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체육의 이해Ⅰ체육과 스포츠구분1.체육역사적으로는 ‘신체의 교육’, ‘신체운동에 의한 교육’ ‘신체운동과 보건의 실천에 의한 광의의 체육’, ‘신체운동 중심의 협의의 체육’으로 변천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개념의 규정을 통일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오늘날 잘 알려진 개념의 규정은 ‘신체운동에 의한 교육’이다. H.록 ·J.로크가 교육을 지육(知育) ·덕육(德育) ·체육의 세 영역으로 나눈 견해는 오늘날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되고 있다.체육은 보통 학교체육과 사회체육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눈다. 양자의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학교체육은 교육과정으로 이루어지는 체육활동을 의미하고, 사회체육은 그 밖의 신체활동에 자발적 참가, 또는 비영리적 동기에서 사회적으로 원조 ·촉진하는 활동을 말한다.체육에 대한 인식이나 구체적인 견해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다르다. 고대 그리스의 체육은 사람의 조화적 발달, 신체적 유능과 미의 가치를 인정한 아테네의 체육과, 군사적 목표를 중시한 스파르타 체육의 두 가지 전형적 유형을 보였다. 고대 로마는 군사적 훈련과 도덕적 훈련의 결합을 중요시한 체육으로부터 대중조작의 것으로 변천하고, 그것은 다시 중세의 심신 이원론과 금욕주의로 바뀌어 체육의 암흑시대를 초래하였다. 그 후 르네상스를 계기로 근대적 체육의 태동이 시작되었고, 많은 사상가나 교육가가 체육의 필요와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스웨덴 체조의 P.H.링, 독일 체조의 F.얀 등 뛰어난 체육가가 나타났고, 오늘날과 같은 과학성을 중시하는 체육으로 변천했다.체육은 사회의 존속 ·발전을 위해 불가결한 것으로 여러 종류의 신체운동의 실천을 통해 국민의 체력, 건강의 유지 ·증진을 도모하고, 그것이 가져다 주는 만족감이나 집단활동으로 밝은 사회적 적응력을 키워나가려는 것이다. 운동에 대한 바른 이해와 관심을 높여 자주적 실천을 촉구하는 것도 목표의 하나이다. 요컨대, 신체적 목표를 중시하면서 개인적 ·사회적 형성을 지향하는 것이지만, 학교체육에서는 심신의 정상적인 발음의 자세 즉 심리적 태도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였다. 즉 같은 사냥이라도 즐기기 위해서라면 스포츠가 되고 생업을 위해서라면 직업이 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스포츠 사회학자인 P.C. McInosh도 스포츠를 놀이의 한 행태로 보고 `스포츠이 기본적 특징은 승리에 대한 노력이다.“라고 규정하면서 비슷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두 번째의 주장은 신체운동의 기능을 기준삼아 스포츠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윌펜드 위원회의 보고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일반 복지에 공헌하는 모든 운동을 스포츠에 포함시킨다”고 규정하였음 일본의 스포츠 진흥법 제2조에서도 “이 법률에서의 스포츠란 운동경기 및 신체운동으로써 심신의 건전한 발달을 꾀하기 위하여 치우어지는 것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세 번째의 주장은 이미 널리 존재하고 있는 신체운동의 여러 형태를 종합해서 스포츠로 파악하려는 움직임을 들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럽 스포츠 장관회의가 채택한 ‘유럽 모두를 위한 스포츠 헌장’에 나타난 스포츠의 정의이다. 즉 이 헌장에서는 스포츠의 범주에 경쟁적인 게임 및 스포츠, 야외활동, 아름다움의 운동, 조정운동 등을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Ⅱ.생황체육이란?체육은 정치, 경제, 교육 등 여러 사회제도와 결합하여 국가 발전을 촉진시키는 긍정적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생활체육을 일반대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국가의 주요 복지 정책가운데 하나로 추진해 오고 있다. 생활체육은 일상생활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체육활동으로 여가시간 활용, 건강, 유지,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을 위한 유익한 생활문화이다. 생활체육은 개인이 전 생애를 통하여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체육활동참여의 기회를 향유함으로써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발달을 촉진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동체 의식을 향상시키는 신체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1.생활체육의 정의생활체육이란 학교의 교육과정으로 이루어지는 학교체육을 제외한 주로 성인이 주체가 되고, 개인 및 가정 사정 등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로 명랑한 사회를 건설하고 건강한 국민을 만들어 국가 경쟁력을 신장한다.③ 단순한 여가 선용이라기 보다는 한층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범국민적 사회운동으로서 여러 가지 스포츠를 사회에 널리 보급하여 건전한 사회풍토를 조성한다.④ 생활체육은 창조적인 여가활동으로 그 자체가 즐거움으로 행하여지고 건강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복지사회 건설의 기본바탕을 이루는 사회 교육적 활동이다.2.생활체육의 범위▶ sport for all 헌장이 제시한 4개의 활동범주① 상대방의 도전에 대한 대응과 규칙의 수용을 특성으로 하는 경쟁적 게임이나 스포츠 활동 (축구, 농구, 배구, 야구, 핸드볼 등 각종 구기운동)② 참가자가 다소 특수한 지형?지물인 개활지, 임야, 산악, 수상 또는 창공의 돌파를 추구하는 야회 활동 (오리엔티어링, 캠핑, 등산, 빙벽타기, 요트, 수상스키, 제트스키, 워터슬레이, 윈드서핑, 행글라이딩, 패러글라이딩, 스카이다이빙, 열기구, 경비행기)- 야외활동③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발현하거나(신기록수립), 인공적 장애물(경기장) 또는 자연환경에 대한 도전에 대응(등반?레프팅)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인간의 내면이나 유형화된(형식적) 신체적 움직임의 감성적 만족에 대응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심미적 움직임 활동인 리듬운동(피겨스케이팅, 리듬체조, 에어로빅체조, 스포츠댄스, 민속춤, 레크리에이션적 수영)- 리듬활동④ 체력단련운동, 다시 말하면 운동 감각적 만족의 직접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건강 운동을 통한 신체활동 능력의 향상이나 총체적 건강을 증진하는 장기 효과를 추구하기 위하여 행하는 건강운동 혹은 움직임 운동(보디빌딩, 조깅, 보건체조)마. 