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SF영화들에서 시간이동, 텔레포트, 벽을 통과하는 물질, 평행 세계 등은 단골 소재이다. 하지만 SF영화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이러한 상상들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바로 양자역학에 의해서 말이다.현대 물리학은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이라는 큰 두 개의 기둥 위에 올려 쌓여졌다. 양자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양자역학은 트랜지스터, 반도체, 핵에너지 등의 여러 신기술로 현대 문명인들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바꾸어 놓았다. 양자역학을 통해 화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 있었으며, 이것으로 생물학적 현상들도 새로이 이해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일상생활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친 양자역학이 어떠하게 발전해왔는지, 그 과정에서 어떠한 융합적 사고들이 있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19세기의 근대 물리학은 매우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미시 입자들과 관련된 실험들에서 기존의 고전 역학적 설명과 부합되지 않는 것과 같은 몇 가지의 숙제들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들을 설명하기 위해 기존 물리학계에서는 새로운 역학적 모델이 필요했고, 막스 플랑크를 비롯한 여러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역학 체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중 양자역학의 기초를 마련했지만 그것을 탐탁치 못하게 여겼던 막스 플랑크와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양자역학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닐스 보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일생을 통해 어떠한 가치관의 소유자들인지, 그 당시의 주변 사회적 상황들은 어땠는지, 그리고 여러 가지 관련된 일화 등을 서술한 뒤 두 사람을 비교하고 분석할 것이다.2. 플랑크의 생애막스 플랑크(Max plank)는 1858년 4월 23일 북독일의 한 작은 도시인 킬(Kiel)에서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플랑크의 아버지는 법학 교수였으며, 그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모두 괴팅겐 대학의 교수이고, 친척들 중에 변호사, 학자, 목사 등이 많은 소위 말하는 인텔리한 집안 출신이다. 그렇기에하학과 같이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간 학문이며, 모든 것은 거의 밝혀졌고, 이제 남은 것이라곤 구멍을 메우는 일”이라고 조언하며 다른 진로를 택하라고 그에게 권하였다고 한다. 뉴턴에서부터 출발한 고전 물리학은 열이나 소리, 전기, 그리고 빛 등이 뉴턴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는 여러 가지 모형을 이해할 수 있는 근간을 제공했다. 그래서 그때의 물리학자들이 우주를 지배하는 거대한 동작 원리를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하며 우주의 진리에 다가갔다고 기뻐하고 있었다.자신 주변의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다. 플랑크는 부유하고 지적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들 모두 목사, 신학자, 법학자 등으로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플랑크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남달랐는데, 김나지움 학생시절 성악 수업을 받았으며 실력도 뛰어나 일요일 미사마다 합창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물리학 교수가 된 이후에도 음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는 등 열정이 대단했고 피아노, 오르간, 첼로 등 여러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고 절대 음감이라는 재능까지 가지고 있었다.그가 물리학을 선택한 이성적 근거는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장애물들을 물리치고 물리학을 선택한 이유를 플랑크의 자서전인 에 “우리의 사고법칙은 우리가 외부세계에서 받아들이는 인상들의 과정에 들어 있는 법칙성들과 일치한다는 전혀 타당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실에 어릴 적부터 열광했었다.“ 라는 말을 통해 어릴 적부터 주변을 탐구하면서 느껴지는 진리들을 밝히고 싶어하는 소망이었던 것을 통해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막스 플랑크는 물리학을 통해 진리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물리학에 깊게 매료되면서 그의 안에서 일종의 신앙화 되었다고 유추해본다. 이는 그가 나중에 얼핏 보기에는 고전 물리학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는 양자 역학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이유라고 생각한다.이후 1877년부터 1년간 그 당시 최고 대학이라고 평가받았던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 가서 공부한다. 1879술하였듯이 당시 물리학은 완성된 학문이라 여겨졌었고, 그중에서도 그 정도가 제일 심한 것이 열역학이었다. 모든 사람이 열역학 분야야말로 완성되어 끝났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플랑크는 열역학을 연구했으며, 열역학에서도 특히 ‘어떤 사람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어떤 특정한 한 가지 개념을 집중적으로 연구 했다. 그렇게 한 가지 개념을 끝없이 고뇌한 결과 엔트로피라는 위대한 발견을 한다.플랑크는 목표를 아주 높게 잡기로 유명 했다. 그의 성격은 등산을 가면 언제나 가장 높은 봉우리만을 목표로 올라갔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가 그런 목표를 정했던 이유는 아마 스포츠나 운동을 위해서 라기 보다는 자신을 단련하면서 정해 놓은 목표를 이루어 낸다는 성취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든 살이 넘은 나이에도, 플랑크는 알프스 산중에서도 아주 높은 봉우리를 오를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엔트로피의 발견은 그의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성격과 물리학에 대한 비이상적인 열정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이후에는 흑체 복사 문제에 몰두하였다. 