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초반부를 감상할 때만 해도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밥 딜런의 전기 영화라더니 밥 딜런이라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잠시 재생을 멈추고 시놉시스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야 가 일반적인 전기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1. 밥 딜런 없는 밥 딜런 영화는 2007년 개봉된 미국, 독일의 영화로 토드 헤인즈가 감독을 맡았으며, 오렌 무버만과 각본을 공동 작업했다. 장르는 뮤지컬/드라마로,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들은 전부 밥 딜런의 곡이라는 점에서 주크박스 뮤지컬이라고도 할 수 있다.밥 딜런의 생애를 담았다는 영화 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다름 아닌 ‘밥 딜런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밥 딜런을 7개의 페르소나로 쪼개어 그들 모두의 이야기를 단편적·교차적으로 늘어놓는 방식을 택한다. 밥 딜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유명한 가수라는 것과 노벨 문학상을 탔다는 것밖에 없는 내게는 그리 친절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다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별개의 인물들이 규칙성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흐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포털사이트에 기재된 영화 줄거리를 봐도 이렇다 할 스토리 라인이 없다. 그러나 밥 딜런의 페르소나인 만큼, 그들 모두는 밥 딜런이라는 인물을 투영하고 있다.2. 밥 딜런의 페르소나우선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우디 거스리’라는 흑인 꼬마는 1950년대에 활동했던 동명의 포크 가수에게서 따온 인물이다. 포크 싱어 우디 거스리는 하층계급의 실상과 기득권층의 횡포를 고발했던 저항 음악의 선구자이자 밥 딜런의 정신적 우상으로, 밥 딜런의 음악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영화 내에서 흑인으로 묘사된 것은 저항 음악을 하던 우디 거스리의 계급적 정체성이 반영된 결과이며, 어린아이로 묘사된 것은 음악적 성장기의 밥 딜런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영화 속에서 방랑하던 꼬마 우디가 입원해 있는 우디 거스리를 병문안 가는 연출(실제로 밥 딜런은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던 우디 거스리를 자주 찾아갔다고 전해진다)은 밥 딜런이 우상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아르튀르 랭보’ 또한 실존했던 프랑스 시인에게서 따온 인물로, 영화 내에서도 시인으로 소개된다. 감독인 토드 헤인즈는 1966년 기자회견장에서의 밥 딜런을 기초로 이 인물을 창조했다는 발언을 한 바가 있는데, 그 때문인지 영화 내의 아르튀르 랭보는 내내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밥 딜런의 페르소나 중 하나로 시인을 내세운 것은 그의 가사에 담긴 시적 감성 때문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언론사 ‘뉴욕타임스’에서는 밥 딜런을 아르튀르 랭보와 비교 평가하는 글을 실은 적이 있다.가장 밥 딜런과 흡사한 캐릭터는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쥬드 퀸’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저항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것이 싫었던 밥 딜런은 언론과 잦은 마찰을 일으켰으며, 정통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사운드로 장르를 전환한다. 이는 수많은 팬들의 실망과 비난을 불렀으나 밥 딜런은 굴하지 않고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간다. 영화 내의 쥬드 퀸도 마찬가지다. 일렉트릭 기타를 드는 것을 일종의 배신 행위로 여겼던 대중은 1965년 5월 열렸던 뉴포트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을 ‘유다’라며 야유하는데, 이는 영화 속 쥬드 퀸의 공연에서 재현된다. 뿐만 아니라 ‘당신처럼 저항음악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136명? 136명에서 142명?’이라고 답하는 장면은 밥 딜런의 기자회견장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또한 쥬드 퀸은 자신을 취재하는 언론인 ‘미스터 존스’가 저항 음악에 대해 묻는 것에는 모호하게 답하고, 미스터 존스가 자꾸 자신에 대해 캐내려 하자 ‘시시한 당신 신문에 기삿감이라도 줄 줄 알았소?’라며 차에서 내려 버리는 짓까지 감행한다.그 외, ‘잭 롤린스’라는 포크 싱어는 밥 딜런이 저항 음악을 주로 하던 시절을 대변하는 인물로, 작중의 어딘가 어색한 토크쇼 장면은 1964년 스티븐 앨런 쇼에 실제로 출연했던 밥 딜런의 모습을 오마주한 것이다. 같은 배우(크리스천 베일)가 1인 2역으로 연기한 선지자 ‘존’은 1970년대 말부터 기독교 원리주의에 심취해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던 밥 딜런의 모습을 담아낸다.
