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을 읽고작가는 색이 연한 가장 자리의 퍼즐을 맞추다, 주인공이 없거나 주변인들로 구성된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병원이라는 배경을 중심으로 50명의 사람들이 얽혀 살아가는 이야기가 탄생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송수정, 조희락 등 개인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지만 타인의 이야기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이는 실제의 삶 속에서 모든 독자가 생활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온라인이라는 세계만 가도 이념과 성별 등으로 다투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세계는 복잡하고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한다. 마치 누구는 주인공이고 누구는 조연이나 순전한 악인, 무식쟁이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인 만큼 해석의 여지도 수 만가지로 열려있다. 현상에 대한 해석이 같은 사람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연대할 때, 혹은 단지 같은 이유로 아파하여 그 아픔을 공유하기라도 할 때 세상은 조금씩 변해간다. 개인은 너무나 다르지만 다름으로 온전히 존재할 때 세상은 활력으로 가득해진다.사실 개인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고,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줄 수도 없다. 나 역시 50명의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던 것은 아니다. 나만 그런가, 하고 타인의 후기도 읽어보니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 제 각각이었다. 독자의 경험과 삶이 다른 만큼 각자의 감수성을 건드리는 부분도 다른 것이다.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인연을 맺는 다는 게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한다.인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이호다. 이호는 1940년 생, 감염내과 전문의이자 교수, 그리고 봉사자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친척과 국가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만큼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한 그는, 봉사 활동 중 만난 아이에게 삶에 행운이 깃들기를 빌어준다. 그는 자신이 누린 운을 ‘그레이트 라이드’라 여긴다. 파도를 타듯 타인의 정성과 이타심에 기대어 세상으로 나아갔고 빚을 갚듯 자신이 받은 것을 타인에게 돌려주는 삶을 살아간다.소현재 편을 보면, 현재는 공장 노동자 및 그들을 돌보는 의사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분노를 느낀다. 정의로운 그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듯 부당함을 당연시 여기는 시각과 싸워나가지만, 한편으로는 힘에 부쳐 절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감염내과 전문의이자 교수인 이호가 말한다.“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먼지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 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380p, 이호의 대사이호의 말에 소현재가 묻는다.“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이호와의 대화 후 소현재는 영화관에 간다. 클레이메이션을 보는 즐거움도 잠시, 후각에 민감한 그가 기침을 시작한다. 영화관 지하 슈퍼마켓에서 화제가 발생한 탓이다.고백희 편을 보면, 백희는 소현재가 찾은 영화관에서 근무한다. 그녀는 고졸이다. 서비스직이 싫지만 떠나고 있지 못하는 걸 보면 그녀는 적성과 이상으로 영화관 관리자직을 맡은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고졸’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사회적으로 부정적이다. 아마 고졸이라는 단어가 통상 개인의 삶에 미치는 굴레 때문인지도 모른다. 백희는 무전으로 타 직원들과 소통하며 손님들을 대피시킨다. 비상구문을 열어봤지만 이미 연기가 가득하다. 백희는 무전으로 묻는다.“어디로 가면 되죠?”연대와 배려가 없다면 가난이나 기회의 불균형은 해소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개인은 자신의 삶에 직접 답을 찾을 의무를 갖는다. 지금의 백희는 길을 찾고 있지 못하지만 언젠가 찾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돌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소현재의 할아버지인 소씨의 이야기는 방승화와 남세훈 편에 등장한다. 어머니에게 평생 학대 당한 딸 승화가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첫사랑 소씨 아저씨를 만날 때다. 소씨는 가난했지만 스스로 가난을 극복했다. 산업화의 시대에 공장을 세워 큰 돈을 벌어들였다. 다만 그가 젊어서는 가난했기에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거부 당했다. 