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목 명 : 동양고중세사담당교수 :소 속 :학 번 :이 름 :제 출 일 :I. 서론1II. 본론11. 유학의 역사11)공자12. 성리학의 발생23. 성리학의 발전21)성리학의 발전과정 22)성리학의 내용 3(1)태극론3(2)이기론3(3)심성론3(4)성경론3(5)이기의 개념44. 성리학이 동아시아에 미친영향41)긍정적인 영향 42)부정적인 영향4III. 결론55I.서론성리학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물론 그 전에도 얼핏 듣기는 하였지만, 공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리학에 대해서 이렇다 할 뚜렷한 생각이 없었다. 윤리시간에 처음 성리학을 배웠는데 어찌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던지 성리학과 성리 학자들에 대한 원망이 아주 가득했었다. 당시에 본인의 생각은 실제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과 '이'가 먼저고 '기'가 먼저고 하는 논쟁들은 다 소용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성리학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수많은 관료들과 학자들이 그렇게 이론논쟁을 벌였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성리학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위한 학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조선사회의 성리학만을 바라본 나로서는 부정적인 생각만이 들뿐이었다. 나에게 성리학이란 논쟁의 논쟁을 거듭하는 사대부들의 권력싸움의 도구로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리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에 많은 부분들을 차지해왔고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성리학과 동아시아의 질서에 대해 알아보면서 아마도 나는 그것의 본질에 대해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견해와 같이 성리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성리학의 본질을 깨닮으로서 부정적이었던 나의 견해가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성리학은 동아시아의 많은 학자들과 학도들 사이에서 부정적이게 혹은 긍정적이게 평가되어왔고 연구되어왔다. 한 이론에 대해서 이렇게 왈가왈부 의견들이 많은 이유는 아알아야 할 것이며, 성리학이라는 이론이 동아시아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II. 본론1. 유학의 역사1)공자성리학은 유학의 한 계통이기 때문에 성리학에 다가가기 이전에 유학을 알아보고 다가가는 것이 훨씬 이해함에 있어서 용이 할 것이다.유학이란 공자를 시조로 하는 전통적인 중국의 학문이다. 요(堯), 순(舜)으로부터 주공(周公)에 이르는 성인을 이상으로 하고 인과 예를 근본 개념으로 하여, 수신에서 비롯하여 치국평천하에 이르는 실천을 그 중심 과제로 한다.공자는 춘추시대의 제자백가 중 한명으로, 일정한 스승의 지도 없이 당시의 학교와 인물로부터 두루 배웠으며, 나중에는 주나라로 가서 노자를 찾아 '예' 에 대해 묻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공자는 20대에 벌써당시 노나라에서 무시 못 할 인물이 되었으며,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22세의 나이로 이미 높은 학식을 인정받고 이름을 얻은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로부터 그들의 능력에 알맞은 폐백(幣帛)을 받고 그들의 수준에 알맞은 공부를 시켰다.공자가 꿈꾸던 세상은 예(禮)와 덕(?)과 문(文)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래서 공자는 그러한 이상을 실현한 주(周)나라를 동경하였고, 그 반대로 당시의 권세 있는 대부들이 제후들을 무시하고 권력을 농단하던 사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당시 춘추시대에는 국가 간이나 나라 안이나 간에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횡행하여 온갖 명목의 전쟁 때문에 민중들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지게 되었다. 공자는 당시의 정치가들에게 자기의 덕치주의(?治主義)를 설파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여러 나라를 주유하기도 하였고, 직접 벼슬을 맡아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벽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엔 너무나 두터웠고, 많은 좌절과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합리적인 도덕정치철학은 시대를 넘어 후대에 계승되어 한(漢)나라에서 국정이념으로 채택된 이래 동양의 역사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2. 성리학의 발생유학의 한 분류며 정주학, 주자학, 도학, 양명학, 심학 등으로도 불린다. 이 중 정주학, 주자학, 도학이 송대의 한 계통이고, 양명학과 심학이 명대에 일어나 한 계통을 이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정주학 계통만이 발달하여 성리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이 계통만을 가리키고 있다.성리학은 중국 당 말 이래 귀족사회가 붕괴되면서 일어난 혼란을 당시에 성행했던 도교와 불교의 사상적 약점에서 찾고, 유학의 재건부흥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데서 출발했다. 