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17년의 하반기,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가을하면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말하곤 한다. 또한 나는 문헌정보학도로서 나는 평소 책을 좋아하고 책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지금 이 계절과 나의 전공에도 딱 알맞은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현재 대한민국은 청소년문제, 가정불화문제, 세대 간의 갈등, 성범죄문제 등 각종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17년 올해만 해도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강릉 여고생 폭행 사건과 같은 청소년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소년법 폐지를 외치고 있고, 어금니아빠사건과 같이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나는 사회적으로 이러한 범죄들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로 공감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현대인들은 자신을 돌아볼 시간 없이 바쁘고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한다. 스스로 개척하는 삶이 아닌 누군가에 이끌려 살아갈 때가 많고, 안정적이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은 어떠한가? 초등학생부터 중고교생, 심지어 대학생들까지도 주입식 교육으로 훈련된 사고를 하다 보니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정해진 답을 외우려고만 한다. 이는 마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였지만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공감능력이 없었던 나치부역자 아이히만을 떠올리게 한다. 극단적인 예시일수 있으나 그만큼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생각하지 않는 습관은 위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책에서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시, 소설을 가까이 하여 어떻게 살아야할지, ‘나’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생각해야한다고 말한다. 또, 앞서 이야기한 사회적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나 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당장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시험점수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그 시간에 더 흥미롭고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스마트폰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더 찾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는 이러한 교육현실을 비판하면서 학생들이 문학을 왜 멀리하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나의 경험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중, 고등학교 때이다. 공부를 위해 시를 읽고, 점수를 받기 위해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처음엔 시의 매력을 느껴 재미있게 읽었으나 점차 시가 암호나 풀어나가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학교의 문학시험은 문학을 읽고 느낀 주관적인 생각은 필요하지 않고 1번부터 5번안에서 출제자가 정해준 답을 골라야한다. 기계적으로 답을 고르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한다. 이렇게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시와 소설은 공부의 대상으로 멀리하게 된 것이다. TV 프로그램인 알뜰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는 한국교육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문학은 자기만의 답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작가가 답을 숨겨 놓지 않고 독자와 게임을 벌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독자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타인을 잘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이라고 강조했다.나는 우리사회에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되어줄 수 있는 문학을 더 이상 멀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공감능력을 키우고 나 자신을 알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은 과거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책에서는 이를 ‘역사를 만드는 깃발’ 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면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같은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이것을 시와 소설로 읽게 된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 때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책의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문학을 쓰라고 한다. “쓴다는 것은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업 때 배웠던 자아실현을 실천하는 방안 중에서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가 있었다.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무작정 다른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강요나 통제가 아닌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고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문학을 읽고 쓰는 것은 이를 가능하게 해준다.
