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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립학교 정교사(역사) 합격 자기소개서, 면접질문답변모음 (기간제1년 경험 有) 평가A+최고예요
    사립학교 정교사(역사)합격 자기소개서(공립기간제 1년 경력 有)1. 자기소개서2. 면접 당시 질문과 답변 모음3. 작년에 경험한 다른 사립 학교 정교사 면접 질문1. 자 기 소 개 서지원과목역사성 명OOO1. 성장과정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항상 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을 또래 친구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할 때에 재미와 희열을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때만 해도 저는 그렇게 학업으로 주목받지는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제 꿈은 평범한 교육대학교나 지방의 4년제 사범대를 진학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1 여름방학 때에 저의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모든 힘을 다해 공부를 해보는 것을 제 2학기 목표로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번 죽기살기로 공부를 해보니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때 전교 1등이라는 저로서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성적을 가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저는 학교 선생님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2학년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OO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고등학교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봤을 때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수능에서 실패를 경험하였고, 저는 바로 재수를 결심하였습니다. 재수할 때에는 부모님께 경제적 부담을 드리기 싫어서 집 주변에 있는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를 하면서 끊임없이 공부하였지만 재수 때에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처음 수능만큼의 점수가 나왔습니다. 제가 목표로 삼았던 대학에 가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로 삼수를 결심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마련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의 목표였던 OO대학교 진학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세 번째 수능 때에는 제가 원하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과 재수, 삼수를 하면서 겪은 5년의 입시 생활은 제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배우고 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저는 교직이라는 적성을 키우기 위해 대학교 때에 할 수 있는 많은 경험을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관악구청에서 주관하는 멘토링프로그램을 통해 저소득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모교 윤리교육과에서 주관한 통일캠프, 통일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탈북자 학생들도 가르쳐 봤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경험이 되었던 프로그램은 삼성에서 주관한 드림클래스 겨울캠프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대학생들이 함께 팀을 이뤄 10명의 학생들과 함께 숙박하면서 학생들의 수학과 영어를 가르칩니다. 이때 함께 가르치는 교사로서 다른 교사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젊은 학생들과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배우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경험한 저는 저의 역량을 끊임없이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제가 지금 기간제 교사로서 적응하는 동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저의 단점은 창의성과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가령 조별과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할 때에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할 상황에서는 인터넷에서 다른 사례를 열심히 찾는 노력을 해서 제가 생각해내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의 성향으로 인해 저는 교직에서 새로운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에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적이 많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항상 작년 사례를 참고하고 규정집을 참고하여 항상 절차에 맞게 일을 처리하고자 하였습니다.3. 교직에 대한 가치관교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가르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공적인 교사가 되기 위해서 교사가 가장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역량은 학생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역량입니다. 왜냐하면 교사의 전문성은 가르치는 행위에서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즉 가르치는 행위에서 나오는 전문성은 교사를 교사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야만 학생들이 선생님의 지도에 더 잘 따어렵게 핵심개념을 가르치다 보면 학습에 대한 흥미가 낮아져 과목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학습내용을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수업 중 비유나 사례를 많이 제시하고 도식화를 통해 학생들이 개념의 큰 도식을 그릴 수 있도록 칠판 판서를 항상 신경씁니다. 때로는 여러 인터넷강의를 통해 유명한 선생님이 어떻게 교수내용지식을 전달하는지 관찰하고 좋은 부분은 모방하여 저의 수업에서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도 합니다. 제가 전적으로 전담하고 있는 과목에서는 어떻게 지식을 가르칠지 구상한 다음 이를 저만의 학습지로 구현하여 학생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록 학습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들어가긴 하지만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만족도는 높습니다.4. 교직 경험저는 올해 교직에 처음 근무하면서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가 현재 교직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부분은 제가 올해 맡은 담임반 학생들입니다. 담임학급운영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을 동등하게 적용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가령 교복 착용 지도의 원칙, 일과시간에서 지켜야 할 원칙, 방과후 청소에서의 원칙 등 생활지도에 있어서 원칙을 모든 학생에게 동등하게 적용시켰습니다. 