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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상섭의 효풍을 통해 본 1948년 중간파의 다면적 모습
    염상섭의 『효풍』을 통해 본 1948년 중간파의 다면적 모습-목차-1. 서론2. 본론2-1. 좌우에 낀 세력으로서의 중간파2-2. 병직의 월북비용2-3. 소설 내에서 표상된 다양한 중간파의 모습3. 결론4. 참고문헌1. 서론염상섭의 『효풍』은 해방정국 당시의 혼란했던 사회상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효풍』의 소제목들만을 보더라도 - 당세풍경(p22), 검속(p61), 청춘의 괴롬(p69), 충돌(p.135), 변심(p171) 등 당시 염상섭이 소설 속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효풍』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세 가지 정치적 관계를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꼽아보자면 좌파인 화순과 그에 동조하는 논지를 가진 A신문사, 우파를 상징하고 자본주의를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인 베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견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간파 병직과 혜란이 있다. 물론 『효풍』에는 이들 말고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술집 마담부터 시작해서 골동품상 주인, 형사, 도회의원을 지낸 경력의 노인 등 등 마치 해방정국의 혼란한 한국사회를 그대로 반영해 놓은 듯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각각의 정체성을 지니고 갈등을 일으킨다.개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중간파’들의 존재는 조금 더 특별하다. 어떤 인물은 좌, 우와 관계하며 그 사이에서 붕 뜬 존재로 그려지지만, 또 어떤 이들은 좌, 우의 대립과는 영 거리가 멀다. 적극적으로 무언가에 참여하려는 존재가 있는 반면, 또 개인의 안위와 처신에만 몰두하는 인물 역시 존재한다.필자는 ‘중간파’라는 존재가 가지는 이름값은 어떤 것이었을까에 대한 물음에 집중하여 소설 『효풍』을 분석해보고자 한다.2-1. 좌우에 낀 세력으로서의 중간파1948년은 좌우 합작과 남북 총선거가 추진된, 해방 이후 민족의 향방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 시기다. 이런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 ‘중간파’라 명명된 이들은 기존의 공산주의적 입장에서 정의된 ‘기회주의적 집단’이라기보다 남북 통일 국가 건설이라는 분명한 아젠다를 설정하고 이룩하려는 집소련과 미국이라는 해방 이후 신제국주의 체제의 강대국들이 조선반도를 통치하는 수단의 부산물이기도 했지만 그에 결탁하여 국내 정치에 입지를 다지려는 좌파와 우파 정치인들의 자의적인 행동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중간’파라는 단어가 이도 저도 아닌 듯한,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집단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역시 지금에 와서 보면 해방 이후 좌우와 미소가 행한 중간파에 대한 일방적 ‘정의하기’ 작업의 발로일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그들에 의해 행해진 중간파에 대한 폭력적 정의는 일견 성공하여, 국민들에게 그 후 수 십년 간 벌어진 한국 사회의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중간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무책임하다’는 극단적 스탠스를 취하게 만들었다.염상섭은 소설 『효풍』에서 미군정과 우익의 입맛에 맞춰 의도적으로 오인되고 있던 중간파를 전면에 등장시키는데 이는 당시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좌/우의 극명한 이분법적 대립의 시대가 아닌, 그 사이에 끼어 민족의 통일과 합작을 염원하는 세력이 분명 존재했던 시대라는 것을 표면에 부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효풍』에서는 다양한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크게는 화순을 위시한 A 신문사 기자들, 즉 좌익계열 인물들과 미국을 대표하며 “존경할 인격자라고 나는 믿는데 빨갱일 리가 있나요!”라고 말하는 미국인 베커를 중심으로, 어쩌면 진실로 ‘기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병직의 아버지인 박종렬 등의 우익계열 인물들 그리고 작중에서 서사의 중심에 위치하는 혜란과 병직 등의 중간파적 인물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염상섭이 단순하게 이런 삼분법적 관점에서 중간파를 다룬 것이 아니라, 하나로 범주화된 것이 아닌 여러 층위와 면을 가진 중간파를 소설 속에서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효풍』을 다뤄볼 생각이다.2-2. 병직의 월북비용병직은 화순과의 좌파적 활동의 일환인 월북을 위해 총 두 번 급전을 빌린다. 첫 번째는 병직이 혜란이와의 데이트 과정에서 괴한으로부터의 일방적 폭력이 있이면서 친구인 태환에게 오 만원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급전 마련의 통로는 다름 아닌 아버지 박종렬 영감이다. 장세진은 「재현의 사각지대 혹은 해방기 ‘중간파’의 행방」에서 이 대목을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며 좌우 합작 운동을 하는 병직이 일제 때 도회 의원까지 지낸 친일파 아버지의 돈을 월북비용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아무래도 사상적으로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오히려 극단에 위치해 있는 두 인물에게서 마치 일제 시대 친일파 아버지의 재산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어쩌면 모순된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 좌익 활동의 밑천인 오만원은 친일파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손쉽게 나온다. 그러나 두 번째 급전은, 혜란이에게 부탁한 십 만원이다. 먼젓번보다 더 큰 액수의 이 돈은 친일파인 아버지의 주머니에서가 아니라 혜란이의 고군분투로 인해 마련된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가장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요각의 주인 이진석에게 빌린 오 만원과 일본인이면서 해방 이후 조선인 남편과 함께 조선에 남은 술집 마담 가네코에게 오 만원을 변통하여 채워 보낸다. 소설속에서 레디쉬 운동을 하려는 병직이 친일파인 아버지의 재산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연인 혜란에게서 빌린, 혜란이가 마련해준 십만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물음이 남는다. 중간파로서 좌나 우에 기대기도 하지만 같은 중간 입장의 인물에게 역시 손을 벌리는 모습은 당시 중간파의 중간자적 모습에서 기인한 것일 것이다. 당시의 국내 경제 상황을 살펴 보면 10만원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담배는 국가에서 전매하는 품목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사제 담배가 흔하게 팔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전매공장에서의 근로소득만 가지고는 먹고 살 수가 없는 직공들이 약간 원료를 들고 나가서 팔아먹는 것’이었으니, 국가 주도의 전매사업이 이토록 허술할 정도였다면 당시 파탄 직전의 경제상황을 상상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혜한’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하고자 시행한 총선거인 것이다. 허나 이것은 이름만 ‘총선거’일뿐이고 실상은 반쪽짜리 선거, 거기에 남한에서조차 ‘일당일파만이 참가한 선거’였던 것이다. 이렇게 갈라질대로 갈라져버린 좌와 우를 보며 중간파는 더 이상 그들에게 기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병직은 이런 남쪽만의 선거를 막기 위해 월북을 도모했지만, 좌와 우의 대립 속에서 어렵게 빌린 10만원과 함께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2-3. 소설 내에서 표상된 다양한 중간파의 모습필자는 염상섭의 『효풍』에서 나타나는 중간파의 모습이 단면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여러 유형별로 나눠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효풍』에서의 중간파는 여러 모습을 보인다. 