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정(四禪定)의 각 단계에 나타나는 요소들에 대하여사선(四禪)에서 선(禪)이란 조용하게 생각한다는 뜻인 dhy?na를 원어로 고통을 벗어나 열반을 성취하려는 불교의 수행법의 하나로 명상을 지칭한다. 사선은 그 단계에 따라 初禪, 二禪, 三禪, 四禪으로 나누어진다.애욕(kama)과 착하지 않는 행위(akusala)로부터 떠나고, 覺(vitakka)이 함께하고 觀(vicara)이 함께 하지만, 떠남(viveka, 離)에서 발생한 기쁨과 행복감이 있는 初禪에 도달하여 머문다.覺과 觀이 점차 멈추어지고, 내면은 정적하고 마음이 전일하게 되어, 覺과 觀이 없어져서 삼매(samadhi, 定)로부터 발생한 기쁨과 행복감이 있는 二禪에 도달하여 머문다.기쁨의 욕구를 떠나서 마음의 평정에 머물며, 알아챔(sati, 念)과 바른 앎(sampajana, 正知)로 말미암아 행복감을 몸에 의해서 느낀다. 이렇게 성인들이 말씀하신, ‘마음의 평정과 알아챔을 갖춘 행복감에 도달한다.’고 하는 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행복감과 고통이 제거되고, 이전에 있었던 기쁨과 슬픔은 근본부터 끊어져서, 고통도 없고 행복감도 없으며, 평정과 알아챔에 의해서 완전하게 청정해진, 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이와 같이 사선은 마음이 정화되어 완전하게 청정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1) 초선 (初禪)첫 단계인 초선에서 떠나는 대상은 애욕(k?ma)와 착하지 않는 행위(akusala)이다. 애욕은 감각적 욕망과 같은 五慾을 뜻하고, 착하지 않은 행위는 들뜬 마음과 같은 五蓋을 뜻한다. 명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물의 참모습을 덮고 있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먼저 없애야 할 필요가 있다.이 단계에서는 覺(vitakka)과 觀(vicara)이 사라지지 않고 함께 한다. 둘의 구분에 대해 Visuddhimagga의 관련 구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위따까는 대상들에 대해 마음을 인도하는 것을 나타남으로 한다. 한편 대상을 향한 마음의 맴돎(vicara?a)이 위짜라이며, 반복적인 맴돎(anusancara?a)이 곧 위짜라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대상을 문지르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거기에서 생겨난 것들을 지속적으로 묶어주는 것을 역할을 한다. 마음이 대상에 대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을 나타남으로 한다.위따까와 위짜라의 차이에 대한 몇 가지 묘사가 있다. N?rada는 위따까란 “벌이 꽃을 향해 날아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위짜라란 “벌이 꽃의 주변에서 윙윙거리는 것”에 비유했으며, 또는 종을 칠 때 처음의 큰 소리는 느껴지는 위따까이고, 작아진 소리는 보여지는 위짜라이다. 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특정한 대상을 중심으로 마음을 집중시켜 나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즉, 이 단계에서는 속세에서 인간에게 번뇌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요소들을 떠났지만, 대상에 대한 마음을 인도하는 작용(覺)과 대상에 대한 지속적 마음 작용(觀)을 떨쳐내지 못한 채로 기쁨과 행복감이 있는 초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2) 이선 (二禪)이 단계에서는 覺과 觀이 점차 사라지고, 삼매(Sam?dhi, 定)로부터 발생한 기쁨과 행복감이 있는 二禪에 도달한다. 여기서 삼매(Sam?dhi, 定)란 마음을 집중시켜,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고도의 몰입으로 흩어진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언어의 근본적 원인인 覺과 觀이 사라지고 삼매에 도달하면 침묵만이 남는다. 초선과 이선에서 모두 기쁨과 행복감을 얻는데 둘의 원인은 다른 것으로 본다. 초선에서의 기쁨과 행복감은 애욕과 착하지 않은 행위를 떨쳐내며 속세로부터의 욕망을 끊어내는데서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이선에서는 완전한 침묵에 들면서 마음작용으로 인한 고통의 뿌리가 뽑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선에서는 그 결과로 내적으로 매우 고요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3) 삼선 (三禪)삼선에서는 초선과 이선에서 느끼던 기쁨마저도 떠난다. 기쁨 역시도 욕구로 그 대상과 강약에 따라 변화한다. 이는 곧 마음을 흐트러트리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삼선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욕구로서의 기쁨마저도 떠나서 마음의 평정에 머문다.이 단계에서는 알아챔(sati, 念)과 바른 앎(Sampajanna, 正知)로 말미암아 행복감을 몸에 의해서 느낀다. 알아챔(sati, 念)은 염처 수행의 의미에선 ‘기억하는 힘’, ‘알아차리는 힘’ 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감각대상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대상에 처음 주목함으로써 念이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의식은 잠재의식의 심층에서 인식이 처음으로 발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부적인 인식의 증가, 관찰자와의 관계, 연상 작용, 추상적인 사고라고 하는 네 가지의 특성을 볼 수 있다.