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러닝 철학과 인간가치 기말고사 심화학습 대본앞서서 포스트 휴머니즘과 존엄성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사실상 포스트 휴머니즘은 우리에게 불안과 희망의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기계가 인간을 위협할 것이다라는 불안감과 무병장수의 꿈이 실현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교차하기 때문입니다. 존엄성 개념의 명확한 이해를 이해서라도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심화학습의 차원에서 포스트 휴먼과 트랜스 휴머니즘,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포스트휴먼은 첨단과학기술이 성공적으로 융합되어 2040~2050년경 탄생시킬 인간 이후의 존재를 말합니다. 첨단 과학기술에 의해 완전히 성능이 증강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유전공학, 로봇공학, 인지과학, 나노공학 등을 융합시켜 포스트 휴면을 가능하게 만드는 첨단과학기술을 우리는 인간향상기술이라고 부릅니다. 인간향상기술은 신체적 능력을 강화하고 인지능력을 향상시키고 도덕적 능력을 강화하고 질병을 퇴치하고 노화 과정을 지연하고 최종적으로는 죽음의 극복을 목표로 합니다. 만약 포스트 휴먼이 가능해지는 시점이 도래한다면 아마 진화의 방향은 완전히 기술에 의해 통제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화라는 개념에 일대 전환이 오는 것이죠. 자연적인 진화, 이른바 다윈의 진화는 이제 아주 소극적인 의미를 의미합니다. 진화 과정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을 수동적인 인간을 상성했기 때문이죠. 자기 족의 진화 방향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진화만이 진짜 참된 진화라고 한다면 포스트 휴먼은 진화 과정 자체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진화 자체를 스스로 결정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포스트 휴먼으로의 진화는 기술혁신을 통해 인간 본성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호세 코르데이로라는 미래학자는 포스트 휴먼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상 최초로 진화와 한계의 의식을 가진 종이며, 인간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제한을 넘어서 진화된 인간,극복하고자 시도하는 포스트 휴머니즘의 한 분파가 바로 트랜스 휴머니즘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포스트 휴머니즘은 휴머니즘 이후에 등장한 생각이나 이념, 특히 휴머니즘의 주장이나 생각을 극복하거나 넘어서려는 사상이나 운동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포괄적인 측면에서 휴머니즘과 포스트 휴머니즘의 결정적인 차이가 어느 것인지 보겠습니다. 우선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입니다. 휴머니즘이 대체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 본성은 확정적이고 불변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 본성이 과학기술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휴머니즘은 인간 조건의 불변성을,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 조건의 가변성을 주장하는 것이죠. 다음으로는 휴머니즘이 인간의 사멸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의 불멸성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태도가 매우 다릅니다. 전통적인 휴머니즘이 죽음을 문화적으로 극복한다면 포스트 휴머니즘은 이 죽음을 기술적으로 극복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문화적 극복이라는 표현은 무슨 말일까요? 이건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영어단어 conception을 알고 계신가요? 첫 번째 뜻은 생각, 착상, 파악이라는 뜻도 있지만 임신, 수태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conception은 영혼의 자식을 품는다는 의미와 육체의 자식을 품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지만 그럼에도 불멸의 존재로 남는 방법을 머릿속으로 구상합니다. 바로 문화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이죠. 불멸의 존재로 남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후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명예로운 자로서 이름을 남기는 것과 실제 자손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의 자식을 남기는 것과 실제 육체의 자손을 남기는 것으로 구분했던 것과 마찬가진거죠. 바로 후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큼 탁월한 삶을 사는 것이 죽음의 문화적 극복이라는 거죠. 어쨌든인간도 그러하기에 인간의 삶과 죽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흄은 전통적으로 강조해왔던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무력한 이성대신 우리의 삶을 인도할 안내자로서 오히려 감정을 선택한다. 욕구와 감정에 지배되는 인간이지만 감정의 공유능력을 통해 개인의 이기심을 초월하는 인간과 사회를 꿈꿨던 것이 흄이 생각했던 감정적 인간의 요체다. 경험론자 흄의 사상에 대한 아주 짧지만 이런 고찰이 속성적 존엄성에 대한 의미를 도모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이번 주차 수업에서 사회정의의 조건으로서 자유와 평등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분배적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 개념의 관계설정은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점도 끝부분에서 강조했는데요 심화학습의 차원에서 자유와 평등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했던 존 스튜어트 밀과 마르크스를 통해서 한번 살펴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우선 자유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존 스튜어트 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의 철학자 그리고 정치학자, 경제학자로 불릴 만큼 정말 다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상가입니다. 무엇보다 철학자의 학문적인 작업은 인류를 위해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공리주의 철학자이고요, 특히 근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특징적인 점은 밀은 정식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아버지 제임스 밀의 도제식 개인교습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가 쓴 자서전을 읽어본 사람이면 아마 다들 놀랐을 것입니다. 3살 때 그리스어를 배웠고 또 6살 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8살에 그리스어로 된 이솝우화를 읽었다고 하니 가히 엄청난 천재라고 우리가 볼 수 있겠죠. 