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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고대사
    9월 1일★ 책 예습해올 것보조교재: 한국고대사연구의 새동향★ 일찍올 것(앞자리 없음, ppt강의라 녹음필요)★ 목차1. 시대구분론 : ‘고대’라고 하는 이유?, 고대를 구분하는 시기, ‘단군’은 무엇인가?2. 고고학적인 영역 : 유적과 유물 중심(사진)3. 고대사회 성격론4. 고대 국가론5.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과정6. 삼한사회의 이해7. 통일의 과정과 통일의 원동력 - 학생이 발표8. 라말려초의 호족9. 남북국시대의 이해 - 학생이 발표10. 고대의 대외관계 ? 동북공정(고조선-고구려-발해 중국역사편입), 요서경략(백제-요서를 식민지), 임나일본부11. 고대의 사서들* 시대구분론1. 시대구분의 목적- 왜하느냐?: 확실하게 인식하기 위해서역사는 시작과 끝이없는 무한한 흐름이다.시대란 역사의 경과를 사실의 유형 혹은 일정한 경향에 따라 시간적으로 구분한 것시대구분이 길고 복잡한 인간사회의 역사적 경험을 체계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 시대구분의 과제: 역사발전의 객관적 원리(합법칙성)을 밝히는 것인간역사에서 나타나는 각 시대의 총체적 사회구조의 내적존재법칙을 해명함으로 각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모순 구조와 각 사회가 상호 구분되는 질적 차이를 밝혀내고 그 모순이 어떻게 해결되어 한시대가 다음 시대로 이행해가는가하는 운동법칙을 밝히는 것이다.ex)로마 대토지소유제 이후 노예제사회가 붕괴되며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게 되는 것처럼 명확히 밝히는 것: 궁극적인 과제밝혀진 역사발전의 객관적인 원리를 기초로하여 그 발전의 최종적인 현실사회의 존재구조와 단계적 성격을해명하고 현실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나갈 수 있는 변혁논리창출★에 기여하는 것이다.→ 오늘을 알려면 어제를 알아야함, 내일을 더 발전적으로 살기 위해서 오늘을 분석해야함2. 한국사 시대구분의 시작과 발전- 1930년대(일제강점기 때) 처음 구분함식민지역사학(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도적성격론, 정체성론,타율성론, 당파성론, 만선사관, 일선동조론, 내선일체)정체성론(조선은 고대, 일본은 관해서는 증언할 수 없음- 노예의 발생: 생산력 발전을 통한 계급 분화의 결과, 전쟁포로- 하호의 실체★: 나라에 군왕이 있고, 대개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있다. 마가-우가-저가-구가-대사자-사자 관직이 있고, 호민-하호가 있다. 관직자는 사출도를 주관하고 큰 곳은 수천호 작은 곳은 수백호를 다스린다 : 전쟁이 나면 여러 가들이 스스로 싸우고 하호는 군량미를 담당했다 : 그 나라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앉아서 먹는 자가 만여명이나 되었다. 하호는 멀리서 식량과 생선, 소금을담당했다. : 동예라는 나라는 큰 군장이 없고 한사군 아래 읍군, 장로가 하호를 관리했다 → 이것을 보면 피지배계층이고, 생산을 담당한 것처럼 보임: 하호가 낙랑군에 이르러 조정에 알현을 할 때 거짓으로 관복을 입고온 자가 천여명이 되었다: 그 풍속에 하호는 2~3명의 아내를 가졌다.→ 하호가 상당한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남: 하호가 대인을 마주치면 하호는 비켜서 풀밭으로 들어갔다.: 하호= 가난한 사람스스로 땅이 없고 부유한 집들의 토지를 개간하여 수확 중 5를 본전(田)주인에게 바쳤다(소작농): 호민(명)하호→ 주장1 : 읍락에 모든 호민은 하호이다.→ 주장2 : 읍락에는 호민이 있고, 하호라고 이름하는 것은 모두 노복이다. (다양해서 노예라고 할 수 없음): 호민(민)하호→ 주장1 : 읍락에는 호민이 있고, 민이 있고, 하호가 있는데 하호는 노복이다.→ 주장2 : 읍락에는 호민이 있고, 민중에 가난한 자가 하호=노복과 같다. (단, 한 대는 소작농민보다 한정된의미)가→호민→하호→노비→ 결론: 백남운 ? 하호 주장은 원 사료 검토 결과 인정 안됨 (대립계층으로 민이 사용된 적은 없었음): 하호의 실체(1950 → 봉건적 예속농민)북한 : 부여/고구려의 가난한 인민남한 : 양인농민왜 : 예속민, 피정복 예민 등으로 파악10.01 한국고대사1.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칼마르크스: “대체로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및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은 사회경제형태의 변천에 따른 몇 개의 및 사적 재산을 지키기위한 계약, 동의→국가카르메이로 지리적 장벽이론, 쇼펜하이머 정복설 : 비옥한 땅으로 이루어진 주변에 산이나 사막 등비생산적인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인구증가하면서 전쟁발발 → 이 상황에 1차, 2차 국가등장고던차일드 : 물자교역과정에서 고급의 정보들이 발달된 지역에서 미개한 지역으로 흐름8. 국가발생(4가지 요인)1. 인구학 : 한정된 지역에 인구가 증가하게 되면 증가한 인구들에게 필요성이 생기면서 국가발생함2. 분쟁(전쟁) : 내부-분쟁 / 외부-전쟁 → 효율적으로 공격, 방어하기 위해 국가발전3. 관개론4. 교역론→결론: 계속 논의 중이다.고대국가론- 고대국가의 특질(어떤 과정으로 나타내는가?)1. 정복왕조적 성격: 삼국-영토확장정책2. 