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는 왜 쏘았는가'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박정희가 수차례 개헌을 하고 영구 집권을 노린다 한들,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쉽게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한 것일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친애하는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정권 창탈을 노린 계획범죄인가, 우발적 사건이었을까. 이 사건을 두고 각종 언론과 책 등이 엇갈린 시각으로 사건을 조망하고 있는 와중, 역사적 사실 관계에 기반 한 심화 보고서를 써보고자 한다.10.26 사건의 중요한 정치적 배경은 유신 말기의 YH 여성 노동자 사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재명, 부마항쟁 등이 있다. 약 19년가량의 독재 정치로 인해 박정희는 신임을 잃었고, 유신 체제에 대항해 전국에서 대항 운동이 일어났다. 김영삼 의원의 재명에 반발해 야당 국회의원들은 연이은 사퇴서를 제출 했고 박정희에게 등을 돌렸다. 민주사회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은 부산을 시작으로 한 시위를 일으켰고, 이는 시민들의 가세로 크게 확산되어 마산으로 퍼져나가 10월 16일 부마항쟁을 촉발시켰다.그리고 10일 뒤 10월 26일, 김재규의 자칭 ‘혁명’ 이라고 불리는 10.26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중앙정보부장의 대통령 살해라는 비극적 소재에 대한 낙담과 충격도 분명 있었겠지만 곧 이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심이 국민들 사이에서 광범위 하게 확산되어 이른바 ‘서울의 봄’ 이라는 용어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구속된 정치범들이 풀려나고 긴급 조치도 해제되어 언론의 자유를 회복하게 한 이 10.26 사태는 자칫 북한의 김일성과 같이 1인의 영구 집권 체제가 될 수도 있었을 한국의 미래를 바꿔놨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고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정치 변동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박정희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지니던 김재규또한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도 ‘미국은 더 이상 독재정권을 지원하지마라’고 주장하였고 이를 계기고 박정희는 김영삼을 사대주의자로 몰아세우며 의원직을 박탈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김영삼의 재명을 막기 위해 전 방위로 압력을 가했다. 이를 지켜보던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으로써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고, 직접 김영삼을 만나 설득을 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은 김재규를 ‘한국 관료가운데 가장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은 특이한 정보부장’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김재규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총재를 제명 하였고, 민심은 박정희에게 등을 돌렸으며 한미 관계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김영삼 의원 제명 이후 글라이스틴 대사가 워싱턴으로 소환 되는 등 한미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이는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학생 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 직후 계엄사측의 입장과 김재규의 상반되는 주장이 있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이 사건이 끝난 후 김재규에 대해 ‘아버지를 죽인 폐륜아’로 규정하며 사형 선고를 주장했다. 그는 김재규가 집권 욕에 사로잡혀 정권 창탈을 노린 계획범죄를 꾸몄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김재규의 입장과 상충하는 발표였다. 김재규는 일관되게 민주회복을 위한 거사였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박정희가 1973년 유신 체제를 발표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수 백 번 넘게 시정을 요구했다고 주장 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자신이 박대통령을 죽임으로써 유신으로 말살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회복하길 원했을 뿐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그는 부마항쟁 현장에 직접 방문 하였고 이것이 단순한 학생 시위가 아니라 곧이어 전국으로 퍼져나갈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운동’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김재규는 “내가 파악한 자료로는 반정부, 반유신의 저항은 점차 확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대통령은 강경책만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대규모의 국민저항이 일어난다면 발포를 직접 지시하겠다고 확실시됨에 따라 그로 인해 희생될 많은 시민들의 생명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대 주장했던 ‘민주화’는 정권 내부에서 발생하기도 하고 외부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박정희는 아마 북한의 김일성처럼 1인의 막강한 영구 집권 체제를 노린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박정희는 점점 더 절대적인 일인 체제를 갈구 했고 육영수 여사가 살해 된 이후 판단력을 잃고 정권 연장을 원하는 주변 세력들에 의한 달콤한 목소리에 현혹되어 자신이 마치 전능한 신인 마냥 끝없는 헌법 개혁을 단행했다. 