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주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9
검색어 입력폼
  • <한글날에 대하여>, 한글날, 한글날 레포트, 한글, 한국어
    - 한글날을 아시나요?Ⅰ. 서론1. 한글날 소개와 레포트 의의Ⅱ. 본론1. 한글날에 대해1-1. 한글날의 의미1-2. 한글날의 유래1-3. 한글날의 위기Ⅲ. 결론1. 요약 및 정리Ⅰ. 서론우리가 살아가는 1년 365일 중, 빨간 날은 그리 많지 않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는 공휴일. 그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빨간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 않는가.그렇다면 공휴일 중 하루인 10월9일 ‘한글날’은 어떤 날일까? 초등학교 땐 단순히 한글을 만든 날! 이라고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 많고 많은 날 중에 10월 9일로 지정되었으며, 언제부터 10월 9일이 한글날로 불리어 왔는지, 처음엔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 왔는지 등 깊이 탐구할 만큼 궁금한 적도 없었고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왜 한글날을 의미 있게 생각해야 하고, 한글날을 이렇게까지 기념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Ⅱ. 본론1-1. 한글날의 의미올해로 한글날은 570주년을 맞이한다고 한다. 무언가를 알고 싶으면 그 처음을 이해하라는 소리가 있듯이, 우리도 한글날의 처음을 알아보자. 한글날은 한글이 없었다면 생기지도 않았을 기념일이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25년 곧 서기 1443년에 완성하여 3년 동안의 시험 기간을 거쳐 세종 28년인 서기 1446년에 세상에 반포되었다. 한글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주도하여 창의적으로 만든 문자인데 지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세계 문자 역사상 그 짝을 찾을 수가 없다. 한글만큼 우수한 문자가 또 없다는 것을 세계가 모두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한글의 창제로 말미암아 우리는 문자가 없어서 남의 글자인 한자를 빌어다가 우리말을 중국말 문법에 맞추어 쓰던 불편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문화, 경제, 정치 등 각 분야에 걸친 발전을 이루어 세계 유수한 나라들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이러한 한글의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과 공로를 기리기 위해 한글날이 만들어 졌다.1-2. 한글날의 유래한글날을 처음 제정한 것은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있던 1926년의 일이다. 조선어연구회, 곧 오늘의 한글학회가 음력 9월 29일(양력으로 11월 4일)을 가갸날이라 칭하고, 그날 서울 식도원에서 처음으로 기념식을 거행한 것이 시초이다. 이 해는 한글이 반포된지 480년이 되던 해였다. 당시엔 우리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억압에 눌려서 위축되어 있던 때라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북돋우기 위하여 한글날을 제정하여 기념하였다. 음력으로 9월 마지막 날인 29일을 한글날로 정한 것은 『세종실록』 28년 9월조의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라고 한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며, 이름을 가갸날이라 한 것은 아직 한글이라는 말이 보편화하지 않았을 때였고, 한글을 ‘가갸거거…, 나냐너녀…’ 하는 식으로 배울 때였기 때문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언문, 반절, 가갸글 등으로 불러 오던 훈민정음을 1910년대에 주시경을 중심으로 한 국어 연구가들이 으뜸가는 글, 하나 밖에 없는 글이라는 뜻으로 지어서 ‘한글’ 이라고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한글’이라는 말은 보편화되지 않았다. 가갸날을 한글날로 이름을 바꾼 해는 1928년이었다. 1931년에는 그동안 음력으로 기념해오던 한글날을 양력으로 고치기로 하고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했다. 그러나 이 환산 방법에 의문이 생겨 1446년의 음력 9월 29일을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쓰던 그레고리력으로 다시 환산한 결과 10월 28일과 일치하여 이날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한글날을 양력 10월 9일로 확정한 것은 1945년 우리나라가 광복이 되고 나서였다.곧 ‘정통 11년 9월 상한’의 ‘9월 상한’을 9월 상순의 끝 날인 음력 9월 10일로 잡고 그것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로 정한 것이다. 그리고 1946년에는 한글날을 법정공휴일로 지정하여 거국적인 기념행사를 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한글날 기념행사는 민족주의 국어학자를 비롯한 소수 유지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졌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한글날 행사가 전국적인 것이 되어 해마다 큰 기념식을 하였다. 