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섬익명의 섬은 제목부터 그러하듯 동질성만을 강조하며 유지해나가는 동족부락의 허점과 음습하고 섬뜩한 간음적 생태를 고발하려고 시도한 듯한 작품으로 보인다. 화자의 남편은 옛 공동체 감성을 들먹이며 요즘 사람들이 얻는 익명성을 비판하는 사람이다. 특히 그 익명성으로 인해 여성의 성이 쉽게 타락해간다고 비난한다. 이런 남편의 생각에 대한 반발심으로 화자가 떠올린 회상이 이제 이 소설의 큰 이야기 줄기가 되는데, 화자의 회상 속 공동체는 그 무엇보다도 익명의 도움을 철저히 받으며 집단을 유지 시키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과거도, 신상도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것이 없는 인물인 ‘깨철’이에게 멋대로 ‘병신’, ‘성불구자’, ‘불쌍한 놈’과 같은 별명들을 부여하면서도 결국 그 익명성에 기대어 깨철이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벌이는 만행을 눈감아 준다.이 마을 남자들이 공동체 내에서 획득한 위치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깨철이를 받아들이듯, 우리는 집단에 속해있는 개인들이 저마다의 이익 때문에 밝혀져야 할 진실들 앞에서 쉽게 방관자가 되어가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또한, 공동체라는 것은 결국 집단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내야만 형성될 수 있다. 공통점을 만들어 뭉치고, 그것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집단이 생기는 것이고, 이러한 원리로 인해 당연히 개인의 욕망과 개성들은 억압된다. 그러나 억압의 문제로 어긋나는 어떤 내부의 어두운 문제들을 투사할 수 있는 집단 밖 존재(그것이 애초에 이방인이었든, 아니면 지속적으로 집단이 만들어내는 낙오자들이든)들을 설정하고 나면, 깔끔하고 총체적인 권력에 흠이 갈 일이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그 권력에 부당함이 있더라도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쉽게 반기를 들 수 없고, 혹여나 저항하는 사람이 발생하면 그 사람은 바로 집단으로부터 낙오한다.공동체가 이렇게 많은 모순적 성질을 지닌 채 결속된 만큼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는 폭력과 억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 각계각층에서 불거진 미투 운동을 시작으로, 검사 집단 내에서 암암리에 수용되었던 후배 폭력으로 희생자가 나온 사건, 그리고 대학가 단톡방 성희롱 사건까지. 우리가 속해있는 집단은 이런 식으로 개인에게 크고 작은 강요와 희생의 덕목을 요구하면서 강력한 위계질서를 유지 시키고, 한낱 개인이 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은 그저 방관자가 되어 자기 합리화를 통해 공동체에 속해있는 것이다.이러한 집단의 민낯은 앞으로 계속 논의되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1980년대 이문열은 익명의 섬이라는 제목과 함께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좋은 소설이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소설이 될 것 같다. ‘험한 꼴로 하숙집 들어가기 전에 곱게 벗어’ 와 같은 구린 대사의 나열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작가는 여성 화자의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 시키면서도, 구석구석 자연스럽게 베여있는 남성 작가의 시선을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읽는 내내 작가의 의도가 작중 인물에 과도하게 투영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갓 20대 초반의 초임 선생님인 화자는 낯선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부랑자 행색의 깨철이가 보내는 음흉한 눈빛을 받지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묘한 감정에 압도되어 마치 그 눈빛에 합당한 강렬함이 자신에게 직접 가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는 화자를 모두 이런 식으로 그린다. 내밀한 성의 욕구를 감추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풀어지길 바라는 인물처럼 말이다. 실제로 깨철이가 화자의 품에 억지로 달려들었던 일은 분명 강간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애인과의 충족되지 않은 관계를 통해 억압된 욕망이 해소될 수 있었던 상황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또한, 그 강간을 통해 화자가 내린 결론은 어처구니없게도 깨철이가 온 마을 아낙네들의 숨은 애인이자 욕구의 해결사였다는 것이다. 마을 남자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런 깨철이의 일들을 모르는 척하는데, 이런 설정들 마저 이야기 속에 그려지는 강간을 그저 한낱 불륜 정도의 가벼움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이 분위기대로라면 이 공동체가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 고작 마을 여자들의 간음이라는 것인가. 차라리 깨철이가 정말 마을 여자들과 여러 다리 걸치며 진한 불륜 관계로 그려지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이런 저급한 설정들 때문에 작가가 지금 평소 생각해 온 판타지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불쾌했다.
