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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북리 방형석축지 및 부소산성
    1 관북리 방형석축지 및 부소산성 145333 권순기1 목 차 1. 관북리 방형석축지 2. 부소산성1 1. 관북리 방형석축지 - 석축 : 돌로 쌓아 만든 축대 ( 築臺 ).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올린 벽 .1 1. 관북리 방형석축지 - 규모 는 동서 10.6m, 남북 6.2m 의 장방형의 형태이며 , 깊이 는 1~1.2m 로 주변에 5~6 단의 가공된 석재를 이용하여 쌓았다 . 연못의 북쪽에서 수키와를 이용하여 만든 배수관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연못으로 연결되는 입수시설 이다 . 또한 바닥에서 발견된 연꽃의 줄기와 뿌리 등으로 보아 백제시대 조경 을 위한 시설물이며 백제시대의 기와 빛 토기편 , 목간 , 짚신 , 금동제귀걸이 등 많은 유물 이 출토되었다 .1 1. 관북리 방형석축지 - 82 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 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83 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 ( 方形石築蓮池 ) 가 발견되었다 . - 부여 관북리 유적은 부소산성 남쪽에 자리한 백제 사비시대의 왕궁터로 알려져 있다 . 2015 년 부여 부소산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에 등재되었다 . -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 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 2. 부소산성 - 면적 : 983,598㎡ -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쌍북리 산 4) - 1963 년 1 월 21 일 사적 제 5 호 로 지정 . 사비성 ( 泗沘城 ) 이라고도 한다 . 현재 반월루 ( 半月樓 ) 가 있는 곳에서 산정을 두른 약 600m 의 산성 안에는 영일루 ( 迎日樓 ) 와 군창지 ( 軍倉址 ) 그 밖의 건물터 등이 있는데 , 이곳에서는 탄화미 ( 炭化米 ) 가 많이 나오고 있는가 하면 토축 ( 土築 ) 성벽도 완연히 남아 있다 . 이 부소산성은 538 년 ( 성왕 16) 웅진 ( 熊津 ) 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때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 탄화 : 재료가 가열되어서 검게 탄 상태 .1 2. 부소산성1 2. 부소산성 - 삼충사 * 삼충사 부소산성 정문인 사비문을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면 삼충사가 있다 .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사당에 들어서면 백제말 삼충신인 성충 , 흥수 , 계백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 해마다 10 월 백제문화제때 제향을 올리고 세분의 숭고한 구국충절을 기린다 .1 2. 부소산성 - 영일루 * 영일루 영일루는 부소산성의 맨 동쪽 산봉우리에 세워져 백제왕과 귀족들이 멀리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계획하고 ,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영일대에 세운 누각이다 .1 2. 부소산성 - 사자루 * 사자루 부소산 가장 높은 곳 ( 해발 106m) 에 위치한 사자루는 동쪽 영일루와 더불어 일월 음양을 뜻하며 달이 밝은 밤 누각에 오르면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쳐지고 시흥이 절로 일어난다 . 사자루 건립 당시 터를 파다가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진 ( 정지원명 ) 금동석가여래입상 ( 보물 제 196 호 ) 이 발견되었다 . 사자루 현판 글씨는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고 , 뒤쪽에 붙은 白馬長江 ( 백마장강 ) 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작품이다 .1 금동석가여래입상1 2. 부소산성 - 백화정 * 백화정 낙화암 절벽위에 세워진 육각지붕의 정자가 백화정이다 .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백화정은 백제 멸망 당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숭고한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 년에 부풍시사 ( 扶風詩社 ) 라는 시모임에서 세웠다 .1 2. 