따라서 유학의 장점으로 강조되는 윤리와 경세사상이 담겨 있는 가 중시되는 한편, 불교·도교의 영향을 받아 우주·자연 및 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가 깊어졌고 심성 수양이 철저해진 경향을 보인다. 또 형이상학적 이론과 수기(修己)의 이론이 많이 담겨있는 이 가장 중요한 기본경전으로 간주되었다.3. 성리학의 발전1)성리학의 발전과정성리학이 중국에서 일어나게 된 까닭은 안녹산의 난 이후 많은 민란에 의해 당나라의 폐쇄적인 귀족사회가 허물어지면서 야기된 혼란을 계기로 관료학자(사대부)인 유학자들이 그 혼란과 모순을 불교와 도교의 사상적 약점에 돌리고, 그 극복을 유학의 재건·부흥을 통하여 이루려는 데에 있었다. 당시 유학자들의 판단으로는, 불교나 도교가 지닌 현실 대응상의 약점은 무엇보다도 가정과 사회를 멀리하며, 심지어 국가생활조차 가볍게 보는 점이었다. 도교의 은둔경향과 불교의 속세를 멀리하는 출가의 경향이 그것이었다. 특히 당·송나라의 유학자들의 눈에 비친 불교는 개인의 안심입명 위주의 수행을 위해 출가하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가정과 사회·국가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당시의 사회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한편, 성리학은 불교·도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우주·자연 및 인성에 대한 본체론적 형이상학 탐구가 깊어진 것과 철저한 심성수양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성리학에서는 본체론적 형이상학을 매우 깊이 파고드는 성향이 강하여, 천명·대극·천리(天理)·성명(性命)·의리(義理)·이(理)·. 수양 역시 공자·맹자시대 이상으로 철저히 한다는 뜻에서 공자가 말한 <위기(爲己)>의 표현을 성리학에서 자주 쓰게 되었다. 아무튼 이 모두가, 불교와 대항하던 성리 학자들이 불교에 연기(緣起)·법계(法界) 등의 깊은 형이상학과 참선 같은 수행이 있음을 깨닫고, 그런 것이 유학에도 갖추어져 있음을 과시하려 했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2) 성리학의 내용(1)태극론태극은 만물의 근원이요, 우주의 본체를 의미한다. 태극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통해 성리학의 중심개념이 되었고 보편과 특수를 매개하는 의미로 사용됨으로써 송대 이학의 중심문제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태극을 최고 범주로 삼는 우주론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일분수로 설명된다.(2)이기론.'이' 와 '기' 라는 두 범주를 가지고 우주의 인간을 설명한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이다. 태극론에서 태극은 이로, 음양은 기로 설명된다. 이 세계는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인 이와 우주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 및 에너지인 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형태와 작위가 없는 형이상학의 존재이며, 기는 형태와 작위가 있는 형이하의 존재이다. 이와 기는 처음부터 불가분의 짝을 이룬 개념이 아니었으나, 송대의 '이','기'는 현상적인 실재의 사물에서는 항시 함께 존재하는 불상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으나, 또한 그 본질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섞일 수 없다는 불상잡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3) 심성론인간의 정신구조를 심, 성, 정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기론의 구조에서 이는 만물을 이루는 원리지만,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든 도덕적 선천적 근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는 인간에게 있어서 성이 되며, '기' 는 육체가 된다.(4)성경론심성론에서 발생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수양론으로, 내면적 품성이나 지혜, 도덕을 성과 경에 의하여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은 참되어서 망령됨이 없음으로 경은 외경, 주일, 정제, 엄숙 등으로 요약된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 따라 철학자들 간에 강조하는 것에 차이를 보나, 후에 그 의미가 확대되어 이치, 준칙, 법칙, 규율, 조리 등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는 철학의 최고 범주로서 자연계의 본질이며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자연계의 본질이자 절대적인 존재인 이는 사회질서와 이에 호응하는 윤리질서의 총칭이기도 하다.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원시적인 재료로 매우 세미한 물질을 가리킨다. 기에 관한 관념은 서주 말에 이미 출현하여 이에 관한 관념보다 일찍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기' 개념은 한 쌍의 철학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장재는 우주의 근본은 '기' 이며 기의 천변만화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는데 이 법칙이 바로 '이' 라고 여겼다. 그러나 정호와 정이는 장재가 이해한 '이기' 관계를 전도시켜, '이기' 가 비록 서로 의지하고 있으나 우주의 근본은 '이' 라고 여겼다. 이러한 이기의 관계는 이선기후(이가 먼저, 기가 나중) 또는 이본기말(이가 근본, 기는 말단)의 관계로도 표현된다.