GM의 대우 매각협상사례: 자동차 산업은 막대한 자본과 노동력을 갖고 있지만, 거대한 공장을 가동해야 하므로 세계 자동차 시장의 변화와 같은 외부적 상황에 민감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금융위기로 인한 국내 기업 부채 및 적자가 증가 되면서 GM과 대우의 매각 협상이 시작된다.GM인수의향서 제출국제 입찰로 매각 방식 전환5개사 입찰, 포드 선정포드 인수포기 선언대우 자동차 부도 및 법정관리GM 인수제안서 제출GM- 채권단 양해각서 체결GM- 채권단 본 계약 체결포드의 인수선언 포기 GM은 포드가 대우 인수를 포기하고 난 후, 포드사 가 수집했던 대우관련 정보는 유출이 되어 매각 협상 곳곳에 구멍이 생긴 대우와의 매각협상에서 손쉽게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GM의 협상 전략지연 협상 전략: 경쟁사들과의 인수합병을 통해 협상 노하우를 꾸준히 쌓아온 GM은 상대를 철저히 분석하여 가능한한 오랫동안 협상을 끌고 가는 협상 지연전술을 펼친다. 2000년 10월 포드의 대우인수포기선언 이후 GM은 2001년 5월까지 별다른 협상의사를 보이지 않았다.선별적 매입전략: 한국측은 대우자동차의 모든 지분, 자산, 부채, 영업권, 등을 일괄 매각하기를 희망했으나, 상대를 잘 파악하고있던 GM은 대우자동차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문제가 없는 좋은 자산만을 선별적으로 매입하기를 원했다.헐값 매입전략: GM- 대우 협상에서 대우자동차는 한 때 70억까지 논의 되었지만 결국 4억 수준에 매각 되었다.한국이 이 같은 지원 전략에 대처하지 못한 이유협상 대안의 부재 협상 기간 중 한국정부의 고위관리와 채권단은 “ 대우는 꼭 GM에서 매각되어야 한다.” 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였을만큼 한가지 상황만 생각하고 그 이외에 협상 대안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여 GM의 전략에 말려 들게 되었다. 금융 중심의 한국 협상 팀 대우 자동차는 세계 자동차산업의 구도나 대우자동차 자체의 전략적 가치는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채권은행, 금융 감독원, 재정 경재 부 등에 의해 주도 되어, 대우 자동차를 하루라도 빨다. 두 사람의 동업자와 함께 작은 회사를 설립하고 양 고추냉이를 재배 판매하다가 사업이 실패하게 되고, 하인즈는 1876년에 기업을 재조직하여 최대 피클, 식초, 케첩 생산업체로 부상했다.협상 타결 전략철저한 사전조사 82세의 버핏은 하인즈를 잠재적인 인수 대상자로 마음에 둔 순간부터, 수년 동안 하인즈를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과거의 하인즈회사의 관한 자료부터 현재의 자료 까지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하인즈와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여러 내부이야기를 꾸준히 들어왔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탐색은 협상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다.확실해지기 전까지 철저한 기밀유지 버핏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있음에도 하인즈 회사에 관심 있는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하인즈 회사를 방문하지도 않았다. 인수합병의 경우 예상치 못한 외생변수로 인해 협상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 힘들어질 수 있으므로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전략이 중요하다.거부할 수 없는 제안 수년 동안 취득한 여러가지 정보에 근거해 상대방의 현재상황을 정확히 분석하여 상대방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고, 더 높은 조건을 제안하는 자를 찾을 시에는 우리가 제안하는 좋은 조건을 다 날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을 주어 상대방이 다른 회사를 찾는 걸 포기하게끔 유도한다.LG와 IBM의 전략적 협상사례: LG와 IBM은 신기술 등의 개발 부담, 초기시장 시장진입 우위 확보, 세계시장 선점 위한 기술 표준 등 전력적 제휴 협상의 중요성이 대두 되었다. 전략적 제휴란, 기업간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하여 다른 기업에 대하여 경쟁적 우위를 확보하는 경영전략을 말한다.정보화와 컴퓨터 산업의 저조+ 막대한 투자비용 = 매우 큰 Risk30%15%8%삼성전자대우전자LG1980년대 APPLE, 컴팩 등에 밀림100% 해외직접투자 고집 - PC산업 경쟁력 확보 필요연 50% 고도성장을 하는 한국 PC시장IBM의 컴퓨터 컴퓨터 베이스 기술과 노트북 PC에서 앞선 기술력LG의 전자의 데스크탑 PC기술과 한국시는 역할을 하므로 LG와의 협상 시 정부를 또 다른 협상당사자로 고려함IBM은 LG와의 체제 비교를 철저히 배제함. 협력을 하기 위한 협상이기 때문에 당사자들간에 감정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고 판단LG와의 협상 전략과 마찬가지로 문화차이를 인정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협상할 수 있는 양보전략을 펼침협상 결과 IBM과 LG전자간에 타결된 협상 결과 IBM은 노트북 PC와 서버를 공급하고, LG는 데스크탑 PC를 공급하기로 하였다. 협상 초기에 서로의 요구사항들이 다른 부분도 많았지만 양보전략으로 비교적 원만하게 협상 협상을 통해 서로의 강점을 부각시키고, 약점을 보완하며 8년간 높은 성과를 냄협상-IBM은 LG를 통한 유통구조망을 적절히 활용하게 되었다 -인터넷의 확대와 함께 변화하는 개인 소비자에 대한 인식 측면에서 어필 성공 -한국에서 브랜드 이미지 상승 효과GM과 폴란드(FSO사)와의 협상제 2 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를 위한 자동차를 생성하기 위하여 폴란드 정부에 의해 1951년에 창립 . 폴란드 정부는 fiat와 제조 인가 협정을 서명. 구조 조정 후 폴란드 정부는 fso사의 민영화 추진. 첫 번째 제대로 하게 된 합작은 1994년에 Żerań 에 있는 Opel Astra를 조립하기 위해 제네럴 모터스를 가진 계약으로 시작. 폴란드 자동차 업체인 FSO사 인수.vsGM은 폴란드에 진출하기 위해 5년 동안 폴란드의 국영 자동차회사(FSO)와 협상을 벌여옴. GM이 대우자동차와의 협상할 당시에 지연 협상 전략을 써먹었듯이 FSO사 와도 지연 협상전략 (파비우스 전략)을 함으로써 협상기간이 길어지게 되면서 폴란드의 국영 자동차 공장은 점차 피폐해져 가게 되었음, 폴란드 사람들은 이 협상을 일명 'FSO의 자살게임' 이라고 불리워짐.과잉시설, 인력문제 해결을 위해 바르 샤바의 FSO 공장에서 근무 하 는 2만 1000명 중의 상당수를 해고 하겠다. GM과의 인수 시 인력의 30%만 흡수 하고 FSO사가 생산 할 수 있는 최대 규모는 5만대이다.Gm측 입장바르샤투자 20만대의 생산 능력을 갖추도록 하겠다. 고용보장의 대가로 한국에서 수입해 판매 하 는 대우 차에 대하여 관세(25%) 를 면제 해 달라.대우측 입장우리로서는 고용에 대한 안정이 가장 우선 사 항이다. 2만 1000명의 직원 모두를 고용해 달 라. 앞으로의 추가 투자에 대해서도 약속해 달라.FSO사측 입장GM과 폴란드(FSO)사와의 협상과정vsGM은 FSO사의 고용 인력의 상당수를 해고하겠다는 것을 인수 협상의 최대 조건으로 내세움, 폴란드 정부로 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협상 조건. GM 측에서도 FSO사 인수 시 2만 명이나 되는 인력을 떠안아야 한다는 점이 상당한 부담 감으로 작용함. 세계 자동차 업계의 GM을 무너뜨리고 대우의 폴란드 입성을 확정 짓게 됨.