바른 앎(Sampajanna, 正知)의 원어인 Sampajanna는 그 의미가 ‘바르게 앎’, 또는 ‘분명한 앎’을 뜻한다. 이 正知라고 하는 용어는 있는 그대로를 관찰해서 얻은 올바른 통찰력에, 목적과 현실을 안팎으로 완전히 이해한 것을 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유체도시를 구축하라도시와 도시권에 관한 수업은 철학이 아닌 지리를 전공하는 타과생인 나는 마침 전공인 ‘도시지리학’ 시간에 배운 내용들과 겹치거나 연관되는 부분이 많아서 더욱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지리·교육적 관점에서 보는 도시와 철학적 관점에서 보는 도시에 대해서도 꽤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었고 관점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내가 이와사부로 코소의 ‘유체도시를 구축하라!’ 라는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내용을 지리적 관점에서 최근에 배운 상태이며 그에 대해 어떻게 하면 철학적 방식으로 접근해 볼 수 있는 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요약에 들어가기 앞서 나는 유체(流體)도시란 ‘흐르다’라는 뜻의 ‘流’에 중점을 두어 말 그대로 틀에 박혀 있는 도시가 아닌 사회·문화적 변화에 맞추어 그 모양을 변화할 수 있는 도시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읽어보았다.프롤로그 : 도시와 유토피아거리의 조직론뉴욕의 1차 개발시기에는 엄청난 양의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하여 주요 고속도로, 다리, 터널 등을 건설하였다. 이 당시 수많은 슬럼 주민을 강제로 이동시킨 방식은 비판받아왔다. 하지만 2007년 2차 개발시기에는 중·고급주택, 오피스빌딩, 분화시설 등에 초점을 맞추며 1차 개발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자신의 기획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저자가 살던 곳은 산업용 건물로 쓰인 거주공간이 고급아파트로 개축되고 있었다. 즉 ‘탈산업화’에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어진 결과이다. 그곳의 건물과 크기, 쓰임은 천차만별이었는데 저자는 이러한 잡거성을 개발의 단일한 방향성이 만들어내는 고급아파트와 상점가 형성에 저항하는 것이라 보며 여기에 기인하는 ‘노상사회’ 혹은 ‘거리’ 의 형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책의 기획을 소개하였다자본에 의한 개발에 맞서 버티고 있는 힘으로 ‘연락회의’라고 일컬어지는 거리의 네트워크가 있다. 그 주체는 주로 노숙자와 같은 사람들로 그들로 인해 풍요로운 노상사회가 형성되며 그들의 공동체야 말로 매우 훌륭한 자기 통치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 때문인지 오히려 공동체의 황폐화와 범죄는 오히려 교외나 뉴타운에서 자주 볼 수 있다.거리의 안전은 국가체제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사람들 스스로 만들고 집행하는 얽히고설킨, 거의 무의식적인 자발적 통제와 규범의 망에 의해 지켜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 주민들이 서로 함께 관여하고 상호 점검하는 시선이다. 그러나 1960년 이후 개발에 의해 노동자계급과 소수자를 중심으로 하는 민중들의 커뮤니티가 내몰리고, 그 결과 계급적 분리가 이루어 졌다. 중·상류계급이 주거주자가 되고, 민중은 거리만의 존재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여피주민과 길 위의 존재자들 사이에는 단절이 생기게 되었다.이 책은 거리에서 시작된 민중의 투쟁을 대상으로, 그 운동의 토대가 되어 온 ‘꿈과 욕망’의 영역이 어떻게 ‘유토피아적 기획’이 되어 도시공간을 형성하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여기서 유토피아라는 것은 ‘이룰 수 없는 몽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획으로서의 유토피아’이다. 그것은 ‘도시의 구축’과 ‘혁명운동’ 두 가지 방법으로 인류사에 존재 했다.역사적으로 다양한 ‘유토피아 기획’을 간단히 분류하면 ‘공간형식의 유토피아’와 ‘사회적 과정의 유토피아’ 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사회적인 과정을 어딘가에서 무시하고, 사회적 변화의 역동성을 배제한 채 ‘공간조작=스펙터클’로 향하는 경향이다. 그에 반해 후자는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영역에서 그것을 변혁하려는 ‘정열=몽상’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권력의 유토피아에 점유되기 쉽다. 반면 혁명운동은 궁극적으로 후자이기 때문에 가시화되거나 담론화되기가 어려울뿐더러 상품처럼 생산하거나 건축처럼 계획할 수 없다. 이 책에서는 후자를 도시의 본체로 간주하며 유토피아적 물음을 바탕으로 1부에서는 구축으로서의 도시계획과 사회적 사건으로서의 도시의 생성간의 관계를 고찰한다.1부 도시와 건축의 불화1장 메트로폴리스의 구성요소지리적으로 메트로폴리스란 인구 규모 1백만 명 이상의 도시로서 지역적, 전국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중요하며 주변지역을 형성하는 중심적 도시지역을 말한다. 이 중에는 파리, 도쿄, 런던 그리고 책의 배경인 뉴욕도 포함되어 있다.맨하튼을 중심으로 한 뉴욕의 풍경을 대략 다섯 가지로 나누자면 허드슨 강과 자동차 도로, 그리그, 마천루, 그리고 센트럴파크가 있다.허드슨 강은 오랜 동안 뉴욕시의 생명의 근원이었으며 물리적인 기능에서는 물론 상징적 의미에서도 큰 변화를 겪어왔다. 허드슨 강은 과거 알곤킨계 부족들의 중요한 통상로였다. 하지만 서양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보다 집중적으로 운반에 이용되었다. 