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육과 세계관‘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에세이’이름 : 황 찬용학과 및 학년 : 신학과 4학년학번 : 14001069제출일 : 2017년 6월 15일H.P : 010-9368-94321. 서론몇 년 전 KBS 뉴스 광장에서, 학생들의 성취도에 대한 보도를 보았다. 매 3년마다 실행되는 OCED 국가들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업 성취도 평가를 했더니, 한국에 있는 학생들이 수학도, 과학도, 언어도 최고 수준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한 두해 선행학습은 보통이고 고교 과정을 다 떼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 같은 학습 분위기는 높은 학업 성취도로 나타났다.하지만 학습 동기나, 만족도는 매우 낮게 나왔다. 당시 해의 조사 대상인 ‘수학’에 대한 흥미나 만족도는 65개국 가운데 58위였으며, 수학에 대한 필요성 인식도 최하위권이였다.이처럼 학생들이 공부가 재밌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이것이 현대 교육 현실에 큰 문제로 느껴졌다. 곧이어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공통된 ‘정체성’이 있지만, 각 자 개인에게 주신 독특한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고 그 정체성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사는 학생들에게 힘과 에너지를 공급하고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또한, 이 사회 안에서 ‘Best’가 되려 하지 말고 'Unique'가 되라고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은 'Best'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은 'Unique' 한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그들에게 부족한 면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목적’을 알고 하나님의 전적인 이끄심을 믿으며 따라가려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셨다.이처럼 자신의 고유한 삶의 목적과 독특성을 이해할 때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살게 하신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유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 되어지며 그러한 삶을 들의 마음을 바꾸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개성이 없고 외모가 좋지 않으면 인정 해주지 않으려는 이 사회와 현대 교육 제도도 같이 비판하며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해보고 싶다.본론에서는 1) 교육의 목적을 제시하고 2) 학습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3) 교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4) 그에 따른 교육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5) 결론적으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교육에 있어서 어떻게 이 교육 사회가 'reform‘ 되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5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기독교 세계관의 입각한 입장에서 기술하고, 거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제시하고자 한다.추가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으로 교육하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여러 학자들의 말들을 인용하고 참고하며 나의 생각들을 발전해 나가는 방향으로 이 에세이를 쓰고자한다.2. 본론1) 교육의 목적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위에서 미리 언급했듯이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주신 다양성 안에 고유하고 독특한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확립시킨 정체성을 삶 속에서 실현시키며 그것을 통해 삶의 기쁨과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까지 교육의 목적을 연결 시켜야 한다.교육의 목적을 말하면서, 프랭크 개블라인이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자. 그는 “기독교 교육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보고 판단하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의 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야만 한다.” 라고 말한다. 기독교 교육 안에서 정체성을 깨달을 때 학생들이 “나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 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세상의 모든 일을 바라 볼 때에는 하나님의 자녀인 ‘나’로서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할 것인지 판단할 줄 알게 해야한다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세상과 독립하여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칼빈주의 강연’에서 설명하는 기독교적 인생관처럼, 기독교 세계관으로 교육하는 목적은 1) 하나님과의 관계 2) 이웃과의 관계 3) 피조물 또는 피조 세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이결혼 등등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지켜야 하고 보존해야 하는 질서들이 있다.‘정체성’을 교육의 목적을 삼을 때, 비로소 위에 언급했던 3가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공통된 정체성인 ‘하나님의 자녀’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독특하고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 시켜주고 그 정체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루며 피조 세계들과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교육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정리하자면 교육의 첫 번째 목적은, ‘정체성’을 확립 시켜 학생들이 어떤 ‘무엇’ 으로부터 에너지와 기쁨을 얻게 하는 것이고, 두 번 째 목적은 그 정체성을 가지고, 교실을 넘어서서 1) 하나님과의 관계 2) 이웃과의 관계 3) 피조물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개블라인이 말하는 신본주의 교육에서 말하는 것을 인용하면, “하나님의 진리와 유기적인 관련성을 맺음으로써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통합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라는 그의 관점을 빌려, 교육의 목적은 위에 언급했던 교육의 두 가지의 목적이 함께 가서 올바른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인 교육의 목적이다.2) 학습자 이해교사들이 학생들을 바라 볼 때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필자는 그에 대한 첫 번째 답변으로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씨앗을 판매를 하면서 그 씨앗이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있는 시대이지만 교실에서 상황은 다르다. 