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잡이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3
검색어 입력폼
  • 단오와 하지, 복일
    연중행사(3) : 단오와 하지, 복일(伏日)- 목 차 -머리말1. 단오 (端午)1-1. 기원설1-2. 풍습1-3. 음식2. 하지 (夏至)2-1. 의미2-2. 풍습3. 복일 (伏日)3-1. 기원과 목적3-2. 여러 문헌상의 복일3-3. 시기에 대한 논란맺음말참고문헌머리말고대 중국인들은 무더운 여름철에 농사를 준비해야 했으며 가뭄과 장마로 인한 홍수를 모두 대비해야 했다. 이 시기의 더위와 습함으로 인한 질병과 악기(惡氣)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세시풍속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단오와 하지 그리고 복일에 대해서 알아보겠다.1. 단오1-1. 기원설단오절은 음력 5월 5일로 한·중 양국에서 오래 전부터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세시 명절이다. 동양에서 홀수는 음양(陰陽) 가운데 양(陽)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달과 일의 수가 모두 양으로 겹치는 음력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등의 명절에는 햇볕의 기운이 가장 강하다고 하여 갖가지 성대한 행사가 거행되어 왔다.단오절은 이러한 명절 중의 하나로, 한국에서는 단오절을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하지만 중국에서는 단오절을 단양절(端陽節), 오월절(五月節), 오독일(五毒日), 천중절(天仲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별칭이 많은 만큼 이에 관한 유래설도 다양한데, 그 중 많이 알려진 유래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악월악일(惡月惡日)설·벽사(?邪)설악월악일설과 벽사설은 그 내용이 겹치기 때문에 함께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민간에는 ‘길한 정월과 흉한 5월’이라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5월은 악월(惡月), 독월(毒月), 흉월(凶月)로 여겨졌다. 특히 5월 5일은 흉함 중의 최고라 하여 악일(惡日)이라 불렀다. 이로 인해 5월에 많은 금기가 생겼다.『사기(史記)』「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는 “5월에 태어난 아들이 부모에게 불길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고, 응소(應?)의『풍속통의(風俗通義)』에서는 “5월 5일에 태어난 아이는 남자는 아버지에게 여자는 어머니에게 해롭다(五月五日오절이다.조아설조아는 후한 때 사람으로 아버지가 5월 5일영신(迎神) 하다가 물에 빠져 죽어 시체를 건지지 못하자 14세의 나이로 강물을 따라가며 통곡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런데 5일 만에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물 위에 떠올랐다고 한다. 이에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단오절을 지내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용의 토템설단오절이 오월(吳越) 지방의 토템 제사에 유래한다는 학설은 문일다의 고증에 의해서 성립한 것이다.오월 지방 사람들은 춘추시대 이전부터 이미 토템 숭배의 한 형태로 음력 5월 5일 날, 즉 단오절 날에 자신들의 토템인 용신을 숭배하고, 풍요와 번영을 축원하면서 제사를 지냈다. 즉, 단오절은 용을 기리기 위한 행사였는데, 용은 비와 구름 물, 강 등과 관련이 있으므로 용에 대한 추상화와 신격화 형상은 중국 남방의 농경문화가 발달된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이러한 모든 방면에서 볼 때, 단오절은 농사와 재앙퇴치를 축원하는 농경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1-2. 풍습1) 한국 단오의 풍습굿과 가면극굿은 무당이 원시 종교적 관념에 의하여 주재하는 새신(賽神) 의식의 총칭이다. 이것은 병의 퇴치, 초복(招福), 초혼(招魂), 안택(安宅), 기우(祈雨), 진령(鎭靈), 제재(除災), 천신(薦神), 축귀(逐鬼) 등을 목적으로 하고 샤머니즘의 한 형태로 한국에서 고대부터 계속되었다. 한국에서 단오 때 각 지방에서 단오굿이 흔히 행해졌는데, 대표적인 단오굿은 강릉 단오굿과 영산 단오굿을 들 수 있다.가면극은 연기자의 일부 또는 전원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연출하는 극이다. 이것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민속 중의 하나이다. 가면은 얼굴을 가리는 특수한 조형품으로 다른 인물 및 동물과 초자연적인 존재 등을 나타내는 가장성(假裝性)을 가진다. 가면극은 보통 남자들이 즐겨 노는 것이었는데, 단오 때 하는 가면극으로는 강릉관노가면극 등이 있다.문에 쑥 걸기 및 창포뿌리 차기민간에서는 단오 날에 이른 아침에 쑥을 뜯어 묶어서 문 옆에 세워두는 풍습이 복을 초래하는 것을 의미하는 약초이기 때문에 문에 걸어놓으면 건강해진다고 믿었다.창포는 검과 같이 생겨서 액을 없애 버릴 수 있는 보검으로 생각하며 이를 문에 걸어놓으면 악귀를 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용나무는 몸이 힘차고 건강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걸어놓으며 건강을 기원했다.제액 장식품 쓰기이 풍습도 역시 단오는 악월악일이라는 영향을 받아서 생긴 것으로 본다. 중국에서 제액(除厄) 장식품으로 애호(艾虎), 건인(健人), 오색실, 향낭 등으로 들 수 있다.