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하기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과목명 : 읽기와 쓰기교수명 : 이금란제출자 : 권종민제출일 : 2013.05.21서양에서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특권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 시각은 주체와 객체의 거리를 강조했던 서양 근대 철학과 과학의 핵심적인 특성에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현대 철학자들은 시각적 방식에 근거한 체계를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세상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근대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의 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렇게 시각에 근거한 사고체계를 데카르트적 원근주의라고 명명하였고 이를 비판하였다.이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를 비판한 철학자들과는 달리 푸코는 지식/권력의 그물망에 대한 비판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그는 근대 사회의 권력이 무력과 법을 통해 강제로 사람들을 옥죄는 전통적인 군주 권력보다 간접적이면서 훨씬 더 은밀한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근대 권력을 두 유형으로 파악하면, 하나는 사람을 길들여서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통제 시스템에 통합하는 규율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몸에 작동하는 생물적 권력이다. 그가 말하길 만인이 한 사람의 권력자를 우러러 보는 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하였다. 반면 한 사람이 만인을 주시하는 규율 권력의 사회는 "감시 사회"라고 하였다. 푸코는 이러한 변화가 체벌 형식의 처벌이 징역형으로 바뀌는 것을 중요한 단서로 보았다. 징역형은 더 보편적이며, 육체의 규율이 아닌 영혼의 규율이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으로 보았다. 파놉티콘은 중앙의 감시탑에서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는 비대칭적인 시선을 가진 감옥이다. 그 결과 죄수들은 자신이 언제 감시 당하고 있는지 모르므로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는 감시의 내면화를 하게 된다. 진정한 정신에 의한 정신에 대한 권력 행사인 것이다.1970년대에 파놉티콘에 대한 푸코의 해석은 정보 혁명의 결과로 인한 전자 감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개인의 정보와 프라이버시가 쉽게 권력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사회가 파놉티콘화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심해졌다. 물론 이 전에 산업 형명 시기에도 소수의 자본가가 수많은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기계를 사용하고,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파놉티콘과 같은 규율의 내면화를 이루었다. 또한 이전부터 행해지던 통계 자료의 수집과 큰 데이터를 다룰 수 있는 기계의 출현으로 데이터 감시라는 새로운 체계를 이루었다. 이렇게 파놉티콘의 모습은 점점 발달하여 지금의 정보 파놉티콘이 도래하게 되었다.이렇게 현대화된 정보 파놉티콘의 대표적인 예는 전자 기기를 통한 직접 감시이다. 폐쇄 회로나 생체 정보 전자화, GPS, 애셜런 등을 이용해 감시하는 것이다. 테러 방지가 목적이라고는 하나 인권 침해의 소지가 매우 크다. 기업에서는 전자 카드를 통해 소비를 분석하고 소비자의 프로필을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의 수집과 분류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안에 치명적인 정보 유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작게는 기업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소비자들의 개인정보를 사고 파는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나쁜 마음을 먹은 범죄자의 범죄 도구로도 이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폐해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이용한 감시 능력은 계속 발전했고 1990년대에 들어 사이버 스페이스를 통한 사이버 감시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했다. 이 감시 체계는 개인 정보를 더 쉽게 알아낼 수 있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제제는 미약하다.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사이버 감시는 비단 개인 정보를 원하는 기업만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다. 국가기관에서도 감시 대상자를 모니터링할 때 그가 보낸 전자 메일과 그가 하는 모든 활동을 해당 기관으로 보내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는 인터넷 국제 전화, 휴대폰 문자 메시지, 전자 메일, PC 통신과 인터넷 서비스 회사의 정보, 휴대폰 가입자의 신상 정보와 통화 시간, 음성 사서함 내용, 상대방 전화번호 등은 수사기관에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실상을 대부분의 PC 통신 이용자나 인터넷 사용자들은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감시의 전통적 영역이었던 작업장에서도 감시는 전자화, 컴퓨터화되고 있다. 직장에서의 컴퓨터와 인터넷, 인트라넷, 그리고 각종 전자 장비는 정보 처리를 통해 업무를 도와주지만 동시에 작업자의 업무 시간과 작업의 진행 과정, 심지어는 그의 행동까지 낱낱이 기록해서 상관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회사가 피고용인의 전자 메일을 확인하고, 그들의 개인 화면을 실시간으로 사용자에게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선 다른 법률적 규정이 없어 피고용인의 동의 없이 이러한 감시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한 폐쇄 회로 텔레비전이나 RF카드를 이용해 굉장히 팍팍한 수준의 감시도 병행되고 있다.