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의 전개와 의의 130510 박기원목 차 의병전쟁이란 ?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대한제국군의 무기의병전쟁이란 ? 의병의 사전적 의미 :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 또는 그 군대의 병사 . 을미사변을 계기로 을미의병 (1895) 부터 을사의병 (1905), 정미의병 (1907) 으로 이어지는 전개과정을 거침 정미의병 이후에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인해 다소 의병 활동이 소강되었으며 잔존세력들이 만주 등의 국외로 나가 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됨 동학농민운동에도 항일적인 요소가 있으나 그 시작이 다른 의병전쟁과는 성격이 달라 배제시킴을미의병 개요 :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시발점이 되어 최초의 대규모 항일 의병으로 이어진 사건 전개 과정 1895 년 충남 회덕 , 유성 등지에서 문석봉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킴 1896 년 1 월 경북 , 강원도 , 함경도 등지에서 지역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고 흩어짐 1896 년 3 월 나주의 기우만을 중심으로 광주에서 창의군을 일으켰으나 이 역시 관군의 공격을 받고 해산 함 의의와 한계 최초의 항일의병이며 본격적인 항일의병이라는 의의가 있지만 의병장이 양반에 국한되는 등의 참여 계층의 한계를 보였으며 위정척사적이고 기존 사상을 탈피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임을사의 병 을사늑약 (1905) 으로 잃은 주권을 되찾기 위해 구국적 성격을 띄고 일어난 항일의병 1905 년 8 월 원주에서 원용팔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원주진의군의 배신으로 초기에 진압됨 이후 황해 , 평안의 이진룡 , 조맹선 , 전덕원등의 의병장이 일어남 특히 을사조약 이후 큰 전투가 많았는데 홍주의 민종식 , 태인의 최익현 , 경북 평해 신돌석의 의병활동이 유명함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더불어 평민의병장의 등장 , 유격전에 유리한 소규모 부대로의 개편 등 을미의병과 다른 성격을 띄었다정미의병 1907 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 7 조약 체결 , 군대해산을 단행한 일본에 대해 육군 참령 박승환이 자결로써 저항했고 시위대 병사들은 시가전으로 의병전쟁의 시작을 알림 이후 항일의병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1907 년 가을 ~ 1908 년 봄까지 의병의 세력은 최고조에 이르러 13 도 창의군 창설로 이어짐 양주에서 13 도 창의군을 창설했지만 많은 한계점을 노출하고 실패하였는데 특히 양반 출신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당시 신돌석 , 홍범도 같은 평민출신 용장들이 합류하지 못함 당시 이인영은 총대장임에도 부친상을 위해 총대장직을 위임하고 떠났는데 많은 의병들이 이인영에게 복귀를 요구하였으나 거절하는 등의 한계점을 보이기도 했음 1908 년 서울진공작전에 실패로 13 도 창의군은 해산하고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가 의병 활동을 이어나감이후 1909 년까지 정미의병이 이어졌고 , 당시 가장 의병 세력이 강성했던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남한대토벌작전을 실행 일본군은 남쪽지방 해안가부터 산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수색을 통해 의병의 씨를 말리고자했으며 의심이 가는 자들 을 의병뿐 아니라 양민들도 처형하여 식민 지배의 토대를 다지기도 함 전국적으로 의병 소탕 작전이 끝나자 일본은 1910 년 8 월 조선을 합방하였고 1915 년 의병세력이 완전히 소멸해 의병전쟁은 끝이 남 . 국권회복의식이 강조되었으나 새로운 정치상의 제시가 결여 됨 전대의 의병보다 참여 계층 , 세력 등이 확대됐고 무엇보다 해산 군인들의 가세로 향상된 전투력을 보임 이후 잔존 세력들이 독립군에 가세하면서 항일전쟁을 이어갔으며 독립군의 근간이 되었음{nameOfApplication=Show}
일제강점기의 도시발전 13510 박기원차 례 도시의 형성과 발전 이중도시 도시생활과 도시문제시군도별 1911 1915 1925 1935 1943 인구수 ( 명 ) 인구수 ( 명 ) 인구수 ( 명 ) 인구수 ( 명 ) 인구수 ( 명 ) 경성부 292,667 241,085 302,711 404,202 1,078,178 광주군 83,751 84,347 109,366 52,674 83,889 평양부 155,169 45,793 109,285 172,746 368,288 나주군 68,250 120,015 146,686 167,853 194,672 원산부 42,977 22,413 33,538 58,409 123,444 목포부 80,925 12,782 25,762 59,046 72,981 무안군 - 135,664 167,362 189,187 222,499 부산부 99,833 60,804 103,522 180,271 325,312 수원군 78,443 131,329 147,297 165,496 198,743 인천부 59,645 31,264 53,593 80,420 240,697 울산군 80,841 124,010 136,294 148,737 154,346 1911~1943 년 까지 주요 도시의 인구 변화경성으로 본 이중도시의 형성 1885 년도부터 남산의 일본 공사관을 중심으로 서울에 일본인 거류지 형성하였 고 1901 년에는 일본식 행정구역 시스템을 도입하여 사용 . 일본식 지명 사용구역을 살펴보 면 이중도시의 성격이 명확히 나타난다 . 남촌에는 각종 토목공사와 위생시설 , 사회사업 등의 예산이 투입됐지만 북촌에는 그런 공공예산의 투입이 미비했음 . 출처 : 김종근 , 식민도시 경성의 이중도시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서울학연구 , 제 38 호 , 2010, pp.33.도시생활과 도시문제 당시 도시에는 많은 소비재상품들이 들어왔으며 대부분의 소시민들은 소비재상품을 구매하는데 소비 함 . 