생활체육의 의의▶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① 현대사회는 사회생활의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분리된 사회이다.② 생활체육은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에 기초한 국민복지운동이다.③ 생활체육은 분열과 투쟁의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화해와 공동체적 삶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④ 생활체육은 궁극적으로 삶의 체육 활동의 가치는 개인이 건강하고 행복한 존재로서 사회적 임무와 책임을 잘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건강한 신체 기관의 발달을 도와주는데 있다.2)운동 기능의 발달운동기능이 발달하게 되면 적은 양의 에너지만으로도 신체 활동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신체적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신체에 대한 미적 표현이나 운동감각과 기능의 발달, 적절한 동작 등은 효과적인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잘 발달된 운동 기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적절히 체육 활동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 잘 발달된 운동 기능을 가진 사람은 평생을 통하여 신체 활동을 효율적으로 하게 된다. 즉, 달리기, 매달리기, 점핑, 뛰어오르기, 차기, 비틀기, 던지기 등과 같은 신체의 기본적인 움직임은 근육과 신경 기관과의 조화로운 협응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근신경이 잘 발달된 사람들은 운동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극심한 피로감 없이 업무나 작업을 수행하는 등 효율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 습득하고 있는 기술과 관련된 운동을 즐기게 된다. 목표지점을 향해 던지기를 즐기거나 맞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야구를 좋아할 것이며, 공을 차거나 발로 다루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축구를 할 것이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수영장이나 호수와 같은 물 주변의 환경에서 자주 활동할 것이며 테니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테니스장에서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축구, 농구, 야구는 단체운동이면서 강력한 파워와 유쾌함을 즐길 수 있으며 테니스, 수영, 배드민턴, 골프 등의 개인 운동은 섬세함과 아기자기한 재미를 제공해 준다. 좋은 운동 기능을 가지고 있는 성인이나, 운동선수들은 모두 어릴 때부터 다양한 운동 놀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체육의 목표는 참여자의 운동 기능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발달시켜 운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의 폭이 넓어지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이러한 경험들은 신체 활동이나 운동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이나 사람들과의 사교기회를 통하여 사회적술에 관련된 지식 이외에도 지도력, 용기, 자신감, 동료에의 도움, 안정, 그룹에의 적응성 등에 관하여 잘 아는 것도 역시 농구경기에 필요한 정신력을 강화하고 게임을 효율적으로 즐기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건강에 대한 지식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다. 모든 개인은 각자 자신의 건강 상태, 청결, 질병 예방, 적절한 식사와 영양의 균형, 건강에 대한 태도와 습관 등의 중요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지식이 토대가 되었을 때 보다 확실히 신체활동의 의미와 건강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체육은 신체의 왕성한 활동과 더불어 매우 정확한 판단과 신속한 결정이 요구된다.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가진 사람은 항상 타인에게 뒤질 뿐이다. 따라서 단순히 신체만을 움직이거나 생각 없이 운동을 하기보다는 항상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 왜 이 연습이 중요한지?" "왜 규칙을 지켜야 하는지?","왜 매일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해야 하는지?" 와 같은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운동을 단순한 신체 활동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가치 있는 교육과 철학적인 과정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4)사회, 정서, 정의 발달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사회생활에 필요한 태도를 키워 사회 적응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체육 프로그램에서의 신체 활동들은 적절한 지도력이 발휘된다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적응력을 키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체육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행동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많이 제공해야 한다. 경기의 규칙은 민주사회에서의 법칙과 같다. 경기에서는 오로지 한 개인의 경기능력과 수행수준을 보고 평가한다.모든 것이 평등한 상태에서 오직 운동수행능력 만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이 사회의 어느 일각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가치를 제공하는 셈이다. 체육 활동을 함으로써 얻는 또 다른 이점은 자아 개념을 적절하게 확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게임이나 경기에 참가하는 정신은 건전한 태도를 기르는데 도움이 된다. 또 신체 성장기다.