하지만 만약 원칙에서 예외를 적용시켜야 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든 학생들에게 사유를 인지시키고 학생들의 이해를 구해 어느 학생도 차별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했습니다. 생활지도뿐만 아니라 학생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적극적인 학생에서 소극적인 학생까지 모두 관심을 보여주면서 특정 학생이 소외받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정말 많이 노력하였습니다.담임반 생활지도를 하면서 항상 중요시 했던 점은 생활지도 원칙을 따르게 하되 항상 소통하는 자세를 유지하여 친절하지만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교복이 있긴 하지만 잘 입지 않고 있습니다. 3학년은 아무도 교복을 입지 않고 그에 따라 2학년은 절반의 학생이, 1학년은 1/3이렇게 지도를 한 후에 저희 반 학생 32명 중 30명 이상이 매일 교복을 입고 오게 되었습니다. 보통 이렇게 학생들에게 미움을 사려고 하는 선생님이 많이 없기에 제가 하는 교복지도는 학생들에게 비난을 듣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단호하되 친절하고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학생들과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기에 저희 반 학생들은 저의 생활지도에 큰 불만없이 잘 따라와주었습니다.교직에 근무하면서 교사들 간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현재 1학년부에서 선도위원회(=학생생활교육위원회) 기안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이 업무는 학년부 안에서 다른 담임 선생님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업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선생님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제가 업무를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선생님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교무실 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맡으면서 다른 선생님들에게 항상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자 학년부 선생님들도 저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저를 잘 대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제가 조금 희생을 하더라도 결국에 멀리 보면 제가 얻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이번 교직 생활에서 깨달았습니다.2. 면접 당시 질문과 답변 모음1) 1차 면접 (교과선생님, 교감, 교장선생님이 면접관)- 학교에 대해 아는 것과 결부시켜서 자기소개하기안녕하십니까. 저는 관리번호 O번 OOO입니다. OO고등학교는 학습,봉사,독서,경시,동아리·리더십 등 다양한 부문에서 기준 이상의 목표를 채워 인증을 받으면 그 결과를 토대로 상을 수여하는 OOOO 인재상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부문에서 학생들의 성장을 독려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상담을 통해 학생 하나하나의 특성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작년에 기간제교사로 근무하면서 담임반 학생들과 많은 상담을 통해 학생이 잘하는 특성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OO고등학교에서도 학생과 활 문항정보표(이원목적분류표)를 작성하는 이유문항정보표를 작성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문항정보표에서는 문항별로 교육과정의 성취기준을 연결시켜서 작성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출제를 할 때 출제내용이 교육과정에 규정되어 있는 성취기준에 부합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문항정보표를 작성함으로써 출제범위 중 특정 내용이 편중되거나 빠지지 않았는지 파악할 수 있으며, 답안의 개수 또한 몰려있지 않는지 고려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된다면 수행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작년에 기간제교사로 근무한 학교가 미술 중점 교육과정이 갖추어진 학교였습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수행평가로 그림을 그리는 활동을 포함해 학생들이 자신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학생들이 가진 특성에 맞추어 그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수행평가를 만들어서 부담없이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수행평가를 실시하고 싶습니다.(참고) 추가질문으로 ‘만약 수행평가를 그런 식으로 실시한다면 어떻게 공정하게 수행평가를 채점할 것인가’ 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작년에 수행평가를 할 때 그림실력으로 변별을 주기보다는 그림은 성의표현만 한다면 만점을 주고, 결국에는 역사에 대한 내용으로 공정하게 채점하였다고 답변하였습니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와 체벌에 대한 지원자의 생각은?저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해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선생님들이 학생의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보아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학생들을 계도하기 어려워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작년에 담임반을 맡았을 때에 종이 쳤을 때 교실에 무조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고 이를 어기는 학생에게 남자나 여자나 예외없이 오리걸음을 시켰습니다. 제가 이런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당성을 학생들에게 설득하고 학생들도 공감하는 바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소 옛날방식이긴 하더라도 작년에 이런 규칙을 적합니다.
    취업| 2020.12.03| 6페이지| 3,000원| 조회(2,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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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2015교육과정 한국사 일본의 국권침탈 교수학습지도안
    1. 개요단원Ⅱ. 근대 국민 국가 수립 운동4. 일본의 침략 확대와 국권 수호 운동주제30. 일본의 국권 침탈교과서128~131쪽학습 목표•러·일 전쟁 이후부터 1910년까지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지도상의 유의점•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이 한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조약을 통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설명한다.•‘늑약’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 ‘병합’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설명하여 학생들이 개념어 속에 숨겨진 역사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2. 교수·학습 과정도입• 오늘 수업에서 다룰 주제를 소개한다. T: 일본의 국권 침탈 뒤에 일제강점기, 광복이 이어짐을 안내하여 오늘 수업에서 다룰 주제의 연대적 위치를 학생들에게 안내한다.• 오늘의 호기심을 제시하여 학생들의 동기를 유발시킨다.T: 첫 번째 호기심으로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의 어감의 차이점에 대해 질문하고 학생에게 발표할 기회를 준다.
