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정세와 문화의 이해 과제우선, 삼국시대 이전의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논해보기로 하겠다. 고조선과 부여는 현재의 중국 동북3성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한국 고대 국가였다. 기원전 3세기 말, 부여는 현재의 지린 성 창춘 시를 중심으로 랴오닝 성, 헤이룽장 성 일대에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부여는 기원전 1세기~5세기까지 선비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기원전 3세기에는 중국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는데, 이때 진나라에서 국가적 난이 일어남에 따라 동쪽인 부여로 이주하는 진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주한 진나라 사람들의 대다수가 한반도 남서부에 터를 잡으면서 두 민족은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나면서 한반도 남부는 문명 발달을 이루게 된다. 진나라의 전한 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 한반도에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의 4군과 그 속현을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기도 하였다. 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 유민이 한반도에 유입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군이 한반도에 주둔함으로서 상호간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다음으로 삼국시대부터 근세 이전의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논해보도록 하겠다. 372년 전진의 황제 부견으로부터 승려 순도가 고구려에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중국에서 비롯한 유교 사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오경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이념이 되었으며, 국민을 교육하는 원리가 되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고대국가들은 중국을 통해 한문화와 불교문화를 수입하여 국가통치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었다. 특히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당나라 문화를 흡수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후 고려의 광종은 중국식 과거제를 채택·실시하여 문치주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는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중국의 연호로 사용하였으며 귀족사회는 한문학을 교양의 근본으로 삼았고, 승려들도 송으로 유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13세기에는 몽골의 세력이 강대해져 고려를 침입하여 이에 항쟁하고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40년간 완강히 대항하였다. 그러나 1270년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와 화해하여 개경으로 환도하고 이후에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원·명 교체기인 고려 말에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서로 대립하였으며, 이는 조선 왕조를 개창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 왕조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국시로 삼아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공물을 보냈다.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중국의 왕조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을 표방하였으며, 개국하게 되어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하고 국호도 화령·조선의 둘을 지어 보내서, 조선이란 국호를 선택받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의 금인을 받아 정식으로 왕에 책봉된 것은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로 국왕의 즉위에는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죽었을 때에는 이를 알려서 시호를 받았으며, 또 종속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성절사·천추사·정조사·동지사 등 정기적인 사행 및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형식적으로 정치적인 종속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의 간섭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에서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만주족에 의한 2번의 호란을 당하자 조선은 굴복하여 그들이 세운 청나라를 섬겼고, 이 시기에 유럽의 과학지식과 문명이 중국을 통해 들어와 조선 학자들에게 실학 학풍이 퍼져나간 계기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정치 간섭을 심하게 하여 대원군의 납치, 중국 관제의 실시 강요, 청군의 서울 주둔 등을 행하였다.조선은 병자호란에서 대패한 이후에도 청을 종주국으로 삼는 문제에 대해서 국론이 일치하지 않다가 청이 명을 멸하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자 표면상으로는 사대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신의 내왕은 빈번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와 청나라에 유입한 서양 문물이 한국에도 전래되어 실학사상을 일으키게 하였고, 두 나라 학자들 사이에는 활발한 문화적 교류도 있게 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일본을 배후에 두고 있던 민 씨 일족이 몰락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청나라는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청나라는 임오군란 당일인 7월 24일 지방으로 도망갔던 명성황후와 그 일족이 개화파 관료 김윤식, 어윤중을 청나라로 보내 청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한 것을 핑계로, 8월 20일 청나라 해군 제독 오장경이 정여창, 김윤식을 대동하여 남양만으로 상륙해 조선에 진주하였다. 오장경은 8월 25일 흥선대원군을 병영으로 초청하였다가 군란 선동의 배후자라 하여 톈진으로 납치한다. 대원군 납치 후 다시 민 씨 정권이 부활하였고, 청군은 8월 29일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를 공격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사형시키는 등 군란 진압에 나섰다. 한편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 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대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곧,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조선에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경제적 침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 유입된 청나라 상인들이 바로 재한중국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후원한 갑신정변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 때까지 청나라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그러나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조선과 청나라의 정치적인 종속관계는 없어지고, 두 나라의 관계도 청산되어 조선은 형식상 독립국이 되었다. 1897년 고종의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공식적으로 단교하였다. 1907년 일본 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간도 협약으로 한중간의 영토 분쟁 지역이던 간도가 공식적으로 청나라로 편입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조국광복에 불타는 애국지사들은 중국 본토와 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1919년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마지막으로 현대 한국과 중국에 대해서 논하도록 하겠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전후 냉전체제로 인해 양국은 1950년대 이후 정치적 적대관계와 경제적 단절이 계속되었다. 개방과 개혁이 이루어진 1970년대 후반 들어 간접교역의 형식으로 양국은 경제 분야에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1980년대를 넘어서서 중국의 개방이 더욱 확대되면서 양국 경제교류도 점차 늘어갔다.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가 춘천에 착륙하는 사건이 나자 중국은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고, 이후 비정치적인 부문에서 양국 교류가 활기를 띠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중국 민항기가 한국의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고, 1984년 3월에는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모국 방문과 한국인들의 중국 친지방문이 허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