육영수 여사 살해사건 이후, 새로운 권력을 쥐게 된 대통령 경호 실장 차지철은 1978년 무렵 단순한 보디가드의 영역을 넘어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을 등에 업고 국회, 행정부 등에서 인사를 관여했고 각종 횡포와 의원들에 대한 잦은 폭력을 저지르기도 하며 자신이 ‘실세’ 인 것 마냥 오만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런 차지철을 상당히 신뢰했으며 그는 자연스럽게 최상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대위 출신인 차지철은 대장출신인 김계원, 중장출신인 김재규에게도 오만하게 행동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재규는 차지철과 같은 무례한 사람을 가만히 보지 않는 우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는 김재규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차지철은 매번 중앙정보부의 무능함을 박정희에게 말하기 일쑤였고 면전에다 대고 김재규에게 무능하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이상우, 1985:246)또한 이 무렵 청와대에선 정보부장 교체설이 파다했다. 실제로 김계원 비서실장은 차지철과 함께 후임 정보부장을 물색하고 있었고 김재규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정보실 직원들 또한 경호실 직원들에게 굴욕감과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도중 10월 26일 당시 삽교천 준공식에 김재규가 자신도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차지철로부터 이를 거절당하자 상당한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10.26 사건이 일어나 김재규와 중앙정보부가 차지철과 경호실 직원들을 학살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조갑제: 1987b)실제로 10.26 사건 직전에 부마의원을 지낸 경험이 있는 차지철은 신뢰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정치와 군사 등 광범위한 영역에 세력을 끼쳤다. 이처럼 집권 말기 박정희는 판단력을 상실했고, 그가 신임하고 있는 부하의 말이라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국정 전반을 운영했다. 집권 초반의 야심찬 계획과 야망은 이미 19년가량의 낡고 오래 된 정치에 찌들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1979년 10. 26일 박정희는 차지철, 김재규, 김계원 그리고 미모의 연예인 2명과 함께 연회를 가졌다. 그 당시 화제는 단연 부마항쟁이었고 자연스럽게 그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에 대해 흘러갔다. 김재규는 부마항쟁이 ‘단순한 학생 운동’이 아니라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시민운동’이라고 규명하면서 160명의 연행자중 학생은 16명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강인한 결단력은 없지만 윤리 의식과 민주적 관념이 투철했던 우직한 성격의 김재규는 온건 책을 주장하며 김영삼 총재 재명에 대한 문제 처리 등 근본적인 갈등 해소의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차지철의 입장은 달랐다.“캄보디아에선 3백 만 명을 죽여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나라에서 1백만, 2백만쯤 깔아뭉개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는 이와 같은 소시오패스 적 발언을 했고 더욱이 판단력을 상실하고 차지철을 신임했던 박정희는 그의 말에 동조했다. “서울에서도 그런 시위가 일어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이와 같이 그 날 연회는 여느 날처럼 차지철과 박정희 간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했고, 더욱이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을 까내리는 차지철의 발언들은 김재규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충분해서 김재규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박정희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은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리고 마침내 김재규는 대통령을 조종하는 차지철과, 끔찍이 존경했던 대통령 박정희를 사살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물론 애당초 계획적인 살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마항쟁에서 그가 보았던 시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반감 또한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이고, 차지철에 대한 증오, 민주주의에화학공업 가동률의 하락 등 경제 하락과 같은 요인들도 한 몫을 했다. 