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세계화가 새로운 담론이 되는 지금의 시점에서 세계사적 관점에서의 역사교육이 중요시되고 있다. 역사 교육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일본, 중국 등 앞 다투듯 역사 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동북공정이나 역사 교과서의 우경화 등 역사의 왜곡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아교육과에 재학하는 예비 교사로서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고 그것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한국과 일본은 인접국으로서 그 역사적 연관성이 높다. 그 관계는 교린과 대립 등의 상반된 입장으로 교차 되어 왔다. 그 중 일제 강점기는 두 나라의 역사가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시기이자,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상호간의 관계로 매우 민감한 시기이다.한·일 양국은 오랫동안 서로 상이한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삼국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깊은 우호와 선린의 관계를 유지해가려면 자라나는 후손들에게는 보다 사실에 근접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적어도 같은 역사적 사실을 옳게 인식해야 하며, 객관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교과서를 토대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들이 후에 만났을 때도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며 기꺼이 미래를 함께 나아가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현재 일본과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식민지 통치 정책에 대한 서술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기초를 동화정책으로 인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한국사 교과서는 한민족을 수탈하고, 억압하고, 말살하려는 개개의 일제 식민지 통치 정책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두 나라에서 일제 강점기를 나타내는 분량으로 보아도 한국은 일제 강점기에 대해 중요한 민족적 역사의 한 장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일본은 단순히 일본 역사의 한 과정으로만 여길 뿐 반성의 대상으로는 생각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일제 강점기에 관한 양국의 역사 인식이 상이 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과거 틀 안에서 깊어져 가고 있는 우리나라와 일본야기 하여 보겠다. ‘동화’란 원래 다른 것이 같게 되는 거, 같은 성질로 변하는 것, 또 다른 것을 감화시켜 자신과 같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이것이 국가 수준에서 정책적으로 전개될 때 ‘동화정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식민정책사에 있어 동화정책이란 ‘식민지 및 그 주민을 본국의 영토 및 국민으로서 통합하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데 동화정책이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국과 같은 제도를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식민지 통치 정책에 있어서의 동화정책이란 구체적으로는 식민지에 본국과 같은 제도의 실시를 지향하며, 국민화를 위한 교육을 비롯한 문화정책을 실시하는 것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목적과 수당이 하나의 짝을 이룰 때 그것을 동화정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일본의 동화정책은 특이하게도 식민 본국과 식민지가 함께 중국 문화권에 속했다. 그리고 천황의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평등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일시동인이라는 개념으로서 황족은 상상된 공동체의 우두머리 가족으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또한 일본인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외국인이나 외래사상을 동화시키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식민지 통치 정책으로 ‘직접 통치’의 원칙을 채용하였으며 이는 한민족 그 자체를 지구상에서 소멸시키려고 했던 것을 의미한다.일본은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면서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지배할 것을 천명하며 일시동인(一視同仁)·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내선융화(內鮮融和)·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등을 표방하면서 조선을 통치하다. 이것은 곧 ‘조선의 일본화’를 통하여 북해도나 오키나와처럼 일본의 한 지역으로 편입시켜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것을 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화정책으로 개념화되어, 단순한 정책 차원에서가 아니라 지배원리로 작용하여 민족문화 민족성의 말살에서부터 민족차별, 추방, 혼거, 조선어 사용금지,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잡혼정괴·해체를 뜻한다. 민족적·문화적 동질성과 정체성, 혈연·지연의 공동체적 통합성, 조선 민족의 생물학적 특질까지도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는 근대화와 문명화라는 미명하에 조선 문화를 폭력적으로 파괴시켜나갔다.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였고 조선 역사를 왜곡시켜 일본의 역사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황국서사·신사참배를 강제하여 정신적·종교적 일본화를 획책하였고 민족성 말살의 최후의 단계로써 창씨개명을 자행하였다. 일본인의 조선에의 이주와 조선인의 만주 방출을 통하여 조선에서의 혼거 정책을 취하였고 결혼장려라는 미명하에 양 민족 간의 생물학적 혼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전 시기에 노무자, 군위안부, 군인 등으로 강제 연행하여 전쟁 소모품화 함으로써 민족말살을 획책하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일제의 동화정책은 조선사회를 철저히 분열시킴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전통사회가 근대적이든 봉건적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민족공동체로서 갖는 동일성과 통합성 그리고 정체성을 모든 분야에서 해체시켜야만 했다.