    교육학| 2020.01.25| 5페이지| 2,000원| 조회(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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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전공 러시아 역사 깔끔 요약본
    전공 러시아사 깔끔 정리본[1] 국가형성기1) 키예프 루시v 동슬라브의 지도자들과 바이킹들이 함께 협조하여 최초의 정치체제, 국가를 만드는 데 협동했을 것이라고 추정. 이 당시 흑해를 지나서 콘스탄티노플까지 장거리 무역이 활성화되어 있었고 이를 드네프르 강이 연결. 이에 따라 바이킹이 들어와서 동슬라브의 지도자들과 연대해서 국가체제를 만듬.v 올레크는 노브고로드와 키예프를 무력으로 합병하고 키예프를 수도로 선포. 그 후 류리크의 후계자가 공후가 되었는데 키예프 공후는 대공으로서 러시아의 수장이 됨.v 블라디미르는 동방정교를 국교로 채택. 상업교역으로 비잔티움으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v 야로슬라프는 페체네크 족과 같은 아시아유목민족 공격을 막고 문화를 융성화. 러시아 최초의 법전이라는 편찬. 야로슬라프 이후 내리막길.v 키예프 대공의 계승문제는 항렬에 따른 윤번제를 실시했다는 점에서 발생. 류리크의 왕조 수가 늘어나면서 항렬이 복잡해짐. 나중에는 대공 자리를 두고 전투. 그러면서 키예프의 힘이 약해져 대공위의 지위는 12세기에 북동부지역의 공후령으로 이동. 북동부지역에는 군주정의 형태가 나타나 공후의 영향이 매우 컸음. 이처럼 몽골이 자리 잡기 전키예프 루시 시기부터 군주정은 존재하고 있었음.2) 몽골 지배기v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 칸은 정예기병으로 대부분의 러시아 공국들을 점령.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하였지만 새로운 칸을 뽑기 위해 몽골리아로 불려들어감.v 그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사라이를 수도로 하는 금장칸국을 건설. 노브고로드와 북동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공작령들은 금장칸국의 지배를 받게 됨. 이때 몽골은 러시아를 간접지배. 주기적으로 공후가 사라이에 와서 충성맹세를 하고 조공을 하는 댓가로 야를릭이라는 신임장을 받아 종주관계를 확인시킴.v 공후들끼리 대공자리를 위해 끊임없지 경쟁시킴. 대공은 공후령으로부터 조공과 세금을 마지막으로 취합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음. 그래서 일부를 유용하여 자신의 공후령을 튼튼하게 만들 수 있었음.v 14세서 구심점이 되어 통합, 민족적 자긍심 정체성을 형성.v 이반 3세는 몽골에 대한 종주권을 거부하면서 러시아의 독립 선포. 모스크바 국가는 제정러시아로 가기 전에 중앙집권화된 모습으로 나가게 됨. 바실리 3세 때 영토가 매우 넓어짐.v 이반 4세는 전후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음. 전반부는 능력 있는 군주의 특성이 두드러지고 후반부는 폭군의 특징이 두드러짐. 전반부 이반 4세는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데에 힘을 씀. 1549년 젬스키소보르를 설치. 러시아 역사상 각 계층의 대표자들이 모인 최초의 국민 회의. 여기서 이반 4세는 대귀족들의 권력 남용을 비난, 러시아 국가의 통일을 굳건히 하자고 호소. 화기로 무장한 보병 상비군 스트렐치 창설.v 후반부 이반 4세의 통치는 공포 정치로 요약할 수 있음. 오프리치니나를 확보하여 친위대를 조직. 이반 4세의 반대파를 국가의 반역자로 몰아 무자비하게 테러. 오프리치니나는 이반 4세의 전제 정치를 뒷받침하여 짜르 체제 강화하고 봉건적 분열의 잔재를 일소→ 중앙집권화 촉진. 하지만 오프리치니나 제도로 나라는 무법지대가 되었고 농민과 도시빈민들은 더 억압받음.[3] 동란의 시대와 17세기 러시아 (1598~1689/ 16세기 말~ 17세기)v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긴 1598년부터 로마노프 왕조가 세워진 1613년 사이의 시기를 동란의 시대라고 함. 참칭자 드미트리의 출현과 암살로 귀족의 명문 슈이스키가 즉위. 남부에서는 농민반란. 서쪽에서는 폴란드와 전쟁. 모스크바도 한때 폴란드군에게 함락되었으나 미닌과 포자르스키의 국민군에 의해 해방. 이듬해 젬스키 소보르에서 미하일 로마노프가 황제로 뽑힘.v 로마노프 왕조가 세워지면서 17세기 러시아는 다시 힘을 얻게 됨.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제정이 강화됨. 짜르 체제에서 미하일과 알렉셰이가 통치. 이 짜르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강해지지 못함.v 전제정의 강화는 농노제의 강화와 같이 이루어짐. 러시아 농노제도는 자연스럽게 등장한 제도가 아님. 대부분의 귀족들이 짜르에 봉직하려면 영 이 법으로 인해 농노의 신분으로 강등.v 이 외에도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이 약화, 러시아의 영토가 계속 확장됨.[4] 표트르 대제: 제정러시아로 도약 (1682~1762/ 17세기~18세기 중엽)1. 표트르 대제의 개혁v 표트르 대제: 차르의 전제권 강화, 러시아가 유럽 국가의 일원으로 도약v 군사개혁: 육군 강화, 해군 창설, 징병제도를 개혁하여 모든 러시아의 복무자들은 평생토록 군 복무를 해야 한다고 규정. 국가를 위한 의무봉직v 국가에 대해 귀족도 평생 복무해야 한다고 규정.v 이와 관련하여 관등표를 1722년에 발표. 모든 국가에 대한 봉직을 군사직 문관직 궁정직으로 1~14등급으로 나눔.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업적을 쌓아 승진할 수 있도록v 원로원 창설: 표트르가 전쟁하려 수도를 비울 때 행정과 사법의 권위를 가지는 국가 최고 기관v 세금: 가구세에서 인두세로 훨씬 많이 징수v 중상주의: 국가의 부 증대, 국가의 역할이 강하게 요구됨v 대북방전쟁: 발트해의 영토를 얻어 항구 건설해야지만 서양과 사상적 경제적 정치적인 관계를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 폴타바에서 대승한 후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북유럽의 강대국으로 인정받음.2. 표트르 대제의 양분된 평가v 서구화 정책으로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음. 대제라는 이름에 충분히 어울릴 만한 업적을 러시아에 남김.v 하지만 그의 개혁 정치는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고, 러시아 대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농민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었음. 농민들과 농노들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세금과 병역 부담을 짊어져야 했음.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은 개혁하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하지 않았고 이후 농노제는 확장되기까지 함. 