하지만 한글날은 건국 직후에도 바로 공휴일로 지정되지 못하였다. 건국 초기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일제에 맞선 삼일절과 해방된 광복절, 헌법을 만든 제헌절, 우리 민족이 최초로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개천절 등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가 수립에 정통성을 부여한 날만이 국경일로 정해진 것이다. 언어와 문화가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라는 자각이 너무나도 적었던 것이다. 1949년 대통령령으로 공포된 에서 관공서의 공식 공휴일이 되었지만, 그 지위는 국경일이 아닌 기념일일 뿐이었다.1-3. 한글날의 위기그런데 한글날은 약 23년간 법정 공휴일의 지위를 잃기도 하였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노동 운동이 급성장하면서 노동자와 기업주 사이에 힘겨루기가 심해지자 노동 시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공휴일을 줄인 것인데, 한글날이 그 대상이 된 것이다. 1990년에 휴일이 많은 것은 산업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경제 단체의 문제 제기가 있어 법정공휴일 축소 문제가 논의되었고, 그해 8월에 국무회의에서 한글날을 국군의 날과 더불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하기로 의결, 한글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되었다.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복원하려는 노력은 계속 이어졌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 등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국민들의 관심은 점점 더 약해져만 갔다. 이에 국어 운동계에서는 전략을 바꾸어 한글날을 공휴일이 아니라도 국경일로 만들자는 목표 아래 2001년부터 ‘한글날 국경일 범국민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국민운동을 펼친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류가 번져 나가기 시작하자 한글날의 지위를 높이려는 노력은 차차 힘을 얻어 가고, 마침내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2005년 10월 5일 ‘한글날 국경일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리고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2005년 11월 30일 법안 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는 내용의 을 통과시켰고, 이 개정안은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국경일을 공휴일로 정하는 문제는 대통령령을 개정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바였다. 이는 쉽지 않았다. 2005년 7월부터 시행된 행정 기관 주 40시간 근무제에 맞춰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하는 내용으로 을 2005년 6월에 개정하였고, 이에 따라2008년부터 제헌절이 공휴일에서는 제외되는 상황이었기에 한글날을 공휴일로 다시 지정하자는 주장의 설득력이 약했던 것이다. 결국 소규모로 전개되던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 운동은 한글날이 국경일로 기념된 첫해인 2006년부터 6년이 지난 2012년에서야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 연합’이라는 조직 결성과 함께 대규모 국민운동으로 전개되어 2012년 12월 24일에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국민들의 한글날 공휴일 지정에 대한 여론이 크게 일었던 것이다.
    인문/어학| 2020.12.17| 5페이지| 2,500원| 조회(280)
    미리보기
  • <권지예 '뱀장어 스튜' 비평문 - 사랑의 삼각형 이론>, 뱀장어스튜, 권지예
    분석·비평 보고서-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를 읽고Ⅰ. 서론1. 분석 의의Ⅱ. 본론1. 작품 소개2. 작품 분석2-1. 시점 분석2-2. 인물 분석2-3. 작품 속 상징물Ⅲ. 결론1. 요약 및 정리Ⅰ. 서론누군가 나에게 “사랑의 삼각형 이론”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다. 쉽게 요약하자면 사랑은 친밀감, 열정, 헌신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친밀감은 사람이 누군가와 가깝게 느끼는 감정. 즉 정서적인 사랑을 뜻하고 열정은 사랑의 동기유발 적 요소로서 육체적인 사랑, 헌신은 사랑에 대한 책임감을 뜻하며 더 나아가 집착을 나타내는 말이다.뱀장어 스튜를 읽는 내내 필자의 머릿속에 왠지 모르게 이 이론이 계속 잔상으로 함께했다. 주인공인 그녀는 사랑의 삼각형 안에서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를 사랑을 하며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 가려고 그토록 애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때문에 본고에서 필자는 이 소설이 그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이야기 하려 한다.