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와 북부 이탈리아의 신플라톤주의 운동(반디넬리와 티치아노)16세기 초두에 ‘플라톤적’ 사랑 이론은 일반화되어 있었고, 사교 모임에서는 늘 대화의 주제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속화되지 않은 본래 형태의 신플라톤적 사랑 이론은 인류에 의해 정립된 지성적 구조 가운데 가장 대담한 것 중 하나로 평가되어야 할 한 철학 체계를 이루었던 사상이다.그 철학 체계의 근원지는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였다. 이 모임은 서로에 대한 우정, 주연이나 인간 문화에 대한 공통된 취향, 거의 종교에 가까운 플라톤 숭배 등을 통해 결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라는 학자에 대한 애정 어린 존경심이 그룹의 단결 요인이었다.피치노가 짊어졌던 과제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플라톤주의 철학의 원전들을(초록과 주석을 첨가하여) 라틴어로 번역함으로써 서구 독자의 접근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둘째는 막대한 양의 정보를 하나의 일관되고 생동적인 체계로 통합시켜 당대의 문화유산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셋째는 플라톤적 체계를 기독교와 ‘완벽히 조화로운 화음’의 입증을 통해 조화시키는 일이다.피치노의 체계는 신이 유한한 우주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믿는 스콜라적 사상과, 우주는 무한하며 신은 곧 그 우주라고 파악하는 후대의 범신론적 이론 사이에서 중개자 위치를 차지한다.피치노는 신을 헨, 즉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일자(一者, the One)로 이해했던 플로티노스와 동일한 방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을 정의하려 할 때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모든 서술을 거부하는 일(플로티노스)과, 명백히 모순적인 개념들을 사용해서 정의 내리는 일-쿠사누스의 『반대자의 일치』)을 피치노는 모두 적용한다. 피치노의 신은 한 모습인 동시에 모든 모습이며, 동적이지만 움직이지는 않는다.우주는 기묘하게 신과 구별되면서도 그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점차 완벽성이 감소되는 네 가지 계급 속에 자신을 드러낸다.(1) 우주 지성( 소우주가 구조적으로 서로 유사하다는 오래된 믿음을 공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유사성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해 냈는데, 도표를 통해 좀 더 분명히 설명해 보겠다.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다. 육체는 물질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형태이며 영혼은 단지 그것에 부착된 형태이다. 그리고 세계 정신이 달 아래의 세계와 달 저편의 세계를 연결하듯이, 인간 정신은 육체와 영혼을 연결시킨다. 영혼은 다시 제1영혼과 제2영혼이라는 표제 아래 분류된 다섯 가지 능력으로 구성된다.제2영혼 또는 하급 영혼은 육체와의 밀접한 연관 속에 살아가는데, 생리적 기능을 지휘하는 동시에 그것에 의존하는 세 가지 능력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번식, 자양, 생장의 능력이며, 둘째는 외부 세계에 대한 지각 능력으로서, 다시 말해 외계로부터 신호를 받고 전달하는 다섯 가지 감관(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 외부적 감관)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내부의 지각 능력 또는 상상력으로서, 이는 그러한 산발적 신호들을 통합하여 일관된 심리적 상을 만들어 낸다.(가장 내적이면서 단순한 감관, 상상력), 그러므로 하급 영혼은 자유롭지 못하고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제1영혼 또는 상급 영혼은 오로지 이성과 지성(지성, 인간적 또는 천상적 지력)의 두 능력으로만 구성된다. 이성은 하급 영혼에 더 가깝다. 상상력이 제공한 상을 논리적 원칙에 따라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은 초천상적 관념들을 직접 관상함으로써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이성이 추론적이고 반성적인데 비해, 지성은 직관적이며 창조적이다. 이성은 감관과 상상력에 의해 전달되는 육체의 경험과 욕망 및 욕구에 휘말리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성은 신적 지력과 교신하거나 심지어 그 일부를 나누어 받기도 한다.하급 영혼과 대조적으로 이성은 자유를 누린다. 다시 말해 저급한 감관이나 감정에 자신을 맡겨 버릴 수도 있고 또 이것을 극복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투쟁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성은 투쟁에서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지만, 투쟁이 진행마테르(어머니)라는 단어가 마테리아(질료)라는 단어와 연계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천국의 베누스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초천상 지대, 다시 말해 우주지성의 영역에 거주하며, 그녀가 상징하는 아름다움은 신성의 근원적, 보편적 광휘이다. 따라서 천상의 베누스는 인간 지성과 신 사이의 조정자, 즉 ‘자애’에 비유될 수 있다.아프로디테 판데모스 혹은 일반적 베누스로 불리는 또 하나의 베누스는 제우스(유피테르)와 디오네(유노)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그녀가 거주하는 장소는 우주지성과 월하계 사이에 위치한 지역, 다시 말해 우주 영혼의 영역이다. 