연간 10만 대로 생산 규모를 늘리고 고용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독일의 오펠의 생산 설비 일부도 FSO로 이전 하겠다. 폴란드 정부는 FSO를 인수할 것이니 대우가 방해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Gm측 입장5년이란 긴 시간 동안 GM에 끌려 다녔던 우리로서는 더 이상의 협상이 불가피 할 것 이다.FSO사측 입장대우와 FSO사와의 협상이 확정소식을 접한 GM과 FSO사와의 재협상협상전략과 성공요인협상전략성공요인윈윈전략- 윈윈 협상 게임으로 대우는 폴란드가 요구하는 고용보장 카드를 던져놓고 은근슬쩍 다른 곳에서 무관세 수출 이라는 실익을 챙김. 대우가 폴란드 정부와 의 합작에 성공. 협상우선순위파악- 대우는 해고 없이 생산성을 향상, 생산을 늘려 유휴 인력을 활용하는 고용 조건을 내건 대우와 손을 잡고 1996년 3월 대우 - FSO을 정식 출범. 시간은 적- M A 추진이 발표 되어 임시 계약을 맺는 시점과 본 계약 체결의 시차가 짧아야 함.상대의 숨겨진 협상동기에 초점 -대우는 폴란드 정부의 고심을 파악하고 해고 없이 생산성의 향상과 생산을 늘려 유휴인력을 활용하는 조건을 내세워 협상에 성공. 협상 과정에서 우연성 유지 -대우는 해고 없이 생산성 향상과 생산을 늘려 유휴 인력 활용의 유연성과 이러접촉 중이다. E사와 B사는 여러가지 논의를 진행한 끝에, E사에서 자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표준 영문 라이선스 계약서 초안을 B사에게 보내왔고, B사는 그 라이센스 계약서 초안을 들고 필자를 찾아왔다.협상 결과필자는 IGM에서 배운 다양한 협상기법을 활용하여 당초 E사에서 보내 온 라이선스 계약서 초안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변경하는데 성공했다. (1) 계약지역 -당초 한국으로 제한 → 2년 실적을 기준으로 해서 대만시장에 대한 우선권 보장 (2) 로열티 지급 스케쥴 -당초 매 3개월마다 정산해서 지급 → 매 6개월마다 정산해서 지급 (3) Sub-License 문제 -당초 아무 규정 없음 → 몇 개 품목(티셔츠,바지)에 한해서 국내에서 사전 동의를 얻은 후 Sub-License 부여할 수 있도록 함. (4) 계약기간 - 당초 2년 계약을 기본으로 하고 협의 연장 → 초기 4년 계약을 기본으로 하고 협의 연장 (5) 로열티 Rate - 당초 매출액의 10% → 매출액의 8%2. Win-Win 협상을 위한 Issue-Making(1)계약기간 당초 계약서 초안에는 계약시간이 최초 2년으로 되어 있고, 그 후에는 협의 후 연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필자가 B사 사장에게 물어본 결과, 최소 4년은 보장이 되어야 브랜드를 런칭 하고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했다. (2)계약지역(territory) 라이센스 계약에서 또 중요한 사항은 어느 지역범위에서 라이센스를 받느냐 하는 점이다. 당초 계약서 초안에는 당연히 “한국 내”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B사가 인근 나라 중 다른 곳에서도 K브랜드를 도입할 수 있는지 물어본 바, 대만에는 지사가 있고, 충분히 도전해 볼만하다고 했다. (3) 로열티 지급 스케쥴 B사 사장은 로열티 rate에 대해서만 신경을 쓸 뿐, 로열티 지급 스케쥴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E사가 보내 온 계약서 초안에는 “3개월마다 매출액을 정산한 후 로열티를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사업을 운영하다 보면 현금흐름(cash-flow)이 상how}
학번: 20157471이름: 황인선개인에게 들이 닥친 가난은 이제 단순히 못 먹고 못 입는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빈곤은 과거의 빈곤 개념보다 훨씬 복잡하고 구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실업과 소득 불평등에 의해 파생되는 빈곤문제들은 가계부채를 범람하게 만들고 다시 이러한 현상이 소비를 위축시키게끔 야기하고, 이는 다시 기업에게 영향을 미쳐서 기업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자본을 축소하고 본인들의 이익만을 위해 사용하고 투자한다. 결국 사회 전반에 불평등이 양산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먼저 분노의 숫자 5장에서는 가계부채와 관련된 문제들이 심도 있게 다루어진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는 장기적인 침체에도 불구하고 가계부채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2017년 1분기 기준,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1,359조 원으로 GDP의 90% 이상을 기록하고 있고 이는 금융위기 이전인 2007년말 699조 원 대비 2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의 GDP대비 가계부채비율에서 북유럽국가들과 함께 60%이상의 상위그룹으로 분류된다. 물론 경기침체 시에 가계부채는 단기적으로 경기부양 효과가 있기 때문에 경기변동 폭을 줄여주는 완충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가계부채 증가세가 장기화 될 경우 부동산 버블 평성, 가계 파산, 저축률 하락에 따른 잠재 성장률 저하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심각한 문제로 여겨질 수 있다. 늘어나는 가계 부채의 비율과 반대로 우리나라의 고용률은 계속 60%대에 정체 되어 있으며 실업률 역시 2010년부터 2016년때까지 평균 3.4%대에서 머물러 있다. 이렇게 경제성장을 나타나내는 주요 국가지표들은 모두 멈춰있는 가운데 OECD국가 중 가계부채 비율만 높은 편에 해당하는 것은 상당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더군다나 안정성이 전혀 보장되어있지 않는 불법 사금융 이용자들도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어 금융서비스의 질도 심각하게 하락해왔다. 한국대부금융협회의 2015년 조사에 의하면, 대부금융 이용자의 43%는 제도권 금융기관에서 대출 상담조차 받지 않았고, 그 이유로는 대출 심사기간이 길고 심사기준이 까다롭거나 대출 거절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조사되었다. 결국 대부금융 이용자들은 안전한 금융권의 대출 문턱을 넘기 힘들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사금융과 불법금융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다. 