일제는 한민족을 원칙적으로 말살·동화하려는 식민지 통치 정책의 근본 의도를 지키기 위해 ‘문화 통치’를 고안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시된 방법이 교육이었다. 따라서 교육정책에 있어 교육령을 개정하여 내지의 교육제도와 거의 같은 제도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공립보통학교의 확충을 위하여 서당을 폐지하여 사설 학술 강습회로 바꾸고, 사설 학술 강습회는 단계적으로 사립학교로 바꾸고, 사립학교는 사립보통학교로, 사립보통학교는 최종적으로 공립보통학교로 바꾸는 방식으로 교육을 통한 정책으로 한민족을 일제에 동화시키기 위한 동화정책을 정착시켰다. 또한 한민족이 전개한 민족문화운동에 대항하여 고차원적인 동화주의 식민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1922년 총독부 안에 조사과를 신설하고 정책조사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한편,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한국사를 타율적, 정체적, 사대주의적 역사로 날조하기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1930년대부터는 민족 말살 통치기 시작되었다. 한국인에게 한국역사는 물론, 한국어와 한글의 사용까지도 금하고 모든 문화행사를 엄격하게 규제했다. 그렇게 하면서 일제는 일본역사 속에 한국역사의 일부를 집어넣어 고대 이래 한민족은 일본민족의 지배를 받도록 역사적으로 운명 지어져 있다고 가르치고, 나아가 일본어를 아는 충량한 신민을 기르기 위해 교육 정책을 펼쳤다. 일제는 1936년 동아일보의 무기정간을 필두로 그들의 민족 말살 통치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언론기관과 문화단체를 탄압했다. 이어 1937년에 중일전쟁을 도발하고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한편 그를 바탕으로 강제 동원하는 등 황민화라는 슬로건 밑에 공공연하게 민족 말살 통치를 통해 조선을 일제에 편입하려는 동화정책의 강화를 강행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동화정책은 동화주의 정책이 점진적으로 강화되는 가운데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둘째로 황민화 정책이 있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가 당면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조선을 일시적인 착취대상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다양한 식민지 통치 정책을 통하여 동화시킴으로써 영구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제가 가장 적극적으로 조선의 동화를 위해 적용시킨 것이 국가에 의한 통제와 관리를 위한 교육 정책이었다. 일본어와 일본역사 등의 교육은 일본의 동화정책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동화를 위한 교육 정책의 특징은 내지 언어의 강요에 있다. 또한 고등교육이 아닌 초등교육의 보급에 힘쓴다. 교육에 있어 피지배민을 천황에 충성하는 일본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동화정책이 시행되었지만 점진적 방법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일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을 무단적인 통치 또는 문화 통치를 통해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려는 강력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교육 정책은 ‘조선교육령’에 의해 교육에 대한 기본방침과 제도적 기반이 규정되었으며 일제는 시대적 상황과 목적에 따라서 교육령과 수신서를 다음과 같이 개정하며 교육정책을 펴나갔다.교육정책의 일면을 서에서는 우선 좋은 국민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천황과 황후에 대한 존경심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경축일은 1년에 세 번이 있으며, 그러한 의식 참가의 뜻을 가르치고 있다. 즉, 일제 강점기에는 늘 실시된 연중행사였는데 조선인들을 이러한 행사에 참석시키는 것 자체를 동화를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수신과목을 통해 황국시민으로서의 정신을 주입시키는 교육이 이루어졌다.세 번째 창씨개명 정책, 1940년에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인 식으로 바꾸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조선이 일본의 가제도를 도입시켜, 조선 가정에 있어서의 유교적인 전통을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려, 천황제의 시행을 보다 본격화하겠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창씨개명이란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조선인의 이름을 단순히 일본인 식으로 바꾼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국가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을 변혁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즉, 창씨개명에는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다는 면과 조선 가정의 구조를 일본식으로 변혁한다는 면 두 가지가 있었다. 창씨개명은 일본의 동화정책의 완성기적 수단으로서 실시된 것으로 동화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일제와 동화된다는 것은 물리적인 강제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창씨개명정책이라고 할 것이다. 조선의 ‘성씨제도’를 비롯한 가족제도를 일본식의 ‘씨 제도’로 대체하고자했던 이 동화정책의 목적은 내지법의 동일적용이라는 ‘법적동화’와 ‘징병제의 실시’ 및 ‘총동원체제’의 관리를 위한 기초적인 호적정리라는 현실적인 목적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는 새로운 일본인의 형성이 동화의 목적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영역까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일본인 아닌 일본인’을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결국 창씨개명정책은 조선을 전쟁병참기지로 배치하여 필요한 군사적 물자동원의 기반으로서 활용할 뿐 아니라 조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