그녀가 상징하는 아름다움은 따라서 근원적 아름다움이 개별화된 형상이며 더 이상 물질계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그 안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천상의 베누스는 순수한 지능인 데 반해, 이 베누스는 생산력이며 루크레티우스의 어머니 베누스처럼 자연의 사물에 생명과 형체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지각과 상상력이 지성적 아름다움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다.두 베누스는 각기 알맞은 에로스나 아모르를 동반한다. 에로스나 아모르는 베누스의 아들로 일컬어진다. 천국의 사랑 혹은 신성한 아모르는 인간의 최고 능력, 즉 지성이나 지력을 점령하고서는 지적으로 파악되는 신적인 아름다움의 광휘에 대해 관조하도록 몰아댄다. 다른 베누스의 아들, 즉 일반적 아모르는 인간의 중재능력, 다시 말해 상상력과 감각적 인식 작용을 관장하며 신적인 아름다움과 유사한 것을 물리적 세계에 생산하도록 그 능력들을 다그친다.피치노는 두 베누스, 그리고 두 사랑이 똑같이 ‘훌륭하고 찬양받을 가치가 있다’고 본다. 설령 방식은 다르더라도 양자 모두 미의 창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피치노와 피코, 그리고 벰보와 카스틸리오네 양편에 존재하는 차이는 피렌체와 베네치아 간의 차이를 반영한다. 피렌체 미술이 선적인 디자인과 견고한 형체, 그리고 체계적 구조에 토대를 두는데 반해, 베네치아 미술은 색채와 분위기, 회화적 촉촉함과 음악적 조화에서 기반을 찾는다.이러한 대비는 각기 피렌체와 베네치아과 지성의 독특한 위치가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성과 비열한 충동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에서 지성이 그 어느 쪽 편에도 서지 않으며 그 결과에 대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기억할 것이다.(‘자유로운 그대’라는 표현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지성은 밑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으며(그래서 ‘지성’을 의인화하는 여인이 눈길을 아래로 보내면서 당황하는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다.) 신적인 지혜의 불꽃을 사용해 이성을 밝게 비추어야 한다.이 동판화를 기억하면서 티치아노의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이 작품은 늦어도 1515년경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서, 이 시기는 벰보의 『아솔라니』가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때이다.(도108)티치아노의 그림은 신중세적 도덕주의가 아니라 신플라톤적 인문주의에 관한 기록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과 악의 대비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원리는 두 가지 존재 방식과 두 단계의 완벽성을 지니는 것이다. 고귀한 정신의 나신은 세속적 피조물을 경멸하지 않고 그와 함께 자리를 나누지만 부드럽게 설득하는 눈초리로써 그녀에게 상위 영역의 비밀을 나누어주는 듯 보인다. 뿐만 아니라 두 인물이 자매 이상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사실 티치아노의 작품에는 쌍둥이 베누스라는 제목이 붙여져야 한다. 피치노적 의미에서의 ‘쌍둥이 베누스’와 그것에 함축된 일체의 의미를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신의 인물은 ‘천상의 베누스’로서 보편적이고 영구하며 온전히 지성적인 아름다움의 원리를 상징한다. 다른 인물은 ‘일반적 베누스’로서 소멸하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지상에서의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생산력’을 상징한다. 양자는 모두 피치노가 말했듯이 ‘각기 나름대로 훌륭하고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쿠피도가 ‘지상의’ 혹은 ‘자연적’ 베누스에 좀 더 가까이 있기는 해도 두 베누스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 그리 실제 나신은 배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나신이 빈곤이나 뻔뻔함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유적 의미에서는 대체로 단순함, 진지성, 그 외 사물의 참된 본질, 가령 핑계, 속임, 외모 따위와 반대되는 속성과 동일시되었다. 모든 사물은 신의 ‘눈에는 벌거벗고 드러나는’ 것이다. 벌거벗은 덕은 진정한 덕목으로서 물질적 부나 사회적 지위가 중요하지 않던 흘러간 옛날 그 좋았던 시절에 존중되던 것이다.중세의 도덕 신학에서는 나신의 상징적 의미가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자연적 나신은 인간의 자연적 상태로서 인간을 겸허하도록 이끈다. 둘째 일시적인 나신은 세속적 물질의 결여를 뜻하며 자발적으로 성취되거나 가난에서 기인한다. 세 번째의 덕스러운 나신은 결백의 상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죄적인 나신은 욕정이나 허영, 그 외의 모든 덕이 결핍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네 가지 범주 가운데 마지막 유형은 미술 분야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중세 미술에서 나신과 옷을 입은 인물이 의도적으로 대비될 경우에는 언제나 후자가 부정적인 의미 쪽을 표현한다. 자연적인 나신에 해당하는 좋은 본보기는 ‘자연’과 ‘은총’ 또는 ‘자연’과 ‘이성’ 사이의 대화들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선(先)르네상스 정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쿠피도의 벌거벗은 모습은 사랑의 ‘정신적인 특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고 또 완전한 나체의 인물이 선덕을 재현하는 데 사용되게 되었다.