전제왕권의 확립:사례 1. 율령반포(강력한 전제왕권 증거)2. 왕위의 부자상속↔ 부체제: 왕은 제가들의 추대로 등장(왕권↓): 제가들이 실질적으로 통치함 → 부여에 흉년/질병이 들면 왕의 탓으로 돌림(온건:왕 바꾸자 / 강경: 왕 죽이자→ 제가의 대표자, 집단지배체제 형태)큰 두 집단(왕부족 + 왕비부족)이 결합하여, 나머지를 지배하는 형태 → 왕위의 형제상속 나타남왕(남)-왕비(여) : 두집단이 필요에 의해 결론을 함(집단 이익을 위해): 왕이 죽으면 관계 끊어짐 → 계속 유지를 위해 남자(동생)를 공급(=형사취수제)부인이 죽으면 여동생 공급→ 형제-자매 연혼: 삼국사기는 남자중심 : 형사취수만 부각 / 인류학적으로는 ‘연혼’왕위의 형제상속 이후 여 집단이 필요 없으면 부자상속 가능(강력한 전제왕권)3. 집권체제 강화4. 불교의 수용과 공인: 일반인들은 왕보다 토템을 더 숭배했음. 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를 이용불교의 힘이 토템보다 강하다 주장 ? 왕은 불교만 통제하면 됨예) 삼국유사예) 이차돈의 순교(국가적 수용, 공인)종교는 반대를 하더라도 포교활동을 함초기불교는 오히려 정부가 수용하여 절-식량 줌 → 이에 보답으로 왕과 국가에 대한 법회 → 호국불교5. 역사서 편찬(타고난 출생, 이설과 연관되었다 주장)→ 현재 기자조선은 ////의 영역과 청동기문화에서 다르므로 완전히 부정됨위만조선- 민족적 성분보다 사회적으로 봐야함- 정복전쟁, 관계 조직, 강대한 군사력 확보, 계층분화가 나타남 → 초기국가 형태로 추측- 위만 : 연나라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따져봤을 때 민족이동의 한갈래로 우리나라 민족이었을 것임- 사회 상태 : 유이민 + 토착족의 결합 / 중국의 철기문화를 받음 /한나라와 남쪽 국가의 교역을 통제하며 경제적 부 축적부여(한국고대사적 부여)- 어원과 어의에 대해서 논의, 위치규정, 대외관계, 고고학적 문화에 대한 것으로 분석- 부여 : 기존에 중국인들이 중국사로 간주하였으나 무심하였고 한국사학계의 연구가 시작되자 이에 대한 대응과무관심에 대한 반발로 동북공정이 일어남- 종류 : 북부여, 남부여, 고구려, 백제의 뿌리- 만주에서 일어나 700년 유지,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지배층(주몽-계루부왕실) 등장, 주몽집단은 압록강(졸본부여=고구려)를 세우고압록강 유역에 살던 집단(비류-온조)는 한강유역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움(백제 ? 부여족) 왕실성을 부여씨로하였고, 동명사당을 지어 부여를 세운 동명왕을 기림(성왕 때 남부여라고 함)부여는 고구려-백제왕실의 뿌리역할로서 ‘부여의 별종(다른종류)’ 라고 불림김해지역 청동솥을 비롯하여 북방유목민족이나 부여계통의 유물들이 나오는데 이것은 부여사람들의 움직임이한반도 남부까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발해(대조영)도 자신의 뿌리를 부여에서 찾음 → 부여 : 고구려/백제/발해 나옴- 오늘날 영역/위치적으로 보면 관련없어보이지만 많은 관련이 있다.- 부여 역사 : 선비족과 함께 처음으로 역사서에 등장(bc2c) 등 문헌에는 남방민족이 이동중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나건국신화로 살펴보면 북쪽민족이 남하하며 송화강 유역근처에 세운 것임 → 종족이주 건국설(기존 세력지역에서 갈등으로 인해 내려오게 되고, 예맥족과 융합한 것이다)- 영역 : 북(눈강과 송화강 일대) / 서(도~12c초) 중 9~10c는 습관정치에 따른 지방통치의 혼란기로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 극동 아시아 전부가 혼란기였다.호족의 사상적 기반1) 선종 : 삼국시대 말 법랑에 의해 도입: 불립문자: 대립과 부정을 ////: 교외별전: 번잡한 교리를 일삼는 교종종파들이 소홀하여 다루어온 부처의 본래 의미를 따로 전하며 ////: 직능인심 :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아 ////: 견생성불 : 중생이원래 가지고 있는 ////: 참선 중시: 교종 불교에 대한 도전과 전제왕권의 부인: 신라 하대 선종 30인의 신분 : 육두품, 지방호족 등: 말법 사상 : 미륵(미래의 부처) 미래에 중생을 구제2) 풍수도참사상(풍수설 + 도참사상): 삼국시대 말 도선 국사에 의해 전래됨 (명당 중 명당을 대화세라 함): 근거 없음, 이후 조선은 유학자들이 배척하고, 정감록이 탄생11.10 한국고대사(남북국시대)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발표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최치원(북국 용어 사용, 사불허북국거상표: 당나라가 북국(발해)이 위에 있도록 허락하지않음을 감사함), 유득공(발해고에서 고구려 후예라고 밝힘 남북국시대 용어 사용), 김부식(신라본기=사북국: 북국에 사신을 보냈다를 통해 신라-발해 교류 앎), 김정호(대동지지에서 방여총지에서 남북국체제라고함)발해건국: 696년 요서지방 영주에서 거란족의 반란 → 그 일부인 대조영집단 도망 → 추격물리치고 동모산에 건국※ 동모산 : 철이 풍부, 농사가 잘됨(내적 기반 요소), 중국과 신라와의 지리적 차단발해주체에 대한 주장 : 속말말갈(일본) / 고구려인(한국, 일본) / 민족들의 융합(중국, 한국)주변나라의 인식 : 고구려를 계승했다(고진 = 고구려 보장왕의 손자, 묘비명: 발해인이다)학계 1970년 이우성 주장 이후 1980년 송기호-한규철 선생 주장, 80년대 후반에는 통일관련 남북국시대사용 활발1990년 국사교과서에서 사용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한다.
