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편 대학도서관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에게 도서관을 개방하다?메디치 가문의 도서관들?유럽에서 11세기 이후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여, 도시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그리고 십자군 운동으로 이슬람 세계와 교류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또한 지중해의 무역발달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상인계층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였다.상인계층 중 피렌체의 메디치가문이 도서관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산마르코 도서관:코시모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가 로마제국 멸망이후 1444년에 건립한 이탈리아 최초의 공공도서관이다.산마르코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 장서는 학자들에게 개방되었다.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산마르코 도서관은 ‘공공’도서관이 아니다.하지만 당시 사회에서‘공공’이란 개념은 성직자, 귀족, 부유한 상인들의 활동 무대를 말했기 때문에공공도서관으로 볼 수 있다.?메디치 가문은 산마르코 도서관에 소장할 도서를 직접 선택하는 등 학자를 위한 지원을 많이 하였다.이는 메디치 가문을 상인에서 군주로 바꿔주는 역할을 했으며 공적인 가문으로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메디치 가문이 수집한 도서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 할 수 있었다.첫쩨, 철학 분야의 도서를 수집하여 메디치 가문이 학자 가문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둘째, 도덕과 관습에 관한 도서를 수집하여 정직하고 예의 바른 가문이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셋째, 귀중한 고전을 수집하여 오늘날 인문학의 후원자라는 명칭을 얻게 해주었다.넷째, 수집한 도서에 대해 소장표를 붙여서 도서의 족보를 알 수 있도록 했다.?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손자인 교황 클레멘스7세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수도원에로렌시아 도서관을 건립하였다.?클레멘스7세는 도서관을 호화로운 책들이 모인 공간이 아닌 책을 보관하고 활용하는 공간으로 생각하였다.동시에 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도서관은 개방된 공간이었다.?도서관 건축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하고 건립하였다. 클레멘스7세는 학문과 )을 배출하였다.메디치 가문의 교회에서의 영향력은 로마와 피렌체 두 곳을 손에 넣어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살아남게 하였다. 그들 모두 예술을 후원하였지만 신학분야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또 다른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으로는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레오 11세)가 있다.?코시모 1세: 16세기 메디치 일족 가운데 가장 우수한 풍채를 가진 사람은 코시모1세 였다.무젤로로 물러갔다가 돌아온 그는 대부분의 피렌체 시민들이 싫어했던 맞수 시에나를 정복하고서 공화정을 붕괴시키고토스카나 대공국을 창건하면서 토스카나 전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잡게 되었다.?대형 도서관의 건립이유?르네상스 시대의 군주, 상인, 교황은 대형 도서관 건립을 주도하였다. 당시 인쇄술이 발명되어 출판물이 급증하였기 때문에 대형 도서관이 증가하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군주, 상인, 교황이 지식을 지배하고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도서관 건립을 지시한 군주, 상인, 교황은 도서관에 소장할 장서에 대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장서만을 소장하게 하였다, 중세시대에는 모든 것이 기독교 중심이어서 중세시대 성직자들은 군주를 교육시켜 기독교적인 사고를 갖게 만들었다.?이제 군주들이 스스로 고대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학자들은 도서관을 통해서 연구를 하고 책을 저술했다. 교황은 기독교의 뿌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이론적인 근거가 필요하였다. 당시 교황은 새로 탄생한 대학에 대항하기 위해 지적기반으로 도서관을 만들었다.?바티칸 도서관?교황이 세운 대표적인 도서관으로 1448년 교황 니콜라오5세가 350점에 달하는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의 필사본과 함께 여러 서적과 문서 등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도서관에 소장하였던 문서도 포함되어있다. 1475년 공식적으로 바티칸도서관이 개관하였다.?바티칸 도서관의 초대관장은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 였으며 도서관 장서는 3500권에 달하였다.?당시 목록은 필경사가 만들었는데 필경사가 되기 위회사, 길드 등으로 조직된 사람들의 단체’로 정의함.?대학 도서관의 발전?