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네가 탐식초=톡쏘는=잘어울리지못하는=joy killer마녀사냥다룸 카릴처칠(역사다시다루는게특징 종결no 특히남성중심역사)소셜 페미니스트 여성을 하나의 계층으로봄,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마르크스의공산주의이론(원시에서농경으로오면서잉여물자식에게 일부일처제 내자식인지위해)페미니즘, 프랑스 보가르 두 번째성, 1517년 종교개혁 존녹스 스코틀랜드 주교가 영국여왕마리를 monstrous regiement라고함(가톨릭 종교 신하살해)monstrous regiement극단 1975년창단(68년에 유럽에서 학생들인권운동)소셜페미니즘 표방 존녹스비판melancholy콜드 드라이 phlegmatic 콜드 모이스트 sanguine 핫 모이스트(다혈질) choleric 핫 드라이(더댜혈질)조운과 앨리스는 과부 잭과마저리는 소작농 베티는농장주딸 엘렌은민간치료사 밸린저마녀사냥꾼생일파티해롤드 핀터 부조리연극 2차세계대전 이후 반연극comedy of menace 불통의 언어(non communication) 나를 감추기 위한 것핀터레스크 외부의 것으로 내부상황브로크 일상의폭력과불안이발생계기 기괴한공포와코미디스탠리는 메그와 피터집에 하숙 메그가스탠리에게섹스어필 골드버그와맥캔 루루골드버그 황금충 자본즈의 맥캔 현대기계산업주의 스탠리 현실도피 사회부적응자스탠리취조-개인을 현대의 외부적인힘으로 짓뭉개는것(핀터레스크)생일의 의미는 아동에서성인으로,사회부적응자의인간개조 목조른것은 억압된 감정표출 강간은 유아벗어남필요하게도필요해 우리는 필연성을 인정한 후에야 가능성을 인정해 그게 가능한건 필요하기 때문이지만 가능성을 통해서 결코 필요한건 아니야 가능성은 오직 필연성이 증명된 후에야만 가정할 수 있어메그는 스탠리끌려가는거 못막음 엄마의역할no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부조리극특징골드버그는 어린시절기억 맥캔은 아이리쉬기억 메그는 아버지에대한갈망 스탠리는 하숙집insecurity와 home!나비부인이항대립적요소 서양동양 남녀 삶극 실제환상 서양음악동양음악갈리마드와 송 순종,순결,목숨바치는동상황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그것을 이성(reason)으로 인식(recognize)하여 비판(criticize) 하여야 한다. (Aristotle의 Catharsis론을 배격). 자신이 극장 속에서 목격한 제시된 현실을 비판할 때 그 비판을 실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적용시켜 나아가서는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개혁에 이르도록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 B.B의 목적 - 이러한 효과를 위하여 사용된 그의 dramatic concept이 V-Effect(Verfremdungseffekte) 혹은 이화작용이다.부조리극(The Absurd Drama)철학적 배경은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이다.실존주의:A body of ethical thought, current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centering about the uniqness and isolation of individual experiencein a universe indifferent or even hostile to man, regarding human existenceas unexplainable, and emphasizing men's freedom of choice and responsibilityfor the consequences of his acts. (사전적 정의)부조리(不條理, Absurdism)에 대해:Albert Camus는 The Myth of Sisyphus(194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이성으로 설명되던 세계는 와해되었다. 세계는 돌연 환상과 빛을 제거당하고인간은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게 되고 'irremediable exile'로 간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향(homeland)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고 다가올 미지의 세계(promised land)에 대한 희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과 삶의 간극이 부조리성(feeling of absurdity)이다.“인간은 친밀감이 탕취당할 때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전한 것인 만큼 그 분석의 틀을 서구 이론으로 한다하여도 그다지 큰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 희곡의 분석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Poetics)을 적용하는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일이다.여성은 인류 최초의 식민지였으며 ‘타자(The Other)’ ‘빈 페이지(Blank Page)’ 그리고, ‘주변의(marginal)’ ‘보이지 않는(invisible)’ 등으로 규정되어 왔다. 여성주의를 가장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던 이러한 여성을 보이고 들리게, 자기 자리를 찾은,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살려내는 실천적 운동이며 또 사상이다. 여성주의는 초기의 여성해방적 정치적인 이슈에서 점점 폭이 넓어져서 이제는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게 되었다.여성주의극에 대한 정의는 아주 다양하다. 물론 주체는 여성이지만 주제, 구성, 언어, 그리고 주인공의 변신 개념에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 여성주의극의 어머니인 미간 테리(Megan Terry)는 여성주의극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여성에게 자신감을 주고,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며,그리고 긍정적인 이미지와 부정적인 이미지를 분석할 수 있도록도와주는 극으로 여성에게 유익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여성주의극이다(치노이와 젠킨스, 329). 길레스피(Pattie P. Gillespie)는 여성주의극을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에 대한 연극”(치노이와 젠킨스, 329)으로 부르고 있고, 게일 오스틴(Gayle Austin)은 “여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극”(1990, 1)이 여성주의극이라고 정의하고 있다.이런 광의의 정의들은 초기에 보다 많은 작품을 품어 안으려는 전략적인 정의들로 보인다. 사실 이런 광의의 정의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여성이 쓰고 여성의 경험을 다루면 거의 대개가 여성주의극이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여성의 경험을 극 형식으로 무대에 풀어놓는다고 해서 모두 여성주의극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성도 남성 못지 여자들로 꽉 차 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으로 새롭게 태어났다.그것은 바로 내 속에 있던 여성, “신성,” 이라고 불러도 좋다, 에 내가참여한 것이다. 내가 찾는 연극은, 나의 요구를 채워주는, 여성과 일치되는 연극이다(치노이 와 젠킨스, 326).먼저 ‘개종의 연극(theatre of conversion)'이라는 의미에 주목해 보면, 개종이라는 말이 가리키듯 이 변화의 의미는 거의 종교적이다. 이는 자기 속의 신성이 일깨워질 만큼의 매우 강력한 발견이며 또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강력한 인격적 변화이다.