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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DU [과학사의 이해] 고구려의 과학문명과 기술 리포트 평가A+최고예요
    고구려의 과학문명과 기술-U4620170076 양수현①고구려의 시대상황 및 당시 과학기술 배경 설명고구려의 건국당시 시대상황 : 기원전 108년 경 동방사회의 주인이었던 고조선이 이질적 문화를 가진 한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만주와 한반도는 커다란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부여를 비롯해서 옥저와 동예 등 크고 작은 나라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을 뿐, 새로운 구심점이 될 강력한 세력이 등장하지 못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로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언급한 열국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부여국에서 도망쳐 졸본부여에 도착한 추모왕 집단이 작은 나라인 고구려를 건국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건국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만주와 한반도 일대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700년 역사를 이어 가며 대제국 고구려로 발전했다.[네이버 지식백과] 건국 당시 시대상황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초판1쇄 2001., 3쇄 2007., 도서출판 창해)당시 과학기술의 배경 : 삼국시대에 발전한 과학기술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는 크게 천문학, 의학, 수학, 건축, 토목 공예가 있다. 천문학의 발달은 첨성대, 각저총의 별자리 벽화가 대표적이고 수학의 발달로는 토지 측량, 고분, 성곽 축조 등에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주조술, 용접술, 제련술 발달로는 무기, 금관, 범종 등이 있다.②고구려의 과학문명과 기술[1] 천문학고구려의 별자리고분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별자리를 간직한 덕흥리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별자리를 살펴보자. 먼저, 가장 크게 그려진 것이 동벽과 서벽 천장에 자리한 해와 달 그림이다. 천지우주 사이에 해와 달이 가장 빛나고 밝다는 의미와 사실을 담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크게 그려진 것은 다섯 개의 행성을 그린 오행성 그림이다. 행성 관측은 중국의 고대 왕조에서도 이루어졌었지만 덕흥리고분은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동아시아 최초의 유물자료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셋째, 일월오성 다음의 크기로 다수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진 것은 북두칠성으로 그 배치가 상당히 사실적이다. 별의 크기도 실제 겉보기 등급에 비례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 벽화의 별자리가 단순히 미술로서의 그림이 아닌 당시의 천문 관측학적인 측면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북벽의 왼편 천장에 둘둘씩 세 쌍으로 병립한 3?2성 별자리는 삼태육성으로 해석된다. 『진서』 천문지에서 상태는 천자와 여주(女主)를 중태는 제후와 삼공 경대부를, 하태는 사인(士人)과 서인(庶人)의 생육을 주관하는 별자리로 점성되었다. 다섯째, 북벽 천장에서 북두칠성 아래에 ‘지축일신양두’라 적혀진 방제와 함께 머리가 둘이고 하나로 붙어있는 신화 도상이 그려져 있는 바, 그 의미상 당시의 고구려의 천문학에서 북극과 남극이라는 지축 개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으로 해석된다. 여섯째, 남쪽 천장에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푸른 강줄기의 은하수가 인상적인 가운데로 견우와 직녀가 애틋한 이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남벽의 오른쪽 위 천장 부분에는 형태가 국자 모양을 이루는 6개의 별이 희미한 연결선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남두육성으로 중국의 벽화에서는 찾기 어렵고, 고구려식 천문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는 별자리이다. 일곱째, 서쪽과 동쪽 천장에는 월상 위로 세워 그려진 W자형 5성 별자리와 일상 위의 삿갓 모양 5성 별자리가 눈에 띈다. 이는 중국과는 다른 천문도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을 것임을 시사해 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또한 중국식의 28수의 배열과 별자리 모양은 채택하였음에도 그 방위배치는 중국식을 따르지 않은 점은 고구려 고분성수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2] 건축‘고구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문화유산이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비이다. 흥미로운 점을 이들의 재료가 모두 돌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지배층 무덤으로서 전반기를 장식하던 돌무덤과 후반기의 흙무덤, 수백 년에 걸쳐 중국의 대제국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성곽 역시 거의 돌로 만들어졌다. 특히, 신라와 백제에 비하여 고구려에서는 각각의 용도에 따라 자연 상태의혹은 정교하게 잘 다듬어서 사용하기도 했던 만큼, 돌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성곽이나 무덤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자연 지세를 잘 이용하여 토목 기술을 적용한 예가 고분이나 성곽, 건물 배치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산성의 일부 구간에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고 자연 절벽 등을 활용하여 쌓는 경우나, 경사면에 몇 개의 단을 만든 후 건물을 배치하는 등의 지혜는 자연과의 조화와 활용이 절묘하게 연결된 예이다.