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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영이 예술의 문턱을 소멸시키는 순간 - <판타스틱 플래닛>, <밤의 이야기>를 보고
    환영이 예술의 문턱을 소멸시키는 순간-, 를 보고영화 이론가인 루돌프 아른하임에 따르면 영화는 현실성과 부분적 비현실성으로 구성되어있다. 우리는 현실성으로부터 환영을 얻게 된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현실이라는 본질적인 것을 영화에서 일부만 취하여도 예술적인 완벽한 인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영화의 예술 가능성이기도 하다. 여기서 ‘현실’은 중요하다. 카메라에 담겨지는 것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실제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환영이라는 예술의 문턱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실사’ 영화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의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현실이 결여된 애니메이션은 아른하임의 예술성에 배제 되는 것일까? 영화는 반쪽짜리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 속으로 쉽게 매혹되고 환영을 만들어낸다. 낮은 진입장벽의 환영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완전한 환상 덩어리인 애니메이션에서는 ‘완전한 환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그 문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이 환상 덩어리의 영화를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아른하임과 달리 나에게는 애니메이션은 영화이고 예술이다. 나는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가 아닐지라도 영화를 보면서 동요한다. 실사 영화를 보면서 왠만하면 흘리지 않는 눈물도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흘리기까지 한다. 영화 애니메이션이 왜, 어떻게 나를 환영의 문으로 불러들이는지 과 를 보면서 찾아보았다.작은 파동을 커다란 파도로 만들면서 생기는 환영우리는 상상한다. 이 작은 동물들의 세계에도 우리 인간과 같은 사회의 모습이 있을 것이라고. 엄마 고양이는 집안 일과 생계를 위한 일 사이에서 무엇을 중점으로 둘 것인가 고민하는 워킹맘으로서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엄마 고양이의 마음도 몰라주고 사춘기인 청소년 고양이는 엄마 말은 듣지도 않을 것이다. 고양이들의 세계도 분명히 나와 같은, 나의 주변인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지나가는 하나의 작은 고양이 일뿐이다. 이 상상은 반대로도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가 고양이를 바라보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거대한 생명이 다른 차원에 혹은 다른 행성에 있을 거라고 똑같이 있을 것이라고.르네 랄루의 은 이러한 우리의 상상을 애니메이션으로 실현시킨다. 푸른 거인이 인간을 지배한다. 적어도 고양이는 우리에게 반려동물이다. 하지만 푸른 거인들에게 인간은 반려하는 동물이 아니다. 털이 빠진다는 이유로 고양이를 유기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우리들처럼 푸른 거인들은 인간은 장난감인 것이다. 푸른 거인들이 인간을 소유물로 보고 갖고 놀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정치적 힘이 인간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거인들은 최첨단 머리띠로 지식을 쉽게 전수받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술적으로 진보한 푸른 거인을 인간이 이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힘만이 아니라 물리적 힘 또한 푸른 거인들에게 있다. 말 그대로 그들은 거인이다. 인간보다 큰 존재로 거대한 그들의 몸만큼 그들의 힘은 어마어마할 것이다.그러나 인간들은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힘들 앞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 거인들의 머리띠를 들고 야생으로 도망가 지식을 전파하고 거인들과 싸울 에너지를 만든다. 인간의 힘은 미비하나 변화를 만들어낸다. 은 인간의 움직임을 줌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테어가 집을 나갔을 때, 영화의 화면은 티바의 시선을 화면 안으로 개입시킨다. 테어가 올라가던 쇼파를 바라보고, 테어가 잠을 자던 침대로 시선을 돌린다. 티바의 시선으로 쇼파와 침대는 굉장히 작은 사이즈 일 것이다. 하지만 화면에는 가득차며 관객의 눈에는 작은 물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거인인 티바가 쓰는 물건처럼 보인다. 티바의 시선으로 영화는 화면을 확대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티바가 시선을 거두면서 화면은 이제 풀샷으로 티바를 잡는다. 티바와 테어가 사용한 물건들의 영화 속 물리적 크기는 차이가 어마어마하겠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티바가 테어가 나간 창밖을 바라볼 때 줌인되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물리적 차이를 인지하게 된다. 다음 이어지는 쇼트도 물리적 차이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숲 속에서 머리띠를 끌고 가는 테어의 모습이 이어 나온다. 화면 속 작게 나오던 테어의 모습으로 카메라는 줌인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모습을 더 자세하게, 더 크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일시적으로나마 테어와 티바 사이에 있는 정치적 힘, 물리적 힘을 잊게 한다. 줌인이라는 영화적 움직임을 통해 두 힘을 무마 시키는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인간과 푸른 거인을 동등한 위치로 바라본다. 인간의 작은 파동을 커다란 파도로 만드는 환영을 영화적 움직임 줌인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은 예술의 문턱을 한 단계 낮춘다.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환영은 극영화에 비해 플랫하다. 단순히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3D 애니메이션이 익숙해서 2D 애니메이션이 상대적으로 플랫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닐 것이다. 에서 작화는 살아 숨쉬는 듯한 그림이 아닌 그저 그림이 움직인다는 인상을 준다. 마치 종이인형을 가지고 놀 듯이 이 2D 애니메이션은 3차원의 공간 안에 있지만 인물자체는 2차원 인물인듯이 말이다. 1973년 제작이라는 기술적인 탓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화면에서 튀어나오지 않는, 화면에 딱 달라붙어 플랫한 느낌을 주는 의 작화는 4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이러한 느낌은 실사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의 첫 장면은 어머니와 아들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유화로 그린 그림을 카메라가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단단한 착각이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인물들이었고 그 자세로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 살아 있는 두 인물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 장면을 하나의 회화 작품이라고 환영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은 실사영화, 은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커다란 물리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가 나에게 던져준 인상은 유사하다. 앞서 말한 부분적 환상인 영화와 완전한 환상인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그 공통점은 ‘환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환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착각을 일으키는 방법일 것이며, 이 환영은 환영으로 들어가는 문 자체를 아예 소멸시킨다.