이 의미는 엔토자케 샹게(Ntozake Shange)의 작품 (for colored girls who have considered suicide when the rainbow is enuf) 속에서 흑인 여성 인물이나는 내 안에서 신을 발견했네나는 그 (여)신을 사랑했네몹시 사랑했네라고 말하는 그런 경험과 흡사할 것이다(63).이 ‘개종’, 혹은 신성의 발견은 극 속 등장인물들의 발견과 변화일 뿐만 아니라 극의 창작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 즉 배우, 연출가, 다른 모든 스탭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의 발견과 변화이다. 공연 시의 여성주의극의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는 이 표현은 여성주의극이 관객과 참여자 모두에게 주는 강한 도전성과 전복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성주의극의 현장에서의 이러한 성격은 틀을 깨는 실험적인 극작과 강한 연극성에 힘입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스클라가 전하는 “여성과 일치되는 연극(woman-identified theatre)”이라는 말의 의미는 각각의 공연이 남성의 주도나 평가에서 자유로우며, 스스로 독립적인 가치를 지니고, 여성의 모든 존재론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내용을 담은 극(공연)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욕구 그리고 요구와 일치되어 여성을 위해 존재하는 연극이 된다는 의미이다.당시 미국의 상황을 전해주는 스클라의 말은 지금의 한국적 상황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텍스 궁극적으로 “주체적인 존재(woman-identified woman)”(벨 훅스, 2000, 95)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여성은 남성의 동의나 평가 없이, 남성의 관능적인 인정 없이 스스로절대적으로 충족된다. (. . .) 그녀의 존재론적 실존은 남성의 동의가필요치 않다.(벨 훅스, 2000, 95-6)벨 훅스가 말하는 이 “주체적 존재”는 남성의 시각이나 평가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워진 여성, 더 이상 ‘남성 응시’의 욕망의 대상이 아닌 여성, 여성 스스로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이 여성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닌 존재이다. 스클라의 “여성과 일치된 연극”(woman-identified theatre)”속에서 여성주인공은 이 “주체적 존재” (woman-identified woman)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비슷한 의미로 수-엘렌 케이스(Sue-Ellen Case)는 “주체로서의 여성(woman as subject)”(121)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웬디 마르틴(Wendy Martin)은 이러한 여성을 “자율적으로 행동하며 남성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여성들로서 역할모델을 제시해주는“ 인물이라고 하고 있다(메리 이글튼, 9)변신(혹은 변형, Transformation)은 여성주의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것이다. 변신(Transformation)기법은 1970년대 뉴욬의 “오픈 시어터“극단에서 배우 훈련의 목적으로 처음 고안된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 순발력을 위한 이 기법은 미간 테리에 의해 다듬어지고 점점 형태화 되었다. 199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이 변신의 개념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의 만물과 그 속에서의 인간(여성)의 변화라는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밝히며, 극작술로 구체화될 때, 상황, 시간, 인물의 정체성의 변신(transform)으로 나뉘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심정순, 1997, 31)배우의 즉각적인 역할 변신을 꾀하는 초기의 간단한 변신의 개념은 미간 테리의 극작 특징이 되었고 다른 여성 극작가들에 의해 차용되며 점차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20140043영어영문학과김다혜감상문20140043 영어영문학과 김다혜처음에 빌리 엘리어트라는 작품을 교수님께서 다루신다고 했을 때 생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수업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하여 영화를 미리 찾아보았다. 그런데 표지를 보자마자 어렸을 때 얼핏 보았던 기억이 나서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고 무척 반가웠다. 권투 글러브를 끼고 있는 빌 리가 발레를 배우는 여자아이들을 뚫어지게 보는 장면이 희미하게 떠오르면서 어렸을 적의 향수를 담은 영화를 수업시간을 통해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어 설렜다. 어렸을 때는 아무런 생각없이 보던 영화를 이제는 성인의 나이가 된 내가 어떤 배경을 주제로 만들어졌는지, 인물들의 대조된 행동이 어떠한 구조로 나타나 무슨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나무가 아닌 넓은 숲을 관찰할 기회였고 인물들의 극적인 갈등과 화해에 감정이입을 해보며 저 상황에 인물들은 이런 감정을 느끼겠구나 하고 공감 할 수 있는 스스로의 감정적인 성숙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돌아볼 수 있는 계기인 것 같다.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탄광을 폐광하려는 정부와 광부들의 파업의 대립이 국면으로 치닫게 되는데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광부로서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정적인 면에서 어려움이 있는 가정환경이다. 어머니도 돌아가신 빌리는 치매인 할머니를 항상 모시며 아버지가 보내주는 권투학원을 다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권투에 대해 흥미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파업으로 인해 같은 체육관을 쓰게 된 발레수업에서 들리는 음악소리에 빌리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자아이들이 토슈즈를 신고 바를 잡은 채 윌킨스 부인에게 발레동작을 하고 있는 모습에 빌리는 저도 모르게 강렬하게 이끌린다. 윌킨스 부인은 관심을 가지는 빌리에게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게 해본다. 그의 쭉 곧은 다리선과 동작 습득력에 그녀는 이 남자아이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후로 빌리는 아버지가 권투하라고 준 50펜스를 몰래 발레하는 곳에 사용하게 되며 토슈즈를 신고 수업에 참여한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발각된 빌리는 크게 혼이 난다. 아버지는 남자는 계집애들이나 하는 발레 따위는 하는 게 아니라고 빌리에게 강요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빌리는 그 답답함을 길에서 움직이고 싶은 대로, 추고 싶은 대로 춤을 추며 해소하려 한다. 결국 빌리는 윌킨스 부인을 찾아가게 되면서 아버지 몰래 개인 교습을 받게 된다. 그녀는 빌 리의 재능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해 로열 발레스쿨의 오디션을 보게 하려 한다. 