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Sierra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84
검색어 입력폼
  • 판매자 표지 신민회의 민족운동
    신민회의 민족운동
    신민회의 민족운동1. 서론조선은 1904년(광무 8)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와 한일협약을 통해 일본의 위협에 더욱 직면하였으며,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의 을사조약으로 국권의 일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1907년에는 의병이 다시 일어나 무장투쟁의 길로 나섰다. 애국계몽운동은 그것과 별개로 무장투쟁을 배제하는 지식인, 관료, 개명 유학자 등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학교 설립과 신문·잡지의 발간, 산업 진흥 등을 통해 경제적 문화적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점진적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보안회,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등의 계몽단체들이 있었는데, 이는 우리민족의 자주성회복의 대한 열의를 보여준다.2. 신민회1) 신민회의 성립조선의 주권을 빼앗기 일본이 여러 조약들을 체결하는 가운데, 이를 저지하기 위한 여러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된 후 제일 먼저 조직된 정치 단체는 보안회였다(1904). 이는 러일전쟁 중에 일제가 한국정부에 대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한 데에 자극받아 조직되었는데 연설회를 통해 국민들의 반대여론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다.보안회를 이어 공진회, 국민교육회 등이 설치, 폐지를 거듭하다가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헌정연구회가 결성되었다.(1905.5) 헌정연구회 또한 일진회의 방해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지만, 대한자강회(1906.4)가 뒤를 이어 범국민적으로 국권회복을 꾀하나 또다시 일제의 보안법으로 강제 해체시켰다.이렇게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계몽운동을 진행하다 보니 일제의 반발이 거세어 성과가 부족한 점을 보아 이에 비밀결사로 하여 새롭게 조직된 단체가 신민회이다.(1907.4)신민회의 구성의 주요 인물로는 미국에 있었던 안창호, 대한매일신보 측의 양기탁, 신채호 무관출신인 이동휘, 이갑 민족자본가 집단인 이승훈, 안태국 등이 있었다. 이렇듯 여러 계층의 인사들이 구성함에 따라 적극적이고 다방면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2)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1) 신민회의 목적과 이념① 신민회의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국가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체제는 공화정치로 하는 것이었다.② 우리가 국권을 박탈당한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므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양성하여야 할 것으로 보았다.③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며,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가의 부강은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사상에 의거하고 있다. 신민회가 신민을 강조하고 명칭을 신민회라 한 것도 이러한 사상에서 나왔다.④ 신민회의 신민은 다른 나라의 도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자신(自新)이어야 한다. 수백년 이래로 세계는 새로운 정치, 법률, 교육, 공예, 기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세계로 진보해 왔는데, 한국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퇴보하여 ‘진화의 천연공례’에 역행하여 왔다고 하여, 당시의 시대상황을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파악하였다.(2)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위와 같은 시각으로 무장한 신민회는 합법적 표면단체를 통한 운동과 비합법적인 지하운동을 통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교육구국운동, 국민계몽운동, 경제구국운동 등은 전자의 방법이고, 독립군기지건설운동은 후자의 방법이라 하였다. 다음은 실질적으로 신민회가 실행한 운동들이다.① 교육구국운동신민회가 국권회복을 위한 민력양성운동 중 가장 기본으로 하였던 것이 신교육구국운동이었다. 신민회의 창건 당시 이미 교육구국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으나 이것이 열정적으로 불붙고 1907년 이후에 전국적으로 신교육열이 붐을 이루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신식학교를 설립한 것은 신민회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우선 학교설립과 교육방침을 국권회복에 부합토록 지도하며, 신민회 스스로 시범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오산학교, 대성학교 등)② 대중계몽운동계몽강연과 학회의 토론회, 서적, 잡지출판활동, 청년운동 등이 대표적 예이다. 내용은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신사상, 신지식, 신산업의 계몽, 구습타파, 민중과 지식인간 단합의 고취 등이며 군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이루어졌다. 