1여류시인 허난설헌과 이청조의 사가세계 비교연구목 차1.서론2.허난설헌과 이청조의 생애비교3.허난설헌과 이청조의 작품비교4.결론1. 서론중국과 한국의 봉건사회에서 유교의 도입과 가부장적인 문화가 확립됨에 따라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으로서 지위가 유난히 낮고 공부와 창작은 더더욱 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각종 규칙과 울타리를 타파하고 자신이 처한 불합리한 사회에서 벗어나보려고 시도하며 시대를 앞서간 여성시인들이 등장하여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중국 송나라 최고의 여류시인 이청조(1084?1155?)와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一1589)은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민족의 시인이며 서로 500여년 동안의 사이를 두었는데 봉건시대에 같은 억압당했던 여류시인으로 여겨서 공통의 면을 많이 나타낸다. 이청조는 중국 역사 속에서 문학사상 가장 손꼽는 여류시인이며,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 뛰어나 재능을 보였던 여류시인이다. 그들은 중국과 한국 고전여류문학의 대표적인 문인, 특이 상층 여류시인으로서 중국과 한국 여류문학가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허난설헌과 이청조에 대한 비교분석은 중국과 한국 고전여류문학의 좋은 비교시각이다. 본고는 봉건사회에서 활동한 여류시인 허난설헌과 이청조의 생애과 작품의 비교을 통하여 그들의 공통점와 차이점을 분석한다.2. 허난설헌과 이청조의 생애비교이청조는 중국 송나라 때 인물이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1084년 중국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에서 출생하였고, 이안거사(易安居士)라고 하였다. “이청조의 부친은 소동파(蘇東坡)의 문인으로 후사학사(後四學士)를 지낸 이격비(李格非)이며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북송의 유명한 문인이자 관리인 왕공신(王拱宸)으로 그는 17세에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획득한 인물이다. 이청조의 집안에는 보유하고 있는 장서가 풍부하여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천고제일재녀(千古第一才女)로 일컬어진다. 18세가 되었을 때 조명성난 인물로 소동파와 이격비를 탄핵하기도 하였다.” 1127년, 북쪽의 여진족이 북송을 공격하여 북송은 남쪽으로 피난을 하였는데, 당시 대부분의 귀중한 소장품을 모두 상실하였고 남편이 병에 걸려 남경에서 목숨을 잃었다.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북송 말 전란의 와중에 남편을 잃고 불우한 인생을 맞게 되었다. 남편이 잃은 이후 이청조는 재가하여, 약 100일만 잠깐동안 짧은 결혼생활을 하였다. 두 번째 남편 장여주(張汝舟)는 이청조와 결혼을 한 목적은 이청조가 가진 재산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이 결혼을 끝내기 위해, 이청조는 남편이 뇌물을 써서 관직을 얻은 사실을 관부에 고발하였다. 당시에 부인이 남편을 고발하는 행위는 예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남편이 죄가 인정되어 벌을 받게 되면 부인도 역시 벌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이청조의 가족이 형부의 관리들에게 돈을 주어 이청조는 며칠 뒤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런데, 명나라때부터 사람들 중에서 이청조가 장여주에게 개가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청나라로 들어선 후에는 이의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청나라말기에 이르러서는, 이청조가 재혼한 적이 없다는 설에 찬동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졌고, 말투도 더욱 확정적으로 바뀐다. 그러나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의 일을 판단하고, 실제적인 역사적인 환경과 거리가 있다. 이청조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 살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도 잃고 그 동안 모아놓은 수집품들도 없어졌기 때문에 큰 슬픔을 느꼈다.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슬픈 삶과 국난에 대한 많은 시를 썼다.허난설헌의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1563(명종 18)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나다. 봉(?)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다. 아버지 허엽은 조선명종 조선 시기의 충신으로 부제학 관직으로 있었다. 그는 이전에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동지중추부사 등 조정 요직을 맡은 적 있다.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허난설헌의 친정은 허엽과 허봉의 객사로 몰락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허난설헌은 두 명의 아이를 돌림병으로 잃고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게 된다. 그러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시를 남기고 스물 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청춘을 마감한다.허난설헌과 이청조의 생애와 생활배경, 그리고 작품 주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들의 의식세계는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도 있다. 사대부 집 안에서 출신한 명문규수이고 아무데나 변함없이 자기의 자주적인 의식을 굳게 지킨 것은 그들의 공통점이다. 이런 의식세계는 필연적게 두 시인 의 작품 속에 반영된다.3. 허난설헌과 이청조의 작품비교이청조는 사(詞)로 저명하며 특이 '완약파(婉約派)' 로 유명했다. 허난설헌의 작품은 주로 시(詩)인데 사(詞)에 대한 상당히 조예가 있다. 그들은 원래 많은 작품을 창작했는데 여러 원인 때문에 분실한 것도 많다. 이청조 있는 시대는 허난설헌보다 더욱 멀고 오래니까 분실한 작품이 당연히 더욱 많다. 두 시인 작품의 이런 흩어져 있는 상환을 보면 남성중심의 봉건 사회에서 여성이 창작한 작품의 운명을 설명할 수 있다.늘 생각나는 것은 냇가 정자에서 해질 무렵까지 노닐다 常記溪亭日暮(상기계정일모)너무 취해 돌아오는 길을 잃었던 일이라 ?醉不知歸路(침취부지귀로)흥이 다해 저녁 늦게 배를 저어 돌아오다 興盡晩回舟(흥진만회주)연꽃 가득한 깊은 곳에 잘못 들고 말았네 誤入藕花深處(오입우화심처)어찌 건너갈까 어찌 건너갈까 爭渡,爭渡 (쟁도쟁도)갈매기와 백로 한 무리가 놀라 날아올랐네 驚起一灘鷗鷺(경기일탄구로)─이청조 여몽령(如夢令)가을호수 맑고 푸른 물 구슬 같아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연꽃 핀 깊은 곳에 목란배 매였지 蓮花深處繫蘭舟(연화심처계란주)임을 만나 물건너 연밥따 던지고는 逢郞隔水投蓮子(봉란격수투련자)누가 보았을까 한나절 부그러워 或被人知半日羞(혹피인지반일수)─허난설헌 채연곡(采蓮曲)허난설헌과 이청조의 생애은 전과 후 두 기간으로 나눠서 뚜렷한 대조를 이루어졌다. 