매일같이 연습하며 실력을 갈고 닦던 빌리는 안타깝게도 노조 장이었던 형의 체포로 인해 오디션의 기회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그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윌킨슨 부인은 빌리의 집에 찾아가 아이를 지원해 줄 생각이 없느냐는 얘기를 하지만 파업이 한창인 아버지와 형은 그럴 여건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고 빌리는 발레에 대한 꿈을 접을 위기에 처한다.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에 빌리는 친구 마이클과 함께 아무도 없는 체육관에서 춤을 추다가 우연히 안에 들어온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다. 빌리는 오히려 자신의 춤을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해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빌리의 재능을 방치하려 했던 자신의 과오와 부딪히는 현실의 씁쓸함의 괴리에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보인다. 하지만 어린 빌리의 꿈마저 뺏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렇게 빌리의 오디션에 지원을 해주기 위해 아들과 동지들을 등지고 일터로 나가려 한다. 빌리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의 노력과 함께 아버지는 아내의 유품까지 팔아 빌리를 밀어준다. 오디션을 그렇게 보게 된 빌리는 결국에는 합격하고 시간이 흘러 무용수가 된 어른 빌 리가 주인공 백조의 옷을 입고 도약을 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클로징한다.이 영화에는 상승과 하강의 대조적인 이미지가 많이 나타난다. 영화의 도입부에는 빌 리가 몸 가는대로 춤을 추며 뛰어올랐다가 내려가는 씬의 반복이다. 삶에서의 비상을 꿈꾸는 어린 소년은 뛰어 올랐을 땐 이상에 가까워지는 것을 뜻하지만 다시 내려오게 되는 것은 이상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그러한 빌리의 비상은 당시 시대의 광부들의 일터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광부들은 생계를 위해 어두컴컴한 땅 밑으로 내려가는데 역시 하강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빌 리가 로열발레스쿨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파업이 끝나버렸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아버지의 상황 또한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렇게 상승과 하강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공간적 배경은 빌 리가 사는 곳은 시원하게 바다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벽돌집들로 이루어진, 광부들이 다수 주거하고 있는 동네다. 동네의 집들은 모두 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빌리의 형이 경찰에게 쫒길 때 도망치는 과정에서 다른 이웃들의 집들을 통과하며 다닌다. 그 장면을 통해 광부들의 삶은 누구 하나 잘난 것 없는 살림살이를 비슷하게 가진 데다가 노동자계급의 삶이 획일화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넓은 바다가 보이는 것은 빌 리가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빌리의 집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던 피아노는 어머니의 것으로 빌 리가 특유의 리듬감을 키울 수 있었던 주춧돌의 역할을 해주었다. 게다가 춤을 추는 걸 좋아하셨던 할머니의 유전적 성향이 얹어지면서 빌리는 춤에 대한 재능을 타고나게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답답한 일들이 있을 때 빌리는 온 동네를 무대 삼아 뛰고 발을 구르며 눈을 질끈 감고 몸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춘다. 춤을 추는 것이 빌리에게 있어선 가장 큰 기쁨이고 슬픔과 분노를 해소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모든 것을 다 잊고 빌 리가 말 했듯이 감전된 것처럼 춤을 추는 장면을 보면서 시련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어린 소년에게 발레란 현실의 괴로움을 환기시키는 배출구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사실 이런 빌리의 예술적인 면모는 형과 아버지, 할머니 모두에게 있다. 형은 늘 음반을 모아 듣는 것이 취미였을 뿐더러 아버지는 피아노를 부순 데에 죄책감의 눈물을 흘린다. 할머니도 소싯적의 꿈이 발레리나였다. 그렇기에 모두들 빌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는 하지만 당장 내일 목에 풀칠하는 것이 급급한 지금은 빌리의 춤이 외면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당시의 광부들의 파업은 힘든 시기임에 틀림없었고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다. 빌리의 주변 인물들 또한 현실에서 고통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친구 마이클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혹여 소문이 날까봐 걱정하기도 하고 윌킨슨 부인은 아마 발레를 원래 전공했으나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과 결혼함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습소도 없이 강습을 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녀는 자신의 꿈이 좌절된 상태이다. 부둣가에서 빌리에게 백조의 호수 스토리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야기는 원래 백조가 된 공주는 왕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언니인 흑조가 왕자를 채가면서 결국 공주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윌킨슨 부인은 공주는 결혼하기로 한 왕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죽어버렸다고 말한다. 여기서 발레를 포기하고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과 결혼하여 발레에 대한 꿈도 좌절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변변찮은 교습소 하나 없이 체육관을 빌려서 강습을 하는 현실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어쩌면 빌리를 통해 자신의 꿈을 대리만족하려는 모습도 보았던 것 같다. 이렇게 빌리의 주변에는 성공한 사람 하나 없이 빠듯한 가정환경에도 놓여있다. 하지만 마이클의 격려와 가족들의 지지, 윌킨슨 부인의 열렬한 가르침이 있었기에 열악한 환경에서도 빌 리가 더 새로운 세상으로 도약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발레는 계집애들이나 호모들이 하는 남성스럽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빌리를 꾸짖는다. 윌킨슨 부인의 소녀수강생들이나 집에서 여장도 하며 발레스커트를 입어보고 싶어하는 마이클이 빌리와 대조를 이루며 나타난다. 하지만 빌리는 춤을 사랑하는 데에 남녀의 구분이 정말 존재해야하는가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비단 노동자계급이나 사랑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도 다루기도 한다. 