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 STAIN/ 황학삼展얼룩으로 살아가기: Stay in stain챕터 투 (CHAPTER Ⅱ)에서 열리는 황학삼 전의 제목은 ‘휴먼 스테인Human Stain’이다. 황학삼 작가가 공들여 빚어놓은 인체 형상들을 보면서 그들이 곧 우리 인간(human) 존재라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얼룩(stain)은 어디에 있는가.동명의 소설 『휴먼 스테인』 속 콜먼은 대학 교수로 개강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학생 두 명의 출석을 부르면서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인가요? Do they exist or are they spooks?” 라고 묻는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우연히도 두 학생 모두 흑인이었다는 것이다. (사전 속 ‘spook’의 두 번째 의미는 검둥이를 뜻하는 속어이다.) 이 일로 인해 콜먼은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교단에서 쫓겨나게 된다.Stain의 뜻은 얼룩, 오점이다. 콜먼은 사람들로부터 도덕적 비난을 받고 사회의 골칫덩이, 즉 ‘얼룩’으로 자리 잡는다. 그는 학생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상황에서 ‘spook’가 특정 인종을 지칭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항변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가 흑인들을 역사적으로 박해해 온 백인 유태인이라는 점은 사회 구성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공동체가 추구하는 인종 간의 평등이라는 도덕적 가치의 반례로 삼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가치관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계없이 얼룩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황학삼 작가는 이처럼 다양한 양상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얼룩’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웅크린 인체 형상들과 그들을 관통하는 철제 기둥들을 통해 표현한다. 그리고 개인들이 ‘얼룩’을 어떻게 극복해내고 각자의 정체성을 정립해나가는지에 대한 그 나름의 생각을 조각으로써 구현하고 있다.그림 1. 전시 공간따뜻한 봄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소 차갑고 텅 빈 느낌을 주는 회백색 공간 안으로 들어서면 11개의 인체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10평 남짓한 작은 전시 공간에도 어떤 두 조각도 붙어있지 않고 일정 간격 이상을 유지 중이다.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설치된 철제 기둥들은 인체 하나씩을 매달고 감상자를 둥글게 에워싸며 고립감과 묘한 기시감을 형성한다. 한 작품을 감상하며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새 지척에 다가서있는 또 다른 조각을 보게 되면 감상자는 왠지 모를 불편함과 개인의 영역이 침범 당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느 때보다 연결의 방법이나 기술이 편리해졌지만 진정한 연결에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은 그와 동일한 감각을 전시 공간에서 체험하게 된다. 전시장에서 일차적으로 느껴지는 외로움, 두려움의 정서는 곧 전시 공간을 채우고 있는 조각상들이 어쩌면 우리 자신이고 그들이 모인 공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된다.그림2. 불완전한 기둥 2-3입구로 걸어 들어가면 오른편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이 「불완전한 기둥 2-3」이다. 이 형상은 예수가 십자가에 걸린 모습과 닮아있다.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처형이라는 고통을 감내했다. 십자가라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매우 수치스러운 고난이기에 예수의 희생이 부각된다. 하지만 황학삼 작가의 조각에서 기둥은 더 이상 몸 밖에 존재하는 외부 사물이 아니다. 철제 서포트 기둥은 조각의 배를 관통해서 천장과 바닥을 이어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데, 조각은 기둥에 어깨를 기대고 발을 모아서 얹음으로써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킨다. 때문에 철제 기둥은 십자가만큼의 극심한 고통을 주는 대상이지만 몸에서 분리할 수 없는, 몸의 중심축을 이루는 가치관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작품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기둥은 제 몸과 마음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단단하고 안정된 기둥이 아니라 ‘불완전한 기둥’이다. 사람들이 각자 불완전한 가치관에 근거해 살아간다는 황학삼 작가의 생각이 드러난다. 뭉뚱그려진 목 윗부분과 잘려나간 팔 한 쪽이라는 불완전한 신체 형상은 불완전한 가치관과 함께 우연하고 비정상적인 삶 속에 던져진 우리의 모습을 반영한다.작품의 표면 질감은 매끈함과 거칠함의 중간 그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다. 