미국 또한 한국에 수차례 민주주의로 나아가라고 경고했으며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미 다른 나라의 민주화 사례를 보며 많은 영감을 받고 있었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극우파쇼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데 박정희 자신은 추호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박정희 한 명의 사살로 인해 대한민국의 독재 정치가 끝난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는 곧이어 정권을 장악했고 또 다른 독재 정치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미 시민의식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의 작은 목소리가 공허한 울림이 아닌, 민주 사회로 진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아무리 중앙정보부의 정치 공작으로 국민들을 선동하려 노력해도 이는 한계가 있었다. 부마항쟁 이전에도 민주 사회의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등에서도 유신체제 이후 단식 농성과 침묵시위 등으로 정부에 대항했었고,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었다.박정희의 독재 정치에 대해 알아보며 현 시국과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는 정유라 사건을 통해 나비 효과처럼 촉발 된 것이다. 학점 의혹에 대해 이화여대 생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특혜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으며 이는 배후의 최순실과 박근혜, 우병우, 연관된 대기업 관계자들까지 대대적 수사에 나서 대통령의 파렴치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차지철과 박정희간의 관계 속에서 ‘대통령이 국익이 아닌 타인의 사익을 위한 간언에 휘둘리는 것’, ‘자신의 권력 밖의 권한에 대한 월권행위를 저지르는 것’ 등은 지금 사회의 박근혜-최순실 관계와 참 많이 닮았다.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사사로운 정분에 휩싸여 국정 전반을 운영한 다는 것이 예나
영국과 그리스 비교분석 레포트Ⅰ. 서론영국과 그리스는 모두 유럽연합국(European Union)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경제적 특성이나 역사적 인물의 양상이 큰 차이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은 독일과 함께 유럽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양대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였지만 반대로 그리스는 디폴트 위기에 빠져 아직까지 경제적 혼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두 나라 다 2008년 이후 닥친 금융 위기에 영향을 받은 유럽 국가이기도 하며, 다양한 경제 회복 정책을 내새우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양상을 띄고 있다. 한편으로 이들은 다양한 철학가를 배출했는데, 영국은 베이컨, 홉스 등의 경험주의 사상가를, 그리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의 다양한 고대 사상가를 배출한 국가이다. 이 사상가들은 현제 시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다른 논지를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 등을 나타내고 있다. 본 과제에서는 내 전공과 관련된 ‘영국’과 수업시간에 배운 ‘그리스’의 철학자와 현제 경제 상황에 초점을 맞춰 비교 분석 레포트를 작성해 보고자 한다.Ⅱ. 본론1. 영국 VS 그리스가. 개관항목영국United Kingdom그리스Greece수도런던아테네언어영어그리스어면적243,610㎢ 세계80위 (CIA 기준)131,957㎢ 세계97위인구약 63,742,977명 세계22위약 10,775,557명 세계80위GDP2조 8,534억$ 세계5위2,071억$ 세계43위사상가베이컨, 홉스, 흄, 애덤 스미스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나. 인물 비교1) 영국베이컨 - 17세기 근대 철학자 베이컨은 근대를 이전 시대와 단절된 새로운 세기로 만든 근대 과학혁명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사실 베이컨은 과학자도 아니었고, 과학의 후원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과학혁명에 기여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가 제안한 과학의 새로운 방법론 때문이다. 인간 정신이 일반적으로 갖는 오류를 드러내어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한 후, 베이컨은 과학적 증명을 위한 자신의 고유을 제안한다. 베이컨이 제안한 귀납법은 오늘날 추론의 한 형태로서 귀납의 일종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어떤 원리와 법칙을 발견하기 위한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의 이론을 토대로 지금도 실생활에서 귀납법 이론을 이용한 다양한 풀이들이 행해지고 있고, 고대의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지가 아닌 경험과 관찰을 통한 합리적인 결론 도출이 행해지고 있다. 그는 철저한 과학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과학자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중대한 과학적 업적을 남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통을 극복할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함께 그러한 학문의 방법과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평가받을 만한 것임에 분명하다.