영화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소외된 자들이 모여 있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차별을 해야 하는가? 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남녀의 엄격한 구분이나 이성을 넘어선 사랑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마이클에게 키스를 받았던 빌리는 학교로 떠나기 전 마이클에게 작별키스를 해 주고 떠나는 장면과 어른 빌리의 무대를 보러온 마이클이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며 친구로서의 우정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장면들을 미루어 볼 때 감독이 영화에 동성애를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 아내의 피아노를 부숴 땔감으로 써버리거나 빌리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기 위해 결국 아내의 유품도 파는 아버지의 가슴 아픈 장면들을 보며 어떠한 성공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파업에 동참한 아들과 동료들을 뒤로 한 채 빌리를 학교에 보낼 돈을 벌려 광산에 가는 아버지는 아들과 부둥켜안고 절규하는 장면도 지금과도 다를 바 없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앞에도 말했듯이 상승과 하강은 불가분의 관계다. 즉 하강이 있기에 상승도 존재한다는 말도 된다. 우리네들의 인생도 이렇게 굴곡져 있기 때문에 눈여겨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빌 리가 어른이 되어 비상하는 부분에서 장면이 멈추면서 하강의 이미지가 없는 빌리의 현재 순간을 말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스크립트가 올라가면서 다시 빌리는 상승과 하강을 왕복하는 뜀을 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더 나아가야할 빌리의 인생에 굴곡이 있음을 암시하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뮤지컬 렌트 감상문20140043영어영문학과김다혜뮤지컬 렌트 감상문록뮤지컬로 유명한 뮤지컬 렌트는 1996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하며 시작부터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엄청난 수의 관객을 기록하며 90년대 대표 뮤지컬인 작품이다. 1996년 오프 브로드웨이의 150석의 소규모 극장에서 시작한 렌트는 불과 3개월 만에 브로드웨이 중심에 서게 되었고, 뉴욕뿐 아니라 전 세계의 배우와 관객, 평론가들로부터 아낌없는 호평을 받으며 파격적인 소재와 완성도 높은 음악들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젊은이들의 공감을 크게 산 렌트는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일명 ‘Rentheads‘라고 부르기도 하는 유행을 만들었다. 렌트는 토니상 작품상, 음악상, 각본상, 남우조연상, 퓰리처상 드라마부문상, 연극협회상, 드라마 비평가 협회상, 오비상 등 수많은 상을 받은 작품이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12년간 약 3150억의 수익을 벌어들였으며, 영국, 중국, 독일, 호주 일본, 한국 등 수많은 나라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2000년에 초연된 이후 거의 매해 공연되며 앵콜 공연과 재공연을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렌트는 2008년 9월 7일 연속 상영 5140회라는 기록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렌트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사는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과 꿈, 갈등과 희망을 노래하는 뮤지컬 렌트는 35세에 세상을 떠난 조나단 라슨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오페라 라보엠을 현대화한 작품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 열정과 젊음의 에너지가 가득한 로저와 미미, 마크, 조앤, 콜린, 모린, 엔젤은 사회가 정해놓은 것들보다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어느 추운 크리스마스이브, 뉴욕 이스트 빌리지 공업지역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이즈로 인해 시한부적인 인생을 살게 되어 의미가 있는 곡을 쓰고 싶어하는 한물간 락 가수 로저와 영화를 제작하거나 비디오로 예술을 표현하는 마크는 함께 는 에이즈로 자살한 옛 애인을 생각하며 곡을 쓰고 있다. 그 때 아래층에 사는 댄서 미미는 돈이 없어 전기가 끊겨버려 성냥을 구하기 위해 로저의 집을 찾아가게 되면서 로저는 마약중독자 미미에게 첫눈에 반한다. 이들은 집세가 밀리고 건물이 철거당할 위기를 맞게된다. 집주인 베니는 그들에게 모린의 건물 철거 반대 시위 공연을 막아주면 집세를 면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베니의 제안을 거절한다. 베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모린은 성공적으로 공연을 끝낸다. 엔젤과 콜린은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하며, 로저는 미미 역시 자신과 같은에이즈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와 함께 살게 된다. 이들이 연 파티를 찾은 베니는 자신이 미미와 옛 애인 사이였다는 것을 말하며 파티를 망치고 몇 개월 후 미미와 로저는 결국 이별한다. 안타깝게도 엔젤은 에이즈로 인해 세상을 떠난다. 이를 계기로 모두는 각자의 길을 찾아 뉴욕을 떠난다. 1년 후, 이들은 다시 모인다. 마크는 자신만의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TV 일자리를 그만두고 로저는 다시 돌아와 곡을 완성하였으며 콜린은 창의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완성해 많은 돈을 번다. 이때 친구들이 죽어가는 미미를 데려온다. 로저는 자신이 완성한 노래를 들려주며 깨어나지 않는 미미를 보며 슬퍼한다. 그때 기적적으로 미미는 깨어나고 의식불명 속 죽음 앞에서 엔젤이 살려주었다고 말한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신비함 앞에 함께 노래를 부른며 막이 내린다.이 뮤지컬은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퓨전으로 해석한 뮤지컬이다. 보엠은 보헤미아 집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라보엠은 파리쿼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집시는 나라가 없기 때문에 유럽에서 정착없이 방랑하며 예술적 행위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가난한 예술가들과 의미가 상통한다. 락뮤지컬의 형태로 변환된 뮤지컬 렌트는 뉴욕 소호에 살고 있는 미래가 불투명한 가난한 젊은이들이 꿈을 향해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는 동성애, 마약, 에이즈 등 파격적인 소재들을 다루어 신선한 충격을 점에서는 많은 사람들보다도 하루하루를 더 가치있게 보내기도 한다. 이 뮤지컬의 주제는 오늘이 바로 우리 삶에서 가장 희망찬 날이며 그 소중한 날을 위해 열심히 사랑하고 헤어짐과 절망의 나락 속에서도 비상을 꿈꾸며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진 것 없어도 열정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 특히 현재 시대의 청춘들의 모습은 가진 것 없는 뮤지컬 주인공들의 모습과도 동질감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직면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살아간다. 