Ⅱ. 본론1. 작품 소개이 작품은 중심 소재가 되는 뱀장어 스튜와 그 스튜의 한국판인 삼계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초반과 맨 마지막에만 등장한다. 잠깐 등장하지만, 작품 전체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소재라고 말할 수 있다.제목인 뱀장어 스튜에 대해 소설은 ‘마지막, 스튜, 뱀장어라는 단어가 합성된 뱀장어 스튜는 인생 같다.’라고 표현한다. 이 말처럼 그 세 단어는 인생의 큰 조각들이 들어있는 단어일 것이다. 역동적인 느낌을 주는 뱀장어는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욕망처럼 보이고 스프와는 달리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완성되는 스튜는 짧게 보면 알 수 없는 인생과 닮아있다. 수 많은 요리 중 이 둘을 선택한 의도는 주인공의 삶을 투영시키기 위함이 아닐까.작가는 작품 속에서 요리의 시작과 끝을 모두 보여주며 마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요리 하나를 완성시킨, 혹은 요리와 같은 한사람의 인생 모두를 엿본 것 같은 쾌감이랄까. 성취욕 같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2. 작품 분석이 소설 속에서 주로 등장하는 사람은 셋 이지만 이야기 되어지는 사람은 단 한명이다. 그 주인공인 ‘그녀’를 ‘여자를 보고 있는 나, 남자를 만나 그려지는 여자, 남편과 함께 있는 그녀’로서의 세 가지 부분을 하나의 소설에서 한꺼번에 보이고 있다. 주인공인 그녀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여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주인공의 인생은 평탄치 않으며 그 굴곡 있는 삶만큼이나 소설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것은 구성과 시시각각 바뀌는 시점 때문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로 나타나는 부분이 있지만 여자로, 그녀로도 표현되어 화자가 정확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며, ‘나, 그녀, 여자’ 어떤 표현을 쓰더라도 주인공의 생각을 알기 때문에 말하기의 주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가 모호하다. 또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액자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는 소설은 흐름이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건의 연결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2-1. 시점 분석이 소설의 시점은 크게 1인칭 화자 - 3인칭 작가 - 1인칭화자 - 3인칭 작가 - 1인칭 화자로의 변화를 보인다. 남편이 그림을 보면서 그녀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해 그녀가 돌아온 그 때 이슬비 내리던 날의 남편으로 소설의 끝도 남편의 시점이다.소설 전체에서 가장 나중의 시간인 첫 장면을 ‘조용히 들어서고 있는 그녀……’로 마무리 하면서 다음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3인칭 작가 시점으로 바뀐다. 파리의 아파트 부엌 장면은 그녀가 다시 돌아온 집이다. 이곳에서 그녀의 회상이 다시 시작된다. 그 후 해변도시에서의 회상 뒤엔 또 다시 그 날의 장면과 그 이유를 생각하는 남편의 시점으로 바뀌면서 부엌에서의 섹스 장면으로 돌아와 3인칭 시점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며 다시 눈을 감은 그녀의 회상으로 넘어간다. 소설 속 시점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이후의 3인칭 시점에서는 ‘그녀’가 ‘여자’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녀’-‘남편’과의 이야기에서 ‘여자’-‘남자’와의 이야기로 바뀐다는 의미이다. 남자와의 관계는 남편과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관계임을 나타내고 남편과 남자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보인다. 다시 여자는 그녀로 돌아오고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점에서 소설은 끝이 난다. 치밀하도록 섬세한 시점의 변화는 이 소설만의 특별한 레시피 비법이나 다름없다.2-2. 인물 분석그녀에게는 남편과 첫사랑. 두 남자가 있다. 이 셋에게선 앞서 말한 사랑의 삼각형 이론이 드러난다. 남자와 남편,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르다. 둘의 다름은 여자가 방황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첫사랑인 남자는 여자가 마음을 연 첫 사랑이었고 지금까지도 여자가 정착하고 싶은 대상이다. 또한 사랑의 3요소 중 하나인 열정의 상대였다. 남자에게 젊은 시절의 여자는 한없이 빠져들었다. 여자는 그 남자에게 구속받고 싶어 죄악 이라고 생각하며 아이까지 낳았지만 남자는 누군가에게 구속받기도, 누군가를 구속하기도 원치 않았다. 