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逍遙遊의 함의장자에게 ‘도’란 인성의 근원이다. 도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지식을 기반으로 성립된 시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으로, 곧 인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가 생각하는 인성은 도이므으로, 자연에 순응하여 따르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도가의 성은 하나의 가치덕목으로 말할 수 없는 자연성의 허, 명, 소박 등의 덕목이다. 소박은 무지·무욕하며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이니 무위의 다른 표현이다.장자는 ‘인위’를 자연의 본성에 순응하지 못하는 부질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장자의 ‘위(爲)’란 자연의 본성에 더 보탤 것이 없어야 한다. 장자는 ‘내가 말하는 선이란 인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명의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이다.’라 말한다. 인간의 순수한 성은 허·정·명하며 꾸밈없이 소박한 본성에 따르는 것이며, 이것에 따르는 행위가 곧 위이다. 장자가 바라본 인성은 생명의 본질이므로 이는 생명의 진실한 상태이다. 장자는 양생주편에서 ‘몸을 보전하고 가히 생명을 온전히 하며 부모를 봉양하고 일생을 다하며 살라’고 말하며, 여기서 장자는 생명을 온전히 한다는 것을 인성의 활용이라고 본다. 장자는 인성을 다하여 본인의 생명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세상을 살아가는 큰 방법으로 제시한다.소요유 편의 대붕의 일화는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궁극적으로 잘 함축하고 있다. 대붕은 원래 곤이었다. 곤은 매우 작은 어란을 뜻하는데, 장자는 이것이 수천리나 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작은 것과 큰 것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뒤섞는다. 이러한 곤은 변화하여 새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붕이다. 변화에 대한 까닭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물고기가 새가 된다는 것은 아래의 것이 위의 것이 되는 것으로써 장자는 이번에 위와 아래를 뒤섞는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곤은 변화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는 대붕이 된다. 장자는 하나의 의문을 품는다. 파랗게 보이는 하늘의 색이 원래의 하늘의 색인지 아래서 보았을 때 멀어서 파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장자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대소와 상하를 뒤섞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만으로 하늘의 색을 정의해버린 고정된 시선. 장자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대붕을 통해서 이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편향된 시선을 버리라고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대붕은 그 크기가 수 천리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기 위해서는 수면에서부터 날개 짓 하여 바람을 타고 오르며 두터운 바람을 아래 두어야 한다. 그렇게 두텁게 쌓은 후에야 하늘을 등지고 날 수 있다. 장자는 여기서 하나를 더 뒤섞는다. 바로 쌓는다는 것이다. 공기를 두텁게 쌓는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공기를 채우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비우는 것일까? 장자는 쌓는다는 것과 비운다는 것을 뒤섞음으로써 앞서 말한 편향된 시선을 버리는 것과 더불어 취해야할 올바른 태도를 제시한다. 비우고 덜어내는 것이 진정 채우는 것이며 나아가는 동력이 됨을 말한다. 이렇듯 장자는 대붕을 통해서 그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대지를 가진 태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그렇다면 장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대붕과 같은 큰 지혜와 편협하지 않은 시각을 갖출 것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장자는 매미와 비둘기가 대붕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대붕과 매미와 비둘기에게서 볼 수 있는 크고 작음의 경계도 허물어 버린다. 매미나 작은 비둘기가 이것을 비웃으며 “우리는 후닥닥 있는 힘을 다해 날아올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 위에 머무르되, 때로는 혹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동댕이쳐지는 경우도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붕새는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대붕을 비판한다. 이처럼 매미와 비둘기는 자신의 실존 안에서 만족을 찾는 모습을 보인다. 매미가 대붕처럼 9만리를 날고자 한다면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할 것이고, 수명이 짧은 매미에게 있어서 이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붕과 같이 멀리 날고자 함은 매미가 자신에게서 벗어난 욕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장자는 자신의 능력과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소박하더라도 그것에 만족할 줄 아는 태도와 그 안에서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요유편에서 드러나는 장자의 생각들은 제물론과 자연관 등에서도 그 맥을 달리하지 않는다.노자사상에 이어 장자의 사상을 읽으면서,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었다. 노자는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민하였고, 장자는 개인의 자족을 위해서 고민한 듯 보인다. 매우 혼란한 사회를 살아간 노자는 시비선악미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체계를 경계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에 각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는 그러한 시비의 구분이 없도록하여 이 사회에서 홀대되는 가치들과 중시되는 가치들을 없애 지금의 혼란한 정세를 잠재우고자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장자는 그보다 후대의 학자이다. 