애덤 스미스 - 애덤 스미스는 영국 경험론 사상가들 중 역사적으로 큰 획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한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의 이론을 토대로 많은 국가들이 자유 경제 이론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한 저서는 ‘국부론’인데 국부론의 원제는 모든 국민의 부의 성질 및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그는 국민의 부는 흔히 착각 하듯이 금은의 보유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조직적 작업능률에 비례한다고 주장한다. 그 작업 능률 향상의 지름길은 분업이고, 분업은 국부 중대의 필수요소라고 말하며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풋주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 제조업자들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덕분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렇듯 인간의 이기적 본능이 친철함, 박애심, 희생정신 같은 것보다 더 강렬하고 지속적으로 인간에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고 했을 뿐이다. 이렇게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주장이 너무 삭막한 우리 시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지만, 사실 이기심과 보상이 우리를 더욱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역시 원초적 욕구를 쫒는 욕망적인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베이컨 애덤 스미스2) 그리스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그는 문답법을 통한 깨달음과 자각 그리고 덕과 앎의 일치를 중시한 학자였지만 억울한 누명과 정치문제에 연루되어 사형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항상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닐면서 깨달음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는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엄청났다고 한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 그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부분에서 상당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고, 후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30여 편에 달하는 대화록 속에 담긴 형이상학과 국가론으로 유명해진 철학자다. 그의 형이상학과 국가론은 현대서양 철학의 정점이자 근간을 이루게 한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였지만 부모의 경제적 부유함에 취하지 않고 인간과 철학에 심취함으로서 위대한 철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가 염원했던 ‘이데아’는 정말로 존재하는지 증명할 길은 없지만 더욱 완벽하고 이상적인 세계에 다가서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임과 동시에 한편으론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인 현 세계에 불만을 품었던 그가 남긴 일종의 소극적인 반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서 모든 학문에 능통한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철학자였다. 그는 중용, 즉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강조 했는데 용기가 지나치면 만용이 되고, 부족하면 비겁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항상 적절한 상태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의 시초인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라이는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말씀해주신 아테네의 정치제도인 폴리스 속에서 인간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을 긍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림 속에 살아가야 인간다운 삶을 영위 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들어갔다고 본다.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2. 영국과 그리스의 경제 비교1) 영국 경제- 영국의 경제 생산력은 2조 8,534억$로 전 세계 5위를 기록하고 있고, 독일과 더불어 유럽경제를 뒷받침하는 선진 경제 국가로 성장하였다. 