡한 민족 구성, 다양한 풍토와 지역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의 통치 공간에는 서로 다른 역사가 내포되어 있어 제국의 왕도는 통치공간의 행정적이며 상징적인 중심이 되어야만했고 정치권력이 지배의 정통성을 도모하는 주요 무대였다. 중국 역대 왕조의 왕도에는 관료기구가 주요한 위치에 배치되었다. 그와 더불어 왕도는 왕조 의례의 중심지에 어울리도록 설계되고 건축되어 왕권의 정통성을 다지는 다양한 상징과 의례로 꾸며졌다. 중국의 왕도는 장소이기에 왕조내의 다른 도시와 다르게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으며 의례에 따른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주민이 장안을 생활 도시로 만들었다.황제가 항상 거주하는 궁전이 도시계획상 중추였던 시기에 태극궁에서 대명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저 궁전의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안성 안의 정치 공간과 사회 공간 구성의 재편을 재촉하는 요인이 되었고 8세기 정치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명궁이 태극궁을 대신하여 황제가 일상적으로 거주하는 궁전으로 확정된 것은 안사의 난 당시 함락당한 장안을 지덕 2년(至德, 757)에 숙종이 수복한 이후부터이다. 그리고 장안의 대명궁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전개됨과 동시에 낙양성은 중앙정치 무대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대명궁의 건축 구조는 1) 군사 방위 구조의 강화 2) 내정에서 행정, 재정, 군사기관의 증대 3) 왕조의례의 대규모화 4) 도교 관련 건축물의 돌출이 그 특징이다.수?당 초 장안성은 수?당 왕조가 우주의 왕도라는 상징성을 내세워 군사력으로 지방 정권을 재통일한 선비계의 지방 정권을 중국의 정통 왕권으로 변환시키려는 장치였다. 군사?입법 ?사법?행정 등 여러 기관이 장안에 밀집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정치와 경제의 기능이 왕도에 집중한 것은 오히려 대외적으로 당조에 세력이 약화된 후기부터다. 이렇듯 역사의 흐름은 장안의 역사 속에 집약되어 있다.이에 9세기 장안에 초점을 맞춰 장안의 도시 문화의 변천에 대해 살펴보면 8세기 말부터 9세기 전기 사이에 후대에 직접 계승된 행정과 재정의 원형이 왕도 장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황제 직속의 행정기관과 재정기관이 설치되었고 9세기의 장안은 사상이나 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위치를 다져나갔다. 사상적으로는 유교경전을 재해석하려는 신유교의 흐름이 빠르게 일어났고 불교에서도 새로운 동향이 등장하였다.이렇게 4세기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흐름을 간단히 논한다면, 문화의 주류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공유된 유목민의 보편지향의 문화에서 중국 고유의 한이 전통 문화 지향의 문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