독립전쟁 시기에는 이 강을 제압하는 것이 독립군 측의 생명선이 되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전장이 되었다. 19세기 초반에는 증기선이 운행을 개시하였고 양쪽 강가를 따라 철도가 개통되었다. 19세기 중후반에는 미국적인 풍경화로 유명한 ‘허드슨리버스쿨’이 활약했다. 현재는 자동차 도로, 다리, 마천루 등의 근대적 구축물들에 의한 풍경에 물 공급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상수시설(크로튼 수도)이 추가되었다.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 이민자들의 급격한 유입으로 인한 인구과다로 뉴욕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그에 따른 열악한 급수 설비 때문에 황열이나 콜레라 같은 질병이 창궐하였다. 현재 센트럴파크의 잔디밭이 된 크로튼 수도는 생태계로서의 도시라는 사상이 발생하여 급수 및 하수 시스템의 설치를 촉구하며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는 중류층 이상의 시민을 위한 것이지 도시의 하층민은 이 수도시설의 혜택에서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공중위생을 악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결국 크로튼 수도국은 하수시스템 개량에 착수했고 이러한 근대적인 급수시설의 구축은 자연을 도시의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도시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재정립하는 대사건이었다.물의 흐름은 도시 내부의 모든 기능과 모든 공간을 연결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로튼 수도는 신체적·물질적인 차원에서 ‘공공성’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공성은 시민 모두에게 평등한 편의를 제공하도록 배치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1990년대 크로튼 설비의 수질이 대폭 악화되어 사람들은 시판 생수를 들고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이는 기호로서의 허드슨강이 가지는 의미작용이 모든 ‘생명의 기원’에서 ‘운반용 통로’와 ‘자연경관’으로 전환되어 가는 경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센트럴파크는 시의 153개의 블록을 점하는 크기의 영국식 정원이다. 센트럴파크는 그 주변 지구가 자연과 자신과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만든 ‘만들어진 자연’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업의 정치적 의도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불안정한 요소를 포함한 ‘도시적 생성’을 통제하는 것이며, 근처 지구의 땅값을 상승시키려는 경제적인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인공적인 전원풍경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공원이 들어서기 전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들, 공원을 만드는 데 동원된 노동이 소외되게 된다. 센트럴파크의 공공성은 노동자들의 투쟁과 사회 문제에 대한 집회 등 항상 계쟁으로서 형성되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최근 고급아파트의 건설로 희미해져 가는 ‘공공성’마저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자동차 도로는 자동차 교통을 위해 공원도로가 도시공간과 교외를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으로서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점차 사회적이고 기능적인 대도시 전경을 구성하게 되었다. 자동차의 도입은 이후 새롭게 형성되는 생산과 소비를 주도하게 되었으며 도로를 따라 시설물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도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그리드와 마천루는 뉴욕의 개발 이데올로기가 개개의 건축에 부과한 프로그램이다. 뉴욕의 도시들은 거리가 가로의 스트리트와 세로의 애비뉴로 이루어진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편리성과 주요 교차점에 가치가 집중되는 대신 대광장과 같은 공공적인 중심을 축소, 삭제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고전적인 도시 구성을 부정하며 모든 도시의 교점을 등가화 함으로써 어디까지나 전진해 나가겠다는 ‘개척주의’의 산물이다.그리드식 도시구조는 수평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엘리베이터는 건물의 수직상승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로 인해 아파트의 출현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현재는 무분별한 수직 확장을 막기 위해 조닝법을 만들어 규제하는 실태이다.2장 계쟁으로서의 공공공간공공공간이란 어떤 것인가?공공공간에 대한 고찰에 앞서 공공권에 대해 고찰해 보아야 한다. 공공공간과 공공권은 원래 그리스적 도시국가(공공권)와 광장(공공공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공공공간은 역사 속에서 시민사회의 물질적 표현으로서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늘 자율을 향한 민중의 투쟁이 민중에 의한 자율적인 정치의 형성이라는 공공권의 획득과 함께 나타났다.