부소산성 - 궁녀사 * 궁녀사 반월루 광장에서 동북쪽 태자골로 조금 내려가면 궁녀사가 나온다 . 이 궁녀사는 백제 의자왕 20 년 (660) 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충절을 추모하고 그 뜻을 후세에 널리 기리고자 ,1965 년에 세웠다 . 10 월 백제문화제 때 제향을 올리고 있다 .1 출처 - [ 네이버 지식백과 ]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대한민국 구석구석 , 한국관광공사 ) - [ 네이버 지식백과 ] 부여 부소산성 [ 扶餘 扶蘇山城 ] ( 두산백과 ) - http://blog.naver.com/bahna2/70156400614 - [ 네이버 지도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백과 대백제이야기 ),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E 뮤지엄1 감 사 합 니 다 .{nameOfApplication=Show}
    공학/기술| 2016.11.26| 15페이지| 1,500원| 조회(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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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창덕궁, 창덕궁 후원을 다녀와서
    조경문화사담당교수백지성 교수님학과조경학과학번145333이름권순기제출일2015. 05. 13. 수요일경 복 궁경복궁은 한반도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해당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안을 따라 지리산으로 흐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금강산부근에서 서쪽으로 한 가지를 뻗어내려 도봉산을 이루고 북한산에 이른다. 그래서 북한산 줄기의 북악산(北岳山)은 경복궁의 주산이 되어 백두산 정기를 전한다. 또한 낙산(駱山)과 인왕산(仁王山)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로서 경복궁을 감싸안고 남쪽에는 목멱산(木覓山 : 남산)이 살짝 가려주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서울을 건설하면서 국왕이 사는 경복궁의 동쪽에는 역대 국왕을 제사하는 종묘(宗廟)를 두고 서쪽에는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사직(社稷)을 두었는데 이는 좌묘우사(左廟右社)라는 유교적 전범에 따른 것이었다.광화문예전에는 지금의 세종로 좌우에 의정부, 육조 등 관청건물이 즐비했다. 지금은 해태상이 광화문 바로 앞에 있지만 원래는 육조거리의 사헌부 건물 앞에 있었다. 해태는 정의를 상징하는 전설상의 동물로, 관료의 기강을 세우는 사헌부 건물 앞에 해태상을 두어서 경복궁에 들어가는 관료들에게 올바른 말과 행동의 모범을 보일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육조거리에 있는 해태상을 지나면, 인왕산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경복궁 앞으로 흘렀다. 그 냇물의 다리를 건너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들어서면 홍례문(弘禮門)이 있고, 인공으로 만든 개천에는 영제교(永濟橋)란 다리가 있었다. 영제교를 건너면 여러 채의 건물이 일렬로 배열되어 중심축을 이루었다.일제때 광화문에서 영제교까지 모두 허물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만들어 경복궁의 앞부분은 옛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1995년 광복 50년을 맞아 조선총독부건물을 해체하고 현재는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근정전맨 앞에 있는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이었다. 정치를 부지런히 한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근정전은 국왕이 관료의 조회를 받고 국가의 중요 의식을 거행하는 중심건물이었다. 그래서 근정전은 가장진 앞마당에는 품계석을 두어 정1품부터 종9품까지의 문무관료들이 조회하게 하였다.사정전, 강녕전, 교태전근정전 뒤로는 국왕이 평소에 집무하던 사정전(思政殿), 국왕의 침소인 강녕전(康寧殿),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이 일렬로 배치되었다. 국왕과 왕비가 거주하던 이들 건물도 일제때 거의 헐렸지만, 교태전의 후원이었던 아미산(娥媚山)의 아름다운 굴뚝은 세련된 궁중문화의 멋을 지금까지 자랑하고 있다.