벌거벗은 진리의 이미지는 르네상스와 바로크미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의인상의 하나가 되었다. 나신의 모습은 특히 옷을 입은 인물과 대비될 때면 일반 철학적 의미에서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적 매력(에페이삭톤 칼로스, 장식)과 대조를 이루는 내재적 아름다움(피지콘 칼로스, 선천적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이상적이고 지성적인 것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이때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다루어진 이유는 단순하고 ‘참된람이다.
미술작품의 가치Ⅰ. 머리말미술비평이나 감상은 예술작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향수하는 활동이다. 예술작품은 어떠한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인간 정신이 객관화된 것으로 감상자는 미술작품 속에서 자기 나름으로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미술의 가치가 재생산되고 풍요로워진다. 몇 사람의 견해를 통해 예술작품의 가치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한다.Ⅱ. 예술작품 가치레이더와 제섭은 ‘좋은 예술작품’이란 아름다움, 독창성, 형식적 통합, 기억할 만한 경험 등 네 가지 요소를 들어 설명하였다.- 아름다움 :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예술작품의 전부는 아니지만 형식적 미는 좋은 예술작품의 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독창성 : 독창성이나 창조성은 좋은 예술작품, 혹은 진정한 예술작품에서 중요한 특성이 된다. 그러나 그 창조성과 독창성은 상대적으로 전통에서 이어받은 것이다.- 형식적 통합 : 예술작품의 특질은 각 요소들의 유기적 관계 사이에서 나타난다. 예술작품의 형식은 다양한 가운데 통일성을 가지면서 내용과도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 기억할 만한 경험 : 예술작품을 지각함으로써-감상할 때 그 속에서 기억할만한 경험을 환기시켜주는 작품이 좋은 작품인데, 기억할 만한 경험의 가치는 형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제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애버크롬비는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기억할 만한 경험의 환기는 예술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김춘미는 예술의 가치를 첫째, 도덕적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가치, 둘째, 진리 또는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가치, 셋째,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가치란 세 가지 관점으로 논의하며, 예술은 ‘가능한 세계를 보여주는 기능’이란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한다.(미적 가치, 종교적 가치, 도덕적 가치, 지적 가치 실현) ‘가능’은 새로움을 뜻하는데 예술에 있어서 새로움은 독창적임을 전제로 한다.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때 독창성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박이문은 예술작품 가치판단은 예술작품에 내재하는 구성요소들(내재), 감상하는 사람의 반응(외재), 예술작품의 기능(고유의 기능, 자율적 기능, 자기 목적적)에서 평가의 기준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예술이 인간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인 이상, 인간의 삶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박이문의 예술작품의 자율적 가치는 가능성으로서의 새로움의 세계를 제시하는 독창성에 의해 가능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예술작품은 가치표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는 ‘가능성으로서의 새로움의 세계’를 제시하는 독창성이다.Ⅲ. 미술작품의 가치 평가 활동의 의미미술작품의 가치 평가 활동의 의미는 첫째, 과정으로서의 의미, 둘째, 초발적 가치평가, 셋째, 작품의 가치를 규명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여 서로 미적 가치의 공유. 넷째, 미술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고 선택하게 하는 활동은 우리들이 삶을 영위함에 있어 ‘평가’하고 ‘선택’하는 데에 중요한 인간적 능력을 키워주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가치평가는 선택을 위한 안내자란 점과 ‘자기 완결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며, 미적경험 혹은 예술작품 안에 있는 복잡성과 차이를 발견함으로써 거기서 느끼는 가치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Ⅳ. 가치평가의 관점과 방법예술작품의 가치 평가란 예술적인 질에 대한 평가이며, 그 탁월성(독창성)의 등급 지움도 포함되는 것이다. 작품을 비평하고 감상하는 사람에 있어 작품의 어떤 점이 고도로 예술적이며 그렇지 못한 것인가는 중심적인 문제이다.비어즐리 ‘미술작품의 어떠한 점이 독창성인가‘ 비평의 기준을 통일성, 강렬성, 복잡성이라는 일반적인 원칙들을 전제로 주장한다. 통일성의 원칙은 작품의 질서로서 일관성과 구성의 효과 등을 말하며, 강렬성의 원칙은 작품이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다든가, 작품의 짜임새가 있다든가, 혹은 새롭고 독창성이 있다든가의 원칙이며, 복잡성은 다양성으로서의 원칙을 의미한다.독창성은 한 예술작품에서 주제와 형식의 차원에서 고찰될 수 있다고 한다. 독창성이란 가치기준을 형식과 내용에 의하여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실제에 임해서는 형식과 내용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서 독창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데 동원되고 있고는 것을 고려해야한다. 다시 말해, 작품에 대하여 주제의 깊이와 형식의 세련미를 유기적인 관계에서 평가해야하는 것이다.