부자가 되었음에도 그는 평생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또 소씨는 남세훈 편에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배경이 콜라텍이다.고백희는 대학에 못 가 속상해 할지 모르지만 막상 대학생이 된 남세훈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연히 콜라텍에서 물품 보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세훈은 소씨 아저씨에게 장학금을 받는다. 다시금 연대의 장면이 등장하는 것이다.세상이 온통 다툼으로 가득할 때, 차이를 극복한 아름다운 연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 마음이 뭉클했다. 빈부, 학벌 등 상태는 얼마든 변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왜 타인을 지금의 모습으로만 판단할까. 심지어 그들이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다 떠난다 한들, 우리는 분명 그들의 삶에 빚을 진 채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자신의 인생에 책임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사피엔스를 읽고(요약 및 독후감)사피엔스는 호모 속에 속하는 현생 인류를 일컫는 말이다. 호모 속에는 여러 종의 인간이 존재했으나 사피엔스만 살아남아 세계 곳곳에 자리잡았다. 약 3만년 전에서 7만년 전 이들에게는 인지혁명이 일어났고, 인지혁명을 통해 다른 종은 갖지 못한 독특한 습성과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뒷담화와 상상의 산물을 공유하여 뛰어난 결속력을 갖췄다. 덕분에 동아프리카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해오던 이들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이들의 발길이 닿는 곳에서는 특정 종의 대량 학살 및 멸종이 빈번하게 발견되었다. 기원전 12000년 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단순한 수렵, 채집 활동을 넘어 직접 가축을 기르고 농작물을 수확하는 정착 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기를 저자는 농업혁명이라 부른다. 동시에 저자는 농업 혁명이 인류의 최대 사기극이라고 지칭한다. 농업혁명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는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인류는 번성했고 자연스레 지배 계급이 등장했다. 생산 인구 및 생산량의 증가는 삶의 질과는 무관했다. 피지배 계층은 더 많이 일했고, 더 쉽게 병들었다. 가축을 사육하고, 정착 생활을 하면서 전염병에 취약해진 탓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농업을 등져 다시 수렵 생활로 돌아가지 못했다. 상호 주관적인 상상의 산물을 받아들인 탓이었다. 상호 주관적이란, 어떤 상상의 산물이나 개념을 상호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믿는 경향을 말한다. 화폐, 종교, 심지어 국가의 개념까지도 상호 주관적이며 이는 한 개인이 어떤 산물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것을 믿고 있는 다수를 설득시킬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농업혁명으로 상상의 산물은 더욱 정교하게 발전해 나갔으며 인류는 제국과 종교, 더 나아가 제국의 힘을 실어줄 과학을 신봉하게 됐다. 500년 전 일어난 과학 혁명으로 인류는 ‘신’을 벗어나 성경을 비롯한 종교 교리에서 다루지 않는 학문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종교 경전에서 다루지 않는 영역을 탐구했으며, 탐구의 결과물은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제국은 몸집을 불리기 위해 과학이 필요했고, 과학은 제국의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과학은 제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탐구했고, 무지를 더 빠르게 인정하고 탐구하기 시작한 제국은 막대한 힘과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과학, 제국, 자본이 맞물려 굴러가자 인간의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였고 이로써 소비지상주의가 등장했다. 소비지상주의 역시 상호 주관적 산물인 만큼, 인류는 마케터가 고안해낸 각종 광고에 강제로 노출되며 무의식적 소비를 시작했다. 소비 및 생산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환경 오염 문제가 대두되었으나 인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250년 전 일어난 산업 혁명, 그리고 50년 전 일어난 정보 혁명을 통해 인류는 그 어느때보다 빠르고 다채롭게 변화하고 있다. 500년전 일어난 과학 혁명의 목적지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로,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영원한 삶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스스로 탈인간, 초월적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스스로를 개선하여 사라진다는 아이러니에 