이 창조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독특하고 고유한 ‘씨앗’이다. 하나님은 모든 품종을 다 아우를 수 있고 관리할 줄 아는 ‘농부’일 것이다.알버트 그린의 말을 인용하자면 ㅡ맥락은 다르지만ㅡ “모세는 이집트의 대학을 다녔고 다니엘은 바벨론의 대학을 다녔다.” 라고 말한다. 그들이 씨앗으로 있던 배움의 자리와 몇 십년 뒤 풍성한 어떠한 열매를 맺는 결실의 자리는 그 누구도 예상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 예상하실 뿐이다.학생이 곧 ‘씨앗’ 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교사들은 이 ‘감추어진’ 씨앗이 배움의 자리에서 서툴고 못한다하더라도 그 학생에 대한 기대ifferent’이지 ‘Wrong’이 아니라는 것이다. 답 없는 학생들은 없다. 답은 분명히 있으며, 기다리고 찾는 학생들일 뿐이다. 그 답을 교사가 명확히 제시 해줄 수는 없지만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깔을 찾도록 ‘기다려주고’ ‘도움을 주며’ ‘응원해주는’ 덕목이 필요할 것이다.또 하나의 원리는 학생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모든 색깔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서 학생들에게,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 여러 색깔들로 지으셨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질문이 필요한 것 같다.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만드셨을까?를 생각해보자. 그 목적은, 창 1: 6 에 나와있는 “형상”과 “모양”에 찾아볼 수 있다. 형상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이고, 모양은, ‘지,정,의’이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땅을 경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키는 것이다. 또한 지,정,의를 사용하여 올바른 삶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교사는 학생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이 땅에서 그 학생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이 땅을 경작하고,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킬지, 더 나아가 어떻게 ‘의미 있는 인생’을 살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학생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3) 교사의 모습학습자의 이해라는 주제에서 학생들은 ‘씨앗’이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여기서의 한 가지 교사들의 주의점으로 그 주제를 보충할 것은,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씨앗이라고 해서, 시도 해보지도 않는 나태한 마음가짐은 잘못되어진 것이다. 말 그대로 씨앗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어떤 씨앗인지 알수가 없다.특히 사춘기 시절을 겪고, 상황에 민감하고, 많은 감정들이 존재하는 학생들을 교육 할 때에, 그들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한 번 시도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을 계속 갖고, 여러번 시도해보는 교사의 덕목이 있어야 할 것이다.게블라인이 교사의 모습에 대한 말을 인용하면 “기독교 세계관과진리 없이 세속적 학문 편에서 서 있는 자들이 듣게 된다면 이성적인 것들은 무시한채 보이지 않는 영역만 강조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길 기독교 교사는 일반 교사보다 더 힘들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기독교 교사는 세속적 학문과, 성경에 대한 것을 동시에 가지고 가야한다. 다시 말해, 세속적 학문과 성경에 대한 것을 유기적으로 묶어 가르쳐야 한다. 어떻게 보면 교사는 탈 기독교를 이루어 세속적인 것을 면밀히 관찰해야 하는 필요도 있고, 관찰한 것을 가지고 성경적 원리를 끄집어 내는 필요도 있을 것이다.또한, 교사는 학생들의 다양성을 묶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학생들은 말 그대로 다양하다. 각자의 살아왔던 환경, 각자의 장점, 단점, 그리고 교육의 목적이라고 밝힌 정체성의 색깔까지 모두가 다 다르다. 교사는 이 학생들의 다양성을 화합할 수 있게 ‘공동체’를 형성 시켜줘야 한다. 각자가 잘하는 것을 서로에게 도움을 줄 때 아이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연합’이라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는 원리를 찾게 될 줄로 생각한다. 학생들은 이 공동체를 가지고 무언가 했을 때, “내가 필요한 존재이구나”를 느끼게 끔 해줘야 한다.그래서 교사는 학생들의 장단점을 파악해야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그 학생을 곧이 곧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관심과 대화를 통해 학생의 부족한 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채워줄 수 있는 학생을 옆에 붙혀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현대 교육에서는, 말을 안듣거나 공부를 잘하지 못한 학생들을 내버려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교육 방법이 아니다. 필자는 이 시대에 교사들에게 어떠한 부분을 제일 강조해야 할까? 라는 생각에, 학생들 각자가 독특하고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교사에게 필요하단 답을 내리게 됐다.4) 교육 방법첫 번째로는 ‘사랑’이다. 학생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색깔다.
누가 여호와 같은가?14001069 황찬용‘하나님의 계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에는 시간을 초월하는 교리적 체계로서 진리를 요약 정리해서 주시지 않는다. 또한 이 성경을 ‘역사’의 관점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①‘계시의 역사’는 계시에 대한 완만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시를 한 번에 다 알리지는 않으셨기 때문에 성경에는 계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구약을 대면하며 충돌하는 문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②‘구원의 역사’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더움에서 빛으로 구원해 내시려고 오신 특별한 방식을 말한다. 처음 구원의 역사는 인류 전체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후에는 특정 백성들에게 집중하는 방식으로 좁아지게 됐다. 결국 다윗에게로 구원의 역사가 옮겨지는데, 마침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두 가지의 계시적인 방법은 모든 문제 해결에 열쇠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문제는 너무 어렵고 이해를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이 언제나 우리의 생각보다 크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말씀을 통하여 인생을 찾아오시고 우리와 관계를 갖기 원하신다. 