특히 대한매일신보와 소년잡지 태극서관을 이용하여 널리 애국심과 독립의지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유지와 민중들의 교육열을 자극하여 무수한 학교가 설립되는데 크게 기여했다.③ 실업구국운동신민회는 일제의 경제침략을 군사침략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시하였으며 민족산업의 진흥이 신교육과 마찬가지로 바로 실력양성의 길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구성원의 대다수가 서북지방의 상공인이었으므로, 일본인들의 경제적 침탈은 신민회 회원들의 생존권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따라서 신민회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전통적 상공업 천대사상을 공박하여 상공업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산업진흥이 애국이고 곧 구국임을 강조하는 경제 계몽운동을 폈다. 실례로 평양에서 안창호, 안태국 등이 상업회의소, 협동회등의 상인단체를 조직하여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일으키고, 한국 상인의 상권보호운동도 전개했다. 그리고 공장 및 주식회사도 자체적으로 설립하여 신민회 활동의 물적 토대 및 인맥형성에 작용하여 활발한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④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신민회는 국내에서 위와 같은 실력양성을 위한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하여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독립군이 국내에 진공하여 내외 호응하여 봉기하여 일거에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자기 민족으로 국권을 회복할 준비를 하려고 하였다. 예로 이동녕을 중심으로 한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1913~1920) 이동휘와 이종호 등의 동림무관학교, 이갑을 중심으로 한 밀산무관학교등이 있다. 위와 같은 무관학교를 통해 많은 장교들을 배출했는데 진공작전은 무산되었지만 차후 여러 무장투쟁의 기초가 되었다.3) 쇠락과 해체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한일합병을 마무리 지으려고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일제의 주된 감시 대상이던 안창호를 비롯한 이갑·이동휘·신채호·조성환 등은 1909년에 이미 미국과 러시아령 연해주, 서북간도 등지로 망명했으며, 이회영·이시영등 6형제와 회원 일부가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했다.
    인문/어학| 2025.04.13| 3페이지| 1,500원| 조회(70)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한국 고대사(고조선~통일신라)
    한국 고대사(고조선~통일신라)
    우리 역사에 등장한 첫 나라 - 고조선의 형성과 발전1. 단군, 신화에서 역사로① 단군신화는 우리 겨레가 처음 나라를 세웠던 역사적인 경험을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 형식으로 전하고 있음② 단군신화: 앞부분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주인공이고, 뒷부분에는 지상의 곰이 여자로 변해 환웅과 함께 낳은 단군왕검이 주인공임.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은 하늘을 상징하는 환웅과 땅을 상징하는 곰의 결합임 → 하늘과 땅의 신비스러운 결합으로 우리 겨레가 탄생했음을 표현③ 사회 모습과 역사적인 사실들이 함축: 비·구름·바람·쑥·마늘은 농업을 중시했던 청동기시대 사회모습을 보여주고, 곰·호랑이, 환웅 관계는 여러 정치세력이 서로 무력으로 정복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보여줌④ 단군신화는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여러 부족을 통합해 나라를 세운 사실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려는 이념이었음. 단군은 우리 역사에서 첫 계급 국가로 출현한 고조선의 건국 시조일 뿐임2. 동북아시아에 자리 잡은 고조선1) 조선朝鮮에 대한 기록① 중국 책 『관자』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 무렵 산동반도에 있던 제(齊)가 조선과 짐승 가죽을 교역하고 정치적인 관계도 맺으려 했던 적이 있음②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의「흉노전匈奴傳」을 보면, “조선의 서쪽에 산융·동호 같은 종족이 있어, 100여 개 오랑캐가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나옴2) 유물과 문화① 고조선은 처음에는 조그만 정치 세력이었지만, 차츰 우세한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다른 정치세력을 정복하거나 통합했을 것임. 고조선 사람들이 남긴 문화를 ‘비파형동검 문화’라고 함.②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 비파형동검, 고인돌, 미송리형 토기, 팽이형 토기3. 위만, 고조선을 계승하다① 기원전 3세기를 지나면서 고조선과 연의 세력 균형이 깨어짐 → 연은 고조선의 서쪽을 공격했고, 이에 고조선은 중심지를 한반도 서북쪽으로 옮겨 발전하였는데, 이 무렵 남만주 지역과 한반도 지역에는 비파형동검 문화가 세형동검 문화로 발전하였음② 요동 지역에서 망명해온군을 통해 한의 지배를 받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 한다는 것만은 분명2. 소노부에서 계루부로① 고구려 사람들은 기원전 2세기 말 현도군이 설치, 한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음②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여러 집단이 연맹을 이루었을 것이고, 그 중 소노부가 두각을 나타내 연맹을 이끌었을 것이라고 추측③ 소노부가 중심이 된 고구려 연맹체가 이미 성립해 있던 상황에서 주몽이 이끄는 계루부가 압록강 유역에 새로이 출현, 연맹의 주도권이 계루부로 넘어감④ 5부체제: 계루부를 중심으로 5부가 연맹체를 형성해 국가 운영의 중핵을 이루던 이 시기의 정치체제3. 