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과목: 동양근현대사주제: 만주(滿洲), 우리 역사와 함께 아픔을 나누다.■ 왜 만주라고 부를까만주란 ‘만주족’이 발상하여 거주한 지역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만주는 과거부터 고조선,부여, 고구려, 발해, 요(중국), 청나라(중국), 일본 등의 다양한 지배를 받았으며 현재는 중국과 러시아의 영토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만주(일제 침략의 불편한 역사를 상기하지 않도록)보다는 ‘둥베이’(동북, 東北)지방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만주에 존속했던 국가들?고조선 (대릉하 유역, 요동, 송화강 유역, 한반도 북부, 초기 중심지는 만번한 등이 위치한 요동반도였으며 기원전 4세기 연나라의 침입 이후 요서 대릉하 유역을 잃고 요동의 대부분을 상실, 이후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하다 한나라에 멸망)?고구려 (주요 영역은 남만주, 송화강 이남, 한반도 북부, 고구려의 주몽이 엄리대수(송화강 상류)를 건너 만주 통강 유역의 졸본(환인현)에 정착하여 해당 지역의 소국인 졸본부여의 왕이 되어 고구려를 세웠다. 통일제국 중국 수나라, 당나라의 침입에 맞서다 당나라 장수 이적에 의해 멸망)?고리국 (북만주 일대, 이명으로 탁리국, 탁근국, 색리국 등이 있다. 지금의 흑룡강성 치치하얼(부유시)시 일대를 중심으로 하던 고대 국가, 부여의 시조 동명왕의 출생지, 고리국왕이 동명의 재주가 남다름을 두려워하여 죽이려하므로 부여의 동명왕이 엄호수(송화강)을 건너 송화강 남쪽 길림 일대로 도망가 부여를 세웠다. 부여와 백제의 뿌리,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 동명왕은 주몽이 아닌 부여의 동명왕이다. 주몽(도모왕)은 신찬성씨록에 백제의 원조 또는 태조로서 등장하고 있다)?부여 (송화강 유역 중심, 위만조선이 멸망하기 이전인 기원전 2~3세기 무렵에 동명왕에 의해 건국되었음. 3세기 무렵에 동으로 연해주 인근까지 접함, 북으로 송화강 중류와 흑룡강 하류와 접함, 서쪽으로 요하 상류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만주 휘발하를 경계로 고구려와 접함, 선비족의 침입으로 국가가 쇠약해져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다 동부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벌로 64성을 빼앗기고 멸망, 5세기 무렵에 북부여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침으로 멸망, 북부여의 일부 유민들이 송화강을 건너 옛 고리국이 있던 자리에 두막루를 세움)?두막루 (북만주 일대, 복식은 고구려와 같았음. 정치 제도는 부여의 마가, 우가, 구가, 저가처럼 동물의 이름을 따서 관직명을 정했다. 지도자는 대군장이라고 불리었다. 언어는 본래 부여어를 썼으나 거란, 실위, 물길(말갈) 등의 북방 민족과 접하게 되면서 그 언어가 북방 민족의 언어와 유사해졌다. 발해에게 멸망당한 뒤 그 강역이 흑수부와 철리부에 편입)?발해 (요동반도, 송화강 유역, 연해주 일대, 한반도 북부 원산만 일대로 신라와 경계를 함, 흑룡강 이북에서도 성터와 유적 발견되고 있음)?연 (중국 한족의 국가, 허베이성 동북부와 난하 유역 중심)?후연 (선비계 국가, 난하와 대릉하 유역 중심)?북연 (고구려인이 세운 요서 대릉하 일대의 국가)?요 (거란족이 세운 국가, 지금의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동으로 연해주 일대까지 대제국을 건설)?금 (여진족이 세운 국가, 요나라의 뒤를 이어 만주와 연해주를 장악하고 북송을 멸망시켜 북중국을 접수)?원 (몽골족이 세운 국가, 금나라의 뒤를 이어 만주와 연해주를 장악하고 이후 중국에 진출해 중국을 통일하고 고려도 복속)?후금/청 (만주족이 세운 국가, 심양 일대가 발원지, 만주 세력을 통합하여 만주를 장악하여 서진하여 요동과 산해관 일대를 접수하고 북경으로 진격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차지함, 전성기에 몽골 일대와 티베트 일대, 신강성 일대를 중국의 영토로 편입)?만주국 (일본 제국이 만주를 접수하면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세운 괴뢰 국가, 실질적인 통치 권한은 일본에게 있었다)이처럼 만주는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던 격변의 땅이었다. 현재 만주의 범위를 중국내로만 국한시켜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대게 학계에서는 만주의 범위를 아래의 그림과 같이 러시아지역(사할린도 포함)을 포함하여 보고 있다.■ 만주국은 존재하였으나 존재하지 않았다.만주국은 일제가 만주사변 직후부터 만주에 세운 괴뢰국가다. 