그는 여자에게 안식을 줄 수 없었고 여자는 자유로운 남자에게서 자유 끝에 오는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남자와의 관계는 여자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고 구속하는 폭력적인 관계이다. 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 마저도 입양 보냈으니 여자에게 남자는 매정한 사람이다.남편은 여자의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여느 부부들과는 달리 남편은 아내와 노을을 보러가서 화첩을 꺼내고 아내는 남편을 버려두고 혼자 언덕을 오르는 등 겉도는 느낌이다. 경제적으로 무능해서 아내의 수입에 의존하고 그 때문에 남편으로서의 지위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또한 남편은 따듯하게 상처를 핥아주었지만 무뚝뚝하고 멋없는 한 마디를 던질 뿐이고, 책에서 나오는 남편의 화젯거리들이나 손목의 상처 이야기도 매력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게다가 여자의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카페에서 여자가 뛰쳐나가는 데에도 ‘왜 그러냐는 식’의 말을 건네는 남편과는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가 매일 남자를 만나러 떠도는 것을 알면서도 붙잡을 수 없었으며 그것을 탓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남편은 남자가 줄 수 없는 단 한 가지를 그녀에게 제공하고 있다. 바로 그녀가 ‘돌아갈 곳’. 남자는 그녀를 책임지기 위해 애써 헌신하며 살아간다.이렇게 다른 두 남자사이에서 여자는 방황을 반복한다. 피카소가 열정으로 수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방황하였지만 결국엔 마지막 여인과 함께 조용히 삶을 끝마쳤던 것처럼 여자의 삶도 처음에는 열정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녀의 젊은 시절은 배와 오른쪽 손목에 난 상처처럼 상처투성이였다. 배에 칼자국을 내며 첫사랑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남자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해외로 입양을 보낸 그녀는 충동적인 자살을 시도했었다. 그래서 여자에게는 위의 두 개의 상처가 있다.하지만 그 후에도 그녀의 상처들은 계속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는 그 후에도 많은 남자를 만나고 결혼까지 했다. 그녀가 소설 속에서 계속 바라보고 있는 바퀴벌레의 모습은 결혼생활을 하는 그녀를 투영하고 있다. 끈끈이에 갇힌 바퀴벌레처럼 가정에 갇혀버린 것 같다고 느끼는 그녀는 가정이라는 끈끈이에 빠진 스스로를 애써 부정하기 위해 더더욱 바퀴벌레에 집착하는 듯하다.소설 중반부에서 그녀는 열정을 찾기 힘든 남편과의 삶에 지쳐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동물원의 암컷 원숭이처럼 집을 나온다. 동물원의 우리를 집이라고 보았을 때 암컷은 ‘꼭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빠져나갔다. 그녀는 암컷 원숭이와 같은 마음을 느꼈기 때문에 그 원숭이의 기사를 남자에게 편지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었던 원숭이와는 달리 여자는 남편이 첫사랑에게 또 한 번 허무감을 느끼고 다시 우리 속으로 돌아간다.그녀는 이러한 삶 속에서 끝없는 균열의 순간을 몇 번 맛보게 된다. 이 균열의 순간을 통해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체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균열적인 순간들을 통해 이 책의 결론이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인 ‘뱀장어 스튜’와도 같은 인생을 깨닫게 된다.남편과 여행을 떠난 여자는 우연히 자신의 아이를 마주하게 된다. 동양인 여자아이의 눈동자를 쳐다본 그녀는 자신의 아이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이 순간은 여자에게 가장 큰 균열로 다가왔을 것이며, 아이를 낳은 것 역시 이 여자에게 삶의 균열과 같다. 아랫배와 손목의 상처는 이 여자의 몸과 인생의 균열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인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어왔던 남자들에게도 균열의 순간을 많이 느낀다. 때문에 여자는 남자들을 통해 자신의 무언가를 찾고 싶어졌다. 그 무언가는 여자의 정체성일 수도, 여자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섹스의 쾌감처럼 잠깐의 것일 뿐, 결국 두꺼비 집처럼 균열이 보이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기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균열은 상실감, 허무함과 같은 기본적인 슬픔의 감정으로 여자의 삶에서 항상 있어오던 감정이었으나 여자는 균열을 애써 무시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여자는 균열을 직면했다. 끝내 그녀는 남편에게 돌아감으로서 그녀의 삶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다시금 일상을 견디는 그녀의 모습은 갇힌 세계에서 죽어가는 그녀의 열정을 뜻하며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다.