이전에 말했던 계시가 우리의 이해 수준으로 인해 제한되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에 직접 선을 긋기도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리기 원하시는 만큼 조금씩 알 뿐 인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숨길 수 있다. 하나님께서 숨어 계실 때에 돌파구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당황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하고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으로 자유롭게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즉 침묵은 하나님께서 대화를 이어가시려고 하는 가정에 잠시 숨을 돌리는 시기인 것이다.‘하나님의 질투’ 질투는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간 욕망의 가장 깊고도 가장 나쁜 감정 중에 하나이다. 구약의 히브리어 중 ‘키나’의 의미처럼 어떠한 문맥에서건 행동을 촉구하고 행위들을 촉구하고 이끌어 내는 강렬하고 열정적이며 격렬한 감정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질투’ 하시는 분이며, 우연적이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닌, 자기를 계신하신 핵심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특별한 관계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고 언약과 관계 되어 작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권한을 주장하시고 그분의 영예가 더럽혀지는 일을 용인하지 않으시게 되기 때문에 이것이 심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질투’이다. 결론적으로 ①인간과 하나님의 ‘키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② 구약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키나’라는 말의 성격신학적 배경에 대한 것이다. ③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특징 하는 것이다. 이러기에 다른 신들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하나님의 후회하심’ 구약에서 ‘후회하심’과 관련된 본문들은 크게 두 가지를 나눌 수 있다. ①악을 위하여 후회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후회하신 결과 인간에게 심판으로 재앙이 닥치는 것을 의미한다. 홍수 사건과 사울이 왕 된 것. 두 본문이다. ②선을 위하여 후회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임박한 혹은 이미 집행이 된 심판에 대하여 슬퍼하시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대부분의 본문이 후자를 더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판의 진행을 멈추시고 예고된 심판을 유예하심 등등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산발적으로만 언급한다. 사실상 후회가 없으신 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질투하심과 마찬가지로 ‘후회’하는 것은 인간의 후회와 동일하지 않으며, 자책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어두운 부분이 아니며 구약을 이해할 수 있는 한 줄기 빛이다.‘하나님의 보복’ 신성 모독에 가까운 것일 정도로 부정적인 단어를 하나님께 사용하냐 할 수 있지만, 히브리어의 어근인 ‘나캄’이라는 단어를 보면 공의를 회복하고 잘못을 적제하는 방법이다. 곧 공의를 시행하기 위해 사용된다. 핵심본문 네 개 중 ①레위기 26:26에 나오는 저주 인데, 심각한 형벌이지만 최종 형벌이 아님을 밝힌다. ②신명기 32장의 모세의 노래, ③나훔 1:2의 위로 ④이사야 35장의 꽃 피는 광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복은 신자들에게 깊은 위로를 줄 수 있다.‘하나님의 진노’ 히브리어 어근을 보면 ‘코’또는 ‘콧구멍’을 뜻한다. 이것이 ‘노’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을 본다면, 그것이 실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노하실 때는 거룩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곧 사랑의 도구와 같은 것이다.‘하나님의 거룩하심’ ‘거룩함’은 ‘분리하다’라는 어근에서부터 끌어오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중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이 모두 있다. 소극적인 측면이란 속된 것과 죄로부터 분리 되는 것을 말하고 적극적인 측면이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말한다. 구약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를 선포하는데, ‘전적인 타자’ 곧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으로 부르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속성으로 가르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과의 무한한 차이를 표시하여 주며, 사람들은 엎드려 입을 봉하고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구약에레위기 10:1-3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여러 번 그 분의 심판을 통하여 분명하게 나타난다.‘하나님의 용서’ 용서는 간단히 말해서 죄에는 언제나 그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데, 이러한 죄의 책임에서 속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용서로 하나님과 깊은 간극을 이어준다. 또한 구약성경은 용서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특징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구약에서 사람들이 용서를 구하려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제물을 바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용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동기가 있다. ①긍휼하심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흥망성쇠에 아주 깊숙이 엮이어 계심을 나타낸다. ②언약에 신실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언약을 기억하시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돌이키신다는 사실은 언약에 신실하심 이면에 더 깊은 동기가 있음을 암시한다. ③하나님의 이름의 명예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며 모독을 받을 때 진노를 멈추시고 용서한다. ④심판을 이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를 골고다 십자가로 인도한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극한 진노를 보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가장 강하고 놀라운 사랑을 목격한다.이 책의 의도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은 지식과 신뢰의 요소를 포함으로써 구약 안에 그분에 계시에 대한 지식이 불충분하고 부분적이라면, 그분과 그분의 약속을 신뢰 하는 일도 어려워진다. 때로는 신약과는 다른 방식 때문에 신령해 보이기보단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들이 많다. 더 나아가서 구약의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숨기시고, 질투하시고 때로는 후회도 하시며 보복도 하시는 하나님이다.