한스 켈젠의 법철학목차한스켈젠 생애순수 법학법 단계설근본규범수업 중 교수님께서 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 중 자신은 어느 것을 더 지지하는가? 라고 하시는 질문 앞에 나는 법실증주의에 손을 들었다. 나를 생각해보았을 때 어릴 적부터 종교적인 이유, 가정의 환경으로 인해 도덕을 매우 중시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과 도덕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법실증주의가 타당하다고 생각을 했다. 무엇 하나 맞고 틀린 이론은 아니지만 내가 법실증주의를 더 지지하게 된 바탕에는 한스 켈젠의 법철학이 나를 설득시켰고 그의 이론을 흥미롭게 배웠기 때문인 것 같다.한스켈젠은 철저한 법실증주의자, 법철학자 한스켈젠은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법학자였다. 켈젠은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두 살 때 그는 가족과 함께 빈로 이주했다. 그는 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906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11년 그는 공법과 법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했고, 그의 첫 번째 주요 저서 《공법에서의 주요문제》를 출판했다. 1919년 그는 빈 대학에서 공법과 행정법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빈에서 《공법 저널》을 출판, 편집했다. 대법관 카를 레너의 간곡한 부탁으로, 켈젠은 새로운 오스트리아 헌법을 입안하는 데 종사했고, 그 법은 1920년 제정되었다. 그 문서는 오늘날까지도 오스트리아 헌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켈젠은 헌법 재판소에 종신 임명되었다. 1925년, 그는 베를린에서 《일반정치학》을 출판했다. 헌법재판소의 몇몇 지위에 대한 정치적 논쟁들(특히 이혼에 관한)이 증가하고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함에 따라, 비록 당원은 아니었지만 사회민주주의를 존경한 켈젠은 1930년 재판소에서 해임되었다. 1930년 켈젠은 쾰른 대학에서 교수직을 받아들였다.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게 되자, 그는 직장에서 해임되었고 스위스의 제네바로 이주·망명하여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제네바 고등국제연구소에서 국제법을 가르쳤다. 1934년 그는 《순수법학》의 첫 번째 판을 출판했다. 제네바에서 그는 더욱 국제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할 때까지 프라하의 독일 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 1940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1942년 하버드 법대에서 올리버 웬델 홈스 교수로 가르쳤고 1945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학 정교수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더욱 국제법과 국제연맹 같은 국제기구에 대한 논쟁을 다루었다.한스켈젠에 의하면 법은 실정법이고, 실정법은 법규의 통일체를 의미하는데 이 실정법의 이론이 순수법학이다. 순수법학이란 이데올로기, 정치, 윤리, 사회적 요소 등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실정법 그 자체를 순수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법 이론을 말한다. 그간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인 여러 가지가 혼합된 법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실정법 자체를 인식하고자 했다. 켈젠은 ‘순수 법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고 1920년에 발간된 켈젠의 《주권문제와 국제법 이론의 부제》에서 순수한 법이론 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한스켈젠은 자신의 순수법론을 통해 법학을 순수한 정신과학(학문)으로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추구하였다.국제법에서 순수법학이 특히 관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국제법 상위론을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국제법 상위론은 국제법과 국내법의 관계에 관한 학설의 하나로 양자가 하나의 통일적인 법질서를 구성하고 그 중에서 국제법이 상위를, 국내법이 하위를 차지한다는 설이다. 그 때까지의 통설은 국제법과 국내법은 각각 다른 법질서로 서로 독립적인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 순수법학은 국제법과 국내법은 서로 상대방의 존립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결국은 하나의 통일적인 법질서를 구성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국내법이 일정의 지역 내에서 타당한 것은 국제법으로 정해질 수 있으며 그것은 국내법의 타당성이 국제법의 규정에 기초한 것, 즉, 국내법의 타당성이 국제법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이 의미에서 국제법이 상위를 차지하고 국내법은 하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은 국제법과 국내법의 관계를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추구한 성과이다. 이 성과는 국제법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순수법학이 국제법에 기여한 큰 공적이다.한스켈젠의 법단계설은 현대에 흔히 법학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단계설이란 법에는 상 · 하위의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을 말한다. 법은 피라미드 형태의 계층적 구조를 가지게 된다. 가장 근원적인 법으로서는 근본규범이 있고, 그 밑에 국제법 · 헌법 · 법률 · 명령 · 판결등의 순으로 구속력을 부여받는다. 정점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법규의 수는 증대하고 그 내용은 점차로 구체적 ·특수적인 것이 되며, 마지막에는 판결 및 처분으로 이루어진 밑면에 이른다. 또한 헌법은 다른 모든 법적 명령의 구속력의 근원이 된다. 헌법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상위의 규범이 바로 근본 규범이다.
서대문형무소 탐방 조사기5월 18일을 지나면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그 역사의 순간을 기억하며 찾아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수많은 항쟁과 탄압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음날인 5월 19일에 근 현대 우리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상징했던 서대문형무소를 탐방하게 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감정기에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이후 민주화를 이루고자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고 희생당했던 곳이다. 이곳을 탐방하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3가지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1. 