동쪽 구역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는 근정전의 동쪽구역은 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동양사상에서 해가 뜨는 동쪽은 양(陽)을 의미하기에 세자는 동쪽에 살았고, 그래서 세자를 동궁(東宮)이라 불렀던 것이다.동쪽구역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은 왕족과 상궁들이 드나들었는데, 동쪽은 봄을 의미하므로 건춘문(建春門)이라 이름하였다.지금의 프랑스문화원부근에 왕에 대한 간쟁을 담당하는 사간원(司諫院)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외부인이 왕실과 내통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서쪽 구역또한 근정전의 서쪽 구역에는 여러 관청이 있었다. 왕의 비서기구인 승정원을 비롯하여 학술기관인 홍문관 등 국왕과 수시로 접하는 관청이 이곳에 있으면서 국왕을 보좌하였던 것이다. 이곳도 일제때 모두 헐렸는데, 현재 남아있는 수정전(修政殿)은 세종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로 한글 창제 등 민족문화가 집대성된 곳이다.수정전 뒤쪽에는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慶會樓)가 있다. 경사스런 만남이라는 이름대로 임금과 신하가 이 누각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군신간의 정을 돈독히 하였던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공식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정감을 나누던 장소이기에, 경회루는 간결한 형태의 커다란 누각이면서도 연못에 떠있는듯한 모습이 육중한 무거움보다는 정취어린 품격을 느끼게 한다. 태종때 만든 경회루는 기둥에 용을 조각하여 물에 비쳐 꿈틀대는 용기둥이 장관이었다고 하는데, 고종때 중건할 때에는 바깥기둥은 땅을 상징하여 사각으로 만들고 안쪽기둥은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만드는 등 동양의 전통적 사상을 반영하였다.서쪽 구역에서 선총독부 건물을 지었으며, 경무대에는 총독의 관저를 지었다. 또한 강령전, 교태전 등 대부분의 건물도 철거하여 빈터로 만들었고, 을미사변의 현장인 건청궁을 철거하여 만행의 자취를 지우려 하였다. 그리고는 각지의 절과 절터에 있던 탑과 부도 등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경복궁에 이어온 유교 전통을 훼손하였다.경복궁 복원과 의미광복 50년이 되는 근년에 와서 경복궁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여 근정전도 제 모습을 찾았고 일제 때 파괴된 건물의 복원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북악산과 어울린 경복궁의 자연환경과 경복궁에 어린 역사문화적인 전통을 몸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경복궁은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또 다른 형태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대부분 경복궁에 한 번씩은 다녀왔을 터이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경복궁을 다녀온 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 학생들 중 한명으로 이렇게 많은 의미와 역사를 담은 궁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자원 봉사로 우리나라 문화재를 설명해주시는 도우미분과 함께 경복궁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다. 길 조차도 임금과 무관, 문관이 나뉠 정도로 신분에 관해 엄격하였던 조상들, 처마 밑에 그물을 치고 쇠창살을 설치하여 새가 둥지를 트지 못하게 하는 미덕 등 참된 조상들의 지혜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삶을 배울 수 있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공부를 하고 경복궁을 오면 보이는 것이 많을 것 같았다. 도우미분께 설명을 하나하나 들으면서 ‘아하!’하며 깨닫거나 소름이 돋는 조상들의 지혜를 배워가며 궁을 구경하니 그냥 지나치며 눈이 즐거운 정도가 아닌 머리와 온몸으로 경복궁을 느낄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유물 유적을 살펴본다면 훨씬 의미 있고 재미있는 구경이 될 것이다.