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 나타난 환경과 정치 1? 복합적인 장르를 가지고 있음. 장르의 측면에서 보자면 다면적인, 복합적인 특징.? 환경이란 주제는 최근에 들어서 화두가 되고 있고, 현안이 되고 있는 주제? 은 전형적인 주류영화의 스타일을 갖춘 작품? 주류영화란 일정한 형태의 서사를 가지고 있음. 그 서사는 올림푸스 서사를 말함.? 올림푸스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비극적인 부분은 삭제하고 올림푸스가 잘된부분까지만 차용해와서 그 이야기 틀로 다양한 살을 덧붙어 이야기를 만들어냄.? 우리가 극장에서 보는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올림푸스 서사임.? 결국에 우리가보는 많은 영화들은 영웅에 관한 영화라는 것이다.? 영웅이란 우리보다 뛰어난 능력, 비범함을 갖춘 인물이다.? 영웅이 그야말로 하나의 결점도 없이 완벽한 인물들이라면 할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영웅이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영웅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어야하기 때문에 영웅은 완벽한 인물이서는 안됨. 비록 남들보다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육체적 정신적 외모적으로도 뛰어나더라하더라도 무언가 결핍이 있어야함. 그 결핍으로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김.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고 결핍을 채우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과 위험을 겪고 결국에는 문제를 해결함.? 보통의 영화들은 열린 결말을 취하려고 하지 않음. 보통 극장에 갈 때는 쉬고, 편안하고 영화를 보는 만큼이라도 세상사의 근심을 덜고자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가기 때문. 열린 결말이란 것은 사람들에게 생각의 여지를 주는 것임. 머리 아픈 일임.? 영화가 처음 발명이 되고 이라는 영화가 상영된이후, 처음에는 영화가 신기해서 사람들이 보러옴. 간단한 장면들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이 실증을냄. 초기영화를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을 화면으로 옮긴 것이 대부분임. 동영상을 신기해서 보러왔지만, 그 장면이 재밌는 것은 아님.? 영화가 가진 딜레마.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장르이다. 이를 두고 영화가 예술이냐 아니냐를 논쟁함.? 영화가 탄생한 초기에는 카메라는 귀한장비였기 때문에 어놓는 하수구의 수평과 수직이미지가 충돌적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장르 영화에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탈출과 추적, 구원, 정치적 모티프에 환경의 모티프가 첨가되었다.? 또한 영화에서 경찰은 자주 진실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히치콕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모티프이다. 즉 사람들은 진실을 믿지 않는다.#15.? 박강두의 가족들이 탄 봉고차는 비가 내리는 원형구조의 주차장을 올라감.? 이때 시각적 이미지는 탈주와 추적의 모티프를 강조한다.? 미군의 지시로 버려진 약품이 강물을 오염시키고, 그 결과 돌연변이인 괴물이 탄생했는데, 정작 피해자는 이 과정과는 아무 관련 없는 박강두의 가족. (이런 현실이 우리에게도 있다.)? 이 영화가 환경 오염의 모티프로 출발하여 사회 정치적인 수준으로 이동한다.? TV를 통해 방송되는 간호사 인터뷰는 방송의 허상을 나타낸다.? 간호사는 박강두의 가족에 대해 전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방송이 절대 진실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16.? 영화에서 환경오염으로 인한 아이러니한 상황은 계속된다.? 방독명을 쓴 사람들은 오염이 되자 않은 곳에서 방독면을 쓰고 다닌다.? 주인공들의 방황하는 하수구의 미로는 병원을 탈출할 때 주차장을 연다.#17.? 박강두의 가족은 완전한 가족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딸까지 잃을 위기.? 여기서 고아 형제는 딸의 대체 인물.? 이들은 최소한의 도덕성을 유지.? 그들은 매점에서 컵 라면을 훔쳐 먹을지언정 돈을 훔치지는 않는다. (고아형제가 구원받는 것을 시사)? 