특히 아버지의 철저한 독서교육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전날 읽은 책의 내용을 다 외우고 아버지와 토론하는 방식은 오늘날 대학에서도 사실 이루기가 힘든 사고와 표현 교육과 거의 흡사합니다는가를 질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시장은 자본과 노동의 요소로 돌아가는 데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자본은 희소한데 비해 노동은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음으로 매우 흔하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자본은 희소함으로 귀하게 여겨지고 노동은 흔함으로 천하게 여겨짐으로써 자본의 가치는 높게 측정되고 노동의 가치는 낮게 측정되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노동을 하며 자아실현을 하는 그런 존재입니다.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인간 주체의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 자본가가 일정한 값을 매긴 특수한 상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의 소외로 인해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소외란 인간이 만든 생산물이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자립하면서 인간에게 낯선 존재, 대립적인 존재가 되고 나아가 인간을 억압하여 종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함으로써 인간이 주체성과 자율성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다양한 형태의 소외를 낳습니다. 예를 들면 ①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고용된 존재로써 자신이 만든 상품으로부터 소외된다라는 것입니다. ②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일을 해야 하며 결국 노동은 자발적인 노동이 아니라 강제된 노동의 형태를 띕니다. 그래서 노동자는 노동과정 속에서 행복보다는 불행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③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적 존재란 인간이 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노동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유적존재로부터의 소외는 노동을 통해 자기실현을 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인격이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④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결국 위의 세가지 형태의 소외는 노동자자들의 상황 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때 결국 기회의 균등은 일부 사람들의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다른 일부 사람들의 소유물을 가져와야만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 균등의 실현을 위해 어떤 사람의 소유 권리를 가져오는 방식은 개인의 소유권리에 대한 심각한 훼손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그러면 노직의 자유지상주의가 끼친 사상적인 영향은 무엇일까요?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라는 노직의 책의 의의를 꼽자면 우선 소유권리론에 대한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로크에 의해 제시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이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소유권리론에 대한 이론적인 토대를 확립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공정한 분배를 사회 정의의 기본 원리로 주장하는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최소 국가가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밝힘으로써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 것에도 큰 의의가 있습니다.그러면 이제 존 롤스는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존 롤스는 1921년 미국 볼티모어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변호사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롤스는 병으로 두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었는데 이 아픈 기억은 롤스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3년 프린스턴 대학교 학부과정을 마치고 그해 육군에 입대해 필리핀, 일본 등에서 복무했습니다. 맥아더 사령관 시절 일본 점령군으로 복무하는 가운데 동료 군인을 처벌하라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여 계급이 강등되었고 마침내 1946년에 제대했습니다. 나중에 하버드 대학 교수 시절에도 롤즈는 ‘베트남 전쟁이 정의롭지 않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불리한 징집기준도 정의롭지 못하다.’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습니다.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해 195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코넬대학교,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2년부터 1991년까지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02년에 타개.
e러닝 철학과 인간가치 중간고사 심화학습 대본지금까지 철학과 인간가치를 시작하면서 왜 지금 인간가치가 문제인지 철학이란 어떤 학문인지 앞으로 본 교과목은 어떤 주제와 내용을 다룰 것인지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좀 더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철학의 특징과 유래를 통해 인간가치를 왜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다루어야 하는지 한번 그 이유를 분명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철학, 아마 이 단어만큼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는 단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진지한 사유와 정신, 가치관을 근사하게 표현하고자 할 때 우리는 흔히 철학이라는 단어를 호출합니다. 누군가의 가치관을 인생 철학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또 CEO의 가치관을 경영철학이라고 포장하기도 하며, 운명을 예측한다는 관상가와 점술가의 행위를 사주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편 학문적인 의미에서 철학은 문학과 역사학과 함께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문 정도로 이해합니다. 