이청조는 남편을 잃을 때 두 기간를 구분하며길을 잃어버렸으나 서슴없이 헤쳐 나오는 물새 떼를 만나는 것을 묘사하였다. 사(詞) 속에 있는 저녁놀, 연꽃, 갈매기와 백로등 아름다운 자연경물은 사인 그 자유로운 마음을 부각시켰다.허난설헌의 전기 생애 중에서도 소녀의 낭만적인 환상이 넘치고 행복한 혼인을 추구한다. 그녀는 평생을 사랑으로 갈망하고 꿈꾸었지만 단 한 번도 연인을 가져보지 못했다. 이와 같이 군자를 의미하고 절개를 뜻하는 연꽃도 한편으로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채연곡〉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에 자신의 내적 자아를 기탁하고 자신이 꿈꾸는 남녀의 은밀하고 낭만적인 애정에 대한 환상이다.얇은 안개 짙은 구름에 긴 낮을 걱정하고 薄霧濃雲愁永晝(박무농운수영주)용뇌향은 금동 짐승 모양의 향로에서 피어오른다 瑞腦消金獸(서뇌소김수)아름다운 계절에다 중양절이라 佳節又重陽(가절우중양)옥 베개 베고 비단 장막에 눕는다 玉枕紗廚(옥침사주)한 밤중 서늘한 기운이 이제 스며들고 半夜凉初透(반야량초투)동쪽 울타리에서 술잔을 드는 황혼이라 東籬把酒黃昏後(동리파주황혼후)소매에 가득찬 은은한 향기 풍기니 有暗香盈袖(유암향영수)넋 잃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莫道不消魂(막도불소혼)발 걷으니 서풍이 불어오는데 簾捲西風(렴권서풍)사람이 국화꽃 보다 파리하다. 人比黃花瘦(인비황화수)─이청조 취화음(醉花陰)창가에 하늘거리는 아름다운 난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잎과 줄기 어찌그리 향기로울까 枝葉何芬芬(지엽하분분)가을 서풍 한바탕 스치고 나면 西風一披拂(서풍일피불)찬서리에 그만 시들어 버리네 零落悲秋霜(영락비추상)빼어난 그 모습 초췌해져도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맑은 향기 끝에 그치질 않네않아라 淸香終不斃(청향종불폐)이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하여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자꾸만 옷깃에 눈물적시네 涕淚沾衣袂(체루첨의몌)─허난설헌 감우(感遇)(一)이 두 작품은 사군자중에서 국화와 난초의 고격의 형상에 통해서 사대부 여성의 절조와 강렬한 서정을 토로하였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속에 의식이 다르게 표현되었다.이청조의〈취화음〉는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다 파리하다’는 생각이 떠오렀다. 마지막의 글자’瘦(수)’는 바로 첫째 구의 ‘愁(수)’때문이다. 그녀는 잃은 무한 의식공간에서 자신 감정을 보여 주었다.허난설헌은 향기롭던 창가의 난초의 싱그러운 모습을 통해 자신의 감개를 끌어 내여, 좌절로 얼룩진 인생의식을 구현했다. 그녀는 시 속에 나오는 난초같이 살다간 시인이었다. “난혜지질(蘭蕙之質)을 갖춘 여인과 자신을 견준 그녀는 난을 통해 자아를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잎과 줄기, 가을 서풍이 스치고 난 자태는 자신의 꽃다운 나이와 뛰어난 재화를 비유했다. ‘찬서리에 그만 시들어 버리네’의 묘사는 외적요소 대문에 초췌한 자신형상을 비유했다. 시들어 가는 창가의 난초를 바라보면서 점차 색이 바래고 낡아져만 가는 자신에 옷소매가 젖도록 눈물을 흘리는 허난설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는 겹치는 괴로운 운명에 따른 고통을 그린 애상적 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온갖 시련에서도 초지를 잃지 않은 시인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살아서 마땅히 사람 중의 호걸이었고 生當作人傑 (생당작일걸)죽어서도 귀신 가운데 영웅이 되었네 死亦?鬼雄 (사역위귀웅)지금까지 항우를 그리워하는 건 至今思項羽 (지금사항우)강동으로 건너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네 不肯過江東 (불긍과강동)─이청조 하일절구(夏日絶句)산 서쪽 열여섯 고을 새로 수복하고 新復山西十六州(신복산서십육주)안장에는 월지의 머리 메달고 돌아왔네 馬鞍懸取月支頭(마안현취월지두)황하 가에 백골 묻어줄 사람 없는데 河邊白骨無人葬(하변백골무인장)백리 모래벌판에는 붉은 피 흐르네 百里沙場戰血流(백리사장전혈류)─허난설헌 입새곡(入塞曲)(二)허난설헌과 이청조 인생의 후기에는 더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삶이 자리 잡고 있다. 이청조의 비극은 남편의 잃을 뿐만 아니라 전란 때문에 혼란스러운 시대적인 원이이 조성하는 것이다.그녀는 전란 때문에 도처를 떠돌아다니는 고달픈 생활을 했다.가정과 나라의 불행은 그녀의 인생과 작품풍격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일절구〉에서 이청조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다.
조성 성리학이 양반에게 끼친 영향Ⅰ성리학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元)나라 때부터 어느 정도로 변형된 성리학(性理學혹은 주자학朱子學)은 고려 말 ? 조선 초에 한국으로 전래되어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형을 미쳤다.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士大夫)는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계층으로서 그 당시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기 위하여 이 이데올로기(ideology)를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했다.어느 시대나 당시에 유행했던 사상과 지배이념이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이념 중 하나는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지배사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통치체제 및 각종 방면에서 성리학적 사상이 깊게 뿌리지어 졌다. 특히 조선은 신분제도에 따른 사회적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사회였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양반 계층이 자신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양인의 신분을 가진 중인 계층과 상민 계층을 누르고 정치, 경제, 사회적 특권을 독점하기 위한 방편과 지배체제 이념으로 성리학을 이용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반들의 성리학적 명분론은 자신들의 특권화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해 주었고, 그 결과 조선 사회는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신분 질서가 정착되었다.