다리 밑 하수구에 갇힌 현서의 고립감과 공포는 수직과 수평 몽타주의 충돌로써 탁월하게 표현.? 이 영화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진정성이 있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탁원한 묘사력.영화 에 나타난 환경과 정치 3#18.? 괴물을 곁에 둔 상황에서 박강두의 딸인 현서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위가 상황에 잘 대처한다. (현서의 고립감 고조. 현서의 시선을 보면 옆에 괴물이 있음. 현서 내면의 위기감을 잘 보여줌.) (영화를 볼 때 시각적인 형상들을 살펴볼 필요가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으로 이동. 이 파국을 맞는 남녀와 대조되는 인물도 등장. 이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감.)#4.(감독의 나름대로의 재해석)이 영화가 톨스토이 원작에서 가져온 것1. 카프카즈에 러시아 군대가 존재한다는 것2. 공격과 퇴각을 반복하고 휴전과 전투를 반복하는 전쟁이면서도 본격적인 전쟁은 아닌 것 같은 상황3. 시대적 배경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4. 기타 제목, 등장인물들의 인물, 그리고 몇 가지 모티브→ 그러나 감독은 크레딧에 톨스토이 원작이라는 점을 밝히지 않았은넫, 이것은 그가 기존의 문학 작품 영상화 방식에 벗어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추정.#5.? 이 작품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주인공인 쥘린과 라린? 이들은 거의 영화 전체에 걸쳐서 화면에 함께 등장하며, 대조적인 캐릭터로써 작품의 서사를 이끌고 있다. (대조적이기 때문에 계속 갈등이 생김)? 영화 초반부에 신병 바냐 쥘린은 신체검사를 받는다. (라린은 고참 병사)? 의사들은 그에게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합격”이라고 말한다.#6.? 그리고 이반은 그와 같이 신체검사를 받고 있는 청년들의 무리에 합류? 화면이 바뀌면서 그는 이미 새 군복을 입고 있으며 동정심이 많은 장교인 사샤 라린을 긴장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라린이라는 인물은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지내옴. 이 사람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움.)? 사샤는 사령부를 마치 자기 고향집처럼 여기며, 그 곳에서 그는 주인과도 같은 인물이며 모두 그에게 호감을 갖고 대한다.영화 에 나타난 전쟁과 자연 2?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자연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주인공과 그렇지 않은 주인공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대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이 긍정적인 결과를 맞이하고 그렇지 않은 인물들은 파국적인 결과를 맞이한다.? 「안나 카레니나」 : 장교와 만났을 때는 상당한 성적 매력이 묘사. 두 사람의 사랑하는 정도가 달라서 안나는 기차에서 자살. 안나는 브론스키를 모든 것을 버리고 갈 정도로 사랑했압둘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인에 포로로 잡혀있는 아들을 이반과 교환하려 한다.#25.? 이러한 상황의 대치는 외국인 관객에게는 낯설어 보이는 이 전쟁이 무의미한 것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영화가 흥행하기 힘든 이유)?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카메라는 직접적인 전투장면보다는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전쟁영화로서 잘 만들었다는 말은 고전이고 걸작이라는 전쟁영화는 대게 이렇다. 정말 스펙타클하고 물량을 쏟아붓는 영화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직접적인 전투장면을 보여주지 않음.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비극이 양쪽 모두에 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묘사하는가가 중요)? 라린이 하산을 장난스럽게 대하는 것이나 이반이 압둘의 딸인 지나에게서 느끼는 묘한 감정들이 바로 그러한 예.#26.? 