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기 위한 방안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과거 산업혁명을 일으켰던 1차, 2차, 3차 기술들은 사회와 경제전체로 확산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주요기술들인 인터넷과 컴퓨터 기술 등은 비교적 빠른 확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비록 당장은 4차 산업혁명이 가깝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변화의 바람은 크게 불 것이고 기존의 사회 경제 질서나 삶의 방식도 송두리째 바뀌게 될 것이다. 지금 미국, 독일,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가 4차 산업혁명과 지능 정보사회라는 시대적 흐름에서 앞서 나가려고 노력중이다. 우리는 산업화에 100년 이상 늦었지만 정보화에 발맞춰 지금에 이르렀다. 아직까지는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 분야에서 미국이 단연 우위에 있지만 아직 산업 초기 단계인 만큼 우리의 노력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기 위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4차 산업혁명이 이루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이다. 고도의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이제는 육체적 노동을 넘어 인간의 거의 모든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을 2020년까지 약 710만 개의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하였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일자리들도 많이 창출될 것이고 걱정만 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일자리에 지금부터 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한국직업전망에서는 간병인, 간호사, 상담전문가 및 청소년지도자, 응급 구조사, 의사, 컴퓨터보안전문가, 빅 데이터 분석가, 사회복지사 등이 유망 직업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정보를 알고 이에 따라 4차 산업혁명에 도움이 될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코딩기술을 배우는 등 미래의 준비를 해야 될 것이다. 또한 부모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고 주도할 아이들에게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알아야 될 것이다. 미래는 내가 아닌 우리의 시대이고 융합시대인 만큼 팀을 이루어 성과를 내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통합시스템으로 창의적 문제해결력을 키워야한다. 아이들의 리더쉽을 키우고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나타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더 이상 지식만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한 분야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많은 양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인공지능의 몫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지식 중심 교육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활용할 것인가’의 역량 중심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의사소통 능력, 협업 능력이 21세기 미래인재에 필요한 핵심역량으로 강조되어지고 있다.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닌,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고 생각하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학생 참여 수업’이 시행되어지고 있지만 창의적인 인재양성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학교의 교육을 받는 나의 생각으로는 아직까지는 달라진 교육방식에 학생들이 익숙치 않아 잘 시행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취업난을 겪고 있는 우리기에 아직까지 학벌위주의 사회에서 여유롭게 토론하고 생각하고 참여하며 공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국가는 창의력 인재양성 형식의 교육을 조금 더 연구해야 되고 기업들은 사람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학벌, 학력위주가 아닌 역량 중심의 인재를 채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각과 창의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디지털 혁신인재의 육성”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전문성과 상업성이 부족해 정부지원을 받지 못하고 결국 그 아이디어를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부지원 형태는 실적위주의 정부지원이고 그러다보니 기업위주의 정부지원이 더 많은 실정이다. 개인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개인 연구 실적이라던지 창업실적, 개인의 지식센터를 통한 특허 지원 및 4차 산업 지원, 도나 지자체에서 해주는 창업지원, 그리고 중소 기업청에서 지원하는 벤처 기업 지원 등이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상업성이나 전문성이 훨씬 우수한 대기업이 수혜를 입는 경우가 다수이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 더 효과적인 국가지원을 위해 절대적 지원이 아닌 개인과 기업, 정부가 하나가 되는 연구 주도형 쿼터제를 제시한다. 연구 주도형 쿼터제란 전문성이 부족한 개인의 아이디어와 전문성, 상업성이 우수한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연구를 주도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대기업위주의 정책보다는 대기업의 전문성과 상업성을 이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면 좋은 결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 정부지원이 100이라고 가정할 때 100만큼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20퍼센트에서 30퍼센트 정도 개인이나 지지체 창업 벤처의 연구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개인과 창업지원은 대기업의 높은 기술력과 상업성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고 대기업은 순수 자본위주의 사업에서 벗어나 개인과 벤처기업간의 뛰어난 아이디어를 상업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기존의 기업과 개인/기업의 경쟁이 아닌 각자의 역할에서의 협업을 통해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정부가 협업형식의 정부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대기업이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이나 소규모 창업자의 아이디어를 지원해주어야 하는 쿼터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작은 기업도 대기업의 우수한 기술력을 이용한 생산 공정의 현대화를 이루었다. 정부주도의 쿼터제가 아니었다면 중소기업과 소규모 벤처기업은 원천기술 확보보다는 지금 당장의 실적을 위한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도 4차 산업혁명을 위해 무조건적인 실적위주의 지원보다 대기업의 기술력을 개인과 중소기업이 이용할 수 있도록 쿼터제를 시행하면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에 한걸음 더 가까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이버 익명성을 무기로 한 ‘키보드 살인’,이대로 괜찮은가.