그러나 유럽의 도시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뉴욕의 도시공간에서는 자본주의적 토지개발에 이상적인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발전시켰기에 공공공간의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뉴욕에서는 도시적 공공공간의 물질성과 정치성이라는 두 개의 개념이 합치될 수 없다.실제 공공적이라는 말과 달리 ‘공공적인 것’은 애초부터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민중들은 다양한 차별에 대응하여 도시의 거주민으로 살기 위해 계급투쟁을 계속해 왔으며 제도는 그들이 계급투쟁에 참가할 것을 강요해왔다.로고가 붙은 공공공간도시의 공공공간을 지탱해 온 거리, 공원, 광장 등은 점차 기업이나 개인의 소유와 통제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신조닝법에 의해 발전된 ‘사유화된 공공공간’은 ‘의사 공공공간’으로 우리가 자율적으로 구축하는 공공권과 주어지는 공공권의 구별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 한 가지로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예술’을 감상할 기회를 얻음으로써 도시의 시민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즉 ‘작품’은 있을지언정 그것의 가치를 개개인이 발견하고 논의할 기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의사 공공성’을 보여주는 것에는 뉴욕 공공도서관, 대학, 텔레비전 미디어 등이 있다.
상상력 교육, 미래의 학교를 디자인하다.1. 서론상상력 교육, 그 이름만 들었을 때는 상상력이란 그저 창의적 영역에 머물 뿐이며 그 방법은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활동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했다. 즉, 최근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 상에 포함되어 있는 창의성이 곧 상상력이며 그러한 상상력을 교육한다는 것 역시 현재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다른 교과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여타 교과들처럼 수업시간에 상상력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해서 역사, 그를 주장한 학자들, 계발 방법과 같은 내용들에 대해 외우는 것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마지막 수업시간에 잠시 언급한 부분에서 상상력 교육이란 나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한 학생이 사과를 주제로 깊고 폭넓은 포트폴리오를 작성한 일화였다. 그 때 내가 생각한 상상력 교육은 하나의 주제를 제시하면 아이들 스스로가 그 주제로부터 가지를 뻗어나가며 학습하는 마인드맵 형식이었다. 어떤 가지가 뻗어나갈지는 학생들 개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달려있으며, 가지 하나하나는 학생의 흥미와 관심이 수반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상상력 교육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 다가왔다. 반면 교육철학 및 교육사를 배우면서 어느 사상가나 사조에서도 상상력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할 수 없었기에 이러한 교육방법이 너무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근본 없는 교육방법은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책을 읽어가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상상력 교육은 진보주의와 전통주의 양 면과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 쪽에 속한다 할 수 없는 새로운 교육 이론이었다.책의 서문에서 저자가 말하듯 나 역시도 학교를 대단한 성취의 기관으로 간주하지 못하고 있으며, 과거 소품종 대량생산체제에 맞추어진 학교제도를 다품종 소량생산체제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에 있어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바이다. 아래로는 이러한 혁신적이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학교에 대하여 짧게 말하고 있으며 현재까지의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세 가지 관념의 차원에서 다루고, 앞선 사실들을 통하여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제 2부에서는 상상력 교육을 통한 교육의 새로운 역사, 교육 개혁 50년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한다. 현재 2010~2020년의 가까운 미래부터 2060년까지 교수활동, 교육과정, 학교의 모습에 대하여 가상의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다.요약에 앞서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부분은 하나의 주제가 바뀔 때마다 그 주제의 핵심을 담은 소제목을 글의 머리에 써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책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도움을 주었고, 다음 장의 내용에 대하여 유추해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요약에 있어서도 핵심의 수월한 전달을 위하여 소제목들을 중심으로 보고자 한다.1)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학교학교는 고대 그리스의 스콜레(에서 기원한다. 