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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소설 비평문 [박안식-소현세자]
    소현세자 불행한 권력의 희생자(박안식의 소현세자를 읽고)목차Ⅰ. 들어가는 말Ⅱ. 새로운 나라 청의 등장Ⅲ. 소현세자의 능력 평가Ⅳ. 역사가 박안식의 추리Ⅴ. 나가는 말Ⅰ. 들어가는 말평소 인문학 책은커녕 역사에 관한 소설을 읽은 경험이나 습관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유명한 작품이나 베스트셀러라 해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책은 새로운 지식을 쌓는 용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나 전공 관력 서적을 제외하고 소설은 2년 만에 처음 읽게 되었고, 도서관에서 무작정 한 권짜리 깔끔한 새 표지를 고르게 되었다. 제목은 소현세자 이고, 고난의 길을 걸어간 왕세자이자 새로운 사상을 중시한 선구자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나의 배경지식은 수업시간에 배운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병자호란에서 패하고 청나라를 섬기게 되었다는 정도이다.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의 볼모로 잡혀가게 되고 조선에 돌아온 뒤 둘을 중심으로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리게 된다. 소현세자는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이 책에서는 박안식이 고증을 통해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해 집요하게 추리하였다. 당시 정권의 상황과 소현세자의 죽음으로써 이득을 보는 사람들을 근거로 생각하였으며, 인조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세력의 기반을 쌓는데 만 몰두했기 때문에 부자간 비상식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인조가 왕이 된 시점의 조선시대 상황부터 알아보겠다.Ⅱ. 새로운 나라 청의 등장광해군 때부터 살펴보면,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면서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왜란 후 국력이 한층 쇠약해졌다. 이틈을 이용하여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 사회에서는 급속한 통일이 일어났고, 1616년 마침내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고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1618년에는 푸순을 점령하고 명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했다. 명나라는 큰 병력을 풀어서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하였다.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을 맺었고, 그 후 명나라는 모문룡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시 말해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펴나갔다. 이렇듯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취하게 되었지만 대북파의 무고로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켰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행위를 명분삼아 서인들은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정묘호란 때 후금은 조선과 화약을 맺고, 조선이 청이 아닌 명과도 외교를 하는 것을 인정하고 명과의 군신 관계를 인정했다. 정묘호란 이후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어느 정도 계승하여 후금의 무리한 요구도 대부분 받아들이곤 했던 인조 및 대신들은 1636년 청나라 칸이 황제를 선포하면서 인조의 왕후에 대한 조문단을 핑계로 명을 배척하고, 청나라와 친하게 지낼 요구에 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병자호란의 계기 중 하나에 불과하다.당시 청나라는 누르하치 시대의 확장이 산해관에 막혀있던 상태였다. 이는 청태종(홍타이지) 때도 마찬가지 였다. 명나라는 만주족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번 군사를 파견했고, 광해군에게 조선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사르후 전투가 보여주듯이 대실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1641년까지도 명나라의 군대는 요동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청나라는 명나라의 토벌군을 전멸시켰지만,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맞는다. 바로 경제적 타격이다 청나라는 만주일대를 휩쓸면서 만주족을 비롯한 이민족 뿐만 아니라 한족을 대거 받아들이고, 몽고가 들어오면행하여, 부를 쌓으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전쟁이 본격화 되자 교역이 끊기면서 청나라는 매우 심각한 경제상황에 처해진다. 이런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청나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산해관을 공격해 중국 본토 침공을 노렸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625년이 되자 흉작과 겹쳐지면서 청나라의 경제적인 혼란은 심각해지는데, 특히 식량을 포함한 생필품의 가격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는다. 결국 식량위기가 닥친 청나라는 조선은 매력적인 목표였고 병자호란까지 일으키면서 물자를 요구하기 위해 속전속결로 들이닥쳤다.1636년 12월 겨울, 청태종은 용골대, 마푸타를 지휘관으로 하여 10만을 거느리고 침공하였다. 청군은 안주, 평양, 개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7일 만에 한성에 다다른다. 급보를 전한 조선은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들과 문, 무반과 그 가족들은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뒤늦게 따라가려 하였으나 청군이 이미 한강을 도하하여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광주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이후 조선 각지에서 방어태세로 있었던 조선군은 식량이 부족한 청나라 군대를 어쩌면 무찌를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강화도 수비를 맡은 김경징은 무능력한 판단과 무책임함으로 강화도의 해안선인 갑곶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마저 내팽겨 치고 도망간 뒤 강화도를 함락당하고 만다. 