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모습을 품은 좁은 내: 합천(陜川), 그리고 해인사(海印寺)201610039 황태성1. 서론2. 본론1) 합천과 해인사의 역사2) 해인사의 입지성3) 해인사(海印寺)와 화엄종4) 해인사의 창건설화3. 결론1. 서론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과,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한 해인사는 경상남도의 작은 도시 합천에 있는 가야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 애장왕 3년에 두 명의 승려와 신라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화엄종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창건되어 지금까지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함과 동시에, 한국 불교 화엄종의 근본도량과 법보사찰(法寶寺刹)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합천과 해인사의 간략한 역사와 더불어 해인사와 화엄종의 관계, 그리고 해인사의 두 가지 창건설화를 통해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그동안 가려져 온 해인사의 숨은 이야기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2.본론1) 합천과 해인사의 역사① 합천의 역사최근 전문가들은 합천지역에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대다수의 신석기 문화는 큰 강이나 바다 주변에서 발견되어 왔기 때문에 내륙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합천에는 신석기 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설이 우세했다. 하지만 1980년대 부산동의대학교 박물관 발굴팀이 합천댐 수몰지구에서 신석기와 청동기를 비롯한 여러 유물을 발견하며, 합천지역의 신석기 문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선사시대를 넘어, 합천지역에서는 가야시기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에는 고분군에 크게 눈에 띠는데, 곳곳에는 작은 고분군이 분포한다. 이들 소규모 고분군들은 합천의 중심부에 있는 지배자의 고분군에 종속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몇 개의 촌락을 거느린 소국, 즉 가야의 연맹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이다.가야국은 주변의 다른 가야국들과 대립하거나 신라 혹은 백제와 교섭하면서 그 세력을 성장시키다가 결국 신라의 정복으로 그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합천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그들의 갖은수 있는 해인사의 모습은 1817년의 대화재 이후 순조 18년(1818)에 대폭 축소된 형태로 중건된 것이 근간이 되고 있다.많은 상처를 겪어온 해인사는 또 한 차례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바로 한국전쟁 때문이다. 1951년 8월 한국전쟁이 한창일 당시, 낙오한 일부 북한군 패잔병들은 남한 각지의 산악지대에 숨어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와 고통을 주었는데, 가야산 해인사의 주변 계곡에도 많은 패잔병들이 숨어 있었다. 공군은 사찰 인근에 있는 공비 소굴을 소탕하고,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미국 고문단의 명령을 받았으나, 당시 제10전투비행단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귀중한 문화유산이 소실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출격조종사들에게 해인사에 대한 폭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이후 다른 작전을 통해 남은 북한군을 소탕하는데에 성공하여,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에 대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전해진다. 이후 해인사는 부분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삼보사찰과 오대총림(五大叢林)으로서 우리나라의 불교에서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2) 해인사의 입지성본 순서를 읽기 전, 본고에서 해인사의 입지성을 다루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예로부터 사찰이 자리 잡는 곳은 풍수지리적 명당과 매우 흡사한 지형이었다는 점에서 입지성이 사찰에서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 그리고 창건설화에서 신인(神人)에 가까운 존재들이 해인사의 입지를 점지해주고, 다른 서책들에서도 해인사가 자리하고 있는 가야산을 풍수지리적 명당으로 보고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산신령이나 사냥꾼과 같은 특별한 존재가 사찰의 위치를 스님들에게 점지하였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는 곧 해인사가 입지한 곳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산신령이나 사냥꾼과 같은 존재는 토착민간신앙과 외래사상인 불교의 원만한 결합을 상징하기도 한다.특히 해인사는 폐쇄된 입지조건을 갖춘 곳에 위치하였는데, 이를 두고 이중환은 “옛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은 모두 ‘온 우주와 세상의 만물은 어떤 이치로던 서로 융합된다.’는 정신을 지니고 있는데, 동시에 ≪화엄경≫의 중심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이 세상에 대광명(大光明)을 비추어 모든 조화를 꾀하고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화엄종은 신라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의상대사는 화엄종을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는 곧 전부이고, 전부는 곧 하나다.”라는 뜻을 가진 이 표현은 왕과 백성만을 강조하여 전제왕권강화에 대한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화엄종의 특성으로 일각에서는 ‘신라에서 화엄종이 원활하게 자리를 잡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라의 화엄종은 국가에서 인정을 받은 종파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다시 말해서 신라시대의 불교는 각종파간의 대립이 없는 소위 통불교(通佛敎)의 시대였으므로, 화엄종도 하나의 교학으로서는 의상으로부터 계승되어 왔으나 종파로서는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이다. 