    인문/어학| 2019.02.26| 30페이지| 1,000원| 조회(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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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현대사
    3월 10일 동양현대사한중회담- 2013년 : 미국 이후 중국을 먼저 방문, 경제는 협력하였으나 외교-군사는 냉랭- 2014년 : 성숙한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설정, 중국이 북한보다 먼저 남한을 옴, 일본-북한 연계→ 한중 FTA 등 경제는 더욱 긴밀, 군사-외교는 입장차이 재확인한반도 정책- 시진핑은 국내 문제도 많기 때문에 동북아는 평화를 취하길 원함- ‘한국에 의한 통일저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로 바뀜→ 대응과제 : 한국은 수동적인 행동을 벗어나 능동적인 정책 발표 요구 되어짐- 중국사례) 미국/소련/인도 분쟁으로 고립-1964년 핵실험성공?68년 대륙간탄도미사일장착?71년 핑퐁외교 실시→ 북한도 핵으로 돌파하려함(요구: 1. 주한미군 철수 2. 대북전단 살포 금지) → 맞춰주면서 압박해야함중국의 권력도(현 시진핑)장쩌민(10년-상하이당) → 후진타오(10년-공청단) → 시진핑(10년 예상-태자당)- 상하이당 : 상해를 거점으로 정치자금이 막대하고 제일 큰 파벌 이룸, 덩샤오핑 개혁정책의 수혜자, 균형발전- 공산주의청년단 : 핵심인물을 키우기위해 청년그룹을 끌어들여 만듬 (시초: 호요방), 개혁개방의 피해계층 대변- 태자당 : 혁명원로나 고위관료의 자녀들로 구성된 파벌, 덩샤오핑 개혁정책의 수혜자, 균형발전- 상하이당과 공산주의청년당의 힘이 비등하자 그보다 약한 태자당에 주석자리를 넘겨주고 나머지 자리를 나눔- 상하이당은 별다른 인물이 없었고, 공청단은 호요방과 시중쉰의 관계 때문에 시진핑에게 양보해도 상관없음- 태자당에는 시진핑과 보시라이가 있었으나 보시라이(아내)의 부정부패로 몰락- 호요방이 덩샤오핑과 갈등할 때 시중쉰이 끝까지 호요방을 지지하여 같이 몰락함공산당 뽑는 과정1. 당원 8200만명 : 고등학교 때 공산주의 청년단 활동(학생회장, 수석), 스무살 때 탈퇴하고 다시 정식으로 가입2. 당대표 2270명 : 당원들이 직접 투표함(차액투표)3. 중앙위원회 370명 : 뽑힐 때 비전을 제시함, 신분 철저 검증4. 정치국위원 25명5. 정치국상실패- 정리: 태평천국은 전통적 질서에 대한 저항 (↔ 전통적 질서의 신사층의 반발 불러옴): 근대성을 띤 부르주아 민주주의운동이었는가? 국가권력과 사회개인간의 갈등과 조하를 전제로하는 인식은 없었음: 종교적 혁명운동이었는가? 종교적 색체가 있긴하였으나 세속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제시함: 농민운동인가? 농민의 기대를 반영하였지만 계급적 갈등이 불분명했고, 농민 지위의 향상을 꾀하지 않음: 서양에 대해 낙관적인 평가였음(‘양형제’): 후반기 지도자 중 홍수전의 조카 홍인간은 홍콩에서 정통기독교와 서양의 제도를 배움(1859년 간왕에 봉해지고최고의 행정직을 지냈지만 이미 무너진 상태였음)- 의의: 반봉건적 사회 혁명운동, 반제국주의적 민족운동, 아래로부터의 운동, 근대 민족운동의 선구자양무운동(위로부터 근대화)- 개량노선의 시작: 아편전쟁 ? 이민족 지배 체제의 모순 자극 / 청말의 경제적 사회적 모순 자극: 태평천국운동 ? 반만한민족주의 / 기독교의 반만 한족민족주의 통합: 제2차 중영 전쟁 ? 영불 연합군에 의한 베이징 점령→함풍제 황제 죽음 이후 공친왕-서태후(주화파)집권: 중국의 근대화 노력 : 청과 한인관료가 주도하는 개량운동(양무운동→무술변법→광서신정)- 양무파 관료의 형성과정: 양무운동: 1861년 동치제 즉위이후 30년간 한인관료를 중심으로 추진된 서구 근대문물의 수용-친서구적외교정책: 텐진조약: 1858년 제2차 중영전쟁 패배로 인해 체결(천진): 베이징사변: 조약비준서 문제로 영불연합군이 텐진(천진)을 점령하고 베이징으로 진격: 신유정변: 함풍제의 사망이후 서태후와 공친왕의 쿠데타, 태평천국진압한 한인관료 등용, 대내외안정(동치중흥): 한인관료층의 태평천국 진압→ 증국번은 ‘단련’(신사층 주도 향촌자위집단)을 성단위로 확대하여 상군-회군을 만듬→ 사병: 지연-혈연을 이용하여 병사 선발, 지휘관에 대한 개인적 충성 / 재정자립: 이금(국내 통과세)징수권 장악: ‘중체서용’ = ‘중학위체 서학위용’ = 중학은 체이고, 서학은 말이니 중학을 주로 삼고혁신의 선구자로 삼고, 공자가 육경을 지은 목적은 개혁을 위해 요-순등 성군의 말을 빌어 찬술 주장→ 공자보다 강유위가 뛰어나다는 뜻을 내포, 이단으로 몰려 소각됨→ 유토피아적 이상이 망라된 것(계급, 국가, 가족을 없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극락의 조건)→ 민권론과 평등론 주장, 공자교 제창(개혁과 변법의 논리적 근거를 공자에게서 찾아내려함)→ 기존 관민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고 유력인사와 수구파의 공격을 받음2. 방양개제론(외국의 변법을 본받아 중국의 개혁방안 모색)- 독-영-프-일-폴-러 6개국의 변정고를 저술함- 러: 표트르를 개혁군주 모델 삼음 / :메이지유신-천황의 사례, 입헌군주제 개혁정책폴: 실패, 개혁이 안됬을 때, 황제의 결단 촉구 // 외에는 자료 없어서 알 수 없음강유위의 평가1. 개혁파: 양계초를 비롯 추앙받는 존재2. 혁명파: 보황주의가 가진 한계성에 대한 반대/비판3. 사회주의 개혁론자: 복고반동사상을 가져 지탄4. 중국 연구자: 대부분 긍정(민주적 대중혁명을 반대한 부르주아적 이상주의자)한계(민주주의적 정치체제 반대, 대동의 세계 구체적이지 못함)ㅡㅡㅡㅡㅡㅡㅡㅡ중간고사(4.14)-----------------------------------------------------------------------------------------------1. 