체홉 ; 귀엽기만 한 여인퇴직한 팔등관의 딸인 올렌까는 기품이 있으며 정이 많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눈동자를 가졌으며, 통통한 장밋빛 뺨에 부드러운 살결을 가진 여자로 묘사된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미소의 소유자로 사람들에게 ‘귀여운 여자’라고 불리곤 했다.그녀의 집에는 꾸우낀이라는 한 극장 관리자가 건넌방을 빌려 쓰며 살고 있었는데, 계속되는 비 탓에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본 올렌까는 그를 동정하다 못해 사랑에 빠진다. 꾸우낀의 청혼으로 둘은 결혼하고, 올렌까가 극장 일을 도우며 둘은 행복한 생활을 한다. 하지만 어느 날 밤 한 통의 전보로 모스크바로 떠났던 꾸아낀의 급사 소식이 전해지고, 올렌까는 절망에 빠진다.석 달이 흐른 뒤 올렌까는 목재소 관리인인 바실리 안드레이치 뿌스또발로프라는 목재상에게 반하게 되고, 둘은 이내 약혼과 결혼식을 순조롭게 거친다. 올렌까는 연극에 대한 열정은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목재상의 일에 애정을 느끼며 화목한 생활을 하지만, 뿌스또발로프가 감기로 죽게 되어 올렌까는 다시 한 번 남편을 잃는다. 군대 소속의 수의관인 스미르닌에게 애정을 느끼고 다시 생활의 활력을 찾지만 스미르닌이 속한 군대가 전근을 가 버리고 나자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된다.외톨이가 된 이후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올렌까는 공허하게 수많은 세월을 보내다가, 나이가 든 채 스미르닌과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스미르닌은 전처와 재결합한 상태였고, 올렌까의 애정의 대상은 그의 아들인 사샤에게 옮겨간다. 올렌까는 사샤의 친어머니가 아들을 데려가 버릴까봐 불안해하면서도 사샤를 사랑하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올렌까는 항상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여자였다.’ (본문 中)올렌까라는 캐릭터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선 견디지 못하는’ 올렌까의 성정은 작품을 이끌어 나가는 동력이자 주체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전혀 주체적이지 않다는 점이 조금 아이러니하다. 이 아이러니함은 작품을 읽는 내내 날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전혀 이해도 공감도 가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사랑이 넘치고 헌신적이며 순종적인, 누군가에게 맹목적인 애정을 쏟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며 그 사람만을 바라보는 올렌까는 한없이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저 거울처럼 대상(주로 남편)을 고스란히 비추고, 앵무새처럼 그의 말들을 솜씨 좋게 흉내 낼 줄만 알 뿐 정작 자신만의 생각이나 가치관은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하는 이와 자신의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고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것이다(애초에 그녀에게 ‘자기 자신’이 있기는 있을까?).이러한 점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은 스미르닌이 떠난 이후 올렌까의 생활이다. 애정을 쏟을 대상이 사라지자 그녀는 아무런 의견도 갖지 못하여 깊은 공허감을 느끼지만, 이를 바꾸려는 일체의 노력도 하지 않고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자신의 삶의 주도권이 남에게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모르지는 않으면서도 문제의식을 전혀 가지지 못하는 올렌까가 나는 지독히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제목과 같이 귀여운 여인이지만, 그저 귀엽기만 한 여인, 자신이 대상화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물일 뿐이었다.그러나 그녀의 수동성이 오롯한 그녀의 탓일까? 라는 질문을 떠올리면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작중에는 그녀의 유년기, 즉 그녀의 성격이 형성된 배경을 다루고 있지 않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를 짐작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존의 시대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했던 자질들이란 언제나 비슷했고, 지금까지도 비슷하기 마련이다. 온화하고, 조신하고, 섬세하고,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성들. 분명 기품이 있고, 상냥하고, 심지어 어여쁘기까지 했던 올렌까는 그런 여성들만을 추앙하는 사회 속에서 길러지고 또 추앙받아 왔을 것이다. 사회의 요구에 부응했을 뿐인 올렌까를 어떻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현대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또 다른 올렌까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을.
