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뒤돌아 보게 한 “해동제일의 지장도량” 고운사가을로 접어드는 늦여름, “해동제일의 지장도량“ 고운사에 다녀왔다.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에 가면 염라대왕이 이리 묻는다 한다. ”고운사엔 다녀왔는가?” 그에 대한 답을 오늘 만들어 가리라.고운사는 경상북도 의성의 등운산 자락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조계종 16교구의 본사로서,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민가로부터 3km 정도 떨어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며, 일주문에 이르는 솔밭 사이 비포장 길은 부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다소곳이 다가서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정감 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騰雲山孤雲寺” 현판의 고운사 일주문은 부드럽게 곡진 자연 그대로의 굵은 기둥이 각기둥의 협시를 받으며 육중한 지붕을 가뿐히 이고 있다. 지붕의 날아오르는 듯한 기상이 예사롭지 않다. 근데 구름 운(雲)자가 두 개나 있다. 오늘은 구름에 떠서 다닐 모양이다. (합장)일주문 속에서 보이는 천왕문을 지나니 먼저 오래된 석불을 봉안해 놓은 고불전(古佛殿)이 나타난다. 요철 모양의 구조가 특이하다. 은은한 향냄새가 아주 좋다.고불전 위로 커다란 가운루(駕雲樓)가 출항하는 배처럼 서있다. 그 뒤를 우화루(羽化樓)가 따른다. 이들은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세웠다는 누각들이다.신라 말기 대문장가이며, 신라 최고의 지성인 고운(孤雲)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한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한다. 이후 즐겨 찾은 곳 중의 한곳이 강주(剛州) 즉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義城)이다. 고운사의 가운루와 우화루는 그가 세상을 유랑할 적에 여지ㆍ여사 양 대사와 함께 세운, 고운사의 얼굴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누각이다.가운루의 원래 이름은 가허루(駕虛樓)였다. 누각은 계곡을 가로질러 다리처럼 놓여있다. 길고 가는 기둥들이 커다란 몸체를 떠받치고 있어 둥실 뜬 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옛날에는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라 했다 한다.계곡은 대부분 메워져 옛 풍취는 없지만 지금도 누각에 오르면, 서쪽 하늘가에 걸린 등운산 봉우리가 무지개처럼 섬처럼 보인다. 가운루는 그곳을 향하는 대해의 배처럼 느껴진다. 가운루의 원래 이름인 가허루와 우화루는 도교 사상이 담긴 이름이다. 고운이 품었던 이상세계로의 간구가 깃들어 있는 것 같다. 가질 수 없기에 간절함은 깊었을 터. 절의 창건 시 ‘높은 구름(高雲)’을 뜻하던 고운사(高雲寺)는 고운 최치원이 거처간 뒤 그의 자(字)를 따 ‘고독한 구름(孤雲)’ 고운사(孤雲寺)가 되었다.가허루가 언제 가운루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2개의 가운루 현판 중 누각 바깥 처마에 걸린 행초서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은 내란을 겪으면서 노국공주가 세상을 뜨자 실의에 빠져 전국을 유람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고운사를 찾아 현판의 글씨를 남겼다. 구름에 몸을 싣고 세상사를 잊고 싶어 한 당시 공민왕의 심경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런 현판 앞에서 한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노국공주를 잊지 못하는 공민왕의 애틋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한편 공양간 입구 벽면에 걸려있는 호랑이 벽화 앞에서는 모두들 호랑이 눈빛을 벗어나고자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봐도 호랑이의 매서운 눈을 피할 길이 없다. 아무리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얘기인가...우화루 곁의 종각을 지나면 고운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이다. 1992년에 신축한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ㆍ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백중(百中)을 끝내고 회향하는 마음으로 나선 성지순례.. 부처님께 감사의 108배를 올렸다.대웅보전의 왼쪽은 극락전, 뒤쪽은 약사전, 오른편 돌계단을 오르면 나한전이다.극락전은 대웅보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고운사의 큰 법당 역할을 하던 곳이라 한다. 종일 바라보아도 좋을 단아한 기운으로 가득하다.은근히 숨은 듯한 나한전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앞에는 상처 많은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 아래로 전각의 지붕 선들이 순순하게 흐르고 있다.약사전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삼층 석탑과 약사전 부처님은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이라 한다. 천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다.약사전 맞은 편에 품위 있게 낡은 연수전(延壽殿)이 자리한다. 영조 20년(1774)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帖)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전각으로, 1887년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되었고, 1902년에는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새로 지었다 한다. 안내판에는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떠받들던 시대에 사찰 안에 이렇듯 왕실과 관련되는 건물이 지어졌다는 사실이 이채롭다’고 적혀 있다. 연수전 터는 명당 중의 명당이면서 나침반의 바늘이 꼼짝달싹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기가 센 곳이라 한다. 연수전을 들어서는 만세문(萬歲門)은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솟을 대문 건축 방식으로, 절집 내에서지만 왕가의 권위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