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기 소 개 서1. 성격의 장단점저의 성격의 장점은 새로운 낯선 환경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부분입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왔습니다. 스파브랜드 의류 매장, 학과 사무실 근로 장학생, 판촉 행사, 콘서트 진행 등 새로운 환경들 속에서 빠른 적응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스파 브랜드 의류매장에서 일할 당시 매장 특성상 빠른 속도로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는 동시에 고객 응대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의류 매장 경험이 처음인 제가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매장에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기 위하여 출근 시간 외에도 브랜드 홈페이지에 들어가 옷들의 정보를 파악해보거나 일하면서 헷갈리거나 모르는 부분들은 바로바로 여쭤보며 수첩에 적어두고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2개월 계약으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였지만, 점장님이 먼저 계약 연장을 제안해주셨고 저도 더욱 책임감을 가지며 계속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반면, 한 문제에 빠지게 되면 그 문제에만 집중하는 점이 단점이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집중력이 좋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학부 시절 실기가 중점인 과 특성상 시험 대신 작품을 완성하는 과제들이 많았습니다. 하나의 과제에만 몰두하다 타 교양 시험이나 다른 과제들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학원에 진학 후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어진 과제와 일들을 미리 파악해 주 단위 계획표를 만들었습니다. 저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계획표를 만들기 시작하여 미리 시간을 배분하니 대학원의 바쁜 생활에도 잘 적응해나갈 수 있었습니다.2. 대학 생활저는 재수를 하게 되어 1년 늦게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입학 전, 비록 한 살 차이지만 동기들과 함께 어울리며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제게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오기 부담스러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먼저 말을 걸거나 과제를 할 때 도움을 주며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걱정과는 달리 학과 생활을 순조롭게 보내게 되면서, 4년이라는 시간을 더욱더 알차게 보내고 싶어 1학년 때부터 동아리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운동과 거리가 멀던 저는 탁구 동아리에 가입하여 운동능력을 기르고 다른 과 학우들과도 친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아리에서 꾸준한 연습을 한 결과, 여자 대학 신입 부로 대회에도 참가하게 되는 경험도 하였습니다. 또한, 용돈을 스스로 벌기 위하여 시작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들은 사회에 나가기 전 미리 조직 생활이나 다양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용돈 이외에도 조금씩 저축하며 모은 돈으로 두 번의 해외여행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계획하고 처음으로 보호자가 없이 나간 해외에서 길을 잃어 비행기를 놓쳤을 때, 현지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 갑작스러운 변수에 계획이 틀어진 상황 등 다양한 경험들은 저에게 새로운 감정이나 대처 능력들을 일깨워주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습니다.3. 지원동기 및 포부학부 시절 저희 학과 사무실의 근로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조교 선생님들의 업무들을 보조하면서 학과의 다양한 행정 업무들을 보고 배우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과 내 기자재 관리 및 실기실 관리, 학과 행사 준비, 우편물 관리 등 학과 내외의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ㅇㅇ대학 교육조교의 업무에 조금이라도 빨리 적응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를 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사회인으로서 성장하기에 튼튼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조교가 된다면 기본적인 행정 업무 수행 능력을 비롯하여 타 부서들과 소통을 하는 경우가 많아 조직 사회 속 소통의 중요성과 유기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행정 능력 외에도 제가 생각하기에 조교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교수님들께는 든든한 서포터로, 학생들에게는 교수님과의 소통 창구로서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빠른 적응력과 다양한 아르바이트 및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목차1. 사진의 국내유입 -------------------------------------------- 32. 중국을 통한 사진과의 접촉 --------------------------------- 33. 고종 황제의 초상사진에 관한 고찰 ----------------------------- 44. 1900년대의 영업사진 시작 ------------------------------------- 45.