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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아소카왕 평가A+최고예요
    아소카왕, 제3결집 그리고 불교의 아시아 확산-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아소카왕불교의 전륜성왕은 고대 인도의 보편적인 제왕관과 결부된 이상적 제왕으로서, 붓다도 전생에는 여러 번에 걸쳐 전륜성왕으로 태어났었다고 하며, 불교 경전에는 여러 명의 다양한 전륜성왕의 존재가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상의 실제 전륜성왕에 비견되는 중요한 인물이 바로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 제국을 통치했던 아소카왕이다.아소카 왕은 현재까지도 인도인이 가장 좋아하는 성군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또 마우리아 왕조를 상징하는 공작새는 인도의 국조로, 아소카 왕이 붓다를 기념해서 첫 설법장소인 바라나시에 세운 아소카 석주의 머리 장식은 인도를 상징하는 국장이 되어 인도에서 발행하는 모든 화폐와 공문서에 각인 되어 있다. 이외에도 아소카 왕이 펼친 복지 정책에 대한 연구는 전 세계에 수백여 종에 달할 정도로 아소카 왕은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1. 전쟁의 왕- 무력에 의한 정복붓다 제세시에, 붓다를 후원해서 불교가 성립하고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와준 최고의 왕은 마가다국이 빔비사라와 그 아들인 아사세였다, 그러나 불교가 오늘날과 같은 세계종교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한 왕은 아소카 이었다. 붓다 입적 후에 200여 년 후의 인물인 아소카 왕은 전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고 불교를 국교화하며 자비와 복지를 실천한 군주이다.인도 통일의 기운은 마가다국이 인도 최초의 강대국으로 자리하던 시기부터 움트고 있었다. 부를 축적하고,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점점 넓혀 가던 마가다국의 기운은 마가다 계의 난다 왕조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동방원정에 나선 알렉산더가 서북인도를 점령한 것 역시 인도 통일이 구체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아소카의 조부인 찬드라굽타는 난다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우리아 왕조를 세웠다. 마우리아는 공작새라는 뜻이다. 새롭게 왕이 된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더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서북인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알렉산더의 부장이었던 시리아 왕 셀레우코스의 인도 침략을 막아 냄으로써 통일의 초석을 다진다. 그리고 인더스 강 유역에 남아 있던 그리스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북인도를 최초로 통일한다.찬드라굽타가 다진 기반은 아들인 빈두사라가 계승한다. 빈두사라는 지속적으로 팽창정책을 펼쳐 주변을 정복하였으며, 이 방식은 3대인 아소카에게로 연결된다. 아소카는 강력한 맞수이었던 이복형 수시마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왕위에 오른다. 이후 99명의 이복형제들을 숙청하고 장장 10여년에 이르는 통일 전쟁을 완수한다. 이것이 전 인도 최초의 통일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아소카왕은 불법에 귀의했지만, 인도 대륙을 통일하기 위한 정복전쟁을 멈추지는 않았다. 불교에 귀의한 2년 뒤, 아소카왕은 보병 60만, 기병 10만, 9,0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칼링가국 정벌에 나선다.결과적으로 가장 잔인했던 칼링카 전투에서는 사망자 10만, 포로가 15만명에 이르렀으며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고 한다. 전쟁의 참담함에 자괴감을 느끼고, 깊이 가슴 아파하던 아소카왕은 비구가 된 친동생의 간절한 당부를 듣고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살생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한다. 마침내 진정한 불제자로 거듭난 것이다. 그 후 참회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여러 법령을 제정하고, 이후 불법(佛法)을 따르고자 정진하게 된다.2. 전륜성왕 ? 다르마에 의한 정복아소카는 상반된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다. 통일 전쟁 과정에서는 ‘잔인한 아소카’로 불리는데, 잡아함 권 26 『아육왕경』에서는 그가 지옥에 비견되는 고문실을 운영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불교에서 최고의 군주로 꼽는 아소카 왕에 대한 기록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것은, 아소카가 실제로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자, 아소카는 오랫동안 지속된 정복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 것을 후회하며 불교로 전향하였다. 아소카 왕이 불교도가 된 다른 이유도 생각할 수 있다. 제국 건립 후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포용해야 하는 그는 `법의 만민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 사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한 `법'은 보편 상식적인 윤리 이념을 초월하여 `현세와 내세에서 일체 생명의 이익과 안락을 도모하는 것'으로 이를 왕의 최고 의무로 삼았다. 요즘 용어로 법치(法治)를 뛰어넘어 인치(仁治)를 추구한 것이다.불교에 귀의한 아소카는 당대의 고승인 우바굽다의 인도로 붓다의 성지를 차례로 순례하였다. 그는 방문한 지역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기념 석주를 세워 성소를 기렸다. 이때 세워진 석주들을 ‘아소카 석주’라고 하는데, 이는 후일 현장의 인도 기행문인 『대당서역기』와 함께 붓다의 유적지를 찾고 확정하는 핵심자료가 된다.또 아소카는 붓다 입멸후 분배 받은 사리를 봉안하여 지어인 근본 8탑 중 일곱 개를 열고, 그 안의 사리를 나누어 전 인도에 8만 4천개의 탑을 건립하게 된다. 이러한 아소카왕의 진신사리 공양과 8만 4천 불탑의 건립은 인도 전역에 불교를 유포시킨다는 종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에 더 나아가 불교적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정치적 선전의 의미도 있다고 본다.그리고 동쪽 교단에만 존재하던 당시 불탑이 전 인도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동쪽 교단의 권위 축소를 의미하는데, 2차 결집을 통해 확인되는 서쪽 교단의 약진과 상호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다. 즉 붓다 입멸 후 성립된 서쪽 교단으로서는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사리’라는 붓다의 성물이, 이제는 서쪽 교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서쪽 교단이 더욱 강력하게 약진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아소카의 아들과 딸이 출가하여 스리랑카 불교의 시원을 이루는 마힌다와 상가미타는 모두 서쪽 교단의 인물이다.또한 아소카는 불교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법대관’이라는 직잭을 만들어 임명하고, 국교를 맺고 있던 모든 국가에 파견한다. 불교를 믿으라고 권하는 일종의 종교 사절으로서 ‘권진’불교의 대표적 사례라 생각한다. 아소카는 이웃나라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에까지도 ‘법대관’을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3차 결집 - 경?율?론의 삼장구조의 완성아소카 대왕이 불교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출가 환경이 좋아지자, 수행을 위해 출가하는 사람 외에도 생계를 위해 출가하는 사람들도 다수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정리하여 붓다의 가르침이 왜곡되는 것을 막고, 붓다의 가르침을 재정리하기 위해 시행한 것이 바로 3차 결집이다.