그 후, 사기가 꺾인 조선군은 남한산성에서마저 승산이 없어지자 인조는 청의 조건을 들어주고 화의를 맺기로 하고 삼전도로 가게 된다.Ⅲ. 소현세자의 능력 평가인조의 장남이자 이름은 왕往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남한산성에서 힘들게 싸우며 굶어가는 백성들과 군인들을 위로하고 눈 맞은 옷을 말리며 따뜻한 곳에 앉아있을 때도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군인들을 걱정하였다. 아무리 명에 대한 의리도 중요하지만 소현세자는 백성들의 안위와 인간의 목숨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이 앞섰던 것 같다. 이는 아버지 인종과는 상반된 생각이었고, 젊은 왕자가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는 문제로 강화조약이 결렬되자 자진하여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심양에서 9년간 유수(幽囚) 생활을 하는 동안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창구 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 도망자의 속환 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군량·선박 요구, 각종 물화의 교역 요구 등 정치·경제적 현안을 처리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의 마음에 꽤들게 행동을 했던 것 같다. 황제가 소현세자를 아들처럼 생각한다거나, 조선과 맺은 조약의 조건을 불리하게 바꿀 때 소현세자가 이를 중재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을 청나라 신하들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청에 있을 때 북경에서 명나라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고 현실을 직시했다. 북경에서 70여 일을 머물며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독일인 신부에게 천주교와 서양 과학문명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웠다.당시 조선상황에 비추어보면 상당히 파격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을 숭배하지 않았고, 지구가 둥근지 몰랐던 정도였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실질적 학문에 대한 탐구와 호기심이라면 조선의 운명이 어쩌면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운명은 안타깝게도 내 생각과는 반대로 돌아갔다.인조는 청나라가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즉위시키려 하지 않을까 의심했고, 소용 조씨는 사람을 보내 청에서 소현세자를 감시하게 했고 이 의심은 더 커지게 되었다. 1645년 2월 조선으로 영구 귀국할 때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 지금의 지구본등을 가져왔고,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도 데리고 왔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이런 개방적인 세계관을 명나라를 섬기는 데 대한 배신으로 여긴 인조는 그를 박대했고, 반청친명 정책을 고수하던 조정도 그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결국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했고, 여러 대신들이 사인을 규명하고자 했으나 인조는 이를 무시한 채 서둘러 입관을 마쳐 독살설이 파다했다. 소설에서는 궁에서 실세를 차지하고 있는 소용 조씨의 사람인 이형익이 협박하다시피 하여 박군에게 세자에게 귀 손상을 입거나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을 치료약으로 쓰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세자가 잡스러운 서귀(西鬼) 기독교를 섬기고, 그들과 어울려 청루(靑樓)에 출입해 자녀(恣女)를 사귀었다는 소문을 만들어냈다. 이에 똑똑하고 총명했던 소현세자는 억울한 누명과 권력에 근간을 세우기 위한 인조의 욕심과 불안으로 희생양이 된 것 같다.Ⅳ. 역사가 박안식의 추리작가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351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 데다 증거 인멸이 철저하여 무엇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살인사건의 수사 원칙을 적용해보기로 한다. 살인사건의 피살자가 죽음으로써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혀 범인을 잡는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죽어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을 두말할 것도 없이 동생인 봉림대군이었다. 그는 둘째아들인데도 적장자인 원손을 제치고 세자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수사관은 봉리대군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찍을 것이다. 하지만 세자가 죽은 시각에 귀국길에 있어 알리바이는 충분했다. 봉림은 세자의 죽음으로 왕권을 이어받는 최고의 수혜자가 되긴 했지만, 전후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왕이 되고자 형을 살해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면 두 번째 수혜자는 누구일까. 임금과 소용 조씨를 들 수 있다. 먼저 소용 조씨부터 수사선상에 올렸다. 소용 조씨는 후궁으로서의 지위가 계속 유지된다는 살해 동기도 뚜렷하고 내의원 의원 이형익의 양녀라는 특수한 관계가 시선을 끌었다. 세자 살해인의 하수인은 이형익일 가능성이 높다.임금의 혐의점은 세자 사후의 대소렴 대렴大殮(소렴을 한 다음 날, 입관을 위해 소렴한 시신을 베로 감싸서 매듭을 지음)과 소렴小殮(운명한 다음 날, 시신에 수의를 갈아입히고 이불로 쌈)을 아울러 이르는 말.때 보인 비정상적이며 상식을 벗어난 행동에 있다. 절차가 복잡하고 힘든 대소렴은 원래 내관들이 하게 되어 있는데 임금은 이를 비밀 유지에 좋은 종친들만을 동원해 치렀는가 하면 반드시 입회하게 되어있는것이다.
    독후감/창작| 2016.12.19| 5페이지| 1,500원| 조회(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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