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사진과 신설 ---------- 56. 1920년대의 사진(예술사진의 태동기와 경성사진사협회) ------------- 67. 30년대 아마추어 사진가의 등장과 ‘예술사진’ 개념의 확장 ----------- 88. 8,15해방과 사단의 재현성 -------------------------------------- 89. 리얼리즘 사진 ----------------------------------------------- 910. 1960, 70, 80년대의 사진의 흐름 ------------------------------- 911. 90년부터 현대까지 ------------------------------------------- 121. 사진의 국내유입중국과 일본에 전래된 사진은 우리나라에 오면 국내사정으로 수용의 길이 막힌다. 1840년대의 국내는 폐쇄정책을 실시해 외국과의 교섭을 차단하고 천주교를 박해했으며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기술의 유입을 금지했다. 이러한 요인으로 주위 국가에 있던 사진은 국내로의 이입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로 놓여졌다. 계속되는 서양의 자본주의 세력들의 통상과 개항의 요구는 프랑스와 미국의 전쟁 형태의 싸움으로 까지 이어졌고 그 후로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기까지 우리나라는 쇄국으로 인한 암흑기가 장기화 되었으나 중국과의 문호는 개방되어 있었다. 매년 공식사절단이 베이징을 왕래했으며, 서양문물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진 또한 사절단과나라의 부강함을 위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필요성 역시 느끼고 있었다. 1880년대 초에 외국인들에 의하여 촬영되었던 고종의 사진에서 고종은 경직되어 있으나 다소 편안한 모습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다. 하지만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그 자신이 황제에 등극한 이후 촬영에 임했던 사진의 대부분은 신식 군복 차림에 경직된 포즈로 일관되어 있다. 이 당시 촬영되었던 사진은 의궤도감에서 보이는 초상화와는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의궤도감에 기록되어 있는 초상화는 기존의 초상화와 유사한 의도, 즉 진전에의 봉안하기 위한 의도로 제작된 것이며, 이는 기왕의 제례적 기념적인 성격을 띠고 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다. 고종의 초상사진은 대중들에게 지배자의 통치를 목적으로 한 유포는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일제의 간섭을 받고 있었던 구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함께 외세의 대항의식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었다. 헤이그 사건으로 인하여 무력항쟁과 더불어 항일의식이 고취되었던 상황에 고종 황제의 사진을 게시하자는 ‘어진봉안운동’도 각 단체별로 파급되었다. 하지만 이미 다수의 대중들에게 고종의 초상사진이 알려져 있었으며, 일반인들의 수집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종의 재세 당시 또는 살아 생전에 촬영되어야 한다는 매체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사진이 초상화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면서도 초상화와는 다른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4. 1900년대의 영업사진 시작청일전쟁(1894)이후 일본의 한국진출에 힘입어 일본인들이 사진관을 만들고 영친왕의 서예 스승이 던 서화가 해강 김규진이 1907년 8월 17일 석정동에 사진관, ‘천연당 사진관’을 개관하였다. 약 10년 동안 운영하면서 이 때부터 사진관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사장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최초로 개업광고가 신문지상에 게재 된 것은 1907년이다. 천연당사진관은 돌우몰골이라는 석정동, 지금의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었던 김규진 자신의 집 사랑 설립된 사진전문 교육기관으로, 사진의 수용기를 지나서 정착기에 이르는 과정에 교육을 통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중요한 목적을 담당하게 되었다. 도제식 일변도의 사진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으며 사진술의 전달체계가 사적인 관계의 개인과 개인에서 공적인 관계의 선생님과 제자로 정규 학교교육의 제도로 변화로 바귀게 된다. 정확한 사진과 개설 연대는 밝히기 어렵지만 공업부의 교육실무 책임자였던 캐나다인 그레그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미 1909년 봄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사진반 학생들을 가르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미 1909년부터 개설되어 교육되어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에 사진속성과를 설치하고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다. 하와이 교포였던 최창근이 실질적 교사로 1909년 하와이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다 한국에 왔지만 1927년 최창근이 교수직을 그만두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폐과 상태에 이르렀으나 ‘도쿄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신낙균이 사진과 교수로 부임하여 YMCA사진과 영업사진사 단체인 ‘경성사진사협회’의 후원으로 힘쓰게 된다.1910년 6월 첫 졸업생으로 고응한, 이의진,백영옥,추교현,고기성,한택리,김길동을 배출한다. 1930년대 YMCA 사진과가 운영에 어렵게 되자 경성사진사협회 경성인상사진연구회, 경성사구회, 세 단체가 협력하여 이끌어 가게 된다. 