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독서노트소설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이 세상에 나온 지는 올해로 200년이 되었지만 놀라울 만큼 2018년 현재 시점에서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을 많이 지니고 있다. 피조물의 처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의무, 권리와 의무가 부여되는 방식, 생명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윤리적인 문제 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피조물의 이야기를 흑인의 서사와 비교하여 해석하거나 작가 메리 셸리 개인의 이야기와 연결하여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그러나 작가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부분은 다름 아닌 제목에서 드러난다. 이 책의 제목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제를 살펴보면, 그는 살아있는 피조물을 만든 프랑켄슈타인을 ‘프로메테우스’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인간을 만든 신이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생명 자체를 준 것이 아니라 보다 문명을 이룰 수 있는 근간인 불을 인류에게 전해주었다. 불 사용 이전의 인류가 그저 흘러 가는대로 살아갔다면 불과 불로 만든 도구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인간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그렇다면 박사는 피조물에게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와 환경까지 주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부분까지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생김새로 인해 소외당하고 부적응 상태가 이어져 살인을 저지르는 등 결과적으로 인간 사회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충분한 숙고와 예상이 부재한 상황에서의 무모한 도전이 여러 사람의 비극을 초래했다.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졌다고 생각하든 사회적으로 맺은 계약으로 인해 생겼다고 생각하든, 인간에게 어떤 권리가 주어진다고 공통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권리의 정확한 내용과 적용되는 대상의 범위는 시대와 문화마다 제각기 다르지만 보다 많은 사람과 존재들의 다양한 권리를 인정하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생명체, 혹은 다른 존재를 창조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논의한 바가 많지 않다. 최근 들어 딥러닝 방식의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이들을 어떤 존재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많은 철학적, 사회적 논의가 막 생겨나는 참일 뿐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존재들에 더불어 이들을 만들어 낼 권리가 인간에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단순히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다는 신념적인 논리가 아니라 만약 다른 생명체를 탄생시킨다면 이 존재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디까지 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프랑켄슈타인은 이 고민을 건너뛴 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파우스트를 통해 욕망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근대적 인간상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 책은 책임감 없는 발전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보여주었다. 소수자보다 우선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태도, 진보해 나갈 사회에서 인간 이외의 존재와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시간이었다.
일리아스 독서노트‘일리아스’를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이다. 오늘날의 죽음에 대한 감수성으로 이야기의 배경과 호메로스가 살던 시대에 죽음이 가졌던 의미를 이해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삼천 년이라는 시간과 그에 따른 문화, 기술, 가치관의 변화를 넘나드는 데에는 상상이라는 징검다리가 필요하다.호메로스는 전쟁을 형용하는 수식어구로서 ‘남자의 명예를 드높이는’과 ‘남자를 죽이는’ 이라는 표현을 동시에 사용한다. 어떻게 죽음이 명예를 드높이는 행위가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작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격렬한 전투 가운데에서도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목숨을 잃은 전우의 투구와 방패, 또는 시신을 챙기는 장면이나 적군에 완전히 포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자는 비겁한 자’라면서 완강히 버티는 오뒷세우스의 모습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그런 장면들 중에서도 가장 주제를 잘 표현하는 장면이자 작가의 역량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느껴졌던 부분은 죽음을 묘사하는 상황들이다. 잔인하리만치 세세하게 묘사된 죽음에 대한 첫인상은 약간의 불쾌함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그것이 타인의 죽음이든 나 자신의 미래든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드물어, 아직은 공포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죽음과 글에서 담고 있는 명예로운 죽음에 대한 인식을 되짚어 보면 마냥 극도의 사실주의만을 위해서 이런 식의 표현을 추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들어서고 사라지는 일을 반복하는 가운데, 전쟁에서 싸우다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전투에서 죽는 이들을 명예로이 기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일이다. 