양식(樣式)예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양식파악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작품은 제작동기가 다르면 감각의 형태와 표현하고자하는 생활감정의 표현재료, 표현수단, 형식도 달라진다. 그러한 이유로 예술작품은 저마다 특유의 표현형식, ?개개의 양식?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동일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공통된 특색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한 작가의 그 시절만의 독특한 ?사물을 보는 방식?, ?사물을 느끼는 방식?으로 작품 속에 객관화·구체화된 작가의 표현형식은 작품들마다 ?개인양식(個人?式)?을 가진다.?양식(樣式)?(style, stile, stil)이라는 단어가 오늘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 빈켈만(J.Winckelmann, 1717~1768) 이후로, 양식은 작품을 작품 ?개인양식?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같은 시대, 같은 지역, 같은 유파의 다른 작가의 표현 형식과 공통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시대(時代)의 양식?, ?지방(地方)의 양식?, ?유파(流波)의 양식? 등으로 분류된다.?시대의 양식?은 그 시대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조건이 당대 사람들의 생활감정을 형성하고, 예술의 표현 형식(양식)에 공통된 영향을 받아 그 시대 사람들의 작품에 유사한 표현양식이 나타난다. 하지만 예술작품 양식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조건보다 직접적인 영향관계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기본정조(基本情調)이다. 그러나 당대 많은 미술가가 시대정조만을 기초로 서로 유사한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스스로에게 가장 적합한 표현수단, 방법, 표현의 양식(모양과 색상, 선 및 빛과 그림자의 관계)을 가지고 생활감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작가의 모든 체험은 작가의 생활감정을 변화시킨다. 천재적인 미술가는 당대나 과거에 예술의 지도적인 양식을 토대로 변화된 생활감정을 새로운 시대의 정조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신양식(新樣式)?을 ?개인양식?으로 창조하거나 기존 지도적 양식을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 수도 있다. 천재 미술가의 ?개인양식?은 당대의 미술가들에게 공감을 이끌어 그 시대 작가들의 표현양식에 영향을 줌으로써 공통되는 시대 양식이 발생하게 된다. 즉 ?시대양식?은 당대 천재 미술가의 ?개인양식?과 다름없는 것이다. 예로, 17세기 이탈리아 밀라노출신의 화가 카라바조는 작품을 의도적으로 신앙을 의인화한 이상화되고 아름다운 인물 대신에 단순하고, 때로는 추하기도 한 인물로 표현하였다. 이는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의 작품과는 완전히 달라 그의 양식이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북부 유럽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주어 그의 추종자들로 카라바조 화파가 형성된다.?유파의 양식?이나 ?지방의 양식?에 있어서도 ?시대의 양식? 양상과 같다. ?유파의 양식?은 유파에 독특한 기교적 전통을 파악해야하고, ?지방의 양식?은 풍토적인 조건에 영향 받는 여러 요소를 인지해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있더라도 새로운 양식을 전개시켜나가는 것은 그 유파나 지방에 속해있는 지도적인 천재 미술가이다.하나의 양식을 바르게 이해하고 역사적 전개를 밝히기 위해서는 누구의 어떤 작품이 처음으로 가장 정확하게 그 시대의 문화정조와 시대생활의 이상을 표현했는지를 연구하여야한다. (즉, 각 양식의 ‘양식의 아버지’를 요구해야한다.)미술의 역사는 미술가가 자신의 작품 안에 당대의 생활 감정을 표현한 그 시대의 역사이며, 역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양식은 곧 역사이다. 미술사학은 양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개의 작품을 예술적으로 이해하고 그 작품의 양식의 유래와 영향관계를 분명히 파악하여, 그 양식의 역사적 전개와 그 역사적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것이 미술사학의 목표이다.