    독후감/창작| 2020.12.10| 4페이지| 2,000원| 조회(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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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의 봄의 불교 생태론적인 해석
    緣起, 모든 존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침묵의 봄』의 불교 생태론적인 해석 -- 목 차 -Ⅰ. 서론 : 春來不似春 (꽃은 피었으되 침묵하는 봄)Ⅱ. 선행연구 : 자연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불교적 인간관과 자연관을 중심으로)Ⅲ. 『침묵의 봄』 의 불교 생태론적 해석 : ‘緣起法’을 중심으로ⅰ. 인과의 법칙 : karma(행위) never loses an address(결과)ⅱ. 상호의존성의 법칙 :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ⅲ. 모든 존재는 잠시 인연에 따라 모인 가합물(假合物)일 뿐이다.Ⅳ. 결론 : 중도의 길Ⅰ. 서론 : 春來不似春 (꽃은 피었으되 침묵하는 봄)예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꿀벌의 실종”이란 제목의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내용인즉, “스트레스와 환경오염 등으로 일벌의 수가 무더기로 감소(CCD 현상)하여 아이스크림은 물론 웰빙 식품 등은 꿀벌 없이는 만들 수 없어 유럽?미국?캐나다?중국 등에서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 나섰다”는 것이다.꿀벌이 생산하는 벌꿀은 자연이 주는 식량 중에서 가공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웰빙 식품’이자 항생제등 각종 질병 치료제도 제공 한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주목하여야 할 점은 꿀벌이 인간에게 주는 또 다른 중요한 혜택이 있는데, 세계 식량의 약 90%를 공급하는 100대 농작물 중 70%가 ‘꽃가루 매개자’인 꿀벌에 의하여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과, 배 등 과일은 물론 가축이 먹는 사료 작물도 나비나 벌들이 없으면 재배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꿀벌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먹는 농작물의 70%이상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인류는 식량부족의 상황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꿀벌의 실종은 인류가 낳은 천재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 안에 멸망할 것이다”고 전망하기도 했듯이 침목의 봄이 현실화 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좋은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우리에게 ‘살충제 또는 농약’으로 잘 알려진 DDT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화학물이다. 과학기술 발전의 결과물인 이 DDT는지게 되고 각국은 DDT의 사용을 금지시키게 된다. 그러나 현재에도 인도등 개발도상국에서는 DDT를 여전히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는 DDT의 다른 형태로서의 이름(예: 가습기 살균제, 모기향)을 가진 화학물질에 노출(예 : 살충제 달걀)되어 있으며, 또한 환경 생태계의 교란으로 암을 비롯한 코로나19 팬더믹 등의 아직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는 각종 불치병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미증유의 사태인 “침묵의 봄”라는 위기가 우리 세대와 미래의 세대들에게 직면하고 있다.Ⅱ. 선행연구:자연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불교적 인간관과 자연관을 중심으로)불교는 『화엄경』에서 중생의 개념을 인간?식물?동물은 물론 생명현상이 없는 무정물까지도 부처의 성품을 가진 불성이 있다고 넓게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존재들의 끝없는 변화(순환) 가능성에 대한 시각을 열어 둔 사유 방식으로서 생명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불교에서 자연이란 일체 존재는 상호의존적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 관통되어 있는 세계이다. 불교적인 자연은 마치 인드라의 그물망과 같이 수많은 조건들이 어우러진 관계들의 연쇄로서 역동성을 가진 자기 조직적 네트워크(그물망) 이며 복잡한 비선형적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근대 서구의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투쟁적?지배적관계로 보고, 자연은 인간이 지배하여야 한다는 인간중심적 인간관관 달리 불교적 인간관은 인간과 자연을 둘로 분열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인간과 자연은 ‘상의 상관성’의 원리에 의해서 천지와 나라는 존재는 한 뿌리이며,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은 둘이 아닌 즉 만물과 나는 한 몸이라는 사상으로 통일된 한 생명으로서 큰 바다를 이루고 있는 점을 강조한다.나를 둘러싸고 있는 생태계의 구조를 보더라도, 미생물인 ‘분해자’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시체인 유기물을 분해하여 무기물화 하고, 분해된 무기물은 다시 생산자인 뿌리를 통해 녹색식물에게 다시 흡수되는 완벽한 상호의존적 순환작용을 반복하면서 생태계를 유지한다. 이곳에서 ‘소비자’인 인간은 생태계의 질서와 원리에 대한 침해의 금지를 뜻하는 것이 되고 왜곡된 생태계의 질서에 대한 시정까지도 배타적인 것이 아닌 생태계를 구성하는 그 구성원에 대한 존중이라는 同體慈悲(동체자비)의 개념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침묵의 봄』의 저자인 카슨과 불교에서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 간에 일정부분 일치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본 과제는 불교의 생태론적인 관점에서 『침묵의 봄』에 나타난 카슨의 환경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여 자연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Ⅲ. 『침묵의 봄』 의 불교 생태론적 해석 : ‘緣起法’을 중심으로ⅰ. 인과의 법칙 : karma(행위) never loses an address(결과)연기법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세계에서 일체 존재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진리로서, ‘모든 원인에는 반드시 그 결과가 따른다.’는 의미이다. 즉 ‘자업자득’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불교의 연기법은 지극히 간단하고 상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연기적인 인과의 법칙에 의거하여 저자가 말하는 『침묵의 봄』을 해석하면 “살충제들의 무분별한 사용은 해충뿐만 아니라 천적(벌과 나비, 새)을 모두 사라지게 하여 꽃은 피지 않고, 새의 지저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으며, 봄은 왔으나 지구 온난화로 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심정’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또한 카슨의 “우리의 존재는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생각보다는 여전히 자연을 정복하여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만큼 자연을 향한 전쟁은 결국 인간 자신을 향한 전쟁으로 귀결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촉발된 환경파괴라는 ‘부메랑’은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시켜 인류 종의 멸망을 초래하게 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는 불교적인 연기법 뿐 만 아니라 소박한 상식으로도 분명하게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다.ⅱ. 상호의존성의 법칙 :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그렇다면 해충을리에 따라 성립되기에, 영원불변으로 존재하는 고정된 것은 있을 수 없고(無常), 혼자만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도 있을 수 없으며(無我), 자기만의 존재로 지속되는 독립적인 실체도 있을 수 없게 된다(無自性, 空). 