본고에서 다룰 내용은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성리학에 대해 알아보고 조선의 성리학이 당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 하였는지와 더불어 양반 지배체제 사회에서의 성리학이 어떠한 영향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송이란 나라 자체가 그렇다. 당나라는 절도사(변방을 지키는 군인)에 의해 망했는데, 이 때문에 송을 세운 태조는 무(군인)보다는 문(사대부)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나라를 시작했다. 송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문치였지요. 사대부들은 국가의 주요 지배층이었다. 이런 가운데 송이 요에 쫒겨 수도를 남쪽으로 옮긴 이후, 사대부들은, 사대부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중소 정도의 토지를 소유한" 경제적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당시 강남은 중국 벼농사의 본산지로, 토지를 소유한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면서도 생산 계층인 농민들과도 잘 화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학문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학문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물론 우주의 질서를, 본체인 이와 부수적인 기로 설명하는 철학이다. 이른바 형이상학의 학문이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이러한 강남의 사회 상황이 깔려 잇었던 것이지요.성리학은 공자, 맹자님의 유학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공, 맹의 유학이 왕을 정점으로 한 통치 질서를 강조한 이론 체계였다면 성리학은 사대부들과 농민의 권익에 앞장 선, 그러니까 왕조차도 사대부의 일원으로 보아 그 절대권력을 인정치 않았던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다.이 성리학이 고려 말의 신진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져, 결국 조선의 개국을 낳은 것을 보아도 그 새로운 기운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겠지요. 성리학은 원래 이런 학문이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달라졌는가, 사림의 진출에서 부터죠. 조선 초 개국을 이끌었던 성리학이 조선의 기초를 다져 나가야 했던 실용적인 성리학이었다면, 사림들의 성리학은 "의리"와 "명분"의 성리학이었다. 그들의 출신 성분이 고려에 대한 절개, 의리와 관계가 깊다보니 학문의 방향도 그리 흘러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조광조에 힘입은 바가 큰다.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조광조의 도덕과 수기치인 + 이황과 이이라는 천재에 의해 이론 적으로 더욱 정비되어진 조선 성리학(신토불이 성리학)에 + 송시열의 교조주의 성리학까지 버무려진 "막강 성리학"이 되어 조선 사회를 이끌어 가게 된다.성리학은 조선을 이끈 힘이다. 이것이 그 재생의 길을 찾지 못해, 정조 사후 세도정권 아래에서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만, 조선 말 100여 년 간의 늙은 성리학을 두고, 성리학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물며 실학이란 이름의 학문도 그 본질은 성리학에 두고 있었다. 실학자 모두는 성리학자들이었고, 성리학을 모태로 새로운 학문의 길을 모색하는 중이었지요. 실학은 결코 성리학과 반대되는 학문도 아니었고, 성리학은 근대화의 적도 아니었다. 나라의 기운은 노쇠해 가고, 결국 틔워진 근대화의 싹을 키우지 못해 망해 버린 것이지, 성리학 그 자체에 모든 원인을 돌리는 것은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망국론의 일부일 뿐이다.Ⅱ조선성리학의 역사적 배경1. 성리학의 의의, 특징 :송의 주희가 완성한것으로 종래 자구의 해석에 주력하던 한당의 훈고 학풍에서 벗어나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문제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신유학임. 불교선종의 철학적인 사변을 유학에 접목한 것으로 오경보다는 사서를 중시하는 특성을 지님2. 성리학의 전래 :고려 충렬왕때에 안향에 의해서 고려에 처음소개. 백이정이 직접 원에가서 배워와 이제현,박충좌 등에게 전수.고려말에 이색, 정몽주,정도전, 길재,권근등이 발전시킴.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조라는 칭호를 들은 뛰어난 성리학자였음.3. 성리학의 영향(조선사회의 특징) :초기성리학은 형이상학적인 면보다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였고 불교를 비판하였고 훈고와 사장을 벗어나 경학과 사학의 발달이 초래되었음Ⅲ조선시대의 성리학의 역활1. 외교관계 :명분론이 강조된 성리학의 존화양이 사상을 내세워 평화추구의 친선정책을 기본외교정책으로 삼음.국제적 긴장관계를 완하하고자 함2. 사상정책 :사상적으로는 불교, 도교, 토속신앙을 포함하는 종교적 생활까지도 유교사상으로 흡수하고자 함.현실적인면에서 고려 이래 사회관습상의 잔재로 이상적인 유교이론을 수용하는데에는 거리감이 있었음.서민사회에서는 불교, 도교, 토속신앙등이 그대로 잔존3. 사회면 ;양반중심을 지배질서와 종법사상이 응용된 가족제도를 기본으로 하는 성리학은 양처놔 반상이 엄격히 구분됨.신분에 따른 직역의 법제화가 이루어짐.4. 경제면 :성리학은 지배층의 농민지배를 긍정하는 지주전호제를 관철하고자함.지배층이 농업경영에 참여하여 주인과 종의 관계를 군신관계처럼 종적 질서로 편제하려함.Ⅳ 양반양반(兩班)은 조선 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 사(士)·농(農)·공(工)·상(商) 중 사족(士族)에 해당한다. 이는 또한 조선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와 관료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자격을 가진 가문, 그리고 사림(士林)이라 불렸던 학자 계층까지 포함하는 조선 왕조 특유의 사회계급이다. 본디, 문관과 무관을 지칭하는 관료적 의미였으나, 반상제가 확립되어가면서 신분상의 의미로 변화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이러한 사회 배경으로 들어오게 된 성리학은 조선시대 집권층에 의해 사회 깊숙이 전파되었고, 주체사상이 되었다. 먼저 사회계층의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조선의 백성들을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가지 계층으로 나누게 하였다. 양반은 조선의 상류 계급으로 백성들을 지배하였으며,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 시험을 통하여 관리가 된 후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참여하였다. 