소비재구매 뿐 아니라 거주지 문제도 컸음 . 또한 많은 수의 인구가 도시로 모이면서 극심한 실업 문제를 야기시킴 . 사실상 모든 도시에는 일본인 거류지와 조선인 거류지를 나누어 개발하였고 그 차이가 심해 조선인들의 반발을 삼 .종로 2 가의 모습충무로 2 가의 모습 ( 혼마치 ){nameOfApplication=Show}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를 읽고 나서일단 이 책은 사학과의 교수님이신 강봉룡교수님이 원장으로 계시는 도서문화연구원에서 출판된 책이다. 처음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큰 섬인 제주도에 관한 서평을 쓰려했는데 내용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적당한 두께와 과제의 가이드라인에 부합한 내용의 책을 다시 찾게 되었는데 마침 도서관에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면모를 뽐내는 책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였다. 처음 책의 제목을 보고나서 서평을 이 책으로 써야겠다고그림 1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 4강하게 생각이 들었으며 제목만 보고도 대충의 내용이 짐작 됐다. 또한 책의 두께도 적당했으며 무엇보다도 도서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책이기 때문에 도서문화연구원에서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책을 쓰는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에 궁금증도 해결하고 서평도 쓰고 1석 2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책 제목은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연구의 대상은 섬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일 것이며 삶이 들어갔으니 생활방식 또한 연구 대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틀만 예상할 수 있었지 연구의 내용이 얼마나 깊이 들어갈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생각 못했지만 큰 틀에 대한 내 생각은 정확히 맞아들었고 세세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목차를 살펴보니 의식주 및 생산·생업, 교통·교역 도구에 대한 연구가 나왔으며 섬사람들의 풍속 및 생활연구가 이어졌다. 목차를 봤을 때 생각보다 세세한 부분까지 있어서 놀랐지만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이 작은 섬들에서 내용이 나와 봤자 얼마나 깊고 넓게 나오겠냐고 생각했으나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하자 깊고 자세한 서술에 놀랐다. 하나 예를 들자면 본인을 포함하여 비전공자나 일반인이 봤을 때는 외형만 다르고 똑같은 항아리라고 생각하겠지만 항아리라는 큰 틀 안에서도 각자의 쓰임새와 이름이 모두 달랐다. 또한 도구들을 만드는 방법을 거주민에게 직접 듣고 유례까지 서술하여 신빙성을 높였으며 하나도 빠짐없이 컬러 사진 게 놀라웠다. 이후 전통시대에서 아궁이에서 밥을 지을 때 사용하던 부지깽이의 종류인 비땅이 소개된다. 이것은 불을 지필 때나 헤칠 때 쓰는 것인데 이런 것들을 참고해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고증할 때 참고하면 매우 좋을 것 같다. 고구마를 찔 때 받치는 겉갱이, 시루에서 떡을 찔 때 쓰는 튀틀이 등 정말 사소한 도구들 까지도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서 자은도와 암태도만의 독특한 식품가공법이 소개 되는데 토속음식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고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식품은 숭쿠수제비이다. 송쿠는 소나무 속껍질(송기)인데 소나무 속껍질을 말려내어 밀가루와 섞어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다는데 소나무 속껍질을 먹는다는 것이 너무 흥미로웠다. 도대체 왜 소나무 속껍질을 먹게 되었을까? 과거에 먹을 것이 없어서 먹기 시작할걸까 아님 정말 맛있거나 건강에 좋은 별미라도 되는 걸까? 책을 읽다 문득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다. 결과는 다른 지역에서도 송기를 먹는 것으로 확인 됐다. 특히 송기떡은 조선시대 연속된 전란을 맞게 된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자 구황식품으로 만들어먹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송기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은도와 임태도에서처럼 수제비를 빚어 먹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섬에서는 곡식이 귀했을 텐데 송기를 생으로 먹지 않고 왜 수제비를 떠먹게 됐는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식기에는 밥바가지라는 재미있는 도구가 나오는데 KBS드라마 추노에서 노비들이 책에 나온 밥바가지와 정말 똑같이 생긴 그릇에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노비들은 그릇도 없이 박에다 밥을 먹는구나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식생활 도구 다음에는 주생활 도구가 나오는데 시작은 남서해 도서지역 전통 가옥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부엌의 역할을 하는 정지와 정지에 딸린 작은 방인 모방이 있다. 