불교에서는 이처럼 무상성과 무아성를 특징으로 하는 상호의존성, 즉 연생성(緣生成)을 자연의 본성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은 자연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연기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카슨은 이러한 상호 의존적인 원리를 『침묵의 봄』의 여러 곳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지구 생명의 역사는 생명체와 그 환경의 상호작용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식물과 대지, 식물과 식물, 식물과 동물사이에는 절대 끊을 수 없는 친밀하고 필수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식물 역시 생명계를 구성하는 거대한 네크워크의 일부이다.” “제초제는 오직 실물에게만 독성이 있고 동물에게는 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데, 불행히도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토양은 서로 연결된 생물들로 촘촘하게 짜인 거미줄과 같다”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인간도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생계태의 일부의 구성원이기에 우리는 자연에 대하여 어떠한 행위를 할 때는 심사숙고해서 신중히 행동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살충제의 직?간접적 피해가 최종적으로 인간에게 되돌아올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을 고려한 개체주의에 입각한 인간중심적인 환경보호를 의미하기에, 근본적으로 모든 생물의 본질적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레이첼 카슨의 살충제가 아닌 자연 친화적 방법으로 해충(이마저도 인간이 부여한 등급에 의하여 인간 중심적으로 분류한 종)의 개체 수를 조절하는 방법 제시,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키지 않고 상호연결?상호의존적인 개체들의 연결망으로 본 것 등은 기존의 환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을 사실이다.ⅲ. 모든 존재는 잠시 인연에 따라 모인 가합물(假合物)일 뿐이다.살충제로 인해 한 생명은 죽음을와 종류는 다르지만 동일한 유전물질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우리는 화학시간에 원소의 주기율표를 외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주기율에 따라서 원소를 배열한 그 원소들이 현재 나의 몸과 내가 사용하는 물건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연을 비롯한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가 동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 『화엄경』에서는 “불성에는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터끌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한다. 요약하면 불교에서는 인간과 동물을 비롯한 유정물과 식물, 나무, 흙과 돌과 같은 무정물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또한 동일한 원인이 ‘어떤 인연으로 모이는가’에 따라 인간도 되고, 식물도 되고 동물이나 무정물까지 된다고 본다. 이것은 사람이나 동물등의 겉모습(정확히 말하면 표피)에만 차이가 있을 뿐 근원적으로는 유정물이나 무정물에도 근원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개체(우위)적인 조화가 아닌 관계(조건, 원인)에 조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침묵의 봄』을 재해석한다면 인간이 DDT등의 사용으로 환경을 파괴하거나 오염시키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당위성은 ‘인간’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를 구성하는 ‘중생’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Ⅳ. 결론 : 중도의 길그러면 벌과 나비가 춤을 추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생물종의 감소를 방지해야 하는 참다운 이유는, 모든 생물이 그 자체의 존재 이유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연기법의 가르침과 같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고. 모든 것은 나와 관련을 맺고 있고 서로 연결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자연과 인간은 서로 간에 지배와 종속이라는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아니라 중심성을 결여한 空한 ‘연기적인 중도’관계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연구소장
    독후감/창작| 2020.12.10| 5페이지| 2,000원| 조회(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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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과 중관의 개념적 이해
    『공과 중관』 개념적 이해Ⅰ. 서론 : 중관사상의 성립과 전개중관사상은 일반적으로 용수(150~250년경)가 확립한 중관학파의 사상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용수는 스스로를 초기 반야경전의 사상을 해명하고, 공의 논증에 노력한 공성론자라고 지칭했다. 그러므로 실제로 중관학파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사용했던 것을 용수가 아니라 청변(490~570년경)이다. 그러므로 용수의 위치는 역사적 내지 사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중관학파의 비조이자 유식학파의 비조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중관사상이란 무엇인가? 중관사상이란 ‘중도(majjhim? pa?ipad?, 中道)를 관찰하는 불교의 사상’을 말한다. 그것은 초기불교에서 유래하는 비유비무의 중도설을 기초로 하는 불교사상(=중도사상)을 확대한 것이 되지만, 일반적으로 ‘중관사상’이라고 하면 용수의 『중관론』, 즉 『중론』에 입각한 사상‘, 혹은 그런 흐름을 형성한 학파인 ’중관파의 사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그리고 중관사상은 시대적으로 초기와 중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 된다. 초기(2-5세기)의 중관 사상은 중관파의 성립 이전으로서, 용수의 『중론』 그에 대한 논서 및 초기의 『중론』 주석서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시대이다. 한편 중기(6세기 전반)와 후기(8세기 이후)는 티베트의 전승에 따르면 중관학파가 학파로서 성립하며, 청변에 의해 형성된 경량부중관파와 적호(725-784)와 연화계(740-797)를 중심으로 하는 유가행 중관파의 학설이 성립한 시대를 말한다.초기 중관학파의 논사인 용수는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하여, 부파불교의 법유론과 비불교학파들의 실재론을 비판하고, 일체법은 공이고 중도라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여 중관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용수(150-250) 이후에 나타난 유식학파는 識과 空性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오히려 일체법을 공이라고 주장하는 중관사상을 허무론이라 비판한다. 이에 청변(500-570)과 월칭(600-650)의 중기 중관학파와 적호9680-740)등의 후기 중관학파는 다시 부파불교의 어 있는 자성’은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자성은 독자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경량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여러 법이 ‘인 과 연에 따라 자체를 얻는 것’ 과 ‘ 자체를 얻자마자 곧바로 소멸하여 비존재가 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3) 무자성과 공본래 공(??nyat?)