어찌됐든 목숨을 내놓고 나서야 하는 전쟁터에 나서는 이들의 이름이 이렇게 문학 속에서 몇 천 년 이상 불리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책에서 이야기되는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또한, 호메로스는 헥토르나 파트로클로스처럼 주요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아닌 이소스, 안티포스, 오일레우스, 힙폴로코스처럼 다른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 인물들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만약 당대 사람들이 그토록 죽음을 통한 명예를 중요시했다면 작가가 이렇게 상세하게 평범한 인물들의 마지막을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길게 늘어놓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은 인물들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실제 현실에 있는 인물을 향한 것인지 자신이 만들어 낸 캐릭터를 향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불멸의 신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인간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그 차이의 한가운데에 있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호메로스가 전쟁의 병사 1, 2, 3으로 지나갔을 수도 있었던 개개인에게 바친 명예는 한 인간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조명하는 과정에서 발현된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는 역설적인 발상은 오늘날의 삶에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잘 몰랐던 인물의 장례식에서 듣는 추도사, 한 인물이 세상을 떠나면 TV를 가득 채우는 다큐멘터리는 그 인물이 걸어온 길이 어떠했는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단 몇 줄의 묘사에서도 이것을 가능케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작가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보물섬 독서노트얼마 전 방구석 1열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변영주 영화감독이 ‘장르 영화는 필연적으로 문학에 의존한다.’ 라고 말한 것을 보았다. 오늘날 해적이라는 집단의 세계관을 다룬 이야기들이 다양한 매체에서 소비되는 가운데, 보물섬이라는 책은 변 감독의 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외다리와 어깨에 새를 올려놓고 다니는 해적, 보물이 숨겨진 섬이라는 설정 등 이제는 클리셰로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한 책에서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바다라는 미지의 공간, 어딘가 부족해 보이고 늘 거친 성격의 구성원들, 안정적이지 못한 수입과 생활 등을 생각해 봤을 때 ‘해적’이라는 공동체는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이었을 것이고 여전히 그들에 대한 이미지는 정상에서 한참 빗나가 있다. 특히나 해적 중 가장 우두머리 격인 존 실버는 외다리라는 장애까지 가지고 있다. 장애라는 것이 절대적이거나 악함이 아님을 말하기에 앞서 당시 사회에서 신체적 결여를 가진 이는 더욱 외면당하기 쉬웠던 것을 생각했을 때, 해적 집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퀴어’ 문화라고 볼 수 있다.오늘날 퀴어 문화를 생각하면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한 동성애나 양성, 트랜스젠더 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퀴어 문화가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소수자의 문화를 다루는 것을 그 근간으로 한다고 생각했을 때, 기존 사회에 정상적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그들만의 고유성을 가지는 해적들 또한 퀴어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바로 이 소수자의 문화를 그려낸 방식에 있다. 퀴어 영화나 문학을 보면, 이들을 아주 특별하게 그리거나 아무렇지 않은 듯 평범하게 그리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러나 보물섬은 해적들의 특수한 문화, 예를 들어 배 위에서의 각자의 역할, 그들만의 유대감 등을 다루는 동시에 권력과 재물을 둘러싸고 벌이는 다툼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겪을 법한 투쟁으로서 그려낸다. 이 지점에서 이들의 문화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책에서 해적으로 대표되는 소수자 문화의 정체성과 특징은 언제나 주류 문화권의 사람들이 어떻게 규정짓는가에 따라 다르게 소비되기 때문이다.보물섬은 인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비주류의 시점에서 다루었다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작품의 주제와 이 작품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함께 생각해 보면 더욱 흥미롭다. 보물섬은 언제나 ‘위대하다’라는 수식어가 붙는 파우스트나 일리아스와는 다른, 아동 문학이라는 비주류의 맥락에 놓여 있다.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지만 어른 또한 그 안에서 많은 것을 짚고 넘어갈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소수자에 대한 책의 태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작가가 의도했던 부분이 아닐지라도 작품과 독자의 관계가 역사 속에서 변화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할 수 있어 이야기의 내∙외적으로 보다 풍부하게 감상했던 작품이다.