놓인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전혀 다른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우연한 역사적 사건, 과학적 발견 끝, 사피엔스는 과연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기대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혁신적 사고, 개념, 발견이 개개인의 행복까지 견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시대를 주관하는 상상의 산물은 인류의 무의식에 깊게 박혀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개인은 시대의 산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의 지배하에 움직인다. 호모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는 나날이 정교해질 것이고 개인이 그 세계에서 벗어 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만일 뇌가 집단적인 기억은행에 직접 접속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기억, 의식, 정체성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상황이 되면 가령 한 사이보그가 다른 사이보그의 기억을 검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치 자신의 것인 듯 기억하게 된다.-576p사이보그가 되고 싶은 인간은 그리 많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는 이미 새로운 혁명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앞서 일어난 혁명을 통해 인류는 새로운 도구를 기반으로 새로운 산물을 창조해왔다. 인류가 원하면 어떤 종은 개체가 증가하였고, 어떤 종은 완전히 사라졌다. 변덕스럽게도 인류는 사라진 종을 복원해내려 하기도 한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인류로 거듭났다가 다시 현생 인류를 복원시키려 애쓰게 될까.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 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일 것이다.-586p개인의 기억과 생각이 데이터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일까. 어쩌면 잊혀질 권리, 죽을 권리를 외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럴 의지를 스스로 인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최선의 삶강이. 주인공 강이는 자신이 기르는 개와 이름이 같다. 개 강이도, 사람인 강이처럼 집에 미련이 없는 듯하다. 틈만 나면 가출을 일삼는 강이처럼, 개 강이도 하염없이 창 밖 너머의 세상만 바라본다. 바깥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게 바로 개 강이가 가장 좋아하는 행위. 주인공 강이네 집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편이고, 어머니는 미신적인 신앙을 추구한다. 대체 강이 엄마가 날마다 무엇을 비는지 독자들도, 강이도 알지 못한다. 아이러니한 건 강이가 가출하지 말길 빌어대기도 하는데, 신은 되려 강이를 집 밖으로만 내보내려 한다는 거다. 강이는 밖을 좋아한다. 언젠가 멀리 떠나가는 것이 그녀의 꿈일 정도로.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결국 집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사실만큼,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게 또 있을까?강이는 툭하면 가출한다. 소영의 집에 누워 함께 담배도 피우고, 학교 화단의 꽃은 죄다 죽이고. 강이는 삶에 모든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런 강이가 전민 중학교 절친인 아람, 소영과 집을 나가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서울 거리를 누비며 미성년자인 그녀들을 노리는 수 많은 아저씨들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기도 하고, 정말로 자신을 도와주려는 아저씨를 뒤통수치기도 한다. 점점 돈은 떨어져 가고, 각자 일 자리를 얻어 월세 살이를 하기도 한다.강이는 횟집, 아람은 바, 모델을 꿈꾸는 소영은 카페. 강이는 횟집에서, 식용으로써 인기는 많지만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수족관 속 광어를 마주한다. 곧 죽을 목숨인 광어는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열심히 헤엄쳐야 다다르는 곳은 죽음인 걸 아는 탓일까? 수족관에 갇힌 광어의 처지는 어쩐지,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결국엔 하나의 결론으로 치닫는 강이의 처지와 닮아 있다.미성년자 소녀들의 가출 놀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밖이 좋은 강이나, 무서운 아빠를 피하려면 떠나야 하는 아람과는 달리, 소영은 다소 유복하고 다정한 부모님을 뒀다. 먼저 집을 찾고자 하던 사람도 자연스레 소영이 됐다. 소영과 기이한 관계를 유지하던 강이도, 길고양이를 끔찍이 아끼던 아람도 어쩔 도리가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셋의 관계는 틀어진다. 