런던 증권 거래소의 하루 평균 거래 금액은 미국의 2배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뿐 아니라 영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자원, 숙련된 노동력과 유연한 노동시장, 금융 및 마케팅 지원 서비스, 우수한 국제적 물류 기반 및 연결 서비스 등을 제조업을 육성하는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이러한 영국도 1960년대~1970년대 연 10%대의 높은 인플레이션과 저생산성, 잦은 노사문제 등으로 경제 불안이 지속되면서 이른바 ‘영국병(the British Disease)’을 앓았으나 1979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 총리의 보수당 정부가 재정 지출을 억제하는 한편 공공 부문 개혁,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 개혁 등의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던 중 2008년 하반기에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 위기로 인한 유럽의 경기 침체가 영국 경제에 다시금 영향을 미쳤는데, 고든 브라운 전임 총리는 정부 재정 지출을 늘리는 케인스식 해법의 구제 정책을 계속적으로 발표했고, 다양한 무역 거래와 금융 거래, 숙련된 노동시장을 기반으로 다시 안정적인 경제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2) 그리스 경제 - 그리스의 경제생산력은 2,071억$로 전 세계 4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피그스(PIGS)’ 즉 경제위기에 빠진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중 하나에 속하면서 유럽의 디폴트 위기에 빠진 문제국가 위기에 쳐해 있다. 이 때문에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소매치기, 성매어나고 있고 경제 회복을 위한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경제 위기에 빠친 원인은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그리스의 유로 존 가입이다. 자국 화폐인 드라크마에서 유로로 전환함에 따라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을 상실 했고, 경제 상황이 어려워도 정부의 뜻대로 환율을 조정할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는 2008 금융위기 때문인데, 관광업과 해운업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던 그리스가 경제 위기로 인해 관광객이 감소하였고, 고부가가치 산업이 아닌 관광과 해운업이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경제 침체에 대한 EU의 잘못된 처방을 들 수 있다. 경제 침체로 인해 EU는 긴축재정, 세금인하, 인건비 인하 등의 처방을 내렸는데 이는 오히려 자국 국민들이 소비위축으로 인해 더욱 심각한 경제 악화를 일으킨 것이다.그리스 총리는 경제 회복을 위해 ‘더 이상의 긴축조치는 없다’고 밝혔고, 국내로는 ‘신 건축세’를 감소해 주택 소유주들의 조세 부담을 약화하는 한편 비행기 등에 대한 ‘사치세’를 증가 시켰고, 대외적으로는 ‘자본통제’를 내년 상반기에 완전히 해체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끊임없는 경제 회복의 노력 끝에 그리스 경제는 예상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 오고 있고, 이번 년 GDP는 0.4%로 소폭 상승하는 등 조금씩 나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Ⅲ. 결론영국과 그리스 비교영국은 베이컨, 홉스, 흄 등의 경험주의 사상가를 많이 배출 했고, 애덤스미스와 벤담 등의 공리주의,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사상가들 또한 배출 해 왔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공리주의에 기반 한 자유 경재가 활성화 되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그리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사상가들을 많이 배출 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인 사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두 나라의 사상가들 모두 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영국은 인간의 현실세계에, 그리스는 이상세계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고대 로마와현대 이탈리아의밤 문화Ⅰ. 서론1) 선택 동기2) 개요II. 본론1) 고대 로마의 밤 문화(1) 폼페이 집창촌 - 루파날레(2) 루파날레 내부2) 현대 이탈리아의 밤 문화(1) 이탈리아(2) 이탈리아의 성매매III. 결론1) 두 시기의 공통점과 차이점2) 느낀 점Ⅰ. 서론1) 선택 동기세계 어느 나라 어느 나라에 가던지 대중들의 무료한 일상을 달래줄 유흥 문화가 있기 마련이다. ‘흥겹게 놂’이라는 뜻을 가진 ‘유흥’은 각 나라의 일상적인 부분인 게임, 술에서부터 아주 사적인 부분인 성매매, 집창촌 까지 폭넓게 발전되어 왔고 문화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고대 로마와 현대 이탈리아의 유흥 문화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 나라들이 남성의 원초적인 욕구인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설들, ‘밤 문화’가 특히 잘 발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쁘게 포장된 이탈리아의 겉모습을 조사하기 보다는 눈에 띄지 않는 사각지대를 조사함으로서 이 나라 국민들의 일상적인 문화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이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고, 또한 생일이 지나 성인 인증을 할 수 있게 된 기념으로 ‘밤 문화’에 초점을 맞춰 레포트를 작성하고자 한다.2) 개요본론에서는 고대 로마와 이탈리아의 밤 문화, 성매매 등에 초점을 맞춰 작성하고, 결론에서는 이들을 비교, 대조하고 느낀 점과 함께 마무리 짓는다.II. 