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리더의 연구-세종과 정조, 두 인물 비교하기-1.비전, 목표세종대왕의 목표는 백성들이 본인들의 생업에 종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생생지락(生生之樂)’이었다.세종은 유교적 사회를 이끌어 나갔으며 백성을 매우 사랑하는 왕이다. 유능한 신하들을 유배에서 불러들여 복직하도록 하였으며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많은 인재들을 채용하였다. 그는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말을 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유교의 윤리를 가르쳐주고 잘 실천 할 수 있도록 효자, 충신, 열녀의 고사를 그림책으로 만든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이로 보아 백성들을 많이 위하였으며 유교사상을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정조가 지향하고자 목표는 모든 백성이 즐겁게 지낸다는 ‘인인화락(人人和樂) ‘이었다. 정조는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며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다.2.조직, 파트너세종은 “태조께서 정하신 법에 따라, 의정부의 기능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겠다. 육조에서는 각각 맡은 직무를 의정부에 보고하여 의정부에서 먼저 논의하게 하라. 그리고 나의 허가가 필요한 것만 나에게 보고하고, 그 외의 일은 의정부가 논의한 그대로 육조에 명을 내려 일을 시행하게 하라.” 말을 하였고 3명의 정승(황희, 맹사성, 윤회)에게 각자의 능력과 성격을 고려하여 적합한 일을 맡도록 하였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대권을 전부 넘겨주지 않았으며 서로의 업무를 공유하도록 하였다. 의정부 서사제를 실행하고 강화하였으며 6조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가 있었으며, 육조의 장관을 판서) 의정부 아래로 들어가 실무를 담당하였고 자신의 업무를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처리했다.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서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였다.정조는 1776년 왕으로 즉위 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정조는 또한 규장각을 통해서 학문정치를 구현하며 인재 육성을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키워나갔다. 규장각에는 두 명의 제학과 두 명의 직제학을 두었는데, 제학에는 황경원, 이복원을 임명하였고 직제학으로는 홍국영과 유언호를 임명하였다. 정조는 홍국영을 많이 의지하고 숙위대장에 임명하는 등 많은 실권을 주었지만 결국 몰락하였다.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탕평책을 계승하고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서 장용영이라는 군대를 설치하였다. 지방 행정에 대해서도 중앙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수령의 임기를 보장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한 지방사족이 행정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박제가나 유득공, 박지원, 정약용 등 측근을 지방관에 임명하기도 하였다.3.실행세종은 많은 업적을 낸 왕이다. 대표적으로 한글 창제가 있다. 1443년 세종은 집현전학자들에게 언어를 연구하도록 명하였고 그 해 음력9월에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농업?지리?측량?수학?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조세?재정?형법?군수?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했다. 그리고 장영실에게 명하여 앙구일부와 측우기, 누호 등 백성들의 농업에 관련된 과학기구와 천문 관기구인 간의, 혼천의, 일성정시의를 발명하게 하였고, 태조시절에 고르지 못 한 활판 인쇄술을 발전시켜 많은 책을 편찬하도록 하였다.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였다. 회유책과 왜구의 항복과 3포를 개항하고 무역을 받아들여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 두만강 하류지역에 6진을 설치하는 군사제도를 펼쳤다. 그리고 서민들을 위한 새로운 복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장애인에게 쌀을 지급했고 세종은 “지화가 국가의 미래를 점치는 일과 왕실 혼인에 자주 참여하여 점복을 잘 치니 벼슬을 내리는 것이 어떠냐”고 정승 황희와 맹사성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황희가 정4품으로 한정하자고 제안하여 시각장애인 점복가 지화와 이신에게 벼슬을 준 일화도 있으며,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롭게 편경과 편종 등의 다양한 악기를 만들었으며 물문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세종은 즉위초기 부터 법전을 직접 정비하였다.정조는 규장각을 통해서 학문이 뛰어난 인재를 키웠으며 지방에 있는 인재들을 위하여 각 지역에 신하를 보내 시험을 보게 하였다. 규장각과 연계해서 37세 미만의 신진 관료 중에서 똘똘한 사람을 신분에 상관없이 발탁해서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시킨 제도 인 초계문신제도를 실시하였다. 1791년에 영조의 통공정책의 이념을 계승하고 제도로 옮겨 신해통공을 실행하였다. 그해 1월 30년 미만의 영세한 시전을 모두 혁파하고 육의전 외의 모든 물종에 대한 통공화매를 허용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리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이 혁파되고 이를 기반으로 행해지던 시전의 도고활동도 금지되었다. 신해통공은 도성 내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을 허용하는 정책이 되었다.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만의 세력을 확장할 수 지역을 가지기 위해서 수원에 화성을 건축하였다. 화성은 그의 규장각 인재인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를 이용하여 건축하였고, 건축실명제를 사용하여 부실방지를 하였다. 또 추쇄관 혁파 등을 개혁하고 개혁을 실시 한 것을 법전으로 옮겨 지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대전통전을 편찬하였다.정조는 제언절목을 반포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 저수지 축조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농업을 위하였고 대유둔과 서문을 설치하여 농업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 많은 활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설치하였다.4.공통점, 차이점세종과 정조는 많은 인재들을 널리 고르게 채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새종은 생생지락(生生之樂)을 목표로 태종은 인인화락(人人和樂)을 목표를 한 것을 보아 둘 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세종은 집현전, 정조는 규장각에서 인재를 육성하였는데 두 인물 모두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정치적 기구를 두었지만 세종은 학문의 발달을 위한 목적이 크지만 정조는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정조는 세종과 달리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위주로 많이 하였고 노력했으며 재위 초기에는 세도 정치를 하였고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지방행정을 잘 발달시켰지만, 세종은 중앙집권체계를 유지하였다는 차이점이 있다.세종과 정조는 활자 인쇄술을 발달시켜 서책을 다시 편찬하거나 많은 활자를 만들어 그것을 이용하여 서책을 편찬하였다. 둘 다 언어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하였다. 세종과 정조는 세자나 세손시절부터 서책을 많이 읽었고 왕으로 즉위 하고 여러 서책을 편찬하였다.5.결론(느낀 점, 리더십)세종과 정조는 조선의 왕으로써 많은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삶을 자세히 조사 하면서 두 인물의 실행과 업적 그리고 많은 노력을 깨닫게 되었고 또 두 인물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여러 리더십적인 면을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세종에게는 훈민정음을 창조하고 반포한 모습에서 창조 리더십을 볼 수 있다. 정인지, 장영실과 같은 유능한 인재들과 함께 많은 과학 기구와 천문기구를 발명 하는 모습에선 조직을 지배하기 보다는 구성원들을 리드해 나가는 서번트 리더십을 볼 수 있었고, 집현전 학자들과 같이 언어를 연구하고 훈민정음을 만든 과정에서는 브랜드 리더십도 볼 수 있었다. 또 세종은 3명의 정승과 6조를 두어 그들에게 권한과 사회를 발전해 나가야한다는 책임감을 주는 등의 임파워링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신하들의 정치 참여기회를 높이기 위해 많은 힘과 노력을 했으며 지휘자의 역할을 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