18대 당대회 이후 시진핑의 권력이동과정을 쓰시오2. 태평천국운동의 천조전무제도와 실패원인을 쓰시오3. 이홍장을 들어 양무운동을 설명하시오.4. 변법운동에서 강유위의 활동을 쓰시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4월 21일 동양현대사의화단 운동과 반제 민족주의 운동반기독교 운동(구교운동 = 원수 구)기독교: 당나라 초기에 ‘경교’로 들어옴, 중국의 사회에서 큰 의미가 없었음: 아편전쟁 이후 기독교 세력이 열강의 무력과 함께 들어와 제국주의의 도구로 봄→ 아편전쟁 전 : 중국의 유교를 존중하는 입장아편 직접적 계기 : 서태후는 의화단운동의 실패로 열강의 개혁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음: 변법파= 탕차이챵의 자립군 봉기 / 혁명파 = 후이져우 봉기 / 청조 내부에서도 혁명 위기감 고조- 신정상유~신해혁명 전까지 교육, 군사, 재정, 법전 등 혁신적인 개혁 조치2. 주요 개혁 내용- 법률정비 : 모두 치외법권 폐지를 위한 개혁방안으로 중화민국시대까지 이어짐: 혹형금지, 신체형은 벌금으로 대체, 연좌-고문 폐지, 외교-선거-교통-공공위생에 새로운 범죄항목추가: 1910년 핵정현행형률 공표- 교육개혁 : 과거제 폐단(창조적 사고력 부재- 러일 전쟁에서 전제국가=러시아가 패배하자 폐지함), 팔고문 폐지,신식학교 설립(대-중-소학당), 1905년 학부설치, 인력충원(교사=해외 유학 장려),여성교육(현모양처, 일부 교사 양성에 한정): 한계 = 신식 교육을 담당할 인력이 부족, 황제에게 충성하는 신하 양성이 주된 목표(최고덕목: 충군)- 군사개혁 : 청일전쟁-의화단으로 신식군대 필요성 절감, 구식 무과고시 폐지, 무비학당 확충, 구식군대 감축,신식군대 확대, 원세개, 장지동 등을 군기대신으로 임명-북경에 오게함(지방 군권 박탈 의도): 황제가 통수권자가 됨, 군관의 지위와 인식이 문관과 동일한 수준으로 향상, 신사층에도 군관지원늘어남: 한계 = 개혁에 따른 엄청난 비용 부담, 순무들은 군 중앙집권화 시도에 반감, 비협조적- 재정개혁: 회폐와 재정의 일원화 추진, 재정처 설립, 근대적 재정국가로 가는 획기적 조치 → 실행전에 멸망- 행정개혁: 기존의 관료제도 부패 → 관청의 공문서 양식 간소화, 서리 폐지, 연납제의 관행 폐지3. 신정의 영향과 변화- 엘리트층 구성의 변화: 신사층은 전통적 엘리트 층이었으나 과거제를 폐지함으로 청조에 대한 충성심이 하락함: 모병제 채택 : 일반 병사의 교육수준 향상: 중하급장교 : 신사층의 자제 포함(문과적 소양을 갖춘 무관) → 혁명 위험있는 한족에게 무기를 맡긴셈: 전문엘리트층 등장 : 개항 이후 매판, 자본가, 교육자, 법률가 등 등급의 민족해방운동을적극 지원하고, 그들과 반제통일전선을 모색해야한다. → 국공합작의 성립: 5.4운동을 경험한 젊은 지식인(당시 책임자는 22% 지식인, 50%는 당원 = 도시 노동자): 구추백 : 국공합작 지속을 주장한 진독수를 비판: 도시중심 ? 노동자 중심: 혁명단계 설정 ? 사회주의혁명 단계: 무장봉기와 토지혁명 정식 채택(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 → 농민의 소극적 반응, 실패, 공산당 전멸: 이립삼 : 진독수(우익편향적 기회주의), 구추백(좌익편향적 맹동주의)라 비판하고 자신은 중립적(무장 폭동 지속): 도시 노동자들의 냉대와 국민당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실패- 강서 시대: 소련유학파의 당 중앙 장악, 1927년 이후 건설된 농촌혁명 근거지 중심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1931년)→ 주석 모택동, 하지만 지도부는 상해에 있었음: 대중들의 무관심, 선전해야 겨우 움직임 → 국민당 정권은 농촌혁명근거지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 수행(1~5차)→ 초기 공산당의 한계: 지식인 중심 + 코민테른의 강한 영향력 = 중국 현실파악 x, 교조적 혁명운동- 대장정: 국민당의 지속적 공격(5차), 1934년 강서소비에트 함락, 10월 16일 탈출(방어선 4차까지 뚫고 나옴): 당시 지도부 = 박고(서열 1위), 주덕(최고사령관), 주은래(준의회의에 힘 싣어줌), 오토브라운(=코민테른 소식통): 준의회의(1935년 1월 15~18일) : 준의를 급진적 변화의 중심지로 만들기로 결정, 모택동의 군사노선(유격전) 채택→ 모택동이 이후에 권력을 잡게 되는데 밑거름이 됨→ 이것은 기존 이론가들이 퇴진하고, 홍군 지도자들이 당 중앙을 장악한다는 것을 의미→ 혁명 전략의 전환점 : 도시중심의 대중봉기 전략에서 농촌혁명 전략으로 바뀜→ 중국 혁명의 특수성이 나타남: 모아개 회의 : 모택동과 장국도(북경대 학생회장)의 의견이 갈라짐→ 모택동은 북진 장국도는 남하해서 국민당과 지방군벌의 공격으로 병력 궤멸, 이후 모택동에게 합류→ 모택동의 권력 상승, 현실적 이론가-혁명가-군인으로지지
    인문/어학| 2019.02.26| 20페이지| 1,000원| 조회(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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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중세사2