정지에서는 밥을 하며 아궁이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보일러 역할을 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정지에서는 취사와 난방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모방은 정지에 딸린 작은 과거인 1970년대만 해도 땔감을 구하는 것은 겨울을 나기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였기 때문에 자은도와 암태도에서도 역시 안정적으로 땔감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깎음은 크게 개인소유와 공동소유가 있는데 개인소유는 말 그대로 개인 간의 거래를 통해 깎음을 소유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나오는 땔감들은 순전히 개인이 갖는다. 공동소유 깎음은 마을 공동체가 가꾸는 경우도 있고 집안이 가꾸는 경우가 있다. 공동소유의 깎음은 마을 사람들 혹은 집안 사람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동등하게 일하고 나온 땔감들 역시 동등하게 나눠 갖는다. 한 집안에서 소유한 깎음은 상속으로 대물림 되어 대대로 내려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자은도 사람들이 땔감을 채취한 기록을 살펴보면 거의 매일같이 나가 땔감을 채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땔감은 중요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간단한 수렵 방식이 두 가지 소개 된다. 한 가지는 꿩을 잡는 올가미인 ‘꿩치’와 청둥오리는 잡는 ‘오리덮치기’라는 그물이다. 현재에도 사용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초적인 수렵 도구들 같다. 섬이나 바닷가에서는 부족한 농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간척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자은도에서도 역시 간척사업을 하였는데 자은도에서는 그것을 ‘원’이라고 부른다. 바다에 둑을 쌓고 바닷물을 막아 그 안에 밭을 만드는 방식인데 이때 둑을 ‘원둑’, 둑 안쪽을 ‘원안’, 원안에 만든 밭을 ‘갯논’ 또는 ‘갯밭’이라고 부르며 갯논의 반대말은 ‘육답’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서북쪽에는 갯논이 없는데 이는 지역적 특징 때문이다. 서북쪽 지역은 모래밭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둑을 세울 수 없을뿐더러 땅에서 샘이 솟기 때문에 굳이 갯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형성된 갯논은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가졌으나 관리는 일종의 계모임을 만들어 공동으로 관리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암태도에 남아있는데 암태도 오상원의 ‘원계’에는 계칙이 있을 정도로 공동 관리를 추구했다. 왜냐하면 바다에 둑을 쌓아 만든 것이기 때문에 혹여나 관리 소흘로 독 후릿그물, 대매기, 주벅등의 그물어법이 소개 되는데 사람이 손으로 잡고 사용하거나 던지는 방법 뿐 아니라 바닷가에 말뚝을 박고 둘러치는 일종의 함정어법도 나온다. 함정어법에는 독살, 덤장, 매기, 쑤기, 가래 등이 나온다. 낚시법은 물고기 마다 다른 방식이 전해지며 민어주낙과 오징어낚시, 숭어낚시, 부세주낙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는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 작살어법이 등장한다. 어업활동을 마지막으로 다음장인 운반기술과 도구로 넘어가게 되는데 다른 고장과 마찬가지로 지게가 대표적인 운송도구로 등장하고 바작과 낙지를 등에 지고 다니는 조락, 젓갈을 넣는 젓단지가 소개된다. 앞서 나온 운반도구들은 남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이고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운반도구들이 나온다. 사극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또가리와 물동우는 물론 바구나, 동고리, 밥구리가 있다. 여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대부분 음식을 넣어 다니는 용도로 사용된다. 또한 남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항아리와 같은 무거운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여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은 여자들의 사정에 맞게 가벼운 재질로 된 도구들이 주를 이룬다. 6장에서는 교통·교역 도구가 나오는데 섬 사람들은 제한적인 공간에서 나오는 생산물들로는 자급자족하기 힘들기 때문에 다른 마을과 교류는 생활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자은도에도 큰 포구가 형성되어 주변의 섬들이나 내륙지방과 교역을 하였고 흑산도에서 만든 홍어와 곡식 및 지붕을 만들 볏짚들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은도와 암태도, 추포도는 썰물 때가 되면 섬 사이를 걸어서 왕래하기도 하였는데 섬과 섬사이에 놓은 징검다리를 ‘노도’라고 부른다. 노도는 언제 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19세기 말 고종 13년 병자년 흉년 때 곡식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이 갯고랑을 건너다 빠져 죽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를 사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때까지는 아마 노도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도가 있었다면 갯고랑에 빠져 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미신은 비금도와 도초도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을 막아내는 방책은 서로 다른 양상을 띤다. 비금도와 도초도는 장군석을 세워 바위의 사악한 기운을 막으려했다. 석상들은 마을 사람들이 사악한 바위가 존재한다고 생각 되는 곳 근처에 세워졌으며 석상의 기단에는 건립에 공헌한 사람들이 이름을 세기기도 하였다. 