특히 지하철이나 통행이 많은 거리에 싼 이자와 신속간편 대출을 강조하는 일수광고들을 자주 보게되는데, 이런 무분별한 불법 광고를 처벌한말한 제대로된 규제사항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또한 불법사금융의 피해는 꾸준히 늘어나고 규모도 커지고 있는 반면에 검거와 처벌은 미흡한 것도 문제이다. 2014년 불법사금융 검거건수는 1,259건이었고, 이는 2012년 특별 단속 기간 5,987건에 비해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며 불법사금융 검거의 의지가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실제 검거가 이루어져도 대부분 벌금형과 집행유예로 처벌수위가 상당히 낮은편이다.더 이상 생계를 위해 급하게 돈을 구하는 대부서비스 이용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서는 안된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다중 채무를 유도하는 불법 사금융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처벌부터 강화해야 하며, 부당이득을 몰수하는 실제적 제재가 가능토록 해야 한다. 또한 적극적 불법광고 차단 규제가 필요하며, 피해사례를 통해 불법 사금융 이용근절을 위한 효과적인 홍보도 함께 하며 질 높은 금융서비스를 만들어 갈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6장에서는 5장에서 다뤄진 문제들이 긴밀히 연결된 채, 조금도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고 한 쪽의 이익만 막대하게 커져가는 파이 모형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경제불황 이후 한국의 많은 대기업들은 다시 자리를 잡고 2016년 국세청 조사 기준으로 3%대 소득증가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가계소득 증가율은 전년대비 1.0%가 준 0.6%에 그쳐 근 7년새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가계 소득과 기업 소득 증가율이 5배 이상 벌어진 것이다.불평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발전의 ‘낙수효과’를 이야기한다. 이는 대기업과 부유층들에게 더 많은 돈을 몰아주면 투자가 확대되고 경기가 부양되며, 성장이 가속화되어 전체적인 부의 크기가 커지게 되고, 그 혜택이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에게 확산되어 불평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소멸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하다. 기업의 수익이 증가하면 노동자의 임금 수준도 높아져야 하는데, 가계 저축률은 추락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근로자를 쉽게 해고하고 임금을 억제하는 등의 노동비용 절감을 통해 경영 이익을 창출해 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업 소득은 계속해서 흑자를 기록하지만 일반 국민의 경제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불황형 흑자가 지속되는 것이다.이러한 기업 중심적 경제는 자영업에서도 어두운 현실로 나타난다. 실질적으로 자영업의 소득률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고, 한국신용정보는 2016년 말 자영업자 대출 총액이 520조원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소득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기업과 고용시장에서 밀려난 실직자나 은퇴자 등이 사업자금을 대출받아 자영업에 뛰어든다. 노동자들의 가구소득 증가율은 하락했는데, 자영업자 수는 2017년 2월 기준 552만 1천명으로 지난해 2월보다 21만 3천명 증가했다.이러한 생계형 창업의 소득은 중소기업청 조사에 따르면 월 평균 187만원에 그쳤고, 100만원 미만인 경우도 17.8%에 달하였다. 2015년에는 안산 gs25 편의점주가 4인 가구 최저생계비 수준의 166만 가량의 낮은 소득으로 생활고를 겪다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자영업을 고려할 때 조금이라도 안정성이 있을까 싶어 프랜차이즈 가맹 창업을 시작하지만, 한 달 총 매출액의 35%를 본사가 수수료로 가져가고, 가맹점주에게 특정 물품 구입을 강요하는 등 불합리적 제도 때문에 비극을 맞는 창업자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새로 문을 연 프랜차이즈 점포는 4만 1699개였지만, 그 중 문 닫은 점포만 2만 4059개에 이른다.또한 자영업과 임금노동자 사이에서 어떤 노동형태로도 규정 받지 못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들의 현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임금노동자와 유사한 노동력을 종속된 곳에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인적, 경제적, 조직적 종속성이 없다는 이유로 형식적으로는 자영업자가 되어 근로계약이 아닌 구두계약이나 제 3자에 의한 위탁 계약을 체결하며, 어떠한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굴삭기 운전사, 퀵서비스기사, 대리 운전사, 간병인, 학습지 교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사회보험 가입률이 평균 5.6%에 그쳐 임금근로자들의 평균 사회보험 가입률 68%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이렇게 현재 한국 자영업자들은 사업장을 가지고 있는 부류든, 가짜 자영업에 속하는 부류든 모두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갑을 제외한 을과 병이 생존경쟁을 벌이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된다. 세금 혜택이나 수수료 감면 등의 제도들은 다 기업을 향해 조준되고 있고, 기업은 가맹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의 책임에서 자유롭다. 모든 책임과 의무가 자영업자들에게만 부과되고 있는 상황에서 하루 빨리 자영업자들을 보호 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구축 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의 그늘, 농민공1.서론도시화 과정에서 가족 단위로 이동을 하거나, 가족의 일부만이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들은 어느 나라에서든 관찰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중국 국가 통계국에서 발표한 집계로, 약 2억 8000만 명에 달하는 농민공은 독특하면서도 엄격한 호구제도와 급성장한 중국의 경제가 맞물려서 발생한 중국만의 특이한 계급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 중국은 엄청난 발전을 일구어냈다. 