    한국중세사2수업1. 조선적인 것( 조선 전기, 조선 특징)2. 성리학적 체제 확립3. 조선 후기사(임진왜란 이후~ 동학농민 전까지)평가1. 중간고사 20 ? 기말고사 30 = 502. 출석 203. 레포트 20레포트 : 조선시대 내 주제 정해서 쓸 것(학기 말 시험 전까지 낼 것)관점 : 기록은 관점에 따라 다름( 당시 기록 = 당시 기록자, 지금 사람들이 보는 관점은 또 다름 / 사람마다 다름)한국중세사2 9월 10일조선을 규정시키는 것 : 성리학★- 역사적으로 성리학이 미치는 영향 공부- 조선을 이해하려면 ‘성리학’을 알아야함- 경제체제와 모든 것들이 성리학적임성리학의 보급과 사회적 기능- 선진유학(고대 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훈고학 + 불교적 요소 + 도교적 요소 ) → 주자학- 주자학: 고대 유교 +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모두 수용하고 송나라에 맞춘 것주자학과 고대 유교의 차이점 : 시대성★고대유교 : 군자의 학, 공자가 이야기하고 이후 해석서가 붙음 / 고대 국가의 운영과 유지를 위해서 만들어짐고대 왕들이 부국을 물어보면 공자가 답 → 국가를 운영하는 정점은 ‘군자’국가의 부는 ‘노동력(농민)’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농민이 안집(안정되게 모임)되어야하고 ‘덕치’강조주자학 : 공자의 이야기에 주자가 해석을 달았는데, 주자는 국가 운영의 책임을 왕 외 사대부에게도 전가 시킴임금과 신하의 균형이 맞춰져야한다 (왕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의 몸가짐도 강조됨)→ 고대 유교적 입장에서 혁명적으로 바뀜- 성리학 : ‘이’와 ‘기’ 출현 / 태극이 곧 무극이다(태극=가장 조화로운 상태, 이와 기가 조화 됨)‘이’ = 불변적 우주본질 = 성(모습) 세상의 본질‘기’ = 사회변화, 가변적인 모순 = 정(모습) 본질을 둘러싼 것- 성선설 : 일반적으로 강조되는 것‘성’이 ‘정’으로 바뀌는 순간 기(사회적, 자연적)에 따라 선한사람 / 악한사람이 된다 주장정에 따라서 신분은 구분 되었지만 본성은 같다(인간은 같다) → 합리적, 진보적 측면 보임이것은 기존 고려의 불교와 도교(숙명상의 영향력X, 왕과 대면 이야기, 갓뽑은 선비들이 많음→ 언론 3사가 중요해짐2. 제조제 문제 제기제조제 : 재상이 하위부서의 제조가 되어 이를 직접 장악할 수 있도록 한 제도(재상에게 권력집중)이후 연산군 때 김일손은 폐지까지 주장3. 언관을 확대 시키자대간은 직책이 낮아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 가지 못하고 결정되고 나서 반대함으로 문제 발생→ 사림이 훈구가 차지한 향촌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고, 중앙정계에 올라가 바꾸려고 하였으나 한계에 부딪히자몸소실천하게 되었다(사화)사화는 당쟁의 출발이나 정치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성리학은 들여올 당시 기존 고려사회를 개혁하고자하는 실학이었으나 그 체제가 완성되는 순간 보수가 됨- 사화(사림들의 정치진출 15C말~16C)1.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4년): 성종실록의 사료를 편찬하다가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싣어서 문제가 제기됨: 조의제문 내용 = 단종애도-세조찬탈 비판, 진시황고사, 함양 이야기 등: 훈구세력들에 대한 비판과 세조의 부당성으로 느낌 → 연계된 사림들은 죽임을 당함2.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10년): 사치와 향락으로 재정적 문제가 나타나자 훈구대신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등 행동보임: 국왕의 행보에 반발한 세력이 폐비 윤씨 이야기를 꺼냄: 훈구와 사림의 대결이 아니었으나 사림들이 많이 엮임3. 기묘사화(1519년, 중종14년): 조광조와 사림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발휘함→ 향약보급운동, 현량과(현명한 사람을 선발) 실시 등: 사림의 개혁정치가 훈구세력뿐 아니라 왕실문제까지 들어감: 왕실관행에 불교적-도교적 관행이 남아있었음, 소격서(불교적-도교적) 비판 → 과정에서 중종과의 갈등: 위훈삭제(중종반정 때 공신으로 등록되었던 공신 중 실제 공신 외 76명 공훈삭제를 주장)→ 중종 반정과 정의 문제제기라 생각하고 숙청4. 을사사화(1545년, 명종원년): 이복형제의 왕위계승과정에서 외척인 소윤-대윤의 대립 → 어떻게 보면 훈구세력간의 갈등or성장사림세력 갈등사화의 성격1. 겉면: 훈구와 홍 등 의병들)은 광해군 편(임란 때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 초기엔 서인-남인-북인이 정국운영 → 이후 3사와 이조에서 활약하여 광해군의 정치배경이 됨- 마찰 : 광해군 3년 정인홍 ‘회퇴변척소’ 올림(퇴계와 이언적을 낮게 평가하고 조식을 띄우는 평가) → 유적 삭제: 남명학파 = 성리학적 철학을 몸소 실천, 좋은 얘기는 주자가 다했기 때문에 실천해야 한다.- 서인/대북은 궤를 같이하다가 김계남(서인)을 밀어내고 이후 폐비론(인목대비)-유배(영창대군)→서/남인 정권 탈락→ 대북파의 행동에 서인/남인/소북이 불만 품음, 대북은 정치적 결단성이 강함, 정파의 이익을 쫓지 않음→ 이후 광해군이 망한 이유 = 다른 정파와 타협하지 않았음 = 인정하지 않았음인조반정(광해군 15년)- 서인/남인 중심, 공론을 움직이지 못했던 사류들이 많이 참가- 광해군 시기 관직자들 처리율 40% = 광해군이 인사권을 쥐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음- 대북파 축출, 산림(은둔해 있는자, 지방에서 학식이 있고 제자를 가리키는 세력) 발굴- 인사는 대북 외 당파를 초월해서 등용할 것을 주장, 인조는 서인을 견제하고자 균등 등용에 적극적이었음인조- 15년 사간원은 ‘붕당의 건전한 대립 필요’ 주장 → 사람의 시비지심은 각각 다르므로 끝까지싸워 논리를 만들어야한다. 옳고 그름은 군자가 판단-사대부는 소신을 말해야한다. 지금의 당엔 성인과 불성인이 존재해 버릴 수 없다.→ 합리적인 측면이 있음 / 조화 요구- 왕 : 조선정치는 사대부 중심으로 정책을 만들고 운영, 관리함 → 왕권이 약했음, 공신세력을 통해 국가 운영: 최명길 등을 통해 붕당을 비판적으로 바라봄(1.지나친 서인 중심 정치 2. 왕권에 대한 비판)- 호란 : 주화파 vs 척화파 → 인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한 것이었음→ 최명길의 안건(=얼마 뒤 폐기됨)1. 