스티븐 니일 ‘기독교 선교史’14001069신학과 3학년 황 찬용본 책의 논지는 기독교 확장의 대체적인 흐름을 잡는 데 주안점을 두고, 중요한 사건들과 인문들의 생애를 대 주제의 예증으로 사용했다. 또한 기독교 선교에 대한 폭 넓은 시야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밝히는 복음 전도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식상하고 안일 한 것을 깨부수고 있다.* 요약제 1장 [세계 종교]에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AD 67-70년의 유대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파멸을 당하게 됐지만, 이 일을 통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생기게 되었고 복음이 파급효과로 널리 두루 전파되었다. 유대인들은 “제 2의 민족”을 구성함으로써 자신들과 전체 인류를 구별 하였지만, 세계주의적 책임이며 범우주적인 계시를 무시하고 말았다. 결국엔 예수에 대한 믿음의 주요 특징은 그와 더불어 기꺼이 죽어 다시 그와 함께 부활하겠다는 자발적인에 달려 있었고 이방인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결론적으로 모든 종교는 절대적인 유일신에 대한 지식과 신앙을 갖고 있으며 지방적이고, 부족적이다. 하지만 유례 없이, 그리스도교만이 세계적인 종교로 나타나는데 성공하였다.제 2장 [로마세계의 정복]에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복음 전파에 영향을 끼쳤던 두 가지 요소는 1) 로마 제국은 희랍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2) 도로가 잘 포장되었고 산과 골짜기 위로 잘 뻗어나갔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로마 제국 인구의 7%에 해당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일 것이다. 로마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거치지 않고 유대교가 약속하고 여러 가지 귀한 것들을 더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어렵지 않게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다. 또한 당시 로마의 시대는 영적으로 불안하여 여러 다른 신비 종교들이 강조되었다. 로마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제 3의 중심지였다. 개종 신자들도 있었지만 여러 지역에서 이 도시로 몰려온 그리스도인 신자들도 많았다. AD 166년에 그리스도인 인구가 이미 유대인들의 숫자를 능가했다로마 제국은 줄곧 국경 밖의 북방 민족들로 말미암아 시달리고, 국방 문제는 힘이 들었다. 계속된 압력으로 서로마 제국은 파괴되고, 파괴와 혼돈의 긴 기간이 뒤따르게 된 ‘암흑시대’가 도래했다. AD 622년에 모하메드가 등장하며 오늘까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전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슬람의 침략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죽을지 아니면 배교를 하는지 비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무슬림의 정복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대 재앙이었다. 암흑기 최대의 선교사는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C. 680~754)로 알려진 윈프리드이다. 보니파티우스는 722년 11월 30일 로마에 소환되어 교황 그리고리 2세로부터 독일 변경지의 감독에 임명 됨으로 일생 최대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선교사업을 성공 시키기 위해서는 로마의 직접적인 지원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인식하고 있었다. 이 자는 가이스마르에 있는 신성한 떡갈나무를 용감하게 찍어내림으로써 명성과 그리스도교를 위한 평판을 획득했다. 이 나무로 성 베드로의 기념 교회를 건축하였다. 또, 교회사와 세계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인 샤를르마뉴(Charlemagne)는 프랑크 왕국의 유일하고도 유능한 통치자였다. 주변에 학자들을 불러 모아 카롤링의 르네상스를 시작하였다. 암흑 시대 중에 가장 빛이 찬란한 한 때였다. 무슬림의림의 발흥으로 세계는 양분 되었고, 인도양은 무슬림의 독무대가 되어버렸다. 한 수도승은 987년에 중국 내에서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AD 1000년으로서 암흑시대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도시의 인구는 감소되고, 수도원은 황폐해졌으며 시골은 인적이 끊어졌다. 또 제 정욕을 따라 살면서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행했다.제 4장 [초기 유럽의 팽창]에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유럽 제일의 과제는 그리스도교 세계를 자신이 경계까지 확장하는 일이었다. 여러 세기 동안 북방인들은 불안을 끼치는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가, 8세기에 이르러 그리를 잡게 되었다. 스웨덴은 다른 나라들보다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디었다. 웁살라 신당이 저항을 했기 때문이다. 유럽 인종 가운데 오직 하나의 종족만이 이교도로 남아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리투아니아(Lithunia) 사람들이다. 14세기 때에 그리스도교 투쟁이 있었지만 끝내 승리를 이룩하지 못했다. 서유럽을 각성시킨 첫 번 째 위대한 사업은 십자군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결국엔 낭만화 되었다. 단순히 그리스도교의 성지를 해방시키겠다는 정신을 넘어서 야비한 목적을 위해서도 전쟁을 해왔다. 이 운동으로 인하여 기독교 역사에 지울수 없는 오점 세가지를 남겼다. 1) 서방 교회와 교회의 관계는 영구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고 2)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교도 사이에 나타난 원한의 자국은 오늘까지도 작용하고 있다. 3) 마지막으로 기독교 세계의 도덕적 기온을 낮추었다. 후에 몽고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때 유목민적인 생활 방식을 채택하여 성공적으로 선교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교는 초기에 로마의 평화로 덕을 보았고, 후에 와서 식민지 시대의 제한적이고 불확실한 평화의 덕을 입었다. 복음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 상당한 박해에도 불과하고 기독교는 여전히 유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십자가 운동은 하나의 유럽의 회복을 알리는 능력의 전조였다. 더불어, 전 세계적인 종교로 자라나게 되었다.제 5장 [발견의 시대]에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492년 콜럼부스가 대서양을 횡단하여 지금의 서인도에 닿았다. 이러한 대륙의 발견으로 그리스교의 관점이 크게 확대되었다. 무슬림으로 인하여 아시아로 복음이 들어가기 힘들었지만, 아시아의 뒷문이 발견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16세기에는 선교의 주도권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왕들 그리고 대종단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종단으로서는 예수회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하겠고, 그 뒤를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가 멀지 않게 쫓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선교사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관심사들과 무역관계의 일에까지 너무 깊숙이 관여했다. 