그리고 YMCA 사진과에서 배출한 사진인들이 각 사진 분야에 활발하게 진출하게 되었고 사진과를 졸업한 사진인들이 1930년대에 ‘경성사구회’라는 아마추어 사진 단체를 결성하여 예술사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 외 공성학교 사진속성과의 사진술강습소에 최창근이 초대되어 매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씩 사진교습을 하였다. 1906년 개성에 설립된 한영서원 사진과는 남 감리교회의 선교 및 교육활동을 위해 설립 되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정규사진 교육을 하였다. 직업교육을 위한 실업학교로 사진과는 5개월 과정으로 성경,화학, 사진술, 실습 교육이 이루어졌다6. 1920년대의 사진(예예술사진 개인전람회를 개최해 전시회 제도를 최초로 이용한 사진가였다.정해창 과 7. 30년대 아마추어 사진가의 등장과 ‘예술사진’ 개념의 확장예술사진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등장과 함께 이들의 사진에 접목되었다. 1930년대에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다양한 사진을 추구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사진인화의 크기나 값비싼 카메라를 자랑함으로써 자신의 호사스러움을 과시하는 부자들도 있었으나, 예술의식에 눈을 뜬 일부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사진잡지나 기술서적을 구입해 연구하는 한편 한 장의 사진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로 고심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진활동을 예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카메라 메카니즘이 발달하고 고급 카메라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자 기계적 기술에 구애되지 않고 기록과 표현을 목적으로 카메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피사체나 표현에 있어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고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고 표현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능성을 가지고 있었다.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활동에 있어 표현과 사진과의 연결이 어디까지인진가 하는 구분은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예술사진은 곧 아마추어 사진이라 여겼던 것처럼 사진의 표현을 위해 다양한 실험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찍는 그 자체에 스스로 만족해 사진의 사회화라는 중요한 역할을 폐쇄했다. 하지만 동호인회를 조직해 활동함으로써 사회적 입지를 형성했다. 1926년 창립된 경성사진사협회는 한국인 영업사진사들만으로 결성된 최초의 사진단체였으며 구심점이 되어 사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최초로 단체를 결성해 집단 활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경성사구회’였다. 기독교청년회 사진과 출신 사진가들로 구성되었으며, 경성진사협회*인상사진연구회와 함께 조선인만으로 구성된 최초의 아마추어 사진 단체였다. 1937년에 서울 시내 아마추어 사진가 23명이 중심이 되어 ‘경성아마추어 사진구락부’를 결성해 일본인 사진인들에 대항해 최초의 유일한 사진단체를 결성한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아마추지만 1960년대 후반에는 50여개국에서 4천여 작품이 입선되는 등 한국 사진의 국제 진출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주의 사진 운동과 국제 사진전 전출은 사진의 새로운 가치관 정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해방 이후 촉발된 의식들은 인간 가족전과 사진 저널리즘의 영향으로 새로운 양상을 띄기 시작했으며 1956년 등장한 신선희는 다음 해 회원 작품 38점과 공동 테마로 창작한 사랑의 생태를 촬영한 사진도 함께 전시하였다. 비평가들은 시대정신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회화적인 표현 방법을 초월한 깊은 내용의 작품이라고 하였다..요약하자면 카메라의 기계적 기록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한, 소위 생활주의 사진으로 불리우는 초기 리얼리즘 작가군이 형성되어 관념적인 회화주의에 반대하면서 사회적, 인간적인 대상으로 카메라의 초점을 이동하여 그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고 한국사진사에서 사진의 대중화의 토대를 형성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60년대 이후는 사진의 사회적 정착기로 볼 수 있다.10. 1960, 70, 80년대의 사진의 흐름1960년대 초기는 매체 사진의 역할이 유감 없이 발휘된 시기며 사회 속에 자리를 잡은 시기이다. 상업사진을 통해 프로사진작가들이 출현하였으며 대학에는 사진학과가 설치되고, 영상,사진예술 등 사진전문잡지도 발행되어 사진발달을 촉진시켰다. 1964년 3월 서라벌 예술대학에서 사진학과 설치, 1966년 8월 사진 전문지 '월간사진'이 창간된다. 광고사진이 등장하였으며 달력에 의한 기업 홍보가 유행하였다.보도사진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으며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에는 매체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실의 확증과 부정의 현장을 포착한 수많은 사진이 매체에 반영되었다. 사건의 현장에서 목격자로서 사진 기자들은 불의에 대한 고발과 직설적인 카메라워크를 인쇄 매체에 의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대의 목격자로서 충실하게 현장을 지켰다. 저널리즘의 근본적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텔레비전이 보급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