인간은 스스로 살인 혹은 보복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하고 생동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상황에 직면하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비인간적인 것이며, 인류가 알고 있으나 극복하지 못하는 전쟁의 처참한 보성을 이 영화는 묘사? 영화의 마지막 장면 : 지나의 요청을 무시하지 못한 압둘로부터 살아남은 쥘린은 기쁨에 들떠 달려가지만 곧 마을을 폭격하러 오는 헬리들을 보게 된다.? 그는 “멈춰! 이젠 필요 없어!”라고 외치지만 이 말이 헬기 조종사들에게 들릴 리가 없다.? 영화의 진정한 결말은 다음 장면 : 화면 밖에서 줄린의 목소리가 들리고 화면에는 라린, 하산, 압둘 그리고 지나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사람들은 같이 화해하고 조화롭게 살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함: 전쟁 때문에)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영화의 방점이 증오심이 아닌 화해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27.? 태고의 자연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타타르인들에 대한 러시아인의 침략을 그린 이 영화에서 우리는 영화에 고유한 시각 언어로 묘사된 광대한 자연과 전쟁으로 인한 그것의 파괴, 자연에 순응하는 인물들과 전쟁에 참여해야하는 인물들의 대조를 느낄 수 있다.(이 영화에서 광대한 자연은 카메라의재배치한다. SF적 영화에서도 미래는 역사적인 미래인, 일종의 먼 훗날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간과의 자유로운 유희는 안드레이 따르고프스끼의 서사적 맥락에서 인간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똑같이 책음을 진다는 것으로써 가능하게 된다.#18.- 한편에는 서정적인 분위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따르꼬프스끼와 촬영 감독 유소프는 젊은 간호사와 홀린 대위의 만남을 촬영하기 위해 매우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을 찾아냈다. (만남을 아름답게 시각적인 분위기로 전달하기 위해)(전쟁 중에서도 사랑, 인간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환경의 소리 없는 경고, 영화 1해운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왔고,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이미 쓰나미현상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환경문제) 흥행을 위한 영화 어필.재난영화이다. 상당히 대규모 제작비가 들었으며 블랙버스터 영화그래서 환경영화라고 볼 수 있다.주류영화 어느 정도 있음.그런데 우리는 이런 주류영화 서사 전개 파악하는데 넘어서서 환경오염성을 경고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흥행 성공 외에 어떤 사회적인 진지한 주제를 전달한다면 상당히 이상적인 영화.진지하지 않은 척하지만 안으로 진지한 주제의식을 담고있는 영화.제목-우리에게 익숙한 공간, 아주 열린 공간, 여기에 쓰나미가 덮친다.-해운대 지명하나로서 상당히 많은 것을 전달해 주고, 의문을 줌.#1.(전형적인 주류영화의 서사를 사용 - 올림푸스 서사)(잘된 영화 초반부에 몇 가지를 제시하여 후반부가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슬쩍슬쩍 던져줌. - 굉장히 치밀하게 구성된 작품)- 이 영화는 도입부부터 쓰나미의 위험성을 경고.- 첫 장면은 주인공 최만식과 여주인공인 연희 아버지와의 인연에 대한 것. (연희에게 떳떳하게 다가가기 힘듬. -주인공의 결핍)- 연희 아버지의 죽임이 재난(쓰나미)과 관련.- 이 지점에서 역시 이 작품도 일정 부분 개발과 보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현재 쓰나미는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으나 박감