스콜레란 원래 ‘젊은이들에게 적절한 여가 사용법을 가르치는 장소’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의 근대학교는 모든 어린이가 생산적 작업을 내우기 위한 곳이었으며 국가와 국가의 가치에 정서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준비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학교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진정한 학교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하는가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여기서 학교의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것에 있다고 말 하며 이야기를 맺는다.2) 왜 교육은 그토록 어렵고 논쟁적인가 ?학교교육의 문제점오늘날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 생각할 때 세 가지 관념을 사용한다. 저자는 이 세 가지를 사회화, 플라톤의 학문적 이데아, 루소의 발달개념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들의 조합이 오늘날 학교교육의 현실을 지배한다고 본다. 세 가지 개념에 대해 저자는 ‘좋은 조식’, ‘나쁜 소식’, ‘더 나쁜 소식’, 그리고 ‘정말 나쁜 소식’의 순으로 말하고 있다.우선 사회화의 경우를 보자,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 결국 구별과 파벌을 만들어내게 된다.두 번째로 플라톤의 학문적 이데아의 경우, 문자의 발명은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기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방대하게 축적된 지식 중 아이들이 배워야 할 최상의 지식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주었다. 게다가 교육과정에 포함될 만큼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결정된 지식이 무엇이든 문자는 대다수 학생들에게 그 지식에 접근할 수 없는 장벽으로 다가섰다. 또한 교사는 정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어 아이들의 상상력, 창의력을 희생시키게 된다. 이는 학문적 이상과 책을 짊어진 멍청이를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마지막으로 루소의 발달개념의 경우, 많은 교육자들이 개별적인 발달 단계에서 아이의 학습의 본성에 주목하고, 학습 혁신에 대한 기대를 부활 시켰다. 그러나 이 학습 혁명은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발달 단계의 규칙성은 사람마다 아주 불규칙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자율적으로 발달하는 마음과 외재적 지식체계 간의 이분법적 구별을 정착시키게 되었다.위에서 언급된 세 가지 개념들은 각자 상당한 결점이 있으며, 서로 양립할 수 없다. 때문에 세 가지 모두가 동시에 실현될 수 없으며 상호 대립하게 된다. 저자는 여기서 상호 대립이 없는 새로운 교육 개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3) 교육을 다시 생각하다- 교육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방식저자는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인지 도구 상자의 개념을 든다. 인지 도구란 우리가 뇌로 하여금 문화적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교육은 문화라는 외적 축적물로부터 우리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도구 상자를 최대화하는 과정이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인지 도구를 다섯 가지 이해로 묘사하여 기술하였다.첫 번째는 신체적 이해이다. 신체적 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정서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을 가장 기초적으로 조직하고 방향 짓는 요인으로서 삶 전반에 걸쳐 지속되고 발전한다 이야기가 기본이 된다. 이야기는 경험과 지식을 독특한 감정적 의미가 자리할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준다.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 이야기를 위한 도구로서 상반된 것들, 은유, 유머, 신비가 있으며, 이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도움을 준다.세 번째는 낭만적 이해이다. 이 단계에서 아이들은 현실이 얼마나 광범위 한지, 그것의 한계는 무엇인지 그리고 현실의 가장 극적이고 대단한 점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은 영웅과의 제휴를 통해 초월적인 인간의 특성이나 자질에 마음을 기울이며, 작은 것들에 대한 경이감을 가지게 된다.네 번째는 철학적 이해이다. 철학적 이해 단계에서 아이들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며 이론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철학적 이해의 도구 상자에는 마음을 더욱 세련된 이론적인 사고로 이끌 수 있는 인지 도구는 변칙적인 것에 대한 개방성과 거대 서사를 구성하는 능력인 메타내러티브가 있다.다섯 번째는 반어적 이해이다. 반어적 이해를 발달시키는 사람은 끊임없이 문자의 한계를 알아차린다. 