    독후감/창작| 2020.12.17| 6페이지| 4,000원| 조회(228)
    미리보기
  •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문장론, 글쓰기, 글쓰기지도 평가A좋아요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우리는 수만, 수천가지 종류의 언어들에 둘러싸여 세상을 살고 있다. 흔히 언어로 쓰인 어떠한 것들을 글이라 일컫는다면, 우린 언어만큼이나 많은 글들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글은 ‘어떤 생각이나 일 따위를 글자로 적어낸 것’ 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진다. 단어만으로는 표현하기에 부족한 우리의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란 뜻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꽤 많은 글들을 접하고, 글로 소통하고 글로 관계를 맺는다.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보다 더 좋은 글을 쓰기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에 필자는 우리가 원하는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해 보려 한다.좋은 글이란 어떤 것일까? 쉽게 생각해보자. 유치원생의 수준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과, 비교적 쉬운 문장이 있을 때, 그 글을 보는 유치원생들은 어떤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할까? 당연히 이해하기 쉬운 문장일 것이다. 혹 우리 눈엔 어려운 문장이 더 세련되고, 뛰어난 기법으로 작성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 화려한 것들을 읽는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그저 속 빈 강정에 불과할 뿐이다.이처럼 좋은 글은, 읽는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그 사람이 이해가 가기 쉽게, 글에 담긴 의미를 나타내야 한다. 뛰어난 구성이나 기교, 혹은 깊은 학식이 묻어나오는 글. 물론 이런 글들 또한 좋은 글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맞다. 하지만 필자의 기준으로 겉모습으로 판단되는 글의 특징은 좋은 글을 구분 할 때의 기준으로 그닥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우선순위로 되어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글을 읽는 사람을 향한 배려’이다. 읽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담긴 진정성이 드러난다면, 굳이 불필요한 미사어구를 덧붙이지 않아도 그 사람은 글쓴이의 마음을 전달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전달력 있는 문장이 되고, 전달력 있는 문장은 좋은 글이 되는 것이다. 혹 누구는 '진정성은 현실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판타지나 SF는 진정성을 담지 못하는 글인가요?‘하는 의문을 제기해온다면, 답은 ’아니요‘다. 판타지와 같은 장르들이 비현실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한들, 그 글을 쓰는 작가의 마음에 따라 충분히 진정성이 묻어나올 수 있다. 누군가는 비현실적인 글들을 보고 위안을 얻고 욕망을 채우기도 한다. 비현실적이기에 사실은 아닐 수 있어도 진정성이 결여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또한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스스로가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내려가야 한다. 본인부터 공감하지 못하는데 그걸 남에게 공감을 강요하는 것은 너무 뻔뻔한 일 아닌가. 필자가 중학생 때, 글을 잘 알지 못했을 무렵 그저 좋아하는 가수의 팬픽-가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 끄적인 적이 있었다. 단지 내 글이 멋있어 보였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온갖 판타지스러운 세계관과 캐릭터 설정을 했었는데 그걸 본 내 친구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이 세계에 안 살아서 그런지 뭐하는지도 모르겠고 이해도 안 가’ 공감이 하나도 안됐다는 소리였다. 사실 나조차도 쓰면서 주인공들의 행동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 적이 많았는데, 남이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아이러니였던 것이다.최근 유행하는 책, 뿐만 아니라 TV드라마 웹드라마 영화 등 글로 쓰이는 많은 작품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게 가장 큰 과제이다. 장르물들이 인기를 얻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비현실적인 소재 보다는 바로 우리 옆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가 더 호응을 얻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회사 안, 학교 안에서의 이야기나 주인공들의 평범한 연애와 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생활을 소재로 쓴 글. 이런 글을 보며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떠올리며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주변을 이입해 더 쉽게 상상이 가능해진다. 좋은 글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연상을 가능케 하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좋은 글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한 단어가 있다. 바로 ‘감동’이다. 글은 글쓴이와 읽는 이 한 쪽의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며 둘의 교감이 필수적인 것이다. 교감을 하며 읽는 이들은 글쓴이가 자신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진정성 있는 글을 적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정성을 쏟아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글쓴이는 읽는 사람으로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들 중에 글쓴이가 원하는 감정을 이끌어 내는 일을 해야 한다. 타인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내라는 뜻이 아닌, 내 글로 하여금 꿈틀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문/어학| 2020.12.17| 3페이지| 1,500원| 조회(172)
