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를 읽고부정의의 시작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잘못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친일파 청산을 좌절시킨 일이다. 36년 동안 악독한 식민 통치를 했던 일본인들 밑에서 빌붙어 아부하며 같은 민족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민족 배신자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친일파들을 잡아서 잘못을 밝히고 죄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은 새 나라를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우기 위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을 철저히 단죄해야만 앞으로도 자기 한 몸의 이익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정부가 수립되자마자 국회에서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를 만들었고, 그곳에서 친일파들을 잡아들여 조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을 따르는 자유당의 정치인이나 그 부하들, 혹은 그들에게 정치 자금을 지원해주던 부자들 중에는 친일파가 많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반민특위에 잡혀가는 경우가 종종 생기자 이승만은 불과 반 년 만에 그 활동을 억지로 막아버린다.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 조사관들을 오히려 잡아 가두고 그 활동을 돕던 국회의원까지 간첩으로 몰아서 잡아 가둔 반면, 반민 특위의 조사를 받던 친일파들을 대부분 풀어줘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풀려난 친일파들은 또다시 군대와 경찰, 혹은 행정부 곳곳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일본 총독부 시절에 누리던 권력을 유지하게 됐다. 게다가 자신들을 처단하려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워 죽이거나 가두면서 보복을 하기도 했다.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친일파들은 거의 처벌받지 않았다. 그 친일파의 후손들은 지금도 한국에서 부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래서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굴욕적인 말이 생겼다. 그리고 ‘민족을 배신하는 것은 나쁘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가치관을 세우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의나 공동체나 민족 따위는 무시하고 그저 힘과 돈만을 쫓아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민특위가 와해됐기 때문에 그 이후에 올바른 가치관의 중심을 잡지 못한 것이다.부정의는 현재 진행형반민특위의 와해는 ‘힘이 있으면 부정의해도 덮을 수 있다’의 사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현재도 반복되고 있다.한국은 정치인, 고위관료, 대기업인 같은 엘리트들이 자신들만의 네트워크, 즉 인맥을 구축해 이익을 독점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각 사회 분야에서 엘리트들이 학연, 지연 등으로 뭉쳐 권력유지 기반을 만들고, 부패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2016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최근 불거진 KT 인사비리 의혹(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 등),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의혹, 버닝썬 사태(경찰 총경과 아이돌 스타의 유착)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최근 버닝썬 사태에서 보듯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이 유착해 부패를 공모하며 이익을 취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다만 일일이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교육에서도 이러한 부정의를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최근 교육부는 연구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미성년의 자녀들을 자신의 논문에 공동저자로 등재한 뒤 이를 자녀들의 대학 진학에 유리한 실적으로 사용한 교수들을 적발한 바 있다. 교육부의 발표에 따르면 2007년 이후 총50개 대학에서 전체 87명의 교수가 139건의 논문에 자녀의 이름을 공동저잘 등재한 것으로 밝혔다. 이들 대학에는 서울대, 포항 공대 등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 불리는 대학들이 포함되어 있어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작년에 숙명여고 시험부정사건이 터지면서 수시가 아닌 정시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자녀교육에 대한 삐뚤어진 부모의 욕심이 사회의 정의와 공정성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바라는 바는 동일하다. 