자은도와 암태도에서는 상술했듯이 나무를 심는 식으로 방사를 하였는데 마을 소유의 땅이 아닌 곳에 사악한 바위가 있으면 공동으로 토지나 산을 구매하여 방사하였으며 그렇게 구입한 산을 동네산이라고 부른다. 또한 공동 소유의 깎음에 존재할 경우에는 바위 주변의 나무들을 잘라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방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비금도와 도초도, 자은도·암태도의 거리는 약 7키로미터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비금도와 도초도에서는 석공의 재료가 생산되었으며 그 재료들로 석물들을 제작하여 석물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반면에 자은도와 암태도 사람들은 석공의 기술이 전해지지 않아 다른 지역과의 교역으로 석물들을 충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석공 기술이 충분히 발달한 비금도와 도초도에서는 방사를 할 때 석물 세웠던 것이며 반대로 석공 기술이 부족한 자은도와 암태도에서는 나무를 심어 방사를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은도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가계부를 분석하는 글이 나온다. 특이하게도 윤씨 할아버지는 섬사람이지만 어업 활동을 일절 하지 않고 오직 농업으로만 생업을 이어나갔다. 이에 가계부에는 물고기나 젓갈 따위를 구매한 이력이 주를 이룬다. 윤씨 할아버지가 산 물고기들은 조기, 새우, 송어, 병어, 강다리, 민어 등이 있는데 조기는 흑산도 어장에서 잡은 생선들을 자은도까지 팔러 온 것이 확인 됐고 새우와 송어, 병어는 자은도의 어장에서 강다리는 비금도에서 잡았을 것으로 추정 되나 오징어는 어디서 잡은건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가계부를 통하여서 섬사람이라 해도 어업에 종사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램이다.
중국의 권토중래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차례1. 서론1.1. 19세기의 국제 정세1.2. 19세기의 중국2. 20세기의 중국2.1. 중화민국의 수립과 국공내전3. 공산주의의 중국과 현대사회의 중국3.1. 중국의 초기 토지개혁3.2. 소련과의 대립과 독자노선3.2. 중국의 개방과 성장4. 결론4.1. 맺음말4.2. 참고문헌1.서론1.1. 19세기의 국제 정세19세기는 한마디로 평화의 시기였다. 물론 분쟁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시기들과 비교해보면 매우 평화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을 먼저 살펴본다면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분쟁이 가장 심했던 유럽에서 각국들이 조차 평화 조약을 맺고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등의 사상들에 영향을 받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고 대표적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함에도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분열 돼 있었으며 하나의 통일체로 결집 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오랜 기간의 분열을 종식하고 하나의 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이때부터 유럽을 필두로 현대 사회 국가들의 원형이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형태의 국가들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을 갖고 다시 태어난 유럽 국가들은 과거에서처럼 서로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며 경쟁하지는 않았으나 식민지라는 새로운 요소를 통해 영토를 확장해 나가며 간접적인 경쟁을 시작해 나갔다. 이런 식민지 경쟁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앞세워 진행되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편협적인 사고를 가지게 만들어 결국엔 인류사 최대의 비극인 양차대전의 주범인 열강들을 만들게 되었다. 19세기에는 괄목할 만한 사상과 문학들이 매우 많이 등장하였는데 특히 산업혁명의 발달과 맞물려 발생된 잉여 자원에 대해서 어떻게 분배하고 공급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뿐 아니라 중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성립이 가장 중요한 등장이편에서 힌트를 얻어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아편을 대량으로 수입해와 중국에 되파는 형식으로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했고 이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영국이 무역적자를 해소하는데 성공함과 동시에 중국에는 막대한 양의 아편이 풀리면서 마약 중독자들이 속출했고 이는 사회 문제로까지 번졌다. 이에 중국 황실에서는 아편 수입을 금지하여 영국과의 교역을 하예 끊으려 한다. 이에 영국은 무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의회의 승인을 받아 약 4천여 명의 원정군을 파병했고 인도를 통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여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당시 청나라는 매우 낙후된 군대를 보유했기 때문에 당시 전 세계를 누비며 식민지를 개척하는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으며 영국군은 파죽지세로 텐진(天神) 인근까지 들어와 청나라를 압박했다. 