중국에서는 호랑이를 신수로 여겨 액을 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나라 시대에는 약쑥이나 채색실로 호랑이 모양을 들고 쑥 잎을 몸에 붙이거나, 머리에 꽂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 호랑이 모양으로 만든 쑥잎이 바로 애호이다.건인은 주로 절강성의 부녀자들이 단오에 쓰는 장식품이다. 건인은 보통 금이나 은의 실로 호랑이나, 마늘, 종자 등 모양을 따서 만든 여성용 장식품이다. 보통 머리에 쓴다. 건인은 화를 피하고 액을 없앨 수 있는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풍속통의(風俗通義)』을 살펴보면 “5월 5일에는 색실을 팔에 매달아서 귀신이나 재앙을 물리치고 사람들로 하여금 돌림병에 걸리지 않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색실을 ‘장명루(長命縷)’ 또는 ‘속명루(續命縷)’라고 한다. 오색실은 장명루와 속명루의 또 다른 칭호이다. 남자는 왼쪽에 여자는 오른쪽에 매었다.향낭의 경우, 작은 주머니 안에 향초나 약재를 넣은 것으로 몸에 지니면 병과 귀를 쫓을 수 있다고 믿었다. 향낭은 또한 하포(荷包)나 향포(香包) 등으로 불렸으며 만든 재료는 실크나 천 등이다.오독도(五毒圖) 붙이기오독은 전갈, 뱀, 지네, 도마뱀, 두꺼비를 이르는 말인데 중국민간에서 5월이 되면 오독이 횡행한다고 생각해 집에 오독도를 붙여 놓는 풍습이 있다. 붉은 종이에 다섯 가지의 독물을 그린 후에 다섯 바늘을 각 독물에 찍는데, 이로써 오독은 모두 찍혀 죽고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고 믿었다.이외에 옷에 오독을 자수하거나 먹는 음식에 오독의 모양을 새 바로 웅황주이다. 웅황주는 질병을 물리치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단오날에 마신다.2. 하지2-1. 의미하지는 24절기 중 열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이며 음력으로 5월, 양력으로는 대게 6월 22일 무렵이다. 천문학적으로는 일 년 중 태양의 적위가 가장 커지는 시기이다. 이 무렵 태양은 황도(黃道) 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데 이것을 하지점이라 하며 이를 통과하는 날을 하지라 한다. 하지는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길기 때문에 가장 많은 열을 받는다. 그리고 이 열이 쌓여서 하지 이후로는 기온이 상승하여 몹시 더워진다.중국에서는 하지 15일간을 삼후(三候)로 나누었는데, 이를 초후(初候)에는 사슴의 뿔이 떨어지고, 중후(中候)에는 매미가 울기 시작하며, 말후(末候)에는 반하(半夏)가 생긴다고 한다. 이는 녹의 뿔은 앞으로 향하여 나므로 양에 속한다 보았고 또한 웅(雄)의 성질을 지닌 매미는 음기가 나타나는 것을 느껴서 울게 된다는 것이며 반하는 음을 좋아하는 약초로서 늪지 혹은 논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또한 중국에서는 하지에 조상제사를 행하였는데 이는 일반 백성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제사가 하지에 평민들에게서 거행되었음은 『사민월령(四民月令)』에 제시되었는데 “하지일에 밀과 물고기의 제물이 조상의 사당에 바쳐진다. 제사는 아침에 거행한다. 제사 하루 전에는 사람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몸을 정결히 하며, 집안을 청소하며 부추와 달걀을 준비한다.”라고 하였다.2-2. 풍습동지축제와 연결된 많은 의식들이 하지에 반복되었다. 종교의식을 치르기 위해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재계(齋戒), 햇빛에 비쳐서 생긴 그림자를 측정하는 일영(日影), 개화(改火) 등에서 동지와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동지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지에는 음양의 힘의 질서정연한 교체를 촉진하기 위해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위들은 중단되었음이 핵심적이다.「월령」은 중하(仲夏)에 대해 동지에 대해서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였다.“군자(君의식에 동중서의 설명에서 “우물의 물은 교체되고 우물들은 준설 된다.” 에 등장한다. 이는 동지의 개화의 의미와 비슷한 것으로써 새로운 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개수(改水)를 의미한다.『회남자(淮南子)』에 보이는 양수(陽燧)는 종교적 목적과 관련이 있는데 이 도구를 사용하여 명화(明火)와 명수(明水)를 획득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양수(陽燧)를 부수(夫燧)라 칭하고 방제(方諸)도 마찬가지로 감(鑒)이라 칭하였다. 이는 태양으로부터 신성한 불을 획득하고, 감(鑒)으로써 달로부터 신성한 물을 획득하여 제사에 사용되는 신성한 불과 신선한 물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에 정현주는 “부수(夫燧)는 양수(陽燧)이다. 감(鑒)은 물을 얻는데 사용된다. 그것은 보통 방제(方諸)라 불린다. 태양의 화(火)와 달의 수(水)를 얻음으로써 음양기(陰陽氣)의 가장 순수한 진수(眞髓) 즉 정수를 얻기를 희망했다. 성스러운 불은 제사음식을 비추고, 성스러운 물은 현주(玄酒)를 만드는데 사용된다.”라 하였다. 『회남자』에는 양수(陽遂)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양수가 태양에 드러나면 그것은 타서 불을 만든다.” 라 하였다. 이는 하지에는 양기가 극에 달하는 날이며 신성한 목적을 위해 양수경(陽燧鏡)에서 태양으로부터 얻어진 불은 특별히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5월 전체가 불을 채취하기에는 대체로 좋은 시기인데 왜냐하면 하지의 월(月)일뿐더러 오(五)는 양에 속하는 5개의 주요 홀수의 중심이기 때문이다.3. 복일3-1. 기원과 목적복일(伏日)은 여름철에 행해지는 행사이며 그 기본적인 성격도 여름철과 연관이 있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의 성격과 일종의 축제의 성격을 가진 세시풍속이다.처음 사서(史書)에 기록된 것은 『사기(史記)』「진본기(秦本紀)」에 “진덕공 2년 초복에 개로써 고를 막다”라는 문장이며 『사기(史記)』「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에는 “처음 복을 만들 때 사당에서 고을 4문에 개를 찢어 놓다”라고 하는 복일의 기원이 나타난다.여기서 고(蠱)는 전염병, 독충 등 많은 악기(惡氣 한다.
