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와 아웅산 수치1. 미얀마의 지리미얀마 연방 공화국을 줄여 미얀마라고 부른다. 동남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며 수도는‘네피도’이다. 68%의 버마족과 샨족, 카렌족, 친족, 카친족, 몬족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로 미얀마어를 사용하고 있다.미얀마의 총 면적은 678,500㎢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 중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는 40번째로 크다. 북서쪽은 방글라데시의 치타공 구와 인도의 미조람 주, 마니푸르 주, 나갈랜드 주, 아루나찰프라데시 주, 북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자치구, 북동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윈난 성과 접하고 국경의 총 길이는 2,185km이다. 미얀마는 남쪽과 남서쪽으로 벵골 만 및 안다만 해에 이르는 1,930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서단에 위치하고 있고, 지형적으로는 서부의 아라칸 산맥, 북부의 고산지대, 중부의 저지, 동부의 샨 및 테나세림 산지가 펼쳐져 있다. 중부는 다시 건조지인 상 미얀마분지와 저습지인 하 미얀마로 나뉜다.2. 미얀마의 역사미얀마에서는 10세기 이전에 몇 개의 민족 문화가 번영했던 것을 볼 수 있지만, 버마족의 존재를 나타내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적에서 버마족의 존재가 확실시되는 것은 버간 왕조(11세기 ~ 13세기) 이후이다. 버마족은 10세기 이전까지는 아직 에야와디 강(이라와디 강) 유역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미얀마의 역사는 크게 미얀마(버마)왕조시대, 식민지 시대, 민주공화국, 군사정권과 민정이양으로 나눌 수 있다. 간략하게 소개해보도록 하겠다.① 미얀마(버마)왕조미얀마 남부의 땅에는 예부터 ‘몬족’이 살았다. 그들은 도시 국가를 형성했고 해상 교역을 행하기도 하였다. 북부에서는 7세기에 ‘퓨족’이 퓨국을 건국했지만 몬족과 퓨족의 성채는 9세기에 남조에게 멸망했다. 남조 지배하에 있던 티베트버마어계의 버마족이 무인지대가 된 이라와디 평원(미얀마)에 침입해 ‘바간 왕조’를 수립했다. 바간은 최초의 작은 성시로서, 아나우라타 왕(재위 1044년~1077년) 때에 왕도가 되었다. 버간 왕조는 13세기에 몽골의 침공을 받아 멸망해 미얀마 동북부에 사는 타이계의 샨족이 강성해졌지만 이윽고 버마인에 의한 ‘따웅우 왕조’가 건국되어 한때는 ‘아유타야 왕조’나 ‘란쌍 왕조’, 운남 변경의 타이족 소국을 지배했다. 17세기에 따웅우 왕조는 쇠망하고 남부의 몬족이 강성해졌지만 18세기 중엽 ‘얼라웅퍼야 왕’이 버마를 재통일했다. 이것이 ‘꼰바웅 왕조’이다.② 식민지 시대1937년, 버마가 인도로부터 분열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42년~1945년에는 일본군 점령기가 시작되었고, 이때 많은 미얀마인이 일본군에 학살당하였다. 1947년 2월 12일, 팡롱 조약에 따라 미얀마는 자치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꼰바웅 왕조 시대에 버마는 영국령 인도에 대한 무력 침략을 발단으로 하는 영국-버마 전쟁에서 지고, 1885년에 멸망했다. 1824년부터 1826년에 걸친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는 버마가 인도를 지배하는 영국에 대해서 벵골 지방의 할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영국측이 거부하면서 무력에 호소했지만 패했다. 영국의 도발로 일어난 1852년의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버마는 국토의 반을 잃었고 1858년부터 1861년에 걸쳐 새 수도 ‘만달레이’를 건설해 천도했지만, 1885년의 제3차 영국-버마 전쟁으로 왕조는 멸망하였다. 1886년, 영국령인 영국령 인도에 병합 되어 그 한 주가 된다. 티바우 민 왕(Thibaw Min)과 왕의 가족은 인도의 고아에 가까운 라트나기리로 보내져 그곳에서 사망했다. 1936년에는 자치권을 얻어 영국령 버마가 되었다. 1942년 아웅산과 일본군이 진출하면서 일본은 버마에서 영국을 내쫓고 버마 자유주라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이도 얼마 오래가지 못하고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다시 영국의 소유가 되었다.③ 민주 공화국 (1949-1962)1948년 1월 4일에 버마는 독립하여 버마 연방이 성립되었다. ‘사오슈웨타익’이 첫 대통령으로 승임하였다. 그리고 우누가 첫 국무 총리가 되었다. 예전의 다른 영국 식민지나 해외 영토와 달리 버마는 영국 연방의 일원이 되지 않았다. 대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 의회가 성립하였고 다당제하에서의 선거가 1951~1952년부터 1956, 1960년에 치러졌다. 그러나 민주 정치 시대는 1962년에 ‘네윈 장군’의 쿠데타로 종식되었다. 네윈은 거의 26년간 버마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버마를 통치하였다.④ 군사 정권과 민정이양1988년에 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불만으로 터져 나온 ‘8888 항쟁’을 군부가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그리하여 직접 선거가 허가되었다. 1989년에는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었다. 1990년, 자유 선거에서 '아웅 산 수 지'가 이끄는 야당세력이 압승하자 군부는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아웅 산 수지'를 무기한 가택연금 조치를 시켜버렸다. 1991년, 아웅 산 수 지는 미얀마의 정신적 지주이자 희망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2005년 11월 7일 ‘핀마나’를 행정 수도로 이전시켰고, 2006년에는 미얀마 정부의 공식 수도를 양곤(랑군)에서 ‘네피도’로 이전하였다. 