정의로운 나라, 공정한 대한민국을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과 권한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에 정의가 설 수 없다. 교육은 특정한 개인의 출세수단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숙명여고 사태 그리고 한 교육부 공무원의 ‘개, 돼지 발언’에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최소한 교육은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과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들어가며이번 과제를 위해 여러 공연을 많이 찾아보던 중,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뮤직컬’이란 장르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게 생소한 뮤지컬을 조금이라도 친숙하게 느끼고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지창욱이 나오는 를 선택했다.‘감동’, ‘아픔’, ‘웃음’ 이 세 가지 단어가 이 뮤지컬의 핵심단어라 생각한다. 지금부터 위 세 단어를 중심으로 뮤지컬을 보면서 느낀 점을 적어보고자 한다. 특히 인상 깊은 넘버의 가사를 살펴보고, 특기할만한 점은 없었는지에 집중하여 기록해보고자 한다.-뮤지컬 는 항일 독립 전쟁의 선봉에 섰던 신흥무관학교를 배경으로,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그린 창작 뮤지컬이다. 일제에 항거하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건립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평범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음악 감독 박정아는 넘버의 특징에 대해 “그 시대를 살았던 캐릭터들의 아픔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대한 시위 장면에 등장하는 7분이 넘는 오프닝 곡 ‘죽어도 죽지 않는다’와 독립에 대한 희망과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결의를 느낄 수 있는 넘버 ‘가난한 유서’ 등을 중심으로 고뇌와 에너지 등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라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신흥무관학교’의 넘버들 중 인상 깊었던 넘버 세 개를 소개하려 한다.첫 번째 넘버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이다. 의 주제를 담은 대표곡 오프닝 넘버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합창으로 관객들을 집중시켰다. 군대 해산 명령을 받고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부대를 비롯해 농부,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해산 반대 시위를 벌이는 장면을 웅장하게 표현한다. 앙상블의 군무와 텀블링 등의 아크로바틱이 돋보인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뮤지컬 중간에 자주 등장하는데 같은 멜로디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멜로디를 변주해서 연주하여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선율, 리듬, 화성을 변형해 연주하는 것만으로 상황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신기한 경험이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라는 주요 태마 넘버 하나만으로도 많은 감동을 주었다.두 번째 넘버 ‘이건 뭐지’이다. 이 넘버에서 팔도는 나라를 잃은 비통한 상황에서도 우정을 통해 느끼는 행복에 대해 노래한다. 밝은 멜로디와는 달리 “좋은 시절, 좋은 때에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을”이라는 가사를 통해 평범하기조차 어려웠던 시대적 비극을 알 수 있었다. 솔로 넘버라서 인물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팔도 역을 맡은 배우의 맑은 목소리가 돋보였다.마지막 1막 엔딩 넘버 ‘가난한 유서’에서는 이런 슬픔이 더 크게 다가온다. 독립을 위해 폭탄 의거를 감행하는 투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나의 가난한 유서에 내 이름 석자는 없다. 그저 피로 쓴 여섯들자 대한 독립 만세. 우리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우리 비록 숨통이 끊어져도 서로의 가슴에 화인으로 남아 죽어도 죽지 않는다.”라는 가사를 통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오로지 조국을 위해 희생한 열사들의 모습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넘버는 합창곡인데, 배우들의 호흡이 매우 잘 맞았다. 정말 많은 시간을 연습했다는 것이 느껴졌다.독립군이 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농부, 학생, 승려 등 다양한 사람들과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의 굳은 다짐과 결의가 공연 내내 펼쳐졌다. 특히 신흥무관학교에서 학생들이 서로 의지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장면은 암울한 시대와 대비되어 밝고 쾌활한 사람들의 모습이 작품의 활기를 더했고, 독립 운동을 위해 강도 높은 모의 훈련과 실제 청산리 전투를 재현한 장면은 역동적이고 화려한 군무가 인상적이었다.청산리 전투를 필두로 의열단, 광복군 활동 등이 묘사된 장면이 가장 뭉클했다. 