영국군의 위력을 눈으로 본 기선(琦善)은 황제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광동협정을 맺어 결국 파면에 이른다. 이 소식을 보고 들은 청나라 국민들은 분노하여 영국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영국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진다. 상해를 점령당하고 난징까지 공격 받는 청나라는 속수무책으로 영국이 요구하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평등 조약인 남경 조약이 체결 되고 본격적인 유럽 열강들의 침략이 시작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에게는 안타깝지만 아직 2차 아편 전쟁이 남아있었다. 영국은 불평등 조약으로 청나라를 개방시켰지만 여전히 적은 교역량에 불만을 가졌으며 중국내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해 나갈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에 애로우 사건을 터트려 제2차 아편 전쟁을 시작했다. 2차 아편전쟁 역시 영·프 연합군의 손쉬운 승리로 끝났고 또 한 번의 불평등 조약인 텐진(天神)조약을 맺게 된다. 두 차례 서방 국가와 뜨거운 만남을 가졌던 청나라는 이로 인해 넓은 영토 및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신뢰를 잃었다. 또한 백성들은 서양 오랑캐들에게 패배하며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황실에 대한 실망감과 막대한 배상금을 갚기 위한 무거운 세금을 떠안게 됐으므로 그 분노는 극에 달해가기는 쉽지 않았다. 20세기 들어서서 중국은 신해혁명을 통해 청조가 멸망하고 아시아 최초로 공화제를 토대로 하는 중화민국을 수립한다. 초기에는 쑨원이 대총통이었으나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으나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용함과 동시에 국민들의 지지를 잃고 1915년에는 중화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즉위하려했으나 지방 군벌들이 반발하여 봉기하고 심지어는 지지기반인 북양군의 일부 계파에게서도 반발을 샀다. 이에 1916년 3월에 다시 중화민국을 선포하며 총통의 자리에 돌아가기를 희망했으나 이미 지방 군벌들을 막을 순 없었다. 청나라가 망하고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중국은 새로운 출발을 시도했으나 수뇌부의 불협화음으로 지방 군벌들이 봉기하게 되는 역효과만 낳았고 이것은 사실상 중국을 내란 상태로 귀결시켰으며 중국의 혼란한 상황은 열강들이 중국에 개입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이에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의 군벌들을 진압하고 지지부진하던 혁명의 마무리를 위해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총 2년간 북벌을 시작하였다. 특히 북벌의 대상은 당시 군벌들 중 가장 강력했던 북양정부의 군벌들이었다. 북벌 당시에는 소련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장제스의 북벌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북벌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 돼 있었으며 심지어 서로간의 대립이 심하여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는 그 지역의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축출하는 등의 사건도 일어났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북벌군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하여튼 파죽지세로 북벌을 진행해 나갔고 북벌군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민중들은 북벌군에게 적극 협력하였고 민중과 투항군을 흡수하여 2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으나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세운 국민정부 사이에 마찰이 생겨 약간의 불협화음을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북벌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1927년 2월에는 항저우를 3월에는 상해와 난징을 점령하며 마침내 북벌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상해를 점령한 뒤 상해에 있던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난징잃는다 해도 개의치 않았다. 공산당은 자신의 해방구들을 구심점으로 세력을 형성했으며 토지개혁 등의 국민들을 위해 정책을 구상했다. 1947년 3월 국민당은 옌안을 공격하면서 공산당을 압박하려고 했으나 이미 공산당 핵심 인물들과 군대는 탈출한 뒤였다. 겉으로는 크나큰 승리처럼 홍보하고 다녔으나 실속 없는 승리였으며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거둔 마지막 승리로 기록 된다. 반면 공산당은 초반 국민당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했으나 공산당은 미국을 통해 정전 협상을 이끌어 냈으며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다. 1948년 초에는 이미 만주와 허베이 지역을 대부분 장악했고 이에 장제스는 만주에 남은 병력들에게 요새화하여 전투를 이어나갈 것을 지시했으나 이것은 자충수가 되고 만다. 