초기의 대학은 사전에 규정된 교육과정이나 과목 혹은 학위가 없었다.하지만 점차 대학 규정이 만들어지고, 왕이나 교황으로부터 인가를 받으면서 정규적인 대학이 형성되었다.?초기 유럽 대학교의 틀은 스페인 지역의 이슬람 문화권 대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디?1158년 이탈리아 볼로냐 의학 학교를 프레드릑 황제가 공식적으로 대학교로 인정했다?1150년 파리의 신학교가 대학으로 변모함?1167년 영국계 학생들은 파리 신학교를 그만두고 영국에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가 옥스퍼드대학교의 출발이다.?1179년 파리의 학교들은 마스터(master) 명칭을 정하였고 이에 따라 총장,마스터,학생의 조직을 갖추고, 강의와 시험 규정을 정하였다?초기 대학교에서 교수들은 자신의 책을 가지고 강의를 하였고 학생들이 원하면 책을 빌려 주었다?대학교가 성장하면서 교수가 수업에 사용하는 책을 필사하여 판매하거나 대여하는 서점이 대학교 주변에 생겨나게 되었다.-학생들은 수업에 필요한 교재를 서점에서 빌리거나 구입하였으며 때로는 교수의 강의를 모두 기록하여 책과 같은 강의노트를 만듦?학생들은 공동생활을 하였는데, 책을 공동으로 사용 할 수 있는 방(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학생들은 방에 소장되어있는 책을 구입하거나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책을 복사했다-대학을 떠나는 학생들은 여기에 자신이 사용하던 책을 남기기도 했다?영국의 옥스퍼드나 캠브리지에서도 대학이 발전하면서 도서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서점이나 학생들이 수업과 관련 책을 모아놓은 방, 대학도서관 등은 규모가 매우 적었고,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비로써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대학도서관의 특징?살아있는 도서관이었다-초기 대학도서관은 수도원도서관이나 교회도서관과 비슷하였지만 대학도서관은 살아있었다-많은 이용자가 이용했기에 책이 헐어서 자주 수선하거나 새로운 책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대학도서관은 이용자가 책을 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존재했지, 수도원도서관승들이 관리함-옥스퍼드 대학도서관에서는 목사가 관리함-사서는 책의 내용을 파악하여 책임을 지는 것보다 물리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으로 여겼음?사서 업무에 관한 규정은 매우 엄했음?건물관리 및 장서에 대한 관리 책임도 있었음?분실시 배상 책임이 있었음?1년 단위로 소장도서목록을 작성하였고 대학 고위관리에 보고하였음?초기 대학도서관 장서는 대부분 왕, 귀족, 주교, 상인들의 기부로 증가되었다-초기 대학 도서관 장서는 수도원도서관이 책을 복사하여 장서를 증가시켰던 것과 달리, 많은 부분 장서로 성장하였다.왕, 귀족, 주교, 상인등은 자신들이 수집한 장서를 대학도서관에 기증하였음.?1253년 링컨의 주교인 그로세테스트는 옥스퍼드의 그레이프라이어 칼리지에 참고도서관을(small library) 기부함?1320년 우스터의 주교인 코브햄은 옥스퍼드 대학교에 책을 기부함?1336년 그레이브센드 주교는 옥스퍼드의 발리올 칼리지와 머톤 칼리지에 책을 기부함?1350년 베지만 주교는 캠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8권의 책을 기부함-도서관에 도서를 구입하거나 발전을 위한 기금도 기부되었다. 하지만 장서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하이델베르그 대학교 도서관은 1396년 396권, 1461년 840권, 캠브리지의 퀸즈 칼리지가 1372년 199권으로그다지 크지 않았다. 대학도서관 장서가 1000권이 넘는 시기는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이다.?15세기 이후 대학도서관?독립된 도서관 건물이 건립됨?길고 폭이 좁은 방에 긴 창문들을 가지고 있었음?이러한 열람실의 모습은 가능한 햇빛을 많이 이용하기 위한 설계였음?열람실의 내부는 양쪽 벽 창문사이에 책을 배열한 서가와 책상이 위치함. 그래서 햇빛은 직접 독서 책상을 비춤?독립된 서가나 개인 책상은 15세기에 유행?독자를 위해 제공하는 4~6개의 서가 단을 가진 책장이 책상위에 놓여 있었음?16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대학도서관은 지속적으로 발전함?중앙도서관을 운영하는 대학이 있었음?어떤 대학은 중앙도서관은 없고 소규모 칼리지도서관을 운영하기도 함?학과야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고오르세도서관(Bibliotheque d’Orsay)은 새로운 과학도서관이었다.?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은 파리대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으로 기원은 생트 주느비에브 수도원(Abbey of Ste. Genevieve)임.?이 도서관은 16세기까지는 조그마한 도서관이었고 1710년 도서관장서는 약40,000권이었는데 허락된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었음.?1860년 장서는 160,000권 도서와 5,000점 필사본이었다.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은 정부가 소유한 도서관으로 분리된 행정체계로 운영되다가 파리대학교 소속이 되었는데 역사와 사회과학 분야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의과대학도서관은 14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는데, 1500년 경 장서는 단지 1100권에 불과했다.1509년 의과대학도서관은 책을 책상에 연결하는 체인 시스템을 사용하였는데 대략300년동안 이 체인시스템이 지속되었다. 