정복 전쟁과 국력의 신장① 고구려 사람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열악한 환경에서 약탈을 통해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획득, 물산이 풍부한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함② 약소세력들을 통합, 서쪽과 남쪽의 중국 군현에 대해서도 침략③ 태조왕 때 옥저를 복속,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하였음④ 진대법: 2세기 말 고국천왕 때 빈민 구제 제도가 마련, 나라의 창고를 열어 춘궁기의 빈민을 구제하는 제도 → 식량 비축이 충분했고, 그 자체가 고구려의 국력이 강성했음을 암시한반도 동남부의 모퉁이에서 일어난 신라 - 신라의 성립과 발전1. 신라의 실제 출현 시기1) 신라의 역사: 기원전 57년에 혁거세가 6촌장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2) 성립시기: 백제(기원전 18년) < 고구려(기원전 37년) < 신라(기원전 57년)라는 이야기3) 연대들을 사실로 믿고 신라의 성립과 발전을 설명하면 안 되는 근거① 탈해이사금은 57년에 즉위해 80년에 사망, 신라가 지금의 보은지역에서 백제와 전쟁을 벌였다고 함②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가 청주를 거쳐 보은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상당 부분이 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야 맞음③ 경기도에 인접한 충청도의 천안 일대는 3세기 전반까지 목지국이 존재하면서 백제를 포함한 마한 연맹체를 이끌고 있었음☞ 목지국이 백제에 의해 멸망한 시기는 대략 3세기 중엽, 탈해이사금이 백제와 벌인 최초의 교전 통합된 이후에도 온조계 못지않은 주도세력으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음② 백제 왕실 교체설’: 백제 왕실이 온조계에서 비류계로 교체, ex)고이왕③ ‘우O’ 라는 이름의 왕족이 많이 보이는데, ‘우’는 당시 백제의 왕성이였고, 비류 설화에서 비류의 친아버지로 나오는 ‘우태’의 ‘우’와 통함 → 고이왕의 즉위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새로운 왕실의 출현을 의미함4. 온조계의 재등장① 고이왕에서 시작된 비류계의 왕위 계승이 끝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움② 근초고왕: 비류계의 왕위 계승이 중단되고, 온조를 시조로 표방하는 집단에 의해 다시 왕위가 이어져 갔을 가능성이 큼 → ‘근초고(近肖古)’라는 왕명은 고이왕의 형으로 나오면서 온조계의 직계 혈통상에 있는 ‘초고(肖古)’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③ 근초고왕의 등장은 비류계의 왕위 계승의 종식을 뜻함④ 백제: 『삼국지』의「한전」에 3세기 전반까지는 목지국이 마한의 주도 세력이었고, 백제는 그 마한 연맹체의 한 소국에 머물고 있었음 → 백제가 목지국을 무너뜨리고 마한의 최강국으로 떠올랐는데 그 시기는 대략 고이왕의 재위 기간이고, 이후 본격적인 세력확장과 체제 정비가 비류계의 왕위 계승 기간에 벌어졌으면, 도약의 발판을 근초고왕이 등장하여 백제는 대규모 정복사업을 벌였음⑤ 근초고왕 때 백제: 중국의 요서 지방과 산동 지방으로 진출, 활발한 해외활동을 벌임⑥ 요서 진출 시기를 탐색하기 위한 2가지 요인- 고구려의 요동 점령과 시기적으로 연결- 요서 지역에서 중국 세력의 지배권이 크게 흔들렸을 때 백제군이 진출했을 가능성⑦ 백제의 요서 지역 점령은 385년 11월 후연 군대의 반격으로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끝나고 말았음 → 이로 인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몰림동북아시아의 패자, 고구려1.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 광개토왕 즉위 : 대외 팽창 → 백제와 후연-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396년에 백제의 58성 700촌을 공파하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해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나옴 ☞ 백제와 연결된 가야와 왜 행사하던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빼앗으려는 목적에서 일어남④ 구야국이 예전만큼 영도력을 발휘하기 힘들어졌고, 가야가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인질로 삼게 했는데, 이것은 신라와 가야 사이의 힘이 무너지고 구야국이 신라에 의존하는 형세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줌⑤ 백제의 근초고왕 때는 가야의 여러 소국이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고 그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음 → 가야 연맹체가 백제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음을 의미⑥ 백제와 교류한 나라 중에서 구야국은 빠져있는데, 더 이상 맹주로서 인정받지 못했고, 새로운 구심점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음을 암시⑦ 구야국의 위상은 400년에 벌어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완전히 붕괴 → 가야 연맹체의 여러 소국은 새로운 맹주의 본격적 출현을 기다리게 됨4세기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와 삼국의 정립1. 