본론1) 고대 로마의 밤 문화(1) 폼페이 집창촌 - 루파날레고대 로마 도시 중 하나인 ‘폼페이’는 인구 약 1만2천 명의 귀족들의 휴양지로 이용되던 작은 도시였는데,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화산재에 파묻혀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이자, 식탁 위의 포도주 잔까지 그대로 발굴될 만큼 보존이 잘 되어 당시 로마인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좋은 유적지가 되고 있다.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곳은 바로 폼페이 유적지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곳 중 하나인 루파날레(Lupanare) 즉, 고대 로마의 집창촌이다. 루파날레를 찾아가기는 매우 쉬운데 바닥의 거시기향으로 잘 따라가면 된다. 고대 로마인들의 세심하고 직관적인 배려에 머리가 숙여진다. 루파날레는 라틴어로 루푸스(Lupus), 즉 암늑대의 집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고대 로마인들이 창녀들을 귀한 아들들의 영혼을 잡아먹는 암늑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 귀부인들의 의견이 어떻건 소도시인 폼페이에만도 집창촌이 25채가 있었으며, 종사자 수는 약 300여명 정도로 추산이 되고 있다. 이는 인구 비율의 약 2.3% 정도가 성매매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니 상당히 높은 편이다.폼페이의 위치 루파날레로 가는 바닥의 화살표(2) 루파날레 내부건물은 상당히 좁은 편이다. 당시 로마인들의 신장이 현대인들보다 작았다는 점과, 실제로는 조금 불편하게 해서 빨리 일을 치루고 나가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 등이 위와 같이 좁게 만들어진 원인으로 생각된다. 현재는 조명을 설치해 놓았지만, 그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어두운 방안에서 들어오는 햇빛이나 등불만으로 유흥을 즐겨야 했을 것이다. 이 곳에는 물론 공중 화장실도 있는데, 여기서 수거해 간 오줌은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빨래하는데 사용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오줌이 최고의 세제였던 것이다.당시 여성들의 요금은 시간당 2~8 아스(Ass) 사이였다. 1 아스가 포도주 한 잔 정도의 가격이었으며, 우리나라 현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 아스가 약 천원에 해당한다. 즉, 우리 돈 2천원에서 8천원 사이였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 말도 안되는 가격은 집창촌의 여성들이 대부분 노예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당시 고대 로마의 화폐 체제는 400 아스가 100 세스테르치 였는데, 당시 한 집창촌 건물에서 나온 단지에서 683 세스테르치 에 상당하는 금액이 발굴되었고, 이는 우리 돈 약 270 만 원 정도에 상당하는 거액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아가씨 장사가 돈을 버는 수단이 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게다가 다들 노예 신분이니 언니들 몫도 없어서 고스란히 업주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셈이다.더 내부로 들어가 보면 다수의 춘화(春畵)를 볼 양한 모습을 한 남녀가 그려져 있는데 체위가 현대만큼 다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격투 기술은 2천 년 전에 모두 개발되었다고 하듯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체위는 이미 고대 로마 시대에 거의 모두 구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같이 다양한 춘화를 그려놓은 것은 그림을 보고 흥분하라는 뜻이라는 설과 누비아 등 외국에서 온 바이어들이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여성들에게 "저 체위로 해 달라" 라고 요구하기 위해 그려놓았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재미있는 건 근처에 일종의 "후기 게시판" 같은 담벼락의 낙서들도 출토되었다는 사실이야. "왔노라, 쌌노라, 갔노라" 같은 케사르의 말을 인용한 센스 있는 글에서부터 "어느 집에 이집트에서 건너온 물 좋은 여자가 있더라", 혹은 "어느 집에 갔더니 나한테 바가지를 씌운다"와 같은 정보 공유를 위한 후기 낙서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웠다.이 조사를 하면서 거의 2천년 전에도 있었던 인류의 유산인 성매매를 인위적으로 뿌리 뽑겠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은 매우 오만한 생각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성매매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 현대 이탈리아의 밤 문화(1) 이탈리아이탈리아는 콜로세움 등 고대 로마가 남긴 유산만으로도 충분히 관광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나라이며, 아르마니, 베르사체 등 수많은 명품의 나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경제는 현재까지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피사의 사탑으로 비유될 만큼 지난 3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데, 항상 밤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그 나라의 경제 동향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경제가 어려운 곳에 바로 성매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또한 이탈리아는 로마의 휴일 등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의 무대가 되는 나라이자, 존재 자체만으로 관광 수입이 되는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등 유수의 도시들이 존재하는 동시에 그 지갑을 노리는 소매치기들도 극성을 부리는 나라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반도 국가인 동시에 아름다운 지 혜택을 받고 있어서 프랑스 등지에서 휴가를 오기도 좋은 나라이기도 하다.