고구려는 건축·미술에서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는데, 대부분의 유적들이 통구와 평양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궁실(宮室)이나 사찰(寺刹) 등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고분의 구조를 통하여 당시의 귀족 계급의 호화로운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으로는 석총(石塚)과 토총(土塚)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석재(石材)를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린 장군총(將軍塚)은 통구 지방에 남아 있는 고구려 석총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관(棺)을 안치한 큰 석실(石室)을 축조하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덮은 토총 형식의 대표적인 것은 평양 부근의 쌍영총(雙楹塚)이다. 이와 같은 석실(石室)의 구조와 벽화(壁畵)에 의해서 고구려인의 건축술과 미술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곧 쌍영총의 현실(玄室)과 전실(前室) 사이에 세워진 각(角)의 두 석주(石柱)와 투팔천정(鬪八天井), 또 그림으로 나타낸 천정의 장식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엿보게 한다.[3] 의학조선중앙통신은 고구려 시기의 전통 의술에 대한 소개 기사를 소개하며 이 시기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의학기술 성과가 민족의학 발전에 큰 밑천이 됐다고 평가 했다. 고대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의술을 배운 안작득지(鞍作得志)는 침놓는 기술이 뛰어나 그에게서 침을 맞으면 나지 않는 병이 없었다고 통신은 전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뛰어난 약효를 인정받고 있는 인삼역시 고구려가 세계 처음으로 재배, 질병치료에 사용했던 약용식물이었다고 말했다. 1천500년 전에 씌어진 중국의 한 의서에도 고구려 인인삼노래가 기록돼 있다고 전했다. 통신은 당나라 때의 손사막(孫思邈)이 쓴 천금요방(千金要方)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이 만성위염과 위궤양을 치료하기 위해 대황, 더덕뿌리, 생강, 족두리풀, 작약, 꿀 등으로 제조한 알약의 처방이 적혀 있다고 소개했다.700년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부여계의 정통성이 확보되는 문화적 계통을 이어가면서 우리 민족의 저력을 과시했던 찬란한 문명을 계승해왔기 때문에 의학적 지식기반도 당연히 확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에서 ‘군자국(君子國)’이니 ‘불사국(不死國)’이니 지칭하였듯이, 국가의 체계가 정비되고 민생이 안정된 기반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군자국’이라 지칭하였고, 이에 따른 의학에 관한 지식이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형성되었기에 ‘불사국’이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오늘날 전해지는 , , , , 등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약재들이 기재되고 있음도 그러하거니와, 에 기록되고 있는 이나 과 에 기재되어 있는 의 ‘폐옹방’과 ‘정종방’은 오늘날 임상에 적용한다 하더라도 탁효를 볼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신효한 처방들이다. 비록 이들 의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중국문화의 최성기에 해당하는 당나라 왕도(王燾)가 귀한 신분에게 쓰이는 ‘노사(老師)’라는 존칭을 써가면서 에 기록하였다는 것만 봐도 당시의 고구려 의학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겠다. 고구려의 시의(侍醫)나 백제의 약부(藥部), 의박사(醫博士), 채약사(採藥師), 주금사(呪?師) 등의 용어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미 의료제도가 완비되었음을 뜻하니, 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체제가 정비됨과 아울러 당시 의학 수준 또한 국제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고구려 의약과 본초학의 면모는 다소 단편적인 사실에 불과할 뿐이나 분명 독자적인 의약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자생 약초가 해외로 수출되는 등 동아시아 의약 교류에 있어서도 매우 비중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4] 군사기술고구려는 태되었고, 그 이후 영역을 확장하는 곳마다 성을 쌓은 그야말로 ‘성의 나라’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성을 중심으로 지방 통치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입체적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국경에서 도성에 이르는 구간의 경우, 초기에는 국내성 외곽에 동심원 모양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 바깥에 하천 연안로를 따라 종심 방어선을 구축했다. 평양 천도 이후에는 랴오허 강에서 평양성이 이르는 구간에 전연 방어선, 종심 방어 체계, 도성의 외곽 방어선 등을 겹겹이 구축했으며, 남부 방면에도 한반도 중남부로 남진을 도모하며 백제?신라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고구려가 얼마나 물샐틈없는 방어망을 구축했으면, 당나라 관리조차 “고구려는 산에 의지해 성을 잘 쌓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무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 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같은 시대에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르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
    인문/어학| 2017.11.13| 7페이지| 1,000원| 조회(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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