즉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황제로 세워 일본제국에 철저히 종속되어 대륙진출을 위한 도구로 쓰인 만주국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만 존재했던 국가였다. 그러나 괴뢰국가에 불과한 만주국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만주국에는 관동군이 주둔하였고 그들의 역할은 중국군과의 전쟁,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는것과 더불어 조선의 독립군들을 소탕하는 것 이었다. 물론 ‘국가’인 만주국에도 군(軍)이 있었다. 만주군의 임무는 관동군의 보급 및 지원이 주를 이루었다. 군대와 내각이 존재하였으나 모두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껍데기였던 만주국은 분명히 존재하였으나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것이다.(만주군의 모습. 주로 관동군의 지원업무를 담당하였다.)만주국은 항일독립운동과 함께 하였다. 당시 러시아에서 자유시참변을 겪었던 우리 독립군들은 만주로 돌아와서 독립전선을 개편하는 가운데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로 활동하다가 한족총연합회와 국민부로 개편되고 한족총연합회는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북만주와 동만주에서,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만들어 남만주에서 활동하였다. 만주국에 대해서는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이 사회주의진영의 항일유격대와 하나가 되어 중국구국군대와 연합작전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실제 상등병을 모티브로 연기하였다.)(동북항일연군 등 다양한 무장독립투쟁이 만주국이 있던 만주에서 이루어졌다.)그렇다면 만주국은 어떻게 사라졌을까?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뒤에 8월 폭풍 작전을 전개하였다.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직후 8월 18일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멸망하였고, 8월 말 소련군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다. 같은 해 11월 소련은 만주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다. 결국 일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주국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분명히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국은 어쩌면 가장 슬픈 국가이며 푸이(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만주국의 황제)는 두 국가의 황제로 살았지만 가장 불행한 마지막 황제로 기록되었다.□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남겨진 그들, 조선족(朝?族)-조선족의 배경과 역사1910년 대한 제국이 일본 제국에 강제 합병당하자 일제의 토지 수탈로 토지를 잃은 조선 농민,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 내에서 독립 운동을 일으키기 어려워진 사람들 등 다채로운 계층의 주민들이 만주로 이주하였다. 1931년 7월 2일에는 만주 길림 성 장춘 현 삼성포에서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였고 1932년에는 일본이 오족협화(만주족, 일본인, 한족, 몽골족, 한국인)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자 일본의 이민 정책으로 만주국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또한 급증하였다. 이 시기에는 간도 지역 뿐 아니라 만주 전역에 다양한 직업의 조선인이 흩어졌으며 만주국 내에 거주하던 한국인 인구가 3백만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 뒤 독립운동활약과 국공합작에서 모택동 휘하의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에 큰 기여를 한 조선족은 조선민족 자치구를 얻었지만 1953년 종전과 함께 1955년 자치주로 격하된다.-분포 및 문화조선족은 현재 222만명으로 추산되며 한반도 이외의 최대 한민족 집단이다. 특히나 길림성(105만명)과 흑룡강성(32만명)에 집중되어있다. 각지의 조선족 거주지에는 행정적으로 조선족 자치현과 여러 조선족 마을(향, 진)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 동북 삼성의 중심 도시에는 조선족의 학교와 방송국, 신문사, 출판사 등이 있으며, 이들 기관은 중화인민공화국에 한국어를 보급하고 있다.