그러나 거침없이 고도성장을 일궈낸 중국 역사 한 편에는 빛을 받지 못한 가난한 중국인, 농민공들의 피와 땀이 고여있다.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고, 늘 도시의 삶에서 끝나지 않을 대립과 함께 중국 경제에 무한한 희생을 선사했던 농민공은 현재까지도 고된 삶을 간신히 버티며 남아있다. 1세대 농민공들이 자신들을 둘러 싼 차별들 속에서 꿋꿋이 버텨오며, 도시에서 아이를 낳아 길러낸 자녀들은 지금 2세대 농민공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농민공들은 중국 역사와 현재를 이루는 중요한 계층이므로 중국 문화 매체 속에서도 늘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번 보고서는 농민공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미디어 속에 구현되고 있는 농민공들의 애환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2. 중국의 농민공중국은 1958년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자유로운 인구이동의 제도를 전면 개편했다. 바로 호구제도의 도입이었다. 이 제도는 중국인을 농촌 호구와 비 농촌 호구로 뚜렷이 양분하였다. 중국정부는 도시인구를 조절하고, 관리하기 위해 농촌 호구로 규정받은 사람들의 도시 이전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교육, 의료, 주택, 직장 등 국가가 지원하고 관리하는 모든 것들은 다 호구에 따라 분배되었다. 그러다 중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개혁과 개방을 시작한다. 이러한 개혁은 중국이 엄청난 속도의 큰 경제 변화를 경험하게 만들었다. 그 이전까지 중국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1차 산업이 개혁 이후 생산, 고용측면에서 하락세를 보이게 된다. 반면 2차 및 3차 산업이 더 활발한 추세를 띄게 되고, 외국 자본과 기술에 도입으로 중국 경제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이렇게 1차 산업이 주춤하게 되자, 농업 부분에서는 노동력의 잉여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력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1983년부터 사업에 종사 할 수 있거나, 상업 경영을 하거나, 서비스업 종사를 하며 스스로 식량자급이 가능한 농민들은 도시로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농촌에서 농민의 호적을 가지고 도시로 이주하여 근로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농민공으로 불려진다.하지만 오랜 기간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던 농업인이 도시에서 비 농업인으로서 적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호구제도를 통해서 도시와 농촌은 완전히 다른 수준의 대우와 권리를 받았기 때문에, 농업인은 도시가 요구하는 개인적 능력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게 된다. 선명히 남아 있는 호구제도는 농민공들을 도시의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고, 농민공들은 도시에서 새로운 사회보장혜택을 받을 수 있는 권리 역시 제약 받았고, 지위도 낮은 위치로 인식되어 천대 받기 일쑤였다.임시거주 증을 가지고 있어야했던 농민공들은 영원한 도시의 이방인으로서 어디에 정착하지 못하고 외로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가족의 이산화도 많이 발생했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도시로 내몰려온 농민공들의 지위가 도시호구로 인정받지 못하여 혜택 면에서 많은 차별을 당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는 처음에는 농민공 가족과 함께 도시로 이동하였다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야 할 시기가 오면 높은 학비와 제도적 차별이라는 현실적 벽에 부딪쳐 다시 농민공이 아닌 보호자와 함께 본인의 호구지인 농촌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농민공들은 무수히 많은 가족 분리의 경험을 겪게 된다.3. 미디어 속의 외로운 농민공들이런 농민공들의 고충은 중국을 배경으로 한 많은 소설 속에서도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농민공들의 모습은 한결같다.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하지만 늘 외롭다. 가족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고자 도시로 뛰어들지만 정작 가족의 형태는 불완전하며 해체하기 일쑤다. 그 와중에 악덕 사업주들은 양심 없이 농민공들의 노동을 빨아먹기 바쁘다. 중국이 번영할수록 농민공은 혼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쉽다.문학적 가치로 따질 때, 많은 논란이 있는 소설이지만, 그래도 중국의 광범위한 문화와 생활의 모습을 속속들이 다루 고 있는 것은 분명한 조정래 작가의 정글만리에서도 농민공이 처한 메마른 상황들을 엿볼 수 있다. 정글만리에서는 중국에 정착해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 가는 한국인 전대광을 중심으로 그가 겪는 중국의 경제 시스템과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중국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중 농민공, 물거품하나 라는 에피소드에선 전대광의 집에서 파출부로 일하고 있던 쑹칭과 농민공인 쑹칭의 남편 장완싱의 안타까운 사연이 그려진다. 평생을 농민으로 살다가 더 나은 살림을 위해 도시로 온 장완싱은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치게 된다. 평생을 절름발로 살아야 하며, 다친 몸으로는 예전처럼 노동일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농민공이란 개혁 개방 이후 가난한 농촌에서 벗어나 돈벌이를 하려고 도시로 몰려든 부랑 노동 자들이었다. 그들은 전 세계가 놀라는 중국의 비약적이고 눈부신 경제발전의 맨 밑바닥에서 온 갖 궂은일들을 다 해낸 계층이었고, 그러면서도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어 림잡아 2억 5천만으로 셈해졌다. 부랑 노동자 많기로도 단연 세계 1위였다.그러나 장완싱의 회사는 그의 사고를 모른 척 했다. 