주희는 '이기' 관계를 '사람이 말을 타는 것'에 비유하여 '이기' 를 주종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주(인)의 위치에 있는 '이' 는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주재하고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4. 성리학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1)긍정적인 영향성리학은 동아시아 전역을 석권한 사상이다. 그러한 사상인 만큼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명분과 도덕으로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명분에 어긋난 불의 앞에서는 죽음을 불사하는 정신적인 고고함을 지켰고, 도덕적으로는 방에 홀로 앉아 있어도 거짓이 없을 것을 추구하여 청렴과 청빈을 자랑으로 알았다. 그것이 조선의 선비 문화의 전형을 이루기도 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성리학은 강력한 연대의식·공동체 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는 상당한 긴장감을 형성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부부 관계나 자식 교육 등 항상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게 되어 사회 교육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또한 연좌법의 적용도 이러한 공동체를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되었다.
축의 시대와 제자백가제 출 일전 공과 목동양사상사학 번담당교수이 름I. 서론1II. 본론11. 축의 시대의 정의12. 유가11) 공자 22) 맹자 23) 순자33. 묵가31) 묵가 34. 도가31) 노자 32) 장자45. 법가41) 한비자 4III. 결론55I. 서론동양사상사 과제를 하면서 제자백가에 대한 본인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또 고등학생 시절, 전통윤리시간에 지겹도록 들었던 동양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 할 수 있었다.이론에 관해서는 알지도 못한 채 주입식 교육에 의해 주구 장창 그들의 이론을 외웠던 시절이 기억났다. 그 때는 책을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공부하기 싫었던 철학자들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분명 같은 철학자이며 같은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차근차근 그들에 대해 알아가서 일까.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제자백가들에 대해서 조금의 존경심이 싹트고 있었다.과거에 나는 공부의 양만 늘려놓았던 공자가 그저 미워서 라는 내용도 알지 못하는 책의 제목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지러운 세상을 좀 더 평화롭게 만들고자 했던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들이 존경스럽다. 이처럼 손바닥 뒤집듯 쉽게 변한 나의 생각의 변화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춘추전국시대처럼 현재 또한 상당히 어지러운 시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쉽게 다가왔을 지도 모르겠다.춘추전국시대는 몹시 혼란한 시대였다. 때문에 수많은 철학가들은 혼란의 시대를 바르게 만들고자 했고, 그들만의 사상으로 바른 세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방법들을 제시했다. 우리는 21세기에 살면서 과학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답게 살아야 하며, 그래야만 이 사회는 진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미래만 보며 살 수 없다. 과거의 실수를 돌아보고 과거가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철학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제시하고자 한다.II. 본론1. 축의시대의 정의축의 시대란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탄생한 인류사의 가장 경이로운 시기이다. 이 시대에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가 활동했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고타마 싯다르타가 등장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나타났고 그리스에서는 소포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차례로 태어났다. 이 시기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축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에 '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 라고 불렀다. 이러한 축의 시대에서 중국의 공자, 묵자 노자를 비롯한 제자백가들을 알아보고자 한다.2. 유가1) 공자제자백가 중 유가의 시조인 공자는 이름은 구(丘)이며,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공자가 중국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공헌은 중국사상사의 기초를 이룬 점과 동시에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사상이 된 유교의 골격을 쌓은 점에 있다. 