    미리보기
  •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비평문>, 오정희, 중국인거리, 비평문
    타인과 나-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를 읽고‘타자를 악이라고 규정짓고 인식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전복시키는 것이 바로 환상 문학이다.’ 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타인’은 무슨 의미이며, 우리가 ‘타인’을 악으로 인식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는 중국인 거리의 한 소녀 ‘나’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관찰자로서의 필자가 이런 물음에 답할 수 있도록 하는 소설이다.중국인이 살아가는 중국인 거리에 놓인 한국인. 그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다. ‘나’와 가족들은 전쟁 직후 살던 피란지에서 도망치려고 하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중국인 거리였고, 이 도시 속에서 이방인, 즉 타인으로서 시작되는 ‘나’의 첫 기억 역시 감각 중에 가장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후각으로 표현한 냄새에 관한 기억이다.작품은 주인공인 ‘나’가 친구들과 동네를 돌아다니며 시작된다. 탄가루가 날리고, 맡으면 머리가 아픈 해인초 끓이는 냄새가 진동하며, 곳곳엔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다. ‘나’가 묘사하는 중국인 거리는 대단히 낯설고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이렇게 낯설고 기묘한 곳을 배경으로 하여 ‘나’가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처음 중국인 거리로 이사를 왔을 때 ‘나’가 꿈꾸던 도회지의 이미지는 완전히 깨진 채로 남겨진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나’가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현실적인 세상을 경험하는 과정을 그린다.거리를 ‘겨우내 북풍이 실어 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는’ 곳이라고 표현한 ‘나’에게 주위는 온통 노오란 빛이다. 강렬한 붉은 빛도, 시원한 푸른 빛도 아닌 노오란 빛의 이미지는 어린 어른의 방관과 관조의 색채이며 ‘나’가 가난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나’는 가난을 피하려 하지도, 극복하려 하지도 않는다. 때론 이런 현실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옷장 같은 혼자만의 밀실에 도피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이발소 아저씨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매기언니의 술을 몰래 먹으며 어른이 되고자 하는 ‘나’처럼 중국인 거리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석탄을 훔쳐 음식과 바꿔먹는 행동 등, 피폐한 시대상황과 어른들의 욕망에 찌들어 상처받는 모습들을 보여준다.중국인 거리의 시작이자 끝인 지점에서 계단으로 시작되는 자유공원은 ‘나’가 유일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곳이다. ‘하늘 끝까지라도 이어질 것 같은 층계를 하나씩 올라가’는 공원 정상에서 ‘나’는 그리움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거리를 내려다본다. 매기 언니의 죽음과 할머니의 부음 소식이 들리고 소녀는 공원에 올라와 할머니가 남기고 간 유품을 숨겨놓는다. 공원은 소녀에게 비밀을 숨겨 놓을 수 있는 곳이며, 소녀가 주머니 속에만 넣어 두었던 유품을 꺼낸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다.작가는 왜 화자인 ‘나’를 초등학생의 어린나이로 설정했을까? ‘나’는 크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네 살 배기 동생을 챙기고, 약은 거짓말을 하기도 하며 이발사에게 되바라지게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나’가 가장 가까이 하는 주변인물인 치옥이 또한 어린나이임에도 매기언니의 술을 몰래 꺼내먹고 제니를 장난감 다루듯이 돌보며 양갈보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나’와 치옥이 모두 보살핌이 한창 필요한 나이 이지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아이를 낳고,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으며 남성 중심의 사회 분위기 속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나’는 존재감이 없듯이 지냈다. 때문에 매기에게 엄마가 계모라고 거짓말을 하고 정말 자신이 의붓자식이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치옥이야 말로 ‘나’보다 더 어려운 집안 환경을 가지고 계모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2층에 세 들어 사는 양갈보 매기언니가 검둥이가 가져다주는 신기한 물건들 틈에 사는 것을 선망하며 꿈을 키운다. 