(조선족은 길림성과 흑룡강성 외에도 다양한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조선족 (조선민족)의 언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언어인 문화어를 기준으로 삼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국가정책에 따라 개편된 중국조선말을 교육받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 발전과 도시화로 인해 중국사회와의 교류가 커지면서 중국어를 쓰는 사람이 늘고있다.조선족의 출신지는 한반도 북부 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중국동북3성 각곳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지역방언을 보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게 경상도 방언을 조선족들의 언어로만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구분되어 있다.동북방언(함경도)지역:길림성 연변지구,흑룡강성 동북부,동남부, 두만강연안지구동북6진방언서북방언(평안도)지역:요녕성 다수지역(심양-안산-무순-본계),요녕성과 접한 길림성 남부지역
A good man Brown 감상 및 분석 레포트이 작품은 주인공 Brown이 아내 Faith와 마을을 떠나 숲 속에 갔다가 다음날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간단한 구성인 것이다. 즉, 엄격한 신앙생활의 규범을 지닌 청교도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Brown이라는 청년이 악마의 세계를 체험하고 우울한 신앙 회의론자로 변하는 과정을 다루었다.주인공인 아내의 이름은 Faith이고 남편의 이름은 Goodman Brown이다. 이름에서 보여주듯이 이들은 선량하고 독실한 믿음의 부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주인공 Goodman Brown은 해질 무렵 애절하게 붙잡는 아내를 뿌리치고 어두운 숲을 향해 운명의 여정에 오른다. Brown의 불행한 운명의 발길이 음산하고 어두운 숲 속을 헤치고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장 마귀라도 나올 듯한 어두운 숲 속에서 겁에 질려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탄의 사자인 길잡이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함께 더욱 더 어둡고 깊은 숲 속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얼마 후 어두운 험한 산길에 초행인 젊은이가 피로의 기색을 보이자, 사탄의 사자인 길잡이는 자기의 꿈틀거리는 뱀 모양의 지팡이를 집고 가라고 그에게 친절을 베푼다.사탄의 안내자가 주는 뱀 모양의 지팡이는 물론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뱀과 같이 유혹을 상징하며, 이는 젊은이가 숲 속에 들어온 후의 첫 유혹이며 시련이 된다. 온갖 악이 존재하고 있는 어두운 숲 속에 어쩌다 발을 들여놓았지만, 아직 타락의 경지에는 이르지 않은 그의 양심과 믿음은, 악마의 길잡이에 대한 의심으로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사탄의 안내자는 조금만 더 걸어가면서 의논해 보자고 그를 유혹한다. 이렇듯 이제 막 숲 속에 들어선 것뿐이라는 길잡이의 말에 따라 젊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겨 놓게 된다. 그리고 순진한 젊은이는 늑대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우리 아버님과 그 이전 선대 어른들께서는 이러한 일로 숲 속에 들어온 일이 없으며 우리는 훌륭한 기독교 신자였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귀에 끌려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애통이 여기자, 사탄의 사자는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자기와 젊은이의 조상들과는 아주 친근한 사이였다고 말하며 일일이 젊은이의 조상들에 대한 죄상을 폭로한다. 그리고 자기와 젊은이의 조상들과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젊은이와 더 친근해야겠다고 능청스럽게 역습해 온다.젊은이가 이러한 길잡이의 허황된 말이 믿어지지가 않는 듯 놀라움을 표시하자, 사탄의 사자는 교회의 집사나 마을의 평의원들 그리고 판사들과 지사까지도 자기와 가까운 사이인 동시에 동지들이라 말하며 모든 인간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폭로한다. 자기조상들의 정직함과 믿음을 역설했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한 젊은이는 이제 돌아갈 구실로 삼을 이야기가 없어졌다. 