박헌영 ? 한국의 대표적 사회주의자#1. 성장 과정과 교육? 1900년 5월 28일 충남 예산 출생? 서당에서 한문 수학? 1912년 대홍보통학교 입학 ~ 1915년 졸업?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입학?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YMCA에서 영어공부? 1919년 3·1운동에 참가? 3월 23일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20년 일본을 거쳐 상해로#2.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 1920년 말~ 21년 초, 상해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 : 재상해 한인공산당? 1921년 5월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 당 기관지 올타 편집자.- 사회주의연구소에서 연구? 1921년 8월 북경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고려공청) 중앙총국 결성- 중앙총국 책임비서- 1922년 3월 중앙위원 박헌영, 고준, 조훈, 김단야, 임원근#3. 귀국, 투옥? 1922년 4월 귀국 중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3명이 신의주 경찰에게 체포-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1년 6월 징역형 선고- 1924년 1월 19일 만기 출옥? 출옥 후 활동- 1924년 1월 출옥 후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 3월에는 고려공청 책임비서로 재선임- 1924년 4월 15일 동아일보 입사, 1925년 6월 해고#4. 언론과 사회주의? 1925년 5월 동아일보 퇴사? 8월 조선일보 입사. 10월 15일 해직? 1924~27년 좌파 언론인 활동 활발? 화요회계가 최다, ‘혁신’ 조선일보 중심? 1930년대 좌파 언론인 퇴조#5. 조선공산당의 창립?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립- 박헌영은 화요회 내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출석? 1925년 4월 18일 고려공청 제1차 창립대표회-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주도? 1926년 3월 31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6차 총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승인? 제1차~4차 조선공산당? 코민테른, 조선공산당 승인 취소? 당재건을 위한 지침서로 1928년 ‘12월 테제’ (조선문제에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발표#6. 두 번째 투옥? 1925년 1업 발발? 10월 인민항쟁 발발? 북한으로#17. 남조선노동당 결성? 1946년 10월 6일 평양 도착. 월북 직후 평양에 대남사업 중앙연락소 설치? 8월 3일 조선인민당 여운형이 공산당과 신민당에게 3당 합당 제의? 남조선노동당 결성- 11월 23-24일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 결성? 1947년 1월 해주에 대남사업 해주연락소 설치- 이곳을 중심으로 남한에 아지트와 연락하며 대남 사업? 1947년 남한에서 박헌영의 비중- 3월 21일 미군정 문서 “지금 만일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18. 제2차 미소공위 결렬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 1947년 5월 21일 미소공위 재개? 1947년 10월 18일 미소공위 무기 휴회. 사실상 결렬? 1948년 4월 20일 박헌영의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해 남한 단독선거 보이콧 투쟁을 호소-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되는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 1948년 4월 19-24일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선거 시행#19. 한 민족 두 국가? 7월 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에 참석- 남북조선의 통일적 선거를 실시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와 통일중앙정부를 조직하기로 결정- 남한 지역에서는 남조선인민대표회를 통한 간접선거의 방법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결정? 8월 21일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 개회- 남한 유건자 850만 1,749명 중에서 77.5%가 남조선인민대표자선거에 참가했다고 주장? 8월 25일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출#2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9월 2일 대의원 572명(남 360, 북 212)으로 구성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부수상 겸 외무상으로 선임#21. 