그렇세의 ‘포교’라고 불리는 조치가 나타났다. 선교 사업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굴레 안에서 벗어나야 했고, 전 세계적으로 감독교구가 설립되어야 하면서 로마와 더욱 밀접한 관련을 갖도록 해야했다. 무리하게 감독교구를 뽑음으로써, 많은 불평불만이 로마에게 전달되었다. 주의를 돌려서 세계로 나아간 선교에 관하여 살펴보면 인도, 중국 등등으로 나아갔지만 각기 다른 선교집단들과 수도회들 사이에 상당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다. 의견의 차이는 세 가지 문제로 압축 됐다. 1) 장례식에서 지켜야하는 관습과 조상숭배와 2) 이것이 종교적 예배의 요소인지, 공경의 의미인 경의인지 3) 하나님의 이름을 번역할 때 사용할 용어와 관련된 문제였다. 동남 아시아는 언제나 어려운 선교지였다. 서방세계로 관심을 돌려 살펴보면, 미지의 나라였지만, 1615년에 현재의 몬트리얼이 있는 섬에서 로마 카톨릭의 법식을 따른 미사가 거행됐다. 대부분 카톨릭의 정착 지역의 모습은 비슷했다. 교회는 말을 중앙에 건립이 됐고 건물은 웅대하고도 장려했다. 또한 음악적 관심도 높았다. 하지만 18세기에는 예수회가 우려했던대로 로마의 간섭과 수도사들의 무분별로 선교 사업이 점차 의미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1773년 예수회를 해체시켜 결정적인 손실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19세기 점차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제 7장 [동양과 서양에서의 새로운 출발]에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교 선교에 참여하게 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그 이유는, 서방 그리스도 세계가 무슬림으로 인해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 사업에서 동양과 서양에서 서서히 진전 되어간 7 단계의 과정으로 살펴보면 1) 서 시베리아의 선교 2) 중국 선교 3) 칼묵크 선교 4) 볼가강 중류지역 선교 5) 동 시베리아 선교 6) 캄차타 선교 7) 아메리카 선교이다.제 8장 [서론]에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복음은 이슬람 세계에 전혀 이렇다할 인상을 끼치지 못했다. 이슬람 세력은 1천년의 지배를 끝내고 분명한 퇴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했다. 그의 마음은 경건주의자들의 종말론적인 사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하는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1889년에 교회 분열이 일어나 고대 시리아 교회에서는 최소한 다섯 개가 넘는 분파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1858년 이후에는 모든 나라가 문을 열었고, 교회는 새롭게 변화할 태세가 언제든지 갖추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제 10장 [식민주의의 전성기]에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세계는 반세기 동안이나 거의 중단 없는 평화를 노래했다. 다섯 갈래로 나뉘어 전진한 기독교 세력은 드디어 대륙의 표면을 남김없이 탐험하고 그곳에 기독교의 영향을 심어 놓았다. 선교사들에게 있어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이 아무리 타락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고 유럽인과 대등한 영적 위치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제 11장 [로마, 정교회 그리고 세계]에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8세기 말에 예수회의 해체는 수도사들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회복하기 불가능한 일로 보여졌다. 그렇지만 전통있는 모든 종단들이 종단을 재조직하여 선교 사업에 일익을 맡고 나섰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인도-차이나는 로마 카톨릭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교지로 등장했다. 그렇지만 막대한 선교사들의 인명 손실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는 정교회가 경건과 자의식에 있어서 놀라울 만큼 각성한 시대였다.제 12장 [어제와 오늘, 1914년과 그 이후]에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서방의 진출과 민족적인 반작용에 있어서 기독교는 일개 유럽의 종교로 끝나지 않으려는 노력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최근까지도 가장 성공적인 자기 주장의 수단이 되고 있다. 서방 종교는 민족 생활과 성격의 본체를 침식하는 파괴적인 요소의 하나였다. 2) 선교의 불확성들에 있어서는 20세기 초반에는 신학전인 토의가 전혀 없었다. 기본 원칙들이 모두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적은 세속주의였다. 자유주의적 사고들이 판을 쳤다. 그래서 19세기에는
일반서신(‘십자가의 선한 양심’[채영삼 지음])1-2절이 의도하는 바는 성도가 자기 자신을 보는 시각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1절이 세상이 우리들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2절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관점, 믿음의 관점, 교회가 반드시 그렇게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하는 관점이다. 그리스도교는 ‘세상’과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그리스도를 나타내셨고, 그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부르셨다. 이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신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의 근거요 목적이 되신다. 베드로는 1,2절에 서신서 전체에서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두 담았다.2-9절은 관점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실 뿐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서 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장악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지금 교회가 누리는 것은 ‘살아 있는 소망’이다. 중요한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더 큰 영광, 더 큰 은혜가 남아 잇다. 신앙은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살아 있는 소망을 따라 이 땅에서 잠시 ‘황홀하 여행자’로 사는 것, 그것이 베드로가 주문하는 신앙,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이다.주님은 고난과 시험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것을 낱낱이 드러낸다. 연단이 없는 믿음 생활은 없고 고난을 기뻐하고 헌신되고 사랑하고 이웃과 세상을 주께로 이끄는 믿음의 삶인 살아있고 진정한 믿음을 찾으신다.10-12절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교회가 조그마하고 세상 풍조를 따르지 못한다고 면박할 수 있겠지만, 교회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강력하게 부각 시킨다. 