미끄덩하고 광택감이 있는 느낌의 재료로 완만한 곡선을 지닌 신체를 표현하고 있지만 일부러 만들어낸 듯한 요철이 그 위에 전체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몸 전체에 흩뿌려져 있는 크고 작은 균열들과 부스럼처럼 뭉쳐서 일어난 피부는 생명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경과했음을 암시하면서 죽음의 느낌을 전달한다. 이것은 검은색이 가지는 미지(未知)의 상징성과 합쳐져 기괴하고 기묘한 감각을 한층 강화한다.하지만 세밀한 신체 조직의 표현으로 대변되는 생명력이 단순했던 죽음의 느낌을 뒤흔든다. 황학삼 작가가 특유의 섬세함으로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은 부분들을 「매달린 사람 1-1」이라는 작품을 통해 보기로 한다. 기둥에 매달려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려면 힘을 주어 온 근육을 긴장시켜야 하는데, 작품의 정면에서 이러한 노력을 관찰할 수 있다. 기둥을 붙드느라 몇 부분으로 나뉘어 갈라진 팔 근육, 허벅지에서부터 발끝으로 이어지는 긴장의 흐름, 손마디마다 불거져 나온 뼈와 힘줄이 눈에 들어온다. 다음으로 작품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정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명력의 다른 구성 요소들이 등장한다. 배에 힘을 줄 때 도드라지는 갈비뼈의 윤곽과 다리를 꼬는 동작에 관여하는 골반뼈, 무릎뼈, 복사뼈가 피부를 뚫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근육과 뼈의 결을 따라 그와 같은 기복을 보이며 안을 투명하게 비추는 피부의 주름은 생명체만의 예민한 물성을 표출한다.그림3. 매달린 사람 1-1작품의 정면과 측면에서 고조된 생명력에 감탄하면서 뒤쪽으로 이동하면 생명활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척추와 마주하게 된다. 곧게 쭉 뻗은 것이기보다는 인물의 굽은 자세를 만들어주는 곡선 모양의 척추이기에 단순히 살아있는 상태를 넘어서 잘 살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까지 보여준다. 굽은 등은 고통에 겁을 먹고 웅크린 아이의 자세 같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넓고 단단한 등과 힘이 바짝 선 척추를 보면서, 감상자는 이 조각상이 다시 태동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지금은 그를 위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척추를 중심으로 어깨, 팔, 등, 옆구리, 허벅지, 엉덩이의 모양이 결정되는데 허리와 엉덩이 사이에 파인 근육(중둔근, 소둔근)이 척추로 대표되는 정신적 의지를 강조한다.그림4. 매달린 사람 1-1이토록 미세한 부분까지도 생명력이 투영되었는데 거의 완성된 생명력의 표현에 부러 죽음의 요소를 포함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삶과 죽음의 표현을 혼재시킨 황학삼 작가의 조형 행위는 다 된 죽에 코 빠뜨리기 격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다. 우리는 생명력과 죽음이 충돌하는 역설적 지점에서 생명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통찰을 얻게 된다. 생명이라는 총체성은 몸을 이루는 물질적인 것들의 합보다 크며, 그 속에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는 현상들과 정신적 활동 또한 일어나기 때문에 우연적이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우연한 삶의 행로 위에서 우리 스스로가 조작,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사건들을 시시각각 마주치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사건과 선택에 마주했을 때 근거가 되는 가치관 또한 불완전하지만 그것을 붙들고 나아가야만 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손에 있는 온갖 핏줄과 힘줄이 설 지경까지 기둥을 꽉 잡고 매달려 있는 조각상들의 형상에 드러나고 있다.그런데 황학삼 작가는 육체적인 죽음보다 정신적인 죽음에 더 주목한 것 같다. 조각상이 실제 인체가 죽음 이후에 겪는, 수분이 모두 빠지고 메말라서 뼈만 남은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며, 정신을 의미하는 단단한 철제 기둥의 주위로 속이 텅 빈 육체가 조각되어 있는 것은 육체가 정신에 종속됨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차원에서의 죽음도 물리적 차원에서의 죽음에서처럼 대부분 불가역적이다. 자신의 가치관에 확신이 없고 사회 일반의 주된 가치와 그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 혹은 아예 그것이 불건전하고 비정상적인 ‘얼룩’으로 규정되었을 때에 무죄를 입증하고 정신적 건강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삶과 정신의 근원적 불완전성을 긍정한다고 해서 여기에 머무르고 타협하는 태도가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황학삼 작가는 전시공간을 상징체계로 삼고 그 안에서 실제적인 주장을 펴내는데, 그의 작품들과 작품이 모여서 만드는 대기는 현실에 대한 기호(symbol)로써 기능한다. 우선 직사각형의 전시공간은 하나의 사회이다. 조각들 하나하나는 다양한 개인들이며 바닥은 개인들이 서있는 현실, 천장은 개인들이 좇는 이상이 된다. 그랬을 때 천장과 바닥을 잇는 기둥은 개인이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추구하는 가치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각상들은 각기 기둥의 다른 높이에 매달려있으면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데 이는 육체의 다양한 재현이라기보다 다양한 가치관, 정신의 양태를 표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