표트르의 개혁정치로 소수의 상층부와 무수한 일반 대중 사이에 깊은 분열을 가져옴.[5] 예카테리나 2세 (1762~1801/ 18세기 후반)1. 예카테리나의 시대: 귀족의 황금기v 표트르대제가 죽은 후부터 제위의 계승은 극도의 난맥상을 보임v 표도르 3세 때 귀족에게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에 대한 면을 바탕으로 러시아를 근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v 입법위원회를 소집. 비록 아무 문건도 작성되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사회가 가진 기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됨.v 푸가초프의 난 이후 지방행정을 효율적으로 개혁v 표트르 1세가 시작했던 근대화사업을 더 강력하게 완성시킨 사람이 예카테리나 2세.[6]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의 통치 (1801~1855/ 19세기 전반)1.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v 비공식 위원회의 자유주의 젊은 귀족들과 회의: 점진적 개혁 추구. 자유농민법을 통해 지주가 농민을 해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하지만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함.v 당시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유럽동맹군에 참여, 하지만 패배 후 틸지트 화약을 맺음. 이후 스페란스키에 의한 자유주의적 국가개혁이 이루어짐.v 1812년 전쟁으로 프랑스를 크게 이기고 국제적 위신 강화. 그로 인해 현 체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개혁할 필요성을 지배층들이 느끼지 못함.v 하지만 유럽원정에 참여했었던 젊은 귀족장교들이 유럽의 자유주의를 체험한 후 러시아에서도 헌정을 세우고 농노제를 뿌리뽑고자 하였음v 알렉산드르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일어남. 이들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닌 근본적인 정치 개혁, 즉 입헌군주국 공화국의 수립을 추구.2. 니콜라이 1세v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혁명을 겪으면서 통치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자유주의 분위기를 억압하고자 하였음.v 보수적인 개혁을 추구하였지만 알렉산드르 1세의 개혁을 귀납적인 차원에서 실질적인 개혁이 이루어짐. 민중의 삶 개혁. 이는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의 발판이 됨.v 관제 국민주의: 러시아 정교, 전제정치, 국민성. 이 관제 국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러시아의 문화가 꽃 핌v 1848년 서유럽에서 혁명의 기운이 거세지자 혁명을 탄압하기 위해 사회 억압. 페트라솁스키 사건이 대표적인 예v 크림전쟁으로 러시아가 근본적 개혁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됨.3. 사상계의 동향v 서구주의자 & 슬라브주의자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61년 농노 해방v 농노해방의 단점: 1) 토지가 각 농민에게 분배된 것이 아니라 미르에게 분배. 미르에 속한 농가들은 토지소유 경작에 대한 공동권리를 가지고 있었음. 따라서 미르에서 농민이 떠나는 게 힘들었음. 2) 귀족이 백성에게 토지를 넘겨줄 때 핵심적인 부분은 지주가 소유할 수 있었음. 3) 농민은 자유였지만 2등시민이었음. 농민은 사회의 다른 신분과 평등한 조건에 서지 못하고 보편적 행정 사법 제도로부터 배제당함. 농민만 1885년까지 인두세 납부.v 농노제 해방은 농민에게 인신적 자유, 경제적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농노해방은 자유노동에 입각한 근대적 발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을 제공. 그리고 사회의 이동성을 활발하게 만듬v 사법개혁: 법 앞의 평등, 행정권으로부터 사법의 분리, 배심단원 도입으로 시민들의 권리 보장v 젬스트보: 지방의 이슈를 젬스트보 의원이 결정 집행하는 자치기관으로서 시민들에게 지방행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함v 제도적인 개혁을 통해 통치질서를 전제정 틀 안에서 효율적으로 만듬v “정치 개혁의 부재” : 입헌주의 개혁을 요구했찌만 알렉산드르 2세 거부.2. 반동과 반개혁, 그리고 혁명적 움직임v 새로운 사법제도가 러시아의 정치질서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정치범을 양상하고 혁명운동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음. 짜르 암살 시도가 있고나서 1860년 후반부터 알렉산드르 정부는 보수화됨.v 인텔리겐치아 등장: 짜르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과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함.v ‘토지와 자유’ → 흑토재분배 / 인민의 의지로 나뉨. 인민의 의지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v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이후 알렉산드르 3세도 반동적인 움직임을 이어받아 차리즘을 강화하고자 함.v 치안 유지법 반포, 젬스토보의 권한 약화, 러시아화정책을 강요하여 소수민족 권리 약화3. 19세기 후반 경제v 농노제 폐지 후 러시아 공업화 시행: 특정한 도시에 산업지대 집중-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학교| 2020.01.25| 9페이지| 2,000원| 조회(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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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역사교육의 현황과 발전 방향 -객관식 평가와 서술형 평가를 중심으로-