    독후감/창작| 2017.08.22| 3페이지| 1,500원| 조회(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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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영화다운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에드워드 양의 을 보고- 가장 영화다운 영화 내가 영화를 찍고 나서 가장 크게 배웠던 점을 하나를 꼽자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의 관점을 지니게 했다는 것이다.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다보니 안보이는 것이 보이기도 하고, 다양한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것은 꼭 영화에서만 배울 수 있는 점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미술이 그런 관점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소설이 그런 관점을 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확실하게 이런 배움을 빠르게 준다는 것은 틀림 없다고 장담한다. 영화가 우리 현실과 가장 비슷한 예술이기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보여줄 때 가장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은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된 그 순간이 떠오르는 영화였다. 영화 속 양양이라는 꼬마가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나 또한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 순간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라는 점은 흥미롭다. 이 영화를 위한 영화, 메타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 영화적 성질을 영화 안팎으로 표출하고 있다.은 신생아의 울음소리로 영화의 문을 연다. 그 울음 소리의 근원지는 어딘지 모르겠다. 하지만 울음소리로 시원하게 세상 밖으로 나올 누군가의 탄생을 기다리는 듯, 울음소리와 함께 영화의 첫 씬은 운명론자 삼촌의 결혼식으로 시작한다. 이 신생아의 울음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 그렇게 이질감을 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데이트로 영화를 본 양양과 패티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영화로 인해 우리는 세 번 살 수 있다.” 마치 우리는 을 통해 새로운 목숨을 얻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의 시작은 이 영화의 정체성을 명백히 보여준다. 가족 행사의 대표격인 결혼식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어쩌면 한 가족의 연대기적 영화다. 주인공을 단 한명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여러명이다. 주인공을 꼽자면 에 나오는 가족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빠의 이야기, 아들 양양의 이야기, 딸 틴틴의 이야기.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영화를 가로지르며 영화를 형성해나가고 있다. 영화는 단 한 명의 유년, 청년, 중년, 노년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지않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들의 역할에 따라 유년, 청년, 중년, 노년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 의 가족은 서로에게 말하지 않아도 각자의 공통된 감정들을 관객에게 이야기 해줌으로써 서로에게 대화를 건다. 그리고 이 대화는 이 여러명의, 한 가족의 연대기적 성격을 지닌 영화로 만든다. 그리고 이런 보편의 감정은 영화가 할 수 있는 능력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도 경험한 것 같이 만드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영화의 능력을 만들어낸다.아들 양양은 초등학생이다. 양양은 보통의 초등학생처럼 여자아이들과의 싸움으로 항상 고민이다. 아직 이성이 아닌 그냥 여자인 그녀들과 싸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은 누구나 겪을 법한 유년 시절의 추억이다. 그러던 양양에게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여자에게 느낀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감상실에서 자리를 찾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양양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하지만 이 감정이 ‘이성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우리는 쉽게 명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소녀가 그저 화면을 가리고 있어서, 스크린에 비춘 영상을 양이 보고 싶어 시선을 떼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양에게 그 찰나의 순간이 새로운 감정의 형태로 발화되는 이유는 아빠와 첫사랑 셰리의 일본 여행때문일 것이다. 아빠는 첫사랑인 셰리를 만나 과거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등학교때부터 아빠를 사랑했다는 셰리와는 달리 아빠는 셰리를 초등학교때부터 좋아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말도 안되는, 아빠 인생의 행로를 아들도 똑같이 걸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상황을 우리는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양양이 겪은 보편적인 경험으로 양양 ? 아빠만의 소통이 아닌 양양 ? 아빠 ? 관객이라는 소통을 만들어 낸다.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이 이상한 감정의 몽타주는 딸 틴틴과도 연결이 된다. 아빠가 셰리와 연애를 하던 시절, 횡단보도를 걷기전을 떠올린다. 