바그다드 카페영화는 황량한 사막에서 시작하고, 이어진다. 관광을 위해 독일 로젠하임에서 미국으로 온 ‘야스민’은 남편과의 불화로 홧김에 짐을 챙겨 차에서 내려 버리고, 황량한 사막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한다. 한참을 걷던 그녀는 도로 주변에 덩그러니 놓인 카페 하나를 발견하고, 바깥에서 울고 있던 카페의 주인 ‘브렌다’와 마주친다.모텔을 겸하고 있는 ‘바그다드 카페’는 커피머신이 고장나 카페의 기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이곳저곳 어질러지고 먼지가 쌓인 난잡한 공간이다. 커피머신을 사오는 것조차 매번 까먹는 무능한 남편, 제 아들보다는 피아노를 치는 것에만 열중하는 아들 ‘살라모’, 항상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기만 하는 딸 ‘필리스’ 사이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브렌다의 인생은 환멸과 짜증으로 얼룩져 있다.이런 브렌다에게 야스민은 반갑지 않은 불청객에 불과했다. 야스민이 묵는 방을 청소하다 그녀의 방에 남자 물건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는 보안관을 부르고, 자기가 외출한 사이 카페를 청소해 놓은 것에 누가 허락했냐며 길길이 날뛰는 등 줄곧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독일 출신의 뚱뚱한 백인 여자인 야스민, 모하비 사막의 흑인 사장인 브렌다는 좀처럼 서로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그러나 야스민은 그녀에 냉대에 굴하지 않는다. 필리스에게 자신의 옷들을 입어보도록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모두가 있는 둥 마는 둥 취급했던 살로모의 연주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면서 그를 감격하게 하며 그들과 친구가 된다. 브렌다는 이에 분개하며 야스민을 쫓아내려 하지만, 금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야스민에게 마음을 연다.이후 야스민은 카페의 일을 돕기 시작하고, 마술을 연마해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며 서서히 이방인에서 벗어난다. 야스민의 마술쇼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며 카페 바그다드에 몰려드는 사람은 점차 늘어지고, 카페 바그다드는 활기로 가득 찬 공간으로 탈바꿈한다.그러나 마술은 오래 가지 못한다. 노동 허가도 받지 못한 데다 비자가 만료된 상태였던 야스민이 바그다드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야스민이 사라지자 카페는 단박에 활기를 잃는다. 카페의 구성원들은 기존의 따분한 일상으로 돌아가 야스민을 그리워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야스민이 다시 나타나고, 바그다드 카페는 다시 즐거운 화합의 장이 된다.를 다 보고 난 뒤 어째서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급진적 페미니즘에 익숙한 나에게 페미니즘을 도입해 설명하기에 는 지나치게 정적이고 따뜻한 분위기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는 그 무엇도 강요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성장, 그리고 조화를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곧 페미니즘이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자 답을 알 수 있었다. 감독이 페미니즘을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기획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페미니즘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아니겠지만,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는 페미니즘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우선, 의 두 주인공 야스민과 브렌다는 둘 다 남편과 갈라선 부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야스민의 결혼생활이 어땠는지는 단편적인 힌트밖에 주어져 있지 않으나 바그다드 카페는 모든 권력이 여성인 브렌다가 잡고 있는 일종의 가모장적 공동체이다. 바그다드 카페에 긍정적인 변화를 심어준 장본인, 야스민 또한 여성이다. 두 여성, 브렌다와 야스민이 결합하여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은 ‘여자는 남편을 내조하는 존재다’라는 사회적 편견을 타파하는 동시에 가부장제의 불필요함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