또한 반어는 우리로 하여금 초기에 가졌던 여러 유형의 이해가 지닌 부적절성에 초점을 두지 않고 대신 각 이해가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앞선 이해들에 대한 설명은 과거의 주된 교육사상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마음을 생각한 결과이다. 이전의 교육사상사에서 지식에 우선성을 두는 사람들을 보통 ‘전통주의자’라고 부르고, 인지 발달에 우선성을 두는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로 불러왔다. 저자는 이 두 지지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동의 받을 수 있는 교육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제 2부에서는 2010년부터 2050년까지의 교육의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상상력 교육이며, 미래의 일을 다루는 만큼 상상에 의거하여 쓰여 졌다. 이야기 속 구체적인 고유명사나 대화들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각 장은 10년 단위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수활동, 교육과정, 학교의 모습에 따라 자세하게 이야기를 풀1) 2010~2020년의 학교간단히 이야기하면 이 시기는 상상력교육이 대두되고 조금씩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에 따른 관심의 증가로 정식으로 교사교육프로그램이 실시되기도 한다. IE교육법을 시도해보려는 교사인 사라의 일지를 통하여 자세한 대략의 IE교육법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지속되어 온 교육기관의 실패는 학교교육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핵심적인 이유를 가져오게 되었다.2) 2020~2030년의 학교이 시기에는 생태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학교는 생태 위기를 극복할 중요한 기관으로 부상한다. 이 시기 동안 상상력 교육은 급부상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생태 문제가 IE교육과정과 민감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통주의와 진보주의 양측의 폭넓은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3) 2030~2040년의 학교혼란의 시기, 교사들은 새롭게 시행되어야할 끊임없는 조사, 시험 그리고 교육과정계획 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많은 교사들이 자리를 떠나고 새로운 교사들이 채용되었다. 상상력 교육이 가장 중요한 수확은 얻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것은 상상력 교육이 진보주의와 전통주의의 두 가지 교육철학과 별개라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학교는 학업 프로그램과 사회화 프로그램이 분리 되었으며, 19C 중반부터 널리 알려져 온 형태의 학교가 종말을 고하게 된다.4) 2040~2050년의 학교2040년대에 들어서면서 출생률이 감소하게 되었고 전 세계에서 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리게 되었다. 그 결과 교사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 시기 교육에서는 교사 자신의 열정이 학생들의 학습을 위한 주요 자극임이 계속해서 지적되었다. 또한 외국어 학습을 IE 교육과정에 도입하였으며, 사회화 활동과 학업 활동을 분리된 공간에서 실시하게 되었다.저자는 이렇듯 미래의 학교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통하여 ‘무엇인가 시도될 수 있다. 그 시도에 힘을 보태는 것이 어떤가?’ 하는 질문에 답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책을 .
인식론데미안- 철학적 지혜를 요하는 문제에 대하여1내가 이해한 데미안은 가장 큰 틀로 보아서는 어린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고뇌하며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싱클레어는 선한 것 이면에는 악한 것이 있고, 양자가 갈라져 있는 줄만 알았지만, 선과 악이 혼재하는 세상을 겪으면서 자아를 발견하고 또 다른 자신인 데미안을 쫓는다. 결국 최후의 순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자신이 다름없음을 느낀다.첫번째 문제인 데미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목은 p.121에 처음 등장한다.“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아프락사스는 서로 모순되는 두 세계를 결합시키는 상징적인 것이다. 싱클레어에게 서로 모순되는 두 세계는 밝음과 어둠의 세계이다. 즉 아프락사스는 밝음과 어둠을 모두 가진, 작가의 말로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것“(p.123)을 말한다. 나는 여기서 알, 세계는 앎, 인식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세상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기존에 알던 앎을 깨고 나와야 한다. 싱클레어는 밝음과 어둠으로 갈라져있는 세계가 사실은 혼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자아로 한발자국 더 다가가게 된다.데미안에서는 인식과 앎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부나비에 관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대화에서 질문하는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항상 물어야 되고 의심해야 돼.”