이라는 용어는 ‘결여한, 공허한, 텅 빈, 쓸모없는, 황량한, 없는’등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색은 공이다 rupam sunyam’라는 『반야경』의 문구에 적용하면 곧 ‘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공이라고 주장하는 중관학파는 흔히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허무론자라고 비판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팔천송반야경』은 일반적으로 위와 같은 형식으로 공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일만팔천송반야경』이나 『이만오천송반야경』 등에서는 공을 표현하는 형식이 달라지는데, ‘자성으로(=자성이라는 점에서) 라는 한정어를 부가해서 공을 표현한다. 즉 ’색은 공이다‘라고 말했던 것을 ’색은 자성으로(=자성이라는 점에서) 공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색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자성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또 『일만팔천송반야경』이나 『이만오천송반야경』 등에서는 ‘색의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은 무자체이다. rupasya svabhavo nasti yasya svabhavo nasti sobhavah’ ‘복합인 것의 자성인 것, 그것은 무자체이다.’ ‘여러 법의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일체법은 무자체이다’라는 표현도 발견되는데, 이럴 경우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n?sti ’라고 말해지는 것은 색 r?pa과 법dharma가 아니라 자성(Svabh?va, 自體, 自性)이라는 것이다.그리고 연기인 사물은 모두 무자성이라고 말하며. 연기인 사물의 특징은 자성의 결여이며, 그것이 바로 용수가 설하는 공이다. 그렇다고 ‘공인 것’이라는 사물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공도 또한 공이라고 말하고, 중생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 다면 세속제란 무엇인가? 세속제(sa?v?ti-satya)란 승의제와 함께 二諦, 즉 ‘두 가지 진리’라고 말해진다. 세속제의 문자적 의미는 ‘세간에서 통용되는 진리’라는 의미이고, 승의제(param?rtha-satya)의 문자적 의미는 ‘가장 뛰어난 의미의 진리’라는 의미이다.승의제?緣生法으로서의 存在의 實相 그 자체. 그것은 戱論을 넘어서 있다.세속제? 緣生法? 緣生法에 대한 言語的 表現, 즉 ‘緣生法을 色法, 心法 등으로 부르는 것’? 緣生法인 존재의 실상에 대한 각종 언어 표현들. 즉 ‘일체법은 無自性이다. 일체법은 空性이다. 일체법은 假名이다.’라는 언어 표현들.월칭의 『중송』 제1장 제1송에 대한 주석에 의하면 세속제는 다시 요의설과 불요의설로 구분된다. 즉 일체법의 무자성이나 공성에 대한 가르침은 언어로 설해진 것이기 때문에 세속제이지만, 승의제에 근거해서 설해진 것이기 때문에 요의설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팔불 중도에서 설하는 불생불멸도 언어로 설해진 것이기 때문에 세속제에 속하지만, 그것도 역시 승의제에 근거해서 설해진 것이기 때문에 요의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월칭은 용수는 『중송』 제24장 제10송의 “세간의 언설에 의지하지 않으면 승의는 가르쳐 질 수 없다. 승의에 도달하지 않으면 열반은 증득되지 않는다.(24-10)”를 근거로 하여 용수는 세속제에 의지하여 승의제가 설해지며, 승의제에 도달함으로써 열반을 증득하게 된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월칭의 주석에 따라 용수의 이제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승의제?무자성, 언표 불가능한 공의 진실 그 자체(空性)세속제요의설?道科(해탈)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설해진 무자성, 공, 가명 중도, 불생 등의 가르침들불요의설? 佛道에 입문하도록 하기 위해서 설해진 12연기설, 상호의존적 연기설, 사성제 등의 가르침이제설과 열반의 성취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수행자는 12연설과 상호의존적 연기설이라는 불요의설을 통하여, 무자성?공?가명?중도 등의 요의설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요의설에 대한 반복해석의 차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연화계는 『중관광명론』 제1장에서 일체법의 무아와 무자성성이라는 진실이 직접 지각(現量, pratyak?a)에 의해서 이해된다는 사실과 무자성성을 이해하는 직접 지각은 올바른 인식수단pram?na으로 성립함을 논증한다. 연화계는 이것을 논증하기 위하여 법칭의 무지각 이론에 의지한다. 법칭의 무지각 이론의 중심 사고는 감관의 장애등이 없는 어떤 사람이 어떤 장소와 어떤 시간에 어떤 대상을 지각하기에 적당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것을 지각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이 ‘ 그 대상은 비존재’라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데에 있다.그러므로 연화계의 무지각이론을 살펴보기에 앞서, 법칭의 논증식과 관련된 몇 가지 이론적 개념을 살펴보기로 한다. 법칭의 『니야야빈두』에 의하면 因의 三相으로서 주제소속성? 동품정유성?이품변유성등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올바른 논증인 이라는 지위를 얻게 된다. 이것을 표로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① 主題所屬性이란, 논증인이 주장의 주제에 소속해야 한다는 조건으로서 논증인은 추리의 대상의 전부에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확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② 同品定有性이란 논증인이 동류에는 존재해야 한다는 조건으로서 논증인은 동류(sapak?a, 同品)에만 존재한다는 것이 확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③ 異品遍無性이란, 논증인이 異類에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서, 논증인은 동류가 아닌 것(vipak?a)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이것을 진나의 3지 작법과 관련시켜 법칭의 因의 三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宗 pratijn?, 因 hetu, 誘 d????nta or ud?hara?a진나(디그나가)의 3지 작법법칭(다르마 키르티)宗=주장명제모든 소리는 무상하다主題所屬性소리는 주제지어진 것(소작성)은 논증인因=이유명제 hetu지어진 것(小作性)이기 때문에諭=위례(실례) 명제수반명제[同品,同喩]모든 지어진 (소작성) 것은 특징의 공성을 논증하기 위하여,① 법칭의 이론을 세속적 진리의 영역에서 따르면서도(세속적인 자성의 존재를 假有로 인정하면서도)② 그 적용범위를 확대하여, 법칭의 이론과 일체법의 무자성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중관파의 철학적 계획을 양립시키려 했다.?카말라실라의 중관사상의 핵심은 명상의 힘에 의해서 眞實知를 확정하고 眞實知를 얻는 것이다.요컨대, 연화계는 법칭의 이론을 세속적 진리의 영역에서도 따르면서도 그 적용 범위를 확대하여, 법칭의 이론과 일체법의 무자성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중관파의 철학적 계획을 양립시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2종의 부정에 대하여▣ 2종의 부정?paryudasa :상대적 부정, 배제부정, 정립적 부정, 명사의 부정예) 여기에는 바라문이 아닌 사람이 있다※ 바라문이(명사적) 아닌(부정) → 여기에는 바라문 이외의 크샤트리아나 바이샤 그리고 수드라가 있음을 의도 → 그러므로 크샤트리아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 결국 A의 부정은 비A의 긍정을 함의 O (다른 존재의 성립을 함의O)?prasajya-pratisedha :절대적 부정, 긍정적 진술의 부정, 비정립적 부정, 명제적 부정, 순수 부정예) 여기에는 바라문이 있지 않다.※ ~ 않다(동사에 부여되어 있는 문장 전체를 부정) → 단지 바라문의 존재를 부정할 뿐 그 외에 크샤트리아등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의도하고 있지 않는 경우 → 그러므로 크샤트리아등이 반드시 있다고 할 수 없다. → 바라문은 없지만 크샤트리아등이 있는 경우 또는 바라문과 크샤트리아 모두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 결국 A의 부정은 비A의 긍정을 함의하지 X (다른 존재의 성립을 함의X)ⅴ. 즈냐나가르바(700-760)의 중관사상본장에서는 그의 진작이라고 인정되는 『이제 분별론』을 통하여 즈냐나가르바의 중관사상을 밝혀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즈냐냐가르바가 논하는 이제 가운데 승의제란 어떤 것인가? 離戱論 ? 不可言說 즉 ‘일체의 희론을 떠나 있고, 언어표현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즈냐냐가르바는 있다0.