다쳐 병원에 누워있는 그들의 직원을 방문하지도 않고, 치료비는 달랑 5일 치만 계산하고 갔다. 덕분에 장안싱은 두 달 걸쳐 받아야 할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5일 만에 퇴원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그 어느 누구도 절름발이가 되어버린 장완싱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농민공들은 사고를 당해도 회사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을 받는게 어려운 현실이었다.쑹칭은 회사에는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았다. 농민공들이 사고를 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었 다. 그런데 속 시원하게 보상받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대신 남편이 저런 몸으로 나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찾아내려고 정신을 모아 생각나는 직업들을 찬찬히 꼽아나갔 다. 그러나 마땅히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한 몸으로도 새벽 인력시장에서 일기를 서로 다투다가 빈손으로 돌아서기도 하는 세상이었다.장완싱은 분에 차,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회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가 결판을 내기 위해 두 번째 방문을 했을 때, 회사 측에서는 오히려 악덕한 사람들을 보내어 장완싱을 납치하고 협박을 하게 했다. 농민공의 인권은 존중하지 않은 채, 모욕적인 말을 쏟아내며 한 노동인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시켰다. 장완싱은 가해자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빌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커다란 도시에서 자신이 일구어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참혹한 현실을 통감하고, 한낱 농민공으로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인지한 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다음 날 신문에도 방송에도 그 분신자살 소식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호화롭고 번잡한 도시 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할 뿐이었다. 한 농민공의 죽음은 망망대해에서 일었다가 사 그라진 하나의 물거품이었는지도 모른다.정글만리 속 장완싱처럼 중국의 농민공들은 경제개혁으로 농업에서 입지가 작아지자 가난을 피하기 위해 부푼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도시 호구를 갖지 못한 농민공들은 커다란 도시에서 이방인이란 이름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장완싱과 쑹칭은 농민공으로서 자신의 주제를 항상 검열하듯 생각해야했고, 농민공이라는 이유로 턱없이 모자란 임금도 만족스럽게 받아야했다.도시 호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적당한 집을 얻기도 힘들었다. 비슷한 처지인 다른 농민공들과 함께 좁은 공간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같이 살아야했다. 정글 만리 속 농민공들이 사는 집은 도저히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을 갖춘 공간으로 그려졌다. 도시 변두리에 허름한 아파트를 몇 채 씩 가지고 있는 부동산 부자들은 농민공의 생활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다. 더 많은 농민공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좁은 공간을 쪼개고 쪼개었다. 도시에 나가 차가운 삶의 터전에서 이제는 생존을 목적으로 죽을힘을 다해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곳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좁은 공간에서 농민공들끼리의 갈등까지 견뎌 내야했다.또한, 도시 호구라는 것은 같은 중국인임에도 한 쪽을 비참하게 만드는 차별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장완싱처럼 건축 현장이나 공장에서 산업재해를 당해도 도시 병원에서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5대 사회 보장 보험의 혜택에서 농민공들은 배제 되어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민공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다. 의료 보험 혜택도 주어지지 않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 그들은 항상 위험에 처할 일들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에서 농업만 했던 농민공들에게는 일자리를 얻는 것조차 각박하다. 중국의 전체 농민공 중 제조업과 건축업 종사자들은 절반 이상을 꾸준히 차지하고 있고, 이외에 직종에 종사하는 농민공들도 육체노동을 요하는 단순 직능에 분류된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지나도 변화지 않는다. 그들은 직업전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며 경제적으로 지위가 상승 할 기회도 거의 없다. 이는 제 1세대 농민공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2세대 농민공들에게도 유사하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사회 고립의 되물림 현상이 농민공들을 계속해서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늘 가장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도시사람들에겐 인정받지 못하는 경력을 쌓으며 늘 제자리에 있게 되었다.