그래서 갈등도 하고 고뇌한다. 그러나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도 불투명한 내일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교훈적인 메시지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투명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의 경이로움을 가진다. 결국 내가 두려워하는 불투명한 미래는 생각을 좀 달리해본다면 경이로움 그 자체이며 희망과 설렘의 이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그들이 느끼는 아픔과 갈등, 또 희망과 우정, 사랑의 메시지에 깊이 공감한다. 특히 젊은 예술가들의 꿈과 희망, 우정과 열정, 사랑으로 인한 갈등, 삶에 대한 희망 등을 록, 탱고, 발라드 등 여러 장르의 완성도 높은 음악 속에 담아낸 것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이나 연기력, 카리스마도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춤은 몸을 들썩이게 했다. 환상적인 무대나 음향시설도 뮤지컬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데 한 몫을 했다. 특히 무대구성이 매우 파격적이었는데 연주자들이 무대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연주하기에 용이했다. 그리고 바로 반대쪽에 위치한 철제구조물이 눈에 띄는데 이것의 형상은 차갑고 앙상한 쇠들이 이리저리 붙어있는 것이었는데 곧 무너질 듯한 느낌을 주면서 가난하고 불안정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서로 엉켜있으면서 한 지점을 향하고 있는 모습은 서로를 의지하은 계열과 푸른 계열의 색조명은 각각 사랑, 따뜻함이나 죽음, 차가움을 표현하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뮤지컬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구도나 근접성도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배우들의 동선과 함께 영화처럼 클로즈업을 하거나 줌아웃을 함으로써 현장감과 함께 스토리의 전개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눈을 한 순간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이 점이 뮤지컬을 관람하는 데에 가장 흥미로웠다.뮤지컬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사실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도입부와 중반부에 음성사서함을 무반주에 노래로 부른 것은 확실히 뮤지컬적인 음악성을 잘 살린 것 같다. 그리고 사랑과 이들의 삶을 담은 노래 몇 곡이 아주 인상에 남는다. 로저와 미미의 사랑의 시작을 알려주는 ‘Light my candle'이라는 곡은 미미가 성냥을 빌리기 위해 로저의 집에 방문했을 때 불을 빌리려는 핑계로 서로를 탐색하며 탱고를 추는 것처럼 밀고 당기는 모습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곡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보듯이 타오르는 듯한 둘의 눈빛과 미미의 관능적인 몸짓에 매료되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느끼기엔 이 노래가 렌트 노래 중에서 가장 고혹적인 음악이라 생각한다. ‘I should tell you' 또한 이들의 테마곡이라 할 수 있는데 둘다 에이즈 환자라는 것을 말해야하지만 하지 못했고 결국 미미의 약물중독 때문에 로저는 떠나게 됨을 암시해주는 곡이다. 이 곡을 들으면서 굉장히 서정적인 음색이라고 생각했었고 장면에 슬픔을 한층 더해주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엔젤과 콜린이 부른 노래, 'I'll cover you'는 1막과 2막 둘 다에 반복해서 나오는데 1막에서는 둘만 남은 엔젤과 콜린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밝고 경쾌한 노래이며 2막에서는 엔젤이 에이즈로 죽은 뒤 혼자가 된 콜린이 엔젤과의 사랑을 추억하며 부르는 노래가 된다. 1막에서 엔젤의 모습은 진짜여성 못지않을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밝게 노래했던 것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사회의 소수자인 동있다. 같은 노래의 반복이지만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더 큰 감동을 선사하는 것 같다. 또 다른 커플인 모린과 조앤의 노래인 'Take me or leave me'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주라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차분하고 이성적이며 절제를 추구하는 조앤에 반해 모린은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아름다운 여성이다. 너무나도 반대되는 성격 탓에 자주 싸우고 나를 이해해달라고 주장하지만 되려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레즈비언 커플의 기센 싸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서도 이들의 상반된 성격이 서로에게 흥미를 주는 데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르게 삶을 닮아낸 곡을 꼽으라면 ‘La vie boheme’ ‘Ssasons of love’가 있다. ‘La vie boheme’은 보헤미안의 삶이라는 뜻으로 보헤미안의 정신을 기념하고 현실주의에 돌아선 베니가 보헤미안은 죽었다는 말에 모두가 그를 조롱하는 내용이다. 조금은 선정적인 가사와 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신이 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Seasons of love’는 뮤지컬 렌트의 타이틀곡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그만큼 모두의 목소리가 한데 모여 1년, 525600분을 사랑으로 재고 채우자는 가사를 부르는 것이 감동적이다. 그리고 몇몇의 독창이 관객들의 호응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내며 박수를 치는 모습이 콘서트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뮤지컬에서도 이렇게 명곡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도 꽤나 의외였고 음색들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재밌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배우들이 배역에 맞는 노래의 톤과 제스처들을 소화해내는 것이 흥미로웠다. 엔젤같은 경우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힐과 스타킹을 신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고 많이 연습을 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 동성애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성애자라면 동성애연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는 앞에서 마크처럼 혼자 분위기를 이끌어내.
