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설교학M.divⅠ2차학번2019420103이름정의철과제100년의 설교 산책제1장초기 선교사들의 설교(요약)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성결교회의 근본적 진리인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사중복음의 내용은 초기 교리 가운데 중추적인 교리로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선교사들의 설교에서 성결한 삶을 주장했고 미국에서부터 영적인 각성과 교회의 재생을 위해 성결 운동 으로부터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핵심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자신을 제단에 드림으로서 성령이 이루어주시는 것이 성결이라는 것이다.감리교회로부터 20년을 보내며 200개의 성결파 교단들이 생겨났다그렇게 운동뿐만 대한민국에서는 선교사로부터 성서학원을 세워 전도자를 양성하고 이단과 속화의 지식적인 면을 보충해 나가고 설교를 통해 시대에 따른 단계의 변화가 있다. 초기 단계는 개개인의 설교에서 교회 관련 주제로 변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눔보다 아끼면서 살아간 현실에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방향을 가지고 이웃에 관한 헌금의 자립심까지 전달 되어졌다. 그러한 결과는 한국 설결교회로서 자리 잡아가면서 30년대를 넘어가며 교회 구성원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세워주었다.설교에 있어 선교사들은 성경 본문의 깊이보다 주제만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이야기전개를 풀어갔다.제 2장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시대의 설교(요약)한국성결교회는 본격적인 교회체제로 전환하기 전 14년 동안을 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일제강점기 시대 김상준, 정빈이 1907년 조국의 복음화를 시도하였고, 그 근거지가 바로 복음전도관이었다. 경성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에 총 34개의 복음전도관이 세워졌다. 이곳에 일차 임무는 전도였지만 예배와 세례 성만찬 등 교회와 다를 바 없는 목회가 행해졌다. 그럼에도 복음전도관이라는 명칭을 고수한 것은 동양선교회가 교파나 교회라는 고정된 체제보다는 복음전파라는 단순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보인다. 성령세례와 온전한 구원 그리고 순복음에 초점을 맞춘 이 시대 설교는 성경본문을 주석적으로 연구하기 보다 문자적 해석과 교훈에 치중하는 경향이 많았다. 또한 열정적이고 죄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 설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이 당시 길거리의 노방전도도 빈번하게 행해졌다. 남녀 구분이 엄격했던 상황에도 박기반, 최홍 등 여성 사역자들이 여성의 전도에 대한 공헌을 세웠다. 복음전도관은 여성사역자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선진적인 태도를 지지했다. 국가의 주권이 침탈당한 당시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삼일절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성결인들 마음속에는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어떻게든 애국애족을 고취시키는 설교를 행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모든 것이 정비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서열교회의 초대교회’였다.제 3장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시대(1921-1943)의 설교(요약)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14년간의 복음전도관 체제를 교회로 전환시킨 결과이다. 복음전도관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태동한 성결교회를 기다리는 것은 교활한 일본 제국주의였다. 예배 전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동방요배강요, 구약사용금지 등 신앙마저 위협당하는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특히 신사참배로 한국교회를 폐쇄하고 성도들을 투옥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신사참배에 순응하는 무리와 거부하고 전도운동에 나서는 측으로 갈렸다. 이 속에서 여명기의 설교는 주로 교리설교, 그중에서도 성결을 주제로 한 설교가 빈번히 행해졌다. 당시 교역자들은 영혼구원만이 설교의 유일한 목적으로 복음 외에 주제취급을 엄격히 금했다. 설교자들은 종말 의식이 충만하여 재림에 관한 언급을 많이 했다. 또한 민족의식을 신앙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건 검열이 주된 요인이었겠지만, 피안적 신학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수난기로 접어들면서 여명기의 신약과 구약 사용 비율이 급격히 벌어졌다. 이것은 구약 사용을 금하는 일제의 탄압 때문인 것이다. 