아무래도 중간파라는 위치가 주는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작가의 의도적인 설정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령 과거에 영어 선생이었으며 나름 박식하면서 현재는 고물상의 지배인격 여직원인, 병직의 사랑과 결혼을 염원하는 혜란을 중간파의 한 유형으로 들 수 있고, 분명한 좌익활동가인 화순과 상술한 혜란이 사이에서 부유하는 병직을, 그리고 자칭이자 타칭으로 일두양이주의자라고 하지만 좌파와 우파의 구별만큼 확실한 입장을 가진 다방골집 마담 조정원 등을 들 수 있다. 염상섭은 이들을 통해 당시 여러 입장을 가진 중간파의 모습을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중간파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스펙트럼이 넓기도 하지만 염상섭이 보여주려는 것은 그런 다양한 중간파들의 존재가 당시 좌, 우의 이분법적 대립 속에서도 끊임없이 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개중에서도 병직과 정원은 행동하는 중간파라고 볼 수 있는 반면, 혜란은 ‘도대체 좌우니 중립이니 하는 섣부른 정치담이 듣기에 귀살머리쩍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좌, 우와 중간파의 대립각 자체에 의문을 느끼고 있는 인물이며 의외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사상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보이지 않는다. 화순과 베커, 박종렬는 염상섭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바로 혜란이에게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해방 이후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민족의 통일이 신제국주의 강대국들에 의해, 국내의 정치 세력들로 인해 무차별하게 분열되는 모습을 보며 염상섭은 혜란과 같은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다. 민족의 통일과 발전에 있어서 좌/우의 대립이니 중도, 중추니 하는 것은 꼴사나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직은 다르다. 병직은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 강국에 의해 분단되어 남과 북의 민중들이 서로를 반대할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을 두고만 보려는 인물이 아니다. 끊임없이 당시의 상황을 부정하고 타개하려는 행동하는 중간파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상술했듯이 혜란은 평범한 서민을 대변하는 중간자적 인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좌도 우도 아닌 ‘우리’이다. 귀살머리쩍은 일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그녀를 보며 우리는 당시 많은 민중들이 분단으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중간파의 또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인물로 다방골의 마담 조정원을 들 수 있다. 그녀는 좀 더 좌익 쪽의 가까운 인물로, 화순과 병직 등이 월북하는 것에 도움을 주고, 좌파 이동민을 잡으러 온 형사에게 위치를 숨겨주는 등 이들 일행에게 여러 도움을 준다. 스스로를 ‘일두양이주의자‘라고 부르며 좌나 우 모두에 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여류과학자이자 인텔리로서 술집을 경영하며 돈에는 연연하지 않는 조정원은 “그 잘난 중립과 과붓집 무엇 내세운 듯이 인젠 그만 내세우“하며 쏘아붙이는 화순에게도 친절을 베풀며 전적으로 넓은 아량을 보인다. 이런 조정원이 좌파에 조금 더 가까운 중립파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가네코라는 인물은 조금 더 우파쪽에 가까운 중간파의 모습을 보인다. 일본인 여자로서 해방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요정을 경영하는 가네코는 당시 중간파 지식인들의 눈에는 ”전재민들이 해방의 조국이라고다.
    인문/어학| 2018.07.04| 5페이지| 2,500원| 조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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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강록渡江錄」과 「관내정사關內程史」을 통해 본 『열하일기熱河日記』의 한 특성
    「도강록渡江錄」과 「관내정사關內程史」을 통해 본 『열하일기熱河日記』의 한 특성-구현된 소설적 문체와 관련하여--목차-1. 서론2. 본론2-1. 『열하일기熱河日記』의 구성2-2. 「도강록渡江錄」과 「관내정사關內程史」에 구현 된 기법 양상2-3. 소품체와 문체반정3. 결론4. 참고문헌1. 서론18세기와 함께 성리학은 그 생명을 다했고, 현실을 변화시킬 것을 주장하는 비판적 지식인인 '실학파'가 등장한다. 이런 실학자들은 학문적 선호와 사상적인 지향에 따라 크게 성호학파와 연암학파를 대표로 나뉘는데, 반계 유형원을 비조로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성호학파는 공공재인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한 민생안정 등 정치와 경제 제도의 개혁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홍대용, 박제가 등의 연암학파는 한양에 모여 거주하면서 상공업의 발달과 이용후생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이러한 실학자들 중에서도 연암 박지원은 그 자신만의 문체인 연암체(燕巖體)를 사용하여 연행록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다. 소품체라 일컬어지는 연암체에서는 소설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데, 『열하일기熱河日記』 역시 기존의 연행록들과는 다르게 이런 소설적 표현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정조는 이러한 패사소품체의 문풍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위 말하는 문체반정이라는 정책을 시행했다.연암은 자신의 연행록을 저술하면서 몇 가지 기존과는 다른 식의 서술방식을 취했다. 상술했듯, 소품체라고 불리며 당대 고문의 문풍이 아닌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 이 글쓰기 특징은 그의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을 고스란히 담아내기에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과연 연암의 글에서 찾을 수 있는 ‘소설적 문체’란 무엇인가. ‘소설적’이라 함은 크게 ‘허구적’인 내용으로 글이 구성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연암의 글에서 주목한 ‘소설적’ 문체는 그런 허구적 성격의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담아내는 ‘표현 방식’이다. 가령 연암은 기존 연행록들이 담백한 사실의 나열로 이뤄진삶의 모습에 대한 세심한 관찰 등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청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의식주의 모습, 그 중에서도 집의 구조와 건축 방식, 사용된 재료 등 주거문화에 대해서는 더욱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또한 압록강을 건너고 구련성을 향해 가면서는 발밑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너른 들판을 보고, 고구려의 국내성을 떠올렸고, 옛 봉황성의 터에서는 과거 고구려의 안시성 싸움을 회상해 보며 평양과 패수의 구체적인 위치를 관련 자료를 근거로 고증해 보는 등 우리나라 땅에 대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其?瓦之法 尤爲可效 瓦之體如正圓之竹而四破之 其一瓦之大 恰比兩掌 民家不用?鴦瓦 椽上不構散木 直鋪數重蘆? 然後覆瓦 ?上不藉泥土 一仰一覆 相爲雌雄 縫瓦亦以石灰之泥 鱗級膠貼 自無雀鼠之穿屋 最忌上重下虛 我東?瓦之法 與此全異 屋上厚鋪泥土 故上重 墻壁不?築 四柱無倚 故下虛 瓦?過大 故過彎 過彎故自多空處 不得不補以泥土 泥土厭重 已有棟撓之患 泥土一乾 則瓦底自浮 鱗級流退 乃生?隙 已不禁風透雨漏 雀穿鼠竄 蛇繆??之患기와를 이는 법은 더구나 본받을 만한 것이 많다. 모양은 마치 동그란 통대를 네 쪽으로 쪼개 놓은 것과 같고 그 크기는 두 손바닥만 하다. 보통 민가에는 원앙와를 쓰지 않으며, 서까래위에는 산자를 엮지 않고 삿자리를 몇 잎씩 펼 뿐이요, 진흙을 두지 않고 곧장 기와를 인다.---중략---우리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와는 아주 달라 지붕에는 진흙을 잔뜩 올리고 보니 위가 무겁고, 바람벽은 벽돌로 쌓아 회로 때우지 않고 보니, 네 기둥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아래가 허하게 된다. 