안나 카레리나 감상문20140043영어영문학과김다혜안나 카레리나는 원래 톨스토이의 소설이며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의 배경은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의 연애와 결혼제도와 생활방식, 가치관을 다루며 그 속에서 농노제의 붕괴와 러시아 혁명을 지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 국가의 탄생도 엿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안나는 어릴 적에 빼어난 외모와 교양으로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으나 18세에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결혼제도의 허상이 심했던 시기였기에 안나는 20살 차이나는 남편 카레닌과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하며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카레닌은 장관으로서 정사에 매진하고 이성적이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정열적이지 못한 남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나는 사랑에 갈증을 느끼고 열정없는 나날들에 지쳐간다. 어느 날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에서 그녀는 브론스키를 보게 되고 기차역에서 죽은 일꾼을 위한 금전적인 호의를 베푸는 그의 모습을 보고 호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이기도 하고 가정과 남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의 모습이 뇌리에 자꾸 스쳐도 지우려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브론스키의 유혹과 타슈켄트로 가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와의 로맨스는 시작된다. 육체의 타오르는 열정의 불길에 휩싸인 이 커플은 사교계에서 염문설이 돔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키워나간다. 사교는 취미가 아닌 집안이 관여하는 부분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들은 카레닌은 그래도 그녀를 옹호하려 노력한다. 이렇게 은밀한 사랑이 계속되는 와중에 안나는 임신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의 사랑과 임신사실을 모두 말해준다. 그러나 유부녀에게 남의 아이를 가진 것은 가혹한 시련으로 다가오는 것이 당연했고 안나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부정적인 말을 내뱉고 사과를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남편은 분노했으나 죽어가는 그녀를 보고 아스키의 애정이 안나를 더 예민하게 만드는 이 순환고리의 끝은 브론스키가 지치게 되는 것으로 끝맺음되며 안나는 처지를 비관하며 배신감에 열차에 뛰어내려 자살한다.이 외에도 영화에서는 두 가지의 남녀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데 안나의 오빠부부와 레빈과 키티의 관계구도가 그렇다. 안나의 오빠부부는 남편의 불륜을 보면서도 가정을 박차고 나갈 용기가 없기에 참고 살지만 나름대로의 소박한 행복과 사랑으로 가정을 지켜나가는 아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농부 귀족인 레빈과 안나오빠의 아내의 여동생인 철없고 어리석은 키티의 사랑이 있다. 어린 키티가 레빈의 청혼을 거절했다가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그가 참된 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성숙해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주제의 답에 좀 더 가까워졌다고 느낀다.영화 안나 카레리나의 전개와 구성은 일반적인 영화에 비해 매우 독특하다. 연극무대를 배경으로 삼으며 막이 오르는 것과 무대장치를 일부러 노출하며 드라마에 가까운 영화의 구성이 연극처럼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배경의 전환과 무대의 활용도는 신선하면서도 집중도를 높이고 심미적인 요소로도 큰 자리매김을 한다. 벽과 소품을 옮기며 겉옷을 벗고 다른 역할을 맡는 엑스트라들부터 카메라의 자유로운 회전과 미닫이 식의 장면전환은 극을 보러 온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동자들이 기계적이며 반복적으로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자리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고 앉는다던지 농부들이 동시에 밭을 매는 모습들이 리듬감을 조성하며 어떻게 본다면 공산주의화되는 러시아의 획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은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과 그녀의 모습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하나의 그림처럼 연출 한다던가 미닫이문이 열리며 실내에서 눈밭으로 배경이 전환되는 것도 매우 특이한 구성이다. 또한 브론스키와 안나의 베드신은 사실적인 육체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보다 한 편의 발레를 보는 듯한 몸짓으로 표현을 하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웃는 여자들의 모있고 안나는 그 사이를 지나가다가 뜬금없이 갑자기 나타난 열차에 몸을 던진다. 홀로 남겨진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기도 하는 이 부분은 굉장히 비현실적이며 예술적인 장면의 연출이다. 경마의 경우는 실내무대에 배경을 관람석을 그린 그림을 세워놓고 말들이 실제로 지나가도록 함으로써 연극과 영화 무대 구성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배경이 19세기인 이 영화에서는 색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러시아의 건물들이 인상적이며 의복들은 마치 18세기 로코코시대의 프랑스만큼은 아니더라도 파스텔색채가 강하다고 느꼈다. 여성들의 복장은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에 주로 망사가 달린 모자나 공작의 털이나 꽃모양의 헤어 악세사리를 착용하며 부채를 들고, 추운 러시아의 계절 덕에 퍼가 부착되어 있거나 숄처럼 하고 다닌다. 특히 안나는 초반에 중후한 색의 계열 옷을 입는데 아마 어린 키티의 흰 드레스와 대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되며 이 또한 그녀의 사랑이 커지고 소멸함에 따라 색의 변화가 생긴다. 사랑이 시작되고 빛이 만개한 곳에서의 밀회가 이루어지는 때에는 흰색 옷을 입다가 사랑이 시들어져갈 때 검은색의 복장을 취하면서 마치 미망인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다가 마지막 자살하러 갈 때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톤 다운된 와인색의 옷을 입는다. 전체적으로 색의 변화나 러시아 건물의 문양과 양식을 보는 재미가 더해져서 좋았다. 장면이 수채화나 유화를 연상시키는 장면들도 있었는데 풀밭 위에 안나와 브론스키가 누워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은 마치 르누아르의 그림처럼 빛이 가미된 자연을 아름답게 보여주며 이들의 사랑이 아직은 의심과 변심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레빈이 아침녘 밭에서 깨어나 새벽이슬과 안개 속에서 에르고쇼보로 가는 키티를 보는 장면은 몽환적이며 물에 번진 그림 같았다.