프랑스 혁명기간 동안 의과대학도서관은 왕립의학협회도서관의 장서를 합하여 새로 신축한 의과대학도서관으로 옮겨 통합이 이루어졌다. 1900년경에는 의과대학도서관에 약 180,000권의 장서가 소장되었다.?법과대학도서관은 1772년에 개관하였는데 1900년경에는 약 80,000권의 장서가 소장되었다.?약학대학도서관은 1882년 개관하였는데 1900년 50,000권 장서를 소장하였다.?당시 파리에는 약 30개정도의 주요 칼리지 도서관솨 대학 도서관이 있었으며, 프랑스 전역에는 수백 곳의 대학도서관이 있었다. 초기프랑스대학교 대부분은 교회와 관련되어있어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살아남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근대대학은 19세기 이후 탄생하였고 특히 1870년대 제3공화국 시대에 많이 탄생하였다.영국, 칼리지 도서관 중심으로 발전하다?옥스퍼드 대학도서관?1200년까지 옥스퍼드대학교는 stadium generale (대학교로 형성되기 전 단계)로 인식되었으나1214년 교황이 대학교로 인가하였다.?옥스퍼드 대학교는 여러 독립적인 대학(칼리지)들이 모인 기구이다.?대부분되어있음
아날로그방식의 삶오늘날 인간의 실존 문제는 기술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기술을 통하지 않고 인간이 세계와 만나 소통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랜 기간 진화과정에서 자연에 적응해 왔듯, 이미 기술에도 적응이 되어 이를 조금이라도 벗어나 ‘인간답게’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삶의 방식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삶의 의미조차 어느덧 기술에 종속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스마트폰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채팅은 물론이고, 각종 SNS까지 할 수 있는 그 기계의 작은 액정을 쳐다보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우리는 카메라 대신 스마트폰 내장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앨범을 볼 때도 우리는 그저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린다. 하지만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사진관에 찾아가 사진이 인화될 때까지 설렘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스마트폰의 앨범에서 사진을 보는 것보다 카메라로 그것을 인화하여 앨범에 넣어놓고 그 당시 사진을 찍을 때의 기억과 감정 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학교에서 종종 대자보를 접할 수 있다. 하얀 전지에 검은색 매직으로 써내려간 대자보의 정석은 조금씩 변형되고 있다. 이제는 컴퓨터로 글을 쓴 뒤 인쇄해 붙이기도 하고 그림으로 글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형식은 변했지만, 게시판에 뭔가를 붙이는 아날로그적인 대자보 문화는 수십 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 이유는 바로 대자보가 주는 강렬한 메시지 덕분이다. SNS 시대에 대자보가 부활하고 있는 이유는 '진정성'이다. SNS 상에선 하루 수천, 수만 개의 글이 쏟아지지만, 이를 통해 진지한 의견을 전달하는 데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자필로 쓴 대자보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아날로그 기록과 비교한 전자기록의 장점과 단점Ⅰ.서론Ⅱ.본론1.기록물의 정의2.기록물의 특성3.전자기록의 장?단점3.1전자기록과 아날로그기록의 차이점3.2전자기록의 장점3.3전자기록의 단점Ⅲ.결론........Ⅰ서론전자문서는 오늘날 개인이나 기관의 업무활동에서 필수불가결하게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그 양 또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는 모든 업무에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물리적 보존공간에 대한 한계가 있는 아날로그기록보다 전자기록은 한계가 적으며, 전자기록은 기관의 업무활동을 자동화하고 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기록은 아날로그기록이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해결해주지만 전자기록에도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과연 아날로그기록과비교하여 전자기록은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 비교해 보도록 하자.Ⅱ본론1. 기록물의 정의기록물이란 조직체나 개인이 법적 의무를 수행하거나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증거 및 정보로서 생산, 접수, 관리하는 문헌을 말한다.전자기록은 컴퓨터 등 전자적 처리장치를 사용하여 생성, 획득, 이용, 관리 되는 기록을 의미하며, 기록으로서의 속성과 디지털 자원으로서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전자기록에는 전자형태로 생산된 기록과 아날로그 형태로 생산되었다가디지털화된 기록이 포함된다. 디지털화된 기록은 아날로그 원본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기 위해 제작되는 기록이다.2. 기록물의 특성전자기록에는 4가지의 특성이 있는데 이는 진본성, 신뢰성, 무결성, 이용가능성이다. 