대만 타이베이가 아닌 일본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그때 그 시절을 그들이 떠올릴 때 딸 틴틴은 패티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아빠와 셰리가 했던 것처럼, 땀으로 젖은 손을 서로 맞잡으면서 감정을 교환한다. 분리 될 수 있는 이 감정들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진 쇼트의 연쇄들을 통해 우리는 이 가족을 바라보게된다. 누구나 겪을 법한 감정들을 한 사람이 아닌 다양한 사람, 가족으로 연대의 주체로 만들어낸다. 덕분에 감정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관객의 폭은 넓어진다. 이렇게 우리는 이라는 영화 프레임을 통해 우리 인생을 되돌아 보게된다. 틴틴 가족들의 스토리가 각자의 스토리가 아닌 엄마의 스토리, 아빠의 스토리가 되면서 보편적인 감정들을 공유하게 된다.어쩌면 자신의 분신인 아들 양양에게 아빠는 자신이 찍던 카메라를 선물로 준다. 양양은 앞집 릴리의 엄마가 우울해 하는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봐야지만 아줌마가 우울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어리숙한 양양이 여자아이들과 투닥거리며 싸우는 이유도 아마 이런 편협한 시선을 가진 이유때문일 것이다. 아빠가 준 선물로 사람을 대하기 어려운 양양은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시선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카메라에 무언가를 담기위해서 밖으로만 향하던 카메라의 앵글은 이제 양양의 시선을 자신의 내부와 외부, 양쪽으로 넓게 트여주는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모기를 잡기 위해 사진을 찍던 양양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양양은 자신이 찍어주겠다며 철학적인 생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세상을 조금 더 자세하게 바라보게 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양양은 스스로 체득하게 된다. 영화의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이 우리에게 어떤 보편의 감정을 주듯이 양양도 카메라라는 프레임을 통해 세상에 대한 보편의 감정을 습득하게 된다.양양의 누나 틴틴은 양양과 비슷하게 보편의 감정을 습득한다. 이 보여주는 CCTV화면에서 우리는 틴틴의 모습을 확인한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CCTV화면을 통해 영화 속 인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마치 CCTV화면의 각도에서 보여지는 간접적인 쇼트들을 통해 영화에 나타나는 인물들을 응시한다. 할머니를 모시고 아파트로 들어오는 틴틴과 할머니를 우리는 바라보게 된다. 물리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CCTV라는 카메라를 통해 분리되어 있는 공간들을 거닐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명백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CCTV라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그 연속성을 파괴됨을 목격한다. 마치 쇼트들로 이루어진 영화를 보듯이 우리는 그들을 보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 분리는 완전한 분리가 아니다. 이들은 연결되어있다. 마치 영화의 쇼트들처럼 말이다.
    독후감/창작| 2017.08.22| 3페이지| 1,500원| 조회(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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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의 쇼트로 발현되는 전쟁의 트라우마 - 자크 오디아르의 <디판>을 보고
    영화의 쇼트로 발현되는 전쟁의 트라우마- 자크 오디아르의 을 보고자크 오디아르의 은 스리랑카 내전 중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그러나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지운채 ‘디판’이라는, 자신이 죽였을지도 모르는 남자의 신분증을 사서 ‘디판’으로 살아간다. 영화의 타이틀이 뜨기 전까지 우리는 그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신분증을 삼으로써, 영화의 타이틀로 ‘DHEEPAN’이 뜸으로써 영화 속으로 진입된다. ‘DHEEPAN’이라는 글자와 함께 장중한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불빛, 보통의 움직임보다 느린 고속촬영과 함께 뜨는 강렬한 텍스트. 자크 오디아르의 전작 와 비슷한 방법으로 영화는 문을 연다. 에서 아랍인이지만, 아랍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무국적인으로 자라 온 말리크가 글자를 배움과 동시에 감옥의 순리를 깨닫게 되는 의미를 부여하는 그 텍스트와는 의미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 중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스리랑카인이지만 내전으로 자신의 국적을 포기해야만 하는 위치인 무국적 인물이다. 각 나라의 접경선 위에 서있는 말리크와 디판이 닮은 만큼 영화의 시작도 닮아있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은 ‘디판’은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이다. ‘디판’이란 이름으로 모여진 새로운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의 안정을 위한 디판의 노력들. 그런 디판의 노력들을 조명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관객들에게 영화가 시작 전 부각시켜주기 위한 것인지,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 또한 우리에게 어떤 미묘한 감정을 전달한다.의 시작과 끝은 어떤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어떠한 맥을 만들어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글자에 맞추어진 클리핑 마스크이다. 