2007년, 미얀마 반정부 시위 발생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미얀마 연방 공화국 선포하였다.2010년 11월 7일 미얀마 군사 정권은 총선을 통해 민간에 정권을 이양했다. 군부의 지원을 받는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압승했다. 2010년 총선은 관제 야당들을 들러리로 내세운 사실상 관제선거였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3. 미얀마의 정치군사정권의 ‘아웅 산 수 지’ 가택연금 조치로 인해, 미얀마 군정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이 강화되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 5월, 미얀마 군정이 의연히 민주세력에의 억압을 계속하여 미얀마에 대한 제재를 2010년 5월까지 1년간 연장한다고 발표하였다. 군정 관계자와 국영기업의 미국 내 자산 동결, 송금 금지 등의 조치가 계속되고 있다. 유럽연합의 외무장관 이사회도 2006년부터 도입되고 있는 미얀마 군사정권에의 제재조치의 연장을 2009년 4월에 결정했다. 2008년 민주화를 기초로 한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통과하였으며 2010년 총선 후 이듬해 민정 이양하여 군사정권이 종식되었다.하지만 이 총선은 그저 이름만 "민주적인" 선거였다. 실제 총선에서 압승한 정당은 기존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는 ‘통합단결발전당’으로, 실질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은 이어지고 있다. 또한 미얀마에서는 의석의 25%를 군부에게 할당하도록 하며 배우자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대통령 피선거권이 부여되지 않는다. 이 두 조항에 대한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으나 무시되고 있고 정부는 폐지할 논의가 실질적으로 없음을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미얀마는 지금도 실질적인 독재국가인 것이다.4. 아웅 산 수 치미얀마(버마)의 비폭력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서 미얀마 최대 야당인 민족민주동맹의 당수이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며 ‘라프토상’과 ‘사하로프상’, ‘노벨 평화상(1991)’을 수상했다. 1962년 버마에 쿠데타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군정이 들어선 이후 1988년 미얀마의 군사 독재자였던 ‘네윈’ 장군이 물러났다. 아웅 산 수 찌는 마침 그 해에 병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미얀마에 돌아와 있던 터였다. 1988년 8월 8일 오전 8시 랑군(현 양곤)항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을 신호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는 8888 항쟁이라고 불리며, 1962년 네윈 장군의 쿠데타 이래 26년 만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였다. 유혈진압 닷새째 결국 군부는 지도부를 교체하며 정치 전면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실각 위기를 기회로 삼아 1988년 9월 18일 소 마웅 장군의 신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무자비한 학살로 신군부는 정권을 재 장악했다. 그 달 말인 9월 24일, 아웅 산 수 치를 총비서로 민족민주동맹(NLD)이 만들어졌다.
판소리계 소설 , , : 조선 후기 소설 가운데 판소리를 통해서 생성되었거나 대중적으로 전파된 작품.판소리 계열의 소설은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작품으로 〈춘향전〉·〈흥부전〉·〈토끼전〉등이 있는데, 발랄한 민중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 후기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이다. 이들 소설에서는 탐관오리의 횡포, 양반 계층의 몰락, 서민의식의 성장 등을 동시에 제기하면서 현실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이러한 판소리계 소설은 향토적인 배경, 현실성 있는 소재, 사실적인 표현, 다채로운 수사 등을 갖춘 데다 인물에 있어서 다양한 전형이 창조되어 있어 조선조 국문 소설의 최대 성과라 할 수 있다.1. 은 사설에서 소설로 정착되고 나서 사본 30종 목판본 7종 활자본 50-60종이 남아있어 작품의 종류가 많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경판본 과 완판본 이다. 양본 모두 국문체로 쓰였다.경판본 에서 춘향은 애초부터 창기의 신분으로, 이 도령은 바람둥이인 것처럼 설정해 놓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연애가 자연스러운 결구를 보였고 이들의 행동이 별 무리 없이 작품구성상 일관성이 있어 소설작품으로서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완판본 에서 춘향은 부계로는 양반, 모계로는 퇴기의 딸로 설정해 놓고 있으나 작품상의 행동은 어떤 EO는 근엄한 ‘열녀’로 어떤 때는 음녀로 나타나고 있어 통일성이 없다. 이도령 역시 수줍은 도령으로, 어떤 때는 굉장한 탕아로 나타나고 있어 역시 성격의 모순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 점은 소설작품으로서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의 문학사적으로서의 의의를 5가지로 나누어 논의해볼 수 있다.① 소재의 현실성조선시대 소설이 대부분 비현실적 세계에서 소재를 취재한 데에 비하여 은 당시사회의 현실적인 생활에서 취재하고 있다. 소설이 생활의 재현이라 본다면 은 어느 정도로 소설의 본질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② 배경의 향토성조선시대의 소설이 대부분 중국을 배경으로 택하고 있음에 비하여 은 남원지방의 지리적 사실들을 소상하게 표현하여 사건과 인물의 유기적 관계를 맺게 하고 있고, 민속 · 사소 · 생활상이 비교적 잘 표현되고 있어 향토문학으로서의 본령을 발휘하고 있다.