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ⅰ. 서론ⅱ. 서양음악의 등장과 유입과정- 근대화 과정에서의 서양음악- 실학자들- 천주교의 전래- 개신교의 찬송가- 군악대 창설ⅲ. 서양음악의 영향-서양음악이 전통음악에 끼친 영향-근대 서양음악가의 등장ⅳ. 서양음악 수용이 가지는 의미- 한·중·일 서양음악 수용의 공통점과 차이점-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음악 수용이 가지는 의미ⅴ. 결론-참고문헌ⅰ. 서론1876년. 개항 이후 개화기 또는 근대라 불리는 이 시기는 조선이 자주 독립 국가가 되기 위한 과도기로서 많은 변화와 새로운 시도로 혼란을 겪는다. 특히 대한제국.(大韓帝國,1897-1910)이 수립되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광무개혁을 통해 ‘구본신참舊本{新參)’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목표를 내세웠다. 이는 강하고 부유한 서양 국가들을 모델로 하여 왕권 강화와 군제 개편을 위한 시위대 창설, 무관학교 설립 등 나라의 힘을 키우고 내실을 다지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또한 이 시기에 외국과의 조약을 통해 서양 문물이 빠른 속도로 유입되자 ‘서양음악’도 함께 들어오게 된다. 대한제국은 ‘서구 세력의 아시아 진출 및 침략’, ‘근대 국가의 형성’, ‘기독교의 아시아 선교 활동,’학교 교육‘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서양음악을 수용하였다. 이후 식민이라는 자국의 정치적 상황은 우리가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 서구를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하였고 서양의 믿음체제와 교육체계 역시 ‘근대화’ 해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 하에 자문화에 빠르게 흡수되었다.하지만 이러한 근대 서양음악의 유입으로 인해 전통음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서양음악이 들어옴에 따라 우리의 전통음악은 밀려나게 되었으며 서양음악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또한 표면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된 근대화 과정은 전문음악인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창작 활동에서 내면으로 갈등이 있었음을 반영한다. ‘근대식’ 즉 서구식 교육을 통해서 보급된 서양 음악은 전통음악과의 상반된 음악의 기본자료 미학과 관습으로 전문 음악인들에게 풀어야 할 큰 숙제를 안겨주었다. 음악의촉과 수용은 단순히 중국의 서적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조선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 형성을 위한 적극적이면서도 자주적인 수용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서양음악의 이론과 실제를 우리나라의 세계관과 비교·분석함으로써 커다란 지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가 한국음악사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된다.2)천주교 전래를 통한 도입또 한편으로, 서양음악의 도입 시기를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18세기 후반으로 보려는 시각도 있다. 이에 따르면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아 음악을 사용하는데 제한이 있었을지라도 전래에는 반드시 음악이 수반되어야 하므로 서양음악의 도입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라고 한다.우리나라에서의 천주교 전례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다. 먼저 서적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가 도입되었고, 주교도 신부도 없는 가운데 그 교리서들을 통해 신앙을 획득한 초기 신자들의 전교로 천주교인의 수는 급증하게 되었다.이러한 전래의 특성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에는 독특한 교회음악이 형성되었으니, 그것이 천주가사이다. 천주가사는 난해한 종교적 교리나 사상을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체득할 수 있도록 가사형식으로 만든 종교적 운문으로, 1779년부터 1930년경까지 150여 년 간 200여 편이 남아있는 한국 천주교회의 자생적 성가이다. 천주가사는 1924년 발간된 최초의 천주교 성가집에 12편이 실린 이후로 현행의 성가집에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오나 가사만 전통적일 뿐, 선율은 다른 서양음악의 선율을 그대로 붙인 것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기에 그것이 발생·전파된 경로가 지극히 자생적인 것이어서 서양음악과의 연관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그렇다면 한국 천주교와 서양음악과의 최초의 접촉 시기는 언제일까? 그것은 중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의 입국이 이루어진 1795년으로 본다. 미사예식에는 전례음악이 수반되게 마련이고,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전례음악을 필수적으로 교육받아야 했으므로 주문모 신부가 전례음악을 도입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도움으로 에케르트 초빙 이전인 1900년 12월에 이미 약 580여 명에 달하는 악대원이 확보되어 있었다.이러한 군악대의 창설은 서양음악의 수용 주체가 우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비록 조선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국가가 주도가 되어 적극적으로 서양음악 도입을 위한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ⅲ.