高宗代 璽寶의 考察목 차Ⅰ. 머리말Ⅱ. 璽寶의 개념Ⅲ. 高宗代 璽寶의 기록Ⅳ. 高宗代 璽寶 印?의 양식Ⅴ. 맺음말Ⅰ. 머리말고종의 즉위를 전후한 시기의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열강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미국·영국·독일 등 서양 각국과도 수호통상을 체결하며 국제 사회와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고종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다방면의 개혁을 시도한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을 일으키고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 1895)하는 등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고종은 국제관계에서 보다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고자 1897년 연호는 ‘광무’, 국호는 ‘대한’이라 정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현재 고궁박물관 소장 어보 중 고종대에 가장 많은 어보가 만들어졌다. 무려 316과 중 101과(32%)의 어보를 만들었다. 다음으로는 영조 48과(15%), 철종 30과(9.5%), 숙종 28과(8.9%), 정조 21과(6.6%)순이다. 또한 어보의 제작과 현존 유물의 숫자를 따져볼 때에도 19세기 이후에 만든 것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것은 이전시기의 유물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18세기 이후 급격히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새보의 개념과 문헌기록, 인뉴의 양식분석을 통하여 이 시기 급격하게 많은 양의 인장을 만든 시대적 상황과 이유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Ⅱ. 璽寶의 개념조선시대의 새보는 국가의 상징이나 왕위 선양, 외교문서에 사용하는 國璽와 국왕을 포함한 왕실의 공식인장인 御寶를 모두 포함한다.본래 ‘국새’라는 용어는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의 국새와 대보는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의미로만 쓰였는데,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각종 의전 및 행정업무와 외교문서에 사용하는 집무용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왕위 계승 시에는 ‘나라를 물려주는 전국의 징표’로 전수하였으며, 국왕의 각종 행차 시에는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행렬의 앞에서 정중히 운반하였다.(도 1)한편 왕는 주로 숙동과 함석을 주조하여 만든 후에 금도금을 한 것이다. 은인는 제작된 수량이 많지 않으며 양식상으로는 금인과 차이가 없다. 조선시대 제작된 은인은 모두 6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5과이다.(표 1) 은인은 왕후나 세자, 세손, 세손빈의 것으로 왕의 어보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백철인은 1460년(세조6)에 만들어진 장순왕후의 어보로 직뉴형식의 어보이다.(도 3, 도 4, 도 5, 도 6) 그리고 인뉴의 모양으로 형태를 구분 할 수 있는데, 귀뉴, 용뉴와 직뉴로 나눌 수 있다. 1897년 고종이 조선의 연호를 대한으로 바꾸면서 새보의 모양 또한 변화를 가지고 온다. 인뉴의 형태가 거북이에서 용으로 바뀐 것이다. 용뉴의 경우 조선 초기에 제작되었으나, 현존하고 있는 것이 없으며, 세종(世宗, 제위 1418-1450) 이후부터 대한제국 수립 전까지 용뉴 새보는 제작되지 않았다.(도 7, 도 8, 도 9)인장의 손잡이 모양으로 신분의 높낮이를 규정짓는 관습은 漢代로부터 시작되었다. 시대와 국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인장에 쓰이는 글자, 재질, 뉴식, 인끈의 색으로 신분의 고하를 정하는 관습은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고대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인장의 인뉴는 주로 거북이와 낙타이다. 현재 유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漢舊儀 의 기록을 통하여 귀뉴가 갖는 상징과 이를 소지할 수 있는 신분을 파악할 수 있다.조선시대를 통틀어 명과 청으로부터 받은 6과의 국새는 모두 한제에 의거하여 귀뉴로 한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거북이가 갖는 의미는 십장생의 하나로 주로 상서와 장수를 나타내지만, 인장에 있어서만큼은 책봉과 조공의 관계가 반영된 하나의 상징이다. 용은 왕의 얼굴을 용안, 지위를 용위, 앉는 걸상을 용상, 의복을 용포 또는 곤룡포라 하였고, 왕의 옷에는 항상 용문을 수놓는 등과 같이 동양에서 천자나 군주를 가리키는 상서로운 동물로 자리매김하였다.대한제국이 제작한 새보는 총 9과로 1과의 ?皇帝之寶?를 제외한 8과를 용뉴로 제 국왕의 지시 및 해당 관청의 보고서가 나온다. 다음에는 작업에 필요한 재원의 조달 및 작업자의 급료가 나오는데, 비용은 무위소에서 熟銅 300근과 함석 150근을 내었고, 호조에서 은 880냥과 엽전 2,355냥 5전을 냈다. 작업자가 받은 급료는 업무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장인은 매달 11냥 4전을 받은 반면에 작업을 지원한 捕校는 6냥, 포졸은 3냥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보인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인원과 물품을 해당 관청에 요청하는 문서가 나온다. 작업을 시작할 때 필요한 차일이나 병풍을 요청하거나 보인을 근정전으로 옮길 때 가마를 멜 군사들의 복식을 준비하라는 지시 등이 있다. 12월 28일, 보인이 근정전에 올려진 후에는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포상을 내렸는데, 무위소의 제조와 종사관은 熟馬와 사슴 가죽을 하사 받았고, 하급 관리들은 품계가 올라가거나 지방 수령에 임명되었다. 보인을 제작한 장인들은 무명을 상으로 받았는데, 이를 보면 27종 77명의 장인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인소의궤 의 상당 부분은 圖說이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 제작된 11종의 보인과 이를 보관하는 상자의 그림이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고 세부 규격이 정리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보인을 비단이나 각종 옷감으로 싸서 보관하는 방법인 封?