진본성이란 문서가 처음 생산될 때 생산자가 의도한 것과 똑같은 내용과형태를 지니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취해야 할 모습대로이고, 처리해야 할 사람이 처리했으며 처리하여야 할 시각에 처리하였음을 증명 할 수 있어야 한다.즉 기록물이 생산된 후 내용이나 형태에 아무 변화가 없음을 입증할 수 있을 때 그 문서를 진본이라고 칭한다. 신뢰성이란 문서의 내용이 신뢰할만한지, 과거의 업무 활동이나 사실을 증명 할 수 있는지, 기록과 관련된 담당자가 생산하였는지 등 이 신뢰성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무결성은 문서가 완전하고 변형이 없음을의미하는데 기록의 무결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누가, 언제, 추가?삭제 하였는지 감사증적을 남기고 이를 추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한다. 마지막특성인 이용가능성이란 원하는 기록물에 접근해서 검색하고 정보를 꺼내고 그내용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해석 할 수 있다는 것은 이용자가 정보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3.전자기록의 장?단점3.1 전자기록과 아날로그기록의 차이전자기록의 장단점을 말하기에 앞서 전자기록과 아날로그 기록은 어떻게 다른지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날로그(종이)기록과 다르게 전자기록에는 원본성의 개념이 아니라 진본성의 개념이 있다. 즉 전자기록에서의 원본이란 원본의 형태를 한 복제본을 의미하기 때문에 원본성을 대치하는 개념인 진본성을지닌다.3.2 전자기록의 장점앞서 말한 것 처럼 전자기록에는 진본성의 개념이 있는데, 여기서 종이기록과다른 점은 사본의 생산이 용이하고, 쉽게 생산할 수 있으며 쉽게 변경할 수있다는 점이다. 전자매체로 된 문서를 생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다양하며,빠르게 배포 될 수 있고 여러 사람들이 쉽게 수정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그리고 접근성이 용이하다. 종이문서의 경우 실제 문서를 구하려면 직접 그곳에 찾아가야 하지만 전자문서의 경우에는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다면 시?공간 상관없이 언제든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3.3 전자기록의 단점전자기록이 이러한 장점만 갖는 것은 아니다. 전자기록의 장점 중 쉽게 생산될 수 있고 쉽게 변경가능한 점을 장점이라고 했지만 이는 여러 가지 버전이 생산될 가능성이 높고 이로 인해, 첫째 전자기록의 생산과 관리를 통제하기가힘들어진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며 전자기록에 쉽게 접근 가능한 만큼 보안에 관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접근에 물리적인 한계가 있는 아날로그기록과는달리 전자기록은 온라인으로 접근가능하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될 여지가 많아 공격을 당하기 쉽다. 또한 전자기록은 불법복제, 변조, 삭제 등의 공격을 당한 뒤에도 품질의 저하가 일어나지 않아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탐지하기가 어렵다.둘째, 전자기록물은 전산시스템의 산물이므로 특정 전산시스템을 거치지 않고는 해독 할 수 없다. 아날로그기록을 읽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고 읽으면 되지만전자기록에 읽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항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이는 프로그램에 대한 의존도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에서 보존까지 특정한 하드웨어와소프트웨어에 의존하는 전자기록은 의존성도 문제이지만 기록을 담고 있는매체가 노화되거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호환성이 결여 된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셋째, 아날로그기록은 손상되거나 분실하지 않는 이상 수명을 보장 할 수 있지만 전자기록은 별도의 조치를 지속적으로 취하지 않고는 보존을 보장 할 수 없다.즉 전자기록은 지속적으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자기록은아날로그 기록에 비해 보존기간이 짧다. saffady는 전자형태로 된 매체는 적어도 100년 동안 보존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전자매체의 이용역사가 짧기때문에 이는 확신 할 수 없는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자매체는 종이나마이크로필름의 수명보다 안정적이게 보존 할 수 있는 기간이 짧으며,
책 보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기다중국의 도서관 역사는 서지 혹은 목록 중심의 역사라 할 수 있다.중국에서 서지가 발달된 것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진나라 시대의 ‘분서갱유’이다.?진시황(BC213)의 분서갱유 : 책을 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 시킨 사건?사건의 주역: 이사와 순우월?사건의 발단과 원인‘분서’는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 중앙집권제를 채택하여 군현제를 실시하던 어느날,잔치에서 순우월이 전국의 안정을 위해서 ‘봉건제도’로 돌아갈 것을 주청하면서 발단됨.