③ 표현의 사실성조선시대 소설에서 표현되는 서술적, 설화적, 관념적 표현법들이 비하여 은 미숙한 대로 장면묘사, 인물묘사가 비교적 상세하게 시도되고 있음으로 어느 정도 현실적, 사실적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④ 성격의 창조성에 있어서는 당사의 각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변사또의 탐관오리 상이나 월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상의 형용은 성격창조로서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⑤ 주제의 저항성이 여타의 판소리계 소설들과 공통된 현상으로 겉으로는 ‘열(烈)’이나 ‘효’, ‘우애’ 등의 양반적 취향을 나타내는 것 같으면서 속으로는 민중적 기질을 저변으로 깔아 지배층에 항거하는 이중구조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여 판소리계 소설로의 확증을 더하여 주기도 한다.은 평면적 구성에 있어서나, 지나친 과장과 생략에서 오는 이야기 전개의 무리 등의 결점이 또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살펴 본 점으로 보아 연암의 단편작품들이 한문소설의 백미였다면 이 또한 그와 함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국문소설의 백미로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2. 은 몽고의 설화 와 같은 설화가 한반도로 유입되어 창극화되고 또 소설화되었다. 은 향토 특유의 소설로 윤색되어 있는데, 배경이 충청, 전라, 경상도 어름이라는 한국의 어느 지방이다. 또 인물이 모두 한국 특유의 인간 군상들이며, 인물묘사에 있어서 순연한 우리의 민간속어(民間俗語)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 이런 점은 이 판소리계 소설 중에서도 서민의 채취가 가장 많이 담겨져 있음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따라서 은 서민소설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는 그 해학성에 있다. 에는 시종 익살과 웃음이 벅차 있다. 흥부의 초년 고생상은 하나의 비극이다. 그러나 그 묘사는 웃음 없이는 읽을 수 없고, 놀부의 몰락과 정도 비참의 극을 다한 것이지만 도처에 해학이 넘쳐흐른다. 웃음은 모든 것을 덮어 버릴 수 이TRh, DJejS 괴로움이라도 웃음으로서는 순간적이나마 잊어버릴 수 있다.이 민족에게는 슬픔이 많았다. 그러나 그 모든 슬픔을 슬픔으로 그냥 넘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 그것을 중화시켜 버리는 특징이 있다.우리의 민요는 대부분이 익살과 웃음이 많다. 그러나 그 민요를 향유한 서민들의 생활이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비참했었으나 그 뼈아픈 슬픔을 오직 웃음으로서만 삭여버리려 했고, 또 그 비극을 일소에 붙여 체념과 함께 청산해 버리려 했다. 그러나 은 웃음은 그처럼 뼈아픔 웃음만은 아니다. 그 유능한 작가는 애초부터 명랑한 ‘유머’ 소설을 기도했던 것처럼도 보인다. 특히 ‘왈짜’, ‘사당’, ‘각다귀’, 같은 ‘등짐장사’들의 거칠 것 없이 뱉어버리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허무하고 맹랑하면서도 뼈있고 정연한 말들로서 이같이 풍요한 속어의 활용은 해학을 동반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
- 전쟁 대신 지혜로움으로 -징기스칸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지도자이자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정복전쟁은 시대가 인정할 만큼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러 영웅들이 그러하듯 그들이 저지른 살인은 전쟁의 승리와 정복을 위한 일이라 하지만 그 이면의 참혹함을 결코 피할 수는 없다. 희대의 살인이라 할 수 있는 징기스칸의 정복전쟁도 이 영화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몽골 제국의 세계정복과 자신이 모든 것을 다스리기 원하는 계략만 있을 뿐 기본적인 인간애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냉소적이고 잔인한 그를 굴복시킨 ‘구처기’라는 지략가가 등장한다. 이 영화는 징기스칸은 물론이거니와 ‘구처기’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징기스칸은 중국 지역으로 정복전쟁을 시작하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전체를 정복하였다. 몽골인들에게 있어서는 징기스칸이 매우 위대한 영웅이며 훌륭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로 여겨질 것이다. 그것은 자국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의 살육은 미치도록 잔인하다. 어찌 보면 잔인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제국의 전쟁무기는 최신식 무 기로 그 어떤 나라의 무기보다 강력했다.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 다른 국가들은 모두 두려움과 공포에 떨려하고 징기스칸을 두려워했다. 영화를 보면서 징기스칸의 심리가 궁금했다. 정말 그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가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지만 이렇게 희대의 살육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내가 생각해왔던 징기스칸은 위대한 위인이자 우리나라의 이순신과 같은 존재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는 이제 일반적으로 히틀러와 같은 학살자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영화에서는 징기스칸과 같은 존재감을 나타내는 ‘구처기’라는 인물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는 고령의 나이에 징기스칸의 부름을 받았다. 