4세기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1) 고구려 vs 백제- 고국원왕의 고구려와 근구수의 백제와의 전쟁에서 백제의 승리- 2년 뒤, 고국원왕의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으나 예성강 전투에서 패함 →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의 사망☞ 369년에 벌어진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은 새로운 역사의 전개를 알리는 신호탄2) 고구려의 중국 군현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 중국에서는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5호 16국시대’ 시대- 311년 요동과 낙랑군을 잇는 요충지인 서안평을 공격- 313~31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점령- 315년 현도군을 공격 → 요동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 시도 ☞ 고구려 vs 전연- 고구려는 전연을 견제 위해 후조와 손 잡으려고 하나, 전연은 후조 정벌 및 전연의 배후세력인 고구려를 먼저 없애려고 함- 전연의 고구려 정벌 → 국내성 함락 → 고국원왕 어머니 주씨를 포함한 남녀 5만여명이 포로로 잡힘 ☞ 고구려와 전연과의 우호관계를 맺음- 전연의 중원진출을 꾀해, 후조 멸망시키고, 수도를 ‘계’로 옮겨 중원 국가의 면모를 갖춤- 전진 vs 전연 →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가짐- 요진강 이남에서 수원·여주 이북 지역 정도로 추정)② 거칠부를 비롯해 여덟 명의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한강 상류 10군 차지(충주·제천에서 철령 지역으로 추정)③ 신라는 553년에 나제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지역을 기습해 신주 설치→ 백제는 관산성에서 신라와 격전을 벌였으나 신라의 신주 군주인 김무력의 역공을 받아 성왕이 전사- 고구려의 한강 유역 탈환 시도 vs 신라의 한강 유역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 신라는 국원성을 소경으로 삼고, 한강 하류지역에 북한 산주를 설치, 북한산에 순수를 가서는 이 곳이 신라의 영토임을 확고히 하려는 의지를 천명하는 순수비를 세움-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의미: 국력 신장, 신라의 삼국 간의 중심으로 떠오름, 중국과 직접 통하는 바닷길 확보를 통해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내, 국제질서를 바꾸는 하나의 변수가 됨- 562년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해 낙동강 일대를 완전히 손에 넣음- 한번 점령한 지역은 다시 뺏기지 않으려고 주를 설치해 행정적인 지배체제를 갖춤☞ 한강유역: 산주·북한산주, 가야지역: 대야주, 옛 동예지역: 비열흘주고구려의 수·당 전쟁과 삼국통일 - 7세기 국세 정세의 변동과 전쟁1. 고구려와 수의 전쟁- 589년 중국의 수가 남조의 진을 정복 → 남북조의 분열 구조가 깨지고, 새로운 통일제국 등장- 수는 중원을 통일 한 후, 돌궐을 제일 먼저 굴복시켰음,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와 외교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음- 고구려의 등거리 외교 전략이 무너지고, 수와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비축해 다가올 수의 팽창력에 대비했음- 598년에 고구려 영양왕이 1만 명의 말갈군을 이끌고 요서를 공격 → 당시 고구려와 수 사이의 분쟁 대상이던 요해 지역의 거란과 말갈에 대한 주도권을 먼저 장악하기 위해서였음- 수 문제는 수륙 30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1차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으나, 실패- 612년 1월 수 양제는 113만 3800명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을 개시함 을 받음
    인문/어학| 2025.04.13| 22페이지| 5,000원| 조회(92)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교육사회학(사회변혁이론)
    교육사회학(사회변혁이론)
    교육사회학 : 사회변혁이론1. 비판적 교육관- 경제적·정치적 권력구조 속이나 학교 안의 불평등한 것을 제거하기 위한 교육적 실천을 마련하는 일에 주력하는 관점1) 주요 개념구조적 억압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제도적으로 불리하게 된 상태ex) 헌법재판소 내 재판관 70% 동문주체적 행위삶을 억압하는 구조적 요인들의 실체를 감지(파악)하고 이를 변혁시킬 수 있는 변혁의 주체인 개인의 능력비판 의식- 억압받는 사람이 현실의 본모습을 파악하고, 이를 해방과 변혁의 길로 이끌 수 있는 마음 상태- 비판적 대화 필요 ex)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의식화- 본모습을 파악한 후, 순진함에서 벗어나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일- 허위성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비관적 과정변혁개인과 사회구조 및 제도의 문제를 개혁하려는 적극적인 노력과 구체적 실천역량 강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기르는 일- 관련자들이 협동하여 스스로의 저력을 키우는 일 ex) 시위 참여해방구속의 족쇄에서 벗어난 상태2) 프레이리 : 브라질의 교육 불평등 비판- 억압받는 사람이 현실을 자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에 관심- 억압받는 사람이 자신을 억압하는 존재 조건과 상황을 스스로 깨닫고 극복하는 주체적 행위를 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는 교육 필요- 은행적금식 교육 : 억압을 정당화하거나 억압 상태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기존의 주입식 교육창의적 사고·비판적 사고 불가능침묵의 문화를 지니도록 하는 교육- 비판적 대화를 통한 문제제기식 교육 강조- 민중의 의식화(문맹상태에서 벗어나 비판의식 지닌 상태) → 변혁 → 해방 [의식화 교육]3) 비판적 교육관① 의식화를 통해 학생의 비판적 역량을 강화하여 교육 개혁의 주체가 되도록 함② 학생이 경제적·정치적 권력구조 속이나 학교 안의 불평등한 이념, 제도, 현실을 비판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실천(프락시스) 방안을 마련4) 비판적 교육관의 한계점① 이원적 대립과 그에 따른 지배와 종속, 피지배 집단의 의식화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공존을 위한 화합과 공동체적 노력에 소홀② 다원화되어 가는 교육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함2. 