한국전쟁과 박헌영?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남반부의 로동당 전체 당원들과 전체 세정책? 4) 총독부 및 금융권과의 긴밀한 관계#7. 1930년대 이후의 사업 확장? 1920년대 후반의 세계대공황기에도 순조로운 성장? 1930년대 들어 ‘조선공업화’ 정책? 지주 중심의 농업 정책의 한계-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엔블록 경제권의 한 축인 조선을 일정 수준으로 공업화할필요를 인식했기 때문- 조선공업화는 일본에서 시행된 공장법이나 중요산업통제법의 적용을 피해조선에 진출한 일본자본의 이해에 부합되는 것이기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붐’과 ‘조선공업화’정책으로 특수를 누림- 만주붐 : 광대한 시장과 사업 기회. 일부 조선의 방직·경공업 산업의 자본과 상품이만주에 진출하여 경제특수를 누렸던 것. 대표적인 회사가 경성방직- 해외로의 사업 확장 : 만주, 중국 등으로. 1939년 남만방적주식회사 설립? 사업 확대로 종단적으로 통합된 일관생산체계를 갖춘 면직물 운영 조직으로 발전#8. 해외로의 사업 확장? 만주지역에서 불로초가 인기? 해외로의 사업 확장- 1939년 남만방적주식회사 설립- 자금부족과 경영위축? 1937년 만주 삼양사#9. 총독부 및 일본 자본주의와의 관계? 총독부와의 관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총독부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는 것? 그러나 자본가들은 정치구조에 의해 종속되었다기보다는 정치구조 내로 합류되었으며,권력과 자본주의를 하나의 전체적인 복합체로 융합하여 버렸다.? 총독부의 우위 하에 기업의 자율성이 보장? 보조금과 식산은행의 대출 등이 1920년대 경영위기 극복의 결정적 요인? 산업조사회 등을 통한 경제정책에의 참여? 사적인 관계도 정책 결정과 수행의 역학관계에 중요한 요소? 전시체제 하의 통제경제 체제에서도 공존 가능? 기업도 자원과 생산의 동원 필요성을 인정? 기업에게 정책 결정·수행 과정에 참여할 여지? 권력의 통제가 궁극적으로 회사의 이윤추구에 역작용을 하지 않았기 때문? 정부와 기업 간의 관계는 상호 이익을 안겨 주던 유착.? 일본 자본주의에의 예속 : 기술부문, 기계류, 원료, 시장 확보 등에서.? 나아가 기관, 특히 식산은행과의 관계 중시- 다른 대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금융자본에 예속되어 감#7. 사회 활동? 물산장려운동, 과학운동에 참여.? 교육 : 1929년부터 협성실업학교 경영 참여1939년에 인수하여 광신상업학교로 개명? 안창호를 후원? 서울도시개발계획- 1936년 서울도시개발계획을 구상 / 1961년 ‘남서울계획안’#8. 전쟁과 협력?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 1939년 4월 화신무역주식회사 설립 / 1941년 9월 회사 통합? 전쟁과 기업통제의 와중에서도 화신은 발전을 거듭? 합병으로 기업구조 변화- 주주 구성 및 중역진 변화.일본의 국가독점자본주의 구조의 한 부분으로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것.? 1944년 10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9. 해방 이후? 몇 차례의 위기- 노동자자주관리운동, 반민특위의 체포? 화신 재기 성공-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화신백화점을 재건하고, 신신백화점 신축- 본격적인 재기는 5.16 이후박정희정권은 ‘일본과의 선’이 필요했으며, 박흥식은 필요한 인물- 1960년대 섬유화학공업, 1970년대에는 전자공업으로 사업을 확장? 1980년 전 그룹 부도 처리? 이후 1994년 사망할 때까지 은거#10. 박흥식(1903~1994)? 1930년대에 ‘재벌’의 반열올라 몇 차례의 부침을 겪었지만, 1980년까지 ‘재벌’이었던 인물? 박흥식과 화신의 흥망성쇠는 20세기 한국 자본주의사를 순수하게 비춰주는 프리즘20세기 한국자본주의사의 축도? ‘식민지기 평민출신 상업자본가의 성장’이라는 의미. ‘정열과 사업욕의 응축물’ ‘인격화한 자본’ 그 자체이태규와 리승기 - 남북을 대표하는 과학자#1. 식민지시기 일본 유학과 연구 활동? 이태규와 리승기는 해방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들- 식민지기 과학자로서 화려한 경력- 해방 후에는 교육 생정의 중요한 위치? 한 사람은 미국으로 떠났고, 한 사람은 북한을 선택#2. 이태규? 1902년 충남 예산 출생?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 남원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중 일본으로 이순신과 나폴레옹을 존경- 이광수의 [이순신] : 영웅숭배형 소설의 전형. 