우리는 사이버 공간이란 가상현실기술 기반 컴퓨터네트워크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불과 30년 전만해도 그저 소수의 사람들이 쓰던 컴퓨터를, SF영화에서만 있을 줄 알았던 기기들이 현실화되었다.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도 많다. 특히, 사이버 공간의 소통 시스템의 익명성은 그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나는 그 익명성 때문에 아주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다. 집착이 너무 심한 내 전 남친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하자 그는 자기와 헤어지면 사이버 테러를 할 거라고 협박을 했지만 나는 그래도 헤어졌다. 그 후 나에 대한 헛소문은 내가 속한 학과에 SNS를 통해 다 퍼졌다. 분명 그의 짓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했으나 돌아온 말은 페이스북은 추적이 안 되기 때문에 심증만으로는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뻔히 누구 짓인 줄 아는데도 내가 겪은 정신적 고통을 보상받을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도 뉴스에서도 사이버 피해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사이버 익명성을 폐지하고 실명제를 도입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먼저, 사이버 익명성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 사례들을 들어보자.첫째, 익명성을 이용한 악성 댓글이다. 피해를 보는 대표적인 부류가 연예인들이다. 대표적인 악플 피해사례로 최진실을 꼽을 수 있다. 최진실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우리나라 배우였다. 그러나 2008년 익명성을 이용한 허위사실유포행위와 명예 훼손에 해당하는 악성 댓글과 루머로 인해 우울증으로 시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를 계기로 익명성에 대한 문제는 사회문제로 인식됐고 ‘사이버 모욕죄’가 제정되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익명성을 무기로 한 ‘키보드 살인’은 계속되고있다.둘째, 온라인상에서 채팅, 만남 사이트가 범죄에 악용된다. 뉴스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즐톡’이란 채팅어플에서 돈을 준다고 불러내서 살인을 저지른 사례도 있고 가출팸을 만들어 가출한 아이들끼리 성매매를 하거나 불러내서 돈을 뜯어내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마약 등의 불법 장물을 사고 판다는 거래도 많다고 했다. 이렇듯 익명성 수많은 범죄에 악용되고 있다.셋째, 사이버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이버 다중인격이란 온라인에서의 익명성을 빌려 자신의 정체성, 즉 직업, 나이, 성별, 학력 등을 모두 허위로 꾸미고 ‘새로운 나’ 를 만들어내어 활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몇 년 전에 TV방송 ‘렛미인’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SNS중독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나온 여성을 보았다. 온라인상에서는 미녀로 통했던 그녀는 자신의 사진을 포토샵으로 조작해 SNS에 올리며 친구를 늘려갔고, 자신의 일상생활을 조작한 사진들로 꾸며가며 실제와는 전혀 다른 자신을 연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심각한 과체중의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넷째, 악성 익명 커뮤니티가 점점 활성화되고 있다. 그 예가 ‘일간 베스트 저장소’ 이다. 이런 곳에서 익명성은 방종이 허용되고 폭력성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며 그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러다 보니 온갖 욕설과 악의적인 글이 난무한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을 악의적으로 비꼬아 유가족들을 상처 입히고 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을 오뎅으로 비유하는 등의 악질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베를 유해 사이트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당하게 일고 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과 행복에 대한 권리동성애란 ‘이성이 아닌 동성 간의 사랑’을 말한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나빴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동성애를 이해하고 관련법들까지 조금씩 바뀌고 있는 추세이다. 네덜란드, 포르투갈, 영국, 미국 등 총 21개국의 나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의 동성애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다. 그래서 동성애자가 아웃팅 당하는 것을 염려하며 이성애자인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가 중학교 때 학교에 레즈비언 커플이 있었다. 우연히 한 아이가 그 장면을 목격했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학교 내에서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서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차별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부터 동성애결혼을 합법화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첫째,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나 가치관이 동성애자를 심리적으로 고통스럽게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유교문화권인 한국 사회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수용도가 낮은 사회로 동성애를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로 간주한다. 이로 인해 한국 동성애자들은 고립감과 낙인을 경험할 수 있으며 심할 경우 심리적 고통과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뉴스에서 동성애를 인정해주지 않아 동반 자살한 사례를 볼 수 있었다. 동성애자들도 엄연한 인권이 있고 하나의 자유권이 있다. 그들도 이성간의 결혼과 같이 많은 혜택을 누릴 자유가 있다. “Mill의 해악의 원리”에서 보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개인은 무한한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한다면 동성애자들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동성 간의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동성애자가 결혼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동성결혼은 동성결혼을 하려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행복 또는 정상적인 삶을 얻으려는 행위이다.결혼을 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법적 혜택을 받지 못한다. ‘브라이드 그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 영상은 결혼이라는 법적보호를 받지 못하는 게이 커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6년 동안 교제한 두 게이 커플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토마스라는 사람이 옥상에서 사진을 찍다가 떨어져서 사망을 한다. 