    역사교육의 현황과 발전 방향-객관식 평가와 서술형 평가를 중심으로-1. 서언2. 역사과 객관식 평가의 실태와 발전방향3. 역사과 서술형 평가의 실태와 발전방향4. 결어1. 서언우리나라에서 교육은 상급학교로의 선발과 관련해서 항상 사회적인 관심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평가 또한 변별과 선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해왔다. 이때 평가는 능력주의에 의해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객관식 시험문항을 선호해 왔다. 객관식 문항은 시행이 편리하고 신속한 결과를 산출할 수 있고 공정성의 시비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객관식문항은 평가의 주류로 자리잡아왔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대학입시제도는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객관식 문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대학입시제도는 현행 고등학교 수업의 과정과 내용구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객관식 문항으로 구성된 시험에 높은 점수를 내는 것이 고등학교 3년의 교육을 관철하는 강력한 목표가 되었으며 이를 위해 지식전달 위주의 강의식 수업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하지만 역사교육에서 지식위주의 객관성을 강조하게 되면 지식의 암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는 역사를 비역사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역사는 인간의 행위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고력을 동원해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역사적 사고력은 학자마다 다양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 이에 대해 명확하게 개념이 합의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고력에 대해서 거칠게 그 성격을 규정하자면, 역사적 사고력은 비판력, 판단력, 문제 해결력, 상상력 등 다양한 사고유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정신활동이다. 역사가 과거 인간의 행위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배우는 학문임을 고려한다면 역사적 사고력의 다양한 요소 중 감정이입을 통한 추론과 상상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료라는 단서를 바탕으 전환과정에서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변별을 위한 도구로서의 평가의 기능이 사회에서 중시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교육을 통한 상급학교 진학 여부가 미래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에 크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평가의 변별기능은 사회의 공정성과 결부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역사과 평가 역시 적절한 변별에 대해서 항상 고민을 해야 한다.최근에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한국사가 절대평가 영역으로 전환되었다. 절대평가로 전환한 가장 큰 목적은 천정부지로 규모가 커지는 사교육시장을 잡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양적 평가로 인한 과도한 서열화 경쟁은 사교육을 부풀렸기 때문에 한국사를 절대평가로 전환함으로써 사교육에 대한 수요를 경감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영어의 절대평가로 이어졌고 현재 모든 과목의 절대평가 논의로 관철되었다. 하지만 이런 절대평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평가의 변별은 자연스레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단적인 예로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한국사영역의 1등급은 12만명으로 그 비율은 21%가 넘는다. 만약 모든 과목이 절대평가로 전환된다면 수능이 가지고 있는 평가적 기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고 대학별 본고사가 등장하면서 또 다른 사교육에 대한 수요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2008년도 수능 등급제가 시행되면서 변별력이 하락하였고 사교육비는 오히려 증가함에 따라 교육당국이 목표로 내세웠던 교육 양극화 해소에는 이미 실패한 바가 있다. 수능 전 과목의 절대평가 전환은 시험의 변별적 기능을 고려했을 때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할 부분이다.역사과 또한 변별이라는 기능에 너무 무감각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의 변별은 시험의 사회적 기능을 생각해 보았을 때 반드시 필요하다. 2017년 6월과 9월에 시행된 수능 모의평가에서 한국사 1등급의 비율은 각각 28.95%, 32.50%로서 한국사라는 과목으로서의 변별은 거의 상실한 상태이다. 현행 교육체제의 큰 틀이 개혁되들었을 때에는 시험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게 된다. 문항이 너무 쉬울 경우 학생들의 불안, 부주의와 같은 외적 요인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에 정답을 일관성 있게 골라내지 못하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수능의 문항은 지나치게 쉽기 때문에 문항의 난이도를 적절한 수준으로 높이는 것은 절대평가의 신뢰도의 확보와 변별력의 확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다.또한 절대평가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총괄평가보다는 형성평가의 형태로 교육의 과정에 평가를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행 수능은 1년에 1번 20문항의 시험을 통해 학생들을 서열화한다. 이때 평가 문항의 수가 많아질수록 외부의 우연적 요인에 의한 영향을 적게 받기 때문에 신뢰도는 높아진다. 총괄평가보다 형성평가와 같이 교육의 과정에서 여러 문항을 제시한다면 현행 수능보다 여러 문항을 통해 평가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성평가의 결과를 통해 교사는 개별 학생에게 피드백을 해 줄 수도 있다. 가령 현행 영어듣기 평가가 전국구 단위로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년별로 2회 실시되는 것처럼 역사 또한 이러한 형태로 전국구 단위의 시험을 치루고 이 결과를 누적시킴으로써 선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정리하자면 역사과의 객관식 평가는 적절한 난이도의 문항으로 구성된 절대평가, 형성평가의 형태로 시행하는 것이 역사과의 인문학적 특성을 살리면서 상위학교로의 변별이라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절대평가를 통해 역사라는 과목에 대한 경쟁을 낮추어 학생들이 단순히 지엽적인 역사지식을 암기하는 것은 지양하되, 적절한 난이도의 문제를 출제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변별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식의 평가형태를 유지한다면 학생들이 역사에 대해서 암기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핵심적인 역사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핵심 지식을 기반으로 학생들은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다. 