    인문/어학| 2020.12.10| 15페이지| 2,000원| 조회(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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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淨土란 무엇인가
    淨土란 무엇인가?-淨土의 개념에 대한 고찰-目 次-Ⅰ. 國土와 淨土의 意義 (1p)II. 淨土란 무엇인가? (2p)ⅰ) 槪括的인 정의 와 명칭ⅱ) 具體的인 「淨土」의 의미의 고찰1) 淨土의 「土」에 대한 해석 : 佛土의 意義2) 淨土의 ?淨?에 대한 해석(1) 淸淨한 國土의 意義 : ?淨?이 “동사”로 해석하는 경우(2) 國土를 맑히는 意義 : ?淨?이 “형용사”로 해석하는 경우Ⅲ. 淨土의 종류 (5p)ⅰ) 等位 淨土ⅱ) 場所 淨土Ⅳ. 諸佛의 淨土의 유형 (7p)ⅰ) 他方 淨土ⅱ) 十方 淨土ⅲ) 靈場 淨土ⅳ) 汎神論的 淨土ⅴ) 唯心 淨土Ⅴ. 맺는말 (11p)* 참고문헌 (12p)Ⅰ. 國土와 淨土의 意義국토(國土, Ksetra)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토지나 영역을 말하지만,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有情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음역으로는 ‘刹多羅’이고 의역으로는 ‘土’이다. 그래서 음역의 축약형인 ‘찰’과 의역의 ‘토’를 합하여 ‘찰토’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국토에서의 ‘토’는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즉 깨달은 불보살이 거주하는 세계이면 정토(淨土,Sukh?vati) 또는 불토(佛土, Buddha-Ksetra)가 되고, 반재로 어리석은 범부들이 거주하는 세계이면 예토(穢土)가 된다. 정토는 이러한 국토에서 구분된 용어이다. 이와 같이 정토란 삼독의 번뇌를 여윈 깨달음의 경지에 든 제불보살이 머무는 청정한 서계를 이르는 말이다.정토란 ‘깨끗한 땅’ 또는 ‘淸淨한 佛國土’라는 뜻이다. 대승불교사상에서 보살이 理想鄕으로 추구하는 세계가 淨土다. 그런데 淨土 觀은 經에 따라서, 논사에 따라서, 또 시대에 따라서 각양각색으로 다르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淨土」라는 의미를 크게 나누어 보면 일반적으로 淨土敎學에서 말하는 淨土는 넓은 의미의 정토와 좁은 의미의 정토로 나눌 수 있다. 廣義로는 諸經論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러 佛國土를 의미하며, 狹義로는 無 量壽?無量光이신 아미타불께서 상주하시는 서방극락정토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협의의 淨土 개념에 주안점표현으로 하면 淨刹?淨界?淨國?淨土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오직 이름일 뿐 ‘청정한 불국토’는 하나일 뿐이다. 그 하나는 특정한 장소에 있을까? 아니면 오직 마음에 있을까?ⅱ) 具體的인 「淨土」의 의미의 고찰1) 淨土의 「土」에 대한 해석 : 佛土의 意義먼저 淨土의 ?土?는 국토 또는 세계라는 의미인데 淨 土와 佛土?穢土라고 하여 깨달은 부처님이 거주하는 국토?나 라?세계?刹?淨國?淨刹이라는 의미와 미혹한 중생이 사는 穢 土?堪土?忍土?娑婆世界라는 의미가 있다 . 즉 , 佛土라는 의미 에는 깨달은 부처님이 거주하시는 세계와 오염되고 미혹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출현하신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 佛國土인데, 이는 淨과 穢를 가리지 않고 부처님이 머무시는 세계인데 반해서 淨土는 부처님의 本願力 에 의해서 이루어진 청정하고 평안하고 즐겁고 행복한 세계라는 것이다.2) 淨土의 ?淨?에 대한 해석다음에 淨의 의미를 해석하는 경우에도 淨을 동사로 해석하는 경우와 형용사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1) 淸淨한 國土의 意義 : ?淨?이 “동사”로 해석하는 경우다음에 淨의 의미를 해석하는 경우에도 淨을 동사로 해석하는 경우와 형용사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 먼저 동사로 해석하는 경우는 국토를 “청정하게 한다. 맑게 한다 .정화한다. ”는 clear 와 purify 의 의미가 있다. 여기에는 ① 중생이 사는 세계를 맑게 하여 청정한 나라로 만든다는 것과, ② 이 세상과는 다른 청정한 국토를 건설하여 그 곳으로 중생을 인도한다는 두 가지 의미이다. ①의 경우는 현세에서 부처님의 교화활동 주로 대승보살들의 중생제도와 수행을 말하는데, 방광반야경 에서는 중생의 三 業을 깨끗이 하는 것이 바로 국토를 청정하게 한다는 것이며 , 그실천덕목이 六波羅密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정토를 깨끗이 한다는 것은 바로 대승보살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또 ②의 경우 이세계는 五濁惡世로 고통이 극심하여 수행이 용이하지 못하므로 과거 법장비구가 보살행을 에 따라 다른데 一乘에 依하면 阿彌陀土는 世界海에 屬한다. 왜냐하면 初根機의 사람을 가까이 이끌어 信敎의 境界를 이루고자 함이며 眞實한 佛國은 圓融하여 不可說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다시 말하면, 一乘의 淨土는 오직 世界海와 國土海 둘 뿐인데 彌陀의 淨土는 世界海에 屬한다는 것이다. 三乘에 의하면 西方淨土는 實報處로써 ① 法性土 ② 事淨土 ③ 實報土 ④ 化淨土의 四種 淨土가 있다고 智儼은 설명하고 있다. 智儼이 말하는 이들 四種 淨土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떠한 淨土인가. 智儼은 ?『孔目章』의 十種淨土章에서 정토에 化淨土, 事淨土, 實報淨土, 法性淨土의 네 가지가 있다. 化淨土란 化現所有의 淨土를 말하며, 事淨土란 所謂 衆寶所成의 淨土를 말한다. 그리고 實報土란 理行所成의 淨土, 즉 18圓滿莊嚴에 依해 成就된 淨土를 말하며, 法性土란 眞如의 淨土를 말한다.智儼은 이상과 같이 等位에 따라 四種의 淨土를 말하고 있는데, 法藏은 ?『探玄記』? 卷3에서 三種의 淨土에 대하여, 즉 攝化의 處에 約하면 三種의 세계가 있는데, ‘第一 類는 須彌山界 내지 樹形世界等으로서 一切衆生의 세계이며, 第二類는 世界性 世界海 世界相 등의 十世界로써 轉輪王의 세계이며, 第三類는 蓮華藏莊嚴世界로써 佛陀의 世界이다’라고 法藏은 말하고 있다.法藏은 三種 世界 중 蓮華藏莊嚴世界는 佛陀만이 住하는 最高의 淨土로 보고 있다.上述한 바와 같이 等位的 淨土는 居住人의 等位에 따라서 다르고, 大?