저항이론적 교육관1) 주요개념헤게모니모든 영역에서 지배계급이 행사하는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지배력과 영향력저항사회계급적·이데올로기적·문화적 차원에서의 지배나 구속 상태에 대한 능동적 대항2) 윌리스- 싸나이 : 노동자 계급의 아들들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능동적으로 대항부모의 노동직을 기꺼이 계승(육체노동을 ‘남성적’ 직업으로 여김)남성 우위의 마초적 남성 정체감‘간파’와 ‘제한’을 통해 정체성 구축- 간파 :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대항적 행동이 학교에서 비난받고 결국 좋지 않은 직업을 갖게 함을 알면서도, 지배계급의 문화나 공부 지향적인 학교 현실은 스스로와 맞지 않음을 꿰뚫어 보는 현상- 제한 : 간파를 방해하고 혼란시키는 여러 장애 요소와 이데올로기적 영향ex) 사회가 ‘평등’하다고 교육하여 현실과 혼란 일으킴3) 저항이론적 교육관의 특징① 학생은 주체적·능동적 존재이며 저항하기도 하는 존재② 反학교문화는 노동자 계급의 문화③ 학생은 자신의 정체와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4) 저항이론적 교육관의 한계점①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투쟁에 관한 객관적·실증적 증거 부족② 표면적 저항에만 관심을 두어 이면적 저항이나, 일반 학생의 저항에는 무관심ex) 상류층 학생의 ‘위장적 순응’(죽은 시인의 사회)③ 노동자 계급의 자녀가 보여 주는 반학교문화가 부모의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 간과ex) 부모 曰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해라”3. 포스트모더니즘의 교육관▷ 포스트모더니즘 : 근대적 이성이 추구해 온 합리성과 과학, 객관성을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흐름- 주제, 타자성, 다양성과 차이, 작은 이야기, 일상적 이야기, 개별 담론 등을 강조- 교육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을 새로운 각도(비판적)에서 해석하거나 대안을 제시- 상대성, 열림, 유연성 강조1) 주요 개념국지성개인 또는 소수자의 이야기나 그들의 의미체계가 지니는 부분성, 개별성, 특수성탈중심성모든 사유를 통제하는 하나의 중심적 체계에서 벗어나 개별성, 국지성, 특수성을 중시하려는 경향주체- 중심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진 주체나 자아- 객체화된 존재(≠주체적 존재) : 해석된 나, 관조된 나주체성- 이데올로기화한 개인의 정체성-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 대해 갖는 사회적·언어적 구성물로서의 느낌이나 생각- 주체성 = 정체성 + 이데올로기ex) 엄마 = 여자 + 모성애타자/타아(other/Other)- other : 배제되거나 차별받는 사람이나 소외자, 소수자- Other : ‘형성된 나’의 주체성, 나 안의 또 다른 나주변화중심에서 이탈되어 주변에 위치하는 존재 상황, 곧 배제, 차별, 소외받거나 비주류가 된 소수자들의 존재 상황차이사람들 사이의 서로 다름 → ‘차이의 미학’해체이미 형성된 어떤 개념 또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으로 분해하는 일주체의 정치학이데올로기에 의해 잘못 형성된 개인의 정체성의 허위성을 벗겨 본모습을 파악하고 그 허위성에 대항하거나 개선하려는 집단적 노력ex) 여성권, 흑인의 음악적 노력2) 관련 사상가▷ 리오타르- 보편·타당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진리는 없음- BUT 무정부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음▷ 푸코- ‘지식’과 ‘권력’이 늘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음 ∴ 지식 = 모종의 권력을 드러나지 않게 위장한 것- 지식 : 역사적으로 생산, 축적, 확산된 특정 담론의 총체- 담론 : 문자뿐 아니라 비문자로 된 텍스트와 그 속에 깔려 있는 의미들을 총칭
    교육학| 2025.04.13| 4페이지| 1,500원| 조회(74)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1970년대 유신독재와 민주화운동
    1970년대 유신독재와 민주화운동
    1970년대 유신독재와 민주화운동1.1970년대 남한의 유신독재1) 유신독재의 배경외부적인 배경으로는 닉슨 독트린의 선언, 미국과 중국의 접촉 등에 따라 냉전 체제가 완화되면서,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권위주의적 정권을 유지해 오던 박정희 정부에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내부적인 배경으로는 1960년대 말에 미국의 수입규제와 차관에 대한 원리금의 상환 부담 등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것, 무리한 공업화 추진 결과 노동자들의 노동 착취로 발생한 사회 불안(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도시 빈민층의 급증과 그에 따라 발생한 도시문제, 또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을 강행하여 황폐화된 농촌 경제,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터진 정부의 각종 실정과 비리가 있었다. 