式, 작업에 소요되는 물품을 국왕에게 요청하고 소요 내역을 기록한 稟目, 작업이 끝난 후 각종 물품의 실제 소요량과 남은 양을 보인소에서 호조에 통보한 문서인 移文 등이 정리되어 있다. 보인소의궤 의 마지막에는 의궤 작성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를 보면 대부분의 의궤는 제작과 동시에 해당 기관으로 이송하였으나, 4곳의 사고로 보내지는 것은 일단 예문관(藝文館 : 국왕의 명령을 작성하는 관서)에서 잘 건조시킨 후에 지방으로 발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보인소의궤 에는 1876년에 만들어진 11종의 보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종류와 재료, 규격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단위는 寸이며, 자는 禮器尺을 사용하였다.(표 2) 11종의 보인 가이 차례로 정리되어 있다. 또한 보인소의궤 에 수록된 11종의 보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보인소의궤 에 수록된 보인과 보인부신총수 에 수록된 보인의 가장 큰 차이는 황제의 보인이 대폭 늘어났다는 점이다. 보인부신총수 에는 40여 종의 보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중 황제가 사용하는 보인은 모두 새로 추가된 것이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었으므로 이를 상징하는 ‘大韓國璽’가 만들어졌고, 여러 종류의 ‘皇帝之寶’와 황제의 명령을 의미하는 ‘제고지보’ ‘칙명지보’가 만들어진다. 이들 보인의 손잡이는 모두 용으로 되어 있어 외형상 황제의 보인임을 분명히 구분시켜 주고 있다. 국왕의 보인이었던 ‘시명지보’는 국왕급에 해당하는 황태자의 보인이 되었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정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것은 중국에서 완전히 분리된 독립국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한제국은 황제의 위격에 적합한 최고 수준의 보인을 갖추었던 것이다.(도 16, 도 17, 도 18)Ⅳ. 高宗代 璽寶 印?의 양식새보는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제작되어졌다. 새보는 왕실이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물로 사용자의 위격에 따라 그 양식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보의 인뉴 또한 점진적으로 변화가 나타난다. 이를 통해 시대별 양식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조선전기 새보는 거북이의 모양에 충실하며 힘차고 강한 사실적인 형태의 귀뉴가 제작되었다.(도 19, 도 20)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혼란해진 새보의 양식은 인조대부터 새로운 양식의 귀뉴가 등장해 숙종대에 이르러 새로운 양식의 정점을 이루는데 이때 귀뉴는 추상화되고 장식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사실적인 거북이의 모습이 아니라 신이적인 거북이의 모습을 나타낸다.(도 21, 도 22) 영조대에는 귀뉴에 거북이의 머리 대신 용머리를 하고 있으며 옆구리를 높이고 길게 하고 인수의 크기에 맞는 동그란 천공을 뚫어 효율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도 23, 도 24) 조선말기에 이르러 나타난 귀뉴는 장식적인 요소는 강화되지만 몸은 움츠러들어 활력이 느껴지지 몸체는 앞쪽은 높은 반면 뒤쪽으로 갈수록 좁고 낮아진다. 귀뉴의 크기 또한 작아져 보신에 여유 공간이 많다. 또한 옆구리가 높아지고 둥근 천공이 사라져 배 아래로 인수가 지나가는 특징이 있다. 인수가 배 아래로 지나가는 천공방식은 귀뉴2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귀뉴2양식이 평평한 옆구리 밑을 파고 인수를 지나가게 하는 반면 귀뉴3양식은 옆구리에서 배 밑으로 곡선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보이게 한 점은 발전된 형태라 생각된다.(도 29, 도 30)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함과 동시에 대대적으로 어보와 어책의 제작을 시작하게 되는데 모두 총 43과로 8차례에 걸쳐서 제작되었다. 제후국에서 황제국으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어보도 이에 걸맞게 용뉴형 어보가 제작된다. 이 시대에 제작된 어보 중 용뉴는 25과이다. 용뉴형은 이전에 제작된 용뉴형이 전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짧은 시기에 제작되어 양식적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러나 5차례에 걸쳐서 제작된 용뉴어보는 조각의 세밀함과 몸통 비례 등에서 차이가 나타난다.용뉴1양식은 처음으로 등장하는 용뉴형 어보로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곧바로 제작한 明聖王后 금보에서부터 시작되어 1900년 제작된 明成皇后 옥보까지 지속된 양식이다. 용뉴1양식의 어보는 모두 13과이며 고종 34년, 고종 36년, 고종 37년의 세 차례에 걸쳐 만들어졌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더불어 제작된 명성황후 금보는 2단의 보신 위에 용뉴가 자리 잡고 있는데 몸체가 ∩자형으로 등을 구부리고 있는 형상이다. 얼굴을 약간 아래를 보고 있는데, 입과 눈, 코가 크고 양감이 강하다. 입은 벌어져 있으며 이빨이 날카롭게 표현되었고, 입주위에는 이단의 수염이 날카롭게 뻗어있다 눈썹은 풍성하며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다. 이마 양쪽으로는 사슴뿔모양의 뿔이 솟아 있고, 이마 뒤쪽으로는 고사리 모양의 털이 달려 있다. 얼굴 곳곳에 둥근 홈이 움푹움푹 파여 있다. 앞뒤 발은 정면을 향해 곧게 모으고 있는데 발가락은 각 4개이며 다리 부분에는 화염형태의)