창 덕 궁창덕궁은 140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 조선후기의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궁궐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다른 궁궐 정문과는 달리 2층 문양에 조선말에 박영효가 만든 태극문양이 그러져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바로 창덕궁이 나온다.창덕궁 안에 들어가면 궁궐 다리인 "금천교"가 있고 그 금천교를 지나면 창덕궁 의 정전인 인정전 에 들어가기 첫 번째 문인 "진선문"이 있다. 드라마"명성황후"를 본 사람은 알 수도 있는데, 오프닝 화면에 이 진선문이 등장한다. "장희빈"에서 인현왕후인 박선영씨가 다시 중전으로 복귀하여 들어올 때도 이 진선문이 등장한다. 진선문은 이렇게 사진으로 보면 여느 궁궐문과 다를 바 없이 작게 보이나막상 가까이에 가보면 엄청나게 크다.당시 조선 사람들의 키가 그리 크지 않은 걸로 봐서 키가 180cm인 동기들은 저 문을 지날 때 굉장히 불편해보였다. 물론 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옛 조상님들은 어떻게 한복을 입고 저런 문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으셨는지 후손의 입장에서는 참 신기할 따름이다.진선문 안에 들어가면 어도와 답도 가 나온다. 어도는 가운데 길로 왕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이고 답도는 각각 양옆으로 왼쪽은 문관 오른쪽은 무관이 걸었다고 한다.그렇게 어도를 밟고 지나가다 왼쪽을 꺾으면 창덕궁의 거대한 정전인 ‘인정전’을 들어가게 해주는 정문 ‘인정문’이 나온다. 인정전의 "인정"은 한문을 알다보면 알다시피 어진정치 라는 뜻이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경희궁의 숭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 수원화성행궁의 봉수당과 같은 큰 정전의 역할을 하는데 조선의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자 조선 왕실은 월산대군의 거처인 덕수궁을 임시 궁궐로 하다 그나마 전각이 몇 개 남아있는 창덕궁을 보수, 수리하고 창덕궁을 법궁으로 쓰게 된다. 창덕궁은 선조 말부터 순종 때 까지 그 인기가 멈추지 않았는데 총 이곳에서 왕위에 오른 임금만 10명이 넘는다고 한다.가운데 학 그림이 새겨져 있고 양쪽으로는 조선시대 수호동물 인 해태가 눈을 뜨고 지키고 있다. 오른쪽은 왕 왼쪽은 왕내부의 특징은 방바닥이 반질반질 하여 보통 목화를 신고 올라와야 하는 다른 궁궐의 정전과는 달리 매우 방처럼 버선발로 들어올 수 있을 정도 이다.인정전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말 서구문물로 인해 전등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정전 내부를 보면 저런 식으로 커튼이 쳐져 있던지 서양식 양옥구조로 도배가 되어 있다. 영국의 수정궁이나 베르사유 궁전에 가면 볼 수 있는 이런 커텐 양식들이 우리나라의 창덕궁에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이것은 인정전의 옥좌 내부이다. 옥좌 뒤에는 여느 정전과 똑같이 일월 오악도가 있다. 자꾸 다른 사람들이 저것이 해를 품는 달에 나온 그림 이라고 정확한 이름을 모르던데 일월오악도 일월오봉도라고도 불리며 일월오봉병이라고도 불린다.인정전의 우측으로 빠지면 그 옆에 있는 전각으로 갈 수 있는 조그마한 통로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어떠한 처소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보인다. 그 문은 ‘선정문’으로써 경복궁의 사정전에 비유하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가 열리는 곳이다.선정문을 들어서면 선정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 막이가 되어있다. 또한 선정전의 특징은 기와가 파란색으로 단청이 되어있다.선정문을 나오면 희정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희정당의 정문이 나온다. 창덕궁의 마스코트라고도 할 수가 있는 곳이다.희정당은 왕의 편전으로써 왕의 침전이기도 한다. 사극에서 잘못된 예로는 이 희정당에서 정사를 논하기도 하는데 희정당은 왕의 잠자리를 담당하는 전각이라 말할 수 있다. 경복궁으로 따지자면 강녕전과 같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희정당의 내부를 잘 살펴보면 이런 식으로 서양식 양옥구조로 도배가 되어 있고 의자와 탁자 역시도 서양식이다. 왕의 침전으로 늘 알려져 있던 희정당과는 달리 손님을 접견 하는 느낌이 많이 풍겨온다.대조전대조전은 조선시대 왕비의 편전이자 침전으로 흔히 말하는 "교태전"이다. 여러 가지로 교태전 의 구조와 많이 비슷하다. 대조전 옆으로 빠지면 궁궐의 서양식 수라간이 나온다. 이 당시 대조전은 왕비가 비워놓고 있.