小乘 혹은 一乘?三乘의 立場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함을 알 수 있다.여기서 1가지 주목되는 것은 西方淨土와 蓮華藏莊嚴世界에 대한 智儼과 法藏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智儼은 三乘에 의하면 西方淨土는 實報處라고 했는데, 이 實報 處는 그가 말하는 四種 淨土, 즉 化淨土?事淨土?實報淨土?法性淨土 가운데 最高位의 法性淨土가 아니라 第三位의 淨土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智儼은 西方淨土는 四種淨土 가운데 第三의 實報淨土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는 반면 法藏은, 蓮華藏莊嚴世界는 그가 말하는 소위 三種世界 중 最高位인 佛境界의 설함에 있어 東西南北과 四 維와 上下의 十方國土를 말하고 있다.?華嚴經? 『盧舍那佛品』 에서도 十方의 淨土를 말하고 있다. 『관정경(灌頂經)』에서도 命終者가 임종 일에 十方의 국토에 왕생하기를 願하면 그는 그 원에 따라 왕생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서?남?북과 四維와 상?하의 十方 淨土를 말하고 있다.ⅲ) 靈場 淨土이것은 生身의 佛, 또는 보살이 이전에도 거주하고 또 현재에도 계신다고 믿어지는 靈地靈場을 가지고 정토라고 하는 신앙이다. 이것에는 인도, 중국, 한국, 일본에 있어서 관음의 영장인 補陀落을 가지고 補陀落淨土라고 하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정토로 아촉불과 미륵보살의 정토가 이 세계를 멀리 떠난 타방세계에 있다고 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신앙 및 석존이 永年居住하신 인도 영취산을 가지고 靈山정토라고 말하는데 이 영축산을 가지고 정토라 하게 된 것은 『법화경』에 있는 듯하다.ⅳ) 汎神論的 淨土범신론적 정토란 『화엄경』등에서 설하는 연화장세계를 말한다. 연화장 세계는 비로자나불의 정토라고 하며, 전 우주가 연화에 쌓여 있는 정토라고 생각하는 설이다. 이는 결국 생각하기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연화에 비유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청정법계 두두물물이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는 화엄의 가르침을 깨달으면 이 사바세계가 곧 연화장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세계를 달리 ‘蓮華藏莊嚴世界海’라고 하고 ‘華藏藏世界’라고도 하는데, 이를 80권 『화엄경』 「화장세계품」과 60권 『화엄경』 「노사나불품」에서 설하는 이와 같이 연화장세계는 노사나불이 서원을 세워 보살도를 닦아 장엄한 세계라고 하였다. 이러한 화엄의 정토설이 범신론적인 정토설이다.ⅴ) 唯心 淨土唯心淨土란, 等位的인 淨土나 場所的인 淨土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고 보는 설이다. 유심정토에 관해 설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에 ?維摩經?이 있다. ?『維摩經』? 卷上 「佛國品」에, ‘만일 菩薩이 淨土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 마음이 淸淨함에 따라 곧 佛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차인연 공덕으로 서방정토 극락세계 태어나서아미타불 친견하고 무생법인 이룬 뒤에한량 없는 보살도를 행하여서무량중생 제도하게 하여 지이다 -?참고문헌-.坪井俊映 著ㆍ한보광 역, 정토교개론 , 如來藏, 2004, pp.16~42. 참조-.정광균(법상 스님, 동국대학교), 『禪 과 淨土』, 韓國禪學 제22호, 2009.04, 11-58-.이행구(도업), 『제불의 정토에 대하여』,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2010.12) 제14호,-.지관 편저, 『釋林』 (2권)-.현송 지음, 『정토불교의 역사와 사상』, 운주사, 2014,-.山喜房佛書林,『香川孝雄 정토교의성립사적연구』, 일본, 1993, p.174.-.慧遠, 『大乘義章』1) 지관 편저, 『釋林』 (2권) p.605 참조.2) 현송 지음, 『정토불교의 역사와 사상』, 운주사, 2014, p.49.3) 현송 지음, 『정토불교의 역사와 사상』, 운주사, 2014, pp.37~38.4) 山喜房佛書林,『香川孝雄 정토교의성립사적연구』, 일본, 1993, p.174.5) 이행구(도업), 『제불의 정토에 대하여』, 한국정토학회, 정토학연구(2010.12) 제14호, pp.9-45.6) 慧遠, 『大乘義章』권 19, 『演土義』 (『大正藏』, p.883상),“言演士者 經中或 時名佛刺 或稱佛界 或云佛國 或言佛士 或復說爲淨刹淨界淨國淨土”7) 보적 장자여, 마땅히 알아라. (1) 直心이 곧 보살의 정토니라. 보살이 성불할 때에, 비굴하지 않은(不 諂) 중생은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날 것이다. (2) 菩提心이 곧 보살의 정토니라. 보살이 성불할 때에, 大乘 중생은 그나라에 와 태어날 것이다. (3) 布施가 보살의 정토니라. 보살이 성불할 때에, 일체를 능히 버린 중생은 그 나라에 와 태어날 것이다. (4) 持戒가 보살의 정토니라. 보살이 성불할 때에, 十善道를 실천하고 願이 충만한 중생은 그 나라에 와 태어날 것이다. (5) 忍辱이 보살의 정토니라. 보살이 성불할 때에, 32상을 장엄한 중생은 그 나라에 와 태어날上
    인문/어학| 2019.06.12| 12페이지| 2,000원| 조회(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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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淨土新行의 요체