파우스트 독서노트괴테의 파우스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공간을 넘나든다. 따라서 주제 면에서도, 그레트헨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시민 사회에서의 고뇌, 신과 악마의 관계, 지폐라는 새롭게 생겨난 가치를 둘러싼 일화 등 한 작품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 가운데 가장 좋아하고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1부에 나오는 ‘발푸르기스의 밤’과 2부의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이다.먼저, 1부에서 묘사되는 마녀들의 축제인 발푸르기스의 밤에는 다양한 악의 존재들이 나와 저마다의 이야기를 한다. 보통의 문학 작품에서 ‘악’의 존재는 선과 대비되어 부차적인 존재로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영화나 책에서의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는 매력적인 ‘빌런(악당)’ 또한 정의를 위해 싸우는 히어로들이 있어야만 그 존재 가치가 생긴다. 그러나 이 장면의 경우, 악 그 자체의 속성과 다양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매 작품마다 절대적인 악을 등장시키는 정유정 작가는 자신이 악에 계속해서 주목하는 이유를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에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으면 포식자의 악, 나아가 나 자신의 악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에 의존하던 전통에서 벗어나는 의미에서, 단순히 절대적 선이라고 생각되던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외면하고 싶은 대상인 악마에 대해 들여다보고 마주하는 것은 전환되는 근대성이 견고하게 형성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또한, 2부에서 다시 등장하는 발푸르기스의 밤은 배경으로 설정된 시간과 공간이 고대 그리스로 변화한다. 담은 2막의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은 2부 전체 줄거리의 중심이 되는 헬레네를 찾으러 가는 과정을 담았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메넬라오스가 헬레네를 찾기 위해 벌였던 길고 참혹한 전쟁의 분위기가 아니라 발랄함과 유쾌함을 빌려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고전적’ 이라는 표현이다. 언뜻 보면 파우스트는 악마와의 계약을 맺는 등 전통적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스핑크스, 히론 등의 인물의 입을 빌려 육체적 아름다움만이 아닌 외형과 정신의 조화를 아름다움의 원형으로 여겼던 고대 그리스의 가치관을 환기시키면서 아름다움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따라서 과거의 것에서 탈피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님을 암시한다. 시대적으로 파우스트의 2부가 1부보다 문학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것도 크고 넓은 세계관을 다루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세계에 대한 보다 깊은 사고 과정을 보여주었다는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괴테의 파우스트가 지금까지 대작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드러내고자 했던 인간 본성에 대한 고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질 논의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괴테는 이에 대한 논리적이고 그럴듯한 해석을 제시하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여전히 납득시킨다.
생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독서노트모든 문학 작품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시에 대한 감상은 간결한 표현 때문인지, 모두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감정은 그 속성이 애매하고도 개인마다 고유한데, 서로 다른 사람이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서로 다르기에 같은 감정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이 시집 두 권은 개인적으로 아버지와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시공간을 달리 하지만 특정한 매개로 사랑하는 이와 연결되는 경험 또한 특별했다.시집 ‘생일’은 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을 엮어냈는데, 사랑의 아주 다채로운 감정을 각기 다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사랑을 6월에 피어난 ‘새빨간 장미’에 빗대어 그 강렬함을 노래한 시(‘생일’ p.94)부터 한 순간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시(위의 책 p.160),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이 죽고 난 후의 감정을 노래한 시(위의 책 p.164)도 존재하는데, 사랑이라는 감정이 하나의 단순한 이음절 단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없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시에서 알 수 있듯이 혼란한 시대에서 스스로의 고민이 숨김 없이 드러나 표현되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생을 마쳐 순수한 20대 청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아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가장 주목한 부분은 대표작 ‘길’과 ‘별 헤는 밤’에 나오는 ‘까닭입니다’ 라는 표현이다. ‘길’에서는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산다는 화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안타깝다. 시인이 결핍된 무언가를 결국 찾지 못 하고 광복도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안쓰러워진다. 찾는 것이 곧 사는 이유가 되었던 그 ‘잃은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위치도, 그저 젊은 청년으로서 방황하던 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이 이 시점에서 끝나고 고민이 미완성된 채 우리에게 주어지면서 고민의 길도 우리 세대까지 넘어오고, 그가 했던 성찰은 이 시대로까지 이어진다. ‘별 헤는 밤’에서도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반복적으로 삶이나 행동의 이유를 찾았기 때문에 그의 고뇌가 이다지도 깊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윤동주의 시를 읽고 ‘생일’을 다시 읽으니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특히, ‘찻집(‘생일’ p.122)’ 이라는 시에서 중년의 성숙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만약 윤동주가 해방 이후의 삶을 살았다면 어떤 시를 썼을까 하는 상상도 하게 만들었다. 간결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의 가능성을 체험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