그들은 6년 동안 뜨겁게 사랑하였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지만 동성결혼 합법화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죽기 직전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도 면회거부를 당했고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비참하고 슬픈 결말이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법적인 보호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재산상속, 의료보험 등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아픈데도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는 게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이다.동성애 결혼을 합법화시킴으로서 해외로 입양되는 한국 아이들의 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동성애 합법화가 된 주가 많다. 현재, 낙태가 금지된 우리나라에서 가족이 없는 아이들은 1만 명이 넘는 상황이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가족들이 간절히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까지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아이를 입양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입양문제를 해결해왔지만 동성애 결혼 합법화로 해외로 입양되는 한국 아이들의 수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성이 같기 때문에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울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YOUTUBE’라는 동영상 사이트에서 동성애자 아이들과 부모의 인터뷰를 보고 절 때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이들과 부모 모두 행복해했고 아이들의 교육 또한 올바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돈이 있어야 성공한 것인가성공이란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다. 대부분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한테 ‘성공했다’라고 말한다. 과연 이것이 성공을 한 것일까? 나는 이런 것을 성공이라 표현하지 않는다. 얼마 전 ‘그녀들의 집’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아버지의 학대를 받았던 세 자매의 미래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그 중 주인공인 둘째는 어렸을 때부터 1등만 하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을 따라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행복해지고 싶어서’일 것이다. 좋은 가정을 꾸려서 자신의 자녀에게 부족함 없이 살게 해주고 싶은 것, 자신의 노후에 즐거운 여행도 다니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 돈을 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찾는 행복을 퇴폐업소에 가 찾는 등 옳지 않은 행복을 찾는다. 지금부터 왜 돈과 성공이 연관관계가 없다는 걸 알아보자.우리나라가 헬조선이라고 불릴 만큼 과거에 비해 힘들어졌다는데 동의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행복하다는 느끼는 사람들이 적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에 이런 신조어가 나왔을 것이다. 내가 놀랐던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사람들의 이런 생각이 경제적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OECD 통계자료를 보면 행복지수 통계자료에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OECD국가 중 10점 만점에 4.2점을 받아 34개국 중 32위였다. 자살률도 압도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높아서 10년 넘게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가계수익은 OECD국가들 중 중간정도에 위치하고 있었고 세금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또한 가처분소득도 연간 3퍼센트 가까이 계속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지수가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인데도 행복지수와 자살률은 OECD국가 중 최하위였던 것이다.돈이 많은데도 불행한 상황들은 많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셋째딸 윤형씨가 집안의 반대로 남자 친구와의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자살을 선택했다는 뉴스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비참한 결말을 보고도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15년간 대학교 정문 앞 골목에서 토스트를 구워 팔던 할머니가 있었다. 비록 작은 리어카를 끌고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값싼 토스트를 파시는 할머니었지만 언제나 미소는 온화했고, 토스트는 늘 두툼했고, 잔소리는 정겨웠다고 한다. 할머니는 토스트를 팔아 뇌종양을 앓고 있는 딸과 백혈병에 걸린 손녀를 돌보았다. 이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할머니는 생전에 시신기증 약속을 했다고 한다. 이젠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 토스트를 팔던 자리에는 꽃이 놓이고, 인터넷커뮤니티에는 추모의 글이 가득했다. 나는 비록 가난한 늙은 할머니지만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가난했지만 할머니의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것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나는 돈을 벌고 싶어하는 이유도 사실상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행복해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자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세계적인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행복점수를 매기는 공식을 만들었다. 그 공식은 ‘행복은 소유 나누기 욕망’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은 10인데 욕망이 100이면 행복점수는 10인 것이다. 아무리 소유해도 욕망이 무한대이면 행복은 제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기에 자신이 돈이 많아도 상대적으로 불행할 수 있다. 결국 행복하려면 욕망을 줄이고 자기 생활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러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을 읽고.우리는 소유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더 많이, 더 특별한 것을 소유할수록 자신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하지만 급격한 사회 성장이 이루어지며 소유는 불필요해지고 접속의 편리함이 강조되는 시대가 왔다. 하루하루 변하는 세상에서 소유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 생각이 되어버렸다. 