당시 국민당의 보급로는 이미 공산당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고립되라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후 금주와 창춘, 선양까지 함락 당하며 국민당은 만주에서 완전히 축출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매우 많은 국민들의 죽음을 야기하여 공산당 내부에서도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요심전역에서 승리를 거둔 공산당은 서주 공략을 실시하였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 국민혁명군과 인민해방군이 전면으로 붙은 전투로 국민혁명군이 참패를 하게 됨과 동시에 국민당의 내분으로 장제스가 총통직에서 물러나고 리쭝런이 총통 대리로 임명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동부와 서부를 점령한 마오쩌둥은 마지막으로 남은 남부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곧바로 남진을 명령한다. 1948년 9월에는 산둥 반도의 성도 제남을 점령하고 베이징까지 점령하였다. 더불어 산시 성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옌시산 또한 같이 몰락하게 되었다. 그는 청조부터 산시 성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1948년 9월 28일 시작된 인민해방군의 공세로 대부분의 군사를 잃었고 부하들의 반란까지 겹치며 사실상 모든 세력을 잃었다. 1949년 2월 난징으로 가 리쭝런에게 원병을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의 문제가 대두 되었다. 그러나 중공지도부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였고 이는 엄청난 문제를 가져온다. 개국 초기 토지개혁에만 집중할 수 없어 충분한 연구와 간부들이 투입 되지 못했고 투입된 간부들도 현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고 빈농들과의 마찰을 빚을 뿐 이었다. 또한 열정과 이해도가 결여된 현장간부들은 그저 토지개혁을 빨리 끝내고 싶었으며 승진과 같은 부차적 요소에만 관심을 갖는 경우가 허다했다. 1951년 12월에는 강남의 토지개혁이 거의 완성될 쯤 먼저 시행 된 토지개혁에 대한 보고서가 들어왔는데 이 보고서는 참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강남 토지개혁 역시 동남국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비슷한 문제들이 속출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보고서에는 지주를 큰 문제로 삼고 있는데 이들은 토지를 뺏기지 않기 위해 차명으로 토지를 숨긴다거나 자발적인 거짓 토지 개혁을 이루어 농민들을 속이는 등의 문제를 야기했으며 반혁명 세력들이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키는 등의 생각지 못한 문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동남국은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도구로 삼아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적극적인 폭력사용을 허용할 것을 중앙에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때문인지 강남 토지개혁 때는 전의 토지개혁 때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폭력이 사용 되었다. 그리하여 1952년까지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결과는 실패였다. 개혁의 초기 목표였던 지주 계급의 말살은 이루었지만 소작이 사라지지 않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이는 분배받은 토지가 너무 적어 자급자족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였고 결국 증다죽소현상을 토지개혁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다. 또한 기대했던 농업 생산량의 증가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물론 1953년 중국의 생산량은 항일전쟁 이전으로 회복되긴 했으나 더 이상의 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부농과 중농들은 토지 몰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농업에 대한 투자를 줄였으며 이는 자연히 농업 생산량의 저하로 이어졌다. 이자있다.
도선과 고려 왕조-도선과 도선설화는 고려 왕조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차례1. 서론1.1. 도선의 생애2.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과 도선설화2.1. 도선의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과 연구 성과2.2. 도선과 도선설화의 정치적 활용2.3. 영암지역과 왕건의 관계3. 결론3,1. 맺음말3.2. 참고문헌1. 서론1.1. 도선의 생애도선은 상당히 어지러운 시기인 통일 신라 말에 태어나 나름의 사상과 업적을 이룬 인물로 평가받는다. 도선의 호는 옥룡자(玉龍子) 요공국사(了空國師)·선각국사(先覺國師)이며 성은 김(金), 출생지는 전남 영암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도선의 호 중에서 국사(國師)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는 후대 고려 왕들이 오랜 기간 걸쳐 추증하였기 때문이다.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스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전국 유명 사찰을 돌아다니며 불경을 공부하다 4년 뒤 846년(문성왕 8년) 신승(神僧)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당시 불교계에서 새로운 종파로 등장한 선종의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동리선문(桐裏禪門)의 혜철(惠徹)에게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가르침을 받았다. 850년에는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때 후학들이 매우 많이 몰려왔으며 평소 도선을 존경하던 현강왕이 궁으로 데려와 머물기를 바랐으나 도선은 옥룡사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다. 