보통 그래서 우리는 문사철 이렇게 부르기도 하죠. 보통 많은 학문들은 그 이름에서 그 학문이 다루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경영학, 사회학, 경제학, 생물학의 경우 엄밀한 학문적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경영학과 경영, 그리고 사회학과 사회, 또 경제학과 경제, 또 생물학과 생물의 관계 속에서 어느정도 무엇을 다루는 학문인지를 우리는 짐작해냅니다.그러나 유독 철학의 경우에는 한자 맑을 청자가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떤 학문이며 무엇을 다루는 학문일까요. 왜 다른 학문보다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걸까요.아마도 철학이라는 학문의 특성과 유래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철학의 특성과 철학의 역사적 변천과정은 철학이라는 학문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철학은 이러저러한 학문이다.라고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정의를 내리기앞서 일종의 우회적인 접 아는 것보다 의문이 더욱더 가중된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철학적인 탐구가 깊어질수록 의문은 더 증폭된다라는 것이죠.우리가 이렇게 철학을 일종의 끊임없는 문제제기, 물음, 질문이라고 정의내릴 때 우리는 이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철학자 인물로서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위대함은 바로 일체의 것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치열함에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의심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의심의 사전적인 의미는 확실히 알 수 없어 믿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일상의 삶에서 의심을 거두고 삽니다. 즉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냥 믿고 삽니다. 의심한다라는 것은 일종의 소모적인 정서로써 편안한 살에 균형을 일으키고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가급적이면 의심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데카르트의 탁월성은 바로 이런 편안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려는 그런 도전정신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성찰’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어떤 것을 만날 때까지, 아니 하다못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이라도 확실히 인식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자. 아르키메데스가 지구를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 위해 확고부동한 일점 밖에 찾지 않았듯이, 나 역시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최소한의 것만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가 보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저 기만적인 기억이 나에게 나타내는 것은 결코 현존한 적이 없다고 믿자. 나는 어떠한 감각도 갖고 있지 않으며, 물체, 형태, 연장, 운동 및 장소도 정신이 꾸며낸 것들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참된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한가지 사실 뿐이다.여러분들 어떻게 보셨나요. 사실 이 제시문은 데카르트의 의심이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한지를 정말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정“허무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고의 가치들이 박탈되는 것이다. 목표가 없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없다.” 한마디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야기한다. “허무주의적 상황은 또 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이다. 여러분도 잘 아실겁니다. 똑같은 어려운 상황에 닥치더라도 어떤 사람은 그 상황을 삶의 걸림돌, 장애물로 생각하여 자포자기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은 오히려 그 상황을 자기 삶의 디딤돌로 삼아서 훨씬 더 성장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그래서 니체는 허무주의를 대하는 인간의 두 가지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첫 번째는 약자의 수동적 허무주의다. 니체는 이것을 정신력의 하강과 퇴행으로서의 허무주의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피한의 세계 혹은 가치 원천의 붕괴와 함께 체념과 몰락으로 주저앉아버리는 태도를 말한다. 이와 반면에 또 다른 태도는 강자의 능동적 허무주의다. 니체는 이것을 상승된 정신력의 징후로서의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한 마디로 최고가치의 몰락을 오히려 자기극복, 자기성장의 계기로 삼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과 창조의 삶을 위한 징후로 보고, 새로운 존재로서 거듭나는 계기로 간주한다. 그는 인간이야말로 허무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강화시킬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니체의 사상을 초인사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많이 니체의 책 번역본을 보면 초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초인은 독일어 위버멘쉬 라는 그 말의 번역어인데, 영어로 superman으로 번역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굉장히 오랜기간 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극강의 힘을 소유한 초인으로 그렇게 오해됐던 단어이기도 하다. 독일어 위버멘쉬는 영어로 번역하자면 superman이 아니라 overman으로 번역될 수 있다. 접두사 over는 어떤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서 넘어간다는 일종 자체로 선하다는 점을 반지의 사례를 통해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의지는 반지의 보석에 해당하며 결과는 보석을 감싸는 반지의 테두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선의지가 아무리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석 그 자체인 선의지는 빛나는 가치를 지닌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선의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의무론의 두 번째 특징은 형식에 대해서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칸트는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도덕법칙을 형식적으로 접근하는데요 특히 칸트는 도덕법칙은 정언명령의 형태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좀 생소한 단어일텐데요. 