    인문/어학| 2020.03.28| 15페이지| 5,000원| 조회(132)
    미리보기
  • 1980년 전남도청 앞 광장
    한국 전통사회와 생활문화-1980년 전남도청 앞 광장-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에 걸쳐 광주지역에서 국가폭력에 저항하여 일어난 민중항쟁을 지칭하며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역사이다. 독재타도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쓰러져간 당시 광주의 배경, 전개, 그리고 결과 및 의의를 알아보자.1. 배경1) 정치적 배경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되고 그해 12월 12일 전두환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전두환이 최고권력자가 되면서 민주화가 불확실해지자 대학생들은 ‘전두환 퇴진’, ‘계엄령 해제’, ‘직선제 개헌 시행’ 등의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 국회에서 계엄령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정을 앞당겨 제주도까지 포함하여 5월 17일 전국으로 비상계엄령을 확대하였다.2) 지역적 배경1980년 초, 봄에 벌어진 민주화운동은 거의 전국적으로 벌어졌지만 그중에서도 전남 지역, 그리고 광주 지역에서 벌어진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박정희 정권 시절의 전체 고위 관료 비중에서 영남출신은 30%에 달했지만 호남출신은 절반에도 못 미쳤으니 호남 출신 배제 분위기가 행정 관료들이 전라도 출신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영향을 미쳐 결국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전체에서 소외당하고 있었다.2.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5월 18일새벽 경·군은 전남대학생들을 체포, 광주 시내 직장예비군의 무기와 탄약을 회수, 제7공수여단 제33대대 병력에 의해 전남대는 봉쇄되었다. 이에 학생들과 공수부대들 간의 충돌이 일어났다.-5월 19일오전부터 금남로 가톨릭 센터 앞으로 약 4천여명의 시민과 학생이 모였고 공수부대원들과 대립하였다. 공수부대의 진압에 불구하고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였고, 도청 광장 쪽으로 전진했다. 도청 광장에서 공수부대의 무차별적인 진압에 시민들은 잠시 해산했다가 공수부대가 빠져나가면 다시 모이는 일이 반복되었다.-5월 20일오전에는 소강상태로 지속되었고 오후에는 차량시위가 전개되었고 택시 운전사 4명이 시민들을 시내로 실어 나른다는 이유로 구타당해 죽자, 무등 운동장에 200여 대의 택시들이 집결하여 전진했다. 이에 공수부대는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치한 와중에 최루탄을 퍼붓고 그 틈에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진압하였다.이날 저녁 언론에는 거짓보도가 나갔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MBC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5월 21일도청 광장에 5만여 명의 시민집결, 계엄군과 협상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유혈사태에 대한 사과, 연행된 시민들 석방과 소재파악, 공수부대는 21일 정오까지 철수, 계엄 분소장과의 협상 요청을 하려했으나 장형태 전남도지사가 나오지 않으면서 결렬됐다.오전 10시쯤 광장에 군용 헬기가 착륙했고 공수부대원들에게 실탄이 지급, 1시 정각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총성이 울리고 마침내 민간인에 대한 군의 사격이 시작된 것이다.이에 시민들은 무장을 하여 전남도청으로 돌아와 군에 대응했고 5시 25분 공수부대는 철수, 8시쯤 시민군은 도청을 점거하였다.-5월 22일광주를 고립시키고 외부로 나오려는 시민들을 학살하는 ‘광주 외곽 봉쇄 작전’ 실시,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도청 간부와 인사들, 각계 인사들이 모여 ‘시민수습위원회’를 구성하여 협상을 하려 했으나 협상 자체가 거부당했다.-5월 23일시민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궐기대회를 개최하며 계엄 철폐, 신군부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했으며, 시민들 사이에서는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5월 24일오후 1시 20분경 11공수 부대원들이 소년 4명에 총격을 가했고, 2시 20분경 11공수 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사이에 오인 총격전이 발생해 9명이 사망, 40명이 부상을 입었고 근처 민가를 수색하여 마을청년 4명을 처형했다. 이에 제2차 민주수호 궐기대회를 열었다.-5월 25일오후 3시경 제3차 민주수호 궐기대회가 개최되었고, 학생수습위원회의 학생들은 무기반납, 식량 공급, 거리 청소 등의 문제를 논의하였다.