수업 중 뽑힌 가장 뛰어난 학생이 결국은 독립투쟁의 현장에 목숨을 바치러 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세상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고, 만나면 마냥 웃고 떠드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스무 살 안팎 청년들의 모습은 비슷할 텐데, 그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겪으며 투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프고 존경스러웠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들처럼 용기 있고 뜨거울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의 총기문화≫를 읽고미국의 총기문화미국에서의 총기사고는 일상에 속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미국인의 총기 사망사고는 교통사고 다음으로 많다. 2004년부터 10년간 총기사고로 숨진 이는 모두 31만여 명이다. 매년 3만 명 이상이 숨진 셈이다. 미국에서는 어린아이가 총을 갖고 놀다가 오발 사고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 대체로 부모들의 총기류 관리에 문제가 있는 경우다.미국은 “술보다 총을 사기가 쉬운 나라”이다. 미국에서 총기 구매는 `누워서 떡먹기`라 한다. 주별로 조금은 다르지만 간단한 신원조회만 거치면 쉽게 총을 구매할 수 있다. 총기를 파는 곳이 책방보다 많다고 하니 실상을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일 년에 3만 명 이상이 총기로 인해 사망한다는데 국가가 총기를 규제하지 못한다는 점이 이상하다. ‘미국은 왜 총기 소지에 대해 우호적인 법적 시스템을 갖고 있으며, 총기규제가 왜 강화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미국은 왜 총기를 규제할 수 없는가?미국은 총기산업이 이미 자국 주요산업으로 한 축을 이룬다. NRA의 로비도 만만치 않다. NRA는 총기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체들과 총기 소유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만든 비영리 로비 단체다. 미국 내에서 어떠한 이익단체보다 강력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갖추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50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4억 6000만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매년 총기규제를 반대하고 총기 소유를 옹호하는 로비, PR 등에 쏟아붓는다. 총기규제 법제화 권한을 갖는 연방정부, 연방의회 의원에 대한 직간접적 후원 규모만 봐도 총기규제가 쉽지 않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미국 총기규제가 난항을 걷는 배경에 NRA의 로비가 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이 민간단체 하나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뿌리 깊게 박혀 있는 미국인 특유의 총기 DNA도 문제이다. 총기와 미국 역사·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미국 서부 개척 과정에서 총은 그들의 필수품이었다. 맹수와는 사투를, 인디언들과는 목숨을 건 경합을 해야만 했다. 공권력이 부재했던 오직 ‘약육강식의 법칙’이 작동했던 당시 총기는 삶을 연명할 ‘최후의 수단’이었다. 총기는 ‘스스로 역사를 개척했다.’라는 미국인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이었던 셈이었다.미국의 총기문화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이러한 미국의 총기문화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은 다음과 같다. 먼저 ‘좋음’에 입각해서 판단한다면 미국의 총기문화는 좋지 않다. ‘좋음’은 오직 행위의 결과에 따라 판단한다. 따라서 미국의 총기문화로 인한 결과를 살펴보면 미국은 총기로 인해 연간 3만 명 이상이 숨진다. 다친 사람의 수까지 헤아린다면 그 숫자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총기로 인해 숨지거나 다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주변인들도 고려해야 한다. 총기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잃은 그들의 아픔, 정신적 손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또한 뉴스에 등장하는 총기사고를 보며 ‘누군가 나를 해치지 않을까’하는 미국인들의 불안감도 포함한다면 사회적 비용 역시 크다.물론 미국의 총기산업이 미국 경제의 주요 축을 이루고, 많은 사람이 총기문화 덕분에 일자리를 얻고 돈을 번다. 하지만 경제적인 요소와 사람의 생명을 과연 비교 할 수 있을까? 수많은 미국인이 미국의 총기 문화로 고통받고 있음을 짐작해 볼 때 미국의 총기문화로 인한 손해가 이익보다 크기 때문에 미국의 총기문화는 좋지 않다.‘옳음’에 입각해서 미국의 총기문화를 판단한다면 미국의 총기문화는 옳지 않다. ‘옳음’은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의도나 동기가 선하고 정당하다면 결과와 무관하게 옳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모든 사람은 가치 있고 존엄하며,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총기는 생명을 앗아가는 도구이다. 이러한 총기가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은 사회에서 생명의 존엄성이 지켜지기란 어렵다. 