대모산 일대답사 보고서4월 29일 ‘대모 산에서 느끼는 조선시대 왕의 숨결’을 주제로 한 대모산 일대 답사의 일정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우선, 수서역 1번 출구를 출발점으로, 5분쯤을 걸어가면 길 옆쪽에 필경재라는 한옥 입구를 볼 수 있다. 필경재는 조선조 제 9대 성종 때 건립된 500년 역사를 간직한 전통가옥이다. 세종대왕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증손인 정안부공 이천수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대를 걸쳐오면서 많은 부분들이 유실되었지만, 보존돼 온 나머지 부분들을 지켜오며 복원에 힘써 현재에 모습에 다다랐다. 봄기운을 받아 더 선명하고 짙은 색의 나무들이 우거진 가운데, 저 멀리 고풍스러운 고택이 보였다. 현재 필경재는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 자세히 내부를 관찰 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기회가 되면 다시 방문하여 우리 역사의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에서 멋진 식사를 하기로 다짐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필경재에서 좀 더 걸어가자 광평대군 묘역의 입구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 곳은 현존하는 왕손의 묘역 중 오랜 세월 원형 보존되어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나라에서 가장 도시화된 공간에 이토록 전통적이고 거대한 묘역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늘 다녔던 서울곳곳에 이렇게 역사를 품고 있는 공간들이 잘 보존되어있다고 생각하니 여태 모르고 지나쳤던 무지함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며, 이번 답사를 통해 방문하게 된 것이 무척 소중한 기회로 여겨졌다.광평대군묘역에 들어서니 입구를 지키고 묘역을 든든하게 감싸고 있는 소나무들의 장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소나무는 장수, 용기,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견고한 자세를 상징하기 때문에 왕릉과 묘 주변에 늘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소나무가 어우러진 멋진 광경을 널리 한번 훑어보고 장엄한 왕릉을 마주하기 위해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먼저 광평대군을 모시는 재실:숭모재가 깔끔한 모습으로 지키고 서있었다. 보통 제사는 묘소 앞에서 지내는 것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신성한 영역에 직접 광평대군의 묘역을 중심으로 각 묘소의 위치와 거리를 기록한 것이다. 아쉽게도 많이 오래됐기 때문에 비석에 무늬가 흘러내려 아래 부분의 글씨만 조금 보이는 정도였다.사당과 도청을 지나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바로 광평대군의 묘를 찾을 수 있다. 먼저 광평대군 묘역에 서서 푸른 전경속에 어우러져있는 사당과 도청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내려다 보았다. 굉장히 안정감있는 구도로, 무척 아름다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광평대군 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광평대군 묘는 부인 평산 신씨의 무덤과 쌍분형식으로 되어 있다.그리고 본격적으로 광평대군 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광평대군 묘는 부인 평산 신씨의 무덤과 쌍분형식으로 되어 있다./ 광평대군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로 경서와 시서에 통달하고 음율과 산수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세종 26년 젊은 나이에 별세하였다. 보통 쌍분묘는 봉분을 향하여 위치했을 때 왼쪽이 남자인데, 이 곳은 오른쪽이 대군의 묘이다. 이는 풍수지리에 따라 오른쪽이 더 좋다고 하여 좌우를 바꾸어 매장하였다고 한다. 묘 좌우에는 능을 수호하는 임무로 세워진 문인석이 한 쌍 세워져 있다. 무덤 앞에 세워져있는 비석이라 정승처럼 약간은 무서운 이미지를 상상했었는데, 실제로 보니 둥글둥글하게 조각되어 있어 무서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작지만 듬직한 모습에 전체적으로 충성의 분위기가 강했다. 또한 왕이 살아있을 때처럼 왕을 보호하고 왕에게 경배하는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는 왕의 권위를 그대로 살려주는 장식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화강암으로 제작되었고, 부분적으로 약간 마모된 부분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굉장히 양호한 상태였고, 옷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잘 표현했다.묘 바로 앞에는 장명등이 설치되어있었다. 장명등 역시 문인석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기운을 쫓아 무덤을 보호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공민왕 현릉앞에 놓여진 이후 왕릉에는 반드시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서는 일품 이상의 재상의 묘역에만 세울 수 있었으므로 광평대군의 신분을 그대로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워져 있다. 신도비는 광평대군의 신도비와 좀 다른 모양을 가지고있었는데, 받침돌은 광평대군의 신도비와 비슷하게 방형 대석이지만, 머리돌이 지붕형식으로 올려져 있었다.무안대군은 안타깝게도 제사를 지낼 후손이 없었는데, 세종대왕께서 이를 안타까이 여기시고 양평대군에게 봉사손의 책임을 명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있으니, 떠나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소중히 여기시는 세종대왕의 배려가 깊이 전해져 무안대군의 묘역에 서있는 순간 좀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그 다음에 본 것은 영순군 묘소였다. 영순군은 광평대군의 아들이다. 안타깝게도 영순군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여의었다. 묘소 형식은 광평대군의 묘소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나, 무덤 뒤쪽으로 벽이 세워져 있어, 공을 많이 들인 느낌이다. 뒤에 거창하게 우거진 나무들 앞으로 벽이 세워지고 그 앞에 무덤이 있으니 안정감이 느껴졌다.광평대군 묘역엔 광평대군, 무안대군, 영순군 묘소 말고도 종문 700여기의 묘소가 있다. 하지만 무척이나 광활한 곳이라 다 둘러볼 순 없었고, 다음 답사 장소를 위해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광평대군 묘역에 대해 좀 더 조사를 해보니, 도시화에 따른 도시 인구의 증가로 과밀화, 녹지 면적이 축소가 되면서 도시의 기온이 상승하는 등 많은 환경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광평대군 묘가 도시 내 기온을 저감 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연구를 보았다. 