그러나 젊은이는 자기가 존경하는 신의 종이신 그의 교회 목사님은 그렇지 않으리라 굳게 믿으며 자기가 사탄의 사자를 따라간다면, 존경하는 목사님을 무슨 낯으로 대하느냐고 길잡이에게 항의하자, 사탄의 사자는 제발 나를 웃기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크게 웃는다. 이는 잠시 후에 젊은이 자신이 목격하게 되는 바이지만, 목사님 자신도 이 사탄의 숲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숲 속 사탄의 집회를 향해 총총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목사님과 집사 사이의 대화에서 그는 더욱 놀라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존경하는 노목사까지도 믿을 수 없게 되자, 젊은이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도 Faith인 그의 아내의 믿음에 실망을 안겨줄 수 없으니 자기는 이제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사탄의 사자는 이에 질세라, Nay, if that be the case, even go thy ways, Goodman Brown, 이라고 격려하며, 여자란 모두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듯, 젊은이가 어렸을 때 교리문답을 가르쳐주고 현재도 목사님과 더불어 그의 믿음의 지주인 한 노부인을 목격케 해준다. 평시에 목사님 못지 않게 존경하고 있던 이 노부인이 자기가 현재 유혹 당하고 있는 숲 속 사탄의 모임을 향해 서둘러 가고 있음을 목격하자, 젊은이는 실망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갑자기 저런 늙은이가 가는 곳에 자기는 한발자국도 더 이상 갈 수 없노라고 완강히 거부한다. 그리고는 마치 하늘마저 의심하듯 밤하늘을 우러러 보고 푸른 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음을 보자 이에 힘입어, 위로 하늘이 있고 지상에 사랑하는 아내 Faith가 있는 한 자기는 완강히 사탄을 물리치겠노라고 외친다.Goodman Brown의 비극은 선악과를 맛본 결과 하늘의 낙원에서 쫓겨나 영원한 불행을 초래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처럼, 인간의 은밀한 죄의 내면세계를 알게된 후 믿음을 잃고 사탄에게 그의 영혼을 빼앗기고 마는 한 선량한 젊은 청교도의 비극이라 말 할 수 있다. 그토록 완강히 거부하던 젊은이는 하늘과 같이 믿었던 사랑하는 아내인 Faith 역시 자기와 같이 숲 속 악마의 모임에 가는 중임을 보게 되며, 그 때 그의 아내가 떨어뜨리는 분홍색 리본은 혼합색(붉고 흰)으로써, 이는 인간이란 그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순결한 존재가 아니며 그렇다고 전적으로 악한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두운 숲 속에서 자기의 아내를 발견하자 젊은이는 그토록 완강히 거부하던 이때까지의 그의 태도를 돌변하여 미친듯이 몸부림을 치며 아내의 이름을 부르다가 결국 사탄에 굴복하고 만다.여기에서 말하는 그의 아내 Faith는 Brown자신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가 믿음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죄악이란 단지 이름 일뿐 사실은 온세상이 온통 악마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실망 끝에 사탄에 굴복하고만 젊은이는 그가 두려워하던 길잡이의 지팡이를 집고, 즉 사탄의 힘을 빌어 단숨에 악마의 모임 장소로 달려간다. 그리고 사탄의 모임에 도착한 그는 선악의 구별이 없는 흡사 지옥과 같은 그 곳에 모인 각계각층의 많은 무리들을 다시 확인하게 되며 놀란다. 이는 마치 평상시 하나님의 은총 속에 경건하고 평화스러웠던 온 마을이 그대로 숲 속에 옮겨진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마침내 사탄의 제사장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그의 열띤 설교는 젊은이의 믿음과 선악에 대한 의식에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꿈에서 깨어 난 젊은이는 새벽에 악마의 숲으로부터 마을로 돌아와 평상시와 다름없는 마을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 가까이 오는 길에 그는 목사님과 집사 그리고 어릴 때 교리문답을 가르쳐주던 노부인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젊은이는 지난밤 숲 속 사탄의 모임에서 만난 그들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하르 키 존재를 부정 당하는 자들 .