-5월 26일제4,5차 민주수호 궐기대회가 개최되고 오후 6시 학생수습위원회의 마지막 회의에서 갈등으로 온건파들은 9시경 모두 도청을 빠져나갔다. 계엄분소 측에서는 무장해제, 무기반납, 경찰의 치안회복을 최후통첩으로 제시했지만 이미 그들은 27일 새벽에 재진압 작전을 계획해두었다.-5월 27일새벽 경,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공수부대와 계엄군이 광주와 전남도청으로 재진입하여 시민들을 학살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사상자 및 희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부상 후 사망자는 376명이다.3. 결과 및 의의5·18은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역사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는 훗날 6월 민주항쟁의 승리까지 귀결되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이후 과거 청산 과정에서도 제5공화국이 무너진 뒤 사건 규명을 위한 1989년 국회 5공 청문회, 1995년 5·18 특별법의 제정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당시 학살의 책임자들을 사법 심판받게 하였다.5·18이라는 시민들의 자발적 항쟁으로서 시대의 모순과 억압을 직접적 행동을 통해 해소하려한 그 정신은 세계 곳곳에서 중요한 민주화운동의 사례와 모범으로 알려져 2011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학교| 2020.03.28| 4페이지| 1,500원| 조회(144)
    미리보기
  • 중국사 - 제갈량 발표
    - 목 차 -머리말1. 삼고초려와 적벽대전1-1. 삼고초려1-2. 적벽대전1-3. 형주를 둘러싼 분쟁2. 남만정벌과 북벌2-1. 남만정벌2-2. 북벌준비와 한계3. 무후 제갈량3-1. 성장과정3-2. 성향과 사상3-3. 유비를 선택한 제갈량4. 후대의 칭송과 그 이유맺음말촉한의 승상 제갈량머리말제갈량은 『삼국지』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이다. 유비가 세 번이나 찾아간 끝에 겨우 만났으며 적벽대전에서는 동남풍을 불어오게 하여 조조의 군대를 화공으로 격파하였으며 신기한 재주를 부리며 많은 업적을 세우고 「출사표」라는 역사적인 명문을 작성한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발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칭송되는 제갈량을 정사와 연의를 비교하며 정사에서의 모습과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모습을 주요 사건들과 그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1. 삼고초려와 적벽대전1-1. 삼고초려(三顧草廬)우선 제갈량에 있어서 유비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이들이 처음 만나게 된 사건이 바로 ‘삼고초려’인데 이는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정사 삼국지』「제갈량전」에서는 이 내용이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다.『정사 삼국지』의「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을 유비에게 맨 처음 천거한 사람이 서서라고 되어 있다. 서서로부터 공명을 한번 만나보라는 말을 들은 유비가 “그럼 그대가 한번 데리고 오겠나?”하고 말한 것을 보면, 유비는 처음에 제갈량을 그다지 뛰어난 인물로 의식하지 않았다. 이에 서서는 “그 사람은 당연히 이쪽에서 허리를 굽히고 만나러 가야 할 인물이지, 가만히 앉아서 불러들일 사람이 아닙니다. 고생스럽더라도 직접 찾아가보십시오.” 라고 일축했다.현자를 간절하게 바라던 유비는 몸소 융중에 있는 공명의 초라한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간 끝에야 겨우 공명을 만날 수 있었다.「제갈량전」에서는 이와 같이 ‘삼고초려’에 대해 굉장히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반면에 『삼국지연의』에서 ‘삼고초려’는 신야에서 세를 얻은 유비가 융중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하여 손권과의 외교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며 오나라의 노숙과 함께 유비와 손권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외교관의 모습을 보인다. 제갈량의 지혜가 굉장히 돋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다.『정사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는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화살을 모아오고, 동남풍을 불어오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전투가 있었던 적벽 지역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기 때문에 일단 불이 붙으면 겨울바람이 불 경우 그것이 동남풍이든 북서풍이든 상관없이 무섭게 타오르기 마련인 장소였다.『정사 삼국지』의「제갈량전」에서, 마지막에 진수는 그를 평하여 말하기를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예법규칙을 나타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권부의 제도를 느슨하게 하였으며 성실한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실행하였다. 