도선은 혜철의 가르침을 받아 선승(禪僧)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사실상 풍수지리의 대가로 더욱 유명했다. 그러나 그를 국사의 위치에까지 올려준 풍수지리를 누구에게서 언제 배웠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후 도선은 898년(효공왕 2년)에 72세로 입적하였으며 사후 효공왕 때 요공국사(了空國師), 고려 현종 때 대선사(大禪師), 숙종 때 왕사(王師), 인종 때 선각국사(先覺國師)의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워주기도 하였다. 이렇듯 도선은 생전에서보다 사후 대접을 더 잘 받았다. 도선은 자신통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조금 더 살펴보자면 도선의 비보사탑설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비보이며 다른 하나는 압승(壓勝)이다. 비보는 앞에서 살펴봤듯이 부족한 자연환경에 인위적인 작용을 통하여 지세를 돋구는 것이고 압승은 그와 반대로 자연환경의 과한 부분을 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선은 비보풍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밀교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연구와 음양·오행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만을 서술할 것이다. 일단 음양·오행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먼저 살펴보자면「고려사」를 펼쳐봐야 한다.「고려사」에는 도선이 국토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있는 힌트가 숨어있다.사천 소감 우필홍이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옥륭기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의 본 뿌리는 수요 줄기는 목이라 검은 것이 부모로 되고 푸른 것이 몸으로 되고 있으니 만약 풍속이 토에 순응하면 창성할 것이나, 토에 거역하면 재앙이 생긴다.’ 라고 하였습니다. 풍속이란 임금과 신하들의 의복, 관과 일산, 음악의 악조, 전례에 쓰는 기물 등입니다. 그러므로 금후로 쓸 것이며, 여자는 검은 나사를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산에는 소나무를 빽빽하게 심어서 무성하게 키울 것이며 기명은 모두 동과 유기와 질그릇을 써서 토풍에 순응하게 할 것입니다.도선은 고려사에도 잘 나타나있듯이 국토를 음양·오행 사상을 기반으로 비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스승인 혜철은 중국의 일행으로부터 법맥을 이어 받았으므로 혜철의 제자인 도선 또한 일행의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도선의 비보사탑설을 밀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최유청의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병서(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幷序)」해석에 있어서 나타난다. 서윤길 교수는 도선이 밀교적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중 한명인데 그는 비문에서 익(益)자리 잡은 고려 왕실은 도선을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겨 그를 승려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국사의 자리까지 추증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도선은 태조 왕건을 만나기는커녕 고려 왕조 탄생에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조는 도대체 왜 도선을 국사의 위치까지 올려놓았을까? 일단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선설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선은 개국공신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그와 맞지 않게 생애가 불투명한 이중적인 인물이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항간에 설화로 전승되다 도선 사후 252년만인 1150년에 최유청이 세운 「백계산옥룡사증익선각국사비명병서?에 기록으로서는 처음 나타난다. 최유청이 세운 비문 또한 항간에 퍼져있는 도선설화를 집대성한 내용일 뿐이며 설화의 특성상 오랜 기간이 지나 각색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유청의 비문이 신빙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그나마 가장 빠른 시기에 등장한 비문이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또한 훗날 등장한 도선의 자료들 또한 비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문을 중심으로 도선설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주몽설화와 매우 흡사하다는 특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표1]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주몽신화도선설화임신계기해에 의해 임신하다.구슬/오이를 먹고 임신하다.기아태어나자마자 버려지지만 돼지와 말, 새들이 보호하다.새들이 보호하다.인물의 비범함활을 잘 쏘고, 고구려 건국주가 되다.고승이 되고, 풍수의 비조가 되다.죽음사후에 시신이 승천하였기에 말고삐로 대신 장사지내다.입적한 후 시신이 화장돼버려 천년 후에 다시 온다고 하다.