영웅 이순신은 열등 민족 개조의 주체.60년대 이후 이순신 추앙의 출발점- 나폴레옹 : 식민지 청년의 세속적 성공을 표상. 30년대 입신출세형 영웅주의의 연장선.군인으로의 변신의 심리적 출발선#2. 성장가정과 교사생활? 1932년 4월 1일 대구사범학교 입학- 잦은 결석과 저조한 성적- 교련, 미술, 음악에 두각?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훈도로 발령- 민족적 고민- 이순신 이야기, 조선어와 태극기 교육#3. 군인 박정희? 1940년 교사직을 사퇴하고 만주행- 일본인에 대한 복수심이 단초- 군인이 되어 출세하겠다는 야심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 군국주의 하에서 최고 권력 집단은 군인 “긴 칼 차고 싶어 갔지.”- 민족적 고민 → 항일이 아닌 ‘체제 내 경쟁’? 1940년 4월 4일 만주 육군군관학교 입학- 만주군관학교 : 1932년 설립된 봉천군과학교의 후신1932년 봉천에 2년제 간부훈련소를 설립1939년 수도인 신경에 세워진 정식 4년제 사관학교생도는 일계와 만계로 구분하여 선발일계와 만계 중 성적 우수자는 일본육사로 유학- 조선인은 총 44명 졸업. 해방 후 파벌 형성. 5.16 주체세력? 성적도 우수하고 매사 성실- 훈육관 칸노 히로시(菅野弘)와의 친분. ‘2.26사건’ 관련자. 군사쿠데타의 ‘선구자’- 1942년 만계 240명 중 수석 졸업. 일본 육사로 진학- 1944년 일본 육사 57기 졸업?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 소위로 임관. 만주군 보병- 8단의 단장 부관으로 부임?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과 관련된 여러 설- 독립군토벌설- 비밀광복군설- 간도특설대설? 해방 후 1945년 9월 북경으로. ‘해방후광복군’에 합류#4.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 작전)? 5.16이후 ‘원대복귀’를 둘러싸고 갈등 → 반혁명사건- 당시 원대 복귀가 대세. 그러나 김종필 등 박정희 친위세력은 이를 반대- 1963년 3월 11일 중앙정보부는 김동하·박임항 요구
[1] 김옥균 - 초기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 갑신정변#1. 김옥균●1851~1894(안동김씨)●충청남도 공주 출생●김병태의 장남●6세 때에 종숙 김병기의 양자로●장동김문의 후계자로#2. 장동김문 (장동김문의 형성과 명문가로의 성장)●안동김씨는 조선전기에는 미미하였다가 조선후기에 부상하여 19세기 초반 최대의 가문●장동김문은 16세기 중반 이후 서울에 세거하던 일파? 재지 사족의 중앙 진출이란 사회 흐름에 조응하는 것●16세기 중후반 이후 안동김씨 내의 일파가 서울에 세거하며 장동 김문을 형성●병자호란 때 김상용·상헌 형제의 행적? 장동김문을 척화의리를 상징하는 가문이 되게 함. 이후 서인-노론을 대표하는 가문으로서남인-소론과 같은 여타 정파의 사상적 불철저성을 비판●김수항·김창집의 가화(家禍). 노론 최고의 명문가로 등장? 숙종대의 정쟁과정에서 노론의 영수였던 김수항이 죽음을 당하고 경종대에는 그 장자 김창집이노론 4대신의 한 사름으로 신임옥사에 죽음을 당하면서 영조대 이후 노론 주도의 정국에서 최고의 명문으로 등장#3. 장동김문 (정조대 김조순(1765-1832)의 정치활동)●정조대 장동김문의 정치적 진출? 노론의 핵심이었던 장동김문은 영조의 완론탕평을 반대하고 척족(戚族)의 전횡을 비판하는청론(淸論)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표방? 정조의 준론탕평에 부응하여 대거 정치적 진출●정조의 정치적 후원? 장동김문의 외척화에는 정조의 역할이 결정적? 정조는 김조순이 1785년 21세로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 각별한 관심과 기대를 표시하면서 그를 집중적으로 후원? 결국에는 외척으로 선택하여 세도를 맡기기에 이르렀던 것. 정조의 외척세도론은 1804년에 전위(傳位)를 하고 상왕이 되어 수원으로 물러나 외척을 매개로 상왕 주도의 정치를 하겠다는 정국구상? 정조의 이른 서거로 정조의 실제 의도와는 달리 정국은 외척이 세도를 장악하는 형태로 귀결#4. 장동김문 (19세기 세도정치의 전개)●19세기 세도정치? 세도정권은 안동김씨 이외에도 정조와 가까웠던 남양홍씨, 풍양조씨, 여흥국사무아문과 외교를 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분리·설치(군제의 정비, 기기창 설립, 혜상공국 설치, 의복제도 개혁, 박문국 설치, 한성순보 발간, 근대적인 도시행정)●민영익이 주도하던 외아문에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참여하여 각종 개화·자강정책 추진●1880년대 초까지 개화파는 국왕과 민씨 세력에 의존. 