彌勒寺址 舍利莊嚴具 出土에 관하여- 목 차 -Ⅰ. 머리말Ⅱ. 彌勒寺址 西塔 舍利莊嚴具 出土 現況Ⅲ. 彌勒寺址 西塔 舍利莊嚴具 樣式Ⅳ. 彌勒寺址 舍利奉安記Ⅴ. 맺음말Ⅰ. 머리말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던 당시 우리나라의 탑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그러나 三國遺事 의 기록이나 요동성총 내부에 그려진 요동성도에 다층의 목조건물이 남아 있어 불교 도입 초기 고구려에 세워진 탑은 인도탑과 중국탑이 함께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장법 또한 인도의 것을 수용한 중국 사리장법의 영향을 받아 인도와 중국에서 제작되었던 사리용기의 전형적인 형식을 계승하였다.백제의 여타 석탑 및 사지에서도 사리장엄은 출토되었으나, 왕흥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리장엄 일체를 완전히 갖춘 채 발견된 것은 없고 그 중 일부만 발견되어 동시대 사리장엄의 완전한 실체를 이해하기에 부족하다. 2009년도 1월 14일 백제 7세기 武王대 건립된 익산 彌勒寺址 西塔의 석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를 통해 7세기 백제 사리장엄의 면모와 백제와 동아시아의 교류현황을 이해하고, 사리봉안기를 통해서 미륵사지 창건 목적을 재해석하고자 한다.Ⅱ. 미륵사지 서탑 사리장엄구 출토 현황미륵사지는 1탑 1금당을 3곳에 나란히 배치한 삼원병치의 가람구조로 삼국시대나 그 이후의 가람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배치구조이다.(도 1) 삼원병치 가람의 발생은 미륵신앙의 내용을 구상화한 것으로 설명되어지며, 이는 백제시대 가람배치의 전통성과 용화회상의 사상성 그리고 가람조성에 있어 지형과의 조화라고 하는 관점에서 백제만의 독자적인 배치양식이라 할 수 있다.서탑의 해체과정에서 백제시대의 창건된 석탑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개축된 석탑임이 밝혀진 바 있다. 석탑이 개축된 시기는 여러 정황상 고려후기나 조선초기로 추정되며, 석탑이 일부 지반까지 정비된 때는 해체과정에서 출토된 양각운문청자 편을 통해 12세기 중후반 경으로 추정된다.미륵사지 서탑 석탑 해체·복로 차단하여 사리장엄을 외부환경변화로부터 보호하고 봉안 유물의 영속성을 좋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출토된 사리장엄은 총 4층위로 구분할 수 있으며 바닥층에는 유리판을 깐 다음 유리판 가장자리에 5개의 청동합을 올려놓았다. 이 중 한 개는 또 다른 합에 포갠 상태로 올려져있었으며, 합의 빈 공간에는 크고 작은 유리구슬이 합의 높이만큼 깔려있었다. 이 합 위에 다시 각종 공양품이 놓였고 사리호가 놓일 사리공 중심부분과 봉안기가 놓일 남쪽면 앞쪽을 제외한 가장자리 부분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은 탑의 중심에 위치한 심주석의 중앙에 봉안되었다. 일반적으로 목탑은 지하에, 석탑은 지상에 봉안하게 되는데 대부분 1층 탑신상부 윗부분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공은 예외적으로 1층 탑신상부 아래 부분인 기단부 바로 윗부분에 안치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바로 석탑이 목탑의 시원적 양식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형태로 볼 수 있다.Ⅲ. 미륵사지 서탑 사리장엄구 양식미륵사 사리장엄은 백제시대 사리장엄 중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출토된 백제시대 여러 사리장엄과 유물을 세부적으로 구분 비교하여 미륵사 사리장엄을 통해 7세기 백제 사리장엄의 특징과 백제와 동아시아의 교류현황을 살펴본다.미륵사지 사리기의 구성은 내측에서부터 유리, 금, 금동 재질차가 있으며, 그릇형태는 병, 호, 호의 순서이다.(도 4) 577년 백제 왕흥사지 사리기의 구성은 내측에서부터 금, 은, 동 재질차이를 가지며, 그릇형태는 병, 호, 합 순서이다.(도 5)미륵사지 금제사리호와 금동제사리호는 모두 비슷한 형태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몸체에 조금 굵고 긴 목이 달렸으며, 구연부는 광구형으로 처리되었다.(도 6,도 7) 이러한 형식은 비례가 좀 차이가 있지만 왕흥사지 출토사리장엄구 중에서 은호의 형식과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器形은 중국식 기형이 전래되어 백제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안정된 형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보주형의 꼭지는 역시 왕흥사지 사리구의 형태사지 사리기는 뚜껑의 紐와 그 주변을 제외하면 無紋이지만 미륵사지 사리기에는 문양을 여러 단으로 나누어 연화문, 팔메트(인동당초, 연화당초) 등을 모조기법으로 새겼으며, 문양대의 경계는 횡선대로 구분하였다.당초문은 몸체의 상부와 하부에 연속적으로 뻗어나가는 형태로 묘사되었다. 몸체 상부에는 넝쿨의 S자형으로 연속적으로 뻗어나가고 있고, 하부는 인동당초문을 연속적으로 이어나가면서 타원형의 공간을 연결하고 있다. 잎의 표현이 도톰하고 입체적이며 이중의 매듭장식 등에서 장식성이 뛰어난 점은 북위계보를 잇는 북제 당초문의 표현과 유사하여 그 영향이 주목된다.(도 9, 도10) 당초문은 고대 이집트에서 발생하여 그리스에서 완성되었으며, 북 아프리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서아시아, 페르시아 등의 제국과 인도, 중국과 한국, 일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인동당초문은 인동문과 당초문이 합쳐진 형태로 당초문과 불교문화가 완전히 정착된 후 두드러지는 문양이다. 백제 제석사지 암막새기와에서도 당초문을 확인 할 수 있다.(도 11)연화문은 인도 200B.C에서 500A.D에 이르는 동안 인도 대륙에서 살던 원주민과 이국민의 왕조가 뒤섞이며 발생과 소멸을 거듭해왔다. 