클리핑 마스크 된 오프닝 크레딧으로 우리는 내전 중으로 시체를 치우는 스리랑카의 모습을 글자를 통해 보게 된다. 글자 속에 비춰지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없다. 글자가 사라짐과 동시에 우리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발견하고, 시체를 숨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포착한다. 누군가의 가족을 죽인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를 통해 우리가 목도하게 만들고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클리핑 마스크는 엔딩 타이틀에 또 다시 사용하게 된다. 디판이라는 글자의 일부를 조금씩 보여주다가 모든 것을 완성시켜 ‘DHEEPAN’이라는 글자를 마지막에 보여준다. 이 텍스트 안에 있는 쇼트는 얄리니가 디판의 머리를 쓰다듬는 쇼트이다. 의 마지막 시퀀스는 결국 단란한 가정이 된 디판의 가족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는 제법 여유롭게 차를 타고 교외에 있는 집으로 가며, 집안에는 공포스러운 총성보다 파티와 같은 생활들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그 집안에는 스리랑카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금발의 백인여성도 있으며, 아랍인도 있다. 다국적인 집안 인 것이다. 디판에게 찾아온 가정의 안정, 내부의 안정으로 비로소 영화가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 안정을 주는 얄리니의 손짓은 ‘DHEEPAN’이라는 글자로 파편화되었다가 다시 비로소 완성이 된다. 부분적으로 결여가 있지만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음을 희망하듯이 말이다.의 처음과 끝에는 깔끔하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완전하지 않은 구멍들이 있다. 바로 누군가의 죽음 끝에야만 비로소 안정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가족을, 무고한 시민들을 죽였던 스리랑카의 군인이었던 디판은 쫓기듯이 프랑스로 도망친다. 전쟁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프랑스의 생활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종교 모임에서 만난 친구는 전쟁의 기억을 되묻는다. 그리고 종교 모임 후 평화롭게 누워있는 디판을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령에게 데려가기까지 한다.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한 전쟁의 기억들이 불현 듯 디판을 쫓아오기 시작한다. 대령을 만나고 와서 종교로 자신을 달래보지만 쉽지 않다. 집안으로 돌아 온 다음 날 아침, 카메라는 무빙을 통해 디판의 집 문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게 한다. 마치 전쟁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포가 유영하듯이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따라가듯이 하다가, 공포에 질려 가족들 사이에서 잠든 디판의 모습을 끝내 보여준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은 우리에게 느닷없는 쇼트들로 보여준다. 새 집에서 처음 목욕을 하고 디판은 건너편에 있는 백인 마피아 아파트를 창문 너머로 바라본다. 그의 시선으로 따라가던 카메라는 아파트 외부에 있는, 디판의 눈에 보일 법한 마피아들을 중심적으로 훑더니 보이지 않는 아파트의 내부까지 들어간다. 낮에 보았던 깨진 형광등을 다시 상기시키듯, 아파트 천장에 있던 형광등을 깨트리는 누군가의 팔을 상상하는 쇼트로 넘어간다. 디판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영화는 갑자기 불현 듯 상상의 쇼트를 넘어가는 것이다. 갑자기 찾아오는 전쟁의 트라우마는 디판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 딸인척 하기로 한 일라이얄는 학교에서 첫 수업을 위해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선다. 이상하리만큼 카메라를 통해 우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낯선 환경을 또 다시 우리에게 던져준다. 아이들이 정말 영화 속 만큼 몸이 굳어서 일라이얄을 바라봤을까? 은 또 다시 디제시스 속 사실에서 디제시스 속 상상으로 상황을 전복시킨다.사실과 상상을 오가는 것은 어떤 공포의 대상만을 표상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밤 시내를 돌아다니며 2유로에 파는 장난감 머리띠를 팔다가 도망 온 후 집으로 돌아온다. 침대에 누운 디판의 쇼트에 이어지는 쇼트는 알 수 없는 숲이다. 움직이는 숲을 따라 간 카메라 앞에는 코끼리가 서있다. 이 코끼리의 몸짓과 형태는 얄리니가 디판에게 마음을 연 후 어둠 속에 비쳐지는 얄리니의 몸짓과 형태와 닮았다. 디판에겐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 주는 존재로 얄리니가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건너편 백인들과 날카로운 신경전 때문에 어그러진 디판과 얄리니의 관계가 조금 누그러지자 디판에게 또 다시 코끼리가 찾아온다. 어쩌면 고향으로 보여지는, 고향 속에 따뜻한 기운을 넘겨주던 코끼리가 갑자기 나타나면서 영화는 사실과 상상의 결들을 조금은 부드럽고 완곡한 분위기로 전환해준다.완전해 보여도 무언가 결여된 불안정한 상태, 불현 듯 튀어오르는 전쟁의 트라우마. 혼란스럽고 어딘가에 기대지 못하는 디판의 상태를 영화는 좀처럼 고정되지 않는 쇼트를 통해 보여준다. 카메라는 디판을 향해 트랙인을 한다거나, 움직이는 디판을 계속 따라다닌다. 디판이 누군가 대화를 할 때 조차도 카메라는 미세한 움직임을 갖고 디판을 담아낸다. 그러나 은 문득 디판은 어딘가에 고정시킨다. 바로 디판과 그의 가족이 어딘가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이민자 심사를 받기 전 복도에 서서 잠깐 대화를 나누는 디판과 얄리니를 풀샷으로 보여줄 때도 카메라가 고정되는 데,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한 통로라는 ‘복도’라는 공간에서 카메라는 둘을 움직이지 않은 채 담아낸다. 이 ‘복도’는 또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일라이랼이 학교에 입학하기위해 선생님과 인사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가는 쇼트 또한 디판과 그의 가족들을 멀리서 잡아주는데, 이때도 카메라가 멈춰서 그들을 바라본다. 변방이라는 망명자에서 가장자리인 프랑스 시민으로 진입하는 순간을 고정된 쇼트로 보여주는 것이다. 불안정했던 삶들이 안정된 삶으로 진입하는 순간만큼은 평온의 순간을 추구하고 싶듯이, 카메라는 디판을 고정된 카메라로 잡아둔다.