이 영화는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브론스키는 직접적인 말로써 사랑을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시선의 교장면전환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죽이게 긴박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영화 중반에서는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안나의 앞에서 두 남자가 손을 잡는 모습과 카레닌에게 안겨 우는 브론스키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은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후회와 사랑하는 여자의 배반을 용서하려는 감정이 섞여서 너무 안타까웠다. 결국에는 브론스키가 약혼녀와 있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안나의 심정이 자살로 이어졌다. 기차에 뛰어든 그녀의 마지막을 보며 그것에도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기차도 그 길 위에서만 달리는 존재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부정하고 탈선했다가는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듯이 안나 또한 과감히 자신의 기차를 꺾고 비극을 맞이한다. 몸을 던지며 ‘용서해 주세요’ 라고 외치는 안나의 모습은 아마 그때 사회에 반하는 행동의 종교적인 죄책감과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담겨있지 않나 싶다. 19세기의 러시아는 당시 대부분의 유럽사회처럼 여자에 대한 억압과 당연시하는 사회적인 룰들이 존재했다. 남자가 불륜을 저지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여자들의 또 다른 사랑은 용납되지 않았으며 항상 가정에 충실하고 자식의 교육과 남편의 뒷바라지에 힘써야했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같은 경향을 볼 수 있는데 19세기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이 쓴 인형의 집도 여자들을 소유물 취급하는 사회적 풍토가 담겼다. 주인공 노라는 남편의 끊임없는 구속 때문에 남편이 재결합을 원해도 인형처럼 나를 취급하는 것은 싫다, 인간처럼 살기 위해 떠날 것이다라는 메시지로 마무리되며, 영화 마리 크뢰이어 또한 19세기 덴마크 명성높은 화가인 세베린의 아내인 마리와 음악가 휴고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도 남자와의 이혼은 여자에게 치명적이며 마리는 딸 빕스에 대한 양육권도 빼앗긴다. 마리는 안나와 사랑을 찾아 운명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이처럼 여자들은 사회적 약자였으며 아내로서의 특권과 명예를 중시했다. 심지어 이혼한 여자는 평생 결혼할 수 없었기도 했다. 물론 카레닌은 안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직급이 상승하는가 하면 농노제의 붕괴로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는 철저히 버무려져있다. 그 전에는 지주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이것을 말해준다. 또, 기차역에서의 석탄이 얼굴에 묻은 일꾼의 죽음은 노동자계급의 힘든 현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레빈의 형 아내는 창녀이기 때문에 레빈은 그녀를 지칭하며 불쾌한~, 타락한~ 등의 수식어를 쓴다. 그렇지만 키티는 개의치 않고 그녀와 함께 병수발을 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완연히 성숙해진 여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가정적이고 순종하는 키티의 모습이 안나와 대조를 이루면서도 어쩌면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은 자신이 선택해야 행복해 질 수 있으며 비록 끝이 어떨지는 가늠할 수 없어도 사랑을 찾아간다면 진정 행복한 것이라는 점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안나의 끝은 키티와 다르게 비극적임에 틀림없다. 초반부에 그녀는 브론스키의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는데 그의 어머니가 “사랑을 안하는 것보다는 하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라고 말을 하는데 이때 안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부정하는 안나의 모습이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인 것이다. 이렇게 19세기 러시아의 사회는 여자들이 자유로이 사랑을 찾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런 여자를 창녀로 보았다. 모든 법도 남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모든 정사도 남자들이 처리했다. 같은 여자로서 남자는 된다, 그러나 여자는 절대로 안된다라는 남자들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속물처럼 여기고 여자는 항상 남자 뒤에 있어야 한다는 부조리한 사상도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카레닌과 브론스키도 19세기의 남자이므로 카레닌은 안나에게 모범적이고 충실한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하고 브론스키도 안나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꺼려한다. 물론 한 순간의 욕정 덕 에 아들과 남편을 저버린 안나의 행동이 옹호될 수는 없지만 남자와 동등한 조건에 설 수 없다는 점이다.
나비부인 감상문20140043영어영문학과김다혜나비부인은 푸치니에 의해 오페라로 제작된 작품이다. 주인공은 나비부인인 일본여자 초초상과 미국 해군 남성인 핑커튼이다. 해군인 핑커튼은 나가사키 항구에 도착하며 일본에 머물 동안 함께 보낼 여성과 집을 구하기에 이른다. 돈으로 초초상을 산 그는 그녀와 동거를 한다. 그녀는 핑커튼에게 순종적이었으나 그는 동거 끝에 떠나버리고 만다. 초초상은 정식으로 아내가 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며 그를 끝없이 기다린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4~5살이 되었을 즈음 핑커튼은 자신의 미국 부인과 함께 아이를 데리러 오고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할복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일본 열풍이 불게 된다. 이는 일본에서 프랑스로 보내는 소포가 일본신문으로 쌓여 있었는데 우연히 이들이 순문에 있던 우키요에의 판화를 보게 되면서 일본의 판화를 화가들이 모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유행속에서 나비부인의 작가는 선교사 부인인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누나에게 일본에 대해 질의를 하며 작품을 완성하게 되고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연극형식으로 상영된다. 이후 오페라로 푸치니가 만들어 낸 것이다. 우키요에의 판화는 모네나 마네의 그림과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에밀 졸라의 초상화에 일본식 판화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일본의 화풍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초초상은 나비라는 뜻이며 작품에서 초초상은 10대 초반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결혼하기 전부터 핑커튼은 자신의 진정한 결혼은 미국여자와 할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복선임을 암시하고 있다. 