순우월이 ‘옛 것을 모범으로 삼을 것(봉건제도)’을 주청하면서 엣날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진시황을 도와 전국을 통일하는데 일등공신인 이사는 군현제로 전국이 안정되고 있는데 옛 책을 공부한 사람들이 봉건제도가 좋다며 새로운 정책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다고 반대했다.이사는 순우월이 옛 것을 중시하고 현재를 경시하는 경향이 옛날 책 때문이라며 진시황에게 건의하여 옛 서책을 불태우는 명령을 주청했다. 진시황은 진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 외에 학자들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불태우는 분서령을 내렸고, 30일 내에 책을 태우지 않은 사람은 얼굴에 글자를 새겨넣은 후 진시황의 아들이 지휘하고 있는 만리장성 축조에 징용되었다.분서 이후 진시황은 방사인 노생과 후생이 자신을 비난하고 도망치자, 함양에 있는 460명이상의 방사와 유학자들을 잡아들인 후, 유학자들에게 이전에 강탈했던 서책을 짊어지게 하고 양산으로 끌고가 서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땅속에 파묻었다. 이를 후세 사람들이 ‘갱유’라 불렀다.분서갱유로 인하여 후대 학자들은 이전에 만들어진 서책에 대한 진본을 파악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흘렀고, 그 경향이 서지를 작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송나라, 문화전성기에 도서관이 발달하다?국가기관 도서관송나라의 도서관은 크게 2가지 축으로 발달되었는데, 국가기관의 도서관과 개인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서원도서관이다.국가기관의 도서관은 오늘날 국립도서관과 같은 도서관으로 3관과 비각이 있었다.송나라 정부는 998년 도서관인 숭문원을 새로 설치하고 그 아래에 3관인 소문관,사관,집현원을 두어 서적을 소장하였다.송나라 초기에는 사관에서 국가의 장서를 소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사관에서 서적 편찬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98년(태종 원년)에 숭문원 중당에 비각을 건립하여 사관에서 소장하던 서적을 비각으로 옮겼다. 일반도서는 그대로 사관에 보관하고 비각에는 구하기 힘든 서적이나 사료의 가치 높은 장서를 소장하여 별도로 보관하기 위함이었다.국가기관의 도서관에서 소장한 장서는 국가 소장 장서와 민간 소장 장서이다.국가는 민간이 소장한 장서를 수집하기 위해 도서 수집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관리를 두어 그 관리가 직접 개인을 방문하여 구입하기도 했다.당시 문인이나 학자들은 도서를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어서 수천 권에서 수만권의 장서를 소장한 사람도 있어 국가에서 개인으로부터 도서를 수집하는 것이 수월하였다.?개인도서관?개인도서관의 도서구입방법은 주로 서적을 직접 간행하거나, 필사 하거나, 구입 혹은 증정 받는 방법이 사용되었다.첫째, 많은 개인들은 서적을 직접 간행하며 개인도서관에 소장하였다. 그 이유는 서적을 후세에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둘째, 다른 사람이 소장한 장서를 필사하여 자신의 도서관에 소장하였는데 당시 개인들은 서적을 필사하여 도서관에 소장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셋째, 개인들이 서적을 소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적을 요구하게 되어 전문적인 서점이 등장하게 되었다. 개인들은 원하는 서적을 서점에서 구입하여 개인 도서관에 소장 하였다. 그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장서를 기증 받기도 하였다.?송나라 개인도서관의 특징개인 도서관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첫째, 개인 도서관을 가진 사람들이 고급 관료부터 일반 백성이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는데 이들이 개인 도서관을 가진 목적은 크게 학술 연구, 감상, 장서 연구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학술연구-저술 / 감상-서적을 소중하게 다루고 보관 / 장서연구-서적을 수집하고 분류하여 다양한 서지작성둘째, 개인도서관에서 도서대출이 이루어졌다. 당시기록을 보면 문인들이 다른 사람의 개인도서관에서 서적을 빌려 보는 것이 보편화된 현상임을 알 수 있다.?서원도서관서원도서관은 서원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서원은 당나라 초기에 생겼으며 송나라에 와서 크게 번성하였다. 서원은 개별적으로 서원 도서관을 만들어 서적을 소장 하였으며 국가에서 지방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서원 도서관에 장서를 제공하였다.?서원 도서관의 도서 수집은 사회의 기증, 국가의 하사, 서원 자체 구입, 서원도서관 자체적인 판각 및 인쇄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중에서도 사회의 기증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곧 서원도서관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다.국가에서 하사한 도서는 주로 ‘사기’ ‘옥편’ 등과 같은 표준적인 내용을 대표하는 것 이었다. 서원 자체적으로 생산한 서적은 학자들의 저술 강의 어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서원도서관의 특징은첫째, 인쇄 기술의 발달로 대량으로 서적이 간행되어 서원도서관에 장서가 크게 증가했다. 장소 규모는 천 여건에서 수만건에 이르렀다둘째, 서원도서관 도서관은 주로 인쇄본을 소장하였지만 필사본, 탁본, 친필본 등 다양한 매체들이 소장 되었다.