    생활/환경| 2016.11.26| 10페이지| 2,000원| 조회(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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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편제 감상문
    한국음악의 이해학과 : 조경학과학번 : 145333이름 : 권순기분반 : 2 분반제출일 : 2014. 11. 06서편제는 임권택 감독이 1993년에 제작한 영화이다. 임권택 감독은 76년 왕십리부터 시작해 족보, 만다라, 씨받이 등에 이어 서편제까지 한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는,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영화를 만드는 명세기 한국 영화계의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임권택 감독의 영화이기에 지극히 우리나라적인 것을 잘 담고 있고 서편제에서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이 바로 판소리이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명의 고수가 음악적 이야기를 엮어가며 연행하는 장르라고 정의 되어있다. 판소리는 17세기 한국의 서남지방 즉 전라도 지방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그리고 지역적 창법에 따라 전라도 동북지역의 판소리를 ‘동편제’, 전라도 서남지역의 판소리를 ‘서편제’, 경기도 충청도의 판소리를 ‘중고제’라고 부른다. 이러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서편제의 배경은 주로 전라도지역, 그중 전라도 서남지역이 자주 출현한다. 서편제의 명장면으로 알려진 청산도 역시 전라남도 완도에 위치한다. 서편제는 판소리 영화답게 시작을 판소리로 시작하고 끝 역시 판소리로 끝난다. 판소리에는 서민의 실생활과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노래라고 한다. 그래서 서편제에서도 주인공인 유봉과 소화, 동호의 소시민적 삶과 고통이 잘 들어나고 있다. 판소리가 아직 한민족의 삶속에 녹아있던 시절 유봉은 즐겁게 판소리를 하며 소리 품을 팔고 다닌다. 하지만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줄고 냉대와 멸시 속에서도 소리를 하기위해 유정에 나가서 소리를 하다가 술잔을 따라주기도 하고, 약장수의 홍보 수단으로 소리를 하는 등 여러 시련을 겪으며 판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렇듯 변해가는 세상 속에 판소리의 가치도 영화의 장면마다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는 유랑생활을 하던 도중 청산도의 돌담길에서 유봉과 소화가 소리를 하고 동호가 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길을 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만은 세주인공 모두가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지은 상태로 서로 가사를 주고받으며 노래 부르고 있다. 이 장면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는 서편제 전체에서 가장 가족적인 유대감, 뭉클함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도중 여러 종류의 판소리가 들렸지만 그중 가장 잘 들린 곡은 춘향가와 심청가였다. 물론 그 둘밖에 모르는 내 얕은 지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후에 왜 그 곡이 그 장면에서 사용되었을까? 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춘향가의 경우 요정에서 접대하는 술상에 흥을 돋우기 위해 소리를 할 때 불렸는데, 술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소화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성적 대상으로 대하는 상황과 맞물리도록 선택한 것 같았다. 심청가의 경우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등장하는데 특히 나에게는 유봉이 소화에게 한을 심어주기 위하여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 심청가에서 심청이가 아비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바친 것과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아버지의 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심청과는 달리 아비의 욕심으로 희생당한 소화의 처지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심청가 속의 심봉사가 심청의 희생을 알게 됨으로써 가지게 되는 슬픔으로 인한 한처럼 깊은 한을 심어주고자 심봉사처럼 소화를 눈멀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편제에서는 우리 판소리만의 고유한 특색역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판소리의 가장 큰 특징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판소리’라는 말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라는 뜻의 ‘판’과 ‘노래’를 뜻하는 ‘소리’가 합쳐진 말이다.) 다른 여타 나라의 오페라 등의 장르와 다르게 구경꾼들이 추임새도 넣고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초반의 여러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판소리는 한 사람의 무대가 아니라 청자들 또한 하나가 되어 참여할 수 있는 장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서로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한민족의 특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동호의 고수 역할과 소화의 소리꾼 역할의 판소리역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서로 소리를 끝내고 해어질 때 천가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서로 손을 부여잡거나 끌어안고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소화는 소리(입)로 동호는 장단(북채)을 이용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소화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서로를 알아차렸을 때 직접 표현하지 않은 것은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지켜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예체능| 2016.11.26| 3페이지| 1,0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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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양소쇄원 답사 보고서