일제시대의 서대문형무소1904년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일제의 군대가 주둔했고 1905년 을사늑약의 늑결로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사법권 박탈, 고종 황제 강제 퇴위, 군대 강제 해산 등 일련의 불법적 침략행위로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했다. 그 후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는 초기명칭인 경성감옥으로 개소되었다.“일제는 의병학살에서 보이듯이 현장에서 참혹하게 학살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만행이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더욱 북돋우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비난이 면치 빗발치면서 방향을 바꿔 형식적이나마 재판제도를 실시하고 감옥을 증설하여 우리 지사들을 형벌로 위협하게 된 것이다.”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공포하면서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어나자, 새로운 감옥을 신축하고 이를 경성감옥이라 하고 원래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자행하면서 수탈은 물론이고 한국인을 노예로 전락시켰고 언어와 문화를 일본화하여 한국인 자체를 말살하려했다. 이에 대항하여 국내외에서 치열한 저항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친일파 처단, 일제의 주요 요인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으로 광복회, 27결사대, 의열단, 조선민족대동단 등 국내외 비밀결사 조직원들이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옥사 또는 사형으로 순국하였다.2. 서대문형무소의 실상원래 형무소에 500명정도만 수용할 수 있으나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독립지사들로 실제 3000명을 수용하고 한 수용실에 5명 정도 수감할 수 있는 곳에 일곱 배인 35명이 수감되었기에 누울 수 없어 교대로 잠자야했다고 한다. 김구의 『백범일지』에서도 이러한 생활상을 기록하고 있다.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한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구,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 .”또한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행한 고문은 그들의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신체가 부러지고 찢기는 것은 다반사였고, 장기 파열, 홍막염, 뇌진탕 등의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그 과정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를 하거나 출소 직후에 순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곳에서 살아있는 한 힘든 노역도 거쳐야할 관문이었다. “간수가 대(臺)위에서 쏜살같이 23번! 무얼 생각해?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푹 숙이고 일을 시작한다. 궤짝만한 상(床)에 붙인 유리 위에 도안을 놓고 조개껍질에 그려놓은 선을 따라 톱질해서는 반지(半紙)위에 붙인다. 이것이 초보자인 내가 종일 하는 일이다.”이것은 김광섭의『나의 옥창일기』의 노역기록이다.이외에도 감방 내부에 별도의 화장실이 없어 매우 비위생적이고 열악했다. 또 여름철엔 더위와 각종 질병, 겨울철엔 추위와 동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지금까지도 그 실태를 보여주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쓴 하일지사들의 시, 서한이 많이 남아있다.그리고 서대문형무소는 제레미 벤담이 구상한 부채꼴 모양의 원형감옥 팬옵티콘 도면을 실제로 만든 형태이다. 팬옵티콘 형태의 특징은 한눈에 모든 곳을 볼 수 있어 완벽한 감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감옥의 내부도 감수가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한눈에 방 전체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수감자들은 밖이 보이지 않게끔 만든 구조다.3. 여옥사탐방하면서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곳은 여옥사였다. 여옥사는 여구치감(女拘置監)으로 1918년 전후로 지어졌다. 구치감은 형량이 확정되기 전 미결수가 수감되었던 감옥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은 물론 전국각지에서 활동한 주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지하공간에서 유관순 열사가 수감되어 순국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으로 지하공간을복원하였다. 이곳에 갇혔던 수많은 여성들은 1910년부터 1930년까지 독립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1919년 전국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화, 동덕, 배화, 숙명, 정신, 경성여고, 근화여학교, 경성여상, 경성여자미술학교 등의 서울 시내 여학교 학생들은 물론 일반 여성들까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상호연대와 비밀조직결성을 통해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고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서도 독립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1920년대에는 대표적인여성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가 1927년 5월 27일 창립되었다. 근우회는 식민지하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을 위해 조선의 자주독립과 여성해방을 외쳤다. 근우회 창립 취지문은 이러하다.“인류 사회는 많은 불합리를 생산하는 동시에, 그 해결을우리에게 요구해 마지않는다. 여성 문제는 그 중의 하나이다.세계는 이 요구에 응하여 분연하게 활동하고 있다. 세계 자매는 수천 년래의 악몽에서 깨어나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모든 질곡을 분쇄하기 위하여 싸워 온 지 이미 오래이다. …우리는 운동상 실천에서 배운 것이 있으니, 우리가 실지로우리 자체를 위하여 우리 사회를 위하여 분투하려면, 우선조선자매 전체의 역량을 공고히 단결하여 운동을 전반적으로전개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 자매들아! 미래