노자가 경험했던 격동의 시대에서 드러나는 모습보다 장자는 보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였다. 세워진 기준을 철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비선악미추가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쓰르라미가 대붕과 같이 높게 날지 못한다고 해서 이를 쫓아 높이 날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장자는 궁극적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내적 여유를 찾아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임을 표방한다. 소요유(逍遙遊)의 한자 각각의 부수로 ?(쉬엄쉬엄 갈 착)이 쓰였는데, 이 소요유편을 통해서 장자는 우리에게 자족적인 삶에 대한 교훈을 준다.인간세와 덕충부 편에 이르면 소요편에서 드러난 장자의 함의들은 더욱 명확해진다. 장자는 편에서 자화를 긍정한다. ‘말하지 않는 가르침이라는게 있어서, 겉으로 내보이지 않고도 사람들의 마음이 스스로 충만해지도록 할 수 있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장자는 누군가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고 동시에 타인의 자화 역시도 가능하도록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훔볼트의 교육관을 통해 바라본 오늘날의 교육제도에 대해서-공교육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개선 방향을 중심으로훔볼트는 더 비상하고 탁월한 수준의 인간에 도달할 수 있는 교육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에는 어떤 것들이 요구되는가에 대해 고찰한다. 그는 탁월한 인간은 항상 독창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은 이들의 다양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보편적인 탁월성을 갖게 해준다고 이야기한다. “순수하게 그리고 그 최종 목적에서만 본다면 인간의 사고는 항상 그 스스로를 이해시키려는 정신의 시도이며, 인간의 행동은 그 자체로 자유롭고 독자적이 되려는 의지의 시도이다."라는 구절에서 인간이 갖게 되는 다양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인간은 스스로의 내면을 이해하여 자신만의 독자성을 갖고 하나의 개인으로써 완전함에 도달하고자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유형의 인간이 존재하고 어쩌면 이것은 그에게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육의 방향은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가?훔볼트는 총체성과 통일성이 세계의 개념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교육은 개념을 가르치지만 강요하지 않아야 하며, 통일성과 주체성이 세계의 개념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것이 인간 개인의 독자성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빠 곰이 아기 곰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에서 시행하는 공교육은 그 방법을 가르치지 않으며, 다양성 역시 보존하도록 돕지 못한다. 훔볼트는 교육이 행해질 수 있기 위해서는 국가가 그 안에 속해있는 국민들의 자유를 보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볼 때, 국가는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고 그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한다. 평등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명목아래서 시행하는 공교육은 국민들을 통합하려하며, 앞서 말한 다양함 속에서 어떤 특정한 한 성격만을 갖게 한다. 인류는 개인의 교육을 통해서만 더 높은 수준을 달성할 수 있는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는데, 공교육은 이러한 교육을 방해하고 인간을 집단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참다운 이성은 인간 개개인이 그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의 독자성 안에서 발전하는 상태만을 말한다. 또한, 물리적 본성이 각자의 필요와 성향에 따라 자신의 능력과 권리의 한계를 통해 스스로 부여하는 형태, 그것 외에 그 어떠한 형태도 차라리 인간의 손을 대지 않은 그 상태,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이라고 주장한다. 즉, 공교육은 ‘안하느니만 못한’ 것이며, 국가의 의무와 존재 의미는 국가 내의 치안과 안전의 유지에 있기에 그것 이외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훔볼트가 가진 교육과 국가의 존재의미에 대한 생각은 도가사상과 상당히 흡사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어떠한 형태도 차라리 인간의 손을 대지 않은 그 상태,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구절이 그러하다. 노자는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인간을 도의 작용을 따라 조화롭고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 도의 작용은 스스로 그러함이며 개입하고 강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위이다. 따라서 인간 역시 자연, 무위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위적인 분별과 욕심을 없애고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는 제3의 길이다. 인간에 대한 노자의 이러한 이해는 교육에 대한 그의 견해까지 이어진다. 그는 무위의 가르침으로 ‘불언지교’를 제시한다. 이는 말하지 않고도 가르친다는 것으로 타인에게 말하지 않고도 자신의 행동으로 상대방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즉, 직접 말하지 않고도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이 들여다보는 물그릇처럼 작용하여, 상대방의 ‘자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노자는 교육과 더불어 군주의 통치 역시 무위로써 행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훔볼트가 설명하는 국가의 의무와 노자가 설명하는 무위의 통치 또한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무위의 통치는 군주가 절대적인 권력으로 백성을 강압하는 통치가 아닌, 군주와 백성의 관계가 서로 간섭하지 않는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통치이다. 노자는 “성인은 항상 무심하여,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성이항무심, 이백성심위심)”이라고 이야기한다. 