    독후감/창작| 2017.08.22| 3페이지| 1,500원| 조회(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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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을 통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바라보기
    영화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을 통해, , 바라보기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의 영화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다르다. 그가 카메라를 통해 담아내고 포착하는 그 순간들, 영화 안에 있는 것들을 그는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감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들, 흔히 지그재그 3부작이라고 불리우는 , , , 그리고 를 보고 난 후 나는 이 영화들을 단번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그재그라는 단선적인 명칭으로 말하는 3부작일 수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대부분의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세상과 관객이 만나게 해준다. 그리고 여기서 그 둘을 만나게 하는 방법에 따라, 즉 세상과 카메라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영화 안에 담겨지는 내용은 달라진다. 유동적인 이 관계에는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프레임 속에 있는 피사체들과의 관계와 은밀하게 연결되어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피사체를 담아낸다면, 카메라는 대상이 되는 물체와 거리를 두고 찍을 것이다. 때로는 카메라 스스로 자체가 대상이 되어 관객을 동화시키는 방법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관계 설정은 특이하다. 대상을 사랑하는 태도를 가지고, 피사체를 마치 껴안은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의 영화 속에 나타나는, 혹은 그가 영화를 통해 포착하는 것들은 단순히 베끼는 물체, 피사체(被寫體)가 아니다. 마치 생동하는,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 그 자체다. 그 생명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카메라라는 프레임으로 가둬두지 않는다. 생명체를 껴안은 그의 태도는 느슨하며, 언제든 그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만큼 열려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그것들을 잠시 담아둘뿐이다. 언제 뛰쳐 나갈지도 모르는 이 생명체는 영화 안팎을 뛰어다니며 살아있음을 우리에게 전달한다.에서는 죽음이라는 보물을 찾으러 낯선 도시에 자동차가 도착한다. 여기서 낯선 것은 도시보다 이 자동차를 탄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알 수없다. 낯설다고 생각했던 도시는 한 아이가 카메라를 맞아주면서 낯설음이라는 한 겹의 얇은 껍데기를 거둔다. 하지만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이 낯선 자동차의 주인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아이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차 안에 있고, 우리는 그 안을 들여다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들이 밖으로 나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자동차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마을 밖을 멤돈다. 자동차가 고장나서야 자동차에서 사람이 내린다. 이때 자동차에서 사람이 내리듯이 카메라에서도 사람이 내린다. 아이를 따라나선 남자는 마을을 둘러본다. 우리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관찰하게 되지만, 그의 일행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다. 관객은 더 이상 도시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의 일행들은 낯설다. 낯설은 일행에서 동떨어져 나온 이 남자는 안내자인 아이가 학교 가고 나서 마을 카페 앉아 차를 마신다. 이때 이 남자의 제스쳐들이 심상치 않다.남자는 카페의 주인 아주머니와 주차를 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보고 듣는다. 그는 두리번 거리며 이들의 대화를 듣고 본다. 목을 빼고 고개를 돌려가며 그들을 자세히 본다. 그의 시선과 카메라가 가르키는 방향과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그의 시선을 발판 삼아 우리가 그들의 자리에 함께하고 있게끔 만들어준다. 그러다가 카메라는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이라는 정당성 없이 우리를 그들 사이로 끌어들인다. 굳이 그의 시선이 없더라도 우리의 눈을 그 사이에 껴 놓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마을 주민들도 관찰하지만, 이제는 그 남자를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점하게된다. 목을 빼고 안경 아래 눈을 껌뻑이는 그의 시선.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보고서는 사진을 찍는 그의 몸짓. 그의 호기심 어린 행동들은 마치 어른이 아닌 아이의 몸짓같다. 이 사소한 제스쳐들은 프레임으로 포착된 그를 살아있게 만든다. 마을 주민들의 대화들의 쇼트들의 연쇄들을 통해 그와 관객을 분리시킴으로써, 그의 제스쳐에 어떤 생동성을 불어 넣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리고 그의 행동들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도시에 낯설음을 떠나 보낸 것과 같이 그에게 느껴지는 거리감, 낯설음을 떠나 보내게 된다.