기왓장은 너무 크고 지나치게 굽기 때문에, 저절로 빈 데가 많게 되니 진흙으로 메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흙이 내리 누르니 기둥이 휘어지는 병폐가 생기고, 젖은 것이 마르면 기와 밑이 저절로 떠서 비늘 진 곳이 물러나며 틈서리가 생기게 된다. 이리하여 바람이 들며, 비가 새고, 새가 뚫으며, 쥐가 숨고, 뱀이 서리며, 고양이가 뒤적이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특히 그가 평소 표현하고자 했던 실리적 의님의 배치한 명리가 아닐 수 없겠다.연암은 을 통해 당시 모순된 사회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선비 중에 염치를 모르는 자”는 승냥이나 이리같은 비열한 동물들마저 먹기를 꺼려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연암이 부패한 지배 계급들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연행록의 한 대목에 당시 떠돌던 이야기를 옮겨 적는 것에서 독자들은 철저히 연암의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구태여 직접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이야기에 빗대어 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해 내는,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글을 대신 옮김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도도하게 우회하여 피력하는 그의 서술방식은 직접적인 충격이 아닌, 은연중에 피어오르는 자기반성을 끄집어낸다.2-2. 「관내정사關內程史」와 「도강록渡江錄」에 구현된 기법 양상『열하일기熱河日記』의 문체가 다른 기행문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대화체나 묘사 등의 소설기법을 비교적 빈번히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암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자세한 묘사를 통해 마치 눈앞에 그리듯 생생히 표현했는데, 이런 묘사 장면을 우선 「도강록渡江錄」편에서 찾아 볼 수 있다.馬紫?而白題 脛瘦而蹄高 頭銳而腰短 ?其雙耳 眞有萬里之想矣 昌大前控 張福後囑 鞍掛雙囊 左硯右鏡 筆二墨一 小空冊四卷 程里錄一軸 行裝至輕 搜檢雖嚴 可以無虞矣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쫑긋한 품이 참으로 만 리를 달릴 듯 싶다. 창대는 앞에서 견마를 잡고 장복은 뒤에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異程錄)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짐 수색이 아무리 엄하다 한들 근심할 것이 없었다.위에서 보듯 연암의 표현 방식은 대상의 특징 부분화와 그것의 나열이다.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의 특징적인 면을 부분으로 나눈 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데 그의 문장을 읽으면 마치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나가듯 떠오른다. 대상을 冒雨疾追이때 별안간 말몰이꾼 하나가 알몸으로 뛰어드는데 머리엔 다 해어진 벙거지를 쓰고 허리 아래엔 겨우 한 조각의 헝겊을 가렸을 뿐이어서 그 꼴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 그야말로 흉측했다. 마루에 있던 여인들이 왁자그르르 웃고 지껄이다가 그 꼴을 보고는 모두 일거리를 버리고 도망쳐버린다. 주인이 몸을 기울여 이 광경을 내다보고는 얼굴빛을 붉히더니 교의에서 벌떡 뛰어내려 팔을 걷어붙이고 철썩하며 그의 뺨을 한 대 때렸다. 말몰이꾼은 “말이 허기가 져서 보리 찌꺼기를 사러 왔는데 당신은 왜 공연히 사람을 치오?” 하자, 주인은 “이 녀석, 예의도 모르는 녀석, 어찌 알몸으로 당돌하게 구는 거야?” 한다. 말몰이꾼이 문밖으로 뛰어나갔으나 주인은 오히려 분이 풀리지 않아서 비를 무릅쓰고 뒤를 쫓아 나갔다.이렇게 그는 여행 도중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장면 중심으로 묘사함으로써 눈앞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생생히 재현하고 있다. 소설적 표현 기법을 쓸 때에는 백화문을 이용한 대화체를 빈번히 구사하는데, 이는 다른 연행록류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만하다. 백화문이라는 것 자체가 당시 지식인층이 주로 사용하던 문언문에 반하는 대중적인 언어로서 문법에 구애받지 않고 아는 한자만 있으면 말하는 대로 적는,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이 가능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대화체를 통한 현실감 있는 재구성은 연암이 벽 위에 걸려있던 한 편의 기문, 을 보고 그것을 옮겨 가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余復問此先生所作否 沈掉頭曰 有如明燭 俺長齋奉佛 懺誡?妄 余囑鄭君 自中間起筆 余從頭寫下 沈問先生謄此何爲 余曰 歸令國人一讀 當捧腹軒渠 ??絶倒 噴飯如飛蜂 絶纓如拉朽나는 다시, “이게 선생이 지으신 게 아니오?” 하였더니, 심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는 거짓이 없기가 마치 저 밝은 촛불과 같답니다. 전 오래 전부터 부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부질없는 말은 삼가고 있습니다.”한다. 나는 그제야 정 군에게 부탁하여 그 한가운데에서 쓰기을 치고 앞으로 나서며, “무슨 말입니까?”하고 묻기에, “항우가 아무리 큰 소리를 지르기로서니 어떻게 천둥치는 소리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기에는 항우가 고함을 치자 적천후 양무의 부하와 말들이 모두 놀라서 몇 리를 뒤로 물러났다 했으니, 이는 모두 거짓말이네. 또 항우가 아무리 성이 나서 눈을 부릅뜨기로서니 번갯불만은 못할 터인데, 항우가 눈을 부릅뜨자 여마동이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니 더욱 믿지 못할 일이네.”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위 인용문은 연암이 청국에서 천둥과 비바람을 겪으며 있었던 일을 호기롭게 표현한 부분인데, 옛 고사를 인용하며 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시 유교 사대부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이 사마천의 를 비롯하여 옛 고서들을 진리인양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당연히 그에도 과장과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당시 지식인들이 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믿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암처럼 이렇게 사행길의 경험을 적은 연행록에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비판적인 생각을 담아내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열하일기』에서는 그의 비판적인 사고방식 또한 엿볼 수 있다. 그저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저서에 표현하는 연암의 반항적인 글쓰기 방식은 단연 정조의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2-3. 소품체, 문체반정문체반정은 정조 때에 유행한 문예운동을 일컫는 것으로, 한문 문체를 개혁하여 순정고문(醇正古文), 즉 옛 글쓰기 방식으로 환원시키려 한 주장 및 그 사업을 말하며 때문에 문체순정이라고도 한다. 문체반정이라는 표현은 후세의 연구자들에 의해 붙여진 명칭으로 정조의 정치적 목적성에 초점을 맞춘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명말 청초의 문집과 패관 소설이라고 불린 잡서들의 영향으로 글을 읽을 수 있는 식자층, 즉 당대 양반 사회에서 이러한 문체가 유행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실행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주도로 그 당시 유행한 박지원 일파의 참신한 문체를 대표다.
    국어국문학| 2018.07.04| 9페이지| 5,000원| 조회(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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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어가는 사탄