손쉽게 총기를 구매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매년 수많은 사람이 총기로 목숨을 잃는다. 따라서 미국의 총기문화는 옳지 않다.≪미국의 총기문화≫가 나에게 시사한 것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미국인들의 총기에 대한 신념이다. 2019년 6월 1일. 불과 며칠 전에도 버지니아주 총기 난사로 13명이 사망했다. 이날 벌어진 사건은 올해 미국에서 발생한 150번째 총기 난사 사건이다. 수많은 사람이 총기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다치고, 더 많은 사람이 가족, 친구, 동료, 이웃을 잃는데 왜 미국인들을 총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나는 이러한 총기에 대한 미국인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한 것이 대중매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제조업체들은 국내 시장이 축소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위기 돌파를 위해 총기 제조업체는 마케팅과 광고 캠페인, 영화 등을 통해 미국 독립혁명기에 식민지인들이 벽난로 위에 있는 장총을 집어 들고 거리로 뛰어나가 영국의 압제에 맞섰다는 식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서부개척시대를 승리로 일구어낸’ 영웅적이고 정의로운 총잡이인 카우보이 이야기 역시 총기 업체 마케터들의 작품이다. 독립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총의 이미지는 총기 시장의 호황에 톡톡히 기여했다. 총기 판매자들은 남자라면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하며 그래야 진정한 미국인이라는 식으로 소비자의 허영심을 부채질했다. 미국의 오랜 역사적 배경과 함께 대중매체의 확산으로 총기 소유에 집착하는 국민적 정서가 형성된 것이다. 한 나라의 사회적 관습이 끼치는 사회적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한다.
무용 감상문공연에 앞서교육대학에 와서 공연을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과제가 있었다. 합창, 피아노 연주회 등 여러 공연을 감상했었고 공연을 볼 때마다 내가 교대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공연을 언제 한번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매번 과제 때문에 공연을 보러 갔지만,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아~!’하고 탄성을 질렀었기에 이제는 공연을 보는 과제가 오히려 또 어떤 것이 내 눈, 혹은 내 귀를 자극해 줄지 기대가 된다.드디어 무용공연 차례가 왔다. 다른 공연과는 달리 무용공연은 또 어떤 새로움이 있을지 궁금해하며 청주시립무용단의 을 예매했다. 은 백석 시인의 원작 시편 를 새롭게 각색하여, 청주시립무용단이 2012년 서울무용제에서 대상과 연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공연 시작 전 팜플렛을 보며 공연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은 원작 시편 를 바탕으로 하되, 주인공을 시 속의 '흰 당나귀'로 설정했다는 것과 원작의 '흰 당나귀'를 의인화하여 '사랑의 화신'으로 춤추게 하고, 단순한 시적 시공간을 다양한 무대 언어와 무용 작법으로 펼쳐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설렘을 갖고 공연장에 들어갔다.감상? 움직임한 명이 출 때는 넓은 무대에서 혼자 추기 때문에 많은 무용수가 나올 때와는 다르게 이동 동작이 많고 동작이 빠르고 큰 동작들이 많았다. 특히 당나귀 역을 맡은 남자 무용수의 무대가 기억에 남는다. 당나귀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는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답답한 모습을 춤으로 표현한 듯하였다. 마치 일이 잘 안 풀려 답답해하는 것처럼 바닥에 천장을 보고 누워 몸을 질질 끌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막 허공에 팔다리를 내지르고 교차시키는 동작을 선보였다. 당나귀를 표현할 때 남자 무용수의 다리와 팔, 손의 위치와 모양을 보고 큰 움직임뿐만 아니라 손끝 처리라든지 발바닥이 땅에 닿은 위치 등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고전 발레처럼 정형화된 느낌이 아니라 굉장히 역동적이고 개성이 있었다.당나귀의 어두운 일상을 그린 것 같은 장면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당나귀의 갈등과 고뇌, 또 연인에 대한 헤어짐의 슬픔을 표현한 것 같았다. 대체로 어두운 느낌이었는데 몸을 되게 수축하였다가 갑자기 이완하는 등으로 힘들어하는 느낌을 나타내었다. 특히 중간에 배경음악이 멈춘 후 정적 속에서 남자 무용수가 독무를 한 것이 멋졌다. 무용수의 거침 숨소리와 발바닥이 무대에 닿는 소리 등이 더욱 잘 들려서 고독, 외로움, 고뇌를 느끼고 있을 당나귀의 감정이 잘 전달되었다.여러 명의 무용수가 등장했을 때는 4명 전체가 같은 동작을 하면서 빠르게 움직였다가도 대형을 2:2로 갈라 방향은 다르게 2명, 2명이 같은 동작을 하기도 했고, 한 명이 중심에 서고 나머지가 중앙에 빙 둘러서 한 명의 동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가볍게 몸을 움직이기도 했다. 이렇듯 대형에 변화를 주니 지루하지 않았다.? 