정언명령이라는 것은 조건이 없는 절대적인 명령을 의미합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명령을 말합니다. 그니까 도덕법칙이라는 것은 이런 형태로 주어져야 한다라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정언명령의 반대되는 명령은 가언명령입니다. 이른 바 조건을 가지고 있는 명령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하고 싶다면 운동을 열심히 하거라’ 같은 형태가 가언명령입니다. 이런 가언명령은 사실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매우 유용한 명령 형태입니다. 그런데 칸트가 보기에는 도덕법칙이 만약 가언명령의 형태를 띤다면, 경험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 있고 결과에 대한 고려가 개입될 수 있기 때문에 도덕법칙의 순수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강한 우려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의무론의 형식적인 측면은 보편화의 원칙입니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하라’ 여기서 말하는 준칙은 우리들 각자가 개인적으로 정립한 도덕의 원칙을 말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준칙이 도덕법칙이 되려면 그것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어떤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준칙이 있다고 가정을 할 경우 이 준칙을 나에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누구속한다면 성품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즉, 훌륭한 성품이 습관처럼 굳어진다면 우리가 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개념을 끌어드립니다. 우리의 행위와 선택이 잘못된 길로 빠지는 일차적인 원인은 우리의 행위와 선택이 정념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정념이란 욕망, 분노, 공포, 태연함, 질투, 환희, 사랑, 증오, 경쟁심, 연민 등 일반적으로 쾌락이나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진정으로 덕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바로 이러한 정념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스승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정념으로부터의 완벽한 해방을 외쳤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을 무조건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며, 적절하게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정념의 적절한 통제상태가 바로 중용입니다. 예를 들자면 용기라는 덕목은 어떤 공포라는 감정과 만용이라는 감정의 중용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중용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단 하나의 중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용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각각의 사람에게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위에서 모자람이나 지나침을 피하고 중용을 모색하는 행위야말로 덕스러운 사람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때가 적절한 때이고 마땅한 때이고,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바람직한 행위인지를 가늠해보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살아가면서 중용을 모색하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지혜라고 불리는 이른바 프로네시스(phronesis)를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네시스를 덕스러운 행위를 이끄는 지적인 능력으로 간주하면서 특히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훌륭하게 살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천적 지헤는 도덕 교과서에 나타난 추상적인 도덕법칙을 암기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도덕적인 원리를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선과 악,니다.
정책학개론 보고서Ⅰ 학교 폭력에 대한 의식Ⅱ 학교 폭력 정책의 실패적 요인Ⅲ 학교 폭력 정책의 개선 방안Ⅳ 과제 후기Ⅰ 학교 폭력에 대한 의식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중반이후 학교 폭력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물리적 폭력은 감소하는 추세이지만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언어폭력, 사이버폭력, 스토킹 등의 관계적 폭력은 증가하고 있다. 관계적 공격은 집단 내에서 은밀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당사자 이외에는 알기가 어렵고 타인의 개입에도 어려움이 있으며 간접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크를 붕괴시키며,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정신적 괴로움으로 심한 경우에 자살에 까지 이를 수 있다. 또한 관계적 폭력은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특성이 있어 일상화된 폭력으로 인해 가해자들은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서로 그룹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아 죄책감을 갖기 보다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주류 그룹으로써 쉽게 옹호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한편 소통과 갈등해결능력 부재로 사소한 사안도 학교폭력자치위원회 개최되는 상황이다. 학교폭력자치위원회의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2013년 17,749건에서 2016년 23,673건으로 33.4% 증가함을 보인다. 