    淨土新行의 요체에 관하여 논함Ⅰ. 들어가며 (1p)Ⅱ. 阿彌陀佛 신앙과 극락 왕생 (2p)(1). 아미타불 신앙(2). 극락왕생Ⅲ. 淨土 염불수행 (5p)(1). 정토신앙의 요체(2). 정토염불 수행의 사상적 근거(3). 염불수행의 종류Ⅳ. 本願의 의미 (8p)(1). 總願과 別願(2). 阿彌陀佛의 本願Ⅴ. 결론 (10p)*참고문헌Ⅰ. 들어가며淨土思想에 있어서 중요시하는 用語는 極樂과 阿彌陀佛? 本願思想? 信行? 不退轉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즉, 南無阿彌陀佛을 염불하여 극락정토에 往生하는 것이 정토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往生은 아미타불의 本願에 의해서 가능하며, 그것은 바로 부처님과 보살의 본질인 중생을 구제하지 않을 수없는 同體大悲의 智慧와 慈悲가 阿彌陀佛의 本願을 통해서 중생에게 회향되어지고 왕생한 보살은 바로 不退轉의 경지로 이끌어지는 것을 의미 한다. 그러므로 阿彌陀佛에게 귀의함으로써 아미타 불의本願이란 원동력을 통해 중생에게 베풀어지는 구제의 기연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南無阿彌陀佛이란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말이다. 산스크리트로는 無量光인 Namo amit?bha 와 無量壽 라는 Namo amit?yus 이다.‘Namas’는 귀의한다는 말이며, ‘a’는 否定의 의미를 지닌 접두사 無이며, ‘mita’ 는 헤아린다는 量이다. ‘-abha’는 光明이며, ‘-ayus’ 는 生命?壽를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南無阿彌陀佛?이라고 하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 光明에 귀의합니다.’, ‘헤아릴 수없는 生命에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말이다. ‘無限光明 또는 無量光에 귀의하고, 無限生命 혹은 無量壽에 귀의한다.’고 하는 말은, 法 (dharma)에 귀의하는 것이며, ‘眞理 그 자체에 귀의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중생들의 身?口?意 三業을 총동원하여 진리 그 자체에 귀의하는 것이 바로 ?南無阿彌陀佛?이다.그것은 절대적인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염불하는 것이다. 無量壽經 에서는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佛 어떻게 가는가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아미타불의 본원을 확고하게 믿는 것을 전제로 발원하고 염불수행해서 왕생한다는 것이다.(1). 아미타불 신앙정교교학에서 신앙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은 본래 명호가 무량광불(Amit?bha)과 무량수불(Amit?yus)이다. 이는 아미타불에 대한 위신력(tath?gatasyaa?ubh?va)을 표방하는 내용으로 지혜와 자비를 함께 구비한 무한한 광명과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거기에다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은 아침마다 조반 식사 전에 시방세계 일체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공덕과 48대원의 회향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이란 명호에는 시방 제불의 숫자와 더불어 동일한 의미를 구비하고, 무량한 공덕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이란 명호만 일컬어 불러도 중생은 구제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갖춰진 48가지 원력과 서원 에서 기인하고 일체중생에게 모든 발원과 수행의 공덕이 회향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동시에 스스로는 무량한 지혜의 광명과 무량한 수명을 갖춘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인 아미타불이라고 되어 있다. 이 무량수불의 덕을 『무량수경』 에서는 ‘광명의 붓다’로서 나타내고 있다. 이 광명의 붓다라는 것은 인도의 세친 보살이 아미타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점이 되었다고 한다.이 아미타불의 광명을 이 땅의 일체중생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감득될 수 있으며, 아미타여래의 자비광명을 의지하여 깊은 믿음을 내어 간절하게 일컬어 염하고 견불과 왕생을 발원함으로써 우리 중생은 구제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래의 불가사의하고 걸림이 없는 광명에 자기가 그 광명을 받고 있다는 체험이 정토신앙의 중핵이다. 또한 우리는 아미타부처님께 ‘당신의 자비광명을 攝取(섭수)한 우리 마음을 항상 비추어 보호해주소서!’라고 발원하고, 또 ‘우리가 번뇌에 눈이 가리어 비록 볼 수 없고 대비하신 성력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항상 우리를 비추십니다.’라는 믿음이 가장 정토신또는 本願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體들의 능력이나 역량은 本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莊嚴과 願力은 서로 연관시켜 생각해 보아야할 내용이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부처님께서 48대원을 세워 이룩한 정토의 기세간 청정공덕장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락정토는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48대원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세에서 가장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보물들인 칠보의 가로수와 연못과 연꽃과 누각과 갖가지 진리를 설하는 새들의 17가지 기세간청정장엄과 12가지 중생세간청정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양자를 합쳐서 29종의 장엄공덕이라 한다. 17종의 기세간청정이란 안락국의 국토에 공덕의 청정성을 말한다. 다음으로 12종의 중생세간청정이란 안락국의 중생, 즉 아미타불과 보살들의 공덕의 청정성을 말한다. 이와 같이 29종 장엄은 안락국이 국토와 불보살이 모두 청정한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며 극락이 청정세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량수경』?이 법장보살의 원행이라고 하는 因의 청정을 설함에 대해서 『정토론』에서는 한 걸음 나아가 극락이라고 하는 果가 청정함을 명백히 하고 있다. 여기에 ?『무량수경』보다 일보 진보된 입장이 보여진다.