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서양음악이 전통음악에 끼친 영향한편 전통음악은 고유한 생존방식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식 음악교육제도를 그대로 모방한 교육기관을 통해 명맥을 잇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전통음악의 생산은 과거 예인들이 음악을 학습하고 자신의 내적 원리로 체계화하는 방법이 아니라 다분히 서양음악계에 견줄만한 후계자 양성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갔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전통음악의 근대적 재편 과정을 통해 발생한 가장 큰 폐해는 창작의 영역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전통음악의 창작은 이른바 ‘국악창작’이라는 한정된 영역을 통해 생산되면서 창작의 방향이 서구식 작곡의 방법으로 정착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작곡은 양악과 국악으로 양분되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실제의 음악의 생산과 연주에 있어서 이와 같은 분리는 다분히 양식적 혹은 재료적 측면의 구분일 뿐 국악과 양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계속 발생하는 까닭은 전통음악계 스스로 ‘국악창작’과 양악의 창작 원리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또한 작곡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등장으로 전통사회에서 창작의 주체이었던 연주자에 의한 창작이 점차 작곡가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서구식 작곡의 개념으로 창작의 위상이 고착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 전통사회의 생산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음악은 전통음악으로, 근대 이후 소위 작곡가에 의한 창작은 국악창작으로 구분되는 관념을 낳게 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과 창작 사이의 단절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화되어 전통은 변화할 수 없는 정신적 영역으로 작동하는 한편 전통Baird)가 설립하고 1906년 대학부가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인 숭실전문학교가 있는 평양으로 진출했다. 이곳에서 그는 미국 복음전도자인 로디히버(Homer Alvan Rodeheaver; Rody)11에게 발탁되어 미국 유학을 가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1926년에 로디히버의 초청으로 미국에 간 현제명은 시카고에 도착하여 무디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을 다녔고, 다음 해인 1927년에건 음악학교(The Gunn School of Music)로 이적하여 성악을 전공하고 이어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같은 학교의 연구과에 진학하여1929년 2월에 음악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 기간 중 1928년 8월에는 전 미국현상독창대회에서 1등으로 입상하기도 하였다. 1929년 8월에 귀국한 현제명은 이때부터 “금의환향 음악인”으로 언론과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귀국한 현제명은 복음전도자 · 연희전문교수 · 조선음악가협회 초대이사장의 직함을 가지고 작곡 발표와 작품집 출간, 경성방송국 방송 해설 등 전 분야에 걸쳐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먼저 복음전도자로디히버처럼 전국 각 기독교 단체로 진출하여 독창회를 갖고 창작과그 보급에 주력하였고, 193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개인 독창회를 가졌다. 그의 독창회는 기존 음악회의 창가류 독창에서 가곡과 오페라 등전문 독창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의 이러한 전문 성악가로서 활동은 동시대 테너 안기영(安基永)과 양대 산맥을 형성하며 30년대 중반까지 성악계를 주도하였다.그러나 그는 단순히 음악가로서의 정체성만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지향성과 그에 따른 활동을 펼쳤던 ‘정치 음악인’이라고할 수 있다. 그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일제시기에 그는 여러 음악 단체와 기관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통치 시기라는 정치적, 역사적 특수성 아래에서 조선 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예를 들어 ‘조선음악가협회’가 1931년에 이 들어 온 계기가 된 것은 앞의 중국,일본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찬송가를 가지고 들어와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보급한 사람 역시 자국민이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1887년경부터 교회에서 예배를 위한 찬송가 교육을 실시했고, 미션스쿨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는 근대식 교육을 실시했고 아울러 서양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또한 정신여학교와 영화학당 등에서도 서양음악을 ‘창가’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에는 주로 찬송가를 교재로 하였다.이와 같이 한국도 중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서양음악의 보급 및 활동의 거점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는 서양음악 전달자 및 음악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찬송가’는 집단 가창문화를 낳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만들어진 노래의 기존 선율 및 창장음악의 모델로서 역할을 하였다. 다만 중국?일본과의 차이점은 1세대 음악가 중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중국?일본의 경우는 기독교인이 아닌 음악가들도 많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경우는 양악대 출신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독교 출신이었고, 그나마 양악대가 해산되고는 기독교 출신의 음악가들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절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다.(2)자국의 필요에 의해 수입한 최초의 서양음악찬송가가 각 국가 및 국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국인 선교사가 전달해준 것인데 비해, 각 나라에서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양음악이 필요하여 그것을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공교롭게도 ‘군악’(軍樂)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중국의 ‘남경조약’, 일본의 ‘수교통상조약’, 한국의 ‘강화도조약’은 모두 강대국의 무력에 굴복해 맺은 ‘불평등조약’이었다. 이에 중국?일본?한국은 모두 반식민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서양의 신식무기의 위력으로 반 타의적으로 개국 및 개항을 하게 된 나라들은 오히려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근대국가를 만들어 서구열강에 대응코자 하였다. 이들 나라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