이는 경미한 사안도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열어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 울산 중학생 자살 사건 등 충격적인 학교폭력 사건들로 우리 사회는 학교폭력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경미한 사안에 대해서도 학교폭력자치위원회에 신고해야 하는 절차를 거치게 되어 소통과 대화와 같은 교육적 노력보다는 형사·법적 해결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학교폭력의 원인은 생태학적 요인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학교폭력은 개인과 가족, 또래집단, 학교, 지역사회 및 사회규범 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생태학적 접근이 필요하다.Ⅱ 학교 폭력 정책의 실패적 요인「국가처럼 보기」에서는 정책의 실패를 사회의 높아진 단순화가 사회공학을 위한 능력을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이 모더니즘이 열망을 추가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이러한 실패는 권위주의 국가와 약한 시민사회가 하이 모더니즘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학교 폭력 정책의 실패적 요인을 살펴보도록 하자.첫 번째로 단순화의 관점에서 학교 폭력 정책은 학교폭력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세세한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처벌만을 하는 한계가 있다. 현행 학교 폭력 정책은 관계적 폭력에 대해 다루지 못한다. 가해자에 대한 엄벌주의에 기조 한 2012년 학폭법 개정 이후, 폭력의 양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폭력은 줄어드는 반면 잘 드러나지 않는 관계적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 관계적 폭력은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거나 사안이 사소하고 애매모호하게 보여서 현행법으로 조치했을 때 학교폭력의 사안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두 번째로 하이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갈등론과 함께 살펴본다면 학교 또한 계층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고 미래의 기득권층을 위해 불합리하게 자라나게 한다. 학교의 교육적 기능 약화되고 학교의 사법기관화가 되고 있는 상황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학폭법은 애초에 학교폭력의 예방과 그 사안의 처리를 교육적으로 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점차 형사정책 기조로 변화하고 있다는 한계가 존재한다.세 번째로 권위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예를 들어 가해자가 돈이 많거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기득권층이라면 교묘하게 법률을 피해나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권위주의로 보는 학교 폭력 정책은 오히려 학교공동체를 약화시킨다. 교육부가 발표한‘3차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의하면 학교폭력을 신고한 학생 중‘신고효과를 봤다’는 학생이 36%에 불과하다. 현행 학교 폭력 정책은 절차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 간에 불신과 자기방어를 강화하고 공동체 안에 배제와 혐오의 분위기를 증폭시켜 오히려 관계악화와 공동체성 붕괴를 초래하고 있는 한계가 있다.마지막으로 약한 시민사회의 관점에서는 학교 폭력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학생들 혹은 방관자인 학생들을 볼 수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 학생들이 처해있는 가정상황과 학급?학교 환경, 또한 주변 급우 및 부모와 교사 ?학교의 지원이 없다면,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행동과 관계 패턴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또한 가해학생의 처벌로 종료되는 현 학폭법으로는 학교폭력의 재발을 막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Ⅲ 학교 폭력 정책의 개선 방안현행 학교 폭력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첫 번째로 무조건적인 처벌중심에서 벗어나 피해 확인, 피해에 대한 책임 이행, 공동체의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회복적 접근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발생한 피해 확인과 피해 회복의 책임 이행을 위해 개인 당사자뿐 아니라 공동체가 피해 회복의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학교폭력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두 번째로는 자치위원회의 분쟁조정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친구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 등의 경미한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학교장의 책임 아래 화해와 관계회복 중심으로 교육적인 처리가 필요하다. 이러한 경미한 학교폭력의 상당 부분은 친구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나 상대방에 대한 오해, 실수에 의해 촉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엄벌보다는 관용과 설득이며, 타율적인 복종보다는 자발적 순응이 필요하다. 또한 학교가 학교폭력 사안 처리에 충분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해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많기 때문에 이를 위해 학교폭력위원회 위원의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세 번째로는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는 중대한 사안은 경미한 사안을 구분하여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심각한 학교폭력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조치한 후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중대한 사안의 피해학생에 대해서는 보호조치와 회복을 위한 지원이 즉각 이루어져야한다.마지막으로는 학교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보다 양쪽의 관계를 개선하는 방안에 초점을 두고 생태학적 차원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학교폭력문제를 개인의 인성문제로 보고 가해자 처벌로 종결되는 단편적 접근이 아닌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을 고려한 생태학적 이해와 접근이 필수적이다. 또한 학교공동체 안의 갈등이 억압되거나 은폐되지 않아야 하고, 투명하게 드러나서 민주적이고 공식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결과적으로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헬스케어 비즈니스 인사이트[의료신기술의 발전, 과연 득일까 실일까?]1. 서론2. 의료신기술의 발전이 사회 건강증진에 가져올 득3. 의료신기술의 발전이 사회 건강증진에 가져올 실4. 내가 생각하는 의료신기술의 개선 방안1. 