공자가 태어난 춘추 말기는 정권이 밑으로 옮겨가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의 신흥계급이 출현하여 힘을 내세우고 혈연사회와 그 예제가 붕괴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씨족귀족이 그 지위를 지키기가 곤란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새로운 요소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예의 질서, 씨족귀족 중심의 질서의 붕괴를 막으려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는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제도, 문화, 문물, 사상, 예법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그 해답은 '덕'에 기초한 정치, '인'에 바탕을 둔 자기개조였다.'인'에 대한 공자의 정의는 에서만 해도 사람다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를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보는 이유는 공자가 '인'을 단지 도덕적 규범으로서가 아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해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2) 맹자맹자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다. 공자나 맹자나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으며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222년까지이다. 맹자, 즉 맹선생의 성은 맹이며 이름은 가(軻)이다. 추라는 지방 출신인데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서 가까운 곳이었다.맹자는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 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맹자가 생각하는 정치는 오늘날 우리가 견디며 살고 있는 정치와 달랐다. 맹자는 정치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군자와 지식인과 통치자가 함께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만들어내야 하는 세상은 첫째 전쟁이 없고, 둘째 위아래 모두가 예의바르며, 셋째 구성원 누구나 선한 본성을 충분히 발현하고 살며, 넷째 정치지도자들은 그지없이 어질고 군자와 지식인들은 열성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다섯째 그렇게 천하가 통일되어 왕도가 행해지는 세상이다. 이것이 를 강조하는 유학 사상을 발달시켰다. 그 주장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며,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본성에 그대로 따르면 사회적 쟁탈과 혼란이 생기므로,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라는 사회적 제도에 따라 악한 성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이다. 순자의 이와 같은 사상은 유가로부터 이단시되었다. 또 순자의 '성악설'은 법가의 인간 본성론과 일맥상통한다. 예를 사회적 제도로 하여 인간과 사회를 다스리려 한 것도, 법을 사회적 제도로 하여 인간과 사회를 다스리려 한 법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와 같은 추론은 순자의 문하에서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인 한비자와 이사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순자는 유가와 법가의 경계 선상에 서 있는 사상가였던 것이다.3. 묵가1) 묵자이름은 적(翟).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상가이다.그의 정치사상은 천하에 이익이 되는 것을 북돋우고, 천하의 해가 되는 것을 없애는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했다. 그 실현 방법으로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는 '상현',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ㆍ노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절용',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서로 높이는 '비공'과 '겸애'를 주장했다. 겸애란 사람은 ‘자신(自身)’ ‘자가(自家)’ ‘자국(自國)’을 사랑하듯이 ‘타인(他人)’ ‘타가(他家)’ ‘타국(他國)’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의 인이 똑같이 사랑을 주의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하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를 풀이한 것이었다. 절용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과 음악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고, 공자에게 예를 가르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둔할 것을 결심해 서방으로 떠나는 도중에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이라고도 하는데, 도가 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노자는 무위자연을 지향했는데, 무위자연이란 꾸밈이 없이 자연의 순리에 따른 삶을 산다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무위(無爲)는 인위(人爲)의 반대 개념이다. 여기서 무위의 반대 개념인 인위는 공자의 유가 사상을 말한다. 