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를 훔쳐볼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해킹이나 몰래 카메라를 이용한 범죄나 부당 이득을 취하는 사례가 꽤나 많이 일어났고, 전자기기를 사용한 도청도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용서의 필요성 (원제 : Forgive to Live)을 읽고작가 : 딕 티비츠역자 : 한미영출판사 : 알마작성자 : 상경 권종민처음에 이라는 제목만 보았을 때 이 책은 어떤 방식으로 용서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는 실용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책의 원제목을 알게 되면서 이 책은 단순한 실용서적이 아니라 철학적이고 당위적인 내용을 담은 인문서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살아가기 위해서 용서하라(Forgive to live)라는 원제목답게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용서를 통해 우리가 얻는 이점들을 보여준다. 용서의 필요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최근 우리 사회는 용서하기보다는 철저하게 되갚아주기를 선호한다. 예를 들어 범죄자를 엄격히 처벌하거나 부당히 얻은 이득을 몰수하기를 원한다. 나 역시 여기에 공감한다. 물론 이 책은 범죄라던가 무의미한 악행 같은 것을 용서하라고 말하는 책은 아니다. 인간 관계의 문제에서 우리가 용서를 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등을 설명하는 책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런 인간관계에서도 위처럼 엄격하게 시비를 가리기를 원하고 또 그게 맞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내 생각을 철저히 부정하고 왜 '살아가기 위해' 용서가 필요한지 말한다.처음으로 이 세상이 공평하다는 생각을 부정하라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은 평등하고 평등의 가치는 소중하다고 배워왔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서를 통해 잘못을 봐주는 것은 나만 손해를 보는 것이고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내가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고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공평한 것이 남에게는 불공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불공평함을 느껴도 그것은 남이 생각하기에 공평한 행동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만의 잣대로 누구를 용서하고 말고를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독선적인 생각일 수 있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나는 남에게 당한 일들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혼자 피해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빠져 상대를 비난하고 동정을 얻으려 했을 수 있다.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상대가 고의적으로 피해를 입히려고 악행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이는 범죄에 더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상대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불공평함을 느끼더라도 이는 내가 이해하고 조정 해야 할 부분이지 바로잡으려 한다던가 상대를 비난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나도 남에게 이렇게 불공평함을 느끼게 할 것은 당연하기에 공평의 관점에서 용서를 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둘째로 저자는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용서를 잘 표현하는 격언으로 '용서란 네가 나를 괴롭혔으니 나도 너를 괴롭히겠다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 무명'을 골랐다. 우리가 용서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용서는 옳은 것이므로 무조건 해야 한다는 부담감일 것이다. 용서라는 것이 도덕적이며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용서라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용서는 선택의 문제이며 남의 강요나 의무의 부담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내가 누리겠다는 주체적인 생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용서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주체적인 삶과 관련이 있다. 저자는 용서를 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본다. 이를 상대방이 만들어낸 손해를 상대의 책임으로만 돌리며 이 일을 상대가 해결해주기를 마냥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속을 썩이면서 상대에게 복수할 생각에 사로잡히고 상대가 사과하기 전까진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은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분명 상대가 자신의 잣대로 일견 옳은 행동을 취한 것이라면 상대는 이 일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려 하거나 사과해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행동을 어찌해 보려는 희박한 가능성에 매달리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내 삶을 꾸려나가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일을 해결하며 훌훌 털어내고 전진하는 것이 지금 보았을 때는 억울해 보일지 모르나 멀리 본다면 삶에 유익한 경험이 되는 것이다. 용서는 바로 이런 태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