[표1]주몽과 도선의 설화를 비교해보면 둘은 모두 구슬과 해라는 남성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인해 잉태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출생 이후 또한 동물들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둘의 비범함은 고구려의 시조와 풍수의 비조, 고승이 된다는데 에서 정점을 찍는다. 마지는 것은 앞에서 살펴봤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도대체 도선설화 왜 옛 백제 땅인 영암에서 고구려의 태조인 주몽설화와 비슷한 내용을 가지게 된 것일까? 대부분의 설화는 피지배층들의 의식이 투영 되어 전파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도선설화는 더욱더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이에 도선설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도선설화는 결국 고려 건국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얻고 왕건에게 민심을 돌리게 하기 위한 꼭 필요한 정치적 재료였기 때문에 고려 왕실에서 만들어 전파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도선은 당시의 풍수사상에서의 독보적인 위치 덕에 만들어진 술승의 이미지와 민중들에서의 위치 때문에 왕건이 꼭 필요한 인물이었고 이에 고려 왕조에서는 도선설화를 통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과 주몽과 같은 탄생을 가진 신성한 인물에게 태조의 탄생을 예견 받았기 때문에 고려 건국에 대한 신성성과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두 가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도선설화는 이렇듯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도선 사후 약 250년이 흐른 뒤 비문으로 세워졌으며 그 내용을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설화와 비슷한 내용을 띠게 된 것이다.2.3.영암지역과 왕건의 관계마지막으로 짧은 내용이지만 최근 연구 성과들 중 흥미로운 연구가 있기에 살펴본다. 바로 도선의 가문에 대한 연구이다. 일단 연구의 시작은 왕건에게 있어서 영암지역의 필요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나주지역(영암 및 전남 서남해안지역 포함)은 백제의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때까지도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할 정도로 매우 강성하였다. 이에 왕건과 견훤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해상무역의 근거지인 나주지역을 꼭 필요로 했기 때문에 나주지역을 손에 넣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당시 나주지역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영암최씨는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가문이었다. 당시 왕건과 견훤은 서로 다른 성격을 띠었다. 먼저 견훤은 군부세력을 기반으로 세력을 쌓았기 때문에 정권을 세운 뒤에도 제도를 신라와 비슷하게 유지하였고 아마 나주도선의 성이 어찌됐든 도선의 출자는 영암지역이라는 것은 확실하였고 이에 한미옥은 도선이 최 씨라는 가정 하에 영암지역의 유력한 가문의 일원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당시 영암지역에는 6개의 토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 씨와 박 씨는 으뜸 이였고 영암지역의 최 씨 중에서는 고려 초기 공신인 최지몽을 비롯해 유수한 인재들이 조선시대까지 활동했다. 즉, 만약 도선이 기록대로 영암지역의 유력한 최 씨 가문 일원이라면 왕건은 단순히 필요세력과 제휴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 지방호족을 규합함과 동시에 신성성, 정당성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3. 결론3.1. 맺음말도선은 중국에서 시작된 풍수지리를 한반도의 풍토에 맞게끔 보완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보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풍수지리설을 하나의 중요 사상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그 결과 그는 풍수의 비조로 평가받는다. 오히려 도선은 자신이 주창한 풍수비보사상에 영향을 받아 당시 민중들에게 선승의 이미지보다는 술승의 이미지가 강하였다. 이것은 비단 도선의 비보사탑설 때문만이 아니라 고려 왕조에서 만든 설화적 이미지가 한 몫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도선에 대한 기존 연구 시각들은 불교사적 시각과 풍수지리 비조로서의 시각 등이 있었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도선설화를 통해 고려 왕조와 어떠한 연관이 있었는지를 연구한 논문을 보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 글에서 주 내용으로 다루게 되었다. 물론 다른 다양한 시각에서의 도선 연구도 중요하지만 필자가 생각했을 때는 도선은 비록 승려지만 승려로서의 업적으로 보다 더 부각되는 업적이 풍수지리에서의 풍수비조사상인데 도대체 불교 국가인 고려에서 어떻게 국사의 자리까지 오르게 됐을까 ?라는 궁금증이 앞섰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유 없는 대가는 없다. 그렇기에 도선은 어떠한 업적을 세웠기에 고려 왕조로부터 국사의 지위까지 추증을 받았는지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겉으로는 왕건의 탄생을 예견했다는 이유가 있겠지만 국사의 지위를 받기에는 너무 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