도가 만물의 그러함을 따르듯이 성인은 백성의 마음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렇듯 군주는 백성의 삶에 끼어들고 관리하지는 않아야 하되, 사회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무위에 따른 정치이며, 곧 이것이 이상적인 정치이다.훔볼트는 교육을 인류정신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인간이 그렇게 찾기를 갈망하는 ‘자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몇 가지 물음을 던져보고자 한다. 오늘날에 우리가 받고 있는 다양한 측면의 교육들은 스스로마다 내면에 있는 ‘자아’를 정립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을 하는가? 그렇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무교육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무교육과정을 거치고 나면 보통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들을 거치는 동안 ‘자아탐색 혹은 진로’라는 수업을 포함시켜 매년 혹은 매 학기마다 장래희망을 정해오도록 강요받는다. 보통 장래희망을 정해오지 않은 학생들은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거나, 꿈이 없으면 너의 미래도 없다는 근거 없는 괴변들을 듣게 된다. 장래희망과 자아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일까? 자아란 나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면서 정립되는 것이 자아이다. 물론 인간이 꿈꾸는 장래희망 역시 자아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겠지만, 그 자체로써 자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과정은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고 살필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저 ‘장래희망’처럼 미래에 다가올 스스로의 모습을 살피고 만들어 가기를 요구한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인재’가 될 것을 강요받고 그렇기에 좋은 대학교, 좋은 회사에 진입하는 것에 대한 압박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대학은 지식의 상아탑이 아닌 노동자를 양성하는 공장과 같고 좋게 포장하면 ‘인재’, 어쩌면 ‘노동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 즉, 우리나라의 교육은 훔볼트가 설명하는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본질을 찾는 교육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의무과정으로부터 출발해서 대학교 교육과정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받은 교육들은 자아수립을 위해 얼마나 조력을 했는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훔볼트의 주장대로 교육의 목적이 인류정신에 도달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대학은 본질 외의 것일지도 모른다. 진로 상담시간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싶은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서 상담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진로 상담시간에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대학교에 진학해서 찾아보면 되지 않니, 그래서 어떤 대학에 진학하고 싶니?’라는 질문이 돌아오곤 했다. 이렇듯 자아를 들여다보기 보다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라감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본질과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도 인간소외를 말하며 현실이 불행하다고 느낀다. 만약 대학과 취업을 강요받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데 청소년기를 잘 사용했다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보편성과 동시에 독창성을 가진 인간에 지금보다는 가까이 다가갔을 것이다. 훔볼트의 주장대로 공교육은 인간의 생각조차 통제하며 그들의 다양성을 억압한다. 다양한 경험, 그리고 알맞은 사교육이 각자의 삶을 지금과는 다르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이 교육이어야 하며, 공교육은 이러한 조력자 역할을 할 수 없다. 또한 되고자 하는 인간상과 이루고자하는 목표를 정하지 못해서 대학에 가야하는 상황을 ‘과잉교육’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노동자’가 되기를 자처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프라임사업의 대상자들이 이러한 ‘과잉교육의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다양성에 알맞게 프로그래밍 된 교육을 하지 않는 이상 공교육은 ‘과잉교육’을 부추기는 지름길이며, 모든 인간의 다양성에 맞는 교육을 국가에서 제공하는 것은 매우 불가능한 일이므로 사교육을 권장해야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교육은 예컨대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사교육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사교육은 공교육이 제시한 획일화된 기준 이를테면 대학, 혹은 좋은 직장을 위해 여분의 시간과 돈을 들이는 공교육의 사적 연장에 불과하다. 훔볼트가 제시하고 있는 사교육은 공교육이 불가피하게 제시할 수밖에 없는 단일한 교육 방식에서 벗어난, 개개인의 독창성을 존중하는 다양한 교육 방식이다. 이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예시가 가수 박지헌의 홈스쿨링 교육 방식이다. 그의 자녀는 모두 6명으로 큰아들과 둘째아들의 경우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홈스쿨링으로 전환했다. 체육과 음악 그리고 수학, 중국어 등 매우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도록 지원하고, 배우고 싶은 과목이 있을 경우 자유롭게 배워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아이마다 다른 재주와 특성에 주목하여 이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그 여지를 마련한다. 아이들은 정해진 교과과정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경험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인간상에 대한 생각을 정립해 나간다. 오히려 의무교육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의 본질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