왜냐하면 선택지 사이에서 추측에 의존하여 정답을 맞출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때 내용타당도의 측면에서 서술형 문항은 객관식 문항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다. 역사적 사고력을 동원하여 역사적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상상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대한 자신만의 내러티브가 형성된다. 서술형 문항에서 좋은 답안을 쓰기 위해서는 고차원적인 역사적 사고력을 동원한 결과물을 서술해야 한다. 이처럼 서술형 문항은 학생이 구상한 내러티브를 직접 쓰게 함으로써 역사적 사고력을 직접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서술형 문항은 내용타당성에서 객관식보다 높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평가방식이 측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고차원적인 인지영역을 서술형 평가가 보다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또한 역사과 서술형 평가는 역량평가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역량을 하나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앞으로의 사회에서 지식의 기계적인 암기가 평가의 절대적인 기준은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보의 단순 암기는 앞으로 인간보다는 기계가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며, 이미 몇몇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정보처리능력을 바탕으로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미래의 인간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역량 중 하나는 수많은 정보들 중 필요한 정보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스스로 가공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비판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사고의 틀을 갖추어야 한다. 이때 비판적인 사고는 역사적 사고력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역사과에서 충분히 육성해 낼 수 있는 자질 중 하나다. 학생들은 내러티브를 통해 맥락적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행위주체의 시각에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학생들은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재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건을 스스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학생들이 수많은 정보들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게끔 하고,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할 지에 대해 고민할 수대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과 서술형 평가는 전통적인 객관식 시험의 취약점들을 보완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서술형 평가는 아직 안정적으로 안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방지원은 역사과 서술형 평가 시행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혼선을 몇 가지로 정리하였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첫 번째로는 학생들이 서술형 평가에 대해 낯설게 생각하기 때문에 겪는 혼란이다. 학생들은 객관식 문항의 정해진 선지에 대한 반응에만 훈련이 되어서 서술형 평가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서술형 평가에서 글을 쓰기를 요구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배우지 않은 것을 시험 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둘째로 주목해야 할 점은 교육정책이 서술형 문항을 정기고사에서 점수로 반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술형 평가는 논리적인 역사적 사고력을 측정하고 지식을 스스로 가공하는 능력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질적 평가에 가깝다. 질적 평가의 형태는 교사는 학생의 글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여 수업의 질을 개선하고 학생들에게 개별적인 피드백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러한 점은 양적 평가로 시행되고 있는 객관식 평가의 한계점을 보충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서술형 문항을 기계적인 기준에 의거하여 양적 평가로 시행하는 것은 질적 평가에서 행해질 수 있는 개별화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채점 기준은 공정한 평가를 위해 필요하겠지만 기계적으로 기준을 적용하여 서술형 답안을 평가한다면, 학생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모범답안만을 기계적으로 암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술형 평가를 양적 평가로만 시행한다면 서술형 평가가 가지고 있는 의의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역사과 서술형 평가가 안정적으로 학교교육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학교수업이 변화하여야 한다. 교수-학습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편적.