    죽어가는 사탄중세시대 서양에서 기독교는 국가권력보다 큰 힘을 가지기도 할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권위는 과거와 비교해서 확연히 약해진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제프리 버튼 러셀의 저서 의 4장 에서는 기독교가 힘을 잃어가는 시기의 관한 일들을 말하고 있다. 이는 그 시기의 기독교를 당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어떤 인식이 퍼졌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종교가 쇠퇴해가는 과정에서 교리의 일부분인 악마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야기한다.-제수이트 (18세기)철학자들보다 앞서 기독교 사상가들 중 제수이트들이 먼저 기독교의 세속화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자연계는 종교적 관념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인 채로 있는 것이고, 종교는 그 안에서 핵심적인 것이기 보다는 부가적인 것이 된다. 당시 많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기독교를 지지하긴 했지만 철학이나 과학을 하는 데에 기독교적인 논리가 필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계몽주의 (18세기)또한 계몽주의에 의해 제도화된 종교, 교회라는 종교의 매체를 비판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교회의 권위적이고 관습적인 모습, 제식에 얽매여 위선적이고 편협해진 모습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의 권위는 상당히 위태로워졌는데, 여기에 저항하려 한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인 종교 특유의 계시와 같은 인식론을 포기하고 경험론적인 것들, 자신들을 약하게 한 것들의 틀 안에 도망치려 해 오히려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였다.-광교주의 (17세기~18세기 초)이런 기독교의 모습에서 사회와의 타협은 이미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광교주의자들에게 신앙이란 아주 단순한 것으로 “그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에게 기도하게 하는 것일 뿐”이었다. 여기에는 원죄, 구원, 부활, 악마와 같은 구체적인 개념은 거추장스러운 첨가물에 지나지 않았다.이런 광교주의는 이신론으로 확장되어 대륙까지 퍼져나갔다. 그들은 그저 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성경, 관습, 기적, 계시 등을 버리며, 어떤 이들은 기독교 자체를 부인하였으나 이미 약화된 기독교적 관념과 그것은 큰 차이가 없었다.뒤에서는 이런 과정을 이끈 담론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며, 그런 배경 속에서 라는 작품에 악마가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 분석해볼 것이다.~~~~라는 식으로 서론 씀-------------서론-----------------------------기존의 교회의 입장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을 고집하던 기존의 교회에서도 조정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때 기독교도들은 알렉산더 포프로 대표되는 낙관론을 받아들였다. 그는 신의 전능함에 기인하여 이 세계는 완벽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였다. 따라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타당하다. 여기에는 악마저 포함된다. 관념적인, 형이상학적인 악은 가장 위대한 것, 신의 지선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 반대의 미천함으로써 필요하다. 세계에서 관찰되는 악은 우리가 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인간이 도덕적이지 못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낙관론에서는 도덕적 교정을 통해 신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된다.-이에 대한 비판, 비관론이런 낙관론에 반대하여 악이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는 자연의 힘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입장이 등장했다. 이 시기에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종교가 세속화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계몽주의자들은 그들의 지적 의식을 발전시켜가며 그 과정에 따라 점차 기독교를 부인해갔다.그들의 논리는 먼저 이 세계의 움직임을 유지하는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성격까지는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한다. 이런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교리문이나 과하게 나아간 광신, 미신 등은 악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이다.이런 논리 안에서 우리는 신을 알 수 없으니 절대적인 선과 악에 대해서도 알 수 없어진다. 그러나 이 세상의 악은 척결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인간의 진보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종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다.여기서 악의 문제로 다시 넘어가면, 당연하게도 기독교의 교리에 나오는 악마가 그것을 만들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악마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저열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보다 악의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였던 것이다.그들이 세계를 보는 관점은 종교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연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관찰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 자연에는 인간의 척도로 잴 수 없다는 성격이 생기는데, 여기에는 악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이는 나중에 사드로부터 문제가 불거져 나오게 된다.)-데이비드 흄흄에 의해 악마에 대한 믿음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인간의 이성은 이 세계의 진리를 포착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실재를 우리의 정확하지 않은 인식을 통해 관찰하고 구성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는 것은 경험으로써 알게 된 것들 뿐이다. 이에 따라서 당연히 관찰되지 않는 것, 초월적인 신에 대한 이야기도 의미가 없어진다.그는 또한 종교란 결국 인간의 희망이나 두려움을 외적인 대상에 전가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심리적인 관점과, 애니미즘과 같은 자연발생적인 인간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역사적 관점을 제시한다.또한 그는 기적에 관해서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종교의 생존 가능성 역시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기독교의 기적, 대표적으로 부활과 같은 것은 인간의 경험에 의해 관찰된 적이 없는 현상이다. 성경에서 그것을 증언하고는 있지만, 그 이후 수없이 많은 경우에서 그렇지 않은 모습을 경험해왔기에 부활이라는 개념은 무시될 수 있다.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의 경험은 100%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해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그 예외의 경우를 믿고 종교를 따를 수는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관찰된 적이 없다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논리들 사이에서 흄의 입장은 사실 애매한 채로 남게 된다.흄이 말하는 악의 존재에 대한 입장은 기독교의 전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 우주에는 분명히 악이 존재하는데 완전한 존재인 신이 이것을 용인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이런 주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지각, 이성으로 인해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제거했다. 이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신의 교리의 부수적 부분인 악마 역시 의미가 없어졌다.