그리고 선비로서 바른 생활을 하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도록 요구하였다. 중인은 양반보다 낮은 신분으로 의학, 기술 등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며, 대개 양반을 도와 관청 등에서 일을 하였다. 다음으로 상민은 백성들의 대부분을 이루는 사람들이였고, 주로 농사짓는 일을 하며, 수공업, 상업 등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금을 내고, 군대에 가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관리가 될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천민은 양반집, 관청 등에서 종이나 노비로 일을 하는 계층이었으며, 갓바치, 백정 등 험한 일을 주로 하였고, 향, 소, 부곡 등에서 따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이런 신분제도는 특히 과거제도에서 더 잘 나타난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관계Ⅰ.서론1992년 수교 이후 한중 경제관계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였다. 그런데 최근 중국은 선진경제강국으로의 도약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에 따라, 대내적으로는 향후 10년간 소비중심으로 경제구조 전환, 산업구조 고도화, 소득재분배와 지역균형발전, 대외적으로는 위안화의 국제화 추진과 금융시장 개방, 국제사회에서의 소프트파워 강화 등을 적극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중국이 새로운 과제를 본격 추진함에 따라 한중 경제관계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Ⅱ.본론1. 중국경제의 특징(1)중국경제의 첫번째, 특징은 한마디로 "성과가 크다"고 말할 수가 있다.아시다시피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보다 1년 늦은 1949년 건국되었다. 건국당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빈곤낙후한 농업국이었으며 수십년간의 내전과 분란으로 국력은 쇠락해져 있었다.건국직후, 경제분야에 있어 중국은 당시 구 소련의 계획경제모델을 모방 채택하여, 국가소유와 집단소유제를 채택하였다. 이 제도는 건국초기에 전체 국가의 역량을 한곳으로 동원하여 큰 사업을 치르는데 성공적인 역할을 발휘하였으며, 중국경제를 비약적으로 날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도자체에 내재하는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면서 게다가 또 58년 전개된 대약진 운동, 60년대 초 발생한 3년간의 자연재해와 66년 전개된 10년 문화대혁명 등으로 전 중국이 계급투쟁이 강요되는 시대로 진입하였으며, 경제건설이 거의 포기한 상태가 되고 중국경제는 다시 매우 빈곤한 국면으로 빠졌으며, 농공업생산 중단사태에 몰려, 수 억명 국민의 세끼 식사마저 보장할 수 없는 등 국가경제는 벼랑 끝에 몰리는 국면에 이르렀다.1978년 덩사오핑주석을 중심으로 한 초대지도자들의 지도하에 "돌다리를 두들기면서 건너라" 식의 점진적 전방위적 개혁을 시작하면서 점차 대외개방을 실시했다. 당과 국가의 사업 중심을 계급투쟁에서 점차 경제건설을 중점으로 방향을 바꾸고, 정부주도의 계획경제체지를 량생산입니다. 중국의 개혁은 농촌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여 연합생산도급책임제 등 조치의 실시가 농민들의 생산 적극성을 최대한으로 불러일으켰으며, 바로 식량생산량의 급속한 증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혁개방 실시 전 중국의 식량 년 생산량은 3억 톤을 한번도 넘지 못하였다. 연합생산 도급책임제 실시 직후, 농산품 생산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978년 중국의 식량생산량은 3.04억 톤으로 그후로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하였으며, 급속한 성장으로 1984년 생산량은 4억 톤, 1996년 5억 톤에 다달았다. 최근 몇 년간 비록 매년 다른 형태의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있으나, 식량생산량은 여전히 안정적인 년평균 5억 톤의 생산규모를 유지할 수 있으며 자급자족을 실현하고 있다. 어떤 문제가 세계인구의 1/5 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더 어렵겠습니까? 다행인 것은 중국은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였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하여 전세계 최대의 난제를 풀었고, 이는 참으로 중국이 전세계에 큰 공헌이 아닐 수가 없다.개혁개방 후 중국의 공업생산은 신속한 성장을 유지하였으며, 공업생산품의 생산량은 급속한 증가를 거두어, 적지 않은 생산품이 전세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철강: 1978년 중국의 철강생산량은 3,000여만 톤이며, 전세계 철강생산의 4%에 불과하고 생산량이 100만 톤이 넘는 공장은 불과 3 곳만 있다. 하지만 1996년에 중국의 철강생산량은 이미 일본을 넘어서 세계 1위의 철강생산국이 되었으며 생산량 세계 점유율 13.4% 이다. 2008년 중국 철강을 생산하는 기업은 8곳으로 늘어났으며, 철강생산량은 처음으로 5억톤을 돌파하여, 전세계 40%대 점유율 차지하였다. 1996년부터 현재까지 십여년간 확고부동한 세계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시멘트: 1978년 중국의 시멘트 생산량은 7,369만 톤에 불과하지만 1985년 이미 생산량 세계 1위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2008년 시멘트 총생산량은 이미 14억 톤 1억 톤을 넘어섰다. 2008년 말, 중국의 원유가공량은 3.42억톤으로 세계 2위의 정유대국이 되었다.◈이어서 기초시설(SOC)분야의 변화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겠다.1978 - 2008년 개혁개방 30년 동안 중국의 교통과 통신 등 기초시설분야의 발전은 "일일천리"라고 형용할 수 있다.철도: 1978년 중국 철도길이는 4.86만km에 불과하지만 2009년 철도 총길이는 이미 8.6만km에 도달하였으며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30년 동안에 철도길이는 두배로 증가하였고 증가한 길이는 적도의 길이와 맞먹습니다. 그중, 고속철도는 3,300km이고 또한 세계 1위를 차지한다.도로: 1978년 중국의 차량통행로는 89만km, 2008년 말, 총길이는 373만km로 늘었으며, 3.2배 증가하였다. 그중 고속도로는 1988년의 20km에서 2008년의 6,0302km로 3,000배가량 증가하였다. 현재, 전국고속도로는 여전히 매년 평균 2,000여km씩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농촌도로도 개혁개방 초기 59만km에서 2007년 313만km로 증가하였으며, 99%의 읍급의 농촌마을과 88.2%의 농촌마을에 아스팔트 도로와 시멘트도로가 깔렸다.