    교육학| 2020.01.25| 8페이지| 2,000원| 조회(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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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전기의 ‘사림’ 인식에 대한 재검토
    조선전기의 ‘士林’ 인식에 대한 재검토목차1. 서언: 훈구와 사림에 대한 기존 개념의 비판적 검토2. 조선 전기 향촌의 실상과 국가 주도의 유교화3. 사림의 실체와 정계 진출 과정에 대한 재검토4. 출처론을 통해 본 사림의 정치적 지향점5. 결어1. 서언역사는 대표적으로 모학문의 모습을 축소판으로 옮겨놓은 교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교과서는 학계의 내용지식을 교수내용지식의 형태로 축약해서 담은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교과서의 교수내용지식은 학계의 연구성과가 없다면 절대로 구성될 수가 없다. 훈구와 사림의 성격과 관련된 연구는 오래 전부터 최근까지 진행되어 연구성과가 축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교과서에서는 훈구와 사림을 단순히 이항 대립적으로 서술하여 양자의 성격을 단순하고 피상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학생들이 역사적 내용에 대해서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개념을 이분법적으로 도식화한 후 그에 해당하지 않은 요소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비역사적인 이해를 초래할 수 있다.교과서에서 훈구와 사림은 정계 진출의 방법, 경제 규모, 출신 지역 등 거의 모든 지점에서 분별점이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그려지고 있다. 즉 교과서에서 사림은 향촌 중소 지주층이라는 도식이 남아 있다. 이는 훈구-사림 연구의 축적된 통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에 따르면 훈구와 사림 두 세력은 정치적 견해, 경제 규모, 출신 지역, 사상적 지향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상반된 집단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처럼 통설에서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을 대지주에 대한 중소지주의 승리에 의해 지배세력이 교체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태진은 개설서의 가설 수준에 지나지 않던 사림파 학설을 연구논문으로써 처음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는 1972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중소 지주층인 영남 지방의 사림파가 ㅈ김종직을 필두로 유향소를 다시 세우려는 운동 등을 통해 중앙의 훈구파와 대립했으며, 중앙집권에 맞서 향촌 자치를 강조하고 성리학을 이론적 사상적인 주도권을 갖게 된 사림이 과연 훈구와 어떤 지점에서 분별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세조와 연산군의 파행적 정치를 훈구와 사림이 어떻게 인식했으며 이것이 사림의 정치적 지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사림과 훈구의 출처론(出處論)을 비교함으로써 사림의 정치적 지향을 보다 명확히 규명하고자 한다. 이는 훈구와 사림에 대한 기존의 기계적인 도식에서 벗어나 조선 초기와 중기의 특수성을 염두에 두면서 훈구와 분별되는 사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2. 조선 전기 향촌의 실상과 국가 주도의 유교화기존 연구에서는 대개 조선왕조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낙향해서 초야에 묻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 이른바 절의파의 후학들이 사림이라는 이름으로 중앙 정계에 등장한 것으로 조선의 유교화를 설명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신진사대부와 사림파, 그리고 이들의 근거지인 향촌사회는 유학 사상에 정통한 인사들을 다수 배출해냄은 물론 유교 질서의 구현에 선진적인 공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 전기 향촌사회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향촌사회의 유교화의 정도는 기존 연구에서 그려진 것보다 미진하였다.조선 전기 사료들에 나타나는 지방 유력자들은 새로운 사회 질서의 수용에 소극적이거나 지체되는 모습에 더 가까웠다. 가령 여말선초에 내우외환이 가중되는 가운데 연해지역에서 유행한 매향(埋香) 의식은 당시 향촌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당시 연해지역에서는 개간의 진행, 농장 확대, 소(所)제도 해체에 따른 어업 조건의 변화, 외적의 침입 등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촌락 결속의 필요가 높아졌다. 이에 연해지역 민들은 자기 지역에 인접한 곳에 매향을 하면서 종교적으로는 미륵의 구원을 기원하고 현실적으로는 공동체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였다. 지역지배층은 매향을 통해 향촌사회를 자신들이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 재편하려고 하였다. 매향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무인계열의 유향품관층이었다. 당시 조정에까지 문제가 되었던 향도가 존재했다는 것을 좇고 있었고, 이들이 전염병을 계기로 성황사 복설을 요구하였을 때 이러한 요구를 외관 김윤제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기존의 통설대로 향촌사회가 사림에 의해 성리학적 질서가 정착되었다면 매향과 같은 민간신앙 등의 각종 음사들을 자발적으로 배척해 나가는 동시에, 그것을 유교적 의례들로 대체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 전기의 향촌사회는 아직 구래의 종교적 심성이 잔재한 상태로 유의미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즉 통설에 그려지는 조선 전기 향촌의 역사상은 과도하게 유교 질서의 구현에 선진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연구에 그려진 향촌사회상은 사림의 등장이라는 정치적 서사 속에서 향촌사회의 선진적인 면모가 선험적으로 투사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 사회가 어떻게 유교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는지에 대해 다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조선의 유교화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 간과하고 있었던 주체는 중앙, 즉 국가이다. 