가출 후 고된 삶보다 더 아픈 삶을 맞이해야 했던 아람은, 은근슬쩍 소영을 따돌리고,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도 재개발 구역에 아지트를 만들어, 소영 없이 자신들만의 안락함을 누린다. 이 사실이 밝혀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소영에게 우산으로 맞은 아이가 학교에 못나오게 되면서, 소영과 아이들 사이엔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다. 어쩌면 전민 아파트에 살고 있는 소영은, 읍내동에 살고 있는 강이와 본질부터 다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근본적인 차이는 집을 향한 이들의 견해에서도 드러난다. 가능한 한 멀리 떠나고자 했던 아람이나 강이와 달리, 소영이 집을 나선 건 단순한 호기심이나 반항심에서 비롯되었을 터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가 자연스레 소영을 계층적 지위를 높여준 걸까? 소영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는 교리가 된다. 이제 누구도 소영의 말을 거스를 수 없다. 한번은, 강이가 맹렬히 소영의 권위, 그러니까 근본적인 차이를 만드는 무언가에 도전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강이가 이기는 싸움에서도 강이는 저야 했다. 무릎을 꿇음으로써.공터에서 벌어졌던 치욕스런 다툼 이후, 강이는 왕따가 됐다. 늘 강이 편일 것 같던 아람도, 그 밖의 친구들도 소영을 따른다. 이들 중 소영을 좋아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데도 말이다. 살기 위해 권력에 엎드려야 하는 건,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거다. 학교라는 공간도 하나의 사회라고 본다면, 이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우리들의 현실을 담아낸 장면일 것이다.권위, 권력, 힘 앞에 용기를 낸다면, 그건 무모한 객기로 취급 받기 더 쉽지 않은가. 강이의 저항도 비록 정당했을지라도, 결국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계기로 작용한다. 소영의 엄마가 계산해 준 칼로, 강이는 소영을 해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강이는 도무지 실행에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한다.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아람과 두 번째 상경, 그러니까 두 번째 가출을 자행한 강이는 나름 대로 행복한 꿈에 부푼 삶을 이어간다. 자신들처럼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십대들과 어우러져 불법적인 일에 몸을 담는다. 아람과 강이의 꿈은, 이제 서울보다 더 먼 스페인 그라나다. 그 멋진 도시로 여행 가기 위해 둘은 차곡차곡 돈을 모아간다. 그렇게 믿던 아람이 통장과 함께 사라져 버리기 전까지, 강이는 아주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었다.강이의 두 번째 애완동물은 또 다시 강이. 이번엔 투어다. 다른 물고기와 마주치면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투어. 다만 적을 만나지 않으면 자신의 지느러미를 펼치지 않아, 병에 걸려 죽는 아이러니를 가진 물고기다. 강이는 싸우라고 강이를 응원한다. 거울을 보고서라도 싸울 준비를 하길 바라며. 하지만 혼자 지내던 투어는 점점 전투욕을 잃고 결국 병들어 죽어 간다. 강이는 바다로 이어지는 하수관에 강이를 풀어 준다. 물고기 강이는 죽어가는 몸을 움직여 폐수를 향해 헤엄쳐 갈 것이고, 아무리 멀리 헤엄쳐 간다 해도 그 끝은…아마도 비극일 것이다.결국 강이의 칼은 소영을 향했다. 둘 사이 간극,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투쟁의 결과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이의 칼을 맞은 소영은 죽진 않고, 자신이 원하던 대로 연기자가 됐다. 사정을 모르는 팬들의 동정 여론에 힘입어 괜찮은 출발을 한다. 반면 강이는 소원대로 집을 떠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갇힌 신세가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권고사직을 당하고, 가족들은 이웃들의 항의에 못 이겨 읍내동을 떠난다. 이토록 안타까운 소원 성취가 어디 또 있을까 싶다.우리는 견딜 수 없이 지루한 덫에 걸린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바꾸려고 발버둥치거나, 가만히 있어도 바뀌지 않는 불행 속에서 최선은 무엇일까? 불개미 기어가는 듯한 주문을 외우는 걸까(강이 엄마처럼), 아니면 그 끝이 죽음이나 배신, 이별일지라도 앞을 향해 가야 할까.작가의 위트 있는 역설 속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삶의 연속성을 상기한다. 정말 이게 최선일까. 바뀌는 게 없다면 가만히 있어야 할까, 아니면 바꿔 보려 애써야 할까. 정답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정답도 없다. 삶이란 그저 나의 생각과 행위가 지속되는 과정일 뿐.수족관에 갇힌 광어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란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열심히 살면 꿈도 희망도 있다는 말은, 어쩌면 조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우리 삶 속에 깊이 있게 파고든 불행. 그 불행을 벗어날수록 더 멀어지는 그라나다. 폐수가 흐르는 하수관을 그라나다라고 믿어야 할 만큼 강이의 절망은 짙어진다. 