민항: 1978년 중국민항은 162개의 편도노선과 70개의 공항을 보유하고 있었다. 2008년 국내노선 1,235개, 국제노선 297개와 공항 152개로 증대되었고, 전세계 46개국 146개 도시로 취항하고 있다.◈다시 대외무역에 대하여 살펴보겠다.1978년 중국의 대외무역규모는 206억 달러에 불과하였으며, 30년 후인 2009년 대외무역규모는 22,072.7억 달러로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그중 수출 12,017억 달러, 수입 10,056억 달러, 무역흑자액은 1,961억 달러입니다. 2009년 중국은 독일을 넘어 세계 제일의 수출국이 되었다.외화보유율: 1978년 중국외화보유율은 1.67억 달러밖에 되지 않았으나, 2009년 말, 중국의 외화보유액은 2조5만억 달러 증가하였고, 20년 동안 14만배 증가하여, 세계 제1의 외화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또한 현저히 높아졌다. 궁핍했던 경제상황은 물질이 풍요해진 상황으로 전환되었으며, 일부 생산품은 과잉현상을 보이는 등 빈곤했던 국민생활이 기본적인 소강사회로 변화하였다.(2)중국경제 2번째 특징은 한마디로 "거대한 잠재력"이라 할 수 있다.30년이래 중국경제발전은 높은 성과를 얻었고, 동시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해결될 문제이다. 문제 해결되면서 사회도 역시 진보하고 발전할 것 이다. 멀리 본다면, 중국경제의 미래 발전 잠재력은 매우 거대하다고 볼 수 있다.30년동안 중국의 국력과 국민의 생활수준은 확실히 높아졌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이다. 그러나 세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예를 들어 한국과 비교하자면 경제 사회발전의 수준 여전히 비교적 낮은 수준 단계에 처해있다. 현재 중국 1인당 GPD는 3,000달러에 불과하다. 이는 한국의 7분의 1밖에 되지 않다. 미국과 일본 독일 등 선진국가와 비교해보면 더 큰 차이가 있다. 중국국민이 한국 현재의 1인당 수입기준으로 가정해 보면, 간단히 계산할 수 있다. 중국의 시장은 최소한 7배가 넓다. 그러므로 중국의 국민 경제에는 아직 거대한 발전의 공간이 있습니다. 이 발전의 공간은, 한국기업을 포함한 중국에 있는 각 국 기업에게 무궁무진한 발전의 기회를 제공할 것 이다.2.한중 경제관계중국경제는 최근30년이래 빠른 발전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사실상 최대 수혜국이다. 1992년 한중수교 이래, 한국기업은 비약적으로 경제 발전하는 중국과 수교를 맺는 기회를 민첩하게 잡아 발전하는 중국경제의 힘을 얻어 많은 실질적인 이익을 얻었다.양국의 경제무역액은 1992년 50억 달러에 불과했으나, 2007년에는 1,680억 달러에 다다랐다. 2009년에는 금융위기 영향으로 떨어져 1,400억 달러에 이르렀다. 올해부터 경제가 회복됨에 따라 교역액은 다시 증가하고 있다. 2005년부터,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가 되었다. 현하였다. 중국은 2003년부터 한국의 제일 큰 투자대상국이며, 대중국투자는 한국 전체 해외투자의 30% 가깝게 차지하고 있다. 투자분야는 처음에 제조업에 집중되었다. 지금은 금융, 보험, 물류운송 등 서비스 영역과 부동산영역까지 확대되었다. 투자지역 또한 수교초기에는 산동, 요녕등 연해성 부근에서 동남 연해와 동서부 내륙지역까지 확산되었다.한중양국의 인적교류 또한 큰 폭으로 증가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양국 도시간 매주 800여 항공편이 취항하고 있으며, 15척의 CAR FERRY 정기선이 양국 항구사이에 운항하고 있다. 2009년 양국 인적교류는 600만 명이며, 그중, 중국에 간 한국인이 연 평균 500만 명에 달한다. 제주도는 올해 1~7월 26만명의 중국여행객이 방문하였다. 전년도 동기대비 50%증가하였다. 중국여행객은 외국여행객 중 비중이 상승 하여 19% 차지하였다. 비록 35%달하는 일본여행객에 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증가 추세가 뚜렷하다고 볼 수 있다. 머지않아 중국은 일본을 넘어 한국의 제일 큰 여행국이 될 것이다. 양국의 유학생 수도 대폭 증가하였다. 중국에 있는 한국 유학생 수는 6만명이 넘고, 중국에 있는 14만명의 유학생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HSK시험 참가하는 외국인 중 한국인이 제일 많다. 한국의 중국유학생은 7.5만명에 달하였다. 한국의 외국유학생중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경제무역협력, 인원교류, 정보교환, 문화교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양국간 상호의존 관계는 끊임없이 깊어지고 있다.멀리보면 양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문화가 상통하며, 정치적으로 우호이며, 경제구조도 상호보완성이 강하여, 자연스럽게 좋은 경제무역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우월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발전 전망이 매우 밝다.3.한중 양국 간 경제관계 변화:수직적 관계?>수평적.경제적 관계한중 경제관계가 이처럼 급속도로 발전한 데는 우선 1990년대 글로벌화를 추진하던 한국기업이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막대한 시장잠재력을 보고,발빠르게 대응하었다.
스포츠 리더십1.리더십이란?리더십이란 용어는 다양하게 정의되지만 그중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뜻을 보자면, 집단의 목표나 내부 구조의 유지를 위하여 성원(成員)이 자발적으로 집단 활동에 참여하여 이를 달성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리더십은 과정이면서 개인이 갖는 특성이다. 과정으로서의 리더십은 강제성을 띠지 않는 영향력 행사과정으로서 집단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조직화된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것을 뜻한다. 개인특성으로서의 리더십은 앞서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구사하리라 믿어지는 사람들이 갖는 일단의 자질 또는 성품이라 할 수 있다.리더십은 오랜 세월동안 많은 학자와 연구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켜 온 분야로서 모든 조직에 대한 사회과학 및 행동과학적 문헌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조직에 대한 연구에서 리더십 현상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연구되어 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리더의 행위가 조직의 전반적인 과업수행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가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더십 개념은 크게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거시적 관점이란 리더의 역할을 전체 조직의 관리자나 지도자로 인식하는 것으로서 집단, 조직, 사회의 최고책임자가 수행하는 역할을 리더십이라고 본다.