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미술1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 신고전 주의로 이어지는 서양미술사의 주류 2 ‘자연주의’를 넘어 사물을 이상 적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려 ① 바움카르텐 (감정을 유사ㅏ 이성으로 파악) 3 For 이상적인 신체의 ‘비례’4 형태 > 색채 ① 색채는 드로잉에 종속 ② 그려진 대상을 실물처럼 생 생하게 보이게 할 목적으로 사용 ③ 회화의 기능 – 과거의 사건 이나 인물을 우리 눈앞에 보듯 생생하게 다시 가져다 놓는 것 (알베르티) ④ (정신에 대한 강조)5 재현 (represent) : ① 한 때 있었으나 (present) 지 금은 없는 것을 다시 있게 (re-present) ② 재현으로서의 회화는 가상 (아름다운 가상.)6 내용 > 형식 ① 관객에게 정신적 교훈을 전 it 달 (생생하게 시각적 번역 을 통해) ② 헤겔 – 미는 ‘이념의 감각적 현현’ ③ (대상에 대한 재현)7 장르의 위계 ① Istoria, Story painting (성서, 신 화, 역사 – 고전미술의 제재) ② Portrait ③ Landscape painting ④ 정물화 ⑤ 풍속화원근법1 15c 화가 ; 과학적 법칙 (자연 속 물체가 지각되는 크기는 눈으 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비례) + 회화와 결합 ① 깊이감,, 인상적 눈속임효과 2 중세 : 세계를 ‘아는대로’ <-> 르네상스 : ‘보이는 대로’2 중세 : 세계를 ‘아는대로’ <-> 르네상스 : ‘보이는 대로’3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가정하는 ‘초월적 주체’(데카르트적 주체) 를 한가운데 위치시킨 중심화 된 공간을 표현4 실재인 듯한 환영5 시각피라미드의 묘사, 뒤브뢰유6 카메라의 원리, 회화가 이상화 된 세계를 표상하는 도구였다 면 -> 이후의 회화는 사실주의 의 도구로 변화 7 사진의 발명이후 모더니즘 회 화양식은 원근법의 전통 부정 8 대상이 아닌 지각에 대한 관심
벤야민이 살던 시대에는 사진, 영상 등의 복제기술이 발전한다. 그렇게 되면서 예술의 범위는 변화했다. 복제기술로 인해 원본만이 가진 아우라는 사라졌다. 더 이상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해당 작품의 카피이미지를 볼 수 있다. 트레비분수를 로마가 아닌 롯데월드에서도 볼 수 있고,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디즈니랜드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원본을 복제한 가짜는 이제 새로운 원본이 된다. 이렇게 새로운 형식의 예술작품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대중들은 예술과 보다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대중들이 능동적으로 작품을 감상한다.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재구성한다.이렇게 예술에 있어서 대중의 참여 범위는 매우 넓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아우라’를 다시 생기도록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과학기술이 발전을 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문화는 획일화되었다. 모두가 똑같이 층층이 쌓인, 똑 같이 설계된 아파트에 살고,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것들을 산다. 이런 획일화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이제는 ‘커스텀메이드’라는 개념이 생겼다. 지금은 개성의 시대이다. 대중들은 자기만의 것을 원한다. 스스로 도안을 만들어 티셔츠를 만들고, 폰케이스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주문제작 된 아이템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나만의 것이 된다. 나만의 것만이 가진 무언가. 아우라가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영화로 예를 들어보자. 영화는 연극이 복제기술을 만나 만들어진 예술이다. 그렇게 복제된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영화관에서만 상영되지 않는다. 상영시간이 아니더라도 넷플릭스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대중 각각의 취향을 반영한 넷플릭스에서는 인터랙티브 필름(interactive film)을 만들어냈다. 인터랙티브 필름에서는 대중이 영화를 보면서 각각 ‘보기’를 선택한다. 마치 미연시 게임처럼, 어떤 선택지를 선택했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은 달라진다. 이제 정말로 우리가 예술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직은 객관식처럼 몇 개의 한정된 선택지에서밖에 선택할 수 없지만, 기술이 더 발달한다면 주관식으로 더 구체적인 대중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각각 개인마다의 새로운 원본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아우라는 부활할 것이다.