개화파는 개항 이후 정부가 추진했던 근대화정책의실무관료를 역임하면서 고종의 신임을 받고 급속히 성장해간 세력●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모두 소장관료로서 정부에서는 보조적인 지위에 있었으나 김옥균·홍영식 등은별입시로서 국왕을 수시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개화세력을 확대하고 각종 개혁사업에 참여●외아문이 주요 활동 공간. 외아문을 주도하고 있던 민영익과 협조 관계●그런데 1883년 말부터 청국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면서 민씨세력 내에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친위세력이 분화. 내·외아문 간의 갈등으로 표출. 국왕과 민씨세력에 의탁해 성장했던 개화파는 입지가 축소? 갑신정변#9. 민영익●여흥민씨●1860~1914●민태호의 아들, 민승호의 양자●죽동 8학사 (김옥균, 홍영식, 어윤중 등)●1877년 과거 급제 후 초고속 승진●통리기무아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핵심정 역할#10. 갑신정변 (원인)●임오군란 이후 김옥균과 민영익으로 대표되는 두 그룹의 분열1) 대청정책의 차이 및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 청 / 일본? 민생안정파 / 부국강병파2) 재정조달 문제? 당오전 발행 / 일본 차관 도입3) 외교노선 문제? 대러시아 외교4) 권력투쟁의 측면? 제세력의 對閔民 권력투쟁#11. 갑신정변 (과정)●1884년 10월 17일 오후 7시 정변 발발? 일본의 지원? 정변주도 핵심인물 : 김옥균, 홍영식,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노론 핵심가문 출신? 민영목, 민태호, 윤태준, 이조연 등 민씨 정권의 주요 인사 살해? 개화파가 핵심권력 장악, 종친을 대거 등용? 14항목의 정령 발표? 청군의 개입으로 46시간만에 붕괴? 홍영식, 박영교 피살, 김옥균 등은 망명●른나무?,?직성행년편람 直星行年便覽?은 ?개인의 수호성을 순조로이 이끌고 한 해의 운세를 알기 위한 지침서?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 유명 일간지 에 홍종우의 기사가 나옴#5. 프랑스 유학 (4)? ?다시 꽃이 핀 마른나무?(심청전 프랑스어 번역판) 서문에 드러나는 홍종우의 사상- “나는 이 글은 공화국에 사는데 습관이 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을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기질의 문제이다. 이후가 국민의 관습에 끼치는 영향은 오래 전에 증명되었다. 그 누구도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과 같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번에는유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6. 프랑스 유학 (5)? 군주권을 중심으로 조선을 주체적으로 근대화 하는 것- 조선의 자주권과 국왕 중심의 체제 유지와 함께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 프랑스 유학 시절 동안에도 항상 한복을 입고 다녔으며, 고종과 대원군의 그림을 지니고 있었음? 동양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 동양의 가치들도 근대화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 무분별한 서구 문물 유입 경계, 조선의 실정에 맞는 도입 강조- 서양 문화의 이기주의와 폭력성 경계- 이러한 사상은 이후 그의 정치적 행보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침#7. 김옥균 암살 (1)? 1893년 7월 23일 일본으로 출발? 1893년 12월 고베에 체류하는 동안에 이일직이 찾아와 김옥균과 박영효 암살 모의? 김옥균에게 접근-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귀국하는 개화 엘리트이고 자신이 홍영식과 친척임을 내세워 접근- 그의 개화사상에 동조하는 척하는 한편, 수준 높은 프랑스 요리를 김옥균의 지인들에게 선보임으로신뢰를 업음.#8. 김옥균 암살 (2)? 홍종우는 일본 정부로부터 냉대 받던 김옥균의 처지를 강조하며,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과의권 간섭에 대한 반대, 불평등 조계의개정, 만국공법의 철저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서양종교 반대, 민선의원 설립 등을 주장#14. 중추원 논쟁? 