소설 속 아이들은 성숙해 보이기도 하지만 때론 짓궂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하며 무언가를 이해하기 어렵기도, 쉽기도 한 나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런 나이를 가진 ‘나’의 시선을 통해 타인을 바라본다. ‘나’는 어른들이 중국인들을 낮잡아 부르는 것을 보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나’를 지켜봐주는 ‘그’를 보면서 중국인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기도 한다. 이처럼 무엇이든 쉽게 믿어버리지만 그만큼 ‘편견’없이 타인을 바라보는 아이를 통해 중국인 거리 사람들의 삶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그렇다면 왜, 여자아이로 설정하였을까? 이 작품에선 많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미군 병사에게 몸을 팔며 살아가다 그에게 죽임을 당한 매기언니, 계모에게 구박 받다가 버려진 치옥이 뿐 만 아니라 주인공인 ‘나’와 나의 가족들 까지 모두 불행하긴 마찬가지이다. 먼저 ‘나’의 어머니는 기계적으로 끝없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동물적’ 육체로서의 여성성을 상징한다. 반면 할머니는 한 번도 자식을 실어보지 못하면서, 여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한, 억압되고 메마른 여성으로서 표현된다. 때문에 언니의 젖망울을 동여매고, 양갈보들을 외면하며 매기 언니의 딸인 제니에게도 ‘짐승의 새끼’라며 혐오의 시선을 보낸다.하지만 대립된 두 인물에겐 의외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바로 하락된 지위와 욕망의 부재이다. 어머니는 출산을 반복하며 과잉된 삶을 살아가고 할머니는 아이를 가져보지 못함으로서 결핍된 삶을 살아간다. 또한 두 명 모두 여성으로서의 삶을 존중 받지 못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속 고통 받는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나’는 어머니의 반복된 출산을 보며 출산은 어머니의 삶을 갉아먹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를 통해 어머니의 삶에 대해 거부하며 더 나아가 여성으로서의 삶 자체에 회의를 품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묘한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던 ‘나’는 어머니의 삶에 대해 동정하기도 하고, 할머니가 병이 들자 할머니의 손수건 속 물건을 공원에 묻어두는 행위를 하기도 하며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인다. 결국 소설 끝부분에서 초조를 맞이하며 절망감과 막막함을 느끼고 불안해 하지만 어머니를 소리내어 부르는 등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인다. 작가는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정체성과 지위 그 무엇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끝내는 성장하는 ‘나’를 그려낸 것이다.소설 속에서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항상 창문으로 ‘나’를 지켜보았던 ‘그’이다. 이 남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말도 한 마디 하지 않고, 정체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저 ‘나’가 의식하는 대로 표현 될 뿐이다. 그러나 ‘그’는 ‘나’가 이 작품 속에서 의지하는 인물이며 호기심을 가지고 타인을 바라보는 ‘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다. 또한 ‘나’는 ‘그’를 중국인이라고 편견에 쌓인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으로서 그를 인식한다. 소녀는 가족 중 그 누구에게도 보살핌 받지 못하고,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치옥이와 어울려 지내지만 치옥이가 의지가 되지는 않고, 할머니의 유품을 챙기기도 하지만 할머니에게서도 그 어떤 위안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 소녀에게 ‘그’는 유일하게 자신을 지켜봐주는 사람이다. 맨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소녀는 ‘알지 못할 슬픔’에 빠진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 자신을 동정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을 바라보며 자신을 투영해 보는 것이다.
    인문/어학| 2020.12.17| 4페이지| 4,000원| 조회(263)
    미리보기
  • <천운영의 '바늘' 비평문>, 바늘, 천운영
    욕망, 그 뾰족한 끝에 대하여- 천운영의 「바늘」을 읽고욕망이란 무엇일까. 욕망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이 소설의 키워드를 하나 말해보라면 ‘욕망’을 내뱉을 것이다. 천운영의 『바늘』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어떠한 욕망에 기의해 행위를 하고, 마음을 먹는다. 어쩌면 부정적이게만 보일 수 있는 단어인 ‘욕망’은 이 소설 속에서 어떤 단어보다 뚜렷하게 자신을 표출하고 있다.시작은 주인공 ‘나’(박영숙)가 한 남자에게 골리앗거미 문신을 해주는 장면이다. 여자의 외모가 묘사된 부분을 살펴보면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뚝한 발가락, 말더듬이” 와 같이 아름답지 않은, 더 나쁘게 말하면 혐오스럽고 추한 외형의 소유자다. 또한 그녀는 머리카락조차 두텁고 뻣뻣하며 목소리도 냄비 깨지는 소리처럼 듣기 싫다. 그녀의 성격도 이러한 외형과 비슷하게 추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직업인 문신을 세기는 일에서는 외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바늘땀을 뜰 때 나는 더 이상 말더듬이가 아니다, 나는 어느새 밀림 속에 숨은 한 마리 거미가 된다.” 이와 같이 그녀는 문신에 관해선 혐오스러운 외모를 가진 여자가 아니라, 더 이상 흉하게 말을 더듬는 말더듬이가 아니라 문신과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위를 장인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녀의 외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섬세함을 찾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이런 주인공 ‘나’는 문신 작업이 끝나면 언제나 고기를 먹는다. 