백제는 일찍이 북으로는 중국 한나라문화권과 고구려를 경유한 중국 문물과의 교류가 행해졌으며, 서남으로는 해상을 통하여 중국 남북 조간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인도에서 출발한 연화문은 중국을 통해 백제에 전달되었다. 미륵사지 사리외호 뚜껑 윗부분에 연판 안에 연판이 겹쳐져 세잔하게 표현된 연꽃잎이 촘촘하게 표현된 연화문은 부여 부소산성 출토 광배의 연화문 형식과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도 12, 도 13)연판에 일렬로 이은 연주문은 7세기 새로운 누금의 공예기법으로, 나머지 빈 여백에 원문을 빼곡하게 찍어 어자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을 사용하여 작은 원을 연이어 찍어내는 어자문기법은 서역과 중국을 통해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 중에서 백제가 비교적 일찍 받아들인 것으로1줄을 정연하게 규칙적으로 찍은 것이다. 금제호의 경우에는 목 부분과 동체하부 구연부 윗단에 연주환문을 표현하기 위하여 어자문 기법을 사용했으며, 금동제호에서는 뚜껑과 몸체의 문양 구획부분이나 꽃주위에 어자문으로 표현한 연주문대를 표현하였다. 또 다른 방식은 문양의 바탕을 어자문정으로 쳐서 채우는 魚子文地의 표현이다.(도 14) 이것은 주로 동체 중앙부의 주문양 바탕에 돌린 것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문양의 외곽선을 따라 어자문을 찍은 후 그사이 공간에도 어자문을 찍어 바탕을 메운 것이다. 7세기 후반에 제작된 감은사지 동탑 출토 사리장엄구 중에는 內函의 기단부에 새겨진 신장상의 주위를 따라가면서 어자문을 가득 찍어 표면을 메우고 있다.(도 15) 이러한 통일신라시대의 어자문은 좀 더 조밀하고 빽빽하게 찍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 唐代와는 달리 어자문정을 완전히 찍지 않고 반만 찍거나, 혹은 겹쳐 찍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고 했는데, 이러한 한국적 어자문의 특징은 이미 7세기 백제의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주목된다.사리봉안기를 살펴보면, 왕흥사지 동합 표면에 6행 29자의 봉안기가 새겨져 있으나 미륵사지의 경우 별도로 만든 금판 전후 면에 22행 193자를 새겼다는 점이 다르다. 보다 앞선 시기에 봉안된 능산리 사지의 경우 석제 사리감의 표면에 2행 20자의 봉안기가 새겨져 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 세 개를 시간 순으로 배열하면, 사리감표면(능산리 사지, 567년, 2행 20자)→동합 표면(왕흥사지, 577년, 6행 29자)→금판(미륵사지, 639년, 22행 193자)순이 된다.(도 16, 도 17, 도 18) 즉 시간이 흐르면서 글자의 수가 많아지고 봉안기가 별도로 분리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미륵사지 사리장엄구에는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와 비교해 보았을 때 유독 금으로 제작된 장엄구가 많다. 三國遺事 무왕조에서는 서동이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에서 사금을 채취했다는 기록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익산지역 사금 생산이 일고 있다.미륵사지 사리봉안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我百濟王后佐平沙宅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지금까지 발표된 논문의 주요 쟁점으로 미륵사 창건 발원주는 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므로 三國遺事 무왕조 선화공주 이야기를 설화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와 사리봉안기가 무왕 말년, 그리고 선호공주 이야기는 무왕 즉위 이전의 것이므로 두 기사 모두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이 대립하였다.무왕의 재위 기간이 길고, 통상적으로 왕에게는 여러 비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선화공주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사택적덕은 백제후기의 대성팔족의 하나였던 사택씨 출신으로, 사택가문은 성왕의 사비천도에 적극적으로 왕을 지원하여 사비천도 이후 최고 귀족가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사씨세력의 근거지를 익산으로 추정하고 있다.무왕의 즉위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정황이 포착된다. 三國史記 를 보면 무왕과 비슷한 시기의 왕들은 구체적으로 계보를 밝히고 있는데 반하여 무왕은 단지 아들로만 적기하고 있다. 이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서자(庶子)인 것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추측된다. 三國遺事 를 보면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로 수도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지어 살았으며 池龍과 貧母 사이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무왕의 어머니는 백제 중앙귀족이 아닌 익산 출신인 관계로 상대적으로 신분이 미천했으며, 이 때문에 빈모로 표현되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무왕의 어머니는 수도의 남쪽인 익산에 거주하였던 지방토착세력가의 딸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겨진다.이와 같이 무왕은 모계 쪽이 취약하였기 때문에 집권 초기에 힘이 있는 귀족과 일정 정도 타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무왕의 즉위를 귀족들이 조정하기 쉬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