무용수와의 관계(남녀역할)당나귀 역을 맡은 남자 무용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타샤 역을 맡은 여자 무용수 주위를 맴돌면서 여자 무용수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것은 아마도 둘의 숙명적인 첫 만남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여자 무용수에 비해 남자 무용수의 비중이 훨씬 컸는데, 여자 무용수 중심이였던 고전 무용과 달리 남성 무용수 중심으로 무대를 구성한 것이 인상 깊었다.사랑의 헤어짐에 대해 나타낸 것 같은 장면에서는 다시 붙잡고 싶은 마음과 또 헤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몸짓을 나타낸 듯하였다. 남녀 남녀가 서로 짝을 이뤄 양쪽에서 달리다가 서로 껴안고 몸을 뒤엉키다가 갑자기 서로 싸우고 증오하며 헤어지고 하는 몸짓을 나타내었다.주인공인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가 같은 동작을 하거나 한 명이 빠르게 춤을 출 때는 가만히 있거나 작은 움직임으로 표현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같은 동작이라도 한 명은 느리게, 다른 한 명은 빠르게 표현하여 두 무용수의 관계, 감정을 표현했다. 이것 무용 수업시간에 내가 파트너와 함께 했던 것들과 비슷해서 신기했다.?무대무대조명은 다양한 색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노래 분위기에 맞게 변화하였으며, 무용수들을 따라다니는 밝은 조명이 각자 있기도 하였고, 독무를 할 때는 한 명의 무용수만 비추기도 하였다. 무대조명도 무용수들의 격정적인 몸짓을 따라 바삐 이동하였고 확확 변화를 주어 빠르고 급작스러운 느낌을 연출할 수 있었다.무대 뒤편에는 굉장히 사실적인 배경이 있었다. 숲속의 나무와 길, 초가집이 표현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림인 줄 알았지만, 무용수들이 숲길에서 등장하는 것을 보고 조형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용 수업 때 보았던 현대 무용과 고전 무용의 무대 배경과 비교하면 이 무대는 고전 무용의 무대 배경에 가까웠다. 수업시간에 본 현대 무용의 무대 배경은 단순하고 상징적인 그림이 들어간 반면 고전 무용에서는 사실적인 조형물을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 내가 본 무대도 사실적이기 때문이다.?음악배경으로 깔린 음악이 점점 빨라져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무용수의 동작도 굉장히 빨라졌고, 음악이 차분해졌을 때는 무용수의 동작도 느려졌다. 음악과 무용수의 호흡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악기를 잘 몰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악기를 사용한 것 같았다.?의상무용수마다 의상이 다양했다. 먼저 공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당나귀 역을 맡은 남자 무용수의 경우에는 상의를 입지 않고 흰색 한복 하의만 입었다. 하의에는 한지 같은 것을 달아 당나귀의 털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였다. 머리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머리카락을 하의 색과 맞춰 하얗게 하고 뾰족하게 세웠다. 당나귀를 표현하기 위해 춤뿐만이 아니라 외적인 요소까지 섬세하게 신경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타샤 역을 맡은 여자 무용수는 빨간색 한복 저고리에 초록색 치마를 입었고 나머지 무용수들은 흰색 한복을 입었다. 색을 다르게 함으로써 주요 인물에게 좀 더 집중하는 효과를 낸 것 같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과목 :담당 교수님 :학과 :학번 :성명 :당신들의 대한민국?OECD 가입 국가 중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출산율 꼴찌인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의 만족도는 계속해서 하락 중이다. 국민들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진 지금, 한국의 곪아가는 문제들을 신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대두되는 문제의 깊은 뿌리를 발견해 나간다.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저자의 이름이 한국인임이 분명한데도 다른 나라 사람이 쓴 것 같은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책 제목이 나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러시아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귀화해 지금은 노르웨이의 한국학 교수가 된 독특한 인생을 살고 있는 저자는 누구보다 한국을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는 시선을 갖고 있다. 책을 읽을수록 한국 사회에 대해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그가 놀라웠다. 책이 출간한지 오래되었고 그동안 정치, 경제 등 사회문제에 무지하게 살아온 나에게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그가 바라본 대한민국의 솔직한 얼굴은 부끄러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약 18년 전에 그가 보았던 한국의 부끄러운 모습들은 현재 얼마나 개선되었을까?대한민국의 과거 그리고 현재저자의 통찰로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문제를 다루는 이 책은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다.다양한 각도의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1부는 ‘한국 사회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의 고질병들을 이야기한다. 