의료신기술의 필요성지금 현대 사회에서 의료 기술의 빠른 발달로 인한 평균 수명의 연장은 전 세계적인 인구 고령화를 야기하며 지속적인 의료비 증가와 전문 의료진의 부족은 IT기술의 발달과 함께 스마트(디지털) 헬스 케어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수요를 급증시키고 있다. 또한 환자들의 삶의 질 향상과 세계적인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인 의료비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디지털 헬스 케어는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의사와 환자 간 직접 대면하는 방식이 아닌 원격 진료 방식을 사용하여 국민들의 접근성과 편리성을 높이는 기대효과를 강조하며 스마트 의료 기술의 도입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스마트 의료 기기의 도입은 사회의 건강 증진 행동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점도 같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러한 스마트 의료 기술의 발전이 사회의 건강 증진 행동에 가져올 득과 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2. 의료신기술의 발전이 사회 건강증진에 가져올 득스마트 기기를 통한 의료 기술의 발달은 우리 사회에 여러 이득을 줄 수 있다. 첫 번째로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점이 있다. 지금까지는 아플 때마다 병원에 가서 의료진과 직접적으로 만났어야 했지만 미래에는 스마트 기기를 통해 의료진과 원격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의료진과 환자 간의 시간적, 공간적인 접근성이 높아지며 일반인의 의료 접근성 또한 높아진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병원에 가서 접수를 한 후 기다려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의료 현장에서 보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환자를 돌볼 수 있다. 그리고 장애인, 노인, 임산부와 같이 거동이 힘든 사람들과 지리적 특성으로 의료적 접근이 어려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원격 의료를 통해 집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편의성이 있다.두 번째로는 장기적으로 혹은 주기적으로 의료적 관리가 필요한 만성질환자에 대한 편리성이 있다. 만성질환자들은 계속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줄어들고 스마트 기기를 통해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체계적인 맞춤형 건강관리가 가능할 것이다.세 번째로는 국민의 건강에 대한 삶의 질을 높이고 의료 복지를 확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질병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의료비가 절감될 것이며 세계적인 고령화시대에서 복지비와 의료비의 절감과 질병을 예방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여겨지는 요즘 시대에서 스마트 의료기기는 의료비 절감은 물론 국민의 삶의 질 또한 향상시킬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따라서 결론적으로 스마트 의료기술의 발달은 지리적으로 의료 서비스에 접근이 어렵거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관리가 반드시 필요한 만성질환자들에게 시공간적의 제약 없이 모두에게 경제적으로 편리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3. 의료신기술의 발전이 사회 건강증진에 가져올 실한편 스마트 헬스 케어 시대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원격 진료는 기존의 대면진료행위와 다르게 여러 가지 문제점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첫 번째로는 안전성에 대한 우려이다. 질병을 관찰할 때 환자의 상태를 오로지 스마트 기기에 의존하여 파악해야하기 때문에 오진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스마트 기기 내의 기술적인 문제인 고장이나 오작동으로 인해 의료 사고에 대한 위험성도 존재한다.두 번째로는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보 유출의 위험이 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진료기록을 직접 수기로 작성해 보관하는 반면 의료신기술에서는 스마트 기기에 진료기록이 보관되기 때문에 보안 관리가 없다면 사용자의 개인정보, 질병정보, 건강정보 등이 유출될 수 있다. 이는 굉장히 큰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의료 신기술에 대한 불신이 심화될 수 있다.세 번째로는 마지막으로 환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경제적인 비용에 대한 문제가 있다. 현재 정부는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추가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존에 사용하던 기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최소한의 비용이어도 사용하던 기기에 존재하지 않던 의료 서비스를 추가하여 이용해야하기 때문에 추가 비용이 생길 가능성이 있고 이러한 부분이 환자에게 경제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료 기술의 보급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의료 접근성 또한 낮아질 확률이 있다.따라서 스마트 의료 신기술은 환자들의 안전과 개인의 건강정보 등의 보안, 그리고 의료적인 비용의 측면을 고려했을 때 심리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도 불안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의료 신기술을 도입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러한 문제점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4. 내가 생각하는 의료 신기술의 개선방안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를 통해 본 The American Dream1.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이란?2.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를 통해 본 아메리칸 드림.3. 내가 생각하는 아메리칸 드림과 나의 생각.1.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이란?먼저 아메리칸 드림의 정의는 the American Dream the notion that the American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system makes success possible for every individual. 즉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미국에서 이루고자 하는 가치나 사회적 수준. 민주주의?평등?많은 재산 등을 포함하는 말이다.출신배경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열심히 노력한다면 꿈을 이뤄 낼 수 있다는 믿음, 긍정적인 기회의 의미를 담은 말이기도 하다. 