그리고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은 개인적인 삶의 기준 뿐만 아니라 유가의 인위적인 통치에 반대하는 말이기도 하기에 국가적 통치방법을 말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무위자연은, 유학자들이 천하를 통치하고 예절에 의한 제도를 완비하여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천하에 평화를 유지하자는 공자, 맹자의 유교사상과는 반대로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천지만물의 생성자인 도의 뜻을 체득하여 유약하고 겸손하면서도 또 한편 강인하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도의 능력으로써 이 세계를 스스로 다스려 나가자는 사상이다.2) 장자장자의 이름은 주(株), 자는 자휴(子休)로서 전국시대 송(宋)나라 몽사람이다. 장자는 도교의 중요한 인물로 받들어지는데, 당나라 현종시절에는 남화진인이라는 호칭을 얻었고, 송나라 휘종시절에는 미묘원통진군으로 봉해졌다.장자의 중심사상은 소요, 제물, 양생, 무위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소요유는 장자 사상의 최고 경지이며, 인간과 영혼의 관계에서 자유의 의미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언급하고 있다. 제물론은 장자 사상의 핵심이다. 제물론에는 제물과 제론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장자는 세상 만물이 천차만별처럼 보이지만, 그 근본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제물이다. 또한 그는 사람의 여러 시각이나 관점 역시 각기 다른 것 같지만, 이미 세상 만물이 같은 마당에 사람의 말과 주장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른바 옳고 그름이나 같고 다름이란 존쳤다.
과 목 명 : 동양근대사담당교수 :소 속 :학 번 :이 름 :제 출 일 :I. 서론1II. 본론21. 반란1) 국내의 불안2) 태평천국 반란2. 개혁1) 청조의 위기2) 동치 중흥3) 변법자강운동3. 반발1)청의(淸議)2)반기독교3)배외주의III. 결론8I.서론지금까지 중국 근대사의 평가는 능동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서양에 대한 중국의 대응」의 문제는 일방적인 서구의 충격에 대해서 대응했던 중국 이라는 이해의 수정을 목적으로 그 근거들을 말하고 있다.반란, 개혁, 반발 세 단계로 말하고 있으며, 부제만 보더라도 사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회가 불안정했다는 의미이며, 불안정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개혁을 단행했으며, 개혁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고 짐작 가능하다. 시대별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본론에서는「서양에 대한 중국의 대응」문제에 대해서 요점을 파악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각각의 단계에서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요약해보았다.첫 번째, 반란의 단계에서는 국내의 불안과 그 불안의 폭발인 태평천국 반란에 대해서 요약을 했다. 두 번째 개혁의 단계에서는 청조의 위기, 그리고 동치 중흥, 개혁에 대한 지적위장과 변법자강운동 중심으로 요약을 했으며, 마지막 반발의 단계에서는 반발의 중심에 서있는 청의(淸議)와 반 기독교적 행동, 그리고 배외주의에 대해서 요약을 했다.따라서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반란' 부터 차근차근 각각의 사건들과 시대를 간단히 요약하도록 하겠다.II. 본론1. 반란1) 국내의 불안청나라 말기의 사회는 극도로 불안했다. 여기저기 해안에 잠입한 서양인들의 소규모적인 소란행위가 일어났고,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감(세금과부)으로 농민들이 신음하는 시기였다.따라서 많은 반란이 일어났었는데, 수많은 반란 외에도 중요한 비중을 갖는 4개의 반란이 있다. 운남의 회교도 반란, 북서의 또 다른 회교도 반란, 염군반란, 그리고 다음 장에서 비중 있게 요약할 태평천국 반란이다작은 반란으로부터 인적, 물적 측면에서 규모 큰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5년 동안의 싸움에서 중국의 대부분의 성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1864년 태평천국은 정부와 서양연합군으로부터 제압당했다.청 왕조에 제압당한 반란군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청 왕조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큰 농민운동으로 발전했던 태평천국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태평천국의 가장 혁명적인 부분은 이념과 조직에 있었다. 태평이라는 이념은 기독교 기독교의 복음주의, 원시적 공산주의, 금욕주의, 그리고 유교의 대동사상 등의 혼합물이었다. 또 남녀노소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념위에서 남녀 평등주의 전족, 매춘, 일부다처제 폐지와 성의 구별 없이 토지를 동등하게 할당한다는 내용이 있었다.태평천국의 정치적 목표는 청조를 무너뜨리고, 종류도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있다. 반란의 이념에 나타난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에 대한 혁명적 도전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개신교에 의해 초래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서양에 대한 대응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태평천국은 서양 충격 이전 상황에 대응하면서 중국의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던 문제들에 대해 서양의 영향을 받은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2. 