설교 현장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설교자들로 인해 많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여명기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면 수난기에는 순복음 고수에 대한 호소가 증가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수난기에 들어 비전과 희망에 대한 메시지가 증가했는데 여전히 차안이 아닌 피안의 세계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설교자들 중에는 영혼을 팔아야 하는 영적 매춘을 강요 받기도 했다. 복음전도관에서 교회로 체제를 전환한 성결교회는 너무나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여명기와 수난기를 통틀어 22년 동안 우리의 선배들의 절규와 헌신, 그리고 전 생애를 바친 헌신이 남겨져 있다.제 4장조국의 광복과 6ㆍ25전쟁의 아픔(1945-1953)(요약)조국의 광복을 맞은 성결교회는 1945년 9월 첫 주일 서울에서 300여 명의 성도가 신학교 강당에서 뜨거운 예배를 드렸다. 이후 교단재흥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 재흥총회’를 개최했다. 재흥성결교회는 신생, 성결, 재림을 성경해설의 요제로 한다는 것, 교파주의를 지양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를 설립, 의회제도 채택 등 7개 항을 결의했다. 그러나 곧이어 들이닥친 전쟁으로 인해 교단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대거 납북됨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피난 3년 끝에 1954년 4월 20일 서울신학교에서 제 9회 환도기념총회가 열렸다. 이날 희년기념회관의 건축과 기념출판, 1천 교회로의 확장 목표를 위한 기념사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광복 후 성결교회의 설교는 일제치하의 기독교회와 신앙인들의 행태에 대한 반성과 회개, 광복을 맞은 조국의 미래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특히 새롭게 출범하는 대한민국의 정신을 기독교 위에 세우려는 바람이 설교에서 강력하게 피력되었다.한편 6ㆍ25 전후해서는 성도의 바른 신앙을 촉구하는 설교를 가장 중요하게 다뤘는데 이는 설교자들이 어려운 상황을 신앙에서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전쟁의 원인을 인간의 죄로 보고 회개를 강조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라는 설교 역시 빈번히 행해졌다. 나아가 혼란한 시대에서 이단사설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바른 삶을 강조하는 설교도 눈에 띈다. 어쩌면 설교보다 침묵이 어울렸던 그 시기에도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사자후는 믿음의 진수 그 자체였다.제 5장분열의 아픔(1961-1965)(요약)한국 현대사에서 1960년대는 4 ㆍ15 학생의거와 5 ㆍ16 군사혁명으로 대변되는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다. 부패한 정치인들에 맞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목숨을 바쳤고, 민초들의 삶은 도탄의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성결교회 역시 교단 분열이라는 내홍을 겪어야 했다. 명목상으로는 신학적인 이견이 분열의 원인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금권과 교권 장악을 둘러싼 갈등이 분열의 단초가 되었다. 몇 차례 걸친 합동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끝내 하나됨을 거부한 일부 인사들이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창립함으로 교단의 분열이 공식화되었다.이 시기에는 성도의 개인적 신앙과 삶, 특히 나라와 민족에 관한 설교가 많이 행해졌다. 또 설득력 없는 교단의 분열을 비판하는 설교도 많이 등장했다. 나아가 전문적인 정보와 지식을 담은 설교의 증가와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설교 역시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매길 정도이다. 이 시기 성결교단을 대표하는 부흥사 이성봉 목사는 교단의 통합과 부흥을 위해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각오로 헌신한 반면, 교단 총회장과 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김응조 목사는 끝까지 교단통합에 반대하여 교단 분열의 핵심적인 역할을 자임했다. 모두 하나가 되어도 복음의 위력을 발휘하기 힘든 때에 종교지도자들이 빚어낸 분열의 아픔은 인간이 얼마든지 하나님을 창피하게 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제 6장교단성장과 선교확장(1965-1991)(요약)성결교회의 발전과 성장의 기틀을 다진 이 시기에는 2차에 걸친 교단 명칭 변경, 총회본부 및 서울신학대학의 신축 이전, 한국성결신문의 창간 등이 이뤄졌다. 교세나 행정, 교단의 신학교육, 해외 선교 등 여러 방면에서 성장을 이룩하여 2000년 이후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놓은 시대라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