또한 비교적 이민이 자유로웠던 미국으로 건너 간 외국인들이 미국에 가면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게 잘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 또한 아메리칸 드림에 해당한다.2.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를 통해 본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1920년대의 미국은 과잉의 시대이자 광란의 시대였다. 또한 ‘재즈의 시대’라고 말한다.1914년에서 1918년까지의 제1차 세계전은 기존의 가치관의 붕괴와 그에 따른 쾌락의 추구를 촉진시켰고, 가치관의 혼란으로 방황하고 있던 젊은 세대들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다 도리어 환멸을 느끼고 당시의 유행 음악인 재즈에 몰두하였다. 1919년 노동절은 소위 재즈시대(The Jazz Age)가 시작된 바로 그 날이었다. 1919년 노동절 폭동에서 시작하여 1929년 10월의 경제 공황까지 10년 간의 재즈시대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이 되었다.개츠비의 삶은 어떤 측면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표상하는가에 대해 서술하자면, 먼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지는 개츠비는 물질과 환락에 빠져 지나치게 자본, 물질만을 추구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데이지를 되찾겠다는 순수한 사랑의 목적과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이상주의 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를 위해 물질적 풍요로움을 이뤄내고, 데이지를 위한 것들로 가득채운 대 저택과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연일 파티를 개최하고 자신의 목표와 꿈을 위해 노력하는 순수한 개츠비의 모습에서 타락한 20년대의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초기 아메리칸 드림의 순수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개츠비의 화려함과 물질적 풍요로움에서 개츠비 또한 자본주의적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개츠비는 자신의 순수한 사랑 즉 정신적 목적을 위해 그저 물질적 수단을 사용한 인물로 보여진다. 영화에서 개츠비는 어두운 바다에서 초록색 불빛을 바라보며 손을 뻗는 장면이 나온다. 개츠비의 순수한 꿈과 이상을 초록색 불빛을 통해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개츠비와 뷰캐넌 부부의 갈등이 고조되는데 개츠비의 이상주의 적인 모습과 톰과 데이지의 자본주의적인 모습이 극명하게 대립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츠비는 맹목적으로 순수한 사랑을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고, 데이지는 물질적인 것에 만족하며 개츠비는 무료했던 삶에 즐거움을 주는 그저 과거 속 연인일 뿐, 톰과 이혼하고 개츠비에게 돌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는 현실적인 모습을 보인다. 개츠비의 순수한 이상과 꿈이 그 시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20년대에 아메리칸드림의 의미가 많이 약해졌으며 타락한 시대상에 순수한 이상주의자의 꿈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에서 이상주의자 개츠비는 물질주의자인 데이지의 실수와 톰의 계략으로 인해 정비공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극단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물질주의에 압도된 이상주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된다. 물질에 압도된 인물들 사이에서 비록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데 있어 타락하지 않고 순수함을 유지했던 개츠비의 모습에서 닉(Nick Carraway) 만이 그의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해준다. 데이지를 되찾겠다는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과 과거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그의 이상이 타락한 시대상의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을 가진 인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츠비의 삶이 아메리칸 드림을 표상한다고 생각한다.3. 내가 생각하는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과 내 생각내가 정의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란,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 관계없이 자신의 이상을 위해 노력하면 그 꿈을 이뤄낼 수 있다는 순수한 이상‘이다. 내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이 영화에선 개츠비 만이 이런 순수한 꿈, 즉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인물로 보여 진다. 이 영화를 보며, 또 수업을 들으며 아메리칸 드림은 갈수록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정신적 행복까지 가져올 수 있을까? 라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의 맹점이라고 생각된다.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되고 목표와 수단이 자본이 되어버린 모습을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 같다. 개츠비 또한 정신적 목적 달성을 위해 물질적 수단을 사용했다. 하지만 닉은 물질에 압도 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데 있어 순수함을 유지한 개츠비의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한다. 마지막 개츠비의 이름 앞에 ’The Great’을 쓴 이유도 타락한 동부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순수한 기회의 땅 서부로 돌아가는 닉(Nick Carraway)이 유일하게 인정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고 이 영화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물질에 압도된 인간들은 비단 20년대 미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현대 사회에서도 되짚어 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나, 가치관 형성의 척도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고찰이 필요함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물질이 수단이 되고 목표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의 가치관의 척도는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나의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 여러 환경에 의해 변질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