국가는 조선 건국 이후 16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 동안 유교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유교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자 하는 중앙정부는 지방의 향촌 운영과 교화를 위해 향례(鄕禮)를 시행하였다. 『세종실록』 「오례」 속 향촌에서 실시되는 예제로는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와 양로례(養老禮)가 있다. 향음주의에서 따로 예식 중간에 사정(司正)이 말하는 내용을 통해 향례를 시행하고자 한 목적을 유추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우러러 생각하옵건대, 국가에서 옛날의 제도를 따라 예교(禮敎)를 숭상하여, 지금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게 되니, 오로지 음식(飮食)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무릇 우리들 어른과 어린이는 각자가 서로 권면(勸勉)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안으로는 규문(閨門)에 화목하고, 밖으로는 향당(鄕黨)에 친밀(親密)하며, 서로 훈고(訓告)하고, 서로 교회(敎誨)하여, 혹시 과실과 나태(懶怠)함으로써 그 조상에게 욕됨이 가 삼사를 통해 활발히 대두한 시기로 알려진 성종 대에 대간을 역임한 바 있는 373명의 출신 배경을 전수 조사하였다. 사림의 권력 기반이 삼사였다면 대간을 거친 사람들의 출신배경은 기존에 전제되었던 사림의 출신배경과 일치하여야 한다. 하지만 성종대 대간을 분석해 본 결과 대간들은 새로운 사회계층 출신의 신진 인사가 아니라 훈구 가문으로 알려진 중앙의 명문거족 출신이었다. 이 연구는 사림파를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으로 본 기존의 통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사림의 출신지가 지방이 아니라 중앙이라는 연구성과는 2장에서 검토한 국가 주도의 유교화 과정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유교적 가치를 건국이념으로 채택한 뒤 유교 이념은 국가를 중심으로 조선 사회에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 서울의 성균관과 사학은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한 핵심적인 교육기관이었으며, 과거제 또한 유교적 소양을 요구하였다. 건국 초부터 조선은 국가 주도로 강력하게 서적의 보급을 통해 유교화 정책을 펴 나갔으며, 『의례』, 『대학연의』, 『근사록』, 『소학』, 『성리대전』 등의 도서는 사서오경과 함께 생활 지침서이자 학문서로 널리 보급되었다. 이처럼 조선은 건국 후 점진적이고 꾸준히 유교화 정책을 시행하였고,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 가치가 지니는 무게감은 커져갔다. 조선에서 출세를 꿈꾸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어려서부터 유교적 가치를 배웠으며, 그것이 곧 인륜의 근본이자 정치의 근간이라고 믿으면서 성장하였다.따라서 비록 훈구 집안의 자제라고 하더라도 학문 성향과 정치 성향은 유교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이를 현실에 실현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는 성균관 유생들의 언론 활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양반자제들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특히 집권양반의 자제들이 유생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조선 초기에 국가에서는 권세 있는 가문의 자제들에게 성균관 입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기에 조선 초기 성균관유생은 대체로 중앙의 양반자제였다. 기득권층의장받았다. 세조의 치세에는 유난히 공신이 많았는데, 계유정난에 공을 세운 43명을 정난공신에 봉했고 즉위 뒤에는 45명을 좌익공신에 봉했으며 집권말기에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명목으로 46명을 적개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 책봉은 규모 면에서 104명으로 역대 최대였다. 이러한 정치 현실은 유교적 가치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파행에 가까운 것이었다.특히 세조의 왕위 찬탈은 당시 조야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이때에는 이미 태종과 세종을 거치며 유교적 가치관이 점차 강하게 조선의 사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숙부가 조카인 단종을 무력으로 내쫓은 행위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왕위의 찬탈로 인식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유교적 가치에 역행되는 것임이 명백하였기에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끊임없이 회자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고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켰다. 무오사화라는 사건의 뇌관을 터뜨린 조의제문 또한 세조의 왕위 찬탈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었다.당시 연산군의 폭정 또한 사림이 더욱 원리주의에 입각한 정치 개혁 성향을 가지는 데에 일조했을 것이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은 정치적·비정치적 분야를 가리지 않고 거의 비이성적인 수준으로 일상화되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언론기관의 기능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사간원은 혁파되었으며, 홍문관도 폐지를 추진했다. 그동안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던 경연도 아예 철폐하였다. 비정치적 부문에서는 삼사와 밀접히 연관되어있거나 앞으로 관련될 가능성이 큰 집단인 유생을 길들이는 데에 집중하였다. 가령 성균관의 각종 시설을 철폐하고 교육 과목과 의례를 변경하며 불경한 유생을 감찰해 처벌하였다. 이러한 제도 개편은 그의 개인적 감정과 맞물리면서 광기 어린 전개과정을 거쳐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졌다.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유교적인 가치를 국시로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파행적인 정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은 이후의 지식인들, 특히 사림이 정계에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
    역사학| 2020.01.25| 13페이지| 5,000원| 조회(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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