개혁1) 청조의 위기개혁 지향적인 중국의 지식인들은 아편전쟁 기부터(1839~1842) 서양에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수였을 뿐이었다. 당시 중국의 대부분의 개혁가들의 주된 관심은 국내의 반란문제였다.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 이전에는 서양이라는 문제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 하기는 했었지만 그 사건은 정부정권의 연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므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제2차 아편전쟁을 겪음으로서 1870~80년대가 되어서야 마침내 서양이 라는 문제가 극소수의 학자와 관료에게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승리에 북경은 함락되었고, 함풍제는 열하로 피난을 가는 지경까지 이른다. 청조의 붕는데 반대하지 않았다. 중흥이 경제사상에서 퇴행적이었다는 증거는 철로와 전신의 소개에 대한 강한 반발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경제성장이란 개념 자체가 중흥의 지도자들의 이해 밖에 있었던 것이다.중흥의 관료들이 서양을 따라가려는 혁신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여 받아들였던 두 가지의 중요한 분야가 있다.첫 번째는 중국군대의 증편이었다.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영국과 프랑스 군사력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근대 병기공장과 조선소를 건설하고, 해군 건설에 괄목할 만한 노력을 기울였다.두 번째는 대외 관계의 변화이다. 서구 국가들을 위한 새로운 제도가 창설되었는데 그것이 총리각국사무아문이다. 총리아문의 성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적 조치로 여겨졌을 뿐이었다.메리 라이트는 "동치 중흥은 근대화로의 요구가 유교적 안정의 요구에 반하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근대화와 굳건한 유교 질서의 건설이 근본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었던 탓이라기보다, 중국인의 사고의 중점이 여전히 내부에 있었다는 것이 실패의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동치중흥의 중심목표의 하나가 구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근대화를 선택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위협으로 간주되는 것은 근대화가 아니라 급진적 변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척도 또한 일어나고 있었다. 서구의 위협을 별것 아니라하고, 중국의 문제는 유서 깊은 옛 방식으로 잘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중국인은 반 계몽주의자로 취급받게 되었다. 변화가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개혁가들은 때때로 변화가 해가 없는 것으로 내비치게끔 하는 다양한 지정위장을 했다. 즉 자기합리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예를 들자면 먼저 본말이라는 중국적 사고의 피생물이다. 이것이 잘 반영된 것이 「채용」이라는 공식인데 근본적인 원칙에서는 중학, 실제적 응용에 있어서는 서학이란 내용이다. 서학의 수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 서학의 실제적 유용성을 살리면서 동시에 중국문명의 숭고함과 신성함을 재강조하기 찾아냄으로써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개혁사상의 흐름도 있었다.1880년이전, 선구적 언론이었던 왕도와 왕도보다도 영향력 있고 체계적이었던 1898년 개혁운동의 지도자였던 강유위가 그 예시이다. 왕도는 만약 공자가 살았더라도 서슴없이 서구의 기술과 산업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개혁의 길을 지지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공자를 개혁가로 보는 왕도의 견해는 어떤 특별한 경우에서 변화에 정당성을 제공하였다. 강유위는 현재의 고전에 대한 해석을 위조한 것이라 하여 믿지 않고 단지 믿을 수 있는 것은 「금문」학파의 것이라 하였다. 혁신을 위한 적극적 승인을 제공하기 위해 유교를 재해석한 것은 채용이란 공식과 같은 소극적 승인에 대한 의미 있는 대안을 대표한다. 그러나 여전히 어떻게 중국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면서 동시에 유교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실패하였다.1870년대와 1880년대에 중국의 서구에 대한 지식수준을 향상시키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많은 책들이 저술되거나 번역되었고, 처음으로 외교관을 세계주요 수도에 파견하였다. 개혁의 노력도 경제와 군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동치 연간에 시작된 중국 육해군의 변혁이 본격화되었다. 마침내 짧지만 철로도 완성되었다.지금까지의 내부적인 문제로 시달리던 중국과 비교하자면 과연 중흥이라 할 만한 개혁이었다.3) 변법자강운동중국인들은 「자강」방면에서 상당한 진보를 이룩한 것으로 보였다. 앞서 말했듯이 내부적인 문제로 시달리던 중국이 동치 연간에 중흥이라 불릴 만큼 개혁을 일구어 낸 것은 중국인들 스스로 대견해 할 수도 있음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던 낙천주의적 기초는 청일전쟁의 치욕적 패배와 뒤이은 서구 제국주의의 강화에 의해 여지없이 깨어졌다. 따라서 중국인들에게 훨씬 광범한 개혁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도록 자극하였다.