자동차에서 나와 코커 마을에 땅을 밝은 그를, 마을의 카페 앉아 마을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다툼을 어린아이처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면서 우리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코커의 주민들을 만나는 통로가 자동차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는 을 찍은 영화 장소가 지진으로 인해 큰 인명피해를 입게 되어 주인공인 아마하드를 찾아나서는 영화이다. 자동차를 타고 주인공을 찾아나선다. 에서 우리는 아마하드의 행적을 눈의 추적으로 바라본다면, 에서 우리는 아마하드의 행적을 감독과 함께 자동차에 동행하면서 추적한다. 영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감독과 자동차를 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와 달리 우리는 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쇼트들을 찾을 수 있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밖의 공간으로 진입하기 위해 살펴보는 의 태도가 표현되고 있다.는 영화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메타 영화다. 의 장면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보여지면서, 영화를 만들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졌다. 의 시작은 재밌다. 영화 감독역을 맡은 배우가 나타나 스스로를 “감독을 맡은 모하메드 케사바레즈입니다.“라고 소개한다. 영화를 찍기 위해 배우를 캐스팅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순조롭지 않은 영화 진행에 배우를 바꾸자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한다. 여기서도 자동차라는 공간이 영화 내부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사용된다. 이때도 차 안에서 차 밖을 바라보는 쇼트들이 나온다. 이때 특이한 점은 백미러가 보인다는 것이다. 차 밖과 백미러에 비친 배우들을 보여줌으로써 통로이지만 동시에 거울인 자동차라는 공간을 보여준다. 배우들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스스로를 지칭하듯 말이다. 감독역을 맡은 배우는 촬영을 위해 통제되어진 선 안에서 움직인다. 아이들은 영화 촬영을 때문에 그 선을 넘어 올 수 없다. 하지만 감독은 그 선을 넘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이 선을 넘는 것은 안돼지만, 나는 이 선을 넘어 너희들에게 갈 수 있다“라고 말하며 아이들과 함께 시험공부를 한다. 라는 거울을 만들어 또 다시 한번 코커지방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처음은 낯설지만, 마을의 생활 속에 진입하게 된 의 남자 행동은 ‘아이 같음’은 연기로 표현되지 않는 아이들만의 살아있는, 정말 있을법한 연기들로 보여지기 시작한다. 전화를 받기 위해 차를 타고 마을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그의 움직임은 의 아마하드의 움직임이 떠오르게 만든다. 친구의 공책을 가져다 주기 위해 몇 번을 달려 나가는 그 언덕길, 그 위를 달려나가는 아마하드의 움직임이 생각나게 한다. 어른들은 아마하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하드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하드의 세계 속 어른들은 답답하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마하드의 시선으로는 어른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를 대변하듯 카메라도 아마하드의 시선에 맞춰 세상을 보여준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 시선 안에 어른들을 가득찬다. 하지만 그 가득참은 형태가 분명하지 않다. 얼굴이 프레임에 의해 잘려있어 보이지 않으며, 그들의 온전한 다리 또한 아마하드의 카메라에 완전히 담기지 않는다. 어른들이 말하는 문제들에 비해 아마하드의 문제가 사소하기에, 작기 때문에 카메라는 어른들을 포착할 수 없는 것일까?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른들의 문제는 프레임의 의해 잘린 그들의 몸처럼 완전하지 않아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듯 하다. 오히려 아마하드는 커다란 그들의 몸을 자신의 작은 몸을 통해 전복시킨다. 아마하드는 친구에게 노트를 가져다 주기 전, 엄마의 허락을 받기 위해 빨래를 너는 엄마를 따라다닌다. 아마하드는 빨래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치맛폭에 아직 쌓인 어린아이처럼 빨래감에 감싸져서 나오지 못하는 듯하다. 그 행동이 친구의 노트를 전달해줘야하는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한들, 그는 어른의 폭에 쌓여 마음대로 행동 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마하드는 누군가의 가르침없이 스스로 빨랫감들을 걷어차기를 시도한다. 친구의 집이라고 착각한 집에서 발견한 친구의 바지, 그 바지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끼어넣으며,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시도한다. 그의 도전은 성공적이다. 비록 친구의 집은 찾지 못했지만, x,y축으로 반복되어지는 지그재그로 나아진 길이 아닌, 지그재그를 뚫는 z축으로의 발돋움을 시작한 것이다. 밤에 만난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지만 친구를 만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의 실패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묵묵히 z축의 방향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비록 친구에게 노트를 돌려주지 못했지만 아마하드는 새로운 방향 축을 스스로 만든 것처럼, 새로운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집에 돌아온 아마하드가 방 안에서 숙제를 할 때, 바람 소리에 열리는 문틈 사이로 빨래가 바람에 휘날린다. 