충의를 다하고 시대에 이익을 준 자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에게는 비록 가까운 사람이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각종 사무에 정통하였고, 사물은 그 근원을 이해하였으며, 사람의 말에 근거하여 그의 행위를 관찰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과는 함께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촉나라 경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는 비록 엄격하였지만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서, 관중·소하와 비교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매년 군대를 움직였으면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임기응변의 지략이 그의 장점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라고 기술했다.『정사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오직 정치적 수완만을 발휘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수의 마지막 기술과 같이 제갈량은 군사전략가보다도 뛰어난 행정가라고 보는 것이 맞다.1-3. 형주를 둘러싼 분쟁형주는 중국 남북의 교통요지이며 생산물이 풍부한 지역이므로에 모두 평정했다. 군자(軍資)가 이곳에서 나오니 나라가 부유하고 넉넉해졌다.?이에 치융(治戎), 강무(講武)하며 크게 군사를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라는 기록 말고는 없다. 그러나 소위 불리는 남만 정벌은 제갈량이 운남성(雲南省) 북부의 이민족이나 토착민들을 정벌하러 갔던 사건 정도로 할 수 있고, 사실상 대부분이 픽션인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의 남만정벌의 실제 모티브는 노익장의 대명사 마원의 남만정벌이라는 것이고, 또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남만장수도 다 허구의 인물이다.(특히 축융은 조구라는 여성을 모티브로 나타냈다고 알려져 있다) 맹획조차도 실존여부에 대한 공방이 있는데『정사 삼국지』에는 등장하지 않고 그 외에 여러 역사서에는 등장하는 이유 때문이다.그렇다면 왜 제갈량은 북벌 이전에 남만 정벌을 도모하였을까? 그에 대해 알아본다면, 당시 중국 세력들에게 주변의 이민족 국가들은 침략과 착취, 식민의 대상이었으니 제갈량의 남만정벌 또한 같은 맥락일 것이라는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남만정벌에 대한 기록은 짧지만, 그 이후의 기록을 본다면 그들의 물자를 착취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부유하고 넉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제갈량의 남만정벌의 주된 이유는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촉이 이릉대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난 후에도 수차례 북벌과 그 전비를 지탱할 만한 비용이 나온 것은 바로 남만정벌을 통한 재정확보임을 알 수 있지만, 앞서 말하였듯이 제갈량의 내치도 큰 이유임을 확인할 수 있다.또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맹획의 칠종칠금은 『정사 삼국지』에는 없지만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칠종칠금의 고사가 나온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이니 어림잡아 4,5개월인데 상식적으로 그 기간에 적의 총수를 7번 잡는다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사람을 7번 잡았다 풀어준 것이 아니라 7개의 부족을 정벌하고 사로잡음 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여러 민담도 많지만 이는 제갈량이 남만지방의 사람들과 대부분의 전투는 요충지를 잘 지킨 위나라의 수비와 촉의 신중한 전술적 움직임으로 전쟁은 장기화 되었고, 큰 격전의 승패보단 힘에 먼저 부친 촉이 군을 물리면서 북벌이 시기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정사 삼국지』「제갈량전」건흥 12년(234년)의 기록에 따르면 오장원에서 최후의 전투를 끝마칠 때 까지 보급의 문제를 고민하였다는 것을 보아 식량의 문제와 전쟁에서의 불리한 상황을 끝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음을 알 수 있다.둘째로는 총사령관으로써 제갈량은 때때로 분명한 단점과 군의 전략가로써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사실 제갈량은 촉의 국정을 책임지는 재상으로써 유비의 이릉대전에서의 타격과 이전에 형주를 잃어버림으로써 고립된 형국을 극복할 수 있는 국력의 회복과 국가를 관리하는 행정가로써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후대의 사서에서의 평가들은 장점을 높이는 찬사와 부족한 모습을 엿보였던 판단에는 비판이 공존하는 다양한 시선의 평가가 남게 된다. 그 사례를 들자면『정사 삼국지』「제갈량전」건흥6년(228년)의 기록에는 “1차 북벌에서 교란과 급습에 성공했던 상황을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위를 배반하고 관중이 진동했다.” 라고 평했다. 확실히 위나라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어도 약간의 성과를 올렸다는 평가를 한 것이다. 이것은 앞서 서술한 대로 자오곡과 같은 지름길로 돌격을 하지 않고 기습을 택한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대표적 사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성과는 병법의 이론에만 통달했던, 마속을 가정 전투의 책임자로 맡기는 오판을 함으로써 위연을 비롯한 전투경험이 풍부한 장교들의 장점보다는 유비가 실력 이상으로 말의 화려함이 지나치다는 지적을 할 정도의 마속의 단점을 바로 보지 못한 군 지휘에 어느 정도 미숙함을 보인 모습이다.