강이 돈을 들고 달아난 아람, 친구를 공격한 강이. 산산 조각난 우정과 꿈. 그 불행을 가감 없이 묘사해준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 나에게 독후감작가는 아들러 심리학 이론을 토대로 자기수용의 가치, 방법 등을 소개한다. 누군가의 사연이 소개되고, 아들러 심리학 이론 및 조언이 따른다. 각 사람의 사연은 독자들도 살면서 한 번쯤 고민해 봤을 법한 인생 난제를 포함하고 있다.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면 행복할까, 나는 왜 작은 실수도 인정할 수 없을까, 결정 장애를 겪는 이유는 뭘까, 이대로 살까 아니면 꿈을 위해 도전 할까, 번아웃이 올 만큼 일에 몰두하는 이유는 뭘까, 열등감과 열등콤플렉스의 차이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는 법은? 자꾸 이직하는 나 조직 생활에 안 맞는 걸까?이런 질문들을 혹시 한 번이라도 마음에 품어 본적이 있다면 이 책의 사연들에 깊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아들러는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그만큼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관계는 중요하다. 아들러에 따르면 이 관계를 바라보는 개인의 관점은 각자의 생활 양식에서 비롯된다. 내 주변 사람들을 적으로 인지하느냐, 아니면 협력할 공동체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을 향한 개인의 입장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을 느끼며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 정신을 발달시켜 서로 공존해 왔다고 한다. 인간이 기쁨,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느끼듯 열등감도 자연스러운 감정의 일부라고 한다. 누구나 느끼는 이런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열등감이란 열등 콤플렉스와는 다른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열등감이라면, 그 열등감을 수용하지 못하고 회피하여 우월감이라는 보상을 추구하는 상태가 열등 콤플렉스다. 열등 콤플렉스에 빠지면, 열등한 부분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에 급급해지기 쉽다. 즉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거짓된 우월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열등감을 느끼는 부분을 수정하고 개선해 나가는 대신, 회피하고 우월감을 통해 보상 받으려 한다면, 이는 콤플렉스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들러에 따르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만약 열등감을 올바르게 극복해 오지 못했다면 언제든 극복하는 사람으로 삶의 방향성을 전환할 수 있다. 과거의 나, 잘못된 나, 부족한 나로 스스로를 낙인찍고 그 낙인에 갇혀 지내기 보다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를 다듬어 갈 용기가 바로 아들러가 말하는 용기가 아닐까 한다.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 즉 열등감의 근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가 결핍되었다고 느껴 스스로 부족하게 느낀다면, 결핍된 부분을 채우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현실적인 노력은 현재를 살아가는 일상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실패라기 보다는 과정으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인생을 춤추듯 살라는 아들러의 조언대로 우리는 어떤 과정에서든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 과정, 내가 원하는 나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 나의 열등감이 극복되는 과정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과정 중 발생되는 실망감, 좌절감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저 오늘의 할 일을 충실히 해나갈 때, 오늘이 모여 미래의 내가 될 수 있다.열등감을 수용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성장시키고자 고군분투한다. 이런 과정에서 실제 능력을 얻고 자아실현에도 이른다. 또한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사회에 공헌하여 공통체 감각을 누리기도 한다.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열등감을 현명하고, 올바르게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다. 건전한 방법을 모색할 때, 열등감은 능력을 위한 씨앗으로 작용한다. 능력의 씨앗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오늘 심어야 한다.생각이 과거에 갇혀 있거나, 미래로만 향해 있는 사람은 현재에 온전히 뿌리 내리고 있지 않다.과거의 상처, 후회, 수치심에 발이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 오로지 미래만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에게, 아들러는 현재의 가치를 강조한다. 