히치콕의 ‘현기증’ 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그 엄청난 반전에 놀랐다. 첫 시작은 무언가에 씌인 부인 이야기를 보고, ‘아, 심리치료에 관한 이야기겠구나. 남자의 고소공포증이랑 뭔가 엮여서 같이 치료되려나’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영화속에서 계속해서 강조되는 미술관의 한 여자의 그림을 보고 ‘영적인 분위기구나, 아 영혼이 남은 건가, 복수극인가’ 하고 이런저런 추측을 했었다. 초반의 약간 미스터리한 분위기 때문에 그에 추측만 할 뿐 그게 연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다 중후반에 갑자기 범죄극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굉장히 놀랐다.영화를 보면서 보여지는 남주와 여주의 행동이 사실 그렇게 공감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왜 생판 다른 사람한테 (알고 보니 진짜이긴 했지만) 자기의 이상형의 틀을 강요하는지. 아무리 그 여자가 결국 본인이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사랑했다 하더라도 남자가 정말로 메들린을 사랑해서 저러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들이 맴돌았다. 그리고 여자는 또 왜 처음에는 경계하더니 갑자기 저걸 그대로 받아주고 있는지 답답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남자와 여자 입장에서 한 번 생각을 해본다.남자는 자기가 정말 사랑하던 여자와 똑 같은 여자를 만났다. 너무 반가웠고, 어떻게 해서라도 그 때 추억속의 여자를 재현해내고 싶었던 걸까? 계속해서 새로 만난 여자를 메들린의 모습으로 바꾸고 바꾸고 바꿔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여자가 자신이 생각하던 메들린의 모습과 가장 가까워졌을 때, 남자가 사건의 진상을 알아차렸을 때,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메들린이 되어야 하고, 메들린은 저 탑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마디로 죽으라는 뜻이겠지.왜 그랬을까? 최대한 스카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며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봤다. 첫째는 자신의 고소공포증을 친구와 연인에게 이용당한 것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 이유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완벽한 메들린을 재현해내기 위해서이다. ‘완벽한 메들린’은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 속 메들린은,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 뿐 아니라 그녀의 죽음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메들린의 생애 뿐 아니라 그녀의 죽음까지도 남자가 사랑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부분에서 나는 화가 ‘뭉크’가 떠올랐다. 뭉크의 작품 중엔, 죽은 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을 보고 의아했던 것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떠올릴 땐 죽음은 애써 떠올리지않고 즐겁고 좋았던 기억만 생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뭉크는 그렇지 않았다. 뭉크의 머릿속에서도 누이에 대한 기억은 죽음과 함께 쌓여있던 것이다. ‘현기증’ 의 스카티처럼.이렇게 스카티의 심리를 열심히 상상해보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남자는 여자가 죽은 시점 이후로 단 한 번도 ‘사랑’을 한 적이 없다. 다시 나타난 여주에게 한 행동은 사랑이라 할 수 없다. 그저 자기 머릿 속 ‘메들린’이라는 거푸집으로 복제품을 주조하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워 집착했을 뿐이다. 주디가 연기한 메들린이 죽지 않았다면, 아무리 주디가 머리를 바꾸고 입고 싶은 옷을 입어도 신경쓰지 않았겠지. 어떤 모습이든, 그건 메들린이니깐. 하지만 결국 메들린은 죽었고,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도 주디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다. 주디가 원하는 것은 깡그리 무시하고 주디에게서는 이미 죽어버린 메들린의 그 때 그 모습만을 강요한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면서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든다.다음으로 여자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여자는 범죄에 가담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남자를 사랑해버리는 실수를 한다. 남자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강요하는 남자의 강요를 처음에는 무척 싫어한다. 그런데 나중에는 자신을 사랑해준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모습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자신이 연기했던 겉껍질을 보이느니 차라리 떠나겠다는 다짐과, 그래도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부딪혔을 것이다. 그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이, 자신이 연기했던 메들린이라는 겉껍질이 되도록 했다. 말 그대로 타자의 욕망을 욕망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요소가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모습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모습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회생활에서, 남들이 나에게 원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 대개 그 차이를 메꾸려 한다.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녀가 느낀 스트레스가 이런 종류였을 거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여전히 공감이 안되는 건 마찬가지다. ‘애초에 범죄를 저지르지도 말았어야 되고, 저질러버렸다면 처음 생각대로 떠났어야지. 그 남자의 기억 속 네 존재는, 너 자신이 아니라 그저 네가 연기한 ‘메들린’ 일 뿐인데. 욕심이 너무 많았다.’ 라고 그 여자에게 말해주고 싶다.열심히 열심히 이해해보려고는 했지만 남자의 집착, 그걸 또 받아주는 여자.. 숨이 턱턱 막힌다. 너무 답답하다. 스토리는 반전의 재미는 있었지만 그렇게 흥미롭진 않았다. 오히려 눈에 띄는 건 남자의 고소공포증을 표현한 기법이었다. 위에서 본 계단의 모습이 위이잉 하면서 부각되는데 고소공포증을 가진 사람은 이런 기분이겠구나 느껴질 정도로 와 닿는 표현이었다.
본성이 교육받았을 때와 교육받지 않았을 때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든다. 동굴 안에는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여있고 그 때문에 앞밖에 보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그 앞에는 동물들의 형상과 인공물의 그림자만이 보인다. 그러다 누군가 한명이 쇠사슬에서 풀려나 뒤를 돌아보면, 눈이 부시고, 그동안 보아왔던 것들이 원본이 아닌 그림자였음을 깨닫는다. 동굴 속의 감각의 세계에서 올라와, 가지적인 세계로 나온다. 눈이 부심에도 고개를 돌려 눈으로 쳐다보아 원본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교육이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리고 동굴에서 나온 사람에게, 동굴 속 사람들을 교육시키라 말한다.플라톤은 교육에 있어서 강제적 요소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무지한 것보단 아는 것이 낫다. 메트릭스에서의 바깥세계는 고통스러웠고, 등장인물은 차라리 모르는게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바깥세계가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알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깥 세계를 겪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하지만 나는 결코 실재가 이데아보다 낫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지, 진실을 깨우치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이데아가 좋다면 이데아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고, 실재가 좋다면 실재를 선택해서 살면 되는 것이다. 네이버웹툰의 ‘자판귀’의 한 애피소드에서는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 앞에, 부모 모습을 한 인형들이 나타난다. 아이는 그 인형들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행복해하고, 그 아이도 결국 인형이 된다. 인형이 된 아니는 웃고있는 걸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의 아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실재보다 가상을 선택하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라며 나무랄 수 있지만, 적어도 본인이 행복하다면 나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