    < 담양소쇄원 답사 보고서 >- 자연 속에서의 정화와 여유 ! -조경학과145333권순기2016.11.16* 소개소쇄원은 조선시대 중기에 정원으로 건립된 유적이다. 규모는 4,339㎡(지정구역), 11만 7,051㎡(보호구역)이고 소재지는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 17(지곡리 123)이다. 2008년 05월 02일에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문화재 지정번호는 명승 제40호이다. 소쇄원은 양산보(1503~1557)가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를 담아 조성한 곳으로,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또, 양산보의 호가 소쇄옹 이었기에 원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한 것이라고도 한다. 교수님께서 이번 답사과제로 소쇄원을 정해주셨을 때, 작년 이맘때쯤 우리 과에서 소쇄원을 갈 사람을 모아 교수님과 선배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간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소쇄원을 둘러봤었는데 그 때 교수님께서 설명해주신 것을 잘 기록해둘걸... 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용현 학생과 유태욱 학생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우린 눈앞에서 버스를 놓쳐 약 2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광주역에서 소쇄원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입구소쇄원은 작년에 봤던 내 기억과 똑같은 듯 했다. 변한 것이 없었다. 날씨도 좋았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답사를 오기에 딱 좋은 날씨라며 모두 기분이 들떴다.소쇄원에 도착하자마자 저번에 갔었던 보길도 답사를 떠올리며 가재를 찾는 ‘악당들’. 입구에 흐르는 물에 오리 2마리도 여전히 잘 살고 있었다.입구인 오솔길에 들어서자 마치 자연 속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듯 좌우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우릴 반겨줬다. 시작부터 약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바로 오른쪽의 울타리의 나무가 ‘싸리나무’다, 아니다 저건 ‘대나무’다 의 내용이었다. 유태욱 학생이 옛날의 입구에 있는 울타리는 전부 싸리나무로 이루어져있다는 주장에 나와 김용현 학생이 반발은 한 것이었는데 가까이 가서 육안으로 확인하고 만져본 결과 대나무의 잔가지로 결론을 지었다.* 방지오솔길을 다 올라가면 가장 먼저 왼쪽에 방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방지의 옆엔 5~6단의 석축이 보였고, 연꽃도 식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곡물이 흘러들어올 수 있게 홈대가 만들어져있었다.* 대봉대그 위에 있는 또 다른 방지는 더 작았고 물이 흘러 들어올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이 방지에는 물고기가 참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축대 위에는 삿갓모양의 작은 모정이 있었는데, 이름은 ‘대봉대’이고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대봉대에 앉아서 바라본 계곡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평안해지며 그냥 가만히 앉아서 풍경이나 바라보고 있고 싶었다.제월당으로 가기 전 담장에 한문이 적혀있어서 ‘무슨 뜻일까?’ 하고 찍었는데 글자를 알아볼 수도 없고 의미가 궁금해서 찾아봐도 내용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아쉬웠다. 계곡을 건너가는 다리는 복원된 느낌이 나서 살짝 아쉬웠지만 잘 어우러지도록 복원을 하여 복원을 한 것 치고는 자연스러웠다. 계곡 바로 위의 다리 위에 서서 아래를 바라본 풍경도 한 눈에 소쇄원이 다 들어와 경치가 좋았다.* 제월당 (霽月堂)다리를 건너면 주인의 사적 공간인 제월당이 있는데 안의 천장을 보면 한자로 된 많은 글들이 있다. 송강 정철 ‘자신이 태어난 해(1536년)에 소쇄원이 조영되었다’, 하서 김인후 등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쉬웠다. 이래서 안내 및 해설해주는 사람이 필요한가 싶었다.제월당 주위에서는 누울 듯 말 듯 한 나무도 있었고 소나무, 배롱나무 등을 볼 수 있었다. 제월당 뒤에 등산로도 있어서 사람들이 꽤나 그 길로 등산을 하러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감나무 한 그루에 감이 너무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있길래 감을 따 먹자고 이야기했는데 김용현 학생이 자기 집에 감나무를 키우는데 저건 무조건 떫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해서 결국 포기했다.제월당 뒤에서는 보길도 답사 때 해남 녹우당 안채에서 봤었던 것(물론 교수님께서 중요한게 아니라고 하셨지만)과 똑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기둥의 밑에는 돌을 괸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의 좌측에는 아궁이도 있었다. 그리고 제월당을 올라가기 위해 돌을 괴어 만든 두 개의 돌계단이 있었는데 왜 하나가 아니고 굳이 두 개를 만들어 놓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마루로 올라가기 쉽도록 하기 위해 밟을 수 있는 디딤돌을 하나 둔 것을 보고 조상의 지혜를 알 수 있었다.제월당으로 통하는 문은 엄청 낮았다. 그걸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작았는지 대충은 가늠할 수 있었다. 어디 가서 좀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닐 기회가 없는 나에게도 문이 너무 낮게 느껴져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키가 작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체험하니 실감이 났다. 