셋째, 서원도서관 설립목적은 학생들의 교육과 학술연구를 지원하기 위함 이었다, 이 목적은 서원도서관이 공공성과 개방성이라는 특징을 갖게 하였다,넷째, 도서관에 사서를 두어 관리하였다. 사서들은 서적의 구매, 목록 및 분류, 기록, 대출, 청소, 자료보수 등을 담당하였다. 사서들은 도서관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서관리 및 목록 편찬 업무도 담당하였다.명나라 사립도서관 천일각이 오늘까지 내려오다?천일각의 설립천일각오늘날까지 현존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명나라 가정제 시대에 범흠이 설립하였다. 16세기경 중국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성하였으며, 문화적으로 역동적인 시기였다.천일각 도서관이 오늘날까지 존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엄격한 도서관 규정 때문이었다.범흠은 유언에서 두 아들에게 도서관을 선택할 것인지 전재산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게 하였고 큰아들 범대충이 도서관을 택하였다. 범대충은 도서관 장서를 모아 보존하는 규정을 만들었고 이 규정을 어기는 가족은 없었다.오늘날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서관장서는 재산처럼 분배 되어서는 안되며 가족전체가 도서관 장서를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도서관 문은 가족 모두가 있을 때만 개방할 수 있으며 도서관 내에서 흡연과 음주금지조항이 있음-외부인을 도서관에 데리고 오면 1년 동안 가족 제사에 참석할 수 없으며, 책을 도서관 밖으로 빌려가면 3년간 가족 제사에 참석할 수 없음-이 규정은 도서관에 대한 상호관리체제를 도입하여 도서관이 개인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누구나 무제한으로 도서관에 출입하는 것을 방지하고, 도서관 장서가 분실되고 분산 되는 것을 최소화함.범흠(1506~1585)-명나라 사람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서관인 천일각이라는 사립도서관을 개관함당시 시대적 특징으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성하고, 문화적으로 역동적인 시기였음-관리생활을 하면서 서적을 수집하였는데 다른 장서가들이 쉽게 구할 수 없는 각종 지방지, 정치관련 서적, 실록, 역대 과거시험에 급제한 선비들의 목록, 명대 각 지방의 관리들이 각인한 시문집 등을 수집함.유언: ‘너희들은 선택해라. 내가 평생 모은 책을 관리하던가 나의 전 재산인 은 만냥을 갖던가. 책을 관리하는자는 자신의 재산을 보태서 돌봐야 한다.’?천일각 도서관 설계도서관장서의 가장 큰 적은 전쟁과 화재이다. 범흠은 도서관 설계에서 건물의 안전과 장서의 보존에 대해 고민하였다.?범흠은 화재에 의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했다. 도서관 여러 곳에 물을 관리하는 공간을 설치하였다. 건물은 화재 예방을 위해 벽돌로 만들었다. 화재에 대비해 도서관을 주택지와 분리시키기 위해 높은 벽돌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모든 천장에 서로 다른 물과 관련된 그림을 그렸다.?영파시는 항구이며 여름에는 습기가 높기 때문에 천일각 도서관은 북쪽과 남쪽에만 창을만들었다. 서적 케이스는 양쪽에 문을 설치하였으며 뒤쪽에는 책 사이에 공간을 많이 두어서 공기가 순환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창문과 서적 케이스 문을 자주 열어 습기를 줄였다. 1년에 두 번씩 책을 북케이스에서 빼내어서 바람을 통하게 하였으며 일종의 허브를 사용하여 책 보호를 위해 나방의 접근을 막았다.?학자에게 개방과 도난명나라 가정제로부터 청나라 건륭제 초기까지 천일각 도서관은 매우 번성한 시기였다.황종의가 천일각 도서관을 방문한 최초의 외부인이었다. 황종의의 방문은 범흠 일가 모든 사람들이 허락해서 가능한 일이었다.?8세기 중엽 도서관은 어려움에 처했다. 최초의 좌절은 청나라 건륭제 시기의 사고전서 편찬과 관련이 있다국가에서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위해 건륭제 이전까지 모든 자료들을 수집하였다.수집된 자료를 기반으로 경,사,자,집 으로 크게 4부로 구분된 백과사전이 만들어졌다. 천일각은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638 종의 서적을 국가에 빌려줬다. 국가에서 서적을 빌려 가면서 사고전서를 편찬한 후 사고전서를 돌려주기로 약속했으나 나중에 극히 일부만 돌려주었다.이 사건이 천일각 도서관 최초의 장서 분실 사건이다.?아편전쟁기간동안 영국군이 도서관에 침범하여 수십 권의 서적을 훔쳐갔다.?1861년 ‘태평의 난’ 때 도적들이 영파시에 진군하여 도서관 벽을 부수고 많은 서적을 훔쳐갔다. 일부는 종이 재생공장에 팔려나가 귀중한 자료가 종이 재료가 되었다.
도서관 암흑기를 맞이하다?중세시대의 시작?중세시대- 유럽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476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던5세기부터 르네상스 시대를 말한다.로마제국의 멸망요인 4가지가 있는데,①로마제국의 지리적 구조로 훈족과 게르만족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로마제국의 국경선이 너무 길어 방어가 취약했기 때문.②인력이 부족하였다.③경제가 취약하였다.④정치가 불안정 했다.-부정부패가 만연했기 때문로마시대에 번성했던 도서관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도서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회적 영향은첫째,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이교도 문학과 예술을 반대하는 것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았다. 