독립협회는 특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상원을 구상한 것과는 달리,홍종우와 황국협회는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하원 설치를 주장? 의회를 통해 황제권을 관료들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한 것#15. 홍종우와 황국협회? 황국협회의 결정- 외국 상인이 국내로 침투하면서 국내 상인이 대거 몰락. 국내 상업 보호를 위해서는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상업 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생각.- 전국적인 연락망을 갖고 있는 보부상들에게 주목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상무의회와 황국협회를 결성? 지방기구 설치와 권한을 둘러싸고 정부와 대립- 대중 연설을 통해 정부 비판? 독립협회와 대립. 물리적 충돌 발생- 황국협회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습격? 결국 치안 유지 명목으로 고종은 양 단체를 해산.#16. 홍종우의 몰락? 1900년대에 들어서 일본의 영향력이 다시 강해지면서 친일파 관료들의 권력이 강화. 홍종우를 비롯한황실 주변 세력이 중앙 정계에서 도태? 1903년 1월 제주목사로 좌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에서의 위치가 절대적이 되고, 길영수·이용익 등이 체포되자 신변의 위협을느낀 홍종우는 1905년 4월에 사직하고 전라도 무안군에 은거? 1909년 12월에는 외국으로 망명, 1910년에 귀국했다는 설도? 1913년 63세로 사망. 비참한 최후#17. 어떤 인물이었나?? 식민지기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위해 김옥균을 강조하던 상황에서 그를 암살항 홍종우는 부정적인 평가? 김옥균과 그의 동지가 중심이 된 개화파가 아니면 모두 시대 착오적인 수구파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프랑스 유학 등을 통해 제국주의의 본질 파악일본을 포함한 열강들의 적대시서구 문물의 무분별한 유입반대, 자주적 입장에서의 개화 강조 ‘자주적 개화파’[3] 이회영 형제 - 명문가 출신의 독립운동가들 -#1. 영화 ‘암살’? 2015년 작정식 이주민 통합 자치단체? 신흥무관학교- 1911년 5월 신흥강습소 설치- 1912년 7월 통화현 합니하에 새로운 교사를 신축- 추가가- 명칭문제- 군사교육 + 중등교육- 이석영이 절대적인 공로자#7. 신흥무관학교가 강고하였던 이유? 주체의 조건? 재력 기반? 지리적 이점? 원세개의 도움? 서간도의 사회경제적 조건#8. 1919년 3.1운동 이후의 상황? 거류민단체인 한족회와 임시정부 성격의 군정부 조직- 1919년 3·1운동. 고조된 정세 하에 주민자치단체로 한족회, 임시정부로 군정부를 조직. 군정부는 서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상해임정 산하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 고산자에 학교 증설- 1차대전의 종결과 3·1운동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활기차게 추진하는 계기. 신흥무관학교 확충.1919년 5월 신흥무관학교 본교를 고산자로 이전.? 군사교육에 치중- 무관학교로의 면모가 전보다 훨씬 강해짐? 많은 졸업생 배출#9. 일본의 탄압과 폐교? 1919년 마적의 습격과 윤치국 치사사건? 1920년 일본과 중국의 탄압이 본격화- 중일합동수색대? 10월~11월 경신대학살- 서간도 지역에서 1323명 피살? 결국, 1920년 신흥무관학교 사실상 폐교#10. 1920년대 이후의 활동? 이회영(1867-1932)- 1913년 조선으로- 고종 망명계획- 다시 중국으로 (국내와 북경, 상해 천진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 상해임시정부 불참- 1923년 아나키스트로- 1932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주행. 가던 중 일본 관헌에게 체포 대련경찰서에서 사망? 이석영(1855-1934?)- 서간도 합니하에서 그의 자금은 공적·사적으로 모두 소비.- 1920년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로 (봉천·천진·북경·상해 등지에서 가난으로 고생)- 중병에 걸려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중국으로 가서 비극적인 말년을 보냄- 두 아들 중 규준은 1927년 요절, 규서는 이회영을 밀고하고 피살- 1934년 상해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이건영? 이철영? 이호영#11. 이시영? 1913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