광서제는 원대한 개혁의 필요성에 동정적이 되었고 1898년 여름의 열정적이고 극적인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강유위의 주장에서 나온 개혁의 일부는 과거제의 개혁과 신식 학당의 설립 침입에 대한 강경한 저항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입장에서 서 있었던 정치적 세력으로 청의(淸議)를 말할 수 있다. 청의는 유교적 질서가 허물어지도록 위협하는 집권 세력의 행위에 대응하는 유가 교의와 도덕적 순수의 적극적 수호 자체로 특징 지워진다.대표적인 청의에 의한 비난은 곽숭도에 대한 공격이었다. 곽이 최초로 청의의 비난에 말려든 것은 1875년 마가리 사건과 관련하여 운남총독을 탄핵한 결과였다, 또, 1876년 말 황제의 강요에 따라 그는 상해를 출발해서 영국에서 성제임스궁정의 최초로 중국공사로서 신임장을 받았다. 이러한 일로 그는 계속해서 청의로 인한 괴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그는 영국에서 돌아와서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남은 생애를 자진하여 무명으로 보냈다.1870년대와 1880년대 초의 청의론자들은 서구 문명에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에 대한 비방에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지적현상이 아닐 수도 있었다. 즉 강력한 정치적 수단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당시에는 유교적 덕목에 충실하다고 주목받는 관리는 대체로 고위직으로 승진했다. 따라서 편협한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청의를 이용하려는 유혹이 언제나 존재하였고, 그러한 목적으로 청의를 이용한 것이다. 또 조정에서도 역시 이홍장과 같은 강력한 지방관에 대항할 정치적 세력을 얻을 목적으로 청의를 조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반발들은 서양의 충격에 대한 대응이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도구로 간주되기 때문에 서양의 충격에 대한 대응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2) 반기독교1860년부터 1900년까지 중국에서의 반기독교활동은 매우 광범위한 분포를 보였다. 반기독교적 감정의 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부분적으로는 선교사들의 존재 자체가 공격 목표이기도 했다. 선교사는 외국침략에 대한 반감을 터뜨릴 수 있는 유일한 가시적 대상이었다. 특히 선교사들은 중국만이 문명의 유일한 중심이라는 관념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반대하였고, 더욱이 중국문화 자체의 여러 측면에 대해 공격함으로써 선교사들은 이다.
중국 차 문화, 다경학 과학 번이 름중국 차 문화, 다경고등학생 때 중국에 갔을 때가 생각이 난다. 중국에서는 물을 마시 듯 익숙하게 차를 마신다. 그때는 차가 너무 맛이 없어서 차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중국의 문화를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 적벽대전에서 소교가 조조에게 차를 끓여주는 모습을 보고 차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적벽대전은 액션영화이다. 칼부림을 하고 수십만의 조조 군사가 불에 타 죽는 장면이 다반사로 나온다. 하지만 차를 끓이고 마시는 장면만큼은 어찌나 차분하고 고요하던지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차를 마시면 나조차도 차분해지고 고요해질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였다.이번과제를 통해서 차에 대한 나의 새로운 시각이 더욱 깊은 관심이 되기를 바라며 다경과 중국 차 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겠다.다경이란 중국 당나라 시대의 문인, 육우(陸羽)가 평생 차와 함께하며, 차 생산지를 두루 답사하고 관련 이야기들을 모은 후,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 끝에 집필해낸 책 이다. 760년경에 간행되었으며, 상권은 차의 기원 ·차를 만드는 법과 그 도구, 중권은 다기(茶器), 하권은 차를 끓이는 법과 마시는 법 ·산지와 문헌 등을 기록하고 있다. 판본으로는 백천학회본(百川學會本) 등 여러 가지가 있다.『다경』은 단순히 차에 관한 책이 아니다. 차에 관한 모든 것을 총망라 하고 있다. "차 문학"에 일종의 규범을 세워주었으며, 오랜 경험을 통해 체계화하고 이론화한 차 학계의 경전과도 같다. 육우는『다경』을 통해 약용으로만 음용되던 차를 기호음료로 바꾸는 전기를 마련했고, 차의 정신적 면을 특히 강조하여 차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공헌했다. 때문에 육우는 지금도 다성(茶聖) 또는 다신(茶神)으로 추앙받고 있다.육우의 『다경』을 통해서 차는 생활 속에서 보편화되었고 차 문화가 만들어졌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를 거치면서도 차 문화는 발전하여 차 모임이 결성되기도 했었다.송나라 시대에 와서 차의 제조방법에 큰 변화가 왔고, 점차법으로 변해가며 점차 넓은 다완을 사용하였으며 잘 휘저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음다법이 유행하였다. 차 문화가 더욱 번창해진 이면에 왕실의 음료로 귀족화 되어 서민들의 생활고는 심각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주원장’이 단차의 제다법을 폐지하는 칙령을 내려 약 400년간 중국 차 문화를 이끌었던 점차법은 사라지고 포차법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포차법이란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마시는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제조과정이 간결한 잎차가 제조됨으로써 서민들에게 까지 일반화되어 국민보건음료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차는 청나라 시대에 와서 아편전쟁으로 인해 서양으로 전파되었다.