문에서 석축으로 오르기 위한 깨알 같은 돌계단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들어서면서 정면의 나무가 보이는 것도 제월당으로 들어설 때의 기분이 상큼하고 좋게끔 하였다.제월당에서 광풍각으로 내려가는데 배수구와 계단의 돌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것을 보고 정형화된 미가 느껴졌다. 그리고 배수구와 계단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모습도 꽤 흥미로웠다. 내가 오르내리는 계단 옆으로 물이 졸졸 흐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활/환경| 2016.11.26| 11페이지| 1,000원| 조회(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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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평가A+최고예요
    제목 : 죽음의 수용소에서저자 : 빅터 프랭클주제 : 인생의 목표와 의미분반 : 01학과 : 조경학과학번 : 145333이름 : 권순기날짜 : 2016. 05. 18?죽음의 수용소에서? 와 주제인 인생의 목표와 의미. 책의 제목과 주제의 거리감이 꽤나 나서 책을 펴기 전엔 ‘책과 주제가 과연 일치할까?’, ‘다른 책의 주제와 바뀐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제목을 보고 연상되는 이미지가 지극히 부정적이고 삶의 희망이 없는, 인간의 처참한 삶에 대한 내용일 것 같은 느낌이 강했고, 주제인 ‘인생의 목표와 의미’는 진취적이고 의지적인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펴서 읽어가는 동안 책의 제목과 주제가 자연스레 일치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의 절박한 상황, 최악의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인생의 목표와 의미는 정말 질기고 끈끈한 관계인 것이었다.나는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저자의 상황에 깊게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내가 겪었던 상황과 꽤나 비슷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상황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건장한 20대 이상의 남성이면 모두 느껴보았거나, 곧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언제 죽게 될지, 살더라도 끝이 날지 안날지도 모르는 극심한 강도의 생활은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인권, 인간의 존엄성 따위가 상당히 무시되는, 훈련소에서는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번호로 분류가 되는 ‘군대’에서의 생활은 어느 정도 저자의 상황에 공감하며 감정이입을 하는데 있어 충분한 요소로 작용했다.아우슈비츠의 수감자의 심리변화를 들어간 직후, 적응한 후, 나올 때 이 세 가지의 순서로 분류하였는데, 나의 심리변화 또한 그 순서를 따랐던 것 같다. 들어간 직후, 이제 정말 약 2년간 갇혀 살아야 한다는 충격과 집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또 국가에 대한, 이 상황에 대한 혐오감에 극도로 사무쳤던 기억이 내게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적응한 후의 무감각, 다르게 표현하자면 해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미 시작되었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버텨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니, 처음과 달리 감정이 격하게 요동치지 않았다. 그리고 몸이 힘든 것은 물론 선임들에게 욕을 먹고 벌을 받는 등 정신적인 것들도 점점 무뎌져갔고, 다른 동기나 선임, 후임이 욕을 먹고 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아도 그러려니 하는 단계였다.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다면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올 때, 이 상황이 정말 말이 안 되지만 미친 듯이 갈구한 자유를 얻는 전역, 해방을 하고 나니 막상 생각보다 그렇게 기쁘진 않았다. 그냥 허탈한 느낌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좋았다. 머리로 생각을 해보았을 땐 정말 좋은 것이었다. 이제 나를 속박하는 곳과 것이 없는 자유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공허하며 그 자유라는 것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고, 여느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곳을 벗어나면 엄청난 삶이 기다리고 있으며 정말 행복할 것만 같았는데, 단지 입대를 하기 전 2년 전의 일상을 사는 느낌일 뿐이었다. 군인들의 상당수가 전역 후의 모습을 상상하며 각종 계획을 짜며 보람차게, 열심히 살겠노라 수도 없이 다짐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내 모습을 파헤쳐보면 그 때의 다짐을 찾아보기가 이상형을 만나는 것만큼 힘들다. 전역이라는 자유가 찾아오기 전의 내 각오의 결과가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는데..사람은 원래 이기적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과연 사실일까? 남을 사랑할 줄 알아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틀린 것일까? 나는 가끔 저 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곤 한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화려하게 포장하여 합리화를 하기 좋은 구실을 만든 말이 아닐까? 나는 인간의 선택과 행동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남의 물건에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가둬놓고 3주 가량 굶겼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내가 그 옆에 앉아서 치킨을 먹다가(이것마저도 참을 수 있을까?) 배가 불러서 다음에 먹어야겠다고 말한 뒤, 치킨을 놔두고 온다면 그 사람은 과연 치킨에 손을 안댈 수 있을까? 