일정기간동안 여러가지 상품과 지식, 문화를 구독하고 공유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보나 관리차원에서 보나 소유를 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편리함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점점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공들여 관리하거나 책임을 지는 것보다 누군가가 대신 해주기를 바란다. 소유의 종말에서 제러미 리프킨은 ‘더 이상 소유는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소유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소유의 종말은 과연 일어나게 될까? [소유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나의 생각을 말하기 앞서 [소유의 종말]이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앞으로 경제 생활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물건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서비스와 경험에 대한 접속이 될 것이다. 소유권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접속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리프킨은 제품의 생산과 판매가 목적이었던 산업시대를 넘어 넘치는 제품과 짧아지는 제품의 생명주기로 인해 더 이상 재산의 소유보다는 문화, 경험, 관계 등 서비스로의 목적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 생활의 대부분이 네트워크 사회, 사이버스페이스로 이동되고 따라서 접속의 가치는 점점 커지고 있다. 또한 이 것은 권력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어 얼만큼의 접속권을 가지는지는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상품에 대한 재정적 자본과 관리 부담을 원하지 않기에 소유가 아닌 대여하는 소비를 선호하게 되고 기업들은 접속의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책에서 리프킨이 접속의 시대에 대해 우려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인간의 상품화’와 ‘문화의 상실’이다. 개인의 체험과 시간이 상품화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의 이익창출을 위해 경험하는 것에서의 관계에서는 신뢰와 공감이 제대로 존재하기 힘들고 이러한 관계에서 개인은 하나의 자아로 존재하기 힘들다. 또한 자본주의는 문화의 영역까지 침투했다. 인류가 쌓아온 문화를 통해 기업은 체험과 시간을 상품화하고 다른 곳의 문화를 상품화시키는 과정에서 문화의 상실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의 사회가 점점 더 소외되는 사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편리성에 의존하며 우리는 우리를 점점 잃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사람들이 소유보다 접속하기를 원하는 것은 접속에 대한 편리함 때문이다. 재산을 소유하면그 재산을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하지만 접속한다면 그 재산에 구속되지 않아도 되고 불필요해지면 언제라도 미련 없이 뒤돌아 설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를 책임과 돈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해주는 접속을 선호한다. 나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러한 편리함을 우리는 자유로움이라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스스로 집을 짓고 먹을 것을 구했지만 지금은 아파트에 살며 건물의 관리조차 하지 않는다. 편리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만큼 자율성과 독립성을 잃어가고 있다. 네트워크라는 편리함에 파묻혀 네트워크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가 되어가고 있다. 사회가 짜 놓은 틀 안에서 편리하다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상품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점점 상품이 우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이 책의 저자인 제러미 리프킨의 의견에 조금 반론을 제기해볼까 한다. 나는 리프킨의 생각이 너무 근시안적 발상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미 많은 곳에서 접속의 경제가 열리고 있지만 더 이상 ‘소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사람들이 단순히 물건들이 계속적으로 진화,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소유 대신 접속하기를 택한 것은 아니다. 그 상품이나 지식을 소유하고 싶지만 경제적 한계 때문에 ‘효용성’을 위해 구독을 통해 일시적으로 나마 만족감을 얻고 싶은 것이다. 즉, 그들이 접속을 하는 이유는 소유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급속한 변화가 따르는 세상에, 그들의 네트워크에 연결되기 위해 경제적으로 덜 부담이 가는 구독이라는 차선책을 택하는 것이다. 경제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과 기득권층이 소유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소유의 종말이 왔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식이나 돈을 소유하고 싶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에 구독하고 일시적으로 그 것을 향유한다. 접속의 전제는 소유욕에 있다. 사람들이 오늘을 사는 이유는 내일을 소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회가 공유경제로 변화한다고 해도 네트워크 안에서 돈이나 돈의 역할을 하는 것들은 소유되고 이동될 것이다.리프킨은 책에서 소유권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접속의 시대가 열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접속은 우리 삶 깊은 곳에 들어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접속의 시대가 가져올 수 있는 여러가지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접속도 결국 돈과 연결되기에 이 혜택을 모두가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에서 앞으로는 연결된 자와 연결되지 않은 자의 격차로 변동될 것이며 후자에 있어 더욱 큰 격차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낮은 임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재정적 자산, 교육 수준,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하기에 접속의 시대에 접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다. 시간과 정보, 사람들의 관계와 경험까지 상품화가 되어버리는 세상에서 그에 대한 접속 권한까지 돈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상업이라는 것에 갇힌 인류의 문화발전을 기대할 수는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접속권을 가진 공급자들은 그 권력을 악용하여 사용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고 가난하고 낮은 임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더욱 더 소외된 비접속자 계층으로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공유하고 창조하며 문화를 만들던 옛날과 달리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문화의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 인간 개개인은 개별적인 독립성을 상실하고 ‘자아’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