셋째는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를 잃은 상황에서 공격의 진입로가 관중지역으로 제한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한 두 번째의 서술내용과 연결 지어 본다면 전력의 우위를 제외하더라도, 사마의를 비롯한 위의 조정에서는 촉의 북벌이 어느 정도난의 시대였다. 이런 혼란기는 제갈량의 삶이나 정치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랑생활을 통해 그는 ‘문경의치(文景之治)’와 같은 태평성세를 꿈꾸게 하였고, 절개를 중시하는 청류파 진번, 이응 등의 기개와 의리 또한 혼란스러운 나라를 다스림에 대한 관점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 군벌의 혼전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보면서 제갈량은 한 왕실의 앞날을 걱정했고, 백성들의 고통에 깊은 동정을 갖게 되었다.청소년기의 제갈량에게는 그가 생존한 사회 토양, 접촉한 시대적 정보, 직접 경험한 불안정한 정국, 날마다 겪는 상황 등 그 어느 하나도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남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신상에 집중되어 그의 사물에 대한 관점과 태도, 개인의 기질 형성, 정치적 노선의 확립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3-2. 성향과 사상제갈량은 융중에 있을 때 자주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교하곤 했다. 관중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저명한 정치가로 제 환공을 도와 정치·군사·경제상의 전면적 개혁을 단행해 단기간에 제나라를 부유하고 강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임무를 실현함으로써 그 공을 역사에 남긴 인물이다. ‘악의’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으로 그는 연나라 소왕의 명령을 받들어 한·조·위·초 등의 나라와 연합해 제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으며, 반년도 못 되어 제나라 70여개의 성을 함락하고 제나라 수도를 점령했다.제갈량이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교한 것은 그가 장수가 되거나 재상이 되어 공업을 세우려 했음이 분명하다. 석광원·서원직·맹공위 등 세 친구가 벼슬길에 나서면 자사나 군수 같은 고급 지방관이 될 수 있다고 했지만, 그 치적은 단지 한 지역에 국한되고 말지만 제갈량 자신은 관중과 악의를 좇아 한 시대에 끝나지 않는 영원한 업적을 세우려 했다.그 업적이란 바로 현명한 군주와 협조해 군벌의 반란을 잠재우고 한 왕조를 부흥시켜 다시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혼란스러운 당시에 그의 생각은 진보적이었으며, 국가의 통일과 사회의 안.
    학교| 2020.03.28| 17페이지| 5,000원| 조회(149)
    미리보기
  • 장미의 이름 감상문
    영화 은 움베르토 에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의 모습을 잘 담아냈다고 평가 받는다. 비록 소설에 비해 영화가 형편없다는 평가도 있지만 말이다.초반부에 보이는 수도원의 모습은 굉장히 차갑고 조용하며 어딘가 음침한 모습을 보여주며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수도사들의 복장 또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신체의 대부분을 감추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 흔히 중세를 다루는 판타지적 요소가 강한 영화들과는 상반되는 인상이다.영화는 계속해서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에서 전개되어간다. ‘우베르티노‘라는 교황청에 이단으로 찍힌 수도사는 주인공 아드조한테 이곳을 떠나라면서 ’여성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동일시하며 여성을 부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보인다. 윌리엄에게 ’또다시 베르나르도와 갈등이 일어나면 황제도 도와줄 수 없다‘라는 대사를 통해 황제위에 교황이 군림하고 있었으며 신의 세계에서 그 대리자인 교황과 기독교에 대한 반대는 곧바로 이단이며 죽음이라는 뜻을 나타낸다.윌리엄이 수도원에 도착하여 천문학 도구로 보이는 것을 숨기는 것이 잠깐 나오는데 이는 신의 섭리에 의해 돌아가는 세계와는 반대되는 우주의 중심이 지구, 즉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 이는 이단으로 몰리기에 숨긴 행위로 보인다.수도원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악마’의 간계이며 ‘여성’과 교회에 반하는 ‘이단’에게 덮어씌워 마녀재판을 행하며 신의 뜻으로 문제를 해결했으며 신 앞에서 복종을 요구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돌을 주우며 그들에 반항을 보여준다.영화의 전체 줄거리를 관통하는 ‘웃음을 금지’시키는 행위는 신앙은 두려움에서 나오는데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인간의 신앙을 위해 웃음을 금지함으로써 두려움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이런 인간에 대한 시대적인 혹세무민은 ‘영적희열과 광기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대사가 잘 표현해준다.