베드로는 그 목적지에 어떠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끊임없이 일깨운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에 올 영광”이라는 여행길이다. 이 문구는 정한 그의 세례를 통해 연합한 교회가 뒤따라가도록 되어 있다는 바로 그 길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그리스도의 길과 교회의 길이 분리 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베드로가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길에 대해 강력하게 선포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13절 21절까지 가장 중요한 주제는, ‘소망’이다. 교회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며, 보장된 것이며, 영광스러운지를 설명했다. 믿음보다, 사랑보다, 더 기초가 되는 것이 소망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의 내용인 복음은 ‘살아있는 소망’이다. 본문은 주께서 나타나실 때 가져오실 ‘은혜’에 모든 소망을 걸어두라는 것이다. 그 때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22절부터 2:3에 이르는 것은 ‘말씀’에 관한 부분이다. 22절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22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고 순종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으며, 현재도 여전히 그렇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참된 교회를 세우려면, ‘진리를 순종함으로 마음을 거룩하게,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거기에서부터 거짓 없는 사랑이 솟아난다. 곧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2:3-8절까지는 여행자들에게 ‘여러분이 바로, 그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진짜 예배당 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11절 전까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마치게 된다. 진정 교회가 성장한다는 양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을 배워 알고 따르고 닮는 일에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 아버지를 따라 그분의 거룩함에 이른다는 것을 뜻한다. 말씀이 교회의 영적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또한 세상을 위한 제사장들이다.2:11-17과 2:18-3:12에서 이 긴 여정을 출발하는 교회가 힘을 얻고 더 큰 확신을 갖도록 하는 핵심적인 지침들과 또한 수신자들이 실제로 처해 있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교회가 행해야 할 내용들을 상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자유를 오직 그분의 뜻과 주신 목적을 위해 사용함을 배워야한다. 우리가 선한 행실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다. 로마 내에 크리스찬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주변 사회로부터 낯설게 여겨지고 오해를 사거나 비방을 듣는 상황에서 베드로가 내린 본문과 같은 처방이다. ‘악행하는 자들’이라고 딱지를 붙여 비방할 때, 교회는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 악을 드러나게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지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먼저 빛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십자가를 통해 처리 될 수 있다.3:1-2절을 통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창조 질서에 순복함으로써, 그 창조 질서 안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진리에 근거한 바른 삶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 되심과 그분의 창조하신 질서에 관한 진리를 삶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13-17절을 보면,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일에 있어 선을 행함과 불의한 고난도 참아 내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한다. 베드로는, 교회가 세상과 복음을 나눌 기회를 얻으려면, 우선 그들이 알아듣는 방식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먼저 ‘온유함’이 요구되고 ‘선한 양심’이 요구된다. 곧 깨끗한 양심, 거리낌이 없는 양심이다. 특별히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해 무지하고 악한 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18-22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자취를 충실하게 다라 결국 가장 찬란하고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도착지에 이르게 됨을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총천연색의 화려한 피날레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세가지 그림을 떠올려야 하는데, 1)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고 2)노아의 방주이고 3)세례 받은 성도들이다. 즉, 시작인 18-19절과 끝인 2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여정을 통해 모든 영적 권세들을 정복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착지인 하늘 보좌로 그 구원의 방주를 이끌어그분과 함께하는 삶. 이렇게 삼등분이다. 우리는 보다 ‘남은 날들’에 대해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세적이며 복 받는 것이 신앙의 기준으로 삼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 방식은 선한 양심으로 짊어지게 되는 각자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이다.4:4-6 세상 안에 ‘낯선 사람’으로,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살며 복음의 길이 참 길 인줄 알고 가는 것을 이야기 한다.4:7-11 세상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종말의식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참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지나 하늘에 이르는 교회이다. 그리고 그 안에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살아 있으며, 용서와 치유와 회복으로 살아 숨 쉬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종말을 살아가는 동안 이런 것들을 꼭 실천해야 한다. 말씀대로 돌아가야 한다.4:12-19 베드로는 교회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 것과 세상에서 살아갈 방법을 거듭 설명한다. 낯설어 말고 미리 앞서 오신 영광의 영을 바라보아야 한다. 믿으면 축복이고 믿으면 고난이다. 