현존자료를 통하여 볼 때 화엄종이 하나의 종파로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위와 같이 신라와 화엄종의 관계를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화엄의 가르침은 우주의 질서라는 미적표현을 넘어, 통일국가의 상징과 전제왕권옹호라는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해선 토론이 필요할 것 같다.이와 같은 맥락으로 화엄종은 해인사의 명칭에도 영향을 미쳤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에서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온다. 해인사의 명칭은 바로 여기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해인삼매’는 잔잔한 바다의 물결(海)에 세상의 모습이 비치는(印) 것처럼, 고통과 망상이라는 번뇌의 파도에서 이를 멈추고 깨달음을 추구할 때(三昧), 부처님의 진리로 우주의 참된 모습이 자신의 깨달음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화엄종의 성격을 대변함과 더불어, 해인사의 성격 또한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배경지식으로, 우리는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미고…(중략)이때에 성목왕태후(聖穆王太后)께서 천하에 국모(國母)로 군림하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육성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예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돌문으로 모여들 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승려 이정(利貞)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하략)작자미상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전략) 그 뒤에 신라의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중국에 가서 법을 구하였는데, (중략) 어느 날 묘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지공선사가 나와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 우두산(牛頭山)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해인사를 세우라” 하고는 다시 묘문 안으로 들어갔다. (중략) 두 스님은 우두산에 도착하여 사냥꾼에게 영험한 터를 물었는데, 사냥꾼들이 산 중턱을 가리키며 신라 우두산에 맑은 물이 흐르고 산세가 빼어난 곳이 있으니 그곳에 가라고 일렀다. 그들의 말대로 그곳에 이르러 자리를 깔고 선정에 들어가자, 두 스님의 이마에서 오색광명이 솟아나 하늘로 뻗쳐오르는 것이었다.그 무렵 나라에서는 근심거리가 있었다. 신라 제40대 임금인 애장왕의 왕후가 몹쓸 병에 걸려 백방으로 좋다는 약을 써봐도 뚜렷한 효험이 없었던 것이었다. 왕은 신하들을 여러 곳으로 널리 보내어 덕이 높은 도승을 모셔올 것을 명하였다. 고승을 찾아 헤매던 한 신하가 우두산 근처를 지나다가 하늘을 뻗쳐오르는 신령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정 삼매에 들어가 빛을 발하고 있는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을 뵈올 수 있었다. 신하는 예를 올린 뒤에 그곳을 찾아오게 된 내력을 이야기하자, 두 스님은 오색실을 내어주면서 실의 한 끝은 궁전 뜰 앞의 배나무 가지에 매고 다른 한 끝은 문고리에 매어두라고 일러주었다.신하가 돌아가서 두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 나와있다. 두 기록이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신라 왕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그렇다면 이와 다르게 두 설화 간의 상충되는 부분은 무엇일까? 후자의 설화에서 보면 순응과 이정 스님이 지공선사를 만났다고 나온다. 하지만 순응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던 스님이었다. 지공선사는 그로부터 250여년 전에 죽은 양나라 때의 승려로,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지공선사로부터 우두산에 해인사를 창건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은 이해하는 것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아마 추측하건데, 설화적 요소의 특성상 후대에서 기록을 하며 해인사 창건에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짐작해본다.3. 결론우리는 지금까지 해인사를 ‘장경판전’이라는 작은 틀에 가두어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찰이라는 불교적 의미를 띈 건물을, 단순히 불교라는 틀에만 가두어 놓은 것은 아닐지 이번 답사집을 쓰며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설화를 역사로 받아들이는 학우들께서 본고의 창건설화를 해석하고 정리하는 문단을 읽고, 설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를 구분하며 창건설화를 비판이나 분석 없이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던 학습 습관을 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이처럼 우리는 해인사를 답사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기억 속에 담아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훗날 해인사를 생각할 때 ‘장경판전으로 유명한 해인사’가 아니라 그의 숨겨진 이야기와 역사를 느끼고, 되새기며 이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본 답사지가 단지 한나절의 스치는 것이 아니라, 해인사의 역사와, 그의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담아내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해인사를 답사하는 동안만큼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생각해보고, 해인삼매(海印三昧)에 걸맞게 자신들만의 깨달음을 갖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병철, 강돈구, 허남진, 『한국의 불교 성지』, 한국학 중앙 연구원, 2013,이상해, 「海印寺 伽藍의 象徵性에 關하여」, 『건축역사연구』4집, 한국건축역사학회, 19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