초초상은 한때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었으나 아버지의 할복과 가문의 몰락으로 인해 게이샤로 일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조상들의 영혼이 담겨있는 위패인 오토케를 가져 오는데 핑커튼은 이것을 장난감마냥 여기며 무시한다. 이들의 결혼식은 매우 보기 힘든 광경이었는데 당시 일본여성이 외국 남자와 결혼하여 동족과 절단되는 상황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혼 전날 선교사에게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함과 함께 새로운 종교를 가지기 위해서 개종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승려인 삼촌의 화를 사며 결혼식은 처참히 망가진다. 친척들에게 버림받은 초초상은 자신에게 남은 사람은 핑커튼밖에 없었기에 항상 순종할 것을 다짐한다. 이렇게 지내다가 핑커튼은 떠나게 되는데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야마도리 공작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청혼에도 자신은 미국인이며 미국식으로 이혼하지 않는 이상은 재혼할 수 없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쫓아내면 이혼이 성립되지만 자신은 미국사람과 결혼 했으니 미국이 자신의 나라이며 적합한 절차를 밟아야한다며 끊임없이 그를 기다린다. 그러던 와중 영사에게 핑커튼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는 나비는 아마 나를 잊었을 것이며 아직도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담겨 있었고 초초상은 잊혀졌다는 생각에 죽음을 떠올리지만 이윽고 영사에게 핑커튼 당신의 아들이 있으니 와달라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다시 하나의 나비가 되어 게이샤로서 노래를 하거나 혹은 죽음뿐이라며 매우 슬퍼한다. 4월 즈음 그가 온다는 소식에 그녀는 몸종 스즈키와 함께 기쁨에 차서 꽃잎을 집안 곳곳에 뿌리며 핑커튼을 기다린다. 아기와 함께 온종일 서서 기다렸지만 핑커튼은 오지 않았고 초초상은 지쳐 잠든다. 그때 핑커튼이 자신의 부인과 함께 아이를 데리러 왔고 핑커튼이 나가있는 사이 핑커튼의 아내와 나비부인은 조우하게 된다. 그녀는 아이를 빼앗길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핑커튼의 부인은 용서를 구하며 아이를 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상황을 접하고도 나비는 그가 원하는 일이니 기꺼이 아이를 드리겠다고 말한다. 30분 뒤에 그가 직접 데리러 왔음을 원한 그녀는 어두운 조명속에서 절망과 슬픔을 표출한다. 스즈키는 그녀가 할복하려함을 눈치채고 아이를 데려오려 하지만 초초상은 아이와 그저 놀아주라며 쫓아내듯이 보내고 방에 들어가 머리를 풀고 흰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할복하려는 그 순간 아이가 오는 걸 본 나비는 엄마는 너를 위해 죽는 것이니 너를 버렸다고 슬퍼하지 말라하며 아이를 보내고 할복하며 막이 내린다.이 작품은 초기에는 초초상역을 이태리계 여성들이 맡았으나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동양여성이 맡을 수 있었다. 여성이 소프라노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안정된 발성을 내뿜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는 서양여성들이 유리했기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동양여성을 캐스팅하면서 일본식 컬러나 무대장치들이 돋보이지만 원작 푸치니의 것만큼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덜 극단적이다. 이 작품은 서양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 의미로 보는 것이 더욱 알맞다. 비교해 보자면 미스 사이공이라는 작품은 베트남을 배경으로 하며 비슷한 맥락을 가진 뮤지컬이다. 서양의 이러한 심보를 비판하는 작품들이라는 것에 의미가 상통한다. 무대의 색이 매우 아름답고 섬세하다. 일본식 정원과 꽃과 나비가 즐비하는 무대는 몽환적인데 특히 돌밭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돌밭은 축소된 우주를 상징하며 돌밭을 갈며 불도를 닦는 일본 사람들의 양식을 무대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일본 교토 용안사에 있는 료안지가 이것처럼 돌밭의 모습을 띄고 있다. 일본 건축은 종이로 된 쇼지문과 함께 다다미가 있으며 미닫이 형식의 문이며 나무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내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는 것이 관습이다. 이 모든 디테일한 것들을 무대 장치에 그대로 올렸다는 것에서 매우 섬세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초반부에 서곡 ‘어느 개인 날’이 나오면서 스크린 뒤에서 비춰지는 형태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림자의 연출법으로 곡선과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일본식 느낌을 더한다. 일본 여성의 복식과 발걸음이나 사소한 제스처나 표정까지 완벽하게 소화한 이 오페라는 원작을 살리는 데에 심혈을 많이 기울였다고 생각한다. 결혼식 밤의 장면에서 오페라는 연극과 달리 두 주인공의 가창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극의 감정묘사를 유연하게 해준다. 오페라의 도중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들은 무대 이동이나 혹은 소품 등을 옮기며 무대 진행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일본 연극의 특징으로써 노나 분라꾸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분라꾸는 일본 극의 한 종류로써 인형극에 해당한다. 매우 사실적이며 검은 옷을 입은 채 인형을 조종하며 극을 이어나간다. 검은 옷을 입는다는 점이 나비부인과 비슷하다. 초초상은 결혼식 때 흰 옷을 입고 있는데 동양에서는 결혼식 때 신부, 신랑은 화려한 옷을 입지만 여기서는 서양인과 결혼하기 때문에 초초상은 흰 옷을 입는 것이다. 친척이나 이웃사람들 같은 코러스들은 상대적으로 덜 화려하지만 색이 있는 파스텔 톤의 옷이나 머리를 가리며 눈에 잘 띄지 않는 복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가 핑커튼을 기다리는 장면이 매우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다. 문에 구멍 세 개를 뚫고 아들과 나비, 스즈키가 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장면인데 얼굴이 좁은 구멍에 모두 나오도록 하여 이들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잘 보여준다. 나비의 부채춤 또한 매우 곡선적인 아름다움이 엿보이며 기모노가 마치 그녀가 나비인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그녀가 죽는 장면에서는 연극적이고 미학적인 요소가 강조되는데 흰 옷을 입은 남자들이 직사각형의 흰 천은 깔아주고 나비가 그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자살한다. 그런데 칼이 아닌 부채를 소품으로 이용하며 부채가 마침내 다 펴지며 그녀가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음을 묘사한다. 자살로 인한 피는 붉은 부채와 함께 흰 옷의 남자들이 흰 천막의 각 끝에서 천을 잡아당기며 붉은 천이 드러나게 한다. 흥건한 피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 눈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