이조전랑권 박탈하자 → 인사권을 판서가 가지게 함2. 3사의 논의방식 교체 → 3사가 같은 소리를 내는 것 문제 (‘피령제’= 문제와 상관없는 인물들만 포함)→ 인조 이후 왕권을 면부전 발생 : 군영이나 관청에서 필요해서 만든 둔전, 학교(학전), 능-원-묘(추모의미 전) → 차등도 있었음2. 숙종 말부터 전국 65만결이 대동법의 대상이었음3. 부과(1결당 쌀10만)도 일정하지 않았고, 시간 차도 있었음※ 양전 : 세종 대 전품구등법(전분육등법+연분구등법)을 숙종이 6등급으로 구분 → 흉년에도 면제 안해줌: 1-2등급 토지들은 권세가들이 등급을 낮춰 4-5등급으로 내려옴: 밭의 크기를 제는 것이 아니고, 밭주인-위치-예상 생산량 등을 모두 파악→ 문제점 : 시행할 때마다 반발(각 도별 이해관계, 토지의 등급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과거엔 중앙에서 관리할 수 있었으나 사대부들의 지방 영향력이 강해짐으로 제대로 실시하지 못함: 세금을 덜내고 더내는 등 균등하지 못하거나 토지 개간을 안했다고 주장함4. 조선 결부제 : 밭의 생산량을 예상하고 세금을 징수함, 균등한 부과를 했었으나 양란-재해로 무너짐5. 징수는 ‘백미’기준 → 문제점 발생 → ‘환봉’제도로 극복(환봉=바꿔서 바침=못 내면 무명 등 지역적 특수성반영)6. ‘대봉’ 등장 = 물품에 따라 지역적으로 차이 있음, 관리들이 쌀을 싼 지역에서 사 이윤을 남기는 행위를 하기도※ 대동법의 역사적 의의1. 18C초까지 농민들의 호평 + 반대하던 관료-토호세력도 찬성했음2. 당쟁이 격화되고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폐단이 일어나고 대동법이 비정상적으로 됨(세금을 다시 ‘호’로 바꿈)3. 일역체제→상납체제(=모병제)로 바뀜4. 사회적 측면 : 봉건사회질서 해체(다양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었음)재정적 측면 : 안정적인 세금확보 → 물자 조달 등 노하우(상업-수공업 분야 발달): 화폐 유통(상품경제체제), 고용체계 변함(상업-공인청 등장)→ 상품경제체제 : 관아에서 쌀을 받으면 다 해결할 수 없으므로 시장이 활성화됨역사적 측면 : 세금이 토지로 집중되는 현상(재산, 토지): 과세에 있어서 공평의 원칙(토지 수): 정율세(일정한 가격운영 납부, 서로 좋았음)→ 대동법이 유지되려면 사회변화에 대처가 빨라 사족과 농민 모두에게 있다.(긍정적 : 포용, 함께한다는 의미 / 부정적 : 짐을 나누려 함)→ 임왜 이후 향촌은 바로 복귀한 양반과 천천히 복귀한 노비로 나눠짐양반 : 지역에 근거했기 때문노비 : 향촌 내 복귀율이 떨어짐 → 노비문서가 불탔기 때문에 외거노비 등은 도망감노비 수가 급감한 것처럼 보임→ 땅이 있으나 하층민들이 안옴 → 체제 내로 포섭하기 위해 통합함 → 이 과정에서 향인들이 양반의 권위에 도전- 사족지배체제가 흔들리는 과정1. 상하동계-향약-향규 한계 : 임왜 이후 경제적-사회적문제 발생(향촌 운영 틀↓)2. 입록 문제- 붕당정치의 폐해 : 경제소가 폐지되고 기존 유향소 기능이 부실해짐(=지방 독립기구 성격이 강해짐)- 사족들은 관직 진출의 욕구가 강하지만 막힘- 임왜 이후 수령권이 강화됨 = 수령이 사족들의 이야기를 덜 들음→ 사족들에게 유향소 입록의 무게가 떨어짐(= 유향소 좌수/별감을 꺼려하고 서원을 차리기 시작함)→ 새로운 세력(=신향세력, 외부세력+향인층)이 향안 입록을 주장하고, 수령이 유향소를 지배함향촌 내 신흥세력(부민=요호부민, 사족과 구별된 중인이나 양인 상층부(임왜 이후 상업↑), 수령과 결탁)- 조선후기 사족 변화요인1. 신향들의 도전과 수령의 지배체제 변화2. 사족 내부의 분화: 조선 건국 후 기본 시스템에 유교적인 것을 덧붙임: 재산 상속의 토지 크기가 줄어들고 토지 존재지가 전국적으로 흔터지며 토착적인 성씨집단 힘이 약해짐→ 새로운 변화(종법체제-적장자중심), 17~18C 사족의 문중-동성집단혼 시스템 발달: 이전에 사족들이 모여서 의논하던 것을 문중 중심으로 의논(=서원 발달)→ 이 변화로 ‘상하합동계’가 나타남→ 상하합동계 : 농민과 사족의 관계가 부-자관계(성리학적)로 정의됨: 역사를 통해 가족관계(충-효)를 강조3. 서원: 사족 논의의 장, 문중중심 서원 多발생 / 선산-토지에 대한 송사가 많자 문중을 강화함: 17C말 숙종 대 크게 낭설 됨: 사액서원 : 과거로부터 내려오고 국가에서 인정받는 서원 / 국가적재했음
    인문/어학| 2019.02.26| 20페이지| 1,000원| 조회(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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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중세사
    - 중국사 수업 : 중국 고대 ~ 당나라까지 : 중국의 황제가 왜 중요한가? → (동아시아 역사의 근본적인 틀을 만든 것이 일본이기 때문)- 18-19C 유럽인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 과학, 민주주의( 그래서 혁명이 일어남)- 책 목차를 비롯해서 150P 최소 3번 이상 읽어오기- 구슬(지식)이 서말이라도 꿰어야(교수님) 보배다 = 구슬 챙겨올 것- 월요일 수업 안하심- 우리가 아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시대에 따라 변한다. 시간축에 따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달라진다.동양중세사 9월 9일과제1. 지도 중국 34개성 외워야함 (23일 시험)과제2. 9월 16일(답사일)에 내주심인간(人間) = 사람답다(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음) = 문화문화 = culture = 경작하다 (땅=자연에 손을 대는 것) 자연 그대로는 문화가 아니고, 인간이 손을 대는 순간 문화가 된다 예) 길거리에 돌 → 손 대는 순간 석기인간의 특성 - ‘게으르다’ = ‘경제법칙(최소 투자-최대 이익)’→ 구석기인은 부지런하고 용맹하지 않았다. 