처음 선형진동자를 이용해 복사의 사출흡수법칙을 다루었으나, 이것이 벽에 부닥치자 뒤에 열역학적 방법으로 바꾸어 엔트로피와 에너지 관계로 빈의 법칙을 정당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여러 실험들에 의해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자 빈 분포식의 개량으로 나아갔고, 1910년 마침내 실험과 이론이 일치하자 플랑크 관계식을 발표한다. 이어서 그 물리적 해석을 둘러싸고 에너지적 양자라는 개념을 생각해냈고 플랑크상수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매우 혁명적인 생각으로서 마침내 양자역학의 개념적 시초를 세계에 알려 물리학에 큰 영감을 주었고 이 식으로 191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플랑크는 독일 물리학계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플랑크는 일개 특허청 직원이었던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알아보곤 베를린으로 데려왔으며, 그 외에도 하버, 라우에, 마이트너 등 후대 물리학자들을 발굴해내는데 힘썼다. 1928년 플랑크가 은퇴하인의 일련의 행동들을 통한 헌신, 공정성, 성실, 지혜 등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그의 업적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가 극히 비극적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첫 아내와는 젊은 나이에 사별하였고 큰아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였으며 두 딸은 모두 출산 중에 사망하였다. 또한 2차 세계 대전때 작은아들마저 히틀러 암살사건으로 처형되고 베를린에 있던 각종 연구 실적이 남긴 집마저 타버린다. 이렇듯 플랑크는 개인적인 비극 속에서도 철학적, 종교적인 확신을 갖은 올곧은 사람으로서 신념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었다.3. 보어의 생애보어는 1885년 덴마크에서 태어났다. 보어의 집안은 화목하고 교양 있는 지식인 가문으로 그의 아버지는 코펜하겐 대학 교수로 생리학 및 의학부문에서 노벨상 후보로 지명될 정도로 저명한 생리학자였고, 어머니는 은행과 정계에서 매우 잘 알려진 부유한 유태인 집안의 일원이었다. 보어는 어릴 적부터 상당히 덩치가 큰 편이었고, 스포츠에 관심이 많고 운동신경도 좋아서 그의 동생과 함께 축구선수로도 활약을 했다. 이러한 그가 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는 그의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자식들에게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노력덕분에 그는 1903년 대학에 입학해 자연철학을 전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년뒤 왕립 과학 인문 학술원에서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표면장력의 성질에 관한 실험으로 금메달을 타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 당시 자연철학중에서도 물리를 주로 공부한다. 이후 1911년 물리학 박사 학위를 따면서 논문을 발표했는데, 한 신문에서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 대다수는 축구선수였다고 언급할 정도로 그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다.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영국에서 러더퍼드와 만나고, 의기투합하여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다. 거기서 그는 양자론을 수소원자에 대입하는 3개의 유명한 논문에 대한 기본적인 구상을 떠올린다. 이에 그는 아버지 같았던 러더퍼드, 연구욕구를 자극하는 시설, 러더퍼드의 휼코펜하겐 정신이라고 따로 이름까지 붙여질 정도였다. 보어는 연구소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선입관을 버리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하라고 말했다. 그는 상대가 어떠하든, 무슨 의견을 펼치든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결과로 연구소의 주된 활동은 보어와 그 제자들 간의 대화나 토론이었다. 보어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기 위해 강의실을 이용하기보다는 산책하면서, 여름엔 수영을, 겨울엔 스키를 타면서 물리학에 대한 대화를 했다고 한다.보어의 연구소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널리 알려진 두 가지 일화가 있다. 첫 번째는 1930년대 초에 독일의 실험물리학자인 프리쉬가 보어의 연구를 방문했는데, 보어와 그의 제자인 린다우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보어는 서서 있었고, 린다우는 책상에 기대 누워있는 채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예는 서부 총잡이 실험이다. 보어는 미국 서부영화를 매우 즐겨 보았는데 어느 날 서부영화를 감상한 후 왜 서부영화에서 총싸움이 벌어지면 항상 악당이 죽는가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이에 대해 보어는 의식적 행동이 무의식 행동보다 늦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우스꽝스러운 실험, 즉 진짜로 서부의 총잡이가 되어 서로 쏴보는 실험을 그의 제자들과 실행해 자신의 가설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한다.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젊은 과학자들이 서구문명을 이천 년 동안 지배해왔던 결정론적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비결정론적 세계관을 제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파격적인 자유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 같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도 그들이 제시한 비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보면, 보어의 이런 노력이 젊은 과학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를 알 수 있다.그가 연구소에 재직할 당시 있었던 가장 유명한 이론은 당연 상보성 이론이다. 보어는 이중성의 양립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상보성이라고 불렀다.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모든 성질들은 상보적 쌍을 이룬 켤레로 존재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