    학교| 2020.03.28| 1페이지| 1,500원| 조회(392)
    미리보기
  • 불교와 유교 그리고 무속
    불교와 유교, 그리고 무속서론무속, 불교, 혹은 유교가 받아들여졌던 것은 인간의 보편적 필요인 '구원'의 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궁극 가치나 진리에 대한 물음에 답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구복과 의지처에 관한 대중 일반의 관심에 답해준 것이다. (무속은 후자에만 해당. 유교는 조선 건국 즈음에야 구원의 종교가 됨.) 각 종교는 시대에 따라 국가가 공식적으로 지향하는 이념이 되기도 하고, 사회적 영향만을 갖기도 하고, 정치원리나 문화소양으로서의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종교는 아닌) 지위를 갖기도 한다. 불교국가 1천 년, 유교국가 5백 년 동안 각각의 종교가 어떤 점 때문에, 그리고 어떤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살펴본다.무속 신앙 발표1. 무속의 기원무속이란 무엇인가?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무복(巫服)을 입고 춤을 춤으로써 보이지 않는 신을 강신(降神)하게 하는 능력을 지닌 여사제(女司祭)를 중심으로 이어져 오는 종교습속’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속은 한반도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전 세계의 샤머니즘이 그렇듯, 무속의 기원 역시 불분명하다.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토속 종교들이 그렇듯이 인류가 고등한 정신 체계를 가지면서 자연과 영적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로 인해 자연스레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고조선의 군주인 단군 왕검에서 단군이 제사장을 의미한다는 기록과 삼한에 무당이 다스리는 소도(蘇塗)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역사 시대에 접어들기 전 무속이 형성되었고, 무당이 정치적 지도자도 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2. 무속의 시대사삼국시대가 시작되고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무속은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예가 『삼국유사』에서 신라 초기 왕을 뜻했던 단어 중 하나인 ‘차차웅’이 무당을 칭했다는 단어나, 신라 왕실의 여성이 시조제를 주관했다는 점에서 왕 혹은 왕실의 인사가 무당이 되어 제를 주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무산임수가 아니라 강을 북쪽에 끼고 산을 남쪽에 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고대 시대부터 형성된 전주, 경주 등의 도시는 자연적으로 형성되었기에 풍수 이론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이처럼 신라와 후삼국 시대까지만 해도 풍수는 그렇게 중요한 사상이 아니었지만 고려 시대에 들어서며 그 중요도가 올라갔다. 가장 대표적으로 수도인 개경이 풍수 사상에 입각하여 건설되었는데, 도시 배치를 최대한 송악산에 맞추었으며, 이전의 당나라 장안 양식인 바둑판식의 구획 배치는 개성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이처럼 고려 건국부터 강력한 영향을 끼친 풍수의 존재는 왕건의 아버지 왕융이 왕기를 받기 위해 송악에 자리잡았다는 설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풍수는 집터, 궁궐터 등을 결정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이를 사람이 살아가는 땅인 양택을 중심으로 하였다 하여 양택풍수(陽宅風水)라고 한다. 불교적 가치관이 대세였던 고려 시대에는 화장으로 망자를 처리했기 때문에, 망자를 매개로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발상 자체가 사회적으로 대중적이지 않았다.반면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왕궁 터, 집 터를 결정하기보다는 무덤의 터를 결정하는 음택풍수(陰宅風水)가 성행한다. 음택풍수의 주 논리는 망자가 받는 땅의 생기 덕분에 후손 역시 각종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철저한 유학자였던 정도전이 한양을 건설할 당시에는 풍수가 그리 크게 고려되지 않았지만, 태조의 왕릉 건설부터 풍수론이 적용되는데 이를 통해 조선 국초부터 음택 풍수가 퍼지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왕족을 시작으로 사대부 층에게 풍수론은 급격히 확산되어 갔으며, 유학자들의 미신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17세기를 전후로 완전히 조선 사회에 정착한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조상의 묏자리를 잡기 위해 산과 묏자리를 둘러싸고 벌이는 양반가끼리 산송(山訟)은 노비, 전답 소송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사송(詞訟)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외에도 풍수와 성리학적 질서가 결합하여 명당에 묏자리를 쓰는 것이 효도라는 개념기 위해서는 동네의 무당에게 의지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그리고 두 번째는 무속의 포용성, 유연성을 들 수 있다. 무속은 통일된 교단이나 체계가 없고 각 지역마다 자생하는 풀뿌리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변화하거나 융합하기도 더욱 쉬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 시대 제석천, 부처 등을 신으로 모시며 불교와 꾸준히 융화해왔던 무속은 유교의 득세 이후에도 유교의 의례와 융합해 갔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을굿이다. 조선 조정은 이 마을굿을 꾸준히 유교적 성황제로 바꾸려 시도했지만 지역민들의 반발로 지지부진했는데, 결국 유교 제례를 올린 후 굿을 하는 타협적 방식을 취하며 유교적 제례와 융합되는 모습을 보였다.마지막으로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현세구복적 성격이다. 이로 인한 왕실과 양반층의 무속에 대한 이중적 행태 역시 한 몫 했는데, 이 역시 무속의 현세구복적 성격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조선 말 명성황후와 그녀가 총애한 무당인 진령군이다. 세자(후일 순종)의 건강을 위해 명산대천마다 엄청난 재물을 탕진해가며 제를 올린 사건은 조선 말 지배 계층의 무속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풍수 역시 유교적 질서와 결합하며 조선 말에는 산송 한번 치러보지 않은 양반 가문이 드물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확산된다. 