그분의 손에 당신의 심장을 맡겨야한다.5장은 ‘모든 은혜’가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온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베드로전서에서 ‘은혜’는 그분의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통치 표시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중간의 과정, 그리고 끝까지 그분의 교회를 인도하시며 온전하게 하시는 통치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 이 은혜는 부족함이 없고 굳게 서게 하시는 은혜이다.일단 내 안에 갖고 있던 의문들을 세가지 정도 질문해보고 싶다. 1)본서의 47p을 인용하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곧 이제부터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성도들이 종종 전혀 깨닫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하려 하지만, 정작 계획하고 방향을 정하고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자신이 한다.” 이 본문에 대해서 논하많았고 필자 또한 그런 경험이 있다. 이로써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느껴 왔다. 신앙 생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께 test를 받아도, 그 test를 통해 연단이 되어 더 좋은 생각지도 않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생각으로 계획하고 방향을 정하여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계획성이 도사리지 않을까 싶은데, 이러한 부분은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신데, 필자는 너무 ‘작은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2)본서의 71p을 인용하면, “교회는 세상과 같은 안경을 쓰고,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낯설게 여기는 일이다. 교회는 세상과 같은 안경을 쓰고, 같은 각도에서 같은 곳을 바라볼 때 길을 잃는다. 세상의 뉴스가 교회의 뉴스가 아니다” 이 본문에서는 세상과의 단절이라는 의미와 부합되는 거 같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처럼 세상 속에 들어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크리스찬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게 해주어야 하는 선교적 사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뉴스가 교회의 뉴스가 되어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그들도 부담 없이 우리를 품을 것이며, 우리가 더욱 근신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구별 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세상 속에 나가면 수많은 위험 요소가 많고 유혹도 당할터인데, 우리가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을 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어떤 생각인지 궁금하다. 3)옛날부터 궁금했던 부분이고 현세에는, 목사들이 큰 범죄까지 저지르는 시대에 더욱 궁금해졌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라는 직분을 ‘선택’ 하시는 줄 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죄인인 터이라, 유혹에 빠지고 죄를 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75p에 ‘입맛대로 설교하는 죄’ 문맥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를 세우시고 사용하시는데, 그 목자가 자기의 죄성으로 인해 입맛대로 설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낮추실 수도
‘인간 발달의 이해와 기독교 상담’중간고사 서평 과제‘인간 발달의 이해와 기독교 상담’사람들은 관심과 성취를 맛보며 살아가기 원한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심리 구조이며, 필자는 만화 ‘포켓몬스터’가 미치는 영향의 중대성을 시사한 ‘돌봄’과 ‘성취’에 두 가지 요소가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본다. ‘돌봄’은 후천적 인격 형성에 필수적인 것이며, ‘성취’는 사랑과 돌봄이라는 이타적 관계성을 가지고 개발해야 하는, 성장하고 힘과 능력이 예전보다 더 커지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미래지향적이다. 자기실현에 대한 내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처음 단계보다 나중 단계가 더 성숙하고 강한 적응력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과거의 아픔을 승화할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졌다. 과거의 부정적인 일들로 부정적인 시야에서 탈출을 할 수 있는 것은 ‘가상주의’에 입각한 목표의 필요성이다. 바로 우호적 사회 환경이 필요하다. ‘칼 로저스’의 감자의 예로 사람도 우호적일 때 좋은 결과가 나오고 비우호적이면 성장이 더딜 수 있고 삐뚤어질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을 ‘관계성의 망’이라고 하는데, 크게 ‘힘의 형성’, ‘관계성의 형성’으로 나뉜다. 인간 발달의 기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사람의 생명이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발생하는 기관이 심장이고 이후에 연차저인 질서를 가지고 각 기관들이 발생되는 것과 같이 이것을 ‘후생성’이라 한다. 발달심리학에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원칙이 있다. ①일정한 발향과 질서가 있는 발달 ②서로 차이가 있는 발달 ③연관 되어 있는 발달 ④초기 단계의 중요성 ⑤개인과 사회적 환경의 연관 ⑥비례하지 않는 성장과 성숙의 발달 관계 ⑦발달은 장기적이고 점차적이며 지속적이다. 심리학과 기독교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혹자는 심리학이 기독교 신앙을 망친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제대로 심리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람들을 이해하는 시각은 곧 자신의 신발을 벗고 타인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곧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것이다. 상담자는 공감적 차원에서의 관계성을 형성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개하려는 노력이 요한다. 상담자와 내담자에 창조자가 개입이 될 때 진정한 관계를 형성 할 수 있다. ‘프로이트’와 ‘에릭 에릭슨’은 성장 발달 관계에 대한 심리적 특징과 기독교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상담을 어떻게 접목 시켜야 하는지는 다음과 같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친에 근거한 성적인 삶은 연차적인 발달 과정을 겪게 되고 이런 에너지는 특정부분에 지역화 된다고 설명하며, 인간의 발달 5단계 중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로 첫 3단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쾌락주의와 현실주의에 의거하여 성에 대한 억압과 분출을 시도하는 인간 내부에는 의식 구조가 있다고 보았다. 그가 주장하는 의식구조론은 무의식. 의식, 전의식으로 구분한다. 