당시 로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던 많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자료들을 도서관에서 제거하였다.둘째, 국가경제가 취약해지면서 교육이 무너지고 재화가 고갈되었다. 교육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지식이 생산되지 않고 도서관 주요 이용 집단이었던 교육받은 시민이 감소하였다.셋째, 정복전쟁이 감소하면서 교육받은 전쟁 포로의 공급이 줄어들어 도서관 담당 직원이 감소하였다. 당시 로마 도서관 관리는 교육받은 전쟁포로가 담당하였다. 로마의 행정 역시 대부분 전쟁 포로의 몫이었고 로마 시민들은 군인 역할을 담당하였다.로마 말기에는 학문, 책, 도서관 입장에서 볼 때 전반적인 암흑기였다.?새로운 기록 매체의 탄생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더 이상 기록의 필요성과 가치가 줄어들었다. 양피지와 파피루스도 가격이 비싸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기록매체로 밀랍판이 출현하게 되었다.밀랍판은 수도사들이 많이 사용했는데, 성경을 해석 혹은 필사하기 위해 사용하거나 정신적 수양을 위해 글을 쓰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밀랍판의 특징: 글씨를 쉽개 지울수 있어서 재활용이 가능해 작가들이 좋아하였고, 두 개의 끈을 이용하여 여러개의 판자를 철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또 다른 기록매체로 파피루스 코덱스를 사용하기도 시작하였다.이 방법은 파피루스를 여러장 겹쳐서 오늘날의 종이와 유사하으로 넘어갔다.수도원의 수도사는 신학서적 읽기가 기본이어서 수도원에는 당연히 도서관이 필요했다.수도원의 탄생과 번영은 이 시대의 특징을 대변한다중세 성직자들은 당시 유일한 지식계급이었고, 교육은 수도원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수도원은 교회이자 학교이고 도서관 이었다수도원 도서관은 소규모의 신학 관련 서적을 중심으로 장서를 구성하고 있었고, 경우에 따라 라틴 문학을 소장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비바리움 도서관?540년경 카시오도루스가 설립?자신의 개인 도서관 장서를 기반으로 설립하였고 종교 서적 뿐 아니라 많은 로마시대 라틴 작가의 서적과 일부 그리스어 작품을 소장하였다.?수도원의 제규정(지침서)제정: 수도원도서관의 운영문제, 장서문제, 특히 도서관표준목록에 대해 언급하였다.?문헌의 수집은 서로마제국의 사본류, 동로마제국, 그리스의 고전사본류, 종교와 관계없는 문법, 역사, 지리, 음악, 농업에 관한 원전류 등을 수집?사본의 형태적인 미는 물론 원문의 정확성을 강조하여 원문에 대한 서지적 비평을 시도함몬테카지노 수도원?성 베네틱트가 세운 수도원으로 529년 베네틱트 수도회의 본부로 남부 이탈리아에 설립.?이곳에서 교육받은 수도사들은 서유럽 전역으로 흩어져서 수도원을 설립.?‘성 베네딕트 규칙서’를 통해 모든 수도사들은 최소 한권의 책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지음?수도사들은 부지런히 독서와 다른 책을 복사하는 필사 활동을 해야 했는데 이는 지적능력 향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양을 위한 것임.?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독서를 해야 했지만 일부는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읽기도 했음.?자료의 수집은 신학도서 외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자료를 보존하기도 함.?9세기에 소실되었으나 11세기에 데시데리우스 수도원장때 다시 부흥.?모범수도원으로 다른 수도원에 영향을 줌?서사실을 두고 사자생으로 하여금 고전을 서사하게 함중세시대 수도원은 당시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었다. 수도원 도서관은 대부분 신학관련 서적을 중심으로 보존하였지만 그리스와 로마 고대 자료나 일부 세속적인 작품도 보존하고신발을 닦는데 사용하였다.?중세도서관의 특징?장서?장서는 수백권 정도를 소장하였음?소장된 문헌은 주로 종교서적이었음?12세기가 되면서 라틴고전, 공법과 교회법, 중세 작가의 작품들, 이후 작가들의 시와 연극을 포함함.?도서는 서사실을 중심으로 생산하여 보관되었고 큰 수도원은 서사실과 도서관을 분리하였음.?책의 장정을 아름답게 하고, 제본시 좋은 책은 보석으로 장식하기도 하였으며 첫 글자는 대문자로 크게 씀.?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은 the Lindisfarne gosples 와 The Book of Kells임.?도서의 수서와 관리?수서의 방법은 서사(copy),기증,구입에 의존?Palimpsest:버리게 된 책의 행간에 다시 내용을 기재하여 재사용하는 방법?도서는 대략 주제에 의해 분류되었으며, 때로는 도서의 크기나 수입순에 의해 분류?신학작품과 대중작품, 라틴작품과 다른 언어의 작품, 또는 교과서와 좀 더 어려운 큰 도서로 나뉘었을 것임.?종교작품은 성경, 주해서, 전기류, 미사관계의 도서 등임?비종교작품은 문법, 수사, 논리의 세 주제나 산술, 기하, 천문학의 네 분야로 나뉨?목록은 장서점검(inventory)용이며, 이용자용은 아니었음?목록은 때로 저자 또는 표제에 의해 배열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표제어 또는 문장의 첫째줄 또는저자, 표제, 문장의 첫째줄에 세가지를 결합하여 배열하기도 함.?사본은 보물류와 함께 안전한 장소에 보관함?장서의 수가 적으면 책장이나 역장, 많으면 별도의 건물을 필요로함?장서는 내부장서와 외부장서로 구분하고 내부장서는 수도승용으로 외부장서는 부속학교용으로 사용함.?도서의 이용방법?도서는 회원제로 하여 대개 종교적인 행사와 관련하여 집단적으로 이용되었음?