하루도 굶지 않고 매 끼니 잘 챙겨먹는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치킨에 손을 대지 않겠지. 이번엔 평소 마음이 선해 먼저 양보를 하거나 힘든 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만약 그 사람이 저자와 같이 수용소에 갇혀있다고 치자. 가장 마지막에 줄을 서는 사람은 ‘카포’에게 3시간을 두들겨 맞는다고 가정을 한다면, 그 사람은 과연 남들을 위해서 가장 마지막에 줄을 설까? 아니면 3시간을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 앞에 설려고 노력할까? 당신이라면 어떡하겠는가? 당연히 후자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감시자들과 카포에게 맞지 않으려고, 매서운 바람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서 무리의 중간에 줄을 서서 가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평소 남을 위하고 배려가 많으며 헌신적으로 보여 지는 사람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자신의 상황이 베풀어도 될 정도니까, 굳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될 때니까 이기적이지 않아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 그럼 또 재미있는 가정을 하나 해보자. 나는 지금 출근길이다. 오늘 지각을 하면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내게 딸린 다섯 명의 식구를 먹여 살릴 방법이 없다. 택시를 타면 좋겠지만 내겐 버스를 탈 돈밖에 없다. 지금 내 앞에서 오고 있는 버스는 1명만 탈 수 있고, 나는 이 버스를 놓치면 회사에 지각을 한다. 버스 정류장에는 지금 나밖에 없지만, 뒤에서 1명이 꼭 타야만 한다는 표정으로 이 버스를 타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 자 이제 어떡할 것인가.하지만 이기적인 것과 또 다른 차원인 인격의 차이는 분명이 존재한다. 책에서 나온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 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수프를 퍼주는 ‘요리사F'와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과 매일 폭력을 일삼는 ‘카포’는 전혀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다. 군대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위치가 올라가 카포, 요리사의 위치에 설 때가 온다. 매일 욕설과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선임과 다독여주며 힘을 주는 선임이 있듯 나쁜 선임과 좋은 선임으로 나뉘기 마련이다.나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내가 좋아하는 선, 후임에겐 좋은 사람이었고, 싫어하는 선, 후임에게는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인격이 좋지는 않은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반성을 꽤나 많이 했다. 또, 요리사F의 대목을 읽을 때도 반성을 많이 했다. 그 대목은 마치 나를 ‘저격’이라도 한 듯 양심을 찔리게 만들었다. 학생일 때나 군 생활을 할 때 배식 당번 역할을 맡은 적이 간간히 있었는데, 친한 친구나 선, 후임에게 맛있는 반찬을 많이 주곤 했기 때문이다.인간이 존재하는 한 항상 따라다닌다는 사랑과 예술, 또 유머의 존재는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데 있어 엄청나게 큰 힘을 발휘한다. 가장 흔한 예로, 나 또한 그랬지만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 결심을 그만둔 큰 이유 중 하나가 가족, 친구 등 이다. 즉,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삶에 있어서 사랑은 엄청난 힘을 가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끊지 못하던 담배를 끊게 만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게 만들며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사랑의 힘으로 많은 이들이 그 고통을 버티며 살아가기도 했지만, 군대에서도 많은 군인들이 가족, 친구, 연인을 떠올리며 고통을 극복하고, 또 그들이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여자 친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규율을 어기고 전화를 하다가 큰 처벌을 받은 장병도 있었다. 또, 그 힘든 상황을 버틸 수 있게 힘을 주는 예술과 유머도 큰 역할을 한다. 이별을 하거나, 너무 힘이 들 때 상당수가 음악을 찾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나 역시 그랬으며 친구들을 보아도 절망적이거나 너무 힘이 들 때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살곤 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유머도 반대의 의미로 힘을 준다. 그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웃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이 가장 행복할 때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상황이든 잠깐이라도 그로부터 떠나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큰 존재이다. 글을 작성하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사랑과 예술, 유머 이 3가지는 현재 딱히 고통이 없는 나의 삶에도 너무나도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 존재들이 없었다면 내가 무엇으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들며, 왜 살아가는지, 무엇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살아가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것들의 부재는 특히나 정이 많고, 음악을 취미로 하고 있으며, 항상 웃음이 끊이질 않는 나에게 정말 가혹한 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6.11.26| 5페이지| 1,000원| 조회(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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