-임마누엘 칸트칸트 역시 흄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연을 관찰하여 구성해낸 것들뿐이고, 그런 식으로 구성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은 이야기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악 역시 기독교의 악마론에서는 거리가 멀다.그는 악을 죄, 고통, 부당함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분류했다. 죄를 만든 것은 인간이고, 이것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에 의한 악이 아닌, 인간의 부도덕성에 의한 악이다. 이런 생각은 이후 무신론자들에 의해 논쟁적으로 이용된다.-과학과 역사에 의한 전통적 기독교의 파괴뉴턴은 본인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나 그의 경험론적 견해는 종교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과학주의로 이어졌다. 모든 지식은 과학적이고 경험적이고 정량적이라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역사의 출현 역시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였다. 역사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 이 우주에 대한 견해는 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문학, 우주론, 지질학 등에서 이루어진 시간에 대한 연구는 그 변화를 알게 하였고, 이는 진화론으로 이어졌다. 이런 우주의 거대함 속에서 성경의 이야기는 신빙성을 잃었고, 이는 기독교의 근간이 훼손되는 일이었다.이런 부정할 수 없는 과학주의나 역사를 마주하고 기독교인들은 그것들 안에 자신들의 종교 역시 집어넣는 타협안을 생각했다. 이는 성서를 있는 그대로, 초월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서비평가들의 말에 따라 역사적인 이야기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초월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종교가 그것을 포기한다면 그 시도는 애초에 제대로 굴러갈 길이 없었던 것으로, 물론 실패하게 된다.-이후 기독교, 악마에 대한 인식이런 배경 안에서 이제 인간은 기독교나 악마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은 초월적인 무언가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전에 그것이라고 착각하고 만들었던 개념, 신이나 악마라는 개념은 알 수 있다. 물론 초월적 존재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개념으로써,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그 개념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인문/어학| 2018.06.24| 5페이지| 1,000원| 조회(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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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공空, 가假, 중中의 불교적 의미와 현대 물리학적 해석
    공空, 가假, 중中의 불교적 의미와 현대 물리학적 해석
    공空, 가假, 중中의 불교적 의미와 현대 물리학적 해석1. 들어가며중론 24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모든 인연으로 생하는 존재를 나는 공이라 한다. 또한 공은 임시로 부친 이름이며 중도의 이치이다.”이는 공空, 가假, 중中이라는 세 글자로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 사상과 중도 사상을 풀이하고 있는 말이다.극히 요약하여 풀어보자면 공(空)이란 세상 모든 것이 사실은 비어 있다는 의미이며, 가(假)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수많은 물질들이 실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의미부여하는 사람에 의하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뜻이다. 중(中)은 중도의 원리를 의미하며 중도란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보는 올바른 시각을 뜻한다.중은 하나의 금언으로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공과 가는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분명 존재하는데 사실은 없다니?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에 있어 보일 뿐이라니? 그러나 쉽게 믿어지지도, 또 믿을 수도 없는 의미를 가진 공, 가, 중이라는 개념들은 부처님의 오랜 수양과 깊은 깨달음에 근거한 말일뿐더러 현대 물리학적 관점에서도 너무도 자명하게 증명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이제 본문에서 공, 가, 중의 불교적 의미와 이 개념들이 현대 물리학적 세계관에 어떻게 부합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2. 공, 가, 중의 불교적 의미1) 공空공의 일차적인 의미는 ‘비었다’, ‘빔’이다. 이 일차적 의미를 그대로 가져다 ‘아공我空’ 이나 ‘법공法空’등의 용어를 해석하면 이는 곧 나 자신도 비어있고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도 비어 있으므로 세상 모든 것은 없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해석은 허무주의로 연결되기 쉬우며 실제로 많은 서양의 불교학자들이 불교의 공 사상을 허무주의라고 비판했다. 또한 자칫하면 나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비춰져 내심 부정되기 쉽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단순히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불교의 공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연기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기법이란 부처님이용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모든 것이 한 가지 원인에서 생성되었다고 믿지 않으며, 모든 것이 둘 이상의 원인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로 장미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는 장미꽃 씨와 더불어 씨를 심을 땅과 씨를 틔우기 위한 물과 공기, 그리고 햇살 등 무수한 요소가 필요하다. 게다가 개별 요소들의 적절한 조화 또한 필요하다. 장미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온 우주가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렇듯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다른 것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것이다. 다른 존재와의 연관 없이 스스로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불교에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용어가 언급될 필요가 있는데, 바로 자성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는 성질을 불교에서는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자성이 없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나’는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타인과의 관계를 떠나서 설명될 수 없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 혹은 딸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하고 달리는 어느 대학교의 학생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다른 어떤 것이든지 언급하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 ‘나’ 스스로는 ‘나’를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는 자성이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아공이라 하는 것이다. 법공 또한 같은 맥락으로, ‘나’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나 아닌 나머지’에도 자성이 없으며 이를 가리키는 말이 법공이다. 이를 다른 말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도 한다.