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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록 책가도 레포트
    이형록(1808~1883)은 19세기에 활동한 화원 화가로 자는 여통(汝通), 호는 송석(松石)이라 고 하였다. 1864년에는 이응록(李膺祿), 1871년에 이택균(李宅均)으로 두차례 개명하였다. 조 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가문 출신으로 증조부, 조부, 부친 등 일가 모두 화원으로 그의 아들 세 명도 모두 화원을 지냈다. 25세의 자비대령화원으로 차출되어 순조에서 철종까지 궁중화원으로 다수의 궁중행사에 참 여하였는데 존호도감[純祖純元王后上號都監], 효명세자 예장도감(孝明世子葬禮都監), 창경궁 영건도감(昌慶宮營建都監), 순조 국장도감(純祖國葬都監), 효현왕후 빈전혼전도감(孝顯王后殯 殿魂殿都監), 1855년 익종 수릉 천봉도감(翼宗綏陵遷奉都監),수빈 휘경원 천봉도감(綏嬪徽慶 園遷奉都監) 등에 차출되었다. 어진 화사로 1852년과 1861년의 철종 어진 도사에 참여하여 회화적 기량을 인정받았다. 또한 이형록은 조부 이종현과 부친 이윤민에 이어 3대째 책가도로 이름을 날렸다.
    예체능| 2019.09.01| 6페이지| 1,000원| 조회(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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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청궁 보고서
    건청궁(乾淸宮)● 시 대 : 조선시대●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세종로Ⅰ. 개 관경복궁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쪽으로는 향원정(香遠亭)을 바라보고 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정치적인 무대가 된 곳으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고종이 이어(移御) 전까지 고종의 편전처럼 사용된 공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가설된 곳이기도 하며 외국의 건축가가 서양식 건물을 짓기도 한 곳이다. 한일합병 이후 이곳을 헐어 박물관과 미술관을 만들고 해방이후에는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2003년부터 조사가 이루어져 2007년 복원작업을 끝내고 일반관광객에게 공개되고 있다.Ⅱ. 건 립고종이 즉위한 후 신정왕후가 대리청정을 하지만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권이 시작된다. 대원군을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법전인 경복궁을 10년의 시간을 걸쳐서 재건한다. 재건을 위한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한다. 이후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영건도감이 철수하고 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드는데 궁궐 북쪽에서는 여전히 공사가 지속된다. 부호군 강진규의 상소에서는 ‘건청궁을 짓는 일이 자뭇 크고 화려하다고 합니다. 이는 가끔 나가실 장소인데 저렇게 화려하게 지어 어디다 쓰시려고 비용을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입니까?’라며 고종을 나무라는데 고종은 이에 대해 ‘궐내에서 지출하고 해당관청에 맡기지 않는다.’며 계속 진행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좌의정 강로와 우의정 한혜원도 고종과 소대하는 자리에서 건청궁에 대해 언급하는데 대원군이 지시이며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와 서향각(書香閣)을 본뜬 건물이라며 건청궁 건립을 옹호하고 있다.이 상소들에서 고종은 신하와 흥선대원군 몰래 사비로 지었으며, 주합루와 서향각은 어진과 어필을 보관하는 장소로 건청궁의 건립목적을 들어내고 있으며 궁궐의 형식이 아닌 일반 양반가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건청궁(乾淸宮)이라는 이름이 명청대 황제의 침전의 이름으로 사용하였고 남쪽에는 향원정과 같은 후원시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창경궁 연경당(演慶堂)을 지은 순조, 헌종이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사랑채에 기거한 것 처럼 정무의 공간 보다는 휴식공간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완공 시기는 고종이 친정(親征)을 선언한 때와 일맥상통하는 것을 보았을 때 고종의 통치 구상과 무관해 보이지는 않으며 아버지인 대원군으로부터 독립하여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뜻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한일합병 이후 이곳을 헐어 박물관과 미술관을 만들고 해방이후에는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2003년부터 조사가 이루어져 2007년 복원작업을 끝내고 일반관광객에게 공개되고 있다.Ⅲ. 구 조건청궁의 구조는 양반가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배치는 크게 장안당(長安堂), 곤녕합(坤寧閤), 복수당(福綏堂)의 세부분으로 나눈다. 장안당은 고종이 기거한 사랑채, 곤녕합은 명성황후가 기거한 안채이고 복수당은 상궁들이 거소, 생물방(生物房), 곳간 등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① 장안당(長安堂)일반 민가에서는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물로 27칸, 측면 3칸, 7량의 건물로 북서쪽에는 정화당(正化堂)‘이라는 침방, 남쪽에는 추수부용루가 있다.언제나 늘 편안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장안당은 주로 신청을 소대하고 외국공사를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갑신정변 이후에 건물명의 기록이 보이며 이전에는 견물의 명칭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아 갑신정변 이후의 건청궁의 고종의 주된 거처가 되면서 새로 지었거나 이전의 건물의 당호를 장안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1)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가을 물속의 연꽃’이라는 의미을 지닌 장안당의 누각이다. 학이 날개를 편 듯 힘차고 아름다운 처마 끝 곡선이 포인트이다. 이곳에서는 향원정이 한눈에 보이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유독 곶감을 좋아했다고 한다.② 곤녕합(坤寧閤)왕비가 사용하던 안채로 정면 5칸, 측면 1칸의 전퇴를 두었고 측면은 누에 해당하는 부분이 잇대어 정면과 측면 각 2칸의 방이 북쪽으로 이어진 형태이다.“땅이 편안하다”라는 이름에서 왕비와 관련된 건물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도덕경에서는 ‘하늘은 하나로 맑고 땅은 하나로 평안하다‘는 건청곤녕(乾淸坤寧)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오는데 이는 임금은 맑은 하늘과 같아야 세상의 질서가 성우 왕후는 지내기 편한 땅처럼 만물을 길러야한다는 의미이다. 고종은 이곳에서도 신하들과 소대한 기록이 있으나 공식적인 기록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승하한 장소가 이곳으로 알려져 있다.1) 옥호루(玉壺樓)글자 그대로의 뜻은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지만 ‘玉氷(옥호병)’의 줄인멸로 ‘옥병안의 얼음’이라는 뜻으로 “깨끗한 마음”을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일본인은 명성황후의 시신은 잠시 이곳에 안치하였다가 뒷산으로 버렸다고 한다.2) 사시향루(四時香樓)사시향은 네졔절이 끊이지 않고 꽃향기를 풍긴다는 이름을 지닌 곤녕합의 누각이다.③ 관문각(觀文閣)처음에는 관문당이란 이름이었으나 수정전에 있던 어진, 책보 등을 관문각으로 옮기면서 전각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이후 고종25년에 관문각 3년의 걸쳐 다시 지었는데 이전의 전통양식과는 다른 궁궐에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이에 대한 공사의 시작, 관계자 등증을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소상히 밝히고 있으나 건물의 형태에 대한 언급은 없다. 구한말의 외교문서를 통해서 관문각의 사용된 재료와 러시아의 사바찐이라는 인물이 공사의 전체적인 지휘감독을 하였다. 그가 작성한 공사비 내역서에 의하면 벽돌과 유리가 들어간 증기 보일러가 설치되었고 앞쥐로 복도와 계단을 갖추었으며 일부에는 일본산자제와 일본인 기술자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10년 후 부실공사를 이유로 건물을 헌다.
    인문/어학| 2019.03.24| 5페이지| 1,000원| 조회(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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