을 읽고...당신의 어깨가 무거울 때공모전 입상작이 름당신의 어깨가 무거울 때나는 편식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에 관해서는 편식이 심한 편이다. 책을 읽은 후에 짧게는 느낌만, 길게는 그와 관련된 많은 나의 생각들을 기록해두는 습관이 있다. 최근 나의 도서기록장들을 보면 대부분이 추리 소설들 뿐이다. 이러한 나의 편향된 도서 취향은 최근 들어서 많이 바뀌게 되었는데, 그것은 취업이라는 큰 난관 때문이었다. 올해 초, 졸업을 앞두고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게 되었고, 당시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사회는 내가 동경 했던 그런 곳만은 아니었다. 결국 나는 사회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도로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다시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다시 준비를 하면서 가장 견딜 수 없던 것은 자괴감이었다. 스스로 이겨내지 못했다는 회의감으로 종일을 괴로워했고 추락하는 자신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추리소설을 읽을 수 없었다. 치유가 필요했고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따뜻한 소설만을 읽었다. 조금씩 내 마음의 조급함을 달래고 희망과 용기로 가슴을 가득 채웠다.그날도 평소와 같이 휴일에 서점으로 나들이를 갔다. 그리고 을 발견했다. 은 추리소설도 아니었고, 따뜻한 소설도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해 보였다. 나는 서점에서 을 고르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책을 고를 때 표지에 비중을 많이 두는 편인데, 그것은 표지에 그 책의 분위기가 많이 반영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란 책의 표지에는 꽃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너무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남자는 눈을 아래쪽으로 감고 있었는데, 이 표정이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인지 아니면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한참을 쳐다본 후에야 의 첫 장을 넘길 수 있었다.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등장인물들 중 아프지 않은 인물들이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대부분이 그렇듯 부모님의 이야기에는 한없이 마음이 아프고 가슴 한 구석이 시리다. 대표적으로 조창인작가의 가 그러했고, 신경숙작가의 가 그러했다. 하지만 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문체로 흘러가고 있었다.책은 염부1이라 불러도 좋을 어느 염부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매일 보는 뉴스의 사고사를 보듯 무신경하게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소설의 중반부를 지나면서 염부1은 선명우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평생을 소금밭에서 일하다가 결국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 아버지 선기철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우와 가출한 아버지 그리고 '나'의 과거의 조각들이 완성되기 시작하면서 무신경했던 염부1의 죽음은 내 마음의 뿌리까지 너무나 아프게 만들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무덤덤한 문체가 내 마음을 이렇게 까지 아프게 할 줄은.소금에는 짠맛뿐만 아니라 단맛, 신맛, 쓴맛, 매운맛까지 다섯 가지의 맛이 난다고 한다. 소금이라는 작은 알갱이에 우리네 아버지들의 인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선명우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단맛에 길들여져 있는 아내와 세 딸들의 가장이다. 사실 이들이 아버지를 과연 정말로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저 돈을 생산하는 무엇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닐까. 나는 화가 나기도 했고 그런 선명우의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지기도 했다.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빨대로서의 역할을 해왔고, 그것의 치열함에서 매운맛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에 대한 사랑? 아버지에 대한 은혜? 아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췌장암이라는 병마였다. 그토록 최선을 다해서 묵묵히 가족을 위해 살았던 그에게 남은 것은 무서운 병마와 더 큰 빨대를 기다리는 가족들뿐이었다.에서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더 큰 무게를 느껴야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빨대와 깔때기로만 생각하는 우리들. 현실을, 그리고 우리를 비판하고자함이다. 다소 극단적인 설정과 표현은 있었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마냥 모른척할 수는 없다. 가장이 무너지면 똘똘 뭉쳐야하는 것이 가정이건만 현대 사회는 가장이 무너지면 가정의 해체로 이어지고 있다. 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