아마하드는 한참을 빨랫감을 바라본다. 빨래를 너는 엄마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때 또 다시 z축의 공간이 생성된다. 그 공간은 친구의 집을 찾아나서기전처럼 x,y축이 아닌 z축으로 뚫렸으며, 그 뚫림으로 인해 아마하드가 보이지 않거나 가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독후감/창작| 2017.08.22| 4페이지| 2,000원| 조회(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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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다 - 다르덴 형제의 <아들>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다- 다르덴 형제의 을 보고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가끔 친절하지 않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져있는지 단번에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시작은 재빠르다. 에서는 아이를 안고 어떤 집에 방문하자마자 집에서 쫓겨나가고, 에서는 사이가 좋지 않는 수상한 부부를 단번에 만나게 된다. 다짜고짜 시작되는 이 영화의 첫 장면들은 영화 전체의 스토리와 맞닿는 부분이 있는데,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단번에 파악하기는 어렵다.다짜고짜 모든 것을 오픈하는 듯하지만 단번에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드는 다르덴 형제의 스토리텔링 방식과 마찬가지로 역시 알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가 어떤 공간에, 무엇을 바라보는지 우리는 단번에 알 수없다. 그리고 그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서서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알 수 없다. 그가 어디에 서있었는지, 무엇을 바라보는지는 곧 알게 된다. 그는 소년원에 나온 소년들의 훈련소에 서 있었고, 그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민트색 서류다. 올리비에는 서류에 적힌 소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는 ‘왜’는 여전히 알 수 없다.이때 우리는 영화의 제목 을 떠올려본다. 영화만이 아니라 다른 예술작품에서 주는 ‘제목’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그 작품을 표상하는 기표로 작품 전체를 포괄하기까지 한다. 이라는 영화에 진입하게 되면서, 이 알 수 없는 미로 속에 갇힌 순간, 나는 제목 을 떠올린다. 서류를 받아들이고 나서 어쩔 줄 몰라하고 불안해보이는 올리비에는 자신의 아들 서류를 받게 된 것일까. 친절하지 않은 상황 속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서류 속의 소년 프란시스가 등장하고 나서도 그의 불안과 흥분은 계속된다. 프란시스는 그의 아들인 것일까.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과 흥분은 영화 전체를 휘감기 시작한다.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불안과 흥분은 가시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영화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게 만든다. ‘프란시스가 올리비에의 아들인 걸까’라는 심리적인 압박과 올리비에의 불안한 시선처리를 통해 말이다. 우리는 비로소 대사를 통해 올리비에의 불안의 원인을 알게 된다. 전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프란시스가 아들을 죽였고, 그가 올리비에의 훈련소에 온 것이다. 이 순간 영화 제목과 반대되는 (프란시스를 아들일까하고 의심한 나로썬) 반전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이 반전은 영화의 전체를 뒤흔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프란시스를 다른 반에서 자신의 반으로 받아주면서까지 훈련시키는 올리비에처럼 영화는 충격적인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게 영화를 진행한다. 아무런 일도 있지 않았다는 듯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죄자를 용서하고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인간으로서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인류애적인 사랑의 거대한 담론을 영화는 관객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프란시스가 올리비에와 상관없는 사람을 죽였든, 올리비에가 가장 사랑한 사람을 죽였든, 영화는 건조한 시선으로 관조하는 듯이 프란시스와 올리비에 관계를 ‘보여준다.’나는 여기서 내가 계속 사용하는 문장, ‘보여준다’에 주목한다. 영화란 시각예술로 당연히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준다’. 영화와 ‘보여주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방법에 주목하는 이유는 절대 우리의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것들을 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불안과 흥분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영화 안에 멤돈다. 단순히 제목에서 오는 괴리로 인한 압박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히 보여지고 있고 영화라는 시각예술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의 시작과 끝엔 올리비에가 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상황을 파악하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그를 쫓아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으로, 우리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영화는 온전히 올리비에에게 집중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이상하리 만큼 답답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이유를 찾자면 나는 우리가 올리비에의 시선을 보지 못하고, 그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히 영화는 올리비에를 통해 영화 안으로 우리가 진입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가 무언가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시선이 무엇을 향하고 알려주지 않는다. 