2부는 ‘대학,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제목으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지식인들과 교수집단, 대학 사회를 돌아본다. 3부는 ‘민족주의인가, 국가주의인가’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돌아보고 마지막 4부에서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다른 인종에 대한 인권을 무참히 밟고 사는 현장을 고발하며 ‘인종주의와 대한민국’을 다루고 있다..1부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한국의 종교와 패거리 문화, 군대문화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종교와 패거리 문화는 지금도 개선되지 못했다. 세속적이고 물질 지향적인 기독교 문화는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타락한 목사의 뉴스로 현재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교회를 세우고 신자를 모으는 것이 순수한 신앙심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같은 기독교인끼리 결집과 타 집단에 대한 배타성으로 인해 특히 타 종교와 마찰을 빚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타 종교에 대한 공개적인 비방은 물론이고 몰상식한 집단행동도 서슴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가 많은데도 한국의 교회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사회 곳곳에서 한국 교회의 폐단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의 목소리가 요구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여전하다는 것은 자체적인 개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사회에 만연한 폭력도 근절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사회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군대 문화에 대해서 저자는 “보수정치인이 다스리고 재벌이 소유하는 한국의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군대라는 것은 ‘보스’에 맹종할 ‘충견’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일종의 ‘양견장’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복종을 가르치는 군대에서 폭력은 불가피한 것이 되어버렸고, 군대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학, 직장 내에서도 이러한 폭력적인 행태는 계속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군대 내에서 발생하는 가혹 행위에 대한 보도만 보아도 위로부터의 폭력이 그 사슬을 끊지 못하고 아래로 계속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군대를 ‘남자라면 당연히 가야하는 곳’이라고 인식하는 모습도 변함이 없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남자가 군대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군대 역시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려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2부에서는 대학교수와 관련된 내용이 가장 인상깊었다. 현재도 작가가 지적한 대학 교육의 곪은 부분들이 차례차례 터져 나오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표절, 성추행, 공금횡령 등으로 세간에 화제가 된 교수들의 숫자는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대학사회를 ‘군대만큼 서열적이고 권위 주의적인 곳’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상명하달의 원칙이 엄격히 지켜지는 사적인 추종의 관계이지, 공적이고 평등한 현대적인 동료 지식인의 관계는 결코 아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18년 전이나 지금이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선생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배우고 선생님의 아침조회 훈화를 듣고 자란 우리에게 대학교수나 대학선배가 우위를 가지는 건 사실이다. 이러한 부분이 우리나라 전체에 퍼져 있는 군대문화의 단상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18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는 교사와 학생이 함께 토론을 하며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증가하였고, 과거에 비해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생겼다. 