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느님을 알기 전부터 하느님은 나를 알고 계셨다. 이것은 내가 살아온 삶에 녹아있는 확실한 증언이다.어렸을 때, 나는 아직 성전이 없는 가건물에서 미사를 드리는 성당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아홉 살 때였다. 어머니 손을 떠나, 어떤 방에 들어가면 내 또래의 친구들이 있었고, 조금 뒤에 엄마 또래처럼 보이는 여인들에게서 빵과 음료수를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빵과 음료수를 먹으면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가정에서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와서 그 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마음이 차분해 지고, 깊게 생각하게 되고, 왠지 또 오고 싶은 마음을 무얼까? 초등학교 2학년의 마음에는 그저 빵과 음료수가 좋았고, 그래서 또 오고 싶었겠다.초등학교 때에 기억은 학교에서의 기억보단 성당에서 만났던 친구들과의 기억이 더 오래 남아 있다. 즐거움이 있었고, 자유가 있었다. 그러고 선생님들의 친절함에 마음이 너무 편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직 꼴을 갖추지 않은 상태, 카오스의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아직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새기지 않고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성당에 다니는 깨끗한 마음이 무한한 상태이다.성전은 지어졌고, 우리 반은 연극을 준비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에는 모든 죄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노아만을 남겨 놓고 세상의 모든 것을 홍수로 쓸어버리셨다. 나는 죄 중에 폭력을 담당하였다. 친구와 싸우는 연출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내 의지가 아닌, 선생님이 시켜서 했던 것이었지만, 폭력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폭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겨자 씨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여름 방학 때의 일이었다. 장난끼가 많았던 나는 여동생에게 장난을 치다가 여동생을 울려버렸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매우 혼났다. 나의 장난끼는 부모님을 부담스럽게 할 정도였다. 나는 어머니께 혼날 때면 너무 외로웠다. 집에 있기가 싫었다. 용돈도 못 받 거 사줄 수 있잖아.’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번엔 악마의 음성을 따랐다. 아까의 하느님께서 음성으로 말씀 하셨을 때에는 망설였지만, 악마의 음성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재 빨리 발을 옮기어 그네 있는 곳으로 뛰었다. 열심히 뛰어 갔는데, 이번에 어떤 초등학생 형들이 돈을 주웠다며 즐거워하였다. 나는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보다 덩치가 컸고, 그들은 기쁨의 환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악마가 들어왔다. 분노가 가득했다.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라는 마음의 외침도 외면하고, 악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이 날부터 내 인생의 마음의 고난은 시작된 것 같다.주일 오전 9시에 청소년 미사가 있었다. 그런데 성당에서는 왠지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미사가 끝나면 교리실에 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에 왠지 모를 기쁨에 점프하며 전봇대 옆을 뛰어 올랐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면서 여동생이 미워서 여동생을 때렸다. 여동생은 울었고, 장보러 나갔다가 돌아오신 어머니께 호되게 혼났다. 나는 괴로웠고, 성당을 다녀와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다시는 성당을 가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 때에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자발적으로 냉담의 길을 가게 되었고, 악의 유혹에 주도적으로 넘어갔다.냉담의 시간은 흘러, 중학교에 들어갔고, 중학교 때에 좋았던 성적으로 명문고에 입학하였다. 고등학교 때의 시간은 정말 내 몸과 마음을 악마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시기였다. 공부에는 관심도 없었고, 어둠의 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어둠의 세계에서 직장도 구하고 그렇게 살아갈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두 가지 사건이 나를 어둠에서 서서히 부상하게 하였다.첫 번째 사건은 내 힘이 최고라고 스스로 과신 하였던 때에, 학급 친구들이랑 운동을 하면서 몸싸움에서 밀렸던 사건, 아이들과 힘으로 경쟁하였을 때에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내렸다.날이 저물고 하룻 밤을 보내고, 이튿 날 나에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하룻 밤을 머물고, 우리는 조금 나병 환우에 대해 선입견이 조금 없어질 때에 마을 청년과 마주친 것이다. 그 청년은 오십 대였고, 자신 포함 가족들이 모두 나병에 걸렸다고 하며, 할아버지 때부터 몇 년도에 소록도에 입도 하였다고 하며, 자신의 뭉드러진 손을 나에게 한번 보라며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악수를 청하기에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주변에서 걱정을 했지만, 그 손을 잡는 순간, 그 청년은 감격스러운 말로 저녁에 우리를 위해서 돼지를 잡아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예수님을 느꼈다. 확실히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그 나병 환우의 손을 잡았다고 느꼈다. 