헬레니즘시대의 법사상-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견유학파의 법사상 중심으로-목 차Ⅰ. 서론 - 헬레니즘 시대 양상Ⅱ. 스토아학파의 법사상Ⅲ. 에피쿠로스학파의 법사상Ⅳ. 견유학파의 법사상Ⅴ. 결론Ⅰ. 서론 - 헬레니즘 시대 양상헬레니즘이란 용어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용어로서,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와 서아시아 지역으로 널리 퍼져 나간 현상’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일단 정치적, 군사적으로 무대가 크게 확장된 다음 그리스 문화가 동방으로 전파되면서 동방 문화와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를 맞기 전 그리스는 자유롭고 조화로운 작은 도시 공동체인 폴리스 형태의 국가였다. 따라서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고, 국가는 시민의 행복을 보장하고 국민들은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다해야 한다는 폴리스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의식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전쟁이 시작된 후 붕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당시에 알려진 모든 문명 세계를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한다는 목표 하에 결혼을 통해 각 지역 주민들을 서로 뒤섞었다. 당시 세계는 정복전쟁과 대거이민 등으로 인해 온통 참혹한 분열과 전쟁의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다. 행복과 안전은 개인의 문제가 되었고 공동체의 파편화, 원자화로 인해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종교와 마법이 유행했고,다른 문화에 대한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갖게 되면서 헬레니즘사회의 특징인 세계시민주의사회로 탈바꿈하였다.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당시의 예술작품들이다. 헬레니즘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밀로의 비너스와 라오콘 조각상, 프시케와 에로스의 사랑 조각상을 살펴보면 굉장히 관능적이고, 감정을 제한하기보다 극대한으로 표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헬레니즘사회는 전쟁에 대한 공포, 감정이 격해진 상황이었고 감정적으로 요동치고 있는 불안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의 예술성향과 철학과 윤리학적 이론은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불안한 사회에서 새로운 철학의 위안이 필요했고 이 시대와 정반대로 보이는, 그러나 내적으로는 일맥상통하는 철학 조류가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스토아주의, 쾌락(에피크로스)주의, 견유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이 헬레니즘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법 또한 당시 시대의 사상에 발맞추어 헬레니즘 법사상을 탄생시켰다.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를 바탕으로 대중화를 이루어 유행했던 세 가지 철학을 살펴보고, 이에 따른 법사상을 살펴보도록 하자.Ⅱ. 스토아학파의 법사상스토아학파는 키프로스의 키티온 출신의 금욕주의자 제논(B.C.335~B.C.263)이 창시하여 이 철학 체계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융성했다. 대중성과 영향력 면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를 훨씬 앞섰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 로마 철학을 대표하는 주요 학파이다.세계질서는 기본적으로 ‘선’을 목표로 하고 유일한 선은 ‘덕’에 있으며 덕이란 ‘신의 섭리’에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신의 섭리는 곧 ‘자연에 따르는 삶’이다. 즉, 이성에 따르는 삶인 동시에 자연의 법칙인 자연법에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자연법은 곧 신법이고 인간은 그러한 신법을 수용할 수는 있어도 바꿀 수는 없으므로, 결국 스토아학파가 주장하는 윤리적 삶이란, 신이 정한 우주와 세계의 질서에 인간이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신이 정한 사회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다. 세속적인 욕심과 쾌락에는 무관심했고 개인적 평정을 넘어 폭넓은 인간애와 정의를 추구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신 아래에서 모두 평등한 만민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다.스토아 학자들은 소피스트들이 주장한 피시스와 노모스를 보다 세분화하여 자연법을 노모스로, 인간의 제정행위를 통해 확정된 실정법을 테시스로 부름으로써 용어를 바꾸고 스토아학파는 법을 영원법, 자연법, 인정법으로 삼분하였다. 영원법은 인간사회에서 무엇이 악이고 선인가를 밝혀주는 최고의 가치기준이다. 자연법은 올바른 이성 그 자체이며 인정법은 인위적으로 제정한 법인 실정법을 의미한다. 스토아학파의 세계 시민주의 사상과 자연법사상은 고대 로마와 중세, 근대의 자연법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Ⅲ. 에피쿠로스학파의 법사상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규정한 아테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의해 창시되었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개인의 행복에 있기 때문에 고통이 없는 육체적, 정신적인 쾌락을 중시하며 Ataraxia(평정)을 추구했다. 또한 편안한 사람들과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사는 것을 삶의 실천으로 간소한 생활, 친목도모, 결과적으로 지적쾌락(대화)을 탐닉하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세속과의 거리를 두게 되고 일부는 고립된 삶을 살면서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지킬 필요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쾌락주의를 떠올리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가 점차 육체주의로 변질되어 퇴폐주의로 빠지게 된 영향이 있다.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적, 고립적, 반사회적 인간상은 법률과 국가성립을 계약에 의하지 않고선 만들어질 수 없다. 국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를 지킬 필요에서 계약을 맺은 단체에 불과하다. 법률과 국가성립의 근원을 타산(打算)의 결과인 계약에서 찾았다. 즉, 실정법의 존립의 기초를 사회구성원의 합의에서 도출한 것이다. 이 사상은 사회 계약설의 선구가 되었다 할 수 있다. 또, 국가 및 법이 존재하는 것은 부당한 공격에 대비한 방위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국가나 법은 반드시 본질적인 정의가 아니기 때문에 쾌적한 생활의 보장도 못해준다는 사상은 공리주의적 사상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Ⅳ. 