그리고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의미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현생에서 견불하여 견도하거나 견성하여 자성의 본질을 깨달아 청정을 구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실제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정정취에 머물면서 不退轉에 올라 삼법인을 얻고 구경에 일생보처에 이르러 성불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극락에 왕생하는 수행은 삼배와 삼복을 수행하거나 아미타불께서 구제하려는 48본원을 지극하게 믿고 일심불란하게 염불하면서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일체의 선근복덕을 회향함으로써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Ⅲ. 淨土 염불수행(1). 정토신앙의 요체정토신앙의 요체는 “南無阿彌陀佛”을 믿고 염하여 극락정토에 往生하는 것이다. 중생의 往生은 아미타불의 本願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본질인 중생을 구제하지 않을 수 없는 同體大悲의 智慧와 쉽게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극락에 왕생한 그자체가 불퇴전의 경지이고 열반세계이기 때문에 無上正等正覺하여 成佛로 직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정토삼부경을 비롯한 여러 대승경전에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염불하는 지향점이 비록 見佛과 極樂往生일지라도 결국에는 佛性을 개현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극락에 왕생하려면 至心信樂하여 欲生我國하려고 적어도 ‘十念’해야한다고 역설한다. 또 是心作佛이면 是心是佛이기에 無上正等正覺을 완성한다고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생의 현실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불보살과 선지식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천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3). 염불수행의 종류염불수행자가 외치는 “나모아미타불”이란 聖音은 우주라는 본래불의 창고에 간직되는 깨달음의 근원이고 씨앗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8만4천의 법음이 저장된 제일의 창고도 우주법계이다. 그래서 인연이 성숙되면 수행자가 극락왕생하기도 하고 깨달음의 씨앗을 심어놓은 것이 발아되어 싹이 돋아나 꽃을 피워 열반의 결실을 맺기도 한다. 그리하여 열반이 구체화된 극락에서 성불의 대망을 완성하게 한다. 이러한 수행법은 일차적으로 三味를 얻는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禪觀의 하나로 염불을 가지고 관상하는 수행을 삼아 일종의 三味思 想의 하나임을 나타낸다. 또는 부처님의 덕을 觀想하거나 부처님의 名號를 稱念하는 삼매로 因行과 成果 두 가지를 이룬다.먼저 念佛三味의 因行인데 一心으로 부처님의 相好를 관하거나 혹은 一心으로 法身의 實相을 관하는 것을 지칭한다. 다음에 모두 觀想念佛과는 그반대가 되는데 一心으로 부처님의 名號를 일컬으면 곧 稱名念佛이 된다. 다음에 念佛三味의 成果란 앞에서 말한 因行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마음으로 선정에 들어가면 般母三味인 觀佛三味로 佛身을 親見한다. 念佛三味의 因行은 닦는다는 것이고l念 佛三味의 成果는 갖가지 삼매를 얻는 것(prapti)을 말한다 『觀無量壽佛經』에서는 다시 無量壽佛의 身相光明를 觀함에 그 광명의 相好와 더불어 化身佛은정진의 길을 찾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 보살의 본원사상의 일반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보살의 總願이라고 하는 것이다. 보살의 總願은 그 전형적인 것으로 四弘誓願이 알려져 있다. 이 사홍서원의 설에 대해서 최초로 이야기한 사람은 중국 양나라 법운(法雲,467~529)이다. 이 네 가지가 보살이 실천수행 해야 할 서원이다. 이 사홍서원은 여러 종파에서 약간씩의 변형이 있지만 기본형은 같다. 그것은 度斷知證이다.이에 대해 別願은 불보살이 각각 독자적으로 세우는 서원을 말한다. 예를 들면 『비화경』에서 설하는 석가모니불의 500대원, 『미륵보살소문본원경』에서 설하는 미륵보살의 10가지 본원, 『아촉불국경』에서 설하는 아촉불의 20대원, 『약사여래본원경』에서 설하는 12대원, 『무량수경』에서 설하는 법장보살이 세운 48대원 등이 그 예이다. 이는 모두 독자적으로 세우는 서원이기 때문에 별원이라고 한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서원이 아미타불의 48대원이다.(2). 阿彌陀佛의 本願本願사상이란 부처님에 의해서 자각된 智慧와 慈悲의 두 가지 정신 가운데 특히 慈悲의 측면이 아미타불의 본원이라고 하는 형식을 취해 표현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지혜와 자비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는 형태로 이른바 보살도를 형성했지만 정토교학에서는 법장보살의 서원과 그 성취라고 하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법장보살은 그런 의미로 보살도 실천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량수경』의 마지막 부분, 『아미타경』, 『육방단』등의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이 本願은 믿고 받아들이기에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아미타불의 본원은 중생구제를 위한 것이며 부처님이 자각된 지혜와 자비 가운데에서 자비의 정신이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현세이익을 위해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왕생을 목적으로 염불 하는 것도 참된 종교심은 아니다. 진정한 종교는 자기의 변환 생명의 혁신을 구하는 것이다. 중생구제의 원은 방대하지만 사람들에게 신심과 염불을 요구한다. 그러나 년 2월
    인문/어학| 2019.06.12| 10페이지| 2,000원| 조회(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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