‘관광 자원이 충분하고, 관광 인구도 충분한데 국가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은’ 3가지 조건이 있다면 당연히 밤 문화도 발달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탈리아 여성들은 포르노 스타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을 만큼 성 문제에 다소 개방적인 마인드가 있어서 직업으로서 성매매를 택하는 데에 정서적 장애가 적은 편이다. 동구권 여성들의 인신매매 루트인 ‘발칸 트레일’ 로부터 유럽으로 수출되는 알제리, 모로코, 동유럽 출신 여성들이 도중에 최초로 포기하고 개인 영업을 시작하는 곳이 바로 이 이탈리아라고 한다.그래서 이탈리아 국경, 로마 피렌체 등 도심은 물론이고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국도 등에서도 거리 영업을 하는 여성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탈리아 당국에서 자체 집계한 성매매 종사 여성 수만 약 7 만 명에 달한다고 하니 전체적인 수는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물론 이탈리아는 원칙적으로 성매매를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유럽 각지에서 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이익을 얻고 있다 보니 딱히 크게 단속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들도 세금을 낼 수 있게 해달라고 항의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 당국이 통장 예금 액수 등을 근거로 세금을 추징하다보니 실제 소득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연금 혜택 등을 받을 수 있는 등 다소 페혜가 있기 때문이다.(2) 이탈리아의 성매매이탈리아에 가본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거의 헐벗은 여성들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이탈리아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의 반절은 타국에서 온 외국인인데, 그들은 개방적인 이탈리아의 문화를 이용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망명한 자들이다.이탈리아의 스트립 클럽 등은 가격이 살인적이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주로 거리 영업을 하는 여성들을 주로 보게 될 것이다. 보통 차에 타서 바로 서비스를 하는 종류와, 차로 모텔이나 여성들 집으로 가서 풀 서비스를 받는 종류 등으로 나뉘는데 차에서 받는 서비스는 30유로, 풀 서비론 이보다 가난한 알제리 계 이민자 등은 차로 이동할 곳도 없어서 노상에서 직접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인신매매 루트인 "발칸의 오솔길"에서 낙오된 알제리 계 흑인 여성들은 보통 이탈리아 국도 등에서 영업을 하곤 한다. 보통 10유로 단위에 영업을 하는데, 이런 10 유로짜리 여성들은 노상에서 일을 처리해야 하다 보니 위생이나 기타 문제를 생각하면 싸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사실 옷차림에서 거리에서 영업하는 여성들은 한 눈에 드러난다. 이들은 지나가다가 도심에서 볼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제노바의 뒷 골목에도 있다. 각 도로에는 100미터 단위로 아예 자리를 깔고 호객 행위를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이탈리아 내에는 다수의 스트립 쇼가 가능한 나이트 클럽들도 존재하는데 술 좀 마시려면 우리나라 룸을 방불케 하는 살인적인 가격에 인콜 비용을 별도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추천할만한 곳은 못 된다. 물론 각 클럽에서는 여러 가지 이벤트로 손님을 끌어모으려 하지만, 샴페인한 병에 300유로(41만원) 씩 내고, 밥만 먹고 사진 좀 찍는 코스를 선택해도 최소 45 유로(6만 2천원) 이상 내야하는 가격 대 탓에 그렇게 성황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유명 DJ를 섭외하듯이 이탈리아의 포르노 배우 등을 섭외해서 출연시키는 등 관광객들에게 다소 끌릴 수 있는 요소가 있기도 하다.이탈리아는 현재 집창촌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직업여성 들이 존재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언어 문제만 다소 해결된다면 여성 수급에 큰 어려움은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의 돈과 모험 정신만 있다면 충분히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탈리아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돈 많은 남성들을 찾는 여성들이 어디에나 즐비해 있고, 심지어 남성들조차 특유의 달콤한 말과 버터발린 목소리로 이탈리아에 관광 온 여성들을 노리고 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은 성욕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상품화가 되어버린 여성들의 현실을 조사하고 있자니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