현재를 즐기란 의미는 현재를 소비로 채우고자 하는 ‘욜로’와는 엄연히 다르다.이 현재의 가치를 얘기하는데 있어, 목적론을 빼놓지 않을 수가 없다. 아들러는 인간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행동한다고 했다. 이 목적은 어린 시절의 결정적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과잉 보호를 받았거나 그 반대로 학대를 당했던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어리광 부리며 남에게 특별 대우를 요구하기 쉽다고 한다. 모든 관계는 수평적인데, 특별대우를 요한다는 것은 그 균형을 깨는 행위인 셈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현재의 불행을 모두 과거 탓이나 부모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아들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과거를 해석하는 나의 관점도 결국 나의 선택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언제나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면 깊이 숨어 있을 나의 목적이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어떤 가치와 목적으로 나는 살아갈까. 남들에게 인정 받기 급급하여 나 자신을 일에 혹사 시키지는 않았던가?나의 존재의 가치를 오로지 능력이라는 요소만으로 평가하여, 스스로 존엄함을 잃지는 않았던가? 인정과 칭찬 혹은 비교에 급급하여 스스로 나를 미워하진 않았던가?관심이 온통 나 자신에게 쏠린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타인의 평가에 극도로 예민해지고, 작은 실수에도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등, 오히려 더 큰 문제를 겪는다고 한다. 아들러는 이런 자기 중심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강조한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얻을까 보다는, 내가 남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나에게 집중된 관심을 주변으로 돌려서, 더 건전한 내가 되는 것은 어떨까? 관계가 개인화되고, 파편화 된다 해도, 인류의 오랜 생존 법칙인 분업은 계속된다. 결국 분업에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를 잘 해내 줄 거라는. 이 책은 결국 나를 인정함으로써, 아들러가 말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남을 신경 쓰느라 지금껏 자신을 미워해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삶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다시금 용기를 갖도록 도와준다. 자신에 대한 용기를 되찾을 수 있다면, 삶의 순간들은 정말 멋진 춤사위가 되지 않을까?
[눈먼자들의 도시를 읽고]소설 속 등장하는 인물들은 눈이 멀기 전까지 육안으로 보이는 것, 직접적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쾌락,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 정신 혹은 가치관에 따라 살아왔을 뿐이었다. 첫 번째로 눈 먼 남자는, 눈이 먼 사람들 앞에서 소변 보는 것을 꺼렸고,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옷 차림새를 신경 썼다. 눈먼 소년은 엄마를 잃은 슬픔도 잊고 시종일관 식욕에 충실 했으며,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눈이 멀었음에도 안약을 넣고, 부인이 있는 의사를 상대로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 하고자 하기도 했다. 이들은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한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인간 내면은 간과하는 모습을 보인 셈이다.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주제사라 마구는 이들의 행위에 거리를 두고 묘사함으로써 우리들에게 객관적 판단을 유도하고 있다. 그가 유도하고자 했던 판단과 메시지는 구약 성서와 깊은 관련이 있다.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인간의 윤리적 타락으로 인한 대재앙을 다룬 두 가지 사건이 있다. 첫 번째는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의 오만함으로 인해 인간 언어에 차이가 생기게 된 재앙이다. 이 재앙으로 인해 생긴 언어의 차이로, 당시의 죄인들은 전대 미문의 혼란 속에 전 인류적 붕괴를 겪어야만 했다. 두 번째는 소돔과 고모라 사건 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인들은 윤리적 타락의 절정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불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이 두 사건은 주제 사라마구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설정한 백색 재앙과 흡사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죄인들처럼 ‘보이는 것’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철저히 간과했다. 이들이 겪는 백색 질병은 상징적인 증상을 가지고 있다. 