그렇다면 ‘내’가 없다는 ‘아공’과 ‘나 아닌 것’ 또한 없다는 ‘법공’은 곧 아무것도 없는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공은 임시로 부친 이름이며”라는 구절에 나온다. ‘아공’과 ‘법공’은 자성 없음을 의미한다고 상술하였다. 즉 ‘아공’과 ‘법공’은 그 것 자체로, 스스로 정의되는 어떤 일관되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이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처님은 ‘아’와 ‘법’을 공신묘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즉, 『중론』의 “모든 인연으로 생하는 존재를 나는 공이라 한다.”라는 구절은 이러한 연기적 자성 없음에 기반한 공 사상을 요약한 것이다.2) 가假또 하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개념인 ‘가’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자. ‘가’란 무엇인가? ‘가’란 실제로는 없는 ‘아’와 ‘법’을 마치 있는 것처럼 ‘아’와 ‘법’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나’는 공하며 ‘법’ 또한 공하다. 그러나 뭇 중생의 분별지, 인식상태로는 분명히 존재하는 ‘내’가 느껴질 수밖에 없으며,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 때의 ‘나’와 모든 사물들이 바로 가립假立된 존재, 가유假有이다. ‘임시로’, ‘비유적으로’, ‘빌려온 것’이라는 가유의 개념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자아는 없다는 것, 그것은 다만 오온이 모여 있는 것을 이름 붙인 것이라는 인식을 비교적 잘 담아내고 있다. 경전에서 범부들은 그것을 자아라고 헛되이 집착하지만, 성자들은 조건에 의해서 생긴 임시적 자아, 즉 가라고 여실하게 안다고 말한다. ‘아’와 ‘법’은 실재하지 않으나, 사람이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다시 말해 다른 것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의미부여가 이루어지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공은 임시로 부친 이름이며”라는 『중론』의 구절에도 이러한 가의 개념이 들어있다. ‘아공’과 ‘법공’을 말할 때의 공 또한 공한데, 이는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으로 공하다고 말해진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3) 중中공이 “중도의 이치”이기도 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선 우선 ‘중도의 이치’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중도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밝힌 참다운 수행의 길로서, 불교에서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대승불교, 소승불교에 걸쳐서 중요시되며, 그 뜻하는 바에 따라 의미 차이는 있지만 불교의 각 종파에서는 모두 이 어구(語句)로 교리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 중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설고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코를 만져보곤 뱀과 같다고 말할 것이다. 이들의 인식 한도 내에서 이들의 의견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이들은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지각할 수 없을 뿐이다. 이렇듯 자신의 제한된 시야 안에서 무언가에 대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을 부처님은 극단적인 견해라고 보았다. 부처님은 이 극단적인 견해들을 벗어나 전체의 모습을 볼 것을 설했고, 이것이 바로 중도의 이치이다.공이 “중도의 이치”인 까닭은 ‘아’는 있다는 견해와 ‘아’는 없다는 견해의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아’는 공하지만 이는 내가 죽어 없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견해를 단멸론斷滅論이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영원불변의 실재를 ‘아’가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상주론常住論이라 불린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모두 일심을 간파하지 못한 극단적 견해에 불과하다. 부처님의 연기설에 따르면 아는 단멸하지도 상주하지도 않으며 어떤 인과에 따라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을 뿐인 심리 상태이다. 아공과 법공을 말하되 아와 법이 합쳐진 진여로서의 공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세상의 참모습을 바라본 중도의 이치로서의 공 사상이다.3. 공, 가, 중의 현대 물리학적 해석이제까지 나와 이 세상은 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이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질 뿐이라는 공 사상과 가의 의미, 그리고 극단적인 견해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이치를 설명하였다. 이는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분명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상이다. 나는 분명히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떠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수많은 생각들을 했고, 그 과정에서 셀 수도 없는 사물을 먹거나 만지거나 했다. 그러나 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정교한 논리와 실증적인 실험으로 쌓아올려진 현대 물리학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1) 공의 현대 물리학적 해석먼저 사물이 실재하지 않섭무늬를 만들었다. 간섭무늬란 두 개의 파동이 합쳐질 때 나타나는 무늬로, 이 실험은 빛이 파동임을 증명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빛이 구멍에 쏘아져 들어가는 것을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면 빛은 둘 중 하나의 구멍만을 통과했으며 완전한 입자의 성질만을 보였다는 것이다.컴프턴의 또 다른 실험에서는 빛이 다른 입자를 튕겨낸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는 빛이 입자라는 점을 증명한다.실험에 의해 빛이 입자라는 사실과 파동이라는 사실이 모두 증명되었다. 빛이 양립할 수 없는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띤 것이다. 모순율에 위배되는 이러한 관측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리학자들은 확률파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확률파란 입자가 존재할 확률이 파동처럼 널리 퍼져 있다는 개념이다. 즉 위의 실험을 예로 설명한다면 입자로서의 빛은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확률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때 ‘확률’에 불과한 광자의 탄착점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관측이다. 사람이 빛이 구멍이 통과하는 것을 보는 순간 확률로 분포되어 있던 빛의 도달점은 어느 한 지점으로 확정된다. 이 때 이 확률파를 수학적인 식으로 나타낸 것을 파동함수라 한다.보어에 따르면 파동함수는 가능한 모든 상태들의 합으로 나타내어지는데, 이 때의 파동함수는 이 상태들 중 어느 하나를 명시적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사람이 관측한다는 것은 파동함수에 중첩되어 존재하는 수많은 상태들 중 하나를 확인한다는 의미이며, 이 때 관측자는 확률적으로 저 상태들 중 하나를 확인하게 된다. 즉, 어떤 사람이 확인하느냐에 따라 같은 파동함수에서 얼마든지 다른 상태가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파동함수의 해석을 보어가 연구한 곳의 이름을 따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부르는데, 이 해석에 따르자면 객관적인 실재란 없는 것이다.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물리학계에서도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나, 이러한 사실이 관측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물의 실체가 없다는 불것이다.