(p.76) 이는 우리가 당연히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지식이 아닌 스스로 깨우치는 진리야 말로 자아의 성장을 돕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감각, 심지어 우리 자신까지도 의심해보며 자아와의 소통을 시도해 보아야 한다.또한 피스토리우스가 말한 “우리가 보는 사물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내부에 가지고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현실이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의 그림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 내부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에다 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에 그처럼 비현실적으로 사는 것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의 길은 쉽고 우리의 길은 어렵습니다.”(p.151) 이 대목에서도 외부로부터의 지식이 아닌 스스로 깨우치는 진리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출현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자아에 대한 고뇌를 시작하게 된다. 싱클레어는 외부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데미안을 만나기 전까지는 밝음과 어둠으로 나누어져 있던 세계, 카인은 어둠으로 아벨은 밝음으로 대표되었다. 어린 시절의 싱클레어는 카인으로 대표되는 어두움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끌린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밝음인 양친을 배신하는 것임을 잘 알기에 스스로를 억지로 밝음의 세계로 이끌려 노력한다. 그러나 데미안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카인이 꼭 어둠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데미안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일화의 연장선상에 ‘알을 깨고 나온 새’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필요로 한다고 한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우리 자신일 수가 없으며, 타자와의 교통 속에서만 우리는 실존이라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서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으로 그 타자를 옮겨간다. 친구에서 스승으로, 스승에서 어머니, 혹은 여신으로. 싱클레어가 자아를 찾아감에 따라 그 타자에 대한 시선도 상승한다. 진정한 자아란 에바 부인의 집에서 모이는 다양한 사람들만큼 다양하게 존재한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이끌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란 고정된 하나의 개념이 아닌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이렇게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에바부인과 데미안은 ‘카인의 표지’를 지닌 사람들이라 일컫는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어린 시절부터 그 표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표지는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의 소년에게 보였다는 표지가 과연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싱클레어는 밝음 속에서 자라왔다. 좋은 가정환경, 인자한 양친, 누나들 등 모진 경험 없이 자라왔으며, 어두움에 대한 호기심은 책에서 말했듯 그 나이 대에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이었다.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진정한 자아에 도달 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있다는 것인가. 에바 부인을 보면 그녀와 친한 사람들은 굉장히 선별적이다. ‘표지’가 있는 사람 소수만 유대하며 지낸다. 나는 그 ‘표지’가 어떤 경로로 생기는가에 대해 궁금하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잠시 술에 빠져 방황하며 지낼 때도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마치 정말로 눈에 보이는 표지가 있는 듯 한 행동들을 보인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작가는 이 글에서 표지는 타고나는 것이라 보는 관점인 것 같다. 또 다른 특별함을 가진 동급생 크나우어, 싱클레어를 한 눈에 알아본 피스토리우스, 싱클레어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에바 부인과 데미안을 통해서 말이다. 표지는 노력으로 얻어낼 수 있는지, 타고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자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복지개론-탐욕의 시대-주제 : 사회복지 전공자로써 아래의 추천도서를 읽고느낀 점에 대해 에세이를 작성합니다.(추천도서 중 택 1)1처음에 나는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보고 망설임 없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유시민 씨의 추천 도서 목록에 있던 걸 언젠가 봤기 때문이다. 