프란시스가 훈련소에 도착하여 서류를 작성한다. 프란시스가 도착했음을 알게된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의 얼굴을 보고 위해 그가 있는 곳으로 간다. 올리비에는 프란시스를 몰래 훔쳐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문 뒤에서 훔쳐보는 올리비에 모습만 볼 뿐, 프란시스를 볼 수 없다. 창틀에 가려져 서류를 작성하는 프란시스의 손밖에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올리비에를 통해 영화를 진행하지만 우리가 올리비에와 동일시 되게 만들지는 않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올리비에를 바라보게 된다. 그의 얼굴이 아닌 뒷모습으로 보여지는 형태를 본다한들, 그 형태조차 아웃포커싱이 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한들, 우리는 바라보고 있는 올리비에를 ‘본다’. 그리고 집중한다. 우리는 그의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형태에 집중함으로써 그의 얼굴과 표정을 상상하며 ‘본다’.보여주지 않음에도 보여주는 방식.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방식은 의 전작인 에서도 보여진다. 여기서는 로제타의 행동에 집중한다. 집도 없고 캠핑하는 로제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기적으로 할 수 있는 노동이다. 이 때문에 카메라는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끈질기게 그녀의 행동에 집중해 보여준다. 부단히 움직이고 부단히 보여지고 있는 로제타의 행동을 보다보면 나는 그녀의 행동보다 이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로제타가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될지, 일을 하고 있는 그녀의 기분이 어떨지 그녀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표정을 통해 그녀를 보고 싶어진다. 흐릿하게 형태만 알아볼 수 밖에 없는 올리비에의 형상을 통해 그의 얼굴과 표정을 상상하며 보듯이, 에서도 그녀의 행동을 통해 또 다시 나는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며 본다.그러나 에서 올리비에의 시선을 영화가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의 시선을 쫓아가지 않을 뿐,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추후에 우리는 완전히 알기 때문이다. 늦게 나마 우리가 그의 시선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카메라의 움직임 덕분이다. 올리비에가 보고 있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 수 없지만 올리비에 시선이 거두어진 후, 우리는 그가 보았던 것을 뒤늦게 볼 수 있게 카메라가 움직여준다. 올리비에가 프란시스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외면한채 어딘가로 떠날 때, 비로소 카메라는 뒤늦게 올리비에가 바라봤던 시선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제서야 올리비에가 바라 본 프란시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번 더 주목할 것은 카메라의 재빠른 패닝이다.올리비에는 목공 훈련소에서 프란시스를 훈련시킨다. 목공 훈련소의 공간은 그리 넓은 공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에 시선의 흔적을 추적하며 움직이는 카메라의 빠른 패닝 때문에 그들 각자가 점하고 있는 위치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 즉, 물리적인 거리가 멀지 않더라도 카메라의 부단한 움직임 때문에 그 둘 사이의 넓은 거리감을 만드는 것이다. 훈련소를 벗어난 핫도그 가게에서 올리비에가 프란시스를 만났을 때도 카메라는 재빠르게 패닝하여 그들 사이에 있는 거리감을 확장시킨다. 훈련된 감각으로 어떠한 거리도 정확한 cm로 알아차리는 예민한 거리감을 갖고있는 올리비에에게 영화가 선사하는 ‘거리 유지 방법’은 이러한 카메라가 패닝하는 방법이다.그렇다고 올리비에와 프란시스가 하나의 프레임, 같은 바운더리에 있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거부하지는 않지만 같은 프레임이라는 같은 공간에 둘이 갇혀있을 때,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에게 잔인하고 냉정하게 군다. 프란시스의 후견인을 해달라고 부탁을 올리비에는 거절한다. 올리비에가 먼저 빵을 먹자고 제안했을 때도 따라온 프란시스가 자신과 같은 애플파이를 선택한들 냉정하리만큼 계산은 따로 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올리비에의 프레임 안으로, 그의 바운더리 안으로 계속 들어가기를 시도한다. 처음부터 용접보다 목공이 배우고 싶었으며, 자신을 추적하는 올리비에를 마주했을 때 거부감보다 올리비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올리비에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프란시스는 올리비에 인생의 바운더리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좀처럼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선을 거두어야지만 그를 보이게 하며, 그가 자신의 프레임안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조차도 완강히 그를 거부한다.
    독후감/창작| 2017.08.22| 4페이지| 2,000원| 조회(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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