익힌 고기가 아닌 ‘날 것’ 그대로의 느낌. 양념하지 않은 쇠고기에서 피를 보고 싶어하는 ‘나’는 식욕을 통해 성욕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 초반 그녀가 문신을 해준 남자는 그녀에게 “넌 문신 기술은 좋지만 도저히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 라고 말한다. 추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문신을 해준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한 적도, 자신의 성욕을 만족시킨 적도 없는 것이다. 주인공이 먹는 고기는 그런 성욕을 채우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다. 야채를 곁들여 먹지도 않는 것은 아무것도 추가 되지 않은 ‘그대로’의 성욕을 느끼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나’에게 문신을 받은 남자는 강인함을 향한 욕망으로 인해 허벅지에 또 하나의 문신을 새긴 것이다. 단단한 외피를 가진 거미를 새기면 자신 또한 단단해 지는 느낌을 받아서 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진정한 강함일까? 이것이 진정한 힘일까? 바늘로 문신을 새겼다고 하여 갑자기 힘이 세지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이 강해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 남자처럼 801호의 남자도 자신의 몸에 강인한 무기가 새겨지길 원한다. 남자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문득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 남자의 얼굴, 아름다운 얼굴, 발그레한 양 볼에 솜털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반짝이는 목소리” 와 같이 하얗고 잘생긴 얼굴을 지니고 있는 남자는 이런 외모 때문에 군복무시절 선임에서 성적으로 유린을 당하기도 했다. 약해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강한 외피인 문신을 원하는 것이다.등장인물들은 각각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여되어 있다. 주인공에게 문신을 받으러 찾아온 남자들은 대부분 문신을 통해 잃어버린 남성성을 되찾으려고 한다. 현파스님 또한 남성성을 잃은 모습으로 나온다. 속세를 버리기 위해선 본능적인 욕망인 성욕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801호 남자는 외향적인 모습에서 남성성을 상실한 것으로 표현된다. 쌀알처럼 흰 얼굴과 곱살한 인상은 아름답지만, 훼손된 남성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남성성이 약했던 801호 남자는 군대 내에서 성적 모욕을 겪고 남성성을 회복하고자 한다.이런 남성들에게 문신으로 남성성을 회복해주는 주인공은 여성성을 잃어버렸다. 추한외모로 묘사되는 주인공은 여자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고운 손으로 수를 놓는 엄마와 자신을 스스로 비교하며 움츠러들어왔다. 하지만 문신을 새기는 일을 하며 그 때 만큼은 그녀가 문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분신으로 여긴다.작품 속 공간들은 모두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표출하는 곳이다. 문신을 새기는 남자들은 문신에 대한 욕망을 ‘나’의 작업실에서 표출하며 주인공은 문신 작업을 섹스와 동일시하며 대리만족으로 욕구를 푸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마트에서 장을 보며 ‘날 것’ 의 생고기만을 찾는 행동도 성욕을 만족시키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이다. ‘나’ 회상으로 주로 나오는 미륵암은 욕망이 잠재되어 있는 곳이지만, 어쩌면 가장 폭발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고기를 보며 스님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정사하는 장면을 생생히 상상했다는 것은 엄마가 미륵암에서 스님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걸 주인공이 목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로인해 주인공은 새끼고양이를 변기에 던지고,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기까지 한다. 작은 벌레 한 마리의 살생도 추악한 것이 되는 절 안에서 주인공은 그 욕망을 즐긴다. 주인공과 801호의 남자가 만났던 전쟁기념관은 힘이 있는 전쟁을 좋아하는 801호 남자의, 욕망을 나타낸다.이 작품에서 작가는 기본적으로 남성 vs 여성, 추함 vs 아름다움, 강함 vs 약함의 대칭적인 구도를 소설 속에 깔아놓았다. 중립적인 것이 아닌 극단적인 것들을 서로 대비함으로써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함이다.주인공은 여성이지만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 않고, 남성보다 오히려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스님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주인공의 어머니에 의해 살해당하는 나약한 모습을 갖고 있다. 이렇듯, 바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남성이어서 강하고 여성이어서 아름답고 약하다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다.
    인문/어학| 2020.12.17| 4페이지| 4,000원| 조회(457)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4
4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2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30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0:32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