‘ حركة ’( 하르카 ) 는 ‘ 운동 ’ 이라는 뜻이며 자원으로 이뤄진 전투부대를 지칭 그 부대원을 ‘ 하르키 ’ 라고 부름 오늘날에는 알제리 전쟁에서 ‘ 프랑스와 프랑스 군대를 지지하여 참여한 사람 ’ 을 통칭 그리고 ‘ 하르키 ’ 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 하르키란 ?프랑스 지지자들 구성 정식 군인 ( 공동법 , 지역법 ) 농촌 출신군인 ( 지역법 ) 전투원 고급공무원과 지역유지 ( 공동법 ) 의원 ( 공동법 ) 낮은 계층 ( 지역법 ) 비전투원공동법과 지역법 ( 법적 지위 ) 프랑스계 알제리 주민과 동일하게 프랑스 시민 권리 인정됨 이주 이후 프랑스 국적이 자동적으로 인정이 됨 “ 검은 발 ” 과 지역유지들 공동법 알제리에만 적용되는 법에 따라 프랑스 시민 권리 인정됨 전쟁 중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되었으나 다시 국민임을 입증해야 했음 넓은 의미에서 하르키들이 대부분 소속 지역법에비앙 협정에서 전원 프랑스 송환 약속 프랑스와 알제리 모두 제대로 이행 안됨 공식 이주 약 90000 명 알제리 전쟁에 참여한 프랑스 군인 . 특히 하르키 지휘한 장교들이 개인적 이주 주도 개인 이주 약 90000 명 여러가지 불법적인 통로를 통한 이주 불법 이주 약 90000 명 가족 포함 약 160 만 중 약 30 만명이 이주 이주 문제프랑스 정부의 대책 1962 3 월 18 일 에비앙 조약체결 4 월 하르키들 이송시작 7 월 1 일 알제리 독립 7 월 3 일 임시정부 수립 - 이후 하르키들에 학살시작 8 월 프랑스는 하르키들을 임시 수용소로 수용시작함 초기 수용소 ‘ 비아스 ’ 에서 ‘ 검은발 ’ 출신이 수용소장이 되어서 식민자와 피식민자 계층 재현 ’ 1960 년대 1970 행정당국이 문제의식 1974 년 12 월 파리 마들렌 교회에서 하르키 2 세들이 대규모 단식 투쟁 . 이후 당국은 거주자들의 대표자 회의를 조직하여 실제적 문제를 해결함 . 1970 년대프랑스정부의 대책 1980 자치기구 강화로 2 세들의 주체적인 사회 통합 강조 . 하르키 가족들의 생계보장을 위한 직접적인 지원 강화 1987 각 가정당 6 만 프랑의 보상금 지급 1980 년대 1994 년 6 월 11 일 법령 종합적인 대책이 법령을 통하여 구체화됨 후손들 또한 지원책 결정 장학금 , 취업 우선권 , 취업 장려금 , 8 만 프랑의 창업 장려금 1 만 프랑의 이주 지원금 1990 년대1) 1987 년 지급된 6 만 프랑의 특별 보조금에 덧붙여 11 만 프랑의 지원금을 지급한다 . 2) 주택을 소유하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8 만 프랑의 보조금을 지원한다 . 3) 이미 주택을 소유하였으나 많은 부채를 진 사람에게는 일정 금액의 부채를 국가가 상환한다 . 4) 주거환경 개선을 워하는 사람에게는 1 만 5 천 프랑의 지원금을 지급한다 . 5)” 특별히 상처 입은 ” 보충병의 배우자에게는 60 세까지 추가연금을 지급한다 . 6) “ 심한 고통을 겪은 ” 감금 피해자에게는 상이군인의 자격을 인정한다 . 1994 년 6 월 11 일 법령프랑스 정부가 프랑스식 이름이 사회 통합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권장 거주지 관리자가 강요 , 자진해서 정부의 권장으로 바꿈 혹은 중립적인 이름 선택 하지만 이름의 기원 , 부모의 문화 , 생김새 사이의 불일치로 아이들이 정체성 형성에 방해가 됨 오히려 학교에서 차별의 원인이 됨 이름의 문제 ( 프랑스식 이름 )“ 민족 민중 혁명 ” 을 주장하며 알제리 전체가 혼연일체로 프랑스와 맞섰다고 함 하르키의 존재을 인정하면 가족 포함 160 만명의 알제리인이 프랑스편을 든 것을 인정하는것이다 . 또한 1962 여름 15 만명의 친프랑스인과 1 만명의 유럽인을 학살한 사실을 인정하게 됨 즉 , 하르키들의 존재자체를 부정함 정체성의 문제 - 알제리정체성의 문제 - 프랑스 - 알제리 전쟁은 수치스러운 전쟁으로 인식 - 프랑스 군인은 고문자 , 나치 하르키들은 배신자로 인식 - 잘못된 파악 , 모호한 개입에서 나온 양심의 가책을 은폐하기 위하여 침묵을 선택 프랑스 좌파 - 알제리 전쟁은 수치와 불명예의 역사라고 인식 - 프랑스를 믿고 지지했던 주민들을 버리고 약속을 어겨서 치욕으로 여김 - 학살을 피해서 이주한 하르키들을 의식적으로 방치하여서 치욕으로 여김 프랑스 우파디자이너 입생로랑 , 지네딘 지단 , 카림 벤제마 등 이들은 알제리계 이민자지만 각자의 국가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했거나 활약중이다 . 피에누아르 ( 검은발 ) 혹은 하르키흔히들 하르키를 ‘ 매국노 ’ 에 비유하고 있다 . 알제리인도 아닌 그렇다고 프랑스인도 아닌 하층민으로 전락한 하르키들 . 감정적으로 대하면 안타깝고 동정이 가는 그들이지만 대한민국의 근대사와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더 많은 연구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 결론이영옥 (2005). 기억의 복권과 정체성의 회복 : 하르키 및 그 후손들의 사례 , 한국프랑스학회 학술발표회 노서경 (2010). 사라진 증언들 : 이민인종연구회 논문 참조 출처{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