    인문/어학| 2015.07.26| 5페이지| 2,000원| 조회(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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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소진의 고아떤 뺑덕어멈을 페미니즘적 사상으로 분석한 레포트
    연민의 여성, 의심받는 여성-김소진의 작품집을 중심으로I. 서론Ⅱ. 본론- 부(父) 대체물로서의 모(母), 그리고 연민- 순결에 대한 의심, 그리고 강박Ⅲ. 결론Ⅳ. 참고 문헌I. 서론김소진은 내가 요즈음 다시 매력을 느끼게 된 작가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직접 겪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 작품을 완독하고 책을 덮으면 ‘맞아, 그렇지’ 하는 등의 혼잣말이 나오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가 보통의 소설가들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풀어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은 유독 우리말 어휘의 사용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어휘들은 1990년대의 현대적 어휘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고 독자에 따라서는 기이함을 느끼게 만든다. 인물들의 말투에서도 이북 사투리 등의 낯선 사투리들이 많이 등장한다. 소재 면에서는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다루고 있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런 표현방식들을 이용해서 등장하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떤 일정한 설정이 존재한다. 김소진은 자신의 소설의 많은 부분이 어머니로부터 나왔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여성 인물 (대부분이 어머니의 위치에 있는) 들이 글의 주요한 사건들을 꾸려나가는 경우가 많다. 대게 그 여성들은 허약한 남성과 대조되는, 억세고 강인한 생활력을 가진 여성들로 표현된다.이러한 표현방식을 통해 볼 때, 김소진의 소설에서 여성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남성들의 대체물로서 그려진다. 기존의 사고방식, 즉 남성에 견주어 불완전, 불완성적인 여성으로서의 모습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그리면서 남성 중심사회의 무능력을 꼬집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소진은 이런 대체물적인 여성의 모습에서 강인한 모습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속으로는 한 없이 여리고 약한 모습도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이는 대체물로서의 여성의 불완전한 측면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김소진 소설에서 여성이 가지는 상반된 2가지 측면을 토대로 여성성에 대해 분류하고, 그 특징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부(父) 대체물로서의 모(母), 그리고 연민김소진의 소설 속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보통 병약하거나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억센 이미지로 많이 등장한다. 『쥐잡기』에서는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여 아내가 구멍가게를 꾸려간다.아버지는 잘 싸우는 축이 결코 못 되었다. 민홍이 보기에는 도무지 무력하기 짝이 없는 병사에 지나지 않았다. 벌써 나흘째 가게 안을 야금야금 좀먹고 있는 생쥐 한 마리에 속수무책으로 애만 끊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어지간하면 집안 식구와 몇 마디 상의함직도 했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은 얼굴이 표나게 축이 지면서도 애오라지 당신의 문제로만 치부하려는 고집스러움을 보여주었다. 그 고집스러움은 무엇보다도 말없음으로 드러났다. 아버지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마냥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어버렸고 민홍은 그 완강함에 밀려 멀지감치 겉돌고 잇었다.『쥐잡기』에서 아버지는 고작 생쥐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이에 주인공 민홍은 몹시 부아가 난다. 도대체 이 세상 어느 집구석이 고작 쥐새끼 한 마리에 이토록 유린을 당할 수 있느냐며 한심해한다. 김소진의 소설 속 아버지란 존재는 이 정도로 하찮게 그려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물론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이런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김소진은 기존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의 아버지들이 가지는 권위를 철저히 파괴하는데, 이는 남성에게가 아니라 여성에게 더 큰 멍에를 씌우는 일이다. 보통 여성들이 하는 불평등한 역할에 더해 남성의 몫까지 함께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김소진은 이렇게 남성인물의 대체물로서의 여성인물을 그림과 동시에 이들에 대해 어떤 연민의 감정을 나타내기도 한다.그때 애비의 얼굴을 구경하지 못한 성진이 태어났고 나는 남편이 그새 지운 빚과 몇 번 안 되는 잠자리에서 옮긴 몹쓸 병으로 기력이 몹시 쇠잔해 있었다. (중략) 나는 망연자실해서 눅눅한 하늘을 하릴없이 올려다봤다. 처연했다. 처음으로 웃으면서 울어봤다.『키 작은 쑥부쟁이』에서는 남편으로부터 배신당하고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하는 한 어머니가 웃으면서 우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연민을 자아내고 있다.화자의 이런 연민의 마음은 어머니의 질병이나 허약한 이미지에 드리워져 있다. 그 예로 『세월의 무늬』에서 나타나는 하혈을 들 수 있다.평소 같으면 맨손바닥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탁 때려잡을 줄 알았던 어머니는 뜻밖에도 머뭇거리며 둘레둘레 신문지나 휴지쪼가리를 찾았고 그렇게 주저하는 사이에 살이 통통 오른 그 바퀴벌레는 위험을 감지하고는 장롱 틈새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중략)―글쎄 말이다 얘.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네. 