다음 날 나는 지역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 정보를 검색하고 비보를 접하게 됐다. 누가 빌려가 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다른 목록을 훑어보다 같은 작가가 쓴 '탐욕의 시대'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부제도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로 어쩐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비슷한 느낌이어서 더 마음이 동했다. 나는 또 누가 빌려 가버리기 전에 냉큼 집으로 가져와서 천천히 읽어나갔다.이 책의 저자 장 지글러는 스위스 사람으로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2008년 이 후로는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러한 경력은 책을 읽어 나감에 있어서 왜 저자가 이런 생각을 하며, 어떤 시각으로 글을 썼는지 이해하기 쉽게 도와주었다.이 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부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의 장은 이 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여기서 개인과 국가를 끝없는 가난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원인인 부채에 대해 설명한다. 현대에 많은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국가는 주로 남반구에 위치해 있다.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 라틴아메리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국가는 날이 가면 갈수록 부채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채무국들의 주요 수출품인 농업제품은 점점 가격이 내려가는 한편 그들이 수입하는 공업제품들의 가격은 점점 상승하고 있다. 또한 채무국의 고위공직자들의 비리와 횡령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거기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채무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난데 비해 그들이 벌어들인 이윤의 대부분은 기업의 본사가 있는 국가로 넘어가고 실제 채무국에 재투자되는 금액은 미미하다. 그리고 채무국들은 다국적 기업이 가진 특허를 이용하고 그 로열티는 그대로 본사로 넘어간다. 마지막으로 제 3세계의 채무국들은 투자의 위험치가 높은 곳이다. 그렇기에 서구의 큰 은행들은 채무국에게 비싼 이자를 요구하게 된다.이러한 이유들로 빚은 점점 늘어만 가고 그로 인해 점점 더 깊은 빈곤과 가난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 부채를 가지고 진행된다. 부채로 일어나는 참혹한 빈곤의 다른 모습들, 기아와 전염병, 그로 인한 수치심, 인간다움의 말살 등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부채의 사슬은 어지간해서는 끊기 힘들어 보인다. 너무나 많은 부채에 허덕여 부채를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국가적 고립상태로 만들어버려서 결국 끝까지 허덕이며 빚을 갚게 만든다. 빚을 갚기 위해 또 빚을 지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고위층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드는 도로, 군사, 경찰 등의 부분으로 다 투자되어 버린다. 그렇게 국민들에게 돌아갈 교육, 의료, 쾌적한 환경의 기회는 박탈당한다. 교육에 대한 투자가 없으니 더 나은 노동력을 생산해낼 수도 없고 의료에 대한 투자가 없으니 국민들은 우리라면 손쉽게 구했을 약이 없어 죽어나간다. 환경은 또 어떤가? 우물이 없어 오염된 물을 마시고 병에 걸리고, 먹을 것이 없어 말라버린 어머니의 젖을 물고 아기들은 죽는다.책의 뒷부분에서는 에티오피아와 브라질의 사례를 들어 작게나마 타오르는 희망의 불씨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건 뒷장에 나오는 탐욕스런 신흥 봉건 제후들의 욕심과 그들의 논리를 보고 나면 정말 너무도 작아보여서 곧 꺼질 것만 같다.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순조롭게 막막해졌다. 나선의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빈곤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저 꾸준하고 묵묵하게 한 사람이라도 더 한 끼를 먹을 수 있도록 돕고 물질적인 지원과 더불어 정서적으로도 지지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와 관련해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와 닿은 것이,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부잣집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거리에 나가 구걸하는 것이 그들을 굉장히 수치스럽게 만들고 그런 경험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회복지사들이 정서적인 케어를 해준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번씩 '빈곤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내가 빈곤한 것은 나의 탓이 아닌 사회의 탓이다.' 라고 말하게 한다는 것은 나를 놀라게 하는 동시에 반성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