나에게도 전해진 그 감동은 손을 잡는 순간 통하였다. 그 느낌을 손에 안은 채, 나병 환자도 똑 같은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 없어졌다.마지막 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그 때의 감동을 잊을 수 가 없었고, 내 삶은 변화되었다. 그러나 아직 어둠에서 완전히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광야에 사십 년간 머물게 하시어, 새 민족들만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셨듯이, 나의 어둠이 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아직 광야에 머물고 있던 것이었다.그 때에 고3 수능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그런데 나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있던 터라, 대학은 꿈에도 꾸질 못했다. 그 와중에 나는 수도원 다큐멘터리를 보았고,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였다. 그리고 너무도 무지 했던지, 정보가 없었던지,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만 열심히 하면 성직자가 될 수 있다는 개신교 성도인 큰고모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을 펼쳐 보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 보았지만, 온통 내가 싫어하는 글씨 밖에 없었다. 몇 줄 읽다가 성경을 덮었다. 성경 공부는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성경 대신에 기도를 했다. ‘표회에서 베이스 솔로부분을 맡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렇게 세례를 받고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좋은 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 대학을 아무 대도 못 가고, 외국에서는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꿈 때문에, 태평양 건너 8,447km 거리에 있는 캐나다로 무작정 유학을 떠났다.한국에서 못 했던 공부를 캐나다에서는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떠났지만, 공부가 몸에 베이지 않은 상태에서 떠난 것이라, 가장 위험하게도 그 곳에서도 방황을 하였다. 학교를 두 번 옮기고, 적응을 제대로 못해서, 급하게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 경우다. 원했던 대학교 못 갔고, 군대도 다녀오질 않아서, 병역 문제가 있었고, 한국말도 까먹는 위험 요소를 안고 귀국하였다.20개월의 유학 생활 동안, 생활비도 끊겼고, 실로 많이 굶었다. 가끔 적은 돈이 입금되면 방탕하게 술을 마셨고, 역시 공부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였다. 그 때 만약에 내가 하느님을 만나러 성당에 꾸준히 다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에 성당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성당이 어디 있는 지도 몰랐고, 정보도 없으니, 성당을 가기에 만무했다. 지금 회상해 보면, 하느님 안에 하느님을 꼭 붙잡지 않고 있었으니, 실패한 유학도 그럴만한 이유가 됐다.귀국을 하고 나니, 입영 통지서가 왔다. 그냥 입대를 하면, 힘든 보병에 갈 것 같으니, 그나마 군 생활 편하게 하려면 특정 학과를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재 수능을 보고, 전문대학을 갔다. 단순히 군대를 편한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같은 대학을 1학년 마치고, 입대 하였다.군대에서 만난 하느님은 절제와 용기와 용서의 하느님이었다. 먼저 입대하고 나서, 선임병을 때려서, 하극상으로 영창에 15일씩 세 번, 그리고 5일… 다녀왔다. 총 50일이 군생활이 늘어난 것이다. 이 때에 초등학교 때에 성당에서 폭력 연출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때에 그 마음은 참 순수했던 마음이었는데,성가대에서 목소리가 많이 커지고 좋아졌다고 칭찬받았다. 너무 좋았다. 그리고 성가대 석에 앉아있는데, 주보에 한국청년대회를 한다고 자매님들이 갈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고민할 것 없이 단 번에 그 주보에 실린 신청서에 공란을 채우고 사무실에 제출했다. 성당에서 절반을 지원해준다고 하니, 나는 절반만 내면 됐다. 돈을 내기 위해서 알바를 시작했다. 내 생애에 내 의지로 시작한 알바다.쌀국수 집에서 주문 된 음식을 조리하는 보조요리사였다. 오전에 시작해서 오후에 끝났는데,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을 수 있어서, 전역하고 배가 고픈 나에게는 금상첨화였다. 알바 생활을 그리 길지 않았다. 주방에 너무 뜨거웠고, 그 일에 전념하고 싶지 않았기에, 두 달 하고 알바를 그만 두었다. 그러나 목적은 이루었다. 한국청년대회에 갈 수 있는 돈을 마련한 것이다.한국 천주교 최초로 전국의 청년이 한 자리에 모였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공항에 도착하니, 제주도 청년들이 반갑게 맞이 해주었다. 기쁨과 환희, 즐거움과 깊은 신앙 나눔을 얻을 수 있었던 한국청년대회는 하느님을 정면으로 마주 본 느낌 같았다. 특히, 이시돌 목장에서 저녁 미사를 드릴 때, 하늘에 일시 적으로 보였던 구름십자가와 무지개는 모든 청년들의 마음에 빛을 밝혀 주었다. 모두가 감동했고, 꿈만 같았다.한국청년대회에서 만난 자매님이 있었다. 서울대교구 청년부에서 봉사하고 있다는 자매님이었는데, 창작생활성가제 서울대교구 연합 프로젝트에 함께 하자고 하였다. 팀 이름은 콘디오스 (Con Dios)이다. 우리는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참가하였고, 우리 팀의 노래는 우수상을 받았다. 이름하여, 제목은 “내 안의 그 빛”. 성가를 연습하는 동안에 즐겁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청년대회의 여운이 있어서 그 때에 창작생활성가제가 끝나고, 호주 세계청년대회가 있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 마지막으로 여행가게 도와달라고 하였다. 돈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부탁드린 것이다. 그 때에, 대학 복학하는 중이었고, 때마침 세계청년대회는