결국 현대까지도 풍수를 비롯한 각종 무속 신앙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결국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내재한 기복적 신앙이 바탕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참고문헌』강영경, 『고대 한국 무속의 역사적 전개 - 신라 진평왕대의 ?鬼를 중심으로』, 한국무속학 10, 2005.8.김갑동, 『고려시대 巫俗信仰의 전개와 변화』,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78, 2016.4.이기백, 『한국 風水地理說의 기원』, 일조각, 한국사 시민강좌 제 14집, 1994.2, p.7.강제훈, 『조선 왕릉과 왕릉 의례의 특징』,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제54호, 2014.2.손태도, 『조선 후기의 무속』, 한국무속학회, 한국의 배치에서도 보이는데 사찰배치에서 상단은 불보살단으로 중심을 이루며, 중단은 신중단이라 불리며 하단은 영단(靈壇)이 있는데 이곳에 바로 산신이 모셔진 산신각이 위치하는 모습이 나타난다.셋째로 수신신앙과의 융합인데 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미술에서 용이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천전리 각석에서는 초기의 용 형상이 나타나는데 이 용 문양 아래에 구름을 그려넣어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상징적 존재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비가 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수신적 성격의 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이후 삼국시대에 들어서 미술의 각 분야에서 나타나는데 용 문양이 성행하게 된 것은 불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불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인도신화에서 뱀의 신(蛇神)인 ‘나가(那伽)’를 용이라고 했고, 이 나가는 악신의 모습을 띠었지만, 석가에게 교화된 뒤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재구성되어 부처의 설법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고대 토착신의 불교화 과정 속에서 나가는 기후나 천체운행에 관련된 정령으로서가 아니라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권속신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이후 왕즉불 사상과 더불어 용의 불교적인 호법적, 호국적 면으로 인해 용신신앙이 왕권을 뒷받침 해주는 사상으로 작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황룡사 창사설화를 통해 당대의 용에 대한 사상을 볼 수 있다. 토착적 용 신앙은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호불적 성격으로 변하여 신앙이 되었고 호법룡으로서 불교의 문화에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다.결론지으면 외래종교인 불교는 고대의 토착신앙과의 융합을 통해 사회에 흡수될 수 있었고 한국의 독특한 불교문화를 형성해온 것이다.2. 귀신관, 구원관 그리고 장례문화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귀(鬼)와 신(神)은 다른 존재이며, 아귀의 줄임말인 귀는 육도 중생 중 하나로 공포스럽고 기괴한 모습을 하고 염라왕계에 살고 있다고 본다. 신은 여러 가지 능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이긴 하지만 기독교에서처럼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고 정령과 비슷한 존재로 보지만 그렇다고 귀신에과 혜숙 그리고 선덕왕 때의 혜공과 자장율사의 ‘화장하여 유골을 석혈 속에 모셨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한국에서 최초로 화장이 이루어졌다는 기록과 문무왕이 스스로 화장에 의한 장례법을 택했다는 내용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화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크게 세가지 방식의 장례가 있는데 첫째는 다비 즉 화장으로 화장이 끝난 후 유골은 거두어져 절에 안치되는 방식이고 둘째는 시신을 일정한 장소에 일정 기간 동안 안치 또는 매장하였다가, 유골을 수습하여 정식으로 안장하는 방식이고 마지막은 주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매장 및 풍장이다.불교가 강성했던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사찰에서 불교식 장례를 행하였으나 고려말 척불운동과 주자학의 영향 등으로 토속적인 장례문화와 화장을 반대하고 매장을 선호하는 모습으로 변하고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의 화장방식은 대부분 사라지고 유교의 매장문화가 주류를 이르게 된다.그러나 조선건국 이후로도 불교는 왕실에서도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 개창에 역할을 하고 개국 이후 왕사가 되고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한양천도에서도 역할을 하는 등 건국 초 활동을 한 무학대사라든가, 세종대의 후반에 세종이 내불당을 설치하여 불사를 강행한 것을 보면 유교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왕실도 초기에는 여전히 불교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인다.또한 연산군 9년에 처음 선포된 도성출입금지 조치와 이후 인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대에도 반복적으로 시행하는 등의 억압 속에서도 불교의 의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괘불을 예로들 수 있는데 괘불은 야단법석을 행할 때 야외에 걸어놓는 대형탱화를 말하는 것이다. 억압 속에서도 괘불 불사가 이루어진 이유는 당시 왜란, 호란을 거치며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기 위해서 유가에서는 특별히 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으므로 애도의 의식체계를 가지고 있던 불교에서 수륙재, 천도재 등 여러 의례를 통하여 죽은 망자의 원한을 풀행한다.
    학교| 2020.03.28| 13페이지| 4,000원| 조회(181)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2
2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2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0일 수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7:49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