게을렀다. 이러한 구석기인이 문화를 만들었다 ← 어떻게 볼 것인가?→ 전제를 생각하며 책을 읽었을 때 결론은 다르게 나타난다.→ 이 결론을 보며 충족시키는 전제인지 검토하는 것이 역사이다.- 선사시대 : 인간이 동물과 달라진 것 (= 인간은 다음을 생각함) : 빙하시대가 녹았을 때보다 인류의 삶 조건은 더욱 좋았을 것이다 (구석기인과 신석기인 골밀도 비교 결과) : 인간과 동물의 생태계에서 인간만의 생태계로 분류되고 인간끼리 서열이 또 정해짐 : 민주주의 → 역사-사회는 항상 민주적이지 않았다. 최근 찰나에 민주적이었다.- 왜? (전제의 출발, 생각해야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음) 토기와 석기 공통점: 사람이 만듬(문화적) / 차이점: 물성이 변함
    인문/어학| 2019.02.26| 15페이지| 1,000원| 조회(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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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중세사(05.28까지)
    고려 = 70년대: 고대사로 봄(고려 독자적x , 고대사~조선사 사이): 수령이 파견된 곳이 적고, 부계중심사회의 조선과 다름: 현재 알고 있는 것은 조선후기~일제 강점기때 인식의 변화로 된것 (ex: 남존여비사상 등)80년대: 연구자 다수생성, 하지만 고려비중 낮음= 문제점: 고대사(고-백-신: 지역문화 연구 다수-> 학자 다수) 조선후기(전통문화와 내려오는 것들로 연구자료 다수)고려는 그런 것 없음= 시대구분1. 고려전기(무신정변전) - 고대사회였다.주장: 일본학계 견해(70~80년대 주도)근거: 혈연적 촌락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었다(씨족사회가 해체되지 않았다- 해체해야 중세라고 보는데 해체 시기가 무신정변때)주장: 한국의 경제단위 = 동족촌- 부계(16c발달) 땅이 개인소유면 지세만, 땅이 국가소유면지세+지대*고려 전기: 인두세 중심(고대사의 지표) // 후기로 갈수록 땅중심2. 고려 전기에 이미 중세사회였다.북한학계: 삼국사 때부터 중세사회우리사회: 1. 고려 성립 때부터2. 신라 통일 때부터주장: 고대의 신분해체에 따라 중세사회로 된다(골품제의 해체)주장: 사상사 쪽 -> 사상의 출현(유학 등) -> 중세사회의 지표다 토지사유제/ 국가의 공통체적 소유가깨졌다.(신라의 관료전(녹읍전)체제에서 넘어갔다-> 신라통일때부터 본다(신라통일이 과장되어 있다 = 교수의 생각: 고려성립부터 중세다)시대구분은 현재 중요하지 않다 = 하면 좋은점? 역사를 단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의 연계부분이 있고 고려와 조선의 연계부분이 있다(유불교체는 틀린얘기)후삼국 : 신라가 통일했다는 잘못된 것이다.(통일을 못했다는 명확한 증거: 후삼국의 분열): 통일의 이념을 만들지 못했다(정치-권력이 개방적이지 않았고-골품제, 불교(사상)-경주만 누렸고, 경주와 지방의 엄격한 분리가 있었다): 사찰이 많이 나타난 시기: 호족이 등장하는 시기(사람과 돈o): 궁예-견훤: 신라출신(신성성을 위해 '신라왕자'라 칭하고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세워 신라를 적대적으로 생각함) 들어 팜- 비보사찰 :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국가가 지음 (산천엔 '순'과 '역' 이 있다 -> 순(궁궐, 집), 역(사찰)을 지어 땅기운누름- 사찰의 보수 : 운영을 위해 1.종이(전통 제지술 전수) 2.기와제작 3.마시는 '차'- 자체적 소요 외에 판매 생산 했을 것이라 추정(자료가 거의 없지만 고려 경제에서 중요했을 것임)- 화폐를 통하여 사원경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임(의천-숙종)2. 해동 천태종- 교종 : 각기 경전의 탐구 -> 깨달음 -> 신라 이후 5교(대표: 화엄종(왕실관련)-법상종(인주이씨관련)-> 원찰에 자식 일부를 출가시켜 경영하게 함- 선종 : 참선을 통해 깨달음 추구 -> 신라말고려초에 유행, 산문9산 -> 특정경전x, 승려(교사)의 법맥이 중요-> 교-선 통합보다 화엄종 위주로 법상종을 흡수하려함.-> 1.선종을 각각 억지 통합시킴 2.법상종을 통합시킴 ( 국왕의 권위로 눌렀으나 의천 사후 다시 화엄종/천태종 등 다시분리됨)-> 의천: 교관겸수(교종중심)3. 교장- 사상적 통합- 신라 이래 학자들의 해석서를 모은 것. *원효에 대한(대승기신론소)->화엄의 불령 전파- 송나라 대장경 -> 초조대장경 -> 사업을 통해 위기극복을 위한 퍼포먼스-> 숙종 실패 (외척의 연계를 깨고 국왕권을 도모하려 했으나 정치적 기반x, 여진정벌실패, 인주 이씨의 반발)* 예종- 인주 이씨와 결합하며 여진정벌을 도모하려함- 성공했으면 국왕권을 신장시키려 했을 것, 실패-> 인주 이씨와 연계 강화- 윤관의 동북9성(점령했다가 돌려줌, 쌍성총관부 수복 이후 획득)1. 어디냐는 논란? 조선 후기 실학자 때부터 논쟁2. 9성 개조-철거가 다름, 총 12개가 됨 (동북6성->3성 더 쌓음 -> 3성 더 쌓음)-> 동북쪽 3성은 이미 상실하고 그 이후 9개를 준것이 아닌가 추측- 인주이씨(이자겸)과 연합* 인종1. 이자겸의 난: 문벌사회(왕실과 연관되어 있던 체제 무너짐, 인주이씨만 독자적으로 상승하여 국왕권 제약: 인종은 신진세력으로 외척 견제하려함 그러에 말뚝 박음-국가:국장생 - 현존: 통도사)- 화페 : 숙종 때 있었으나 유통x (성종 때 철전이 만들어지긴 함): 활보(은병) 만듬. 은조각으로 경제 생활, 동전은 거의 유통x: 인양선에서 중국동전 발견 -> 동전 수입 이유: 중국동전을 유통x-화폐가치x, 금속의 가치 녹여서 장비 만듬: 주의할 것: 동전이 명도전부터 다 나옴, 고대 화폐라고 오래된 것이 아님, 후대의 제품처럼 화폐들이 만들어짐- 고려후기(무신정권-원간섭기-고려말): 무신정변 순서: 무신권력자 순: 왜 일어났는가? 