불로장생에 비결을 묻기 위해서였다. 징기스칸은 방대한 몽골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불로장생을 원했던 것이다. 구처기는 징기스칸에게 그의 서역정벌을 멈추기를 권하였고 “사람은 죽어도 원한은 죽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전쟁과 지살을 멈추라 말했다. 구처기는 아마 징기스칸이 불로장생하여 오래 몽골제국을 지배하면서 산다 할지라도 죽은 원한들의 복수에 결코 불로장생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징기스칸에게 그러한 두려움 따위는 있었을까? 아무렇지 않게 많은 목숨을 말 한마디로 죽였던 사람이다. 그런데 징기스칸은 구처기의 설득과 설득을 통해 전쟁과 살육을 멈추게 된다. 구처기는 진심으로 징기스칸의 행위를 걱정했었을 것이다. 후에 징기스칸이 서역정벌로 인해 괴로워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영화를 보면서 감탄하게 된 것은 구처기를 인물의 지혜로움을 보고 난 후였다. 그는 나이가 많았지만 자신보다 어린 징기스칸이 인간다워지길 바랐을 것이며 그것이 그가 결코 불로장생 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우길 원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징기스칸이 아니라 구처기가 위대한 위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감히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징기스칸을, 학살자를 구처기가 설득을 통해 막아낸 것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구처기라는 인물에게 더욱 집중하게 되었고 그의 행위와 말함에 있어서 거짓됨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어찌 보면 이 영화에서 징기스칸보다 구처기에게 초점을 맞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관객에 따라 수만 가지 해석과 생각이 나오겠지만 우리는 이 영화를 보기 전 예측하기로는 징기스칸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나처럼 징기스칸보다 구처기를 더 많이 떠올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감독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새로운 발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징기스칸은 워낙 유명한 인물이고 전 세계인들에게 매우 친숙할 수 있다. 그런데 구처기는 어떠한가.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구처기라는 인물에 대해 거의 몰랐던 게 사실이다. 의외의 인물이 영화를 통해 나에게 비춰지면서 새로운 시각이 생기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 전반적으로는 지루했던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초반까지만 해도 어떠한 교훈이나 인상은 전혀 없었는데 구처기라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서 후반부에 가서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구처기는 나에게 신선과 같이 다가왔다.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당시 세상은 이러한 상황을 구제할 무언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징기스칸을 막을 수도 없었지만 용기 있게 그와 맞서 싸울 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징기스칸의 눈치만 살폈을 것이다. 이러한 잔혹한 세상 속에서 구처기는 모두에게 신과 같은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징기스칸의 지살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구처기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살육당해야 하는 그들에게 잠시의 희망도 가질 수 없었지 않았을까. 징기스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 구처기에게 얻을 수 있는 지혜라고 생각했다.이 영화를 통해서 또 한 가지 들었던 생각이 있다. 지금까지도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다. 현재 21세기는 모두가 평화가 지속되길 바라고 서로 지구촌이라고 하는 한 마을의 주민으로 생각하며 크고 작은 문제들을 협상함으로 전쟁 없는 세상을 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 쪽에서는 여전히 크고 작은 총기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현재 남북한이 전쟁 휴전 중인 상태이다. 북한은 꾸준히 핵을 만들어 자신들의 무기로 여기고 있다. 쉽게 전쟁이 날 것이라 생각은 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아직까지 이 시대에는 전쟁과 피해, 살육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았을 때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제작자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전쟁들을 평화로 이끌 또 다른 구처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을 본 전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이 더 이상은 전쟁의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길 바라며 전쟁을 주도하고 일으킬 각국의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모두가 평화로 공존하는 시대에 살길 희망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