또한 당시 국내에서는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어 반공정책에 위협을 주었다. 이러한 중에서 박정희 정부는 사회 질서 유지와 국가 치안을 내세워 장기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2) 유신 독재의 성립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의 지상 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구실로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 중지 등 일부 헌법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에서 효력이 정지된 헌법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우리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 체제는 동,서 양극 체제하의 냉전 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의 대화 같은 것은 전연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 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같은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따라서 나는 부득이 정상적 방법이 아닌 비상조치로서 남북 대화의 적극적인 전개와 주변 정세의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 실정에 가장 알맞은 체제 개혁을 단행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오늘 이 같은 결심을 국민 여러분에게 솔직히 알리면서 나의 충정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번 비상 조치는 결코 한낱 정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국권을 수호하고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성실한 대화를 통해 전쟁 재발의 위험을 미연에 막고 나아가서는 5천만 민족의 영광스러운 통일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실로 우리 민족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불가피한 조치라고 확신합니다.이와 더불어 전국에 걸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사당과 야당 당사에 탱크를 주둔시키면서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10월 유신’이라 불리는 초헌법적인 헌정 중단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는 통일 지향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특징으로 한 헌법개정안을 의결, 공고하였고 이는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그에 따라 12월 23일 실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제 1차 회의에서 재적 2,359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2,357표의 찬성으로 박정희가 제 8대 대통령이 되었다.박정희는 여러 이유를 들며 개헌을 했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권력 구조상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강화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영구 집권과 독재를 꾀했다.2. 유신독재 이후의 민주화운동과 유신독재의 붕괴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많은 인사들을 투옥하는 등 전례 없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데 대하여 야당과 종교인, 대학생 등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맞섰다. 그러나 유신 독재 정권은 헌법 개정 요구가 사회 혼란을 부채질한다면 민주화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그럼에도 민주화 운동이 더욱 퍼져나가자 ‘긴급조치’라는 응급 수단을 사용하였다. 대학의 흔히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대학생들은 독재를 밀어내고 민주주의를 맞이하기 위하여 열심히 데모를 하였다.1974년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제1호, 2호를 선포하여 헌법을 부정·반대 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만약 위반하는 사람은 영장 없이 구속하여 비상군사재판에 넘겨 처단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개헌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에 앞장선 많은 인사들이 구속되었다. 4월 3일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관련하여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하고 더욱 탄압을 강화했다. 1975년에 들어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더욱 높아졌다. 3월 1일 ‘민주국민헌장’이 발표되었다. 4월 11일에는 서울대학교 학생 김상진이 유서를 대신해 양심선언을 낭독한 후 자살했다. 또 기독교 성직자들도 시국선언을 발표하여 유신 체제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5월 13일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를 내렸다. 