비록 이러한 변화가 한국 전체에 통용되고 있진 않지만 한국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과정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3부와 4부에 등장한 민족주의와 인종 차별적인 모습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단일민족’임을 강조하곤 하는데 이러한 성향이 오히려 타민족을 적대시하고 우리보다 ‘수준이 높다’고 여기는 서구사회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그리고 우리보다 ‘수준이 낮다’고 여기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유색인종의 외국인에 대해서는 멸시를 서슴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바트자갈’이라는 몽골인은 이렇게 말했다. “민족과 국적이 너무 우스운 개념 같아요. 핏줄이 비록 달라도, 나를 살려주고 믿어준 내 친구가 있는 나라를 나는 이미‘남의 나라’로 볼 수 없죠. 그는 나에게 형제와 같은 사람이니 그의 나라도 내 나라처럼 느껴지지 않겠어요? 그러나 나의 이런 마음을 믿고 나를 같은 동족으로 쳐줄 한국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인간들이 왜 겉만 보고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나의 서류에 적혀 있는 ‘몽골’이라는 말만 읽고 내 마음을 보지 못하니 우스운 일이죠. 옛날에 씨족과 부족의 구분이 없어졌듯이, 국가와 민족의 구분이 소멸될 날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나는 그에 대한 사연을 읽으며 미안함, 고마움, 부끄러움, 감동, 분노 등의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몽골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그가 한국에 와서 불법체류자가 되고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가슴 아팠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받는 무분별한 인권 침해에 대해 아무런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들보다 조금 더 잘사는 나라라고 어깨에 힘을 주지만 그들보다 전혀 나은 것이 없다.근로자의 날을 사흘 앞둔 오늘(2019년 4월 30일)도 서울 도심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다. 그들은 법정 공휴일인 노동절조차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게 이주노동자의 현실이라며 거리로 나왔다. 유투브로 관련 영상을 본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무대에 올라가 현장에서 겪은 열악한 환경과 차별을 증언하는 이주노동자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18년 전과 다름없음을 보여주기 충분했다. 2019년인 지금도 “사장님이 욕을 한다, 사장님이 회사를 옮기지 못하게 한다” 등 차별 받은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는 쉽게 들을 수 있다. 차별은 이 뿐만이 아니다. 고질적인 저임금 외에도 이주노동자의 산재 발생률은 내국인보다 6배 이상 높다. 휴식은 적으면서 위험은 더 많이 강요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주노동자의 저임금과 각종 차별의 배경에 정부의 고용허가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직과 재고용 등 고용 전반을 사업주가 사실상 맘대로 할 수 있다 보니 이주 노동자가 아무 대응을 할 수 없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변화해야 한다.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을 보호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위해결론적으로 작가가 18년 전에 본 한국 사회의 문제들은 현재도 개선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들이 많다. 병의 원인에 대한 진단은 받았지만, 치료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초등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어때야 하는지 고민해보았다. 나는 우리가, 그리고 내가 가르칠 아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배려할 줄 아는 세상,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길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편견과 차별적인 생각들을 고쳐야한다고 생각한다. 폭력이나 억압으로 얼룩진 군대 문화나 대학 내에서의 잘못된 교수와 학생 간의 관계, 비정규직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의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반성하여야 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또한 인맥과 친교, 그리고 원만한 사회성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같이 사는 공동체에서 건전한 비판이 스스럼없이 오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비난이 아닌 비판이 공동체의 결속을 저해하는 요소로 취급되는 사회에서는 누군가는 반드시 말해야 할 목소리가 원천 봉쇄된다. 그럴 경우, 당장은 문제없이 굴러가는 듯해도 언젠가는 더 크게 곪아 터지기 마련이다. 과거에 비해 보다 나은 도덕적 사회, 공정하고 정의로운 민주 사회로 변화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저자의 말을 경청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제 치료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PAGE * MERGEFORMAT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