무의식은 모든 정신활동이 원초적으로 기인하여 에너지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곧 모든 정신활동이 이 무의식에 발행이 되고 표출되며, 인간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일종의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점이다. 전의식은 감시 기능을 한다. 무의식적인 생각이 표출 될 때 이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 불합격되면 무의식은 억압되어 표출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의식의 구조론이 프로이트 활동 후반에서는 성격구조유형론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원초아, 자아, 초자아’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원초아가 가진 특징은 모든 것을 ‘자기 만족’을 위해서 추구한다. 곧 ‘자기중심적 쾌락 중심’이며 ‘본능적’이다. 초자아는 ‘양심, 원시적 양심, 자아-이상’으로 나뉘고, 자신의 내부 안에 규제 및 윤리적 규범을 형성하게 된다. 덧붙여서 초자아는 비현실적인 논리를 가지고 현실에 적응하는 자아에게 호소를 하게 된다. 본질적으로 프로이트가 초기에는 성욕을 중요하지 않게 여겼지만 후에 성욕은 매우 중요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기독교에서 많은 천대를 받고있는 이유는 ‘무신론자’라는 것과 종교를 ‘환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객관성으로 신앙을 가진 우리 기독교인들이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가시가 될 것이다. 에릭 에릭슨은 ‘정체성(identipy)’과 ‘청소년’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이론은 프로이트와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앞의 것을 기초하여 새로운 이론을 냈다. 프로이트는 5단계까지의 성장만을 이야기하지만, 에릭슨은 전 성애 단계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에릭슨은 8단계로 발달과정을 나눴다. 또한 사람이 생활하면서 연관을 맺게 되는 사회적 가치, 사회적인 여건에 적응하면서 나타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이 가졌다. 이러한 기준으로 톱니바퀴의 ‘회전’이라는 표현을 썼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상담은 두 가지 특성을 가져야 한다. 첫째는 심리적 및 신학적 통찰력이며 두 번째는 상담에 임하는 하나님 현존에 대한 신뢰감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를 규명하는 것은 어떤 지식이나 기술에 의해서 확인이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상담과 기독교 신앙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한다. 신앙의 뿌리와 상담의 기술과 지식을 가짐으로써 좀 더 균형 있는 인간 이해를 할 수가 있다.목적(주장하는 바)이 글의 저자는 인간에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오늘날처럼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튀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 느린 것보다는 빠른 것을 찾으려는 시대에 있어서 독자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하는지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머리말 페이지를 인용해서 첫 째로는 발달심리학 입장에서 나타난 심리정서적인 문제들을 상담학적인 입장에서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는 이러한 심리적인 특성들을 어떻게 기독교적 상담에서 이해하고 상담할 것인가를 제시 한 점이라고 한다. 곧 인생을 전반만 볼 것이 아니라 후반까지 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우리들은 영원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사람의 아픔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며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이해, 관심, 그리고 변형에 관심을 가지는 상담자로 서게 될 수 있다.증명하는 방법과 전개 요령저자의 주장인 돌봄과 성취, 일관성과 책임감, 실천 욕구, 과거에서 미래로, 사회망과 인간심리로 먼저 인간이란 어떤 심리를 가지고 살아가며 문제가 무엇인지 이 서평에 파운데이션을 깔아준다. 2장부터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밝혀주며 인간의 신체나 정신적인 발달은 일정한 질서에 따라서 진행이 됨을 보여준다. 또한 독자에게 이 책을 일반적인 이론으로써 딱딱한 책으로 느껴지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으며 3장에서는 기독교 상담에 기초가 될 수 있는 신학적 입장에서 인간관계를 고찰 하였다. 후에는, 프로이트의 ‘심리성적이론’과 에릭슨의 ‘인간 이해’ 라는 난해하고 어렵고 광범위한 주제를 갖고 발달 심리와 기독교 상담을 적용했다. 앞서 ‘목적’ 챕터에서 말했던 저자가 두 번째 특성을 더욱 중점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어떤 이해를 갖고 상담할 것인가를 곳곳마다 예시와 사례로 독자에게 꾸준히 도전을 준다.인간의 심리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상담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조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좀더 좁혀 가정의 구조적인 면에서도 면밀히 관찰했다. 인간은 사회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강조했고 사회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할지 많은 통찰을 준다. 더 좁혀 인간은 무엇으로 갈등하며 어떤 것을 불안해하며 어떻게 죽음을 받아드려야 할 것인지 독자에게 제시한다. 프로이트 심리학과 기독교 상담에서 많은 천대를 받고 있다고는 기독교 상담사로서 어떠란 도전적인 이해와 정신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고 개개인의 열정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 프로이트의 부정적인 면도 일부 받아드리고 독자들에게 제시하며 양극성의 생각을 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곧 적합한 균형을 강조한다.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에 대한 신학적 반론이 제기 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이러한 이론들을 배울 때 이분법의 판단들을 배제시켜 준다. 에릭슨의 이론을 설명할 때 프로이트 불가분을 강조한다. 프로이트와 구별하자면, 에릭슨의 이론이 가지는 중요한 점은 개인의 심리적인 양식이 거대한 사회적 조직, 가치, 그리고 문화적 기대와의 상호작용 안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또한 에릭슨의 이론에 대해 쓴 챕터도 전인격부터 시작해 사회와 개인으로 설명된다. 에릭슨은 이미 사회가 한 생명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차원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엙슨의 사회심리이론의 핵심적인 요소는 심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요소 양면, 즉 개인의 발달 적인 것과 그 개인은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인 상황과의 상호작용을 인식해야만 사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