무신에 대한 차별(제도적: 무과가 없음(공양왕 때 생김), 전투에 공을 세워 올라옴-세습직, 승진3품이끝(재-추는 2품부터)(사회적: 글도 모르고 무시하는 분위기)사치와 향락(의종): 정중부 수염 등-> 구체적인 원인: 동북9성 개척과 묘청의난 이후 무신들의 세력(가문) 성장 -> 차별받는 상황이정당하지 않다.: 무반가문의 성장(제도적으로 양반제도가 있고 무신들의 가문 성장으로제도적-사회적 차별에 불만 / 신흥 무인들이 적극적, 기존무인가문들은 지원): 초기모습(정중부(무반가문)-이의방(무반가문)-이고 -> 경대승 -> 이의민)- 정중부: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고 , 이의방을 정중부가 서경-조위총의 난 수습중 제거 함(조위총의 난= 묘청반란지속적인 것)- 경대승: 결사대를 모아 정중부 제거 중방과 충돌, 결사대(도방- 무신집권기구 등장)- 이의민: 의종살해-> 초기 모습 특징: 1. 최고 권력자 위치 불안, 권력 핵심은 중방(상장군-대장군 회의실)2. 정계 장악을 위해 문반직 겸직: 중-후기모습(최충헌-최우-최항-최의 -> 김습 -> 임연)- 최충헌: 초기 도방운영 -> 변화: 1. 기존의 권력체계에 기댈 필요 없이 교정도감 만듬( 교정도감: 최충헌 암살사건범인 색출작업벌이는 곳, 법의 테두리x, 공식절차x, 최고 권력기구 등장/ 교정별감:최충헌)2. 문신에 대한 수용정책- 최우: 무신정권의 극성기정방(인사권 장악) : 기존에 이부-병부의 정안(인사기록카드)를 자신의 집으로 옮성을 지키기 위함인가?(사회적 가치) 권력유지를 위함인가?(교수님의 의견) // 고위층:권력유지 하위층: 생존을 위해, 40년간의 전쟁 이후엔 반란, 계급간의 싸움등 다양한 형태가 나타남* 삼별초의 항쟁: 기원-야별초(농민반란을 잡기위해 가려뽑음 -> 무신정권체제의 안보용) + 신의군(몽고와의 전쟁때 잡혀갔다가 탈출한 사람들): 주민들을 산성이나 해도로 강제적으로 이동시킬 때 사용: 원종이 출륙환도할 때 삼별초 해체요구 -> 배중손 등은 반기를 들고 강화도를 봉쇄함(삼별초의 난): 진도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남해안(남해★-팔만대장경)를 기점으로 영향력을 행사 -> 일본에 국서도 보냄(2개의 국서 -> 1.원종이 보낸 것 2.삼별초가 보낸 것)-> 남해는 삼별초의 근거지이기도 했고, 분사도감이 운영되었던 경험이 있었음-> 이후 여-몽 연합군 진도공격(배중손 전사) -> 제주도 공격 합락: 삼별초의 평가: 국가의 군대, 몽고에 굴욕적 항복 반대, 자주성에 의한 항쟁으로 높이평가 -> 사적복원활발(제주도-항파도성 -> 남북한이 공유하는 코드(사육신-충정,삼별초-반외세)를 가지고 있고 4-3반란을 희석시키는 용도도 있음): 근본적으로 무신정권이 만든 군대로서 항쟁한 이유는 왕과 원라가 연합했다는 것과, 특권적 요소를 누릴 수 없어졌기 때문에: 정치적-권력적인 것과 별개로 남해안 민중의 지원이 중요했음(국민들의 몽고에 대한 저항)* 원간섭기 시작(=부마국, 원제국 안에서 유일한 사례, 고유한 국호): 간섭수준이 아니라 지배수준이었음, 그 안에서 토풍만을 유지: 공민왕의 반원정책 때에도 원의 지배하에 있었음(현재: 한국-미국 관계): 왕의 이중성(고려의 국왕 / 원 황실의 일원)★중조현상: 왕위에 두번오른다(후계자 즉위가 원에 의해 이루어짐 // 고종-원종-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 충렬-충선/ 충숙-충혜 때 왕위가 왔다갔다함, 충선왕 때 가장심함- 왕은 자주적 통치가 아닌 원의 통치에 따라 변함- 지배세력의 변화: 왕실중심의 문벌귀족(국왕이 원에 머 평가됨 북원): ★북원(소종)의 연호 '선광'을 씀(직지에서 나옴= 선광7년, 우왕3년)-> 신진사대부(원타도), 우왕 11년에 명의 책봉을 받음 -> 우왕 14년 위화도회군 발생* 위화도회군: 배경 - 명에서 철령위 설치를 발표 (철령이북의 땅은 원의 영토였기 때문에 명의 영토로 삼겠다 주장)- 명나라 황제가 공민왕19년에 도사 서사호를 보내어 고려의 산천에 대한 제사를 지냄 이에 반발하여 공민왕을 살해했을 가능성 높음-> 고려입장: 원래 고려땅 -> 반란 -> 원 -> 다시 고려 땅으로 돌아왔다: 해결방안★요동정벌계획- 관점: 외교적 카드로 봐야함 / 땅을 차지하겠다는 의도가 아님 / 북원의 세력도 믿음 => 협상을 통해 철령을 자기 땅으로 인정받기위해- 출정장수들(왕-권문세족들은 신흥무인세력이 전쟁과정에서 소요되길 바람 / 장수들은 명과의 전쟁에 이겨도 죽고 져도 외교적관계로 죽음)- 군사(본영-최영/좌군-조민수/우군-이성계), 출정 전부터 이성계는 4불가론을 외침- 4불가론(1.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치는 것= 사대주의를 무장이 가지고 있진 않았을 것 같음 -> 회군 이후에 주장했을 것임2. 여름철-농번기 3. 왜구침략 4. 활의 아교가 녹음 등)- 회군을 주도한 사람은 조민수였을 것이다(더 사정이 절박하고 지위도 높았음 / 이성계: 동북면으로 도망가려했을 것임. 조민수가 회유): 이후 우왕 폐위(사유: 쓸데없이 군사를 일으키는 등 정치를 잘못했다 -> 그래서 아들 창왕 즉위)* 창왕: 우왕은 여주로 유배보냄: 창왕은 조민수와 이색이 협의를 통해 올림(= 이후 이성계가 명덕태후가 반대했다는 것을 걸고 넘어짐) -> 이성계의 쿠데타(창왕폐위) -> 우왕-창왕 정통성 부정* 공양왕 옹립: 이성계-아들 방번을 사위로 보냄: 공양왕 2년: 윤이-이초사건 발생(이성계-관련자들을 다수 숙청함으로 권력잡음): 과전법 시행(기존농장인정x, 국가가 토지 나눔) = 현실성x, 새로운 국가에 맞추기 위해 실시- 과전법은 신돈의 개혁에서 따왔을 것임- 이유? 경기지역: 왕법,
    인문/어학| 2019.02.26| 20페이지| 1,000원| 조회(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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