*특성 이론리더의 성격은 따로 있고 태어난다(안정적 성격 특성)Stogdill(1974): 성취지향성, 수용성, 대체성, 지배성, 에너지, 책임감, 자신감, 사회성 등이 우세상황과 특성의 상호작용Hendry(1974): 훌륭한 코치는 강인함, 권위적, 융통성이 없고, 상황 장악 능력, 외부의 압력에 의지, 독단적 사고, 감정 억제, 현실적 태도Sage(1975): 권위적, 교육적, 조작적임박정근(2001): 우수 코치는 성실성, 노력, 사랑, 선수 육성 능력, 공부하는 자세, 선수 관리 순일관성 결과 부재*상황 부합 모형Fiedler(1981): 같은 특성이라도 상황에 따라 변화, 같은 상황이라도 변화관계지향성: 상호 협조, 긍정적 상호 관계, 과제보다 중요(중요한 목적 인식 중요)과제지향적: 작업이 일차적 목표, 과제의 성취도가 구성원의 관계 유지에 중요(언어적 강화의 중요성, 집단 의식에 대한 필요성 인식 중요)스포츠에선 두 상황 중요*권력정의: 조작과 기만, 비합법적인 통제에서 집단의 의지를 강요하는 친절한 영향까지 포함(긍정적 부정적: 강요)권력의 유형:-준거기준적 권력: 권력자의 특성 모방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특성이나 행동 유형에 의해 영향받고 그를 존경하고 그와 동일시되기 위해 노력할 때 그 대상이 갖는 권력-합법적 권력: 사회적인 위치와 공식적인 권력-전문적 권력: 전문성에 의해 인정-보상권력: 긍정적, 부정적 면을 적절히 분배하는 지도자의 능력을 기반(긍정적 강화, 성취 수준에 따른 비공식적 강화, 리더의 유일한 보상, 집단 평가 능력)-강제적 권력: 최후의 수단*다면연합 모형-선수의 연령과 경력 증가? 권위적 선호(대학)-성별 차(남: 권위적, 여:참여, 민주적)-과제 지향 선수: 훈련과 지도 행동 선호-소속감, 유대 관계 중시?사회적 지지-기술 수준(높은 선수: 더 많은 훈련,민주적, 긍정적 피드백)-종목별(배구 등 상호작용형과 전통스포츠: 권위)2.리더십 역할-집단의 특성과 상황적 요소(집단의 태도, 기대 등) 중요-집단의 목표 성취 도움, 구성원의 행동에 영향-목표 설정, 구성원의 지도, 상호작용의 향상, 응집력 구축3.스포츠 리더십경영이나 리더십 같은 것이 비교적 쉬워 보이긴 해도 별 인기가 없는 것은 다 그게 그 것 같아서다. '말장난'이란 비아냥을 듣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 사례를 들며 끊임없이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피터 드러커나, 느낌표를 한 페이지에 몇 번씩 반복하면서 요란하게 책을 꾸민 톰 피터스 정도나 고정 독자가 있을 뿐이다.스포츠 리더십이 주목받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다. 운동 경기라는 쉽고도 생생한 사례를 갖고 설명하기 때문에 전하기도 쉽고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쏙쏙 들어오는 장점이 있다.그러니 이왕 경영 화두를 회사 구성원들과 나누려면 고차원의 이론보다는 스포츠를 인용하는 게 훨씬 낫다. 실제로 스포츠에서 경영 화두를 도출하는 것은 서구,특히 미국에서는 이미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스포츠 감독들이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이나 MBA 프로그램에서 인기 연사가 돼 빌 게이츠 등 기업 CEO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슈퍼볼 우승 감독은 우승을 하는 그 다음날부터 출판과 강연 요청에 파묻히고 프로농구 NBA 우승감독의 경우는 어엿한 성공 CEO로 대접받기도 한다.본받을 만한 성공 사례나 CEO 혹은 리더가 많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오랜만에 성공 CEO의 모델이 될 만한 주인공이 나타났다. 바로 야구 국가대표팀의 김인식 감독이다. 야구 월드컵으로 불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5전 전승,최고의 승률을 올리며 4강행 티켓을 예약해둔 그다.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놀라운 성과를 올린 그는 분명 탁월한 경영자다. 이번 대회에서 누구라도 알아차릴 정도로 이미 드러난 그의 '경영' 활동을 보라. 우선 타이밍. 절대 넘침이 없는 시기에 그는 선수를 교체했다.투수가 아직 힘이 남아돌아도 상대편이 이미 '맛'을 본 경우면 과감하게 바꿨다. 경쟁자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신상품 출시의 타이밍에 비견될 만한 것이 아닌가.간부(코치)들의 권한을 극대화한 위임의 리더십도 눈여겨 볼 만하다. 투수교체나 필드의 작전 지시는 선동열ㆍ류중일 코치가 '알아서'했다. 혼자 틀어잡지 않고 작은 리더들의 기를 살린 그의 전략은 지나친 카리스마가 초래할 리스크(위험)를 최소화한 수평적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그가 경영자임을 느끼게 하는 대목은 이런 얘기를 할 때다."이미 기울어진 경기를 감독이 이기게 하기는 어렵지만 다 이긴 경기를 감독이 잘못해 망치는 경우는 숱하게 봤다."나서기 보다는 선수들의 컨디션을 객관적인 눈으로 판단하고, 약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장점을 극대화하며 팀워크로서 승부수를 띄운 경영자 감독의 뚝심이 이 한마디에 다 드러나 있지 않은가.헛발질만 하는 정치 리더십 대신에 재미도 있고 가슴 뛰게 하는 스포츠 리더십에서 희망을 찾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1)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몇 년 전 한국 한 대기업이 내걸었던 광고 문구다. ‘달에 첫발을 내디딘 암스트롱은 기억하지만 두 번째인 올드린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살풍경한(?) 광고 내용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일등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한다는 점에서 스포츠의 세계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야다. 스포츠에서 승부는 모든 것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2등은 그저 스포츠신문의 한 귀퉁이 자그마한 상자기사로 남을 뿐이다.일간지 경제기자 출신의 저자가 스포츠, 그것도 스포츠 지도자의 세계에 주목한 것은 이 때문이다. 승부의 세계가 비정할수록 지도자는 고독하다. 선수단 전체의 능력을 최대치로 이끌어 승리를 가져가는 것은 지도자의 몫, 지도자에게는 과감한 결단력, 혁신에 대한 고민, 조직관리의 혜안이 필요하다. 책은 세계 스포츠계를 쥐락펴락한 명감독 18인의 삶을 통해 그들의 리더십과 조직관리의 비결을 들려준다.2)리더는 영감을 불러일으켜야슈퍼볼 우승 트로피에 이름을 남긴 미식축구의 전설적 감독 빈스 롬바르디를 모델로 한 영화 에서 디마토 감독(알 파치노 분)은 선수들에게 말한다. “겉으로는 작게만 보이는 1인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어떤 종류의 싸움이든 죽을 각오를 한 자만이 그 1인치를 찾아낸다. 내 소원은 그 1인치를 찾다 죽는 것이다. 그게 바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