견유학파의 법사상견유학파라는 명칭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이 학파의 창시자인 안티스테네스의 학교 소재지인 아테네의 지명(kynosarges)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둘째로, 그 학파의 개와 같은 생활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견유학파의 주요 사상은 세상의 모든 것은 어리석기에 가치를 둘 필요가 없고 자연과 일치된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한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덕(德)을 위한 정신적·육체적 단련을 중요시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하였다. 대부분의 견유학파 인물들은 속세를 떠나 살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디오게네스가 있다.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찾아와 소원을 물으니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 달라고 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은 미국의 만장일치합의제 배심원제도가 잘 드러난 법정영화로, 극작가 레지널드 로즈가 영화 각본을 썼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헨리 폰다와 함께 공동 제작을 맡았으며 신인 감독 시드니 루멧이 연출을 맡아 제작되었다. 1957년 배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과 OCIC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는 명작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살인 혐의를 쓴 한 소년에 대한 재판에서 12명의 배심원들의 토론을 통해 당연히 유죄라 생각했던 소년을 무죄라고 입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나는 영화를 보며 2가지 궁금증을 품게 되었다. 첫 번째로 12명의 최종 선택으로 한 소년의 인생이 결정되는 배심원제도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배심원제도는 한국에 없는 제도이기도 하고 전문가가 아닌 배심원이 과연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도 했기에 긴 탁자에 앉아 한 소년의 유무죄를 따지는 12명의 배심원은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배심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배심제도란 무작위로 차출한 일반 국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피의사건에 대한 재판 또는 기소에 참여하여 평결하도록 제도를 말한다. 배심제는 '대배심'과 '소배심'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소배심이 배심원단 인원이 12명인 데 비해 대배심은 23명인 데서 각각 이름 붙여졌다. 영화에서는 소배심으로 12명의 배심원이 있었고, 소배심은 배심원단이 사건에 대해 유,무죄를 결정하고 원고 및 피고의 승소에 대한 평결 등을 하는 판사역할을 하는 것이다.배심제는 내가 우려했던 바와 같이 일반 국민이 사건에 대한 평결을 내리기 때문에 중죄나 정치적 오해를 살 수 있는 사건은 근본적으로 배제하는데 미국, 영국과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중죄에 대한 판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복잡한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사안에 있어서 일반 시민인 배심원이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배심제가 정착 된지 오래된 미국, 영국이지만 여전히 논의되는 부분이다. 내가 충격 받았던 장면 중 하나는 한 사람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배심원들끼리 틈만 생기면 야구경기, 남의 뒷담화, 사적인 이야기 등을 하며 무조건 유죄이고 나 몰라라 하는 식의 태도였다. 또한 자신의 시간을 뺏지 말라는 등의 말을 하며 전혀 무죄임을 고민하려하지 않았다. 물론 올바른 판단을 하기위해 애쓰고 고민하는 배심원들이 있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영화에서 나온 배심원들처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배심제도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한국의 경우 배심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2008년부터 국민참여재판이라고 하여 사실상의 배심원제도를 시작하고 있다. 다만 유무죄의 결정은 배심원이, 양형은 판사가 하는 미국이나 영국의 체제와 달리, 대륙법의 전통에 따라 한국에서는 여전히 판사가 유무죄와 양형을 모두 선고할 권한이 있으며, 배심원은 양형도 결정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판결을 '권고'할 능력만 있다. 또한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법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피고인이 원하지 않으면 국민참여재판을 할 수 없다.두 번째로, 존속살인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그저 소년의 살인죄에 대한 유무판단이 영화의 중심내용이었고, 존속살인죄에 대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기에 존속살인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존속살인죄란 자기 또는 법률상의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살해하는 것이고 이를 저지른 범죄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배심원들의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소년의 가정환경이 종종 나오곤 했다. 소년은 아버지에 의해 가정폭력과 학대를 받아왔고 고아원에서 자란 사정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사건은 영화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흔히 뉴스에서도 직계존속을 살해하고, 살해당하는 일은 볼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우리나라는 존속살인죄가 적용되어 일반 살인죄와 처벌수위가 다르지만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영미법계에서는 존속살인죄는 일반 살인죄와 다를 것 없이 처벌한다. 얽혀있는 가정사와 속사정을 배제하고 친자 관계를 평등한 개인 대 개인으로 보지 않는 존속살인죄를 존치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나는 존속살인죄를 폐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존속’ 살해라는 이유만으로 살인죄보다 더 강한 형량을 받는 것은 평등원칙에 반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효를 중시하는 문화로 인해 존속살인죄가 이전까지는 인정되었을 수 있겠으나 효라는 도덕적 가치를 형벌에 의해 강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