첫째, 칠흑 같은 어둠 대신 하얀 우유와 같은 백색으로 압도당한 다는 점, 둘째 아무런 초기 증상이 없다는 것, 셋째 눈을 포함한 신체의 외관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등장 인물들이 겪었던 시각적 증상들은 주제 사라마구가 제시하고 메시지와 일관성 있게 어우러 지고 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나, 소돔과 고모라에서 문란하고 타락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백색 질병에 처한 현대인들의 문제는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무감각한 태도 였다.어둠을 좋아하던 그들의 내면이 벌을 받기라도 하는 듯이, 그들은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색에 압도 당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발병하는 백색 질병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전능자의 심판을 암시하는 듯 하다. 특히 가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등장한 도둑과 첫 번째로 눈먼 남자들의 대화에서도 갑작스런 재앙을 암시하는 말이 등장한다. 도둑이 보인 호의에 눈 먼 남자는 ‘내일은 또 댁이 운이 나쁠 수도 있는 거죠’ 하고 답한다. 이는 죄악을 저지른 인간이 신 앞에 얼마나 무력한 존재 인지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눈을 포함하여 신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 역시, 눈먼자들의 재앙이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이 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소설 곳곳에는 다양한 언어적 장치가 세워져 주제 사라마구의 메시지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실인증과 불가지론의 어원을 언급한 점은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한 강력한 힌트라고 할 수 있다. 실인증 (agnosia)은 시력 감소는 없지만 뇌가 사물을 인지 하지 못하는 증상으로, 실인증에 걸리면 기본적인 감각 이상, 지능 장애, 주의력 결핍, 실어증에 의한 이름대기 장애 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극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실인증이 특정 이상 없이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불가지론(agnosticism)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불가지론 역시 초경험적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이 불가능 하다는 철학적 입장으로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불신과 무시를 보여 주고 있다. 이들은 비슷한 소리를 내는 단어로서 그 의미에서도 공통점을 지닌고 있는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들의 공통 분모를 놓치지 않고 자신이 전달할 메시지를 위한 장치로서 절묘하게 단어의 의미와 주제를 환기시키고 있다.주제 사라마구는 눈먼자들의 도시를 통해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본질을 일깨워 주고, 윤리적, 영혼적 타락을 경고하는 한편, 따뜻한 인류애를 전하기도 한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의 삶은 분리되었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으로 죄인들과 그의 흔적들이 잿더밀로 변했지만 여전히 인류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백색 재앙을 맞은 등장 인물들도 가까스로 그들의 삶을 이어 나간다. 그들은 찬란한 백색 광채 앞에 놓여 지난날의 삶을 속죄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들이 잃었던 내면적 가치들을 서서히 찾아 간다. 그들은 또 다른 종류의 개가 된것처럼 냄새와 말투로 서로를 인식하며, 그들의 이름, 그들의 눈의 색깔과 같은 외적 요소들의 가치가 무색해져 간다. 그들은 초반에는 양심과 인간의 존엄성을 희생하여 본능적 욕구에만 충실했지만, 이후에는 식욕을 희생해 자신의 인간 다운 삶과, 동료의 행복한 삶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용기도 보인다.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이 제시하고 있는 전 인류적 재앙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면서도 희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인류는 사랑과 희생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소설에 마지막에 이르러 첫 번째로 눈먼 남자를 시작으로 등장 인물들은 하나 둘 앞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구성 역시 주제 사라마구가 전 인류를 향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전 인류가 마침내 영혼의 눈을 떠, 그들이 그동안 간과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지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