외부인에게 대출할 때는 수령증과 담보가 될 수 있는 동일한 가치를 지닌 도서 또는 일정 금액의 예치금을 요구함?도서관간의 상호대출이 이루어짐?대개 근접한 도서관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나 서로 멀리 떨어진 도서관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짐?9세기 독일에서는 문헌이 매우 드물어 풀마, 발전시킨 후 유럽에 전달함.-수학,의학,과학 분야에서 인류 역사에 큰 공헌을 함-오늘날 사용하는 대부분의 자연과학 학문은 고대 그리스의 이론으로 실용적인 부분들은 이슬람세계 덕분임.?지혜의 전당-국민의 지식향상을 위한 도서관-오늘날의 대학도서관과 유사하게 세계의 지식을 모아서 국민들을 위해 지식을 재생산한 도서관-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세계의 지식을 한 곳에 모은후, 표준을 보존 한 후, 학자들 중심으로 장서를 이용하여 학문을 연구하였음.?이슬람세계 도서관의 특징-지헤의 전당 학자들은 이슬람세계의 국민들을 위해 각 자료들을 아랍어로 바꾸어 국민들이 지식을 공유하도록 함?이슬람세계의 탄생7세기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가 탄생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문맹자였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무함마드가 이야기한 모든 것을 코란에 기록하여 코란을 통해 이슬람교를 전파함. 이슬람교도는 지식과 학문을 학습하는 것이 신에 대한 헌신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정복한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배웠다. 특히 아바스 칼리파시대에 그리스와 페르시아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이슬람 세계의 도서관인 ‘지혜의 전당’이 탄생하였다.이슬람세계의 계보?632-661: 라시둔 칼리파(무함마드를 계승한 4명의 칼리파들이 지도한 시대로 정통 칼리파 라고도 함)?661~750: 우마이야 칼리파?750-1258: 아바스 칼리파(두 번째 이슬람 칼리파 세습왕조로 수도는 바그다드. 도서관이 발달한 시대?910-1171: 파티마 칼리파(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통치)?1174-1342: 아이유브 왕조(이집트, 시리아 일대를 통치)?1250- 1517: 맘루크 술탄(이집트, 시리아 일대를 통치)?번역운동번역운동이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페르시아 도서관에 있던 페르시아 서적을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 세계의 과학서적과 철학서적 등을 아랍어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을 번역운동이라고 한다.번역운동의 영향은 그리스 문화유산이 유럽에 전달될 수 있었고 수학을 포함한 과학발전에 커다란심을 가지고 있어서 번역운동을 지원했다.?하지만 번역운동은 알마문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번역운동 자금은 바그다드 사회전체에서 모금되었음.?둘째, 이슬람교의 확산결과로 번역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종교적 이유)-이슬람 교인들에게 지식을 탐구하고 교양을 쌓는 것은 종교적인 일이었기에 이상적인 그리스 지식을 배우려 했음. 그래서 그리스 책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교인들이 이 책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려 했기에 번역이 시작된 것임.? 왜 이전 칼리파 시대에는 번역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많은 번역가들은 기독교인이었기에 종교적인 측면이라 말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음?셋째, 당시 그 지역에 살던 그리스 계통의 기독교인들이 그리스 과학에 정통했기 때문에 번역운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지식을 아랍세계에 전달하려고 했고, 번역운동이 일어난것에 고마워 했다고함?하지만 이미 당시의 연구는 시리아 지역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종합?번역운동은 위의 세가지 학설보다는 고대 그리스 지식과 페르시아 지식을 이슬람 교리에 따라 사회에 적합한 현실적인 방안을 찾기 위한 활동임.?번역운동이 일어났던 시기는 이슬람 세계가 가장 번성기를 누렸던 기간임?동서간의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하던 시대임?칼리파 알마문은 베움을 사랑해서가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이슬람 세계의 법과 정부를 조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임.?단순히 번역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이슬람 세계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이슬람화 시켰음.번역운동의 영향여러 분야 중에서 의학 관련 자료는 이슬람 번역가가 가장 우선적으로 이슬람화 시킨 분야 였음. 결과적으로 이슬람 세계는 위대한 과학 문명국가로 탄생했음.이슬람 세계에서 과학은 과학자체 보다는 과학의 활동성에 가치를 두었고 국가와 사회전체를 위한 학문이어서 국가적으로 지원하였음?지혜의 전당832년 하룬 알라시드에 의해서 건립오늘날 이라크 바그다드에 위치했으며 도서관이자 동시에 번역기관이었음.핵심적인 국가 지식센터였으며 세계 각국 언어의 도서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활동의 핵심기관이었음.기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