늙으니 손살이 다 풀려 시라손이 됐나. 벌레들이 갑자기 싫고 무서워졌다, 얘.철원네는 문득 그곳을 바라봤다. 거기는 짙은 초콜릿색의 바퀴벌레가 꼼짝도 않고 붙어 있었다. 철원네는 계집애와 눈을 맞췄다. 그 애의 턱이 약간 흔들렸다. 그러자 철원네는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 끝으로 벌레의 등짝을 밀었다.『세월의 무늬』에서 어머니는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한다. 갖은 모욕을 당하지만 꿋꿋하게 살아갈 정도로 강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렇게 억센 어머니도 어느새 나이가 들자 바퀴 벌레를 잡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머니의 강인함도 쇠잔해진 것이다.김소진의 소설 속 어머니가 이렇게 강인하면서도 질병, 쇠약함의 이미지들이 덧씌워진 채로 그려지는 것은 분명 아버지를 대체하는 데에서 비롯될 것이다. 강인한 어머니의 쇠약해짐은 필시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오는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가 지탱해야할 무게가 애초에 두 배 아니, 그 이상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남성에게 주어진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여성의 삶은 파괴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즉, 일반적으로 남성 가부장이 해야 할 일을 떠맡은 상황에서 겪게 되는 여성으로서의 고통을 통해 김소진은 가장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삶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순결에 대한 의심, 그리고 강박김소진의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열녀의 상징으로 꼽혀오던 순결에 대한 강박을 보인다. 그리고 그런 강박은 남성 인물의 처녀성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다.첫날밤부터 신랑은 새색시의 처녀성을 의심했다. 아아, 당신은 내가 첫 남자가 아니군. 남편의 까칠한 입술 새에서는 낭패스런 목소리가 신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지 못했지. 사내의 절망적 눈빛을 어떤 도리질로도 흩뜨리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중략) 나는 과연 여자일까, 생산성 있는. 같은 기숙사 안의 처녀 맨 몸뚱이를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붙은 건 그 어름이었다.이 상황에서 주목할 점은 ‘나’의 처녀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바로 남자의 절망감을 보며 부인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태도이다. 계속해서 남편이 느낀 절망감은 ‘나’에게도 전이되어, 스스로가 ‘생산성’이 있는 여성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녀가 공장 기숙사의 식모로 일하면서, 젊은 여직공들의 몸을 관찰하는 버릇도 이러한 고민에 기인한다. 젊은 여자의 신체에 대한 관찰은 결국 결핍된 자신의 신체, 즉 처녀가 아닌 자신과의 비교라고 볼 수 있다.‘나’는 작품에서 분노를 드러내기 보다는 수긍하고, 위축되어 있다. 어렸을 때는 병약해서 ‘쑥부쟁이’라는 별명을 얻는가 하면, 남편 때문에 진 빚과 남편이 옮긴 성병 때문에 병약한 모습을 보이고, 수배중인 딸 선영이 돌아와 방황을 끝내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나’는 명진의 동거남에게 차를 끼얹으며 분노를 표출하는데, 이는 명진의 동거남이 낙태와 그로 인해 파괴된 명진의 처녀성에 대해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순결에 대한 강박증은 『파애』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우리는 대낮부터 오후까지 세 번 그 짓을 했다. 호텔방이 흥건히 젖었고 우리는 세상이 끝장난 듯이 무섭게 뒤엉켜 있었고, 나는 그의 털이 수북한 억센 가슴팍을 어루만지다 잠이 들었다.주인공 현구는 아내가 쓴 소설에서 격렬한 섹스에 대한 묘사를 보고 위축된다. 게다가 아내의 소설에는 섹스 장면이 유독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아내와의 관계에서 아내를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초라함을 느낀다. 그런데 이러한 아내의 증상은 『문밖의 여인』이라는 아내의 소설 속에서 그 원인을 찾게 된다.나는 늘 누군가 내 등뒤에 서 있는 것 같앗다. 학교에서 동무들과 이야기를 할 때라든지,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또는 버스를 타고 있는 순간조차 나는 그 사람을 의식했다. (중략) 높은 데 매달려 있는 버스 손잡이는 잡지 말고(허리의 틈새로 속살이 보이니까), 버스 안에서 헤프게 웃지말고(남자애들이 쉽게 접근하니까)아내는 어머니의 광적인 강박관념 때문에 어디서나 감시 받는 듯한 착각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내에게 있어서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유일한 길은 일부러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집어넣는 것이었다.그러나 아내의 어머니가 순결에 대한 강박증을 앓게 된 이유 역시 그녀의 글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처녀막이 터져 불그죽죽하게 물든 첫 서답빨래를 며느리가 자랑스럽게 그 항아리에 넣어두면 다음날 문틈 새로 엿보던 시어머니는 몰래 그것을 꺼내 마을 공동 빨래터로 가지고 가서는 동네 아낙들이 보는 앞에서 자랑스럽게 방망이질을 하며 빨았다. (중략) 그런데 주인공 어머니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략) 순결의 상징으로 여겨진 하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이 소설이 아내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위에서 보았듯이 아내의 어머니는 순결을 의심당한 끝에 순결에 대한 강박증을 앓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강박은 고스란히 아내에게 주입됐을 것이고, 아내는 그 강박에 저항하기 위해 소설 속에서나마 난잡하거나 혹은 격렬한 성관계 장면을 통해 ‘가상의 몸’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인문/어학| 2015.07.26| 6페이지| 1,500원| 조회(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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