도심 한복판에 이토록 거대한 우리의 역사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디 앞으로도 잘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이렇게 소중하고 성스러운 공간에 들어서 눈으로 마음껏 아름다운 경관들을 담아낼 기회를 가지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다음 답사 장소는 대모산이었다. 본격적인 산행을 앞두고 잠시 들러 점심을 먹은 곳이 있었는데, 바로 대모산에있는 불국사이다. 흔히들 불국사하면 경주에 있는 불국사를 먼저 떠올릴텐데, 서울 대모산에도 불국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있었다. 대모산 불국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 말, 절 아랫마을에 살던 농부가 밭 일을걱정을 많이 했는데, 산 특성상 돌이 없는 편이고 흙이 많고, 경사가 심한 곳은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어 안전하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서 보는 서울의 도심은 안개때문이었는지 미세먼지때문이었는지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서울 전경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어 좋았다.대모산 정상을 오르고 이동한 곳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그리고 순조와 순원숙황후가 조선의 역사를 품고 잠들어 있는 곳인 헌인릉이었다.우선 왕릉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홍살문을 거쳐야 하는 구조로 되어있었는데, 홍살문 너머로 보이는 왕릉 전경이 멋었었다.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이라 한다. 실제로 문짝이 달려있는 형태는 아니여서 비교적 간소하게 보이지만 홍살문 안쪽으로 넓게 깔린 돌길이 왕릉을 안내해주고 있어 장엄한 분위기를 전해주었다. 홍살문을 지나치면 바로 정자각이 나온다. 정자각은 제사를 모시는 건물로 정청과 배위청으로 나누어지며 두 공간이 합쳐진 모양이 정(丁)자 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불린다.정자각 오른편에는 직접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다. 계단은 두개로 나위어져 있는데, 계단의 오른쪽은 왕의 영혼이 거니는 계단이라고 한다. 왕의 흔적이 어렴풋하게 남아있을 그 계단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올랐다. 가까이서 본 정자각은 고상하면서도 화려한 색으로 아름답게 단청되어있는 제향 공간이었다. 정자각은 왕릉쪽으로 뒷 문이 열려있었고 내부에는 제수 진설도와 제기류, 기산제의 설명이 소개되어있었다.정자각 오른쪽 뒤에는 태종 헌릉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란히 서있는 신도비는 건물의 높이를 꽉 채울 만큼 컸다. 왼쪽에 서있었던 신도비는 받침돌의 조각이 선명하지 않고 뭉뚝했는데, 이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훼손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숙종 때 구 신도비 옆에 새로운 신비를 설치하였다. 신비는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있었고, 받침돌에 나타난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조각이 인상 깊었다.그 다음 우리는 정자각과 비각을 둘러보고 뒤 편에 있는 언덕 위 헌릉과 안쪽으로는 호랑이와 양이 둘러싸있었고, 바깥쪽에는 말이 문인석 무인석과 같이 놓여있었다. 정교한 조각들은 아니지만 각 동물들의 특징을 확실히 잡아 작게 조각해 낸 것이 놀라웠다.그리고 봉분 바로 앞에는 혼유석이 있었는데 단순하게 생긴 납작한 판으로 보였지만 영혼이 편히 쉬다 갈수 있는 공간이라는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어떠한 석물보다도 혼유석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혼유석은 들고 나르기도 힘들만큼 무게가 무거운편이라 그것을 옮기는데에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동원됐다. 혼유석 밑에는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는데 이러한 구조로인해 석실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무거운 혼유석을 들어올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양식적인 이유로 조선 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편 헌릉의 석물은 망주석만 빼고 모두 짝수대로 맞춰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현릉, 정릉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라 한다.헌릉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듣고 나서 인릉으로 자리를 옮겼다. 헌릉을 보고나서 인릉을 보니 상대적으로 인릉의 규모가 더 작아보였다. 물론 헌릉은 쌍릉이고, 인릉은 합장묘 형식이다 보니 봉분이 하나인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또한, 봉분 주변에 서있는 석물의 개수도 헌릉의 것과 비교되었다. 아무래도 조선후기로 갈수록 왕권이 약해지고 정치기강도 문란했던 사회적 상황들이 왕릉에 쏟는 정성을 줄게 만드는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헌릉과 겉으로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국사를 배우기 시작 할 때부터 늘 들어왔던 조선왕조들의 역사를 머릿속에 그리며 바라보는 인릉의 위엄은 결코 작지 않았다.인릉을 둘러보고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인릉의 정자각과 비각을 둘러보았다. 헌릉의 비각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었지만, 인릉의 비각에는 구비문과 신비문이 나란히 세워져있었다. 앞에 놓여져있는 안내문을 보니 인릉구비문은 1857년에 순원왕후 김씨를 순조와 합장하며 올린 첫 번째 비문이라한다. 그리고 대한제국 광무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