원래 잠정적인 성격을 띤 이 조치는 5년간이나 지속되다 유신 체제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 긴급조치 제9호가 선포된 지 9일 만에 박정희를 반대하는 데모가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벌어져, 418명이 연행되었고, 8월 17일에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장준하씨가 등산길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76년에 들어 각지에서 구속인사 석방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기도회가 이어졌고, 3.1사건으로 김대중, 윤보선, 함세웅, 문익환 등이 구속되거나 불구속 기소되었다. 그 이후로 유신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의 열기는 끝없이 높아졌으며 사회의 곳곳에 퍼져나갔다. 특히 YH무역사건과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 항쟁은 민주화 운동을 최고조에 달하게 했다. 그 결과 마침내 10월 26일 현직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하는 ‘10·26사태’가 발생했다. 이로써 18년에 걸쳐 독재 정치를 해온 박정희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참고문헌-김한종 외 5인 저,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금성출판사-한철호 외 5인 저,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대한교과서-김종수 외 3인 저,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법문사-변태섭 저, 『한국사통론』, 삼영사-류승렬 저, 『뿌리깊은한국사 샘이깊은이야기』, 솔1) 1960년대 말, 일본과 유럽경제가 성장하고 소련과 중국이 대립하자, 미국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모색하는 가운데 닉슨 독트린을 선포하였다. 닉슨 독트린은 미, 소, 중, 일 협력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후 미국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서 진영 간의 긴장이 완화되었다.2) 유신 체제에서는 헌법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권리로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었다. 그 권한이 긴급 조치였다. 유신 헌법에 따르면 긴급 조치는 대통령이 ‘천재 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 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 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될 때’ 시행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 경우 대통령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거나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 조치를 할 수 있다.
    인문/어학| 2025.04.13| 3페이지| 1,500원| 조회(82)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청일전쟁의 배경, 전개과정, 결과
    청일전쟁의 배경, 전개과정, 결과
    청일전쟁[1894.6.(?)~1895.1.]1. 배경1) 서양- 15C 이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한 신항로 개척- 유럽인들의 동양에 관한 호기심으로 시작- 광대한 시장 확보→유럽 경제 지위가 크게 상승- 18세기 산업혁명이후 유럽의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 신항로 개척 이후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 수요·공급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됨2) 동양(1) 동아시아 삼국의 개항① 난징조약(1842)- 아편전쟁 후 청나라가 서양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 영국에게 홍콩을 떼어주는 한편 5개 항구를 열어 영국의 군함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청나라는 비슷한 내용의 조약을 미국, 프랑스와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열강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② 미·일 수호 통상조약(1858)-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바쿠후는 미국 함대가 개항을 요구하자 문을 열고,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일본 스스로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 없고, 미국인의 치외 법권을 인정하는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다.③ 강화도 조약(1876)- 일본의 강압 아래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다. 조선의 관세 자주권을 부인하고 치외 법권을 강요하는 등, 일본이 이전에 서양에게서 강요받았던 내용과 유사하다.군함을 앞세운 외세가 개항을 요구하자, 동아시아 세 나라들은 문을 열면서 불평등 조약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 체제는 개항을 강요한 나라들이 확보한 권리를 다른 서양 열강들에게도 똑같이 보장해 주는 최혜국 특권도 인정하였다. 이제 동아시아 삼국은 밖으로는 외세의 간섭을 극복하면서 안으로는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2) 청- 아편전쟁 패배 이후 : 중화질서의 붕괴와 혼란의 시기- 태평천국운동, 양무운동 등 그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중국의 번영을 꾀하는 운동 시작-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된 일본과 동아시아의 질서와 패권을 두고 일본과 다툼(3) 일본- 쇄국 체제를 고수하다 정세의 변화를 살펴 결국 미국의 개항을 요구를 받아들임(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에도막부에 반(反)하는 존양왕위 운동 전개 → 메이지유신 단행(1868)- 중앙집권화, 제도의 근대화 등 서구 문물의 적극적인 수용- 급진적 변화와 개혁 정책으로 인한 불만과 폭동 증가 → 정한론(征韓論) 대두(전국시대 통일로 인한 내부적 혼란과 불만을 임진왜란으로 돌렸던 상황)(4) 조선- 순조(1800~1834)이후 세도정치 지속 : 정치의 부패- 청의 아편전쟁 패배 소식과 잦은 이양선의 출현으로 위기의식 고조- 고종(1863~1907)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이 실정(實定) : 농민 봉기 빈발, 쇄국정치 고수- 병인양요(1866) : 천주교도와 선교사 학살을 빌미로 프랑스 군이 강화도로 침입- 오페르트 도굴 사건 : 남연군 묘(흥선대원군의 아버지)- 신미양요(1871) :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군이 강화도로 침입- 강화도 조약 체결(1876) : 일본과의 맺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개항 이후 조선에 관심을 보인 나라는 청과 일본이었다. 그들은 서양 여러 나라에 빼앗긴 이권을 조선에게서 보충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청과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에 임오군란 이후 청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조선과 청의 관계는 이제까지의 형식적인 조공관계에서 철저한 종속 관계로 변질되었다.(5) 대만사건[1874]유구사람이 대만 토착민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짐. 일본 관리는 관련 토착민의 처벌을 요구했고, 청조는 자국 영토 외의 일이라며 소극적 태도를 취함. 일본군은 대만 토착민을 징벌하겠다는 구실 아래 대만에 원정군을 보내게 되고(1874), 청조는 이를 정당한 행위로 인정하고 살해된 유구민에 대한 보상금 등을 지불. 이는 결과적으로 유구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유구를 일본의 속국으로 인정, 청의 무력함을 나타낸 사건이 되었다.(6) 청·불전쟁[1884-1885]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지키려는 청과 베트남을 식민지로 보유하려는 프랑스 간에 일어난 전쟁. 프랑스가 1861년 선교사 박해를 구실로 베트남 남부지방을 침략하면서, 베트남에 대한 지휘권을 확대하게 되고 이를 승인할 수 없던 청은 프랑스와 외교적 공방을 펼치다 결국 전쟁에 임하게 되고 처참히 패배당한다. 전쟁의 결과로 청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 상실과 더불어 양 국은 천진조약을 맺게 되고 패배에 대한 큰 충격을 받게 된다.2. 전개과정- 1894년 1월 :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 발생- 1894년 5월 : 동학 농민 운동이 확대되자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 1894년 6월 : 청군, 북양함대 인천 파견과 더불어 육군 아산 상륙 [3000명]- 이에 일본군은 톈진조약을 내세워 청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8000명]을 제물포에 상륙- 청과 일본군의 주둔 소식에 동학 농민군은 조선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 이에 조선 정부는 양국에 철수 요청- 일본은 내정개혁을 빌미로 철수를 거부. 조선과 청에 조선 내정개혁 추진 제안- 일본은 조선·청의 거부로 단독으로 내정개혁을 추진하겠다며 병력을 증강- 아산만에서 청의 북양 함대 기습 공격?청·일 전쟁 시작- 조선 내 : 평양전투, 황해 해전 등에서 청군 격파.- 청국 내 : 뤼순 함락[랴오둥 반도], 웨이하이웨이[산둥반도] 점령, 펑후 제도 점령- 일본 측의 승리로 전쟁 종료(1895. 1. 22)3.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1895. 3)시모노세키 조약제1조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독립 자주성을 훼손하는, 청에대한 조선의 공헌 전례(조공, 책봉) 등은 폐지한다.제2조 청은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한다.제4조 청은 배상금 2억 냥을 일본에 지불한다.제6조 청은 조약 비준 후 전권 위원을 임명하여 일본 통상 항해 조약 및 육로 교통 무역에 관한협정을 체결한다. 청은 사스, 충칭, 쑤저우, 항저우의 개시·개항, 일본 선박의 양쯔 강 및그 부속 하천의 자유통항,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삼국 간섭· 만주 진출을 꾀하는 러시아는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장악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이에